그림 한 점

제니

      내 기억에는 광화문 네거리 근처 어느 작은 다방 벽에 걸려있던 그림으로 생각 된다. 43년쯤 전 일이다. 그날 나는 그와 데이트를 하다가 소나기를 피해 가까운 다방으로 뛰어 들어 갔었다. 우리는 옷에 묻은 물기를 닦으면서 우연히 벽에 걸려있던 노부부의 그림 한 점을 보게 된 것이다. 90세쯤 되어 보이는 노부부가 주름투성이 얼굴을 마주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한참동안 쳐다보고 있던 그가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결혼하면 저 노부부처럼 웃으며 살자. 서로 이해하며, 서로 양보하고 그렇게 해로하면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오더라도 서로 상처 주는 말은 하지 말자.” 그 말을 들을 때 나는 우리가 그때까지 살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도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기에 잠자코 그러자고 약속했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물 둘, 그는 스물넷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었다. 만으로는 13개월 차이밖에 안 나는데도 그는 항상 어른스런 말만 하곤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내가 열다섯 살, 그는 열일곱 살이었을 때였다. 그가 살고 있는 집에 우리가 전세로 들어가게 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밤에 항상 불을 켜놓고 밤을 새우며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공부벌레였다. 그러나 나는 시험 때가 되어도 공부하지 않고 놀기를 좋아하며 마음 편히 잠만 쿨쿨 잤다. 이럴 때면 영락없이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었다. “옆집 학생은 밤을 새우며 공부하는데 너는 놀기만 하고 잠이 오니?” 라고 하시며....... 또한 그는 온화한 성격에 책을 좋아하고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말 수가 적으니 도리어 무게 있고, 듬직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원래 이야기를 잘하며 유머러스한 것을 좋아한다. 게다가 항상 생각이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놀기 잘하며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했다.

      그와 나는 정 반대의 성격이다. 취미도 서로 다르다. 그는 주로 운동을 좋아하고 나는 그림그리기, 글쓰기, 노래 부르기, 뭔가 만들기 등 이런 것들을 좋아했다. 이렇게 취미나 성격이 정 반대인데도 우리는 날이 갈수록 정이 깊어 갔다. 그가 스물네 살이 되어 군대 영장을 받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군대 갔다 오면 결혼하자고 했다. 그리고 곧 바로 양가 부모님을 만나 결혼을 약속 받았다. 부모님들은 우리가 오랫동안 다정하게 지내는 것을 보며 결혼까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그 다방에서 노부부의 웃는 그림을 보게 되었고, 그 그림이 준 이미지가 우리들 마음에 깊이 새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절대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으리라. 무조건 이해하고 감싸 주리라” 다짐했다. 결혼식을 올리고 6개월 후 신혼살림을 차렸다. 살면서 서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나타났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물건 사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는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사지 않았다. 한 번은 그와 의논도 하지 않고 디지털시계를 하나 샀다. 그는 필요하지도 않은 걸 왜 샀느냐고 핀잔했다. 나는 탁상시계 하나 사는 데도 의논해야 하나? 하고 속으로 불평했고, 이틀간이나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지낸 적도 있다.

      어느새 43년이 흘렀다. 그동안 여러 번 이해가 어긋날 때도 많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지금까지 잘 지내왔다. 며칠 전 우리는 예전에 그 다방 벽에 걸려 있던 그림 속 노부부의 얼굴이 생각나서 서로 쳐다보며 웃어 보았다. 아마도 43년 전에 딱 한 번 본 그림 속 노부부의 모습이 우리 부부의 삶 속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그 그림 속 노부부처럼 늙어가는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처럼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