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30 03:12
주홍글씨
지은이:N.호돈 출판사:혜원출판사
1.감옥문
턱수염이 터무룩하고, 충충한 잿빛 옷에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쓴 남자들이
어느 목조 건물 앞에 모여 있었다. 그 중에는 수건을 쓰거나 맨 머리로 나온
여자들도 있었다.
참나무로 된 튼튼한 문에는 커다란 쇠못이 줄줄이 박혀 있었다.
새 식민지 개척자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인간적인 미덕과 행복에 넘친
유토피아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야생의 처녀지에 새로운 나라를 건립함에
있어, 처녀지의 일부를 공동묘지와 감옥터로 정하는 일은, 무엇보다 첫단계로
하여야 할 실제적이고도 필요한 일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런 관례에 따라 보스턴의 선대들도 콘힐 가까이에 처음 감옥을 세웠고,
이를 앞뒤로 하여 아이작 존슨의 땅에 그의 묘를 중심으로 맨 처음 공동 묘지를
만든 것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사실 존슨의 묘는 그 뒤 킹스 교회 옛 묘지에
몰려든 수많은 무덤들의 중심이 되었다. 보스턴 거리가 생긴 지 15년 혹은 20년,
목조 건물로 된 감옥은 이미 비바람에 낡아 세월의 흔적을 뚜렷이 말해주고 있
어,그렇잖아도 잔뜩 찌푸린 듯 음산해 보이는 건물 정면을 더욱 침울하게 하고
있었다.
또한 참나무로 만든 문에 박힌 육중한 쇠붙이에 슨 녹은 신세계의 그 무엇보다
도 고색창연한 빛을 띠고 있었다. 범죄와 관련된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이 문 또
한 청춘시대라고는 전혀 모르고 지낸 듯싶었다. 이 우중충한 건물 앞에서 큰 길
까지의 사이에는 풀이 우거져 있었는데,우엉,명아주,나팔꽃,그밖에도 볼썽사나
운 것들뿐이었다.이 잡초들은 일찍부터 문명사회에 검은 꽃을 피워 온 감옥이라
는 것과 뭔가 통하는 데가 있는 듯 했다.그런데 감옥 문 한쪽 문지방 바로 옆에
서 자라고 있는 한 그루의 찔레나무에는 때가 6월인만큼 구슬을 뿌려놓은 듯
귀여운 꽃들이 함빡 피어 있었다. 감옥으로 들어가는 죄수나 형 집행을 받으러
가는 사형수에게 동정과 자비를 베푸는 대자연의 깊은 마음의 표시로써 그윽한
향기와 갸냘픈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는 것이리라.
이 찔레나무는 이상한 인연으로 역사상에 살아 남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이
찔레나무는,본디 그 위에 그림자를 드리워 주던 거대한 소나무나 참나무가
쓰러져 버린 훨씬 뒤에까지도 이 황량한 옛 들판에 그대로 살아 남은데 불과한
것인지,아니면 성자라고 칭송되던 앤 허치슨이 이감옥에 들어갈 때 밟은 자리에
돋아난 것인지(그렇게 믿을만한 근거는 충분하다 하더라도)는 여기서 논하지
말기로 하자.어쨌든 그 불길한 그림자가 깃든 감옥문에서부터 시작되려는 이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이 찔레꽃을 발견한 지은이가 할 수 있는 일은,기껏해야
그 찔레꽃 한송이를 꺾어서 독자에게 바치는 정도일 것이니까.
아무튼 그 꽃이 이야기의 진행과 함께 떠오를 부드러운 미덕의 꽃을 상징해
주든가,아니면 인간의 약함과 슬픔에 따르는 이 이야기의 암담한 결말을
조금이라도 누그러지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지은이의 마음 간절하다.
2.광장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어느 여름날 아침,감옥 거리에 있는 감옥 앞 풀
밭에는 많은 보스턴 시민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쇠빗장을 지른 참나무
문에 일제히 쏠려 있었다. 다른 고장의 주민들이었거나,뉴잉글랜드의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훨씬 뒷날의 일이었다면,이 수염이 텁수룩하고 선량한
시민들의 얼굴이 이토록 냉혹하게 굳어 버린 것은 뭔가 굉장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징조로 보였을는지 모른다.누군가 악명 높은 죄수에 대해 예상되던 사형이
곧 집행될 것이며,그것은 이미 일반 대중이 내리고 있던 판결을 법정의
판결로써 확인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 청교도들이 지녔던 엄격한 성격으로서는,확신을 갖고 추측을
내릴 수는 없었다.왜냐하면 그것은 관리의 손에 넘겨진 게으름뱅이 하인이나
불효막심한 자식놈이 형장에서 곤장을 맞는 장면일 수도 있고,신앙
지상주의자나 퀘이커 교도 등의 이교도가 곤장을 맞고 시외로 추방되는 장면일
수도 있고,떠돌아다니던 인디언이 백인들이 마시는 위스키를 마시고 거리로
뛰어나와 날뛰다가 매를 맞고 쫓겨 가는 장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괴팍한 판사의 미망인이던 하빈스 부인 같은 마녀가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려는 장면일는지도 모른다.어느 경우건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비슷한
표정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그때의 표정은 조용하고도 엄숙한 것이었다.그
당시에는 종교와 법률이 거의 동일시되던 시대였다.따라서 그들의 의식에도
종교와 법률이 완전히 용해되어 있어서 공적인 처벌 행위는 모두 신성시되어
범할 수 없다고 믿었다.그래서 하찮은 형벌도 그 무렵에는 사형에 못지 않은
준엄한 위엄을 가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 여름날 아침,군중 틈에 끼어 있던 몇 명의 여인들이
머잖아 일어나려는 형벌(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에 대하여 이상할 만큼
흥미를 품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그 당시는 예절이 그리
세련되지 못한 시대였으므로 페티코트나 파딩게일을 입은 여자들이 조심성 없이
함부로 공공장소에 나서기도 하고,경우에 따라서는 그 작지도 않은 몸뚱이를
처형대 가까이 모여선 군중들 틈으로 비집고 들이미는 일도 있었다,영국 땅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란 그들 부인이나 처녀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200여
년 뒤의 그들의 자손인 아름다운 여성들에 비하면 매우 거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왜냐하면 그들의 후세대 여성들은 몇 대를 거쳐 내려오는 동안,그녀들의
어머니로부터 힘과 의지력이 결여된 성격을 물려받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훨씬
부드러운 혈통과 보다 섬세하고 나약한 아름다움과 연약한 뼈대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 감옥문 둘레에 모여선 여자들은 저 남성 같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여성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시대로부터 겨우 50여 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대의
사람들이다.사실 엘리자베스 여왕과 같은 시대의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며,조국 영국의 쇠고기와 맥주,그리고 그보다 조금도 더 나은 것 없는
정신의 양식이 그녀들의 기질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그러기에 그날
아침의 밝은 태양은 먼 섬나라에서 어엿한 한 사람의 여자로
자라나,뉴잉글랜드의 거친 공기 속에서도 여위고 창백해진 일이 없는 그녀들의
넓은 어깨와 풍만한 가슴과 발그레한 볼을 비추고 있었다.게다가 부인들로
보이는 그들이 주고받는 얘깃소리에는 그 내용이나 음량면에서 오늘날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대담성이 깃들어 있었다.
이것 보세요,부인들. 위엄 있게 생긴 50대 여인이 입을 열었다. 내 얘기 좀
들어 보세요.분별 있는 나이에다 뒷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일도 없는 우리가
헤스터 프린과 같은 못된 여자를 처벌하는 것이 우리들을 위해서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겁니다.당신네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저 못된 것이 여기 모여 있는
우리 다섯 사람 앞에 끌려나와 재판을 받는다면요.판사님이 판결한 벌만 받고
끝날 것 같은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글쎄,들리는 말이...... 또 다른 여자가 말했다. 그 여자의 목사이신
딤스테일 목사님 말예요,이런 추문이 자기 교구 내에서 발생한 것 때문에 몹시
가슴 아파하고 계신답니다.
판사님들은 신앙심이 두터운 것은 사실이지만,너무 인정이 많으세요.
정말이라니까 또 한 중년 부인이 끼어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헤스터 프린의
이마빡에다가 달군 쇠로 낙인 쯤은 찍어 줬어야 했다구요.그랬더라면 헤스터도
뜨끔했을 거야.하지만 그 여자는 행실이 나쁜 여자니까,앞 가슴에 뭘 붙여 줬다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거예요!두고 봐요.분명 브로치나 이교도의 표시 같은
것으로 가리고는 여전히 뻔뻔스럽게 돌아다닐 테니!
그렇지만...... 어린아이의 손목을 잡고 있던 젊은 여자가 좀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 여자가 아무리 가슴의 표적을 가린다 해도,가슴 속의
고통이야 어딜 가겠어요.
앞가슴 위건 이마빡이건 낙인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하고 또 다른
여자가 큰 소리로 외쳤는데,그녀는 재판관을 자처하고 나선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냉혹하고 못 생긴 여자였다. 그년은 우리 여자들 모두에게 창피를
주었으니까 죽어 마땅해요.그런 것을 처벌할 법률이 없는 줄 아세요?성서에도
있고 법률 책에도 엄연히 있단 말예요.그런데도 판사님들은 그 법률을
적용하려고 하지 않으니,자기네 부인이나 딸자식들이 탈선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할말이 없을 거예요.
그만하세요,부인. 사람들 틈에 끼어 있던 한 남자가 말했다. 여자들은
교수대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정숙해질 수 없는 겁니까? 너무 지독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자, 이제 조용히들 하십시오. 감옥문의 열쇠가 돌아가고
있어요. 문제의 프린 여사가 나오게 될 겁니다.
감옥문이 안으로부터 활짝 열렸다. 우선 어둠 속에서 햇빛 속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허리에 칼을 차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험상궂은 얼글을 한
형리의 엄숙한 모습이었다.
청교도의 가혹하고 엄격한 법률이 이 사나이의 모습에 잘 나타나 있었다.
그는 범법자에게 단호히 그 법을 적용하는 것이 맡은 바 임무였다. 왼손에
지팡이를 쳐들고 오른손으로는 젊은 여인의 어깨를 붙잡아 끌어내오고 있었다.
감옥문 가까이 오자, 그 여인은 타고난 위엄과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라도 하듯
형리를 뿌리치고, 마치 제 자신의 의사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처럼 바깥
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여인에게 안겨 있던 태어난 지 3개월쯤 된 아기는 너무 밝은 햇빛이 작은
얼굴에 닿자 눈을 깜박였다. 지금까지 어두컴컴한 지하 감방이나 침침한 방의
희미한 빛에만 익숙해 있었지 때문이다.
이 젊은 여인은-그 아기의 어머니였지만-군중 앞에 완전히 모습을 나타낸
순간, 충동적으로 아기를 힘껏 가슴에 끌어안는 것같이 보였다. 그것은
모성애에서 나온 충동이라기보다는 가슴에 수놓았거나, 꿰매 붙인 무슨 표시를
감추기 위함인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치욕을 감춰봤자 또 하나의
치욕의 증거인 아이는 감출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여인은 다시 아이를 팔에
내려 안았다. 그리고는 볼을 빨갛게 붉히면서도 오만한 미소를 띤 채,
거리낌없는 시선으로 거리의 사람들과 모여선 군중들을 둘러보았다. 여인의
웃옷 가슴에는 깨끗한 빨간 붉은 금실로 섬세하게 수를 놓아 정교한 무의로
테를 두른 A자가 붙어 있었다. 그것은 아주 멋있고, 사치스러운 느낌마저
들었으며,가히 예술적이라 할 만큼 훌륭한 솜씨로 만든 것이어서 마치 지금
입고 있는 옷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식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옷차림
또한 당시의 유행에 따른 것으로, 그즈음 식민지의 근검 법령이 허용하는
범위를 훨씬 넘는 것이었다.
키도 몸집도 큰 이 젊은 여인은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검고 숱이 많은 머리는 햇빛이 반사될 정도로 윤기가 흘렀다. 단아한
윤곽과 화사한 살결은 말할 것도 없고, 훤한 이마와 새까만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끄는 데가 있었다. 또한 당시의 상류 여성다운 고상한 기품이
서려 있었다.
당시 상류 여성의 특징은 오늘날 여성들처럼 섬세하고 꺼져 버릴 것 같은
우아함이 아니라 뭐라 말할 수 없는 위엄에 찬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 헤스터
프린이 감옥문을 나서는 이 순간만큼 기품이 있어 보인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헤스터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불길한 구름에 덮여 이제는 그 모습이 흐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감싸고 있는 불행과 불명예가 오히려
후광처럼 그 아름다움을 빛나게 해 주는 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보다 예리한 눈을 지닌 사람에겐 그녀의 모습에서 어딘가 아픔의 구석이 엿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 옷은 이날 입기 위해 자신의 착상대로 직접 감옥 아넹서
수를 놓아 만든 것이었는데, 그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특이성은 오히려
그녀의 정신상태, 즉 절망적이고 자포자기한 기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을 끌 정도로 그 옷을 입은 여인을 완전히 달라 보이게 한
것은-지금까지 헤스터 프린과 친하게 지내 오던 사람들까지도 그녀를 처음
대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었는데-그 이상스러운 자수로 가슴을 장식한
주홍 글씨였다. 그 글씨는 주문과 같은 효과를 자아냈고, 헤스터를 평범한
인간관계에서 분리시켜 고립된 세계에 가두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저 여자 바느질 솜씨 하나만은 그만이야, 구경꾼들 속에 섞여 있던 한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솜씨 자랑을 한 여자는 저 뻔뻔스러운
것이 처음이야! 정말이지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판사림들을 코앞에서 비웃어
대며 그 훌륭한 분들이 내린 형벌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긴다고 볼 수 밖에 없지
뭐예요.
그러게 말이야! 하고 모든 여자들 중에서 가장 매섭게 생긴 한 여인이
소리쳤다. 헤스터의 화려한 웃옷을 저 품위있는 어깨로부터 벗겨 버려야 해.
저 괴상하게 수놓은 주홍 글씨를 떼어 버리고 그 자리에다 내 류머티즘에 쓰는
헝겊 조각을 대주면 썩 잘 어울릴 거야!
좀 조용히들 하세요! 가장 젊어 보이는 여자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가 듣겠어요! 저 수놓은 글씨의 바늘 땀 하나하나가 저 여자의 가슴을 결코
편케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떄 험상궂게 생긴 형리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위엄있게 외쳤다.
자, 여러분, 비키시오, 국왕의 명령이니 길을 터 주시오, 지금부터 낮
1시까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이 훌륭한 자수를 마음껏 볼 수 있도록 헤스터
프린을 세워 놓기로 하겠소, 어떤 죄악이든 백일하에 드러나게 마련인 정의의
고장,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축복이 있기를! 자, 헤스터, 앞으로 나와 그 주홍
글씨를 광장에 모인 여러분께 보이도록!
구경꾼들 사이로 곧 길이 틔었다. 형리가 앞장서고 눈살을 찌푸린 남자들이며
매정한 표정의 여인들이 줄줄이 뒤따르는 가운데 헤스터 프린은 정해진
형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일 때문에 거의 휴일이 되었다는 사실밖에
아무것도 모르는 장나꾸러기 아이들이 헤스터를 앞질러 뛰어가다가는
뒤돌아서서 이상한 듯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눈을 깜박이며
양팔에 안긴 아기와 가슴에 붙어 있는 주홍 글씨를 쳐다보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감옥문에서 광장까니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죄수의 심정으로 보자면 꽤
먼 거리로 여겨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비록 오만스러울 만큼 꼿꼿한
자세로 형장을 향해 걸어갔으나, 자기를 구경하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의 심장은 큰길에 내팽개쳐져 그들의 발길에
짓밟히는 듯한 아픔을 느꼈을 테니까.
그러나 고맙게도 신의 자비가 있어, 고통당하고 있는 자가 진정 그 고통의
심도를 깨닫게 되는 것은 결코 그 당장이 아니라 훨씬 뒤의 일이다. 때문에
헤스터 프린은 태연하다고 할 만큼 침착함을 잃지 않은 채 처형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보스턴에서 가장 오래 된 교회의 처마 바로 밑에 세워져 있는 그
처형대는 마치 교회의 부속 건물처럼 보였다.
사실 이 처형대는 형구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현대인에게는 한낱 역사적이고
전설적인 유물이 되어 버렸지만, 이삼 세대 전만 하더라도 양민을 교육시키는
데 있어 프랑스 혁명 당시의 테러 정치인들을 처단했던 단두대 못지 않게 이
처형대가 효력을 발휘한다고 생각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형틀의
단으로써, 그 위에는 여러 사람의 눈에 띌 수 있도록 죄수가 목에 칼을 쓰고 서
있도록 만들어진 형틀이 놓여 있었다. 나무와 쇠로 된 이 장치는 마치 치욕의
그림으로 그려 놓은 듯이 뚜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죄인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 이 형틀의 목적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잘못이야
어떻든 이보다 더 심하게 인간성을 모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흔히
있는 일로써 헤스터 프린은 일정한 시간 동안 그 처형대 위에 서 있기만 하면
되었을 뿐, 수갑을 채운다든가 칼을 씌우는 형벌은 받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자기가 취할 바를 잘 알고 있던 그녀는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처형대는 사람들의 어깨 높이 정도였고 구경꾼들은 양 사방에서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다.
만일 이 청교도의 무리 속에 카톨릭 교도가 섞여 있었다면, 눈부신 복장과
가슴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아름다운 여서으이 모습에서 성모 마리아상을
연상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연상에 불과했겠지만 수많은 저명한 화가들이
다투어 그리고자 한, 이 세상을 구제해 줄 아기를 낳으신 순결한 성모마리아의
모습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헤스터의 경우에는 인간생몀에서 가장
신성해야 할 미덕에까지도 씻을 수 없는 죄의 오점이 찍한 것이다. 즉 이여자의
아름다움 떄문에 세상은 더욱 어두워질 뿐만 아니라, 그 배를 아프게 한 아이로
인해 한층 타락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장면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죄와
치욕으로 몸을 떠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서도, 두려움은커녕 웃어넘길 만큼
사회가 타락하지 않는 한, 그것은 이러한 떄 으레 외경감을 자아낸다. 헤스터
프린의 치욕을 목격하고 있던 사람들도 아직 이런 소박한 성품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설령 헤스터가 사형 판결을 받았다 하더라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 잔혹함을 구경할 수 있는 그런 엄준한 사람들이었다. 사정이
다른 사회라면 이 같은 장면은 한낱 웃음거리에 불과했겠지만 이 사람들 중에는
누구도 그런 타락한 일면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만일 이런 사태를
웃어넘겨 버리려는 기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엄숙하게 자리잡고 있는 총독,
고문관들, 판사, 장군, 그리고 목사 들의 위엄있는 태도에 기가 질려 압도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교회당의 발코니 위에 서거나 앉아서 직책상의
위엄과 존엄성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은 채 관중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는데,
법대로 선고된 형벌에는 거짓이 없고, 그 효력 또한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 같았다. 따라서, 군중들은 심각하고 숙연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수
많은 사람들의 냉혹한 시선이 자기에게 쏠려 자신의 가슴에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에 중압감을 느끼면서도 이 불행한 여인은 가능한 한 있는 힘을 다하여
지탱하고 서 있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천성이 정열적이고 감정적인 헤스터는, 온갖 모욕적인 대중들의 태도가
바늘이나 독을 칠한 비수처럼 가슴을 찌를지라도 꾹 참고 견디겠다고 굳게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엄숙한 태도는 그보다 더 한층 두려운
것이어서 모든 사람의 엄숙한 표정이 차라리 자기를 비웃는 비웃음으로
일그러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모든 남녀와 아이들까지 목청 높여
조소를 터뜨렸더라면, 헤스터 프린은 그들에게 오히려 멸시적인 냉소로 응수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납덩어리처럼 무거운 침묵은 한층 더 그녀의
마음을 짓눌러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지르며 땅바닥으로 몸을 내던지거나
아니면, 그대로 미쳐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 어느 순간엔 자기가 적나라한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이 광경 전체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 같기도 하고, 형태가 뚜렷하지 않은 꿈이나
환상처럼 흐릿하게 어른거리기도 하였다.머리의 움직임은, 특히 기억력은
이상하리만큼 활발해져서 이 서부 황부지 한 구석에 있는 자곡 거친 마을의
거리와는 다른 장면들이, 뾰족한 모자 밑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얼굴과는 다른 얼굴들이 그녀의 뇌리에 끊임없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과 학교 시절의 일들이며, 운동도 하고, 어린애다운 싸움질도 하던
일이며, 처녀 시절에 있었던 하찮은 집안 일 등등 보잘것없는 일들이 그녀의
생활에서 일어나 의마심장한 사건들과 뒤섞여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모든
기억들이 너무나 생생하여 모두 똑같이 중요한 뜻을 지닌 것 같기도 하고, 또
모든 것이 보잘것없는 연극 같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거의 갖가지 환상들을
머리 속에 그려 보게 됨은 현실의 잔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고픈 본능적인
의식에서였는지도 모른다.
어쨋든 처형대는 헤스터 프린에게 행복한 어린 시절 이후 그녀가 걸어온
인생의 모든 모습을 뚜렷이 전개시켜 보여 주는 일종의 전망대가 되었다. 이
비침흔 단 위에 서 있는 그녀의 눈앞에 그리운 영국의 고향 마을이며 그녀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집이 떠올랐다. 우중충한 잿빛 띤 낡은 집일망정 그
현관에는 유서깊은 가문의 표시인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이마가 벗겨진,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의 구식 주름깃 위에 멋있게 흰 수염을 날리던 아버지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 자상함과 깊은 애정에
넘치던 어머니의 얼굴은 그녀가 죽은 뒤에도 딸이 걷는 인생행로에 나타나
조용한 훈계의 말을 건네주곤 하였다. 여기에 또한 그녀 자신의 얼굴도 보였다.
아름답게 빛나던 소녀시절의 얼굴과 늘 들여다보던 흐릿한 거울 속까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나이를 꽤 먹은 남자의 얼굴, 수많은
책들을 읽느라고 램프의 불빛 때문에 눈이 거슴츠레해지고 얼굴이 파리하게
여윈 학자풍의 남자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약한 시력도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고 할 때에는 불가사의한 통찰력을 지니는 것이었다. 서재에 파묻혀 은둔
생활을 하는 그 남자는 약간 불구의 몸인지라 왼쪽 어깨가 오른쪽 어깨보다
조금 올라간 듯했던 것을 헤스터 프린은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회상의
화랑에 떠오른 것은 유럽 어느 도시의 비좁고 복잡한 거리, 높다란 잿빛집들,
훌륭한 사원, 구시대의 색다른 건축 양식의 공공 건물 등이었다. 거기에는 역시
그 불구의 학자와 관련된 새로운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새로운
생활이라고는 하나 허물어져 가는 벽에 낀 푸른 이끼처럼 케케묵은 것에 의존해
사는 생활에 지나지 않았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이런 장면들 대신에
마지막으로 나타나 것은 청교도 식민지의 보잘것없는 광장이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엄격한 시선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가슴에 금실로 수놓은
주홍 글씨 A를 달고, 아이를 안은 채 처형대 위에 선 헤스터 프린, 바로 그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이 진정 현실이란 말인가! 이 아이와 이
치욕이 현실인가를 확인이라도 하듯, 아기를 가슴에 꼭 껴안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주홍 글씨를 내려다보며 손으로 만져 보기까지 했다. 역시
그러했다. 이 두 가지만이 현실이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말았다!
3.인지
이 주홍글씨의 여인은 군중 틈에서 불현 듯 마음을 사러잡는 어떤 인물을
발견하자, 자기가 지금 비난에 찬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는
의식으로부터 겨우 해방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인디언 한 사람이 독특한
복장을 하고 서 있었다. 인디언들이 영국 식민지를 방문하는 것은 벌로 이상한
일이 아니어서 한두 사람의 인디언이 군중 속에 섞여 있다 하더라도 헤스터
프린의 주의를 끌 리는 없었다. 그런데 이 인디언 옆에는 친구인 듯한 백인 한
사람이 문명인인지 야만안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기묘한 옷차림을 하고 서
있었다.
이 백인은 자그마한 몸집에 얼굴에는 주름이 깊숙이 잡혀 있었지만 아직
노인이라고 할 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이목구비에는 놀랄 만한 지력이
엿보였다. 정신이 발달함으로 해서 육체 또한 저절로 그 영향을 받아 용모가
형성된 그런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 사람은 색다른 복장으로
몸의 특징을 감추거나, 아니면 눈에 띄지 않도록 하고 있었지만 한쪽 어깨가
조금 높다는 것을 헤스터 프린은 식별할 수 있었다.
이 여윈 얼굴과 약간 불구의 몸을 본 순간, 헤스터 프린은 또 한 번 아기를
가슴에 끌어안았는데, 너무도 갑자기 안았기 때문에 가엾게도 아기는 아픈 듯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엄마는 그 울음 소리도 못 들은 것 같았다.
광장에 도착하여 헤스터가 그를 발견하기 전부터 이 사나이는 벌써 헤스터
프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초리로 변했다.
번민하는 듯한 고통의 빛이 그 얼굴에 떠올랐다. 마치 한 마리의 뱀이 그의
얼굴 위를 잽싸게 지나가다가 잠시 멈춰 똬리를 트는 것처럼 그의 표정엔 몸이
비틀리는 듯한 공포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재빨리 의지력으로 억눌러
버렸다.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는 곧 침착한 표정을 되찾았다. 다음
순간에도 이미 고뇌의 빛은 눈에 띄지 않았고 그것도 마침내 마음의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헤스터 프린의 눈이 자기 눈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손가락을 올려 살짝 신호를 하더니 그
다음엔 입술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서 그는 옆에 서 있는 마을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정중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만, 도대체 저 여자는 누구입니까? 무슨 이유로 저렇게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겁니까?
이 고장엔 처음 오시는 분인 게로군요. 하며 그 사람은 그와 함께 있는
인디언을 이상한 듯이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헤스터 프린의 탈선
행위에 대한 소문은 이미 들어서 아실 텐데요. 저 여자는 딤스테일 목사님의
교회에서 아주 불미스러운 짓을 저질렀답니다.
그랬었군요. 그는 대답했다. 나는 이 고장이 처음이며, 본의 아닌
방랑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다와 육지에서 비참한 재난을 만나
오랫동안 남쪽에서 인디언에게 붙잡혀 있었답니다. 이제야 겨우 몸값을
지불하기로 하고 여기 있는 인디언에게 끌려서 여기로 오는 길입니다. 그러니
헤스터 프린의-아마 그런 이름이었죠? 저 여자가 무슨 죄를 지었으며, 왜 저런
처형대에 서게 되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암, 해 드리죠. 마을 사람은 말했다. 황야에서 그렇게 고생하신 끝에,
부정을 저지른 자는 반드시 찾아내어 높은 분과 일반 시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처벌하는 이런 훌륭한 고장을 찾아오시게 되니 얼마나 기쁘십니까. 저 여자는
말입니다. 영국 태생으로 오랫동안 암스테르담에 살고 있었던 어는 학자의
부인이랍니다. 그 남편은 퍽 오래 전에 미국으로 건너와 우리 매사추세츠
식민지 사람들과 운명을 같이 하려고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선 부인을 먼저
보내고, 자기는 뒤처리를 위해 남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글세, 저 여자가 이
보스턴에서 두 해 가까이 살도록 그 프린 씨라는 학자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지 뭡니까. 그러자 혼자 살던 저 젊은 부인이 그만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겨죠.
아, 그랬었군요. 나그네는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말씀대로 그
남자가 학자였다면, 그런 것도 책에서 배워 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런데
실례입니다만, 저 갓난아기 말인데요, 난 지 서너 달이나 외었을까요? 프린
부인이 안고 있는 아기 아버지는 누구인가요?
바로 그겁니다, 그 점이 분명치 않단 말입니다. 수수께끼를 풀어 줄
명판관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요 하고 마을 사람은 대답했다. 재판관들도
노력을 했지만 헤스터가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아 소용이 없었어요. 어쩌면
불의의 짓을 한 그 남자도 하느님만이 보고 계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남몰래
이 슬픈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그 학자 선생님이 와야 되겠군요.
나그네는 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야 그렇죠, 아직도 살아 있다면 말입니다. 마을 사람은 대답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곳 매사추세츠의 재판관님들은 저 여자가 젊은 미인이라
타락의 유혹도 많았을 것이고, 게다가 십중팔구 남편은 바다 속에 빠져
죽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법률대로 엄정한 판결을 내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본디 그 죄에 대한 형벌은 사형입니다. 그러나 재판관님들의 자비심과 동정으로
프린은 처형대 위에 3시간 동안 서 있을 것과 그 다음은 죽을 때까지 가슴에
치욕의 표시를 달아야 한다는 판결을 받은 겁니다.
훌륭한 판결입니다! 나그네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면 저
여자는 그 수치스러운 글자가 무덤의 비석에 새겨지는 날까지 죄 짓는 자에
대한 산 교훈이 되겠군요. 그러나 불륜의 정을 통한 상대자가 저 여자와 함꼐
처형대 위에 서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군요, 하지만 그 남자도
머지않아 알게 될 겁니다.....알게 되고말고요!
그는 이야기를 해 주 마을 사람에게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 같이 온
인디언에게 몇 마디 말을 속삭이더니 군중 틈을 헤치고 사라졌다.
그 동안에도 계속 헤스터 프린은 나그네 쪽으로 눈길을 못박은 채 처형대위에
서 있었다. 너무도 뚫어져라 쳐다보았으므로 모든 것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오직 그와 그녀만이 남은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처럼 그와 단둘이 만난다는 것은, 지금 이렇게 뜨거운 한낮의 햇빛을
얼굴에 받으며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만나는 것보다 훨씬 더 두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가슴에는 치욕의 표시인 주홍 글씨를 달고 팔에는 불륜의 씨를 안고
있다. 마치 축제 구경이라도 하러 나온 듯이 몰려나온 군중들에게, 조용한 나로
불빛 속에서, 행복한 가정의 그늘에서, 혹은 교회당 안에서 베일 밑으로나 볼
수 있는 얼굴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그녀에게 지극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구경꾼들 사이에서 그녀는 일종의 도피처를
발견하였다. 그와 단둘이 정면으로 만나는 것보다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대하는 것이 그녀로서는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대중 앞에 자기 몸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그로부터 자신을 감출 수
있었고, 이런 구원의 손길이 없어지는 순간이 두려웠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었으므로 뒤에서 군중 전체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자기 이름을 되풀이해서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듣거라, 헤스터 프린. 하고 크고 엄숙한 목소리가 말했다.
앞서 말했듯이 헤스터 프린이 서 있는 처형대 바로 위에는 교회당에 붙은
발코니랄까, 지붕이 없는 관람석이 있었다. 당시에는 여러 가지 행사가 있을
때마다 행정관들이 이곳에 모여서 갖가지 공표문을 발표하곤 하였다. 바로
여기에 지금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광경을 보기 위해 벨링햄 총독이 앉아
있었고, 그 둘레에는 네 명의 친위병이 의장대처럼 창을 들고 서 있었다.
총독은 모자에 검은 깃털을 꽂았고, 외투 단에는 수를 놓았으며 그 안에 검은
우단 웃옷을 입고 있었는데, 주름 잡힌 얼굴에는 대단한 경력이 엿보이는 나이
지긋한 신사였다. 이 새 식민지 사회의 대표자로서는 나무랄 데 없는
적임자였다. 왜냐하면 이 사회의 기원과 진보 그리고 오늘날의 발전은 젊은이의
충동적인 혈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엄하게 쌓아올린 성인의 정력과
노인의 평범한 생활의 지혜로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허황한
상상이나 기대가 최대 한도로 억제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큰 성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통치자를 둘러싸고 있는 상류 명사들의 빼어나 점은,
권위있는 모습이 신의 세계의 숭고함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하던 시대에 잘
어울리는 위엄있는 태도였다. 이 사람들이 공정하고 현명하며,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온 세상을 뒤져 봐도 지금
헤스터 프린이 얼굴을 돌린 발코니 쪽에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
사람들보다 죄 지은 여인의 마음을 심판하고 선악의 얽힘을 풀어헤치는 일에
능력이 없는 인사를 찾아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주홍 글씨의
여인도 동정을 기대할 만한 곳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관대하고 따뜻한 군중의
마음속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왜냐하면 눈길을 들어 발코니 쪽을
바라보았을 때, 이 불행한 여인은 더 한층 창백해진 얼굴로 떨고 있었던
것이다.
헤스터를 부른 것은 유명한 목사 존 윌슨이었다. 보스턴에서 가장 나이많은
목사로서 그 무렵 성직에 있던 사람이 모두 그러했듯이 대학자인데다 또한
친절하고 온화한 성경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이 후자의 성격은 타고난 재능
만큼 주의깊게 계발된 성질은 아니어서, 사실상 그에게는 자랑거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수치거리였다.
그의 모자 밑으로는 반백의 머리카락이 엿보였고, 서재의 램프불에만
익숙해진 잿빛 눈은 헤스터가 안고 있는 아이처럼 직사 광선을 받아 껌벅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옛날 설교책 첫머리에서 볼 수 있는 흐릿한 동판 초상화와
비슷했다. 그런 초상화의 인물이 인간을 심판할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하듯,
목사 또한 이런 자리에 나서서 인간의 죄나 정열이나 고뇌의 문제에 간섭할
아무런 권리도 지니지 않은 인물이었다.
헤스터 프린이여. 하고 목사는 말했다. 여기 있는 젊은 친구의 설교는
그대도 익히 들어 온 바이겠지만, 나는 이 젊은 목사와 지금껏 얘기를 했소.
윌슨 목사는 곁에 있는 얼굴이 파리한 젊은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이 신앙심 깊은 젊은이에게 하느님이 보시는 앞에서, 현명하고도
고결한 위정자들 앞에서,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듣고 있는 앞에서, 그대가
저지른 비열하고 무도한 죄에 대해 설교하도록 권유하였소. 이 젊은이는
나보다도 그대의 타고난 성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므로 그대의 완강한 고집을
꺾기 위해서 위협을 하든, 또는 부드럽게 달래든, 보다 적잘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고, 그대 또한 그대를 유혹하여 타락시킨 남자의 이름을 밝히고야 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 젊은이는 내 의견에 반대하기를
(나이보다는 현명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으나, 역시 젊은 사람에게 흔히 있는
수줍음 탓이겠지만, 이런 대낮에 구경꾼이 많은 앞에서 여자의 비밀을
고백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여자의 본성을 손상시키는 일이라는 거요. 그러나
내가 이 젊은이를 납득시키려고 애쓴 바와 같이, 사람이 수치로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죄를 짓는 데 있는 것이지 그것을 사실대로 고백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오. 자, 당신 의견은 어떻소, 딤스테일 목사. 이 가련한 죄인의 영혼을
다룰 사람은 당신이라야 되겠소, 아니면 나라야 되겠소?
발코니에 자리잡은 위엄있는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벨링햄 총독은 젊은
목사에 대한 존경심에서 다소 부드럽기는 하였으나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그
술렁거림을 대변했다.
딤스테일 목사! 이 여인의 영혼을 구하는 일은 당신에게 달려 있소. 따라서
이 여자를 설득하여 회개시키고, 또 회개한 증거로 고백을 시키는 거싱 당신의
의무라고 생각하오.
총독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간청하는 소리를 듣자 군중들은 딤스테일
목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젊은 목사는 영국의 어느 유명한 대학을
졸업하고, 그 당시의 신학문을 이 미개의 황무지에 전하기 위해 건너온
사람이었다. 그의 웅변과 종교적인 정열은 이미 목사로서의 유망한 앞길을
약속받고 있었다. 또한 그의 용모는 남의 이목을 끌만큼 뛰어나게 수려하였다.
희고 훤한 이마와 우수에 잠긴 커다란 갈색 눈, 그리고 일부러 꼭 다물지
않으면 바르르 떨리기 쉬운 입술은 극도로 예민한 감수성과 강한 자제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타고난 비범한 재능과 학식에도 불구하고 이 젊은 목사는
인생의 바른 궤도를 벗어난 곳에서 방황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표정은
몹시 불안스러워 보였고, 근심과 공포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딘가 은신처에 묻혀 있어야만 비로소 침칙해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목사로서의 직책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그늘진 오솔길을 걸었으며, 언제나 소박한 어린이 같은
생활을 했다. 그러나 대중 앞에 나서서 설교를 할 때면 신선하고 향기 높은
이슬처럼 순결한 사상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것은 여러 사람의 말대로 천사의
말처럼 가슴을 울리는 것이었다.
윌슨 목사와 총독은 이러한 젊은 목사를 앞으로 끌어내어 대중이 듣고 있는
가운데, 더렵혀지기는 했지만 역시 신성한 여성의 비밀을 고백시키도록
명령했다. 이 난처한 처지에 놓인 젊은이의 볼에는 핏기가 가시고, 입술은
극심하게 떨렸다.
저 여인에게 말을 거시오, 하고 윌슨 목사는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저
여자의 영혼에 중대한 계기를 줄 뿐아니라, 총독 각하도 말씀한 바와 같이 저
여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당신 자신에게도 중대한 일이오. 진실을
고백하도록 저 여인을 타이르시오.
딤스테일 목사는 기도를 올리듯 고개를 수그리더니 조금 앞으로 나섰다.
헤스터 프린이여. 그는 발코니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며 여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당신도 여기 계신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을 테니까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잘 알고 있을 줄 아오. 당신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이 지상에서 받는
형벌이 당신의 영혼을 구제하는 데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과 함께 죄를 범하고 당신과 함께 괴로워하고 있는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기 바라오! 그 남자에 대한 그릇된 동정이나 친절한 마음에서 입을
다물어서는 안 되오. 알겠소? 헤스터! 그 남자가 높은 곳에서 내려와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수치의 단상 위에 함께 서야 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 편이
차라리 평생을 두고 죄를 숨기는 것보다는 월씬 나을 테니까요. 당신이 침묵을
지키는 것이 그 남자에게 모슨 도움이 되겠소? 그 남자로 하여금 타락의 조를
저지른 위에 위선의 죄를 더하도록 강요하는 것밖에 더 되겠고. 하느님이
당신에게 여러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도록 한 것은 당신이 가슴 속의
죄악과 가슴 밖에 있는 비애를 공개적으로 회개할 수 잆도록 해 주신 것이오.
지금 당신의 입술 앞에 놓여진 그 술잔, 입에는 쓸지 모르나 영혼에는 이로운
술잔, 당신은 그것을 그 남자로부터 뺴앗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오!
젊은 목사의 떨리는 듯한 목소리는 상냥하면서도 우렁차고 엄숙했으나, 말이
막히는 듯했다. 말 하나하나에 대한 뜻보다는 오리려 그 감정이 뚜렷이
전달되었으므로 듣는 사람의 마음에 공감을 불러일으켜, 너나할것없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묶어 버렸다. 헤스터의 품에 안긴 아기까지도 그 영향을 받았는지
지금까지 멍하던 눈망울을 딤스테일 목사 쪽으로 돌리더니 기쁜지 슬픈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조그만 두 팔을 내밀었다. 목사의 말이 어찌나 힘차게
들렸던지 사람들은 헤스터 프린이 그 죄인의 이름을 밝히든가, 아니면 죄인
자신이 그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어쩔 수 없는 심정에 이끌려 스스로
처형대 위로 올라갈 것으로 생각했다.
헤스터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윌슨 목사가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여인이여, 하느님의 자비심도
한도가 있는 법이오. 그 갓난아기도 목청이 있기에 그대가 방금 들은 충고의
말을 뚜렷이 확인하고 있지 않소. 남자의 이름을 밝히시오! 말하고 회개한다면
그대의 가슴에서 주홍 글씨를 떼어낼 수도 있소.
싫습니다! 헤스터는 윌슨 목사가 아닌 젊은 목사의 고뇌에 찬 눈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이것은 가슴 싶이 찍힌 낙인이므로 떼어도 헛일입니다.
게다가 저는 제 고뇌 외에 그분의 고통까지도 참고 견디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말해라! 또 하나의 목소리가 처형대를 둘러싼 군중 큼에서 냉혹하고도
날카롭게 들려 왔다. 말해라, 그 아이에게 아비를 찾아 줘라!
못 하겠어요! 헤스터는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지면서도 귀에 익은 그 남자의
목소리에 대답했다. 이 아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야 합니다. 지상의
아버지는 몰라도 됩니다!
저 여자는 말하지 않을 거요!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발코니에서 몸을 내밀고
자신의 설득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딤스테일 목사가 중얼거렸다. 그는 숨을
크게 내쉬며 자기 자리로 물러섰다. 여자의 마음은 이토록 강하고 넓은가! 저
여자는 입을 열 것 같지 않소!
불쌍한 죄인의 고집스러운 심리 상태를 알아차리자, 윌슨 목사는 이런 일에
대비해 미리 준비했던 온갖 죄악에 대한 설교를 군중을 향해 시작했다. 그는 이
치욕스런 주홍 글씨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한 시간 이상이나 열변을 토하였기
때문에 그 상징은 듣는 사람의 가슴속에 새로운 공포심을 싹타게 하여 마치 그
주홍색은 지옥의 업화에서 가져오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헤스터 프린은 몹시 피곤하고 넋나간 듯안 모습으로 치욕의 단 위에
서 있었다.
이날 아침, 헤스터는 온힘을 다하여 견디어 냈다. 그녀는 심한 고통을 받았을
때 쉽게 기절하여 그로부터 도피하는 그런 기질의 여자는 아니었으므로,
정신만이 돌처럼 무감각한 껍질 밑에 도피처를 찾았을 뿐 육체적인 기능은
여전히 작용하였다. 따라서 설교자의 목소리는 그녀의 귓전에서 윙윙 울려
왔으나, 그야말로 마이동풍에 지나지 않았다.
목사의 솔교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 아이의 울음소리가 찢어지는 듯
주위의 공기를 뒤흔들어 놓았으나, 헤스터는 기계적으로 달래려 했을 뿐 아이의
고통을 안스러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이런 망연한 모습으로 헤스터는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옥문 안으로 다시 모습을 감췄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주홍 글씨가, 감옥으로 들어가는 어두운 복도에서
무시무시한 빛을 발하더라고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4.만남
감옥으로 돌아온 뒤, 헤스터 프린의 신경은 극도로 흥분돼 있었다. 끊임없는
감시가 없다면 자기 몸을 헤치거나 불쌍한 갓난아기에게 미치광이처럼 난폭하게
굴었을지도 몰랐다. 해질 무렵이 되어 흥분은 더욱 심해져 아무리 꾸짖고 벌을
주겠다고 위협해도 전혀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았으므로 브래킷 간수장은
의사를 부르기로 했다. 그 의사는 현대의학에 정통할 뿐 아니라, 숲 속에서
나는 약초에 대해서도 원주민보다 잘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실 의사의
간호가 필요한 것은 헤스터 자신보다도 오히려 갓난아기로, 매우 위급한
상태였다. 엄마의 가슴에서 생명의 자양을 흡입하는 동안, 그녀의 온몸에
충만해 있는 혼란과 고뇌와 절망을 모조리 빨아들인 모양이었다. 고통의
발작으로 몸을 뒤틀고 있는 아기의 모습은 헤스터 프린이 종일 견디고 있던
마음의 고통을 그 어린 몸뚱이로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간수장 뒤를 따라 어두컴컴한 감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군중 속에서 유별나게
주홍글씨 여인의 관심을 끌었던 그 이상한 모습의 남자였다. 그는 이 감옥에
머물게 되었다. 특별히 무슨 죄를 범해서가 아니라, 행정관들과 인디언
추장과의 사이에 벌어질 몸값에 대한 회담이 끝날 때까지 가장 편리하고 적당한
장소로써 당분간 이곳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이 남자의 이름은 로저
칠링워드였다.간수장은 그를 감방으로 안내하고 잠시 그곳에 머뭇거리고
있었는데,갑자기 감방이 아까보다도 조용해진 데 대해 놀라고
있었다.갓난아기는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으나,헤스터 프린은 죽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갑자기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자리를 비켜 주지 않겠습니까? 하고 의사가 말했다. 문제
없소,간수 양반. 이제 곧 이 감옥을 조용히 해 드리리다. 프린 부인이
지금까지보다 말을 고분고분 잘 듣도록 해 드리겠소이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야 선생님의 의술은 제가 보증해 드리죠! 브래킷
간수장은 말했다. 정말로 이 여자는 신들린 사람 같습니다.채찍으로 악마를
쫓아낼까 했으나 그럴 수도 없어서......
스스로 의사라고 청하는 이 기묘한 사나이는 감방에 들어올 때부터 의사다운
침착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군중 속에서 그를 발견하고,이 여인이 뚫어지게
바라보던 것으로 보아,두사람 사이에는 어떤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명백하였지만,잠시 뒤 간수장이 나가고 단둘이 남았을 때에도 그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우선 아이를 진찰하기 시작했다.손수레 침대 위에서 몸을 뒤틀며 울고
있는 아이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었다.그는
아이를 세밀히 진찰하더니,옷 속에서 가죽 가방을 꺼내어 열었다.그 가방에는
여러 종류의 의약품들이 들어 있었는데,그 중의 하나를 물컵에 타면서 말했다.
연금술을 연구한데다 1년 이상이나 약초의 효험을 잘 아는 사람들 속에서
살았으므로 나는 의학의 대가라고 하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용한 의사가 되어
버렸지. 자,여기있소.이 아이는 당신 아이지 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소.
목소리나 얼굴 생김새로 보더라도 나를 아비라고 생각지 않을 것이오. 이
물약을 당신 손으로 먹이시오.
헤스터는 그가 내민 약을 물리치며 두려운 눈초리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어린 것에게 앙갚음을 하시려는 건가요?
어리석은 여자 같으니! 의사의 대답은 냉담한 것 같기도 하고,상대방을
달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불쌍한 아비 없는 자식을 못 살게 굴어 봤자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 약은 잘 듣소.이 애가 내 아기라 할지라도---그렇소,
나와 당신 사이에 태어난 아기라 할지라도---역시 이것 이상의 약은 없을거요.
여인은 사리를 분별한 만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그러자 의사는 아이를 두 팔로 안더니 물약을 먹여 주었다.약은 곧
효력을 나타내어 의사의 말을 확실하게 입증해 주었다.어린 환자의 신음 소리가
멎었다.이어 괴로운 몸부림도 차차 가라앉았다.불과 몇 분 안 되어,고통이
없어진 아이들에게서 흔히 보듯이 아이는 조용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의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이 사나이는 이어서 어머니를
진찰하기 시작했다.조용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맥을 짚고 나더니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보았다.그 시선은 퍽 낯익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서먹서먹하고 냉혹하였기 때문에,그녀는 심장이 움츠려드는 듯하였다.마침내
진찰을 마친 그는 다른 물약을 조제하면서 말했다.
나는 레테도 네펜디도 모르지만,황야에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새로운 비법을
배웠소.이것도 그 중의 하나요.패러셀서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내 학문과의
교환 조건으로 인디언이 가르쳐 준 처방이니까 마셔 보오.깨끗한 양심보다
위로하는 힘은 덜하겠지만.하기야 그런 양심은 나에게도 없소만,하여간 이것을
마시면 날뛰는 파도에 뿌린 기름처럼 당신의 흥분된 격정이 가라앉을 것이오.
그는 헤스터에게 컵을 내밀었고,헤스터는 상대방의 얼굴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받아들었다. 공포의 표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도대체
이 사나이의 속셈은 무엇일까 하는 의혹에 찬 표정이었다. 헤스터는 잠든
아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죽을 생각도 해 보았어요. 그냥 죽어 버릴까 하고 말이에요. 나 같은
여자가 기도를 했다는 것은 곧이들리지 않겠지만, 죽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답니다. 그렇지만 이 컵 안에 독이라도 들어 있다면 내가 마시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세요. 자, 보세요, 이렇게 입술을 댔습니다.
그대로 마셔 두는 게 좋을 거요. 그는 여전히 냉담하고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뜻밖에도 나라는 사람을 잘 모르고 있군. 헤스터. 내가 하는 일이 늘
그렇게 얄팍한 것이던가? 비록 내가 복수를 회책하고 있다 하더라도 당신을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약을 주는 편이 훨씬 더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겠소? 당신을 살려 두어야만 이 낙인 찍힌 치욕의 표시가 언제까지나
당신 가슴에서 불타고 있을 게 아니오?
그러면서 그가 기다란 검지를 주홍색 글씨에 대자 그것은 갑자기 새빨갛게
불타올라서 그녀의 가슴속까지 타들어가는 듯하였다. 그는 헤스터가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는 것을 보자 싱긋이 웃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살아 있어야 하고, 언제까지나 업고를 치르며 살아야 하오.
무사람이 보는 앞에서, 당신이 한 때 남편이라 부른 일이 있던 남자 앞에서,
그리고 저 어린애가 보는 앞에서 말이오, 자. 당신이 오래 살 수 있도록 이
물약을 들어요.
그 이상의 권고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헤스터 프린은 물약을 쭉 들이키더니
의사의 지시대로 아이가 잠들어 있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의사는 방안에
놓여 있는 오직 하나의 의자를 끌어당겨 그녀 옆으로 다가앚았는데, 이러한
그의 행동에 헤스터는 몸을 부르르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면에서든, 원리원칙에서든, 아니면 세련된 가면을 뒤집어쓴 잔혹성에서든,
하여간 육체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 다음, 이번에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남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응대하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헤스터, 당신이 왜 이런 꼴이 되었는지, 아까 본 바대로 어쨰서 처형대위에
서게 되었는지 그이유는 묻지 않겠소. 이 이유야 뻔한 노릇 아니겠소? 나의
어리석음과, 당신의 유약함 탓이니까. 나는....사색의 인간이었소. 수많은 큰
도서관의 책벌레였소. 끝도 없는 지식욕을 채우고자 좋은 세월을 다 보내고
이제 늙은 몸이 되었으니, 이런 내가 당신처럼 젊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소? 날 때부터 불구였던 내가 젊은 여자와 같이 하며 지적인
재능으로 그 모자라는 부분을 덮어 나갈 수 있으리라 믿은게 처음부터
잘못이었소. 남들은 나를 현명하다고 하오. 현명하다는 말이 자신의 일에
괸해서도 적용된다면, 이번 일 역시 예측했어야 옳았던 거요. 어두운 숲 속을
벗어나 이 그리스도 교도의 식민지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이미 나는 확실히
알고 잇었어야만 했소. 즉 내 눈앞에 가장 먼저 나타날 것은 사람들 앞에
치욕의 초상처럼 서 있는 당신이란 것을. 아니, 남편과 아내로서 교회의
들층계를 내려오던 그 순간부터 우리의 인생길에 봉화불처럼 빨갛게 타오르던
주홍 글씨가 보였어야 했던 거요.
당신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헤스터가 입을 열었다. 몹시 참담한
심경이었지만 자신의 치욕의 표시에 대해 은근히 비꼬는 이 마지막 말은 차마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내겐 당신에 대한 애정 같은 건 없었다는
것을, 또 그런 체한 일도 없었어요.
옳은 말이오! 그는 대답했다. 역시 내가 어리석었었소! 방금도 말했잖소.
그러나 그때까지의 나의 인생은 허송세월의 연속이었소. 세상에 즐거움이라곤
없었소! 나의 마음은 손님을 초대할 객실은 많았지만, 난로 하나 없는 쓸쓸하고
냉랭한 커다란 집이나 다름없었소. 나는 뭔가 거기에 불을 붙여 보고 싶었소.
그다지 허황된 꿈은 아닐 것 같았소. 늙은 데다 불구자인 주제에.... 세상 사람
누구나가 붙잡을 수 있게 온 천지에 흩어져 있는 소박한 행복을 지금부터라도
잡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꿈이었으니 말이오. 그래서 헤스터, 나는
당신을 내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맞아들여 당신이 그곳에 있으므로 해서
생기는 내 마음의 훈김으로 당신을 따뜻하게 해 주고 싶었던 거요!
내가 당신을 배신했어요.
헤스터는 중얼거렸다.
배신이야 서로 한 셈이지. 그는 대답했다. 애초에 배신한 것은 바로 나요.
꽃봉오리처럼 젊은 당신을 속이고 늙은 나와 어색하고 거짓된 관계를 맺제
했으니 말이오. 지금까지의 사색이나 철학이 헛된 것은 아니었으니 당신에게
복수한다거나 흉계를 꾸민다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겠소. 우리는 아무에게도
서로 잘잘못이 없는 세이오. 다만 헤스터, 우리에게 못할 짓을 한 그남자는
살아 있소! 그 사람이 대체 누구요?
그건 말할 수 없어요! 헤스터 프린은 단호한 태도로 대답하며 상대방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말할 수 없어요!
절대로 안 된다는 말이로군? 그는 음울하고 자기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이것 보오. 헤스터. 전심전력을 다해 한가지 비밀을
밝히기 위해 몰두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무슨 일이건 어느
한도까지는-외부의 일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의 일이든지간에 비밀은
반드시 밝혀지기 마련이오. 당신은 남의 일을 캐내기 좋아하는
군중으로부터라면 그 비밀을 지킬 수 있을는지 모르오. 목사나 재판관의 눈을
속일 수는 있을 것이오. 오늘 낮에 당신에게서 처형대에 나란히 서야 할 그
남자를 알아내려고 했을 때에도 그러했으니 말이오. 그러나 나는 그들과는 드른
방법으로 그를 찾을 것이오. 책에서 진리를 찾아낸 것처럼 그 남자도 꼭
찾아내고야 말 것이오. 그 남자를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갑자기 까닭도 없이
떨게 될 것이고, 나는 그를 위식할 수있을 것이오. 언젠가는 내 손으로 꼭
찾아낼 거요!
주름진 학자의 눈이 불길처럼 번뜩였다. 헤스터 프린은 가슴속에 간직한
비밀을 혹 그가 알아챌까 두려워서 두 손으로 가슴을 끌어안았다.
당신은 끝내 그자의 이름을 못 대겠다는 거요? 아무래도 내가 알아내고 말
텐데. 그는 마치 운명이 자기 편이 되기라도 한 듯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자는 당신처럼 치욕의 표시를 가슴에 달고 있지 않을진 모르나 내게는 그
표시가 보일 것이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소! 내가 하느님꼐서 그자에게
내리는 처벌에 간섭하거나, 인간이 만든 법률의 손을 빌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마오. 그자의 생명을 해치려는 일을 꾸미리라는 생각도 하시오.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도 없을 것이오. 필시 평판 높은 사람일 테지만, 살려둘 거요!
결코 죽일 필요는 없는 거이오. 명예의 껍데기 속에 숨어 살게 내버려두겠소.
그래도 필경에는 내 손아귀에 들어올 것이 틀림없으니까!
당신의 행동은 자비러운 것 같지만.... 하고 헤스터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말했다. 당신 말을 듣고 있으니 당신은 정말 무서운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한 가지만, 나의 아내였던 당신에게 약속해 달랄 것이 있소. 학자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비밀을 지키고 있듯이 내 비밀도 또한 지켜
주시오!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 고장에 아무도 없소. 그러니 과거에 당신이
나를 남편이라 불렀다는 말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아 달란 말이오! 이
황량한 지구의 끝에서 나는 살 작정이오. 어딜 가나 방랑객 신세, 모든
인간사로부터 고립된 내가 아니오? 그렇지만 이곳에는 나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한 사람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가 있소. 사랑하건 미워하건, 옳건
그르건 그것은 문제가 아니오! 헤스터 프린 당신과, 당신에 관련된 모든 것은
나의 것이오. 내가 있는 곳은 당신과 그 남자가 있는 곳이기도 하오. 그러나
나의 정체만은 밝히지 말아 주기를 부탁하오!
왜 그러기를 바라시지요? 무슨 까닭인지는 몰랐으나, 헤스터는 이 비밀의
약속에 대해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당당히 정체를 밝힌 뒤, 나를
버리지 않는 거죠?
그것은 아내에게 배신당한 나편이 받아야 할 수모를 피아기 위해서인지도
모르오.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도 모르지. 어쨌든 남모르게 일생을 보내는 거싱
나의 바람이오. 그러니까 당신 남편은 이미 저 세상에 가버렸는지 소식도
없다고 해 두면 되는 거요. 말로나 몸짓이나 표정 등으로 나를 아는체 마오!
특히 그자에게 비밀을 누설해선 안 되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가만 있지 않을
테니까! 그놈의 명성도, 지위도, 생명도 모두 내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오!
그 사람의 비밀을 지키듯이 당신의 비밀 역시 지키겠어요. 라고 헤스터는
말했다.
맹세하시오! 하고 그는 다그쳤다. 헤스터는 맹세했다.
자 그럼, 프린 부인. 로저 칠링워드 노인(앞으로는 이 이름으로 통하게
된다)은 말했다. 혼자 있게 해 주리다. 이 아이와 주홍 글씨만을 상대해야
겠군! 어떻소, 헤스터. 당신이 받은 판결은 잘 떄도 그 표적을 달고 있어야
하오? 무서운 꿈을 꾸거나 가위에 눌릴 것이 두렵지 않소? 그는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헤스터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웃으면서 나를 보세요? 헤스터는 그의 펴정에 당황하며 물었다.
당신은 이 마을 가까운 숲 속에 있다는 악마인가요? 나를 속여 내 영혼을
파멸시키자는 약속을 한게 아닌가요?
당신 영혼은 아니오. 그는 또 한 번 싱긋 웃었다. 아니오. 절대로 당신의
영혼은 아니오!
5.삯바느질하는 헤스터
헤스터 프린의 형기가 끝났다. 감옥문이 열리고 햇빛 속에 발을 내디뎠을 때,
누구에게나 골고루 내리쬐고 있는 햇빛이건만 아프로 병든 그녀의 마음에는
마치 햇빛이 자시느이 가슴에 달린 주홍 글씨를 비추는 일만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샅이 느껴졌다. 앞에서 말한 대로 숱한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뒤따르고
너나할것없이 몰려들어 손가락질하는 가운데 처형대의 수모를 겪었지만,
그때보다도 지금 이렇게 혼자 감옥문을 걸어나오는 편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때는 부자연스러운 긴장감과, 지지 않으려는 끈질긴 의지가 그녀의 마음을
지탱해 주었다. 그 덕분에 눈앞에 벌어진 괴로운 장면도 일종의 참혹한 승리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일은 일생을 통해 한 번쯤 있을까말까한,
다른 일과는 무관한 고립된 사건이었던만큼 그때는 앞날의 일은 생각할 수도
없이 오랜 세월을 평온하게 사는 데 소모될 강렬한 생명력을 동원하여 그
수모와 고통에 대결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헤스터를 처벌한 법률은 흡사
무서운 힘을 지닌 거인과도 같았으나, 그 무쇠 같은 팔에는 파멸시키는 힘뿐만
아니라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힘도 내포되어 있어 오히려 그녀의 시련
기간동안 그녀를 지탱시켜 주었었다. 그러나 지금, 감옥문을 혼자 걸어나오는
순간부터 그녀에겐 새로운 일상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생활은 지극히
평범한 재기를 동원해 꾸려나가거나, 아니면 그 무서운 짐 밑에 깔려 버리거나,
둘 중의 어느 하나가 되는 것이다.현재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하여 미래의 힘을
빈다는 것은 이제는 불가능하였다. 내일은 끝도 없이 계속되리라. 나날이
새로운 시련이 닥쳐 올 것이며 그것은 처참하고 고통스럽게 겪고 있는 현재의
시련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먼 미래의 나날들은 그녀가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을 싣고 서서히 다가올 것이며, 언제까지나 그 짐을 팽개칠 수는 없을
것아디, 하루하루 날이 가고 해가 거듭됨에 따라, 그녀의 수치더미에는
그만큼의 비참함만이 더 높이 쌓이리라. 그리하여 오랜 세워링 흐르는 동안
헤스터 프린은 자신의 개성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설교가나 도덕가가 지탄하는
죄의 본보기가 될것이며, 여자의 약점이나 죄많은 격정의 갖가지 이미지를 보여
주는 뚜렷한 존재가 외어 버리리라. 가슴에다 주홍 글씨를 불사르고 있는
헤스터, 훌륭한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헤스터, 머잖아 어엿한 어머니가 될
헤스터, 한 때 청순하기만 했던 헤스터이건만 죄많은 인간, 죄많은 현실의
구체적이 표상으로써 바라보도록 순진한 젊은이들은 배울 것이고 마침내 그
무덤에는 끝까지 지고 가야 할 더럽혀진 이름만이 유일한 비석으로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자기를 마치 치욕의 전형처럼 생각하는 이
고장을 오직 하나의 마지막 거줒지로 작정한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눈앞에는 넓은 세상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이처럼 멀고 보잘것없는
청교도의 식민지 내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조항은 판결문에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아니면 유럽의 어느 나라에라도 가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자유로이 살 수도 있었다. 또 그녀를 처벌한 법률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전혀 다른 생활 습관을 지니 종족들이 살고 있는 깊고
신비로운 술으로 들어가는 길이 그녀 앞에 틔어 있기도 했다. 그녀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그들의 생활에 일치하여, 그들 속에서 그녀는 자유롭게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숙명이라는 거싱 있게 마련이고, 운명의 힘에
이끌려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경우가 흔히 있는 법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특수한 큰 사건이 그들의 일생을 얼룩지게 한 고장 근처를
유령처럼 배회하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 인생을 슬프게 하는
색채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더욱더 피할 수 없는 힘이 가해지는 법이다.
헤스터의 죄, 헤스터의 치욕은 대지에 깊숙이 뻗어내린 뿌리와 같았다. 새로운
재생의 삶을 사는데 있어,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보다도 더욱 가앟ㄴ
동화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다른 순례자나 나그네들조차 꺼려하는 숲 소그이
황야가 헤스터 프린에게는 황량하고 쓸쓸하긴 하나 생애를 보내기에 적합한
고향이 된 듯 싶었다. 이에 비하면 이세상의 다른 풍경은 모두 생소하게
느껴졌다. 고생을 모르던 소녀 시절이나 창순했던 처녀 시절이 마치 옛날에
벗어던진 의복처럼 생소했고 아직도 어머니가 그곳에 살아 계신 것샅이
생각되는, 그 영국의 전원도 이미 한낱 타향에 불과했다. 이 쓸쓸한 고장에
그녀를 묶어 놓은 줄은 쇠사슬과 같아서 헤스터는 마음속 깊이 괴로워하면서도
도저히 그 사슬을 끊어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렇게도 숙명적인 산야와 오솔길 속에 헤스터를 가두어 놓은
것은 그녀의 또 다른 감정 떄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러했다.
헤스터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 애썼으나, 그것이 마치 뱀이 구멍에서
기어나오듯이 마음속에서 나오려고 할 때마다 그녀의 얼굴빛이 파랗게 질리곤
했다. 그렇다. 이 고장이야말로 헤스터와 숙명적인 인연으로 굳게 맺어진 그
사람이 살고 있으며 거닐고 있는 곳이다. 그 인연은 지상에서는 비록 인정받을
수 없으나, 두사람이 함께 서야 할 최후의 심판대, 그 자리를 결혼의 제단으로
삼아 끝없는 천벌의 업고를 함께 감내할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영혼을
유혹한 악마는 여러 차례 이런 생각을 헤스터에게 품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녀가 그 생각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가는 그것을 쫓아 버리려고 몸부림치는
모양을 지켜보며 재미나다는 듯 비웃는 것이었다. 헤스터는 이런 생각에
정면으로 부닥치는 일이 없도록 급히 서둘러 마음의 토굴속에 그것을 가둬
버리는 것이었다. 헤스터가 자신에게 믿게 하려 했던 것은-뉴잉글랜드에서 살게
된 동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은-반은 진실이었으나, 반은 자기 기만적인
것이었다. 나는 이 고장에서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받을 형벌은
이곳에서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여 날마다 받아야 할 치욕의 고통이
언젠가는 나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 줄는지도 모르며, 잃어버린 순결과는 색다른
순결이 생겨나서 결국 고난 끝에는 좀더 성녀같은 여자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이런한 까닭에서 헤스터 프린은 달아나지 않았다. 이 마을 변두리, 반도의
지역 안이긴 하지만 인가와 떨어진 곳에 조그만한 오두막집이 있었다. 이 집은
초기의 개척자가 세운 것이었으나 부근의 땅이 너무 메말라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데다 도심에서 거리가 멀고, 이미 이 주민들의 생활의 일부분이 된 사교
활동의 영역에서도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폐옥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해변에 자리잡은 서향집이었는데, 만 안쪽 저 멀리로 숲이 우거진
산들이 바라다보였다. 이 반도에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잡목 숩이
있었는데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이 집을 가려 주고 있었다. 아니, 가리고
있었다기보다 이집이 그 숲 뒤에 숨어 버렸다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또는,
당연히 숨겨 둬야 할 집이 있음을 그 잡목 슾이 나타내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아직도 성가시게 감시를 하고 있는 행정관들의 허가를 얻어 이
조그마한 외딴집에 가재도구를 옮겨와 아기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자 늬혹의
그림자가 곧 이 장소에 위따르게 되었다. 이 여인이 왜 인간적인 자비로운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하거 이것에 와 살게 되었는지 그 영문을 알 리 없는
아이들은 이 집 가까이 몰래 와서, 창가에서 바느질을 하거나,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거나, 조그마한 뜰에서 일을 하거나, 또는 마을로 통하는
오솔길을 걸어 나오는 그녀를 바라보곤 하였다.
그러나 가슴에 붙은 주홍 글씨가 눈에 띄면 까닭 모를 공포심에 사로잡혀
그들은 모두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헤스터의 처지는 쓸쓸했고 누구 한 사람 찾아 주는 친구도 없었으나, 생활의
곤궁은 면할 수 있었다. 그녀에겐 몸에 익힌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는 그런 기술을 발휘할 만한 고장이 못 되어씾만, 한창 자라는 아이와
자기의 양식을 마련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그 기술이란 예나 지금이나
여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인 바느질이었다. 헤스터가 자신의 가슴에
붙이고 있는 주홍 색 수 글씨는 그녀의 섬세하고도 상상력이 풍부한 재능을
충분히 나타내 주었다. 궁저에 사는 귀부인들이 그럿을 보았다면 명주실과
금실로 짠 옷감에다 인간의 기교를 더한 풍요하고 정성어린 장식을 가지고자
반색하며 달려들었을 것이다. 이 고장의 여느 쳥교도들이 입는 옷은 상복처럼
수수한 것이 특징이라 헤스터의 수 주문이 여간해서 없었음은 사실이나, 그
당시는 정교한 수예품이 대단히 유행하던 풍조였다. 따라서 많은 풍습과 유행을
고향에 버리고 새 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드르이 선조들 또한,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사직의 임명식이라든가 행정관의 취임식, 또는 새로운
정부가 백성에게 보여 주는 행사에 위엄을 갖추는 일 등, 모든 공식적인
행사에는 위용과 장엄함이 돋보이도록 하는 것이 정책적으로 고려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깊이 주름 잡힌 옷깃, 정성들여 만든 띠, 화려하게 수놓은
장갑 등은 모든 집권자의 공적인 정식 복장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일반
시민에게는 근검이란 법령으로 이 같은 사치를 금지하고 있었으면서도 높은
신분의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에게는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 장계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시신에 입히는 수의며, 유가족의 슬픔을 나타내기 위한
검은 천이나 흰 삼베로 된 갖가지 모양의 상복 등, 헤스터 프린의 솜씨를
필요로 하는 일거리는 많았다. 갓난아기의 린네르 제품-그즈음에는
갓난아기에게도 훌륭한 예복을 입혔으므로-또한 돈벌리되는 일거리로 얻을 수
있었다.
이리하여 조금씩, 제법 빠른 속도로 헤스터의 수예품은 요즘 말로 표현하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불쌍한 운명의 여인에 대한 동정심에서인지,
보잘것없는 물건에까지 터무니없는 가치를 부여하려는 병적인 호기심에서인지,
또는 예나 지금이나 뭔가 알 수 없는 사정으로 남이 구할 수 없었던 것이 선뜻
어느 일부 사람에겐 주어졌던지, 또는 헤스터가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방치해 둘
뻔한 불편이 그녀 덕분에 실제로 해결된 때문인지,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녀가 하루에 몇 시간이고 일을 하기만 하면 일거리는 얼마든지 있었고 품삯도
꽤 후한 편이었다. 허영심이 강한 사람들은 호화찬란한 의식을 위해 죄많은
헤스터의 손으로 만들어진 옷을 몸에 걸침으로써 허영의 죄를 상쇄하려고
하였는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헤스터의 수 솜씨는 총독의 주름깃에서도 볼 수
있었고, 아기들의 조그만 모자를 장식하기도 했고, 죽은 사람의 관 속에 들어가
곰팡이가 피어 썩기도 했다. 그러나 청순한 신부의 부끄러움을 가려 줄 흰
면사포에 헤스터의 솜씨로 수를 놓은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헤스터의 죄에 대해 사회가 얼마나 냉혹하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나를 여실히
말해 주는 것이었다.
헤스터는 자기 자신을 위해 최소 한도의 검소하고 금욕적인 생계비 이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칙칙한 빛깔의 가장 값싼 옷감이었고,
장식품이라고는 평생 달아야 할 운명의 주홍 글씨 하나뿐이었다. 이에 비해
어린아이의 옷에서는 상상을 초월한 기발함이 눈에 띄었는데, 이것은 일찍부터
이 어린 소녀에게 싹트고 있던 뭔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한 환상적인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이 점에 대해선 뒤에 더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쨋든 이 아이의 옷을 아름답게 꾸며 주는 데 드는 약가느이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 돈을 헤스터는 모두 자산사업에 썼다. 처참하기로
따지자면 오히려 자기보다는 처지나 나은, 가나한 사람들을 위해 그녀는 돈을
나눠 주었지만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자선을 베풀어 주는 이 여자에게 자주
모욕을 주었다. 차라리 훌륭한 옷을 만드는 데 솜씨를 발휘했으면 더 보람이
있었을 꽤 많은 시간을 헤스터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구잡이 옷을 만드는 데
솜씨를 발휘했으면 더 보람이 있었을 꽤 많은 시간을 헤스터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구잡이 옷을 만드는 데 소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에 힘을 기울이는
것으로 속죄를 할 작정이었는지도 모르며, 많은 시간 동안 이렇게 거친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모든 즐거움을 희생시키려고 하였는지도 모른다. 헤스터의
성품에는 어딘지 모르게 화려하고 요염한, 동양적인 기질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치스럽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취미는 아름다운 의복을 만들어 내는 일
말고는 아무리 생활의 구석구석을 살펴봐도 그러한 점을 엿볼수 없었다.
여자들은 대개 섬세한 바느질을 통해 남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을 발견하곤
한다. 헤스터 프린에게 있어 바느질은 인생에 대한 정열을 발산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또한 그 정열을 진정시키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물리친 헤스터는 이러한 기쁨도 죄악시하여 두려워하였다. 이렇게
하찮은 일에까지도 그녀의 병적인 양심이 작용하는 것은 오로지 순수한
희한때문이라기보다 어딘가 의심스러운, 그녀의 내부 깊숙한 곳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숨겨져 있는 증거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헤스터 프린은 이 사회에서 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녀의 열정적인 성격과 뛰어난 재능 탓에, 여인의 가슴에다 카인의 이마에
찍힌 낙인보다도 더 참기 어려운 표시를 달아 준 세상도 이 여자를 완전히
고립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회와 어떠한 교섭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그 사화의 일원이라고 느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대하는 세상
사람들의 태도나 말씨, 심지어는 그 침묵까지도, 헤스터는 추방된 사람이며
어딘가 별천지에 살고 있는 사람이거나 여느 사람과는 다른 기관이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그것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때도 있었다. 헤스터는 표면적으로는 인간적인 관심사에서
격리돼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바로 그 옆에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녀는
그리운 난롯가로 돌아와서도 이미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으며, 가족의 즐거움에 함께 웃을 수도 없고, 또는 가족의 슬픔에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 망령과 같은 존재였다. 가령 금지된 동정을 표현해
본댔자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감이나 혐오감 그리고 심한 멸시만이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헤스터가 차지한 유일한 자리였다. 헤스터는 자신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잊을 리도 없었지만, 사람들이 가장 아픈 곳을 인정사정
없이 건드릴 때마다 새로운 고통처럼 자시느이 처지를 되새기곤 했다. 앞서도
말했듯이 헤스터가 도와주려고 찾아낸 가난한 사람들까지도 자선을 베풀려는
그녀의 손길에 침을 뱉는 경우가 많았다. 일거리 때문에 드나드는 상류 사회의
부인들도 헤스터의 마음에 언제나 고통이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여자들이란
일상생활의 하찮은 일에도 사람을 해치는 독약을 마즐어 내며, 겉보기엔 태연한
듯하면서도 악의에 찬 감정의 연금술로 그녀를 괴롭히는 수가 있었다. 때로는
노골적인 악담이 곪은 상처에 가해지는 혹독한 일격처럼 아무런 방비도 없는
가슴에 날아와 헤스터를 괴롭히는 일도 있었다. 헤스터는 오랜 시일에 걸쳐
자신을 굳건하게 단련시켜 왔었다. 그러한 공격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으레,
창백한 볼에 홍조가 가득히 번졌다가는 곧 가슴속 깊은 곳으로 가라앚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마치 순교자와도 같이 강한 인내심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는 없었다. 그들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였지만, 혹 아무리 참고 억눌러도 기도의 말이 저주의 말로
변할까 보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헤스터는 끊임없이 그녀의 가슴을 후려치는 수많은 고뇌와 고통에 시달렸다.
그것은 청교도의 법정에서 안겨 준, 그 효력이 언제 다할지 알 수 없는 판결에
의해 교묘하게 만들어진 고통이었다. 길을 가다 그녀와 맞닥뜨린 목사가 한바탕
설교를 늘어 놓으면, 이 불쌍하고 죄많은 여인의 둘레에는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킥킥대며 웃기도 하고 얼굴을 찡그리기도 했다. 만인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미소를 한 번 보고 싶어 안식일에 교회에 가면, 공교롭게도 자기 자신이 그날의
설교 주제가 되는 일이 가끔 있었다. 헤스터는 아이들이 무서워졌따. 그서은
아이들이, 언제나 딸 아이 하나만을 데리고 조용히 거리를 걸어가는 이 와로운
여인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그들의 부모로부터 암시받아 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우선 헤스터 모녀를 지나가게 한 다음 위에서 왁자지껄 떠들어 대며
쫓아오는 것이었다. 이이들의 마음에는 확실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 무심결에 함부로 지껄이는 말이 오히려 헤스터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녀의 치욕을 모르는 사람이 없이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증거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뭇잎들이 그 어두운 이야기를
속삭이게 되고 여름철에 부는 산들바람이 그 이야기를 중얼거리고, 겨울철의
삭풍이 큰 소리로 외친다 하더라도 이처럼 가슴속 깊이 고통을 주지는
않았으리라! 또 한 가지 쓰라린 고통을 느끼는 때는 처음 만나는 사람이
호기심에 찬 누빛으로 자신을 쳐다볼 때였다. 낯선 사라밍 주홍 글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누구나 다 그러했지만-헤스터의 마음에는 새삼스레 그 글씨가
타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손으로 가슴의 표시를
가려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늘 그 충동을 꾹 눌러 참았다. 그러나 주홍
글씨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길 역시 그 나름대로의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그들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싸늘한 눈초리는 정녕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말하자면 헤스터 프린은 주홍 글씨에 쏟아지는 사람드르이 눈길을 위식할
떄마다, 언제나 몸서리나는 고통을 겪었다. 가슴에 단 표적 부분은 절대로
무감각해지는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나날이 더해지는 고통으로 점점 더
민감해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며칠에 한 번, 아니 몇 달에 한 번 정도 어떤 인간적인 눈길이
치욕의 낙인에 멈추어 위안을 주고, 그녀의 고뇌를 덜어 주는 것같이 느끼는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일순간 다시 모든 고통이 왈칵 되살아나 한층 더 심한
고통의 발작을 안겨 주었다. 왜냐하면 그 짧은 순간에 헤스터는 또 새로운 죄를
범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를 지은 것은 헤스터 혼저였을까?
이 여자의 상상력은 조금 기이한 데가 있었다. 정신적으로 도독적으로 약한
기질의 소유자였다면 그것은 고독한 생활의 고통 때문에 좀더 악화되었을지도
모른다. 표면적으로만 연결되어 있는 그녀의 좁다란 세상을 쓸쓸한 발걸음으로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동안에 때때로 헤스터의 머리에는 주홍 글씨 덕분에
자신에게 새로운 감각이 싹튼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이 모두
공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기엔 거역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감각으로 인해 타인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죄를 직관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으나,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드러나는 갖가지 사실은 헤스터를 공포로 몰아 넣었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이었을까? 악마의 흉측한 속삭임일까? 악마는 아직 반밖에
자기의 희생물이 되지 않은 이 불행한 여인에게, 겉으로 순결한 체하는 거승ㄴ
거짓이며 그녀 이외의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도 남모르게 주홍 글씨가 빨랗게
타오르고 있노라고 그녀를 부추기는 것일까? 아니면 이 암시를, 막연하긴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이 암시를 진실로써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헤스터가
겪은 모든 경험을 다 들추어내더라도 이런 의식 만큼 무섭고 지긋지긋한 것은
없었다. 더구나 그와 같은 의식이 얼토당토않은 때에 생생히 떠오르는 데에는
놀라울 뿐 아니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렵 사람들로부터 천사와
친교라도 있는 사람처럼 우러름을 받던, 신앙과 정의의 귀감이라고 할 만큼
훌륭한 목사나 행정관의 옆을 지나갈 때에도 가끔 가슴의 빨간 치욕의 표시가
무엇에 공검한 듯한 아픔을 느끼게 하는 일이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며 눈을
들면, 그 성인 군자의 모습 이외에는 아무도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다! 또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은 오로지 희고
차가운 눈뿐이라는 어느 훌륭한 부인의 점잖기 이를 데 없는 찌푸린 얼굴을
대할 때에도, 그 부인과 자기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묘한
의식이 끈덕지게 머리를 쳐들었던 것이다. 그 부인의 가슴 속에 있는 햇빛을
모르는 눈과, 헤스터 프리느이 가슴위에 치욕의 표시로 불타고 있는 주홍 글씨,
이 두 가지 사이에 공통된 것은 대체 무엇일까? 또 어떤 때는 자, 보아라,
헤스터. 여기 네 동료가 있다. 하는 소리에 오싹하는 전율을 느끼며 눈을
들면, 주홍 글씨를 곁눈질로 쳐다보던 처녀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치
자신의 순결이 그것을 봄으로 해서 더럽혀지기하도 하는 듯이 볼에 홍조를 가득
띠우며 딴청을 부리는 것이었다. 아, 숙명의 주홍 글씨를 부적으로 삼고 있는
악마여, 너는 불쌍하고 죄많은 여인이 존경할 만한 자를 남녀노소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보여 줄 수는 없는가? 이와 같은 신앙의 상실이야말로 죄악이
가져오는 가장 슬픈 결과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스터 프린이 자기
만큼 죄를 많이 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믿으려고 했던 사실은,
스스로의 약한 천성과 인간이 만든 엄한 법률에 희생된 이 불쌍한 여인의
마음이 실은 조금도 타락하지 않았다는 증거임을 우리는 받아들여 주어야
하리라.
이 음울한 시대의 일반 대중을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일에
기괴하리만큼 두려움을 느끼는 습성이 있었다. 이 주홍 글씨에 대해서도,
그들은 현대인이라면 쉽사리 무서운 전설로 꾸밀 수도 있을 그러한 해괴한
이야기를 꾸며 댔다. 이 표적은 흔히 볼 수 있는 물감통에서 물들인 단순한
붉은 빛이 아니라 지옥의 겁화로 빨갛게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두운 한밤이라도 헤스터가 있는 곳은 언제나 환하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주홍
글씨는 헤스터의 가슴에 깊이 타들어가고 있었으므로, 아무래도 어러한
소문에는 회의적인 현대인이 인정하려 들지 않을지라도, 일말의 진실이
내포되어 있으리라는 것을 여기서 밝혀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6.펄
헤스터의 아이에 대해서는 아직 거의 말한 바가 없다. 그 작고 티없는 생명은
헤아릴 수 없는 신의 섭리에 의해 죄 많은 정열의 틈바구니에서 아름다운
불멸의 꽃으로 피어났다. 이 아이의 자라는 모습과, 나날이 밫을 더해 가는
아름다움, 그리고 작은 얼굴에 감도는 총기 등을 지켜보는 가엾은 여인에겐
그것이 얼마나 신기하게 여져졌겠는가! 펄...... 헤스터는 그런 이름을 붙여
주었으나, 그 모습이 진주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붙인 것은 아니었다. 진주를
연상시키는, 온화하고 희고 은은한 광택 등은 조금도 없는 아이였다. 그러나
구태여 펄 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고귀한 것, 즉 엄마의 모든 것을 바쳐
얻은 오직 하나의 보물이라는 뜻이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닌가! 세상은 이
여인의 죄를 나타내기 위해 그녀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아 주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굳게 잠그는 힘을 지니고 있어, 이 여인과 마찬가지로 죄 지은
사람이 아니고는 그 누구의 동정심도 이 여인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없었다.
이처럼 세상에서 따돌림당한 죄악의 직접적인 결과로써 하느님은 헤스터에게
어여쁜 아이를 내려 주신 것이다. 영원히 지워 버릴 수 없는 치욕의 가슴에
안겨 있긴 하나 아이는 엄마를 영원히 인간 가족과 연결시키고, 마침내 천국에
가서 축복받는 영혼이 되게 하려함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면,
헤스터는 희망보다도 불안이 앞서 초조했다.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큰
죄악이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죄과가 호전되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날마다 헤스터는 자라나는 아이의 성질을 불안한 마음으로
살펴보았고, 이 아이를 낳게 된 죄에 합당한 어떤 어둡고 격렬한 특징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하고 가습을 졸였다.
확실히 신체적으로는 아무런 결함이 없었다. 나무랄 데 없는 용모와, 활발한
성겨, 아직 제대로 단련되지도 않은 손발을 신기하리만큼 자유자재로 놀리는
모습 등을 보면 이 아이는 에덴 동산에 태어났다 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을
듯하였다. 인류의 첫 번째 양친인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뒤에도
낙원에 남아서 천사들과 어울려 논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아이에겐 완벽한 아름다움과 선천적인 품위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아무리
수수한 옷을 입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옷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펄이 촌스러운 옷을 몸에 걸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야기가 차차 진행되는 동안 알게 될 테지만 어머니는 아이에게 병적인 집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아이의 외출복을 위해 가능한한 비단 옷감을 샀고 디자인과
장식에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했다. 타고난 미모에다 이렇게 차려 입은 펄의
조그마한 모습은 너무나 눈부셔 어두컴컴한 오두막집 마루는 그야말로 환한
빛이 둥그렇게 비치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답게 기운차게 뛰어 놀아 찢어지고
더러워진 적갈색의 무명옷을 입었을 때도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기만 했다.
펄의 얼굴은 무한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한 아이 속에 이를테면 여러
명의 아이가 들어 있는 셈이었으니, 농가의 어린아이에게서만 볼 수 있는 들꽃
같은 가련함으로부터 어린 공주님에게 볼 수 있는 아담한 화려함에 이르기까지
아주 변화무쌍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정열적인 기질과 심오한 맛을 지니고 있었다. 만일 그러한 여러 가지
변화무쌍한 기질 중에 어느 하나라도 기운을 잃거나 빛이 바래거나 하면 이미
펄이 아닌 딴 존재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이런 외면적인 변화무쌍함은 내면적인 생명의 다양한 특성을 암시해 주는
것이었다. 또한 펄의 성질에는 그러한 다양성 뿐아니라 동시에 깊이가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기가 태어나 이 세상과의 결합이나 순응성은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헤스터의 두려움은 기우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이
아이에겐 규칙을 따르게 할 수가 없었다. 펄이 태어나므로 해서 이미 큰 율법이
깨어졌던 것이다. 그 결과 이 어린 아이의 자질은 아름답고 화려하긴 하나
도무지 질서가 없었다. 나름대로의 독특한 질서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변화와
조화의 구별을 지을 수 없는 것이었다. 헤스터가 이 아이의 성질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펄이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각각 정신계와 물질계에서
흡수하던 시개에 헤스터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생각해 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흥분 상태가 그대로 뱃 속의 아이의 정신 생활에 여러 가지 빛
그림자를 던지는 매개체가 되었던 것이다. 본디는 희고도 맑았던 것이 중간에
낀 매개체 때문에 진홍 색과 금빛, 이글거리는 듯한 광택, 검은 그림자, 게다가
더없이 강렬한 빛을 띠게 되었다. 특히 그 무렵의 헤스터의 정신적 갈들이
그대로 펄에게 전해진 것이다. 반항적이고 격렬한 기질, 그리고 마음속에
어둡게 자리잡고 있던 음울함과 낙담하는 태도까지 그대로 펄에게서
발견되었다. 지금은 아이들다운 모습으로 마침 햇살처럼 빛나고 있지만, 마침내
지상의 생활을 독자적으로 영휘할 날이 되면 휘몰아치는 선풍을 불러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
그 당시의 가정교육을 요즘보다 훨씬 엄격했다. 무서운 얼굴, 호된 꾸짖음,
성서의 권위가 명하는 대로 계속 가해지는 매질 등, 그런 것들은 다순히 실제로
저지른 잘못을 벌하는 것뿐 아니라 아리의 모든 미덕을 길러 주고 향상시키기
위한 소중한 정신 교육의 수단이기도 했다. 헤스터 또한 외동딸의 어머니로서
엄격한 태도를 취했다. 자신의 과실과 불행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므로 자기
손에 맡겨진 아이의 앞날에 대해서 일찌감치 친절하고도 실수 없는 선도자의
역할을 하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저히 헤스터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서운 얼굴을 지어 보이기도 하고, 상냥하게 달래
보기도 하였으나 도무지 효력이 없다는 것을 알자 헤스터는 마침내 두 손을
들었으며 아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물론
육체적으로 위협하거나 구속하는 동안은 효력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지성이나 정서에 바탕을 둔, 다른 교육 방법은 그때그때 펄의 기분에 따라
효과가 있기도 하고 효과가 없기도 했다. 펄이 아직 어렸을 때 헤스터는 이
아이의 독특한 표정-어머니가 아무리 타이르고 설득을 하고 애원을 해도 결국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하는 듯한-을 알아차렸다. 그 표정은 영특하면서 사나울
만큼 고집스럽고, 때로는 개망나니처럼 심술궂은 데도 있었으나 대체로 활기에
넘쳐 있었다. 헤스터는 도대체 펄이 사람의 자식이랄 수 있을까 하고 때때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오두막 마루 위에서 제멋대로 뛰어 놀다가
어느 틈에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짓고 달아나 버리는 정체 모를 요정처럼
생각되었다. 그런 독특한 표정이 침착성을 잃은 아이의 새까맣게 빛나는
눈동자에 떠오를 때는 어딘지 모르게 손이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마치 공중에 떠서 언제 왔다 언제 사라지는지도 모르는 아지랑이처럼
덧없는 모습이었다. 그럴 때면 헤스터는 자기도 모르게 달려가서 늘 도망치고만
있는 요정을 붙잡아 가슴에 꼬옥 끌어안고 힘차게 키스해 주고 싶은 충동이
베면 피가 나오는 인간이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에게 붙잡힌 펄은
명랑한 음악 소리와도 같은 웃음 소리를 냈으나, 전보다도 더 불안한 느끼믕
안겨 주기만 했다.
헤스터에게 펄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둘도 없이 귀중한 보물이었으나,
이 펄과 자기와의 사이에 가끔 까닭을 알 수 없는 이런 불안감이 스며드는 데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따금 서러움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리는 일도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그럴 때면 조그만 주먹을 불끈 쥐며 그 귀여운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갑자기 더 한층 높은 소리로 웃어
대기도 하며 인간의 슬픔을 느끼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그런 아이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혹은 또 슬픔에 몸부림치며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띄엄띄엄
눈물섞인 말로 털어 놓고, 눈물로써 자기에게도 인정이 있음을 증명하려는 듯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헤스터는 이런 변덕스러운 애저을 마음놓고 믿을
수가 없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애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이것저것 곰곰이 생각하고 있노라면 어머니는 요정을 불러 내기는
했지만 주문의 순서가 잘못되는 바람에 이 새롭고 불가사의한 존재를
제어시키는 주문을 찾아내지 못하게 된 사람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안심할 수 있을 때는 아이가 곤하게 잠들어 있을 때였다. 그때ㅏ은 펄을 완전히
붙잡은 것 같았으며, 조용하고 달콤하면서도 슬픈 행복의 몇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펄이 눈까풀 밑에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면서 깨어나기
전 잠깐 동안의 일이다!
늘 미소진 얼굴로 얼러 주던 어머니의 품을 떠나, 펄이 제법 남과 사귈만한
나이에 이른 것은 그야말로 누깜짝할 사이였다! 어쩌면 그렇게도 빨리
다가왔을까? 만일 떠들썩한 아이들 목소리에 섞여 새소리처럼 맑은 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장난에 몰두하고 있는 왁자지껄한 아이들 소리에서
귀여운 딸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헤스터 프린은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펄은 태어나면서부터
아이들 세계에서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악마의 핏줄이며, 죄를 상징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아이들의 동무가 될 자격이 없엇다. 이
아이에게서 무엇보다도 놀아운 것은 뛰어나 직관력이었다. 자신의 고독한
처지라든가, 사방에 침범할 수 없는 진을 둘러치고 있는 숙명, 즉 여느
아이들하고는 다른 처지가 지니고 있는 특이성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헤스터는 출옥한 이후로 남 앞에 나설 때 언제나 꼭 펄을 데리고 다녔다.
그녀가 거리를 걸을 땐 으레 펄도 함께였다. 처음에는 팔에 안겨 있었으나
마침내 소녀로 자라 어머니의 작은 동반자가 되었으며, 엄마의 집게손가락을 꼭
쥐고 헤스터가 한 발짝 걸으면 종종걸음으로 서너 걸음씩 걸어 쫓아가게
되었다. 펄의 눈에 띈 것은 풀이 우거진 길가나 집의 문지방 근처에서 청교도의
교육이 빚어낸 재미도 없는 놀이를 하고 있는 보스턴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교회놀이를 하거나, 퀘이커 교도를 매질하는 놀이를 하거나, 머리 가죽을 벗겨
내는 인디언 놀이, 또는 마술을 쓰는 흉내를 내며 놀고 있었다. 펄은 우두커니
구경만 할 뿐 함께 어울려 놀려고는 하지 않았으며 말을 붙여도 모르는 척했다.
때로 아이들이 그녀 주위를 뻉 둘러서거나 하면 몹시 화를 냈고, 돌을 집어
단지며 날카로운 고함 소리를 마구 질러 댔다. 그 고함 소리에 어머니는 몸을
떨었는데, 그 소리에는 마치 마녀가 뇌까리는 알 수 없는 저주의 말과 같은
음조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청교도의 아이들은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아량이 좁은
개구쟁이뿐이었다. 헤스터 모녀의 모습에 어딘가 색다르고 기분 나쁜,
보통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을 경멸하고 때로는 노골적인 말투로 함부로 놀려 대는 일도 흔히 있었다.
펄은 아이들의 그런 마음의 움직임을 아라차리자, 도저히 아이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무서운 증오심을 갖고 응대하는
것이었다. 이런 격렬한 울분의 폭발은 어머니가 볼 때 의미심장하게 여겨졌고
마음의 위로가 되기도 하였다. 적어도 그럴 때의 펄의 태도에는 늘 엄마를
애타게 하던 변덕스러움 대신 뭔가 착실한 기분이 넘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헤스터 자신 속에 도사리고 있던 악의 그림자가 반영되어
있음을 알고는 소름이 끼쳤다. 펄을 그 거센 증오와 격정을 전적으로 뺴앗길 수
없는 특권으로써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았다. 모녀는 인간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펄의 성질에 스며 있는 그 불안정한
요소는 사실 펄을 낳기 전부터 헤스터를 괴롭혀 왔던 것으로, 그 뒤로는 줄곧
모성애 특유의 부드러운 마음으로 달래 왔던 것이다.
집에 있을 때의 펄은 집 안파껭 여러 가지 놀이 상대가 있었으므로
심심하지는 않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활동하는 이 아이의 정신으로부터
넘쳐나오는 생생한 마력은 수많은 사물들과 서로 사귀게 하였는데, 그 모습은
마치 횃불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솟는 것과 흡사했다. 막대기라든가
넝마뭉치라든가 한 송이의 풀포기 등, 상상 외의 물건들이 펄의 마술에 걸리면
꼭두각시로 변하여, 아이의 마음속에 마련된 온갖 무대에서 전개되는 연극의
주인공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펄의 어린 목소리는 남녀노소할 것
없이 수많은 가공 인물을 상대로 대화를 나누었다. 바람에 불려 신음 소리를
내거나 침울한 소리를 내는 검고 장엄한 늙은 소나무가, 그 모습을 닮은
쳥교도의 장로역으로 등장한다. 몰골 사나운 뜰의 잡초들은 무자비하게
두들겨서 뿌리채 뽑아 버렸다. 청교도의 아이들이 때문이다. 이 아니가
열중해서 생각해 낸 수많은 형상과 그 풍부한 내용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것들은 아무런 연결성이 없으면서도 언제나 초자연적인 활동 상태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가 하면 마침내는 너무도 격렬하게 넘쳐나는 생기에 기진하여
까부라지고 만다. 그러면 또 다른 야성적인 힘을 지닌 양상이 그 뒤를 쫓는다.
그것은 변화무쌍한 북극광 같았다. 그것은 상상력의 움직임이라든가 성장해
가는 마음의 놀이라는 점에선 재주가 뛰어난 다른 아이들의 경우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는지도 모르나, 다만 펄은 동무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만들어 낸
가공 인물들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 잦았다는 점이 달랐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색다른 점은 이 아이가 자기 마음속이나 머릿속에 그려 낸 모든 것을
적대시했다는 사실이다. 결코 그들은 친구로 만들지 않았다. 용의 이빨(그리스
신화, 페니키아의 카트모스 왕자가 용의 이빨을 땅에 심었더니 거기에서
적병들이 나옴)을 심어 놓고 거기에서 적군이 뛰어나오면 그것을 향해 덤벼드는
식이었다. 이토록 어린 생명이 결국 언젠가는 부딪히고 말 적의에 찬
인간들과의 싸움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최후까지 버티어 나갈 힘을 기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면 누구나, 그 원인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에 깊은
슬픔이 새겨졌을지 넉넉히 짐작하리라.
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헤스터 프린은 손에 들고 있던 일감을 무릎 위에
떨어뜨리기 일쑤였고 아무리 억눌러도 솟아나는 괴로움이 말인지 신음소리인지
모를 울부짖음이 되어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이 아직도 저의 아버지시라면 대답해 주십시오,
저 아이는 도대테 무엇입니까?
이런 때의 펄은 어머니의 신음 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더 미묘한 방법을
통해 그녀의 쓰라린 고뇌를 알아차렸는지 그 생기있고 귀여운 얼굴을 어머니
쪽으로 돌려 요정 같은 그 영특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장난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의 태도에서 뺴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 색다른 것이 있다. 펄이
태어나 처음으로 그의 눈에 띈 것은 대체 부엇이었을까? 어머니의 미소였을까?
다른 아이라면 어머니의 미소에 답하여 작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떠올렸을
것이다. 펄의 눈에 띈 최초의 것은 헤스터의 가슴에 달린 주홍 글씨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요람 위로 몸을 굽혔을 때 그 어린것의 눈길은 주홍 글씨를 둘러싼
금색 수의 빛나는 광채에 멈췄다. 좀더 자라서는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려 하였다. 헤스터 프린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가슴의 불길한
표시를 잡아 떼려 했다. 펄의 단풍잎 같은 손이 무엇을 알기나 하듯 주홍
글씨에 와 닿는 데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그러자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어머니의 거동을 자기를 어르는 것으로 알았던지 펄은 엄마의 눈을
들여다보며 생긋 웃는 것이었다. 그 뒤로부터 헤스터는 아이가 잠든 때가
아니고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잠시도 아이를 평안한 마음으로
귀여워해 줄ㅇ 틈이 없었다. 여러 주일 동안 펄의 눈길이 한 번도 주홍 글씨에
집중되는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가는 일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또 마치
갑작스러운 죽음의 발작이 엄습하듯 뜻하지 않은 그녀의 눈길이 그 독특한
미소와 기묘한 표정을 띠며 엄습해 오는 것이었다.
언젠가 헤스터가 어머니들이 흔히 거러하듯이 아이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변덕쟁이 천사와 같은 표정이 아이의 눈동자에 떠오른 일이
있었다. 그 순간 펄의 귀여운 검은 눈에 조그맣게 비친 것은 헤스터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것은 악마처럼 음흉하게
웃고 있는 악의에 찬 얼굴이었다. 잘 아는 사람의 얼굴과 비슷한 듯했으나 그
사람은 악의는커녕 미소조차도 여간해서 짓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무튼
아이에게 옮아 온 악령이 그때 마침 장난삼아 얼굴을 내민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뒤 몇 번이고 헤스터는 같은 망상으로 괴로움을 겪었지만, 처음만큼
선명하지는 않았다.
펄이 혼자 뛰어다니며 놀 만큼 자랐을 때였다. 어느 여름날 오후, 펄은
들꽃을 두 손에 잔뜩 꺾어 들고 어머니 가슴을 향해 하나씩 던졌는데, 주홍
글씨에 명중할 때마다 작은 요정처럼 깡충깡충 뛰면서 좋아했다. 헤스터는
처음엔 두 손을 모아 가슴을 가리려고 했다. 그러나 자존심에서인지
체념에서인지, 아니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고통을 견디는 것도 회개의
하나라는 생각에서였던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지면서도 펄의 기승스러운 눈을
슬프게 들여다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들꽃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고,
날아오는 꽃송이는 거의 다 주홍 글씨를 맞혔다. 그때 이승에선 물론
저승에서도 도저히 그 약을 구할 도리가 없는 그런 상처가 어머니의 온 가슴을
할퀴었다. 드디어 탄환이 떨어지자 펄은 우두커니 선 채로 헤스터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의 심연 속에서 작은 악마의 웃는
얼굴이 내다보고 있었다. 정말로 내다보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그렇게 느꼈다.
펄, 넌 대체 누구냐?
어머니가 소리쳤다.
참 엄마도, 엄마의 펄이지 누구야?
아이는 대답했다.
그리고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그 근처를 팔짝팔짝 뛰어 돌아다녔는데 어린
요정같은 변덕스러운 몸짓은 금방이라도 굴뚝 위까지 뛰어오를 듯한 기세였다.
넌 정말 엄마의 아이냐?
헤스터는 물었다.
실없는 질문이 아니라, 그때만은 다른 생각 없이 정색을 하고 물어본
것이었다. 펄이 뛰어나게 총명했으므로 그녀로서는 펄이, 제가 태어나게 된
비밀을 다 알고서 드디어 어두운 본성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니까. 난 펄이란 말야!
아이는 여전히 익살맞은 몸짓을 되풀이했다.
넌 엄마의 딸이 아냐! 엄마의 펄이 아니란 말야!
반 농담삼아 어머니가 말했다. 헤스터는 고뇌에 차 있을 때도 가끔 농담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런데 넌 누구니? 누가 널 이세상으로
보냈지?
엄마가 가르쳐 줘! 아이는 정색을 하고 헤스터에게로 다가오더니 무릎위로
몸을 기대었다. 내가 누구인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보내셨어!
헤스터는 대답했다.
그러나 이러할 때의 망설임은 아이의 예리한 눈길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저
늘 하듯 장난삼아 한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악마의 재촉을
받아서인지 펄은 검지를 내밀어 주홍 글씨를 만졌다.
아냐! 펄은 똑똑히 말했다. 내게는 하늘의 아버지는 안 계셔!
입 다물지 못해, 펄! 그런 말을 하면 못 써! 어머니는 신음 소리를
억누르면서 말했다. 누구나 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이 세상으로 내려보내는
거야. 너의 엄마도 그렇고, 물론 너도 그래! 그렇지 않으면 넌 어디서 왔단
말이니? 정말 이상한 요물 같은 아이구나, 넌.
가르쳐 줘, 가르쳐 달란 말야! 펄은 졸라 댔지만, 이젠 아까처럼 정색으로
묻는 게 아니라 웃으면서 마루 위를 뛰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엄마가 말해
줘야지!
그러나 의혹의 어둠 속에 파묻힌 미로를 헤매고 있는 헤스터 자신은 그
물음에 대답할 능력이 없었다. 우스운 것도 아니고 두려운 것도 아닌,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이웃 사람들의 말이 생각났다. 펄의 아버지를 알려고 애쓰던
사람들은 이 아이의 기묘한 성질을 보고서 펄이라는 아이는 악마의 자식임에
틀림없다고 떠들어 댔던 것이다. 먼 중세때부터 말해지는 바로는 어머니의 조로
인하여 어떤 흉악한 목적을 위해 쓰여지는 악마의 자식들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루터조차도 적인 수도사들의 중상 모략에 따르면 같은 지옥 태생인
악귀의 대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안에도 그처럼
불길한 성품을 지닌 아이는 있는 법이고, 펄 하나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7.총독의 집 객실
어느 날 헤스터 프린은 벨링햄 총독의 저택으로 총독이 주문한, 가장자리에 수를 놓은 장갑을
전하러 갔다. 무슨 중대한 행사 때 착용할 것이었다. 그는 보통 선거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최고
지위에서 두어 계단 물러난 전 총독이었지만 식민지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명예와 권세를 지닌
인물이었다.
이 식민사회에서 이처럼 권력을 지고 활약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날 헤스터가 면회를 요청하게
된 것은 수 놓은 장갑을 전하는 일 말고도 좀더 중요한 용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고장의
원로들 사이에서 종교와 정치에 좀더 엄한 원칙을 세우기 위해 헤스터 프린으러부터 아이를
빼앗으려는 계획이 논의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밀했듯이 그들은 펄이 악마의
핏줄을 이어받았다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선량한 그리스도 교도다운 관심으로, 그 어머니의
영혼을 위해서 그녀의 앞길을 막고 있는 아이를 그녀에게서 떼어 놓아야 한다고 논의한 일은
무리는 아니었다. 또 한편 아이가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고, 언젠가는
구원될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면, 헤스터 프린보다도 훨씬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에게
맡기는 편이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였다. 이런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벨링햄 총독이 가장 적극적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요즘 세상 같으면
행정위원 정도의 재량에 맡겨질 이런 일이 공적인 일로써 논의되고 저명한 정치가까지 찬반
양론에 나선다는 것은 기묘하고 우습게 여져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때와 같이 모든 것이
단순하고 소박하던 시대에는 헤스터 모녀의 문제보다 공적인 흥미가 훨씬 적을 뿐 아니라
대수롭지 않은 여러 문제가 입법자의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고, 나라의 법령 속에 명시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대는 돼지 한 마리의 소유권을 둘러싼 논쟁이 식민지의
입법자들 사이에 어마어마한 대립을 불러일으켰을 뿐다러 입법 조직 자체에까지 중대한 개혁을
단행케 한 그런 시대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대였다.
그래서 헤스터 프린이 외딴 오두막을 나선 것인데, 근심으로 머리는 아팠으나 자신의 권리에는
확신이 있었으며, 한편으론 일반 대중과, 또 한편으론 자연의 정이 지지해 주는 고독한 여성과의
승부는 쌍방이 서로 5대 5의 승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펄은 어머니와
함께였다. 어머니 곁을 펄쩍펄쩍 뛰어다닐 만한 나이가 되어 아침부터 밤까지 뛰어다녔으므로
총독 저택까지의 거리쯤은 충분히 걸어다닐 수 있었다. 그래도 응석을 부리고 싶은 마음에서
곧잘 안아 달라고 조르는가 하면, 곧 또 내려 달라고 하고서는 헤스터를 앞질러 풀이 우거진
오솔길을 냅다 줄달음질치다가는 넘어지고 고꾸라지곤 했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펄의 빼어난
용모는 앞에서 말한 대로이다. 싱싱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혈색, 환한 살빛, 깊고도 강렬하게
빛나는 두 눈, 벌써부터 윤기가 흐르는 짙은 갈색 머리는 어른이 되면 새까만 색이 될 듯
하였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활기가 넘쳐 있어서 정열적인 순간에 예고 없이 낳은 사생아
같았다. 게다가 헤스터가 지은 아이의 옷 또한 그녀의 화려한 취향에 따라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특색있는 스타일에 금실로 아름답고 화려한 수를 놓은 빨간 비로드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얼굴빛이 나쁜 아이였다면 오히려 파리한 느낌을 주었을지도 모를 만큼 강렬한
색조가 펄의 아름다움에는 멋있게 어울려 마치 지금까지 지상에 나타난 일이 없는 불꽃덩어리
같았다.
그러나 옷차림뿐만 아니라 아이의 전체 모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은, 그 아이를 보는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달린 표시를 연상케 하는 점이었다. 그것은 형태를
달리한 주홍 글씨였으며, 생명을 지닌 주홍 글씨이기도 했다. 헤스터 또한 빨간 치욕의 표시가
뇌리에 꽉 박혀 무엇을 생각하든 그 형태로 뒤바뀌기라도 하는 듯이 그녀가 만든 아이의 옷은
모두 주홍 글씨를 연상케 하는 바가 있었다. 몇 시간이나 병적일 만큼 궁리한 끝에 애저의
대상과 죄업의 표시 사이에 어떤 유사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펄은 애정의
대상인 동시에 죄업의 표적이기도 했으므로 이 동일성이 있으므로 해서 헤스터도 제 자식의 모습
속에 주홍 글씨를 이렇게 훌륭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이 마을 구역 안으로 들어서자 청교도 아이들은 놀이를 멈추고 짓궂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저것 봐, 저기 주홍 글씨를 단 여자가 간다. 게다가 옆에 ㅜ띠러가고 있는 아이도 주홍
글씨하고 똑같지? 그렇지? 우리 가서 진흙이라도 던져 주자!
그러나 펄은 지기 싫어하는 아이였다. 얼굴을 찡그려 보이기도 하고, 두발을 쾅쾅 구르기도
하고, 작은 주먹을 흔들어 위협하는 몸짓을 하더니 갑자기 적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어 모두 쫓아
버렸다. 이렇게 상대방을 맹렬히 쫓아가는 모습은 어린아이들의 조를 벌하는 일을 직책으로 하는
아이들의 역신, 즉 성홍열같은 그러한 천벌을 가져다 주는, 날개도 채 안 난 천사와 같았다.
펄은 무시무시하게 고함을 질러 댔으므로, 도망치는 아이들의 마음을 공포에 떨게 했을 것이다.
승리를 거두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온 펄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뒤로는 별일 없이 벨링햄 총독의 저택에 이르렀다. 큰 목조 건물인 이 집은, 이런 구조의
집은 지금도 미국의 오래된 도시에는 그 견본이 남아 있지만, 지금은 이끼가 끼고 다 허물어져
가는데다 어두운 방안에서 일어났다 사라진 사건과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거나 잊혀진
수많은 슬프고 즐거운 사건 때문에 완전히 음산한 집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당시 이 집의
모습엔 신선한 맛이 있었고, 죽음이 한 번도 찾아든 적이 없는 생활의 산뜻함이 햇볕 잘 드는
창문을 통해 비쳐나오고 있었다. 참으로 즐거워 보이는 집이었다. 벽 전체에는 깨어진
유리조각이 많이 섞인 회를 발랐기 때문에 태양광선이 건물 정면을 비껴 쬐면 마치 한 움큼의
다이아몬드 가루를 잔뜩 뿌려 놓은 듯이 반짝였다. 그 광채로 이 집은 완미한 쳥교도의 노지배자
저택이라기보다는 알라딘 궁전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게다가 그 등시의 괴상한
취미에 맞추어 벽면에는 보기에도 신비할 만큼 기묘한 무늬와 도형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런
그림들은 백회가 마르기 전에 그려 넣은 것이었는데 단단히 굳어져 후세 사람들이 구경하며
찬사를 보내게 된 것이다.
펄은 이렇게 휘황찬란한 집을 보자 기쁜 듯이 깡충깡충 뛰며 저택 전체에 비치고 있는 햇빛을
몰래 떼어서 장난감으로 만들어 달라고 졸라 댔다.
안돼요, 펄! 하고 어머니는 타일렀다. 너는 네가 햇빛을 모아야 해. 엄마는 네게 줄 햇빛이
없어!
모녀가 다가선 현관은 아치형으로 되어 있었고, 그 양쪽에는 저택의 좁다란 탑이랄까,
튀어나온 부분이 마주 보고 있었으며, 어느 쪽에나 다 살창문이 달려 있었는데 필요에 따라
여닫을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덧문에 대어져 있었다. 현관에 달려 있는 철제 해머를 들어 문을
두드리자 총독의 시종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 사나이는 영국 태생의 자유민으로서 지금은 7년 기한의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자였다. 이
기간 동안은 주인의 사유물과 같아서 소나 의자처럼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 노예가 입고
있는 푸른 웃옷은 그 당새만이 아니라, 영국에서는 아주 예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귀족
문중에서 평상시에 하인들에게 입혔던 옷이다.
벨링햄 총독님은 계신가요?
헤스터는 물었다.
네, 계십니다.
시종은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신대륙에 온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처음보는 주홍 글끼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총독 각하꼐선 댁에 계십니다만, 목사님 두 분과 또 의사 선생님도 함께 계십니다. 지금 바로
만나 뵐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들어가야겠어요. 라고 말하는 헤스터 프린의 아주 단호한 태도와 가슴에 빛나는 주홍
글씨가, 헤스터를 이 나라의 귀부인이라고 여기게 했던지 시종은 막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서 헤스터와 펄은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벨링햄 총독의 저택은 건축자재의 질이라든가,
기후의 차이, 그리고 사교생활 등을 고려해, 조국 영국에 있는 상류층 저택처럼 설계되어
있었다. 그래서 현관 안 널찍한 객실은 천장도 높고 건물 안쪽까지 계속되어 있어 다른 모든
방과 직접 통할 수 있는 복도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이 널따란 방 한쪽에는 현관 양쪽에 움푹
들어가서 작은 방을 이루고 있는 두 탑의 창문으로부터 광선이 비쳐들고 있었고, 그 일부가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다른 쪽의 창은 흔히 옛 책에서나 볼수 있는 궁형 창이었는데 ,
거기로부터는 더 강한 광선이 들어오고 있었다. 방에는 푹신한 쿠션이 깔린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 쿠션 위에는 <<영국의 연대기>>같은 이절판 크기의 목직해 보이는 문헌들이 놓여
있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방문객들이 볼 수 있도록 방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 금박을 입힌
책을 놓아 두는 것과 같은 식이었다. 객실의 가구류는 등받이에 참나무꽃의 화환을 정성껏
조각한 몇 개의 묵직한 의자와, 같은 취향의 테이블이 하나 있을 뿐이었으나, 이것들은 모두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것이든가 그 이저의 물건으로써 총독의 본집으로부터 가져온 대대로
물려오는 유물들이었다. 테이블에는 백랍의 큰 맥주 잔이 놓여 있어는데, 헤스터나 펄이
들여다보았더라면 그 잔 바닥에서 조금 전에 마시고 난 맥주의 거품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벽에는 벨링햄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조상 대대의 초상화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가슴에
흉갑을 두른 무인도 있었고, 주름깃에 위엄을 떨치고 있는 무인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가
하나같이 옛날 초상화의 특징인 냉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초상들은 망령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속적인 향락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객실의 벽을 이루고 있는 참나무 널의 한가운데에는 갑옷 한 벌이 걸려 있었는데, 초상화에
나오는 선조의 유물이 아니라, 극히 최근에 만든 물건이었다. 벨링햄 총독이 뉴잉글랜드로
건너오던 해에 런던의 숙련된 무구사가 만든 것이었다. 강철로 만든 투구.흉갑.후갑.경갑, 그
밑에 늘어진 장갑 한 켤레와 칼 한 자루-이 모든 거이 다 그러했지만, 특별히 투구와 흉갑은
광택이 날 정도로 잘 손질되어 있어 마룻바닥이 온통 번쩍이고 있었다. 이 눈부실 만큼 빛나는
갑옷은 한낱 장식품으로 놓아 둔 것이 아니라, 총독 자신이 엄숙한 열병식이나 연병자에서 여러
차례 입기도 하였으며, 피쿼드 전쟁에서는 이 갑옷을 입고 연대의 선두에 서서 활약한 일도
있었다. 법률가로 교육을 받았고, 베이컨, 코프, 노이, 핀치 들을 허물업싱 벗할 수 있던
총독이었으나, 이 새로운 나라의 긴박한 사태는 그를 정치가이면서 동시에 군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펄은 빛나는 이 저택의 정면을 보았을 때 못지않게 번쩍이는 갑옷을 보고 몹시 기뻐했는데,
잠시 뒤에는 거울같이 닦은 흉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펄이 외쳤다.
엄마, 엄마가 여기 비쳐요. 자, 이리 와 봐요!
헤스터는 아이를 즐겁게 해 줄 작정으로 하라는 대로 해 보였다. 그러자 그 볼록거울에 비친
주홍 글씨가 묘하게 크게 과장되어 나타나서 그녀의 외모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부분처럼
보임을 알게 됐다. 그래서 헤스터의 모습은 주홍 글씨 뒤에 가려져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펄은 또 투구에 비친 그 비슷한 영상을 손가락질하면서 웃고 있었는데, 그 작은 얼굴에 자주
떠오르는 영리한, 요정 같은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그 심술궂은 미소 역시 아주 그럴 듯하게
흉갑 거울에 비쳤으므로 헤스터 프린은 그게 자기 자식의 모습이라기보다 퍼의 모습을 닮으려고
애쓰는 작은 악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온 펄! 하고 헤스터는 아이를 그곳으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했다. 저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하자. 꽃이 피어 있을지도 몰라. 숲에서 보는 것보다 더 고운 꽃들이 말야.
마침내 펄은 객실 반대쪽에 있는 궁형 창 쪽으로 달려가더니 정우너의 경치를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짧게 깎은 잔디가 양탄자처럼 깔려 있었다. 그 양쪽으로 절반쯤 심은 채 손질이 안 된,
관목이 늘어선 산책길이 나 있었는데, 정원을 꾸미는데 영국식 취미는 아예 살릴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 저택 주인은 흙이 단단해서 식물이 자랄 것 같지 않은 이곳 대서양 쪽에서는
그것은 도저히 무리라고 단념한 모양이었다. 그대신 양배추가 보란 듯이 자라고 있었으며,
저만큼에 뿌리를 내린 호박이 벽면 가까이 덩굴을 뻗어 객실 창문 바로 아래에 커다란 호박을
하나 매달고 있었다. 이 황금빛의 호박이야말로 뉴잉글랜드의 토질이 줄 수 있는 가장 푸짐한
장식품이란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대륙에 처음으로 건너온 블랙스턴 목사가
심은 나무의 후예로 보이는 장미 덩굴과 사과나무 몇 그루도 보였다. 블랙스턴 목사란
반신화적인 인물로서, 미국 초기 연대기 등을 보면 늘 황소 드에 올라타고 다녔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펄은 장미 덩굴을 보더니 빨간 장미꽃을 꺾어 달라고 졸라 대며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조용히 해요, 펄! 어머니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울지 마, 펄! 정원에 사람 소리가 나잖아.
총독님이 계신단 말야! 다른 분들도 함께!
그때 산책길 저쪽으로부터 몇 명의 나자들이 저택을 향하여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펄은
어머니의 달래는 말은 아랑곳없이 악을 쓰며 울어 대다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쳤다.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아이의 변덕스러운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8.어린 마녀와 목사
헐렁한 상의에 가벼운 모자를 쓴 벨링햄 총독은 앞장서서 집터를 안내하며 집의 개조 계획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임스 왕조풍의 구식 옷이기는 했지만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주름깃이 반백이 된 턱수염을 둘러싸고 있어 큰 쟁반 위에 놓인 세례 요한의 목을 연상케 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세월의 서릿발을 맞은 것 같은 아주 완고하고 엄격한 그의 인상은,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 주위에 잡아 두려고 한, 세속적인 즐거움을 위한 갖가지 설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근엄하고 충실한 우리의 선조들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쉽게 잡을 수 있는
안락이나, 풍요를 거부하는 것이 양심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믿는다면 그건 큰 잘못이다.
이와 같은 신조는 지금 벨링햄 총독의 어깨 너머로, 흩날리는 눈발처럼 흰 턱수염을 나부끼고
있는 존 윌슨 노목사도 그런 설료는 한 적이 없었다. 이 흰 턱수염의 주인공은 그때 배나무와
복숭아나무가 뉴잉글랜드의 풍토에서도 자랄 수 있을지 모르며, 자색포도도 또한 햇볕 잘 드는
정원 앞담장에서라면 무성하게 자랄 수 있을 거라는 의견을 말하는 중이었다. 노목사는 영국
교회의 풍족한 품에서 자랐으므로 모든 쾌적하고 좋은 것에 대해서는 확고한 취미를 지니고
있었다. 설교단 위에 섰을 때나, 헤스터 프린이 저지른 것 같은 죄를 대중 앞에서 비나하거나 할
때는 매우 엄격해 보였지만, 사생활에서는 온정이 넘쳐 흐르는 관대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 무렵의 목사들 가운데서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애정을 사람들로부터 받고 있었다.
총독과 윌슨 목사의 뒤에는 다 사람의 손님이 뒤따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독자들도 기억하는,
헤스터 프린의 치욕적인 장면이 벌어졌을 때 과히 내키지 않는 역할을 맡았던 아더 딤스데일
목사였고, 그와 나란히 걷고 있는 사람은 요 이삼 년 동안 줄곧 보스턴에서 살고 있는 의술에
뛰어난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었다. 그는 젊은 목사의 주치의인 동시에 친구이기도 했다. 젊은
목사는 교회 관계의 일이나 자신의 의무에 너무 희생적인 봉사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최근에
와서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는 소문이었다.
손님들 앞에 서서 계단을 하나 둘 딛고 올라온 총독이 객실의 커다란 창문을 양옆으로 활짝
열어젖히자 정면으로 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나 헤스터 프린은 커튼 그늘에 가리어 잘
보이지 않았다.
이게 누구지? 벨링햄 총독은 눈앞에 있는 아이의 새빨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솔직히
말해서 이 같은 모습은 나의 화려했던 청춘 시절 이후 처음 보는 거시야! 궁정 가면무도회에
참가하는 것을 다시없는 영광으로 생각했던 옛날 제임스 왕 시절에는 축제 때가 되면 이런 어린
요정 같은 것들이 많아서 우리는 그 애들을 축연경 아이라고 불렀었지. 그런데 어떻게 이런
손님이 우리 객실엘 들어왔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착한 윌슨 목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요 빨간 깃털을 단 새는 무슨
새일까요? 멋있게 채색된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와 마룻바닥에 금색과 진홍색의 그림자가 비쳤을
때 이와 똑같은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영국에서 있었던 일이죠. 그런데
너의 이름은? 넌 그리소도 교도의 아이냐? 교리 문답은 아느냐? 아니면 천주교의 유물과 함꼐
메리 잉글랜드에 남겨 두고 온 장난꾸러지 요정의 친구란 말이냐?
난, 우리 엄마 딸이에요. 주홍 색 요정이 대답했다. 내 이름은 펄이고요!
펄이라고? 펄이 아니라 루비겠지, 그렇지 않으면 코럴인가? 아니 그 색깔로 보면 아무래도
빨간 장미라고 해야겠군! 그렇게 말한 늙은 목사가 손으로 펄의 볼을 만지려고 하자 아이는
살짝 피해 버렸다.
그런데 네 엄마는 어디 있지? 아, 여기 계시군. 목사는 벨링햄 총독 쪽을 보며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이 애기 지금껏 우리가 의논했던 문제의 아이입니다. 그리고 저기 불행한
어머니 헤스터 프린도 와 있군요!
불행한 어머니라고? 총독은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런 애 어머니라면 당연히 주홍
색의 여인 이고 바빌론 여인의 좋은 표본이라 해도 좋을거요! 어쨌든 저 여자는 마침 좋은 때 와
줬군. 곧 그 문제를 의논하기로 합시다.
객실로 들어온 벨링햄 총독을 뒤따라 나머지 세 사람도 들어왔다.
헤스터 프린! 총독은 엄한 시선으로 주홍 글씨의 여인을 보며 말했다. 요즘 그대에 대해
말이 많았소이다. 요점인즉, 저 아이 속에 든 불멸의 영혼을 속세의 구렁텅이에 빠져 타락할
대로 타락한 그대에게 맡겨 둬도 과연 우리 당국자가 양심껏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느냐는
문제였소. 이 아이 어머니로서 그대의 생각을 듣고 싶소! 그대 곁을 떠나서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엄격한 교육에 의해 하늘과 땅의 진리를 배우는 것이 이 애의 현세와 내세의 행복을 위해 보다
나은 길이라고 생각지 않소? 이 점에 대하여 그대는 이 아이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소?
헤스터 프린은 주홍 글씨를 손가락질 하며 대답했다.
저는 이 글씨에서 배운 것을 펄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뭐라고, 그건 수치의 표시가 아니오! 총독이 엄격하게 말했다. 우리가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하는 것은 그 글씨가 나타내는 오점 때문이오.
말씀은 그렇습니다만. 안색은 창백했지만, 어머니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 표시가
저에게 가르쳐 준 것은-매일,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나 자신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이 아이에게는 좀더 슬기롭고 좀더 좋은 아이가 될 수 있는 교훈입니다.
신중히 생각한 뒤에 이 일을 처리합시다. 벨링햄이 말했다. 윌슨, 이 아이를 좀 시험해
보십시오. 이 나이 또래에 알맞은 그리스도 교도로서의 교육이 되어 있는지 어떤지를 말입니다.
늙은 목사는 안락의자에 앉더니 펄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 이외의
사람이 손대 본 적이 없는 이 아이는 창문으로 뛰어나가 계단 있는 데까지 도망쳐 버렸다.
화려한 빛깔의 깃털을 단 열대 지방의 들새가 창공을 향하여 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윌슨 목사는
펄의 이 돌연한 행동에 적이 당황했다. 그는 평소에 인자한 할아버지 같아서 아이들이 퍽 잘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이를 계속 시험해 보려 하였다.
펄! 그는 엄숙한 말투로 물었다. 말 잘 들으면 진짜 펄(진주)을 가질 수 있어. 너는 누가
만들었지? 대답해 봐라.
펄은 자기를 만든 것이 누구라는 것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엇다. 신앙이 돈독한 가정의
딸이었던 헤스터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아이에게 들려주고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열심히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줄곧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펄이 생후 3년
동안에 배운 것은 정말 대단한 야이어서 뉴잉글랜드 신앙 입문서나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집의
제1문쯤은 비록 그 유명한 책의 겉모양조차도 몰랐지만 쉽게 통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아이들은 다소 심술궂은 구석이 있게 마련이고, 펄은 열 배나 더 심술궂었기 때문에 입을 꽉
다물어 버리거나 뚱딴지 같은 말을 지껄였다. 펄은 아주 기분나쁜 듯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대답하기를 거절하다가 자기는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감옥문 옆에 핀 찔레꽃 덤불에서
어머니가 주워 왔노라고 말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떠오른 것은 펄이 서 있는 총독댁의
창문 밖에 빨간 장미가 피어 있었고, 오는 도중 감옥 앞에서 찔레꽃 덤불을 본 것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로저 칠링워드 노인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젊은 목사의 귀에다 뭐라고 속삭였다. 헤스터
프린은 이 의사를 쳐다보자, 자기 운명이 어떻게 변할는지 모를는 긴박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달라진 노인의 얼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지내던 때에 비하면
너무도 흉한 얼굴이었다. 침울한 안색은 더욱 어두워 보였고, 몸은 전보다 더 불구가 된 것
같았다. 한순간 시선이 마주쳤지만, 헤스터는 다시 눈앞에 벌어진 사태에 주의를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야단났군! 펄의 대답을 듣고 어이가 없어진 총독이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는 세 살이나 되었다는데 누가 자기를 만들었는지도 모르다니! 자기의
영혼이라든가 현세에서의 타락이라든가 내세의 운명 등에 대해서도 역시 모르리라는 것은 뻔한
노릇이오! 어떻습니까, 여러분. 더 이상 시험해 볼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헤스터는 펄을 붙잡더니 두 팔로 꽉 끌어안으며 몹시 사나운 기세로 청교도의 늙은 총독을
쏘아보았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외로운 처지로 오직 하나의 보물인 딸애만을 보람으로
여기고 살아 온 헤스터로서는 온 세상 사람들이 덤빈다 해도,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는
권리였고, 죽어도 이것만은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하느님이 이 아이를 내게 주셨습니다! 헤스터는 외쳤다. 당신들이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그대신 하느님이 아 아이를 주신 것입니다. 이 아이는 나의 행복입니다! 나의
가책이기도 합니다! 또 펄은 내게 벌을 주기도 합니다! 보지 못하십니까? 이 아이는 주홍
글씨입니다만, 사라을 받기만 하는 주홍 글씨이기에 그만큼 나의 죄를 벌 주는 힘이 백만배나 더
큰 것입니다!
가엾은 여자군. 인정 많은 늙은 목사의 말이었다. 이 아이는 잘 돌봐질 것이오. 그대
이상으로.
하느님이 이 아이를 제게 맡겨 주셨습니다. 헤스터 프린은 되풀이했으나 그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이 아이를 내줄 순 없어요!
이렇세 말한 그녀는 발작이라도 하듯이 젊은 목사 딤스데일 씨 쪽을 돌아다 보았다.
저를 위해 말씀 좀 해 주세요! 헤스터는 외쳤다. 당신은 제 목사님이셨고 제 영혼을
책임지셨던 분이니까, 여기 계신 분들보다는 저를 더 잘 아실 거 아녜요. 이 아이만은 빼앗길 수
없습니다! 저를 좀 변호해 주세요! 당신은 제 마음을 알아 주실 거예요. 이분들에게는 없는
동정심을 지니고 계시니까요. 제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어머니의 권리가 어떠한 것인지
당신은 알고 계실 겁니다! 부탁입니다! 이 아이를 빼앗길 순 없습니다! 부탁입니다!
이 격하고 절박한 호소는 그녀가 금방이라도 미쳐 날뛰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자아냈다. 이
말에 젊은 목사는 곧 앞으로 나섰는데, 얼굴은 창백히지고 특히 그의 신경질적인 기질이 흥분할
때마다 하는 버릇대로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다. 목사는 헤스터가 군중 앞에서 욕을 당할 때
소개됐던 것보다 훨씬 더 초췌하고 수척해 보였다. 건강이 쇠약해진 탓인지, 아니면 다른 까닭이
있는 탓인지는 모르지만 크고 검은 그의 눈 깊숙한 곳에는 무한한 괴로음이 서려 있었다.
이 여인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목사의 음성은 부드럽고 떨리는 듯 했으나, 넓은 방
안이 쩌렁쩌렁 울리어 속이 텅 빈 갑옷이 공명할 정도였다. 헤스터의 말에도, 또 그렇게 말하는
심정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그녀에게 이 아이를 주신 것이고, 보기에 괴팍스럽게
생각되는 이 아니의 성질이나 요구를 본능적으로 이해할 힘도 아울러 주어졌을 테니 어느 누구도
이 여자만큼 이 아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이 모녀 사리에는 뭔가 머리가
수그러질 만한 신성한 데가 있지 않습니까?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딤스데일 목사님? 총독이 목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목사는 말을 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창조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조의 행위를 가볍게 보시고, 더러운 육욕과 신성한 애정과의
구별을 무시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아비와 죄와 어미의 수치 사이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그 어머니의 마음을 감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손을 통해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고,
그리서 어머니 역시 저렇게 열심히, 또 저렇게까지 애타는 마음으로 이 아이를 보호할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축복, 그것도 이 여자의 생애에 있어서 단 하나의 축복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게다기 그 어머니 자신도 말한 바와 같이, 그녀의 죄를 벌하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이 아이는 그 어머니가 생각지도 않은 수간에 불현 듯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며 괴로움
종에도 간혹 기쁨을 맛보는 때에 새삼스레 느끼는 가책이며, 늘 되살아나는 번민입니다! 그
흔적은 이 아이의 옷차림에 잘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여인의 가슴에 낙인찍힌 저 붉은 표적을
뚜렷이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참으로 좋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윌슨 목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 여인이 자기
아이를 협잡꾼으로 만들까 봐 걱정하고 있었죠.
아니, 결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딤스데일 목사는 말을 이었다. 저 아이의 존재를 통해
하느님이 엄숙한 기적을 이룩했다는 사실을 이 여인이 깨닫고 있다는 것을 저는 보증합니다.
게다가 이 여인이 믿고 있는 것은 보다 암담한 구러에 빠뜨리려고 꾀는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하느님께서 저 아이를 내리선 것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불멸의 영혼을 지닌 아이, 영원한 기쁨과 또한 슬픔을 맛보게 하는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는 일은 이 가엾은 죄많은 여인을 위해 좋은 일입니다. 그녀는 이 아이를 통해
정의를 체험할 것이며, 자신의 타락을 되새겨 명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녀가 이 아이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창조주의 신성한 약속에 의해 아이 또한 어머니를 천국으로
인도하리라는 것을 이 여인은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점으로 보아 죄많은 어머니 쪽이 죄많은
아버지보다도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니 헤스터 프린을 위해서나 이 불쌍한 아이를
위해서나 이 불쌍한 아이를 위해서나 하느님의 섭리가 처리하신 대로 두 사람을 놔 두도록
합시다!
굉장히 열성적으로 말씀하시는구요.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이 젊은 동료의 말씀에는 중대한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윌슨 목사가 덧붙였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벨링햄 총독님? 불쌍한 여인을 위하여 그가 훌륭히 변호해 주지
않았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총독은 대답했다. 이 문제는 일단 보류하기로 합시다. 이 여인이 더 이상
추문을 퍼뜨리지 않는다는 조건부라면 하여간 선생이나 딤스데일 목사의 손을 빌든가 해서 이
아이를 위해 규칙대로의 교리문답 시험을 치르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적당한 시기가 되면 이
아이를 학교에도 보내고 교회의 모임에도 나갈 수 있도록 책임자들에게 일러둬야 할 것
같습니다.
젊은 목사는 말을 마치자 사람들 앞에서 몇 발짝 물러서서 두터운 커튼자락 뒤에 반쯤 얼굴을
가린 채 서 있었다. 햇빛에 비치어 마룻바닥에 던져진 그의 그림자는 애소의 흥분 때문에 아직
떨리고 있었다. 사납고 변덕스러운 요정 펄은 살며시 목사 옆으로 다가가더니 자기의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아 자기 볼에다 갖다 댔다. 아주 상냥하고 자연스러운 애정의 표시였다. 이를 본
어머니는 저 아이가 정말 펄이란 말인가 하고 이상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헤스터도 이 아이의
마음에 애저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격한 감정으로 나타내기가 일쑤여서,
이렇게 부드럽고 훈훈하게 표현된 적은 지금까지 거의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목사는 오랫동안
그가 동경해 오던 여인의 애정을 제외한다면, 이 어린아이의 애정만큼 감미로운 것은 없었다.
그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엊고 잠시 주저하다가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러나 펄의
그러한 부드럽고 다정한 기분은 오해 계속되지 않았다. 아이는 웃으면서 객실 저편으로
뛰어갔다. 그 모양이 어찌나 가볍고 경쾌한지, 늙은 윌슨 목사는 저 아이의 말끝이 대체
마룻바닥에 닿은 것인가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저 장난꾸러기는 아무리 봐도 요술을 알고 있는 것 같군요. 하고 그는 딤스데일 목사에게
말했다. 저 아이라면 마귀 할멈의 빗자루가 없이도 하늘을 날 수 있겠어요.
참, 이상한 아인데!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말참견을 했다. 어머니를 닮은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아이의 성격을 분석해서 아버지를 추측해 보는 것은 학자의 연구
범위를 벗어난 일일까요?
그렇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런 문제를 세상의 학문에 의뢰한다는 것은 죄가 되는 일입니다.
윌슨 목사가 말했다. 단식하고 기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로 저절로
밝혀지지 않는 이상, 비밀은 비밀대로 놓아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모든 기독교인은 아버지
없는 이 불쌍한 아이에게 어버이와 같은 친절은 베풀 의무가 있습니다.
일이 잘 해결되었으므로 헤스터 프린은 펄을 데리고 그 저택을 나왔다. 둘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을 때 어떤 방의 격자 창문이 열리더니 벨링햄 총독의 심술궂은 누이동생-사오 년 뒤에 마녀로
처형된-히빈스 부인의 얼굴이 햇빛 속으로 불쑥 나타났다.
이것 보라고! 하고 부르는 부인의 불길한 모습은 이 산뜻한 저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
주는 듯했다. 당신들 오늘 밤에 나하고 같이 가지 않겠소? 숲 속에서 재미있는 모임이 있는데
아름다운 헤스터 프린도 같이 갈 것이라고 마왕에게 약속까지 했는데.
나 대신 미안하다고 말이나 전해 주세요. 헤스텉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집에서 펄을 돌봐 줘야 합니다. 이 아이를 빼앗겼다면 당신을 따라 숲 속에 들어가 마왕님의
장부에 내 피로 서명을 하겠소만!
머잖아 꼭 데리고 갈 테야!
마녀는 얼굴을 찡그리고 창문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 히빈스 부인과 헤스터 프린과의
대면이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있었던 일이라면, 이것만으로도 타락한 어머니와 또
그로부터 생겨난 아이와의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된다는 젊은 목사의 주장이 옳았음이 입증되는
셈이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펄은 어머니를 악마의 손길로부터 구해 주었던 것이다.
9.의 사
로저 칠링워드라는 이름 뒤에는 본인이 다시는 남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심한 본명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독자들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헤스터 프린이 수치를 당하던 광경을 목격하던
군중들 틈에 여행이 지친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따뜻하고 안락한 가정을 꿈꾸며 위험한
황야에서 빠져나왔지만, 그리던 그 여인이 죄악의 본보기로 뭇사람들 앞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얘기도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아내로서의 그녀의 면목은 숱한 사람들의 발
밑에 여지없이 짓밟혔다. 불명예의 광장에 서 있던 이 여인을 둘러싸고 그녀에 대한 욕설이
빗발치듯했다. 이 소식을 친척들이나 순결하던 시절의 친구들이 듣는다면 그들도 이 불명에를
함께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불명예는 헤스터와의 관계가 친밀하고 순수한
사람일수록, 그가 받는 불명예의 정도는 크기 마련일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과거에 이 타락한
여자와 관계가 친밀하고 순수했던 사람이라도 이런 달갑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겠다고 구태여
밝히고 나설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 사나이는 여자와 함께 수치스러운 자리에 서지 않기로
결심했다. 헤스터 프린 말고는 아무도 자신의 비밀을 모를 것이며, 그녀의 입을 열게 할
자물쇠와 열쇠는 그가 쥐고 있었으므로 인명부에서 자기의 이름을 말살시켜 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바닷속에 매장되었으리라는 그에 관한 소문대로, 옛 인간 관계나 이해 관계는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완전히 증발시키기로 그는 작정하였다. 이 목적이 일단 달성되기만 하면,
그에 따른 새로운 이해관계와 목적이 곧 모리를 쳐들게 될 것이다. 하기야 그건 죄라고까지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음흉한 짓임엔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능력을 쏟을 만큼 어떤 중요한
목적임이 확실했다.
어쨌든 이 결심을 실행하기 위해 그는 로저 칠링워드라는 이름을 가지고 비상한 학문과 지식을
지닌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로써 청교도 거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했던 연구
덕분에 그는 상당히 폭넓은 의학 지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의사라고 자칭하였고, 이곳
사람들로부터 진심으로 환영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식민지에서 내과와 외과 기술에 통달한
의사는 여간해서 만나기 힘들었다. 아마도 의사들은 다른 이민들처럼 대서양 횡단을 결심하게 한
종교적 정열이 없었던 모양이다. 인체의 연구를 거듭하는 그들의 미묘한 고도의 능력이 물질
본위로 되어 버리고, 생명의 전부를 내포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복잡하고 섬세한 인테조직의
신비에 압도되어, 인간 존재에 대한 정신적인 관찰 능력을 상실케 되는 모양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보스턴 시민의 건강은 교회 집사 겸 약제사인 한 노인이 감독 아래 놓여 있었는데, 이
사나이의 돈독한 신앙심과 훌륭한 태도는 의사의 면허장 이상으로 그 자격을 보증하는 증명서가
되고 있었다. 또 이 도시에 하나밖에 없는 외과 의사는 이따금 외과 의사로서의 훌륭한 기술을
발휘하곤 했지만, 평상시에는 면도질을 하는 것이 그의 본업이었다. 이런한 의업계에 나타난
로저 칠링워드는 실로 혜성과 같은 존재였다. 고대 의학에 능통한 숙련의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그는 어떤 경우에든 다종다양한 성분을 골고루 섞어서 너무도 정성껏 조제했기 때문에
불로장생의 약을 만드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될 정도였다. 더구나 그는 인이언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야생 목초의 약효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이 의사가 자신의 환자들에게 서슴없이 말한
바에 의하면, 무지몽매한 야만인에겐 하늘의 혜택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흔해빠진 약초는
수많은 명의들이 몇 백 년이나 걸려 정제한 유럽의 약제나 다름없이 믿을 만하다는 것이었다.
이 기묘한 학자는 적어도 외면적인 종교생활에 관한 한 흠잡을 데가 없었다. 보스터에 닿은
바로 뒤부터 그는 딤스데일 목사를 그이 정신적인 지도자로 모셨다. 이 젊은 종교가는 아지고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학자로서의 명성이 남아 있었다. 열렬한 숭배자들은 그를 하느님이 보낸
사도로 여겼으며, 그가 요절하지만 않는다면 과거의 교부들이 초기 기독교 교회를 위해 이룩한
것 만큼 위대한 업적을 아직 기반이 약한 뉴잉글랜드 교회를 위해 수행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즈음 딤스데일 목사의 건강 상태는 눈에 띄게 쇠약해져 갔다. 평소에 목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젊은 목사의 볼이 창백해지는 것은 그가 지나체게 연구에 몰두하고
교구의 일을 너무 양심적으로 처리하는 데다 특히 세 속의 추악함으로 인해 정신적 등불이
흐려지거나 꺼지지 않도록 자주 단식이라든가 철야 기도를 실행하기 따문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딤스데일 목사가 죽게 된다면, 그것은 이 세상이 그의 발을 디딜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본인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자기가 지상에서 조그만 사명조차 이행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목사가
쇠약해지는 원인에 대해서는 이처럼 의견이 구구했지만, 그의 건강이 점차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의 몸은 몹시 수척했다. 목소리는 아직도 쟁쟁하고
부드러웠으마 거기엔 쇠퇴에 대한 음울한 예언 같은 것이 있었다. 사소한 일에도 잘 놀랐으며,
뭔가 뜻밖의 일이 생기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고통스러운 듯 가슴에 손을 얹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젊은 목사의 건강 상태가 이같이 악화되어 여명 같은 그 생명의 빛이 경각에 달렸다고 여겨질
무렵 로저 칠링워드가 이 도시에 나타났던 것이다. 대체 그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아났는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이 사나이의 등장은 신비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기적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제 유능한 의사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여느 사람의 눈에는 아무
값어치도 없어 보이는 약초나 들꽃을 수집하거나, 숲 속에서 나무뿌리를 캐거나, 나뭇가지를
꺽어 그 속에 숨어 있는 효험을 추출해 내는 비상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상의 업적이 신의 조화에 가깝다고 한 케넬름 다그비 같은 유명한 사람과도 서신
연락이며 교제가 있엇다는 말을 들은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학계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이 왜 이런 황량한 땅으로 왔을까? 이런한 의문에 대해 답변이라도 하듯 점차로
퍼져가던 소문은 하느님이 훌륭한 기적을 내리시어 독일의 어느 대학으로부터 저 유명한
의학박사를 고스란히 공중으로 옮겨다 딤스데일 목사의 서재 문 앞에 내겨놓았다는 것이었다.
사실 하느님은 소위 기적적 중개라는 방법에 의하지 않고서도 능히 그 목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가장 현명한 사람들까지도 로저 칠링워드가 적절한 시기에 등장한 사실에는 하느님의
섭리를 결부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의사가 젊은 목사에게 강한 관심을 나타낸 일로 더 뚜렷한 뒷받침이 되었다.
그는 교구민의 한 사람으로서 목사에게 다가갔고, 이 소극적이고 다감한 경격의 소유자로부터
친구로서의 호의와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의사는 목사의 건강 상태에 몹시 놀랐으나,
열심히 치료하고 빨리 서두르면 회복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딤스데일 목사의 교구에 속해 있는
장로나 집다, 또는 부인네들,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미혼 여성 등 누구나가 의사의 솜씨를
시험할 겸 한 번 약을 써보라고 귀찮을 정도로 권유했다. 그러면 딤스데일 목사는 조용하게 그
간청을 무리치고 내게는 약 같은 게 필요 없소. 하고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매주 안식일이 올 때마다 그의 볼은 칭백하게 여위어 가고 음성은 전보다도 더 떨리게
되었다. 가슴에다 손을 얹는 일이 이젠 우연한 몸짓이라기보다 하나의 습관으로 변해 버렸는데,
어째서 목사는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목사의 직분에 싫증이 났단 말인가? 죽기를 원한단 말인가?
보스턴의 선배 목사나 교회 집사들은 이러한 의문을 딤스데일 목사에게 진지한 태도로 물었고,
하느님이 베푸시는 이렇게 뚜렷한 구원의 손길을 거절한다는 것은 죄라고까지 하였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목사는 마침내 의사에게 의논해 보겠노라고 그들에게 약속했다.
이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로저 칠링워드 노인에게 의사로서의 조언을 구하면서 딤스데일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나의 일이나, 슬픔이나, 죄의 고통이 곧 내 죽음과 더불어 끝난다
해도 나는 만족할 것입니다. 당신의 의술을 굳이 시험해 보지 않아도 세속적인 것은 묘에 묻힐
것이고, 정신적인 것은 나와 함께 내세에 가게 될 테니까요.
네. 로저 칠링워드는 일부러 그러는지 아니면 천성이 그런지 그의 언동은 언제나 조용했다.
젊은 목사시니까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죠. 젊은 분은 뿌리를 깊게 박지 않았기 때문에
인생을 손쉽게 단념합니다! 이 지상을 하느님과 함께 걷고 게신 성자는 기쁘게 이 세상을 떠나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황금의 보도를 하느님과 함께 걷고 싶을 테지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가슴에 손을 얹은 젊은 목사의 이마에는 고통의 빛이
얼른 스쳐 지나갔다. 설령 내가 그러한 곳에서 산책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는
차라리 이 세상에서 땀 흘리고 일하는 것에 만족할 것입니다.
훌륭한 분들은 언제나 그렇게 자기 자신을 과소 평가하는 법입니다. 하고 의사는 말했다.
이렇게 하여 의문의 인물 로저 칠링워드 노인은 딤스데일 목사의 주치의가 되었다. 의사는
병의 증세에 흥미를 가졌을 뿐 아니라, 환자의 성격이나 특성도 연구해 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으므로 연령적으로 차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두사람은 차차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목사의 건강을 위해, 또한 의사가 병에 쓸 약초를 채집하기 위해, 두 사람은 해안이나
숲 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곤 했다. 때로는 파도가 속삭이며 부서지는 곳을, 때로는 나뭇가지
끝에서 바람이 엄숙한 찬미가를 부르는 곳을, 그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으며, 남의
이목을 피한 서로의 면학의 장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 과학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에
목사가 매력을 느낀 것은 그의 범상치 않게 깊고 넓은 지적 교양뿐만 아니라, 동료 목사
사이에선 찾아볼 수 없는 폭넓은 사상의 자유로움을 상대방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러한 특징을 의사에게서 발견했을 때 거의 충격적인 만큼 놀라움을 느꼈다. 딤스데일은 진정한
목사요, 진정한 죵교가였고,신을 섬기는 마음이 열렬하고, 신앙의 길을 꿋꿋하게 걸으며, 시일이
가면 갈수록, 그 길을 보다 깊이 파고드는 그런 정신의 소유자였다. 어떠한 사회 상태에서도
그는 소위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지닐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기를 지탱해 줌과 아울러 무쇠틀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신앙의 무게를 신변에 느끼고 있는 것이 그의 평화를 위해선 절대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상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과는 또 다른 지성의
소유자는 통하여 이 우주를 바라보는 즐거움은, 두서 없는 기쁨일망정 때때로 목사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갑자기 창문이 활짝 열리고, 지금까지 램프 불빛이나, 잘 들지 않는 광선 아래서,
책에서 풍겨 나오는 곰팡내에 섞이어 생명을 소모시키고만 있던 좁고 숨이 막힐 것 같은 방
안으로 자유로운 공기가 한꺼번에 흘러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공기는 너무도
신선하고 싸늘하여 오랫동안 그 속에서 편히 숨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목사는 교회에서
정통이라고 공인하는 범위 내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로저 칠링워드는 환자를 세밀히 관찰했다. 일상적으로 친숙해진 사상이 영역
내에서 낯익은 길을 걷고 있을 때뿐 아니라, 색다른 정신 풍토 속에 던져졌을 때의 환자의
상태도 유심히 관찰하였다. 어쩌면 후자의 경우, 그의 내부에 숨어 있는 뭔가 새로운 것이 그의
성격 표면에 떠오를지도 몰랐다. 환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우선 그 사람에 대해 상세히
알아야 한다고 로저 칠링워드는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인간의 감성과 지성은 그 육신의 병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아더 딤스데일의 경우, 감수성과 상상력이 몹시 예민하고 또한
강렬했기 때문에, 그의 육신의 병은 그 감수성과 상상력 속에 원인이 있는 듯하였다. 그래서
로저 칠링워드는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서 보물을 찾는 사람처럼 환자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어
그의 사상을 음미하고, 기억을 들여다보고, 모든 것을 조심스러운 손으로 더듬었다. 이와 같은
탐색을 행할 기회와 자유가 있고, 더구나 그것을 규명해 낼 만한 기술을 몸에 지닌 탐구자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비밀이란 거의 없을 것이다. 깊은 비밀을 간작하고 있는 사람은 이런 의사와
각별히 친숙해지는 것을 피하는 것이 현명하다. 가령 두뇌가 명석하고,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 갖추어져 있는 의사가 있다고 하자. 눈에 거슬리는 독선이나 불쾌하리만큼 눈에 띄는
버릇을 갖고 있지 않으며, 환자의 마음과 자기 마음을 완전히 일치시켜 환자가 머릿속으로
생각했었다고 기억하는 정도의 일조차 부지불식간에 털어놓게 할 수 있는 선천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또 무슨 말을 들어도 놀라거나, 동정의 말을 하기보다는 침묵을 지키며 숨소리나 짤막한
응수로써 모든 것을 알아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음밀한 천성에
덧붙여 공인된 의사로서 역할이 가지는 이점까지 있다고 하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비밀로
얼어붙은 환자의 마음도 투명한 물처럼 흘러내려 모든 비밀을 백일하에 쏟아 놓게 되고 만다.
로저 칠링워드는 앞에서 말한 특징을 모두라고는 할 수 없어도 거의 대부분 갖춘 의사였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두 뛰어난 정신 사이에는 일종의 친말한 관계가
생겨났다. 그래서 이 두 지성은 인간의 사상과 학문의 모든 영역에 걸쳐 서로 교류하였다.
그들은 공적인 문제에 관해 논의하였고,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나 의사가 틀림없이 있으리라고 믿고 있는 비밀이 목사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와
상대방의 귀에 들어가는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의사는 딤스데일 목사가 자신의 병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다는 의혹에 사로잡혔다. 참으로 이상한 침묵이 아닌가!
그러나 얼마 뒤, 로저 칠링워드의 제안에 따라 딤스데일 목사 친구들의 주선으로 이 두사람은
한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생명의 조류가 금세 밀려 들었다 밀려가는 것 같은 목사의 건강
상태를 염려와 우정 어린 의사의 눈길이 늘 지켜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바람직한 일이
이루어지자 마을 전체가 기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젊은 목사의 건강뿐 아니라 기회 있을
때마다, 권유한 대로 그의 영혼을 음모하는 꽃 같은 처녀들 중에서 한 사람 골라 아내로
삼는다면 그것은 더욱 바람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아더 딤스데일을 설득하여도 이
일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전혀 실현될 가망이 없었다. 목사는 마치 독신 생활이 교회의 계율인 양
이런 권유는 모조리 거절해 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딤스데일 목사는 맛없는 남의 밥을 얻어
먹고, 남의 집 난롯가에서 몸을 녹이길 원하는 사람에게 따르게 마련인 춥고 고생스러운 생활을
평생 자진해서 참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학식과 경험이 풍부하고 마음씨가
인자한 노의사는 젊은 목사에 대해 부성애와 경애의 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으므로, 목사
곁에서 늘 돌보아 줄 인물로서는 가장 적임자로 생각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기거하게 된 새 집은 사회적으로 매우 명망있고 신앙심도 깊은 어떤 미앙인의
집이었는데, 그 집은 현재 유서깊은 킹스 교회 건물이 서 있는 대지를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 쪽에는 본디 아이작 존슨의 땅이었던 묘지가 있어, 목사와 의사의 직업을 가진 두
사람에게는 진지한 사색에 잠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었다. 딤스데일 목사에게는
어머니와도 같은 훌륭한 미망인의 배려로 양지바른 바깥 방이 주어졌는데, 그 방엔 낮에도
햇볕을 가릴 수 있게끔 두터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벽에는 고블랭 지조라고 하는 벽걸이가
걸려 있었는데, 그 진위는 그만두고라도 그 벽걸이에는 다윗과 밧세바와 예언자 나단에 대한
성성 이야기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들은 아직 색이 바래지 않았고 아름다운 여인
밧세바의 모습은 예언자 나단 못지 않게 훌륭하였다. 창백한 안색의 목사는 이 방에다 자신의
장서들을 쌓아 올렸다 양피지로 장정한 초기 교회 교부들의 2절판 책들이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저술가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도 자주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방의 반대편 방에는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서재 겸 실험실을 차렸다. 현대
과학자들이 생각하기엔 몹시 빈약한 것이었지만, 증류 장치 하나와 약제 및 화학약품을 조제하는
기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연금술에 능한 그는 이런 기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훌륭한 환경에서 각 방에 지라잡은 두 학자는 허물없이 상대방의 방을 드나들면서
호기심에 찬 눈으로 서로의 일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딤스데일 목사의 통찰력이 예리한 친구들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모든 일은 젊은 목사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손길이 이루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말해 둬야 할 것은, 최근에 보스턴 시민의 일부에서는 딤스데일 목사와 기묘한 의사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별개의 의견을 갖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무식한 대중이 자기
눈으로만 사물을 보려 할 경우 대개는 잘못 보기 쉬운 법이다. 그러나 이 역시 대중이 곧잘
하듯, 그들이 아주 따뜻한 마음의 직관에서 판단을 내릴 때에는 참으로 심오하고 그릇됨 없는
결론을 얻게 되며, 그것은 신기에 의해 명백해진 진리와 같은 성격을 띠는 일이 흔히 있는
법이다.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로저 칠링워드에 대한 일만 하더라도 그들 대중은 나름대로의
견해를 심중에 품고 있었으나 진지하게 반박할 만한 사실과 논리로 뒷받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30년쯤 전 토머스 오보베리 경의 살해 사건이 일어났던 무렵 런던에서
살았었다는 한 수직공 노인의 증언에 따르면, 지금은 생각이 잘 안나지만 어쨌든 이 노의사가
다른 이름으로, 오보베리 사건에 관련한 유명한 마술사 포먼 박사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다고 한다. 또 이 의사가 인디언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마술로 기적적인 치료를 한다고
알려진 야만인 기도사에게 힘입어 의학상의 지식을 길렀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또 많은
사람들은 로저 칠링워드의 얼굴은 그가 보스턴에 살면서부터, 특히 딤스데일 목사와 동거하게 된
이후 부터 놀랄 만큼 변모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조용하고 명상적이어서 그야말로 학자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젠엔 없던 추악한 표정이 얼굴에 엿보이며, 그것은 보면 볼수록
더욱 뚜렷하게 눈에 띈다는 것이었다. 또 일편의 무지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의사의 실험실
불은 땅 속에서 가져온, 지옥의 연료를 때는 거이어서, 의사의 얼굴이 연기에 그을려
검뿌예진다는 것이다.
요컨대, 어는 시대의 기독교 세계든 특히 신성한 인물들에게 흔히 있는 일로써, 로저 칠링워드
노인의 모습으로 변신한 악마나 악마의 사자가 아더 딤스데일 목사에게 따라다닌다는 소문이
세상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악마의 사자는 하느님의 허락을 얻어 잠시 동안 그와 친분을
맺고 그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 그를 파멸시키려 한다는 것이있다. 그러나 분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승리가 어느 쪽으로 기울 것인가를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목사가 이 악마와의
싸움에서 틀림없이 이겨 결국은 영광에 휩싸인 신성한 모습으로 거듭나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리하기까지 겪어야 할 목사의 치명적인 고뇌를 생각하면 슬프기도 했다.
아아! 가엾은 목사의 눈 속에 깃든 공포의 검은 그림자는 그 싸움이 치열한 것임을 말해 주는
듯했고, 승리의 행방도 또한 모호함을 암시해 주는 듯했다.
10.의사와 환자
로저 칠링워드 노인은 평생을 통해 비록 그 성질이 온화하고 따뜻하지는 않았으나 친절하였고,
세상과의 교섭에 있어서도 항상 순수하고 정직한 남자였다. 그런 그가 탐색에 착수한 것이다.
본인도 믿고 있듯이 오직 진실만을 탐구해 가는 그의 태도는 재판관처럼 엄정하고 중립적인
성실함을 지니고 있어 마치 인간적인 정열이나 자기에게 가해진 피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공간에 그린 선이나 도형같은 기하학의 문제를 다루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차차 깊이
파고들어감에 따라 조용하면서도 맹렬한 어떤 필연성이 무서운 매력을 가지고 노인을 사로잡고
말았기 때문에, 그는 그것이 명하는 바를 달성할 때까지는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노인은 노다지를 찾는 탐광자처럼 이 불쌍한 목사의 가슴속을 파헤쳤다. 시체의 가슴에 달린
보석을 찾으려고 무덤을 파헤쳤으나 다만 썩어가는 주검만을 발견할 뿐인 묘지에서 일하는
인부의 모습과 흡사했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노인이 찾고 있던 것이 그와 같은
것이었다면 아아, 그 영혼이야말로 불쌍하다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이따금 의사의 눈이 광채를 발하는 때가 있었다. 그 파랗고 불길하게 타오르는 눈빛은
용광로에서 반사하는 불빛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번연히 그림 속에 나오는 산중턱에 있는
무서운 문으로부터 터져나와 순례자들의 얼굴을 비친 그 기분나쯘 불빛과도 비슷했다. 이 음험한
광부가 파헤치고 있던 땅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는 어떤 조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때면 의사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남이 보기에는 순수하고 정신적인 인간으로 보이지만, 아버지나 어머니 중 어느 한
사람으로부터 강렬한 동물적 기질을 물려 받았어. 이에 대해 좀더 알아보기로 하자!
이처럼 의사는 목사의 어두운 내면을 오랫동안 탐색했지만, 그가 파헤친 수많은 귀중한 자료는
인류의 행복에 대한 높은 이상이나 따뜻한 인간에, 순수한 감정과 타고난 신앙심 등 사색과
연구에 의해 강화되고 계시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값비싼 황금도
이 추적자에게는 한낱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실망하고 돌아서서 또 다른 방향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주의를 살피면서 살그머니 더듬어 갔다. 마치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보물을 훔치려고 주인이 잠들어 있는, 아니 어쩌면 완전히 깨어 있는지도 모르는
방으로 몰래 들어가는 도둑과 같은 꼴이었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마루청이 삐걱대고 가까이 가서는 안 될 곳까지 다가섰기 때문에 그의 그림자가 상대방의 얼굴
위를 가리기도 했다. 다시 말하자면 과민한 신경의 소유자인 딤스데일 목사는 정신적 직관에
의해, 막연하나마 무언가 자기의 평화를 깨뜨리는 적의를 품은 존재가 무리하게 자기 쪽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저 칠링워드도 직관적인 지각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목사가 깜짝 놀란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면 의사는 사려깊고 동정심은 많으나 결코
간섭하는 일 없는 친구와 같이 친절하고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태연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마음이 병든 사람에게 흔히 나타나듯이 늘 모든 인간에 대해 의심을 품는 일만 없었더라면,
딤스데일 목사는 이 의사의 성격을 좀더 완전히 간파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무도
친구로서 믿지 않았기에 막상 실제로 적이 나타났을 떄도 그것이 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목사는 여전히 늙은 의사와 친교를 계속하였고, 매일처럼 서재로 그르
불러들이기도 하고 상대방의 실험실으 방문하여, 잡초가 효력 있는 약으로 변하는 과정을
구경하며 기분전환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목사는 묘지가 내다보이는 활짝 열린 창문턱에 팔꿈치를 댄 채 손으로 이마를 짚은
자세로 로저 칠링워드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인은 지저분한 풀다발을 조사하고 있었다.
선생님. 목사는 그 풀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근래에는 사람이고 물건이고 정면으로 보지
않는 것이 목사의 버릇처럼 되어 버렸다. 어디서 이렇게 검고 축 늘어진 약초를
수집하셨습니까?
바로 저 묘지에서 뜯었습니다. 의사는 일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나도 처음 보는
풀입니다. 비석도, 죽은 자에 대한 기록도, 아무것도 없는 무덤 위에 나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흉측한 잡초만이 죽은 자를 기년하듯 나 있더군요. 그 죽은 자의 심장에서
돋아난 것일 겝니다. 살아 잇는 동안 고백했더라면 좋았을 어떤 무서운 비밀을 숨긴 채 묻혔기
때문에 그 비밀이 이런 모양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르죠.
그 사람도 고백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였지만, 할 수 없었던 게죠. 하고 목사는 말했다.
왜 그럴까요? 의사가 반문했다. 왜 고백을 하지 않았을까요? 모든 죄의 고백을 요구하는
자연의 힘은 아주 대단한 것이어서, 보다시피 파묻힌 사람의 심장에서 검은 잡초가 돋아 나와,
말없이 죽은 고인의 죄를 나타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건 선생님의 공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사는 대답했다. 내 생각이 잘못되었는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묻힌 비밀을 말이나 상징 등으로 폭로하는 힘은 하느님의 자비심밖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마음은 이 세상 속에 숨겨진 모든 것이 폭로되는
날까지 계속 비밀을 지키려고 고집할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거나 해석한 바로는, 설령 그날이
되어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이 폭로되더라도 그것이 인과응보의 결과라고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아무래도 천박한 생각이죠. 이렇게 비밀이 밝혀지는 것은 이 세상의
어두운 문제가 명백해지는 것을 보고자 기다리던 지적인 사람들에게 지적인 만족을 주기 위하여
마련된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리 잘못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 문제를 완전무결하게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일 것입니다. 지금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비참한 비밀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인간은 그 최후의 심판의 날에는 주저하기는커녕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고 그 비밀을 고백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세상에서 그 비밀을 털어 놓지 못할까요? 로저 칠링워드는 목사를 너지시
곁눈질하며 물었다. 왜 죄인은 그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좀더 빨리 자기 것으로 하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물리칠 수 없는 고통의 발작으로 괴로운 듯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실은 많은 불쌍한 영혼등이 임종의 자리에서뿐 아니라, 원기왕성하고
명성을 떨치고 있는 시절에도 내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고백하고 난 다음 죄지은
그들이 얼마나 안도의 표정을 짓는지 모릅니다! 자기 자신의 부패한 숨결에 질식할 것 같다가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게 된 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가령 살인을
범한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도 마음속에 시체를 묻어 두기 보다 당장에 밖으로 내던져 우주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겠죠!
그러나 비밀을 가슴속에 그대로 묻어 두려는 사람도 있지요. 의사는 조용하게 말했다.
하긴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딤스데일 목사는 대답했다. 그러나 좀더 명백한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타고난 성질 때문에 침묵을 지키는지도 모릅니다. 또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죄는 비록 졌지만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사람들
앞에서 추악하고 흉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선행을 할
수도 없게 되고, 보다 현실적인 봉사를 함으로써 과거의 악행을 속죄할 수도 없게 되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마치 흰 눈처럼 순결한
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마음속에는 좀처럼 지울 수 없는 죄악이 시커멓게 얼룩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저 칠링워드의 말은 여느때와 달리 힘차게
들렸다. 그는 집게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며 말을 계속했다. 그런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치욕을 마주 대하는 일이 두려운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열성이라든가-그런 깨끗한 충동과, 한 번 범한 죄가 문을 열고 불러들인 나쁜 종자를 번식시키는
사악한 충동이 그자들의 마음속에 공존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자들이 아무리 하느님을 찬양하고 싶다 하더라도 그 더러운 손을 천국 쪽으로 쳐들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동포에게 봉사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우선 겸손한 태도로 죄를
회개함으로써, 양심의 힘과 존재를 명백하게 하는 일부터 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참으로
현명하고 경건한 당신이지만, 설마 기만과 허위가 하느님의 진리보다도 더 훌륭하고, 또한
그것이 하느님의 영광이나 인간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나에게 믿게 하려는 것은
아니겠죠? 그런 자들은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젊은 목사는 무슨 당치 않은 얘기를 가로막듯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목사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자기 성격을 자극하는 그런 화제를 잘 회피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나의 쇠약해진 몸이 선생의 친절한 간호로 부슨 효험이라도
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로저 칠링워드가 채 대답도 하기 전에 어린아이의 맑고 자지러지는 듯한 웃음 소리가 이웃
묘지 근처에서 들려 왔다. 열어젖힌 창문으로 -여름철이 되었다-목사가 무심코 내다보니 헤스터
프린과 딸 펄이 묘지를 가로지른 오솔길을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펄은 눈부신 태양처럼
아름다웠으나 그 심술궂으면서도 쾌활한 기분에 넘쳐 있었다. 이런 때의 펄은 동정이라든가
인간적인 접촉이 있는 세계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마침 그 아이는
무엄하게도 이 무덤에서 저 무덤으로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위인의
무덤으로 보이는 넓고 평평한 가문이 박혀 있는 묘석이 있는 곳에 이르자, 그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좀더 얌전하게 굴라고 타이르는 어머니의 말에 펄은 춤을 멈추었지만, 그대신 그 무덤
옆에 있는 커다란 우방초에서 뾰적한 가시를 따 모으기 시작했다. 손에 잔뜩 모아지자 펄은
그것을 어머니의 가슴에 붙어 있는 주홍 글씨의 선을 따라 붙였는데 그 가시는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헤스터도 굳이 떼려고 하지 않았다.
로저 칠링워드는 창가로 와서 침울한 웃음을 띠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법률이나, 권위에 대한 존경심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인간의 관습이나 의견에 대한
관심도 저 아이의 성질에는 하나도 섞여 있는 거이 없단 말이야. 의사는 혼잣말도 아니고
상대방에게 하는 말도 아닌 투로 말했다. 요전에는 저애가 스프링레인의 가축용 물통이 있는
곳에서 총독 각하에게 물을 끼얹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아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 애도
애정이라는 걸 지녔을까요? 저 애 속에 뭔가 뚜렷한 존재 원칙이라도 갖추어져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있는 것은 법을 파괴한 뒤에 오는 자유뿐입니다. 딤스데일 목사의
대답은 조용했다. 이 문제를 줄곧 생각해 온 것 같은 태도였다. 선행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펄은 두 사람의 말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심술궂긴 했으나, 명랑함과 총명함이 가득한
미소를 띠고 창문 쪽을 올려다보더니 딤스데일 목사를 향해 가시를 하나 집어 던졌다. 예민한
목사는 깜짝 놀라 날아오는 가시를 피했다. 이렇게 당황하는 목사의 모습을 보자 펄은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헤스터 프린도 무의식중에 눈을 들었다. 이 네 명의
남녀노소는 잠자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아이가 큰 소리로 웃으면서 소리쳤다.
도망가야 해, 엄마! 도망가지 않으면 저기 있는 악마에게 붙잡혀! 벌써 목사님은 붙잡혔단
말이야. 도망가, 엄마. 붙잡힌단 말이야! 하지만 난 문제없어!
이렇게 말하면서 펄은 어머니의 손을 잡아 끌고 갔다. 무덤 사이를 뛰고 춤추며 깡총거리면서
가는 모습은 거기 묻혀 있는 과거의 세대와는 아무런 공통성이나 유사성을 가지지 않은 아이
같았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색다른 요소로 만들어진 아이여서 제멋대로 살아가도록 놓아 둘
수밖에 없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칙일 수밖에 없으며, 그녀의 괴팍한 성격도
죄악으로 간주되지 않는 그런 아이 같았다.
잠시 뒤에 로저 칠링워드가 말했다.
저기 가는 저 여자는 그 죄과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방금 전 목사님께서 큰
고통이라고 말씀하신 그런 숨은 죄악의 비밀은 전혀 없을 겝니다. 헤스터 프린의 불행은 가슴에
주홍 글씨를 달고 있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가벼워졌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믿습니다. 하고 목사는 대답했다. 그러나 저 여자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는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여자의 얼굴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의 빛이 엿보였으니까요.
그러나 죄를 숨기고 괴로워하는 인간보다는 저 불쌍한 헤스터처럼 그 고통을 나타내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 생각됩니다.
또 잠시 말이 끊어졌다. 의사는 수집해 온 약초를 다시 조사하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까 당신의 건강에 대한 진단을 물으셨지요.
마침내 의사가 입을 열었다.
네. 하고 목사는 대답했다. 꼭 알고 싶습니다. 망설이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죽든 살든 상관없습니다.
그럼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의사는 여전히 약초를 뒤적이는 반면, 유심히 목사를 살피며
말했다. 목사님 병은 좀 이상한 병입니다. 적어도 내가 관찰한 증세로 본다면, 그 병 자체나
또는 겉으로 봐서는 대단한 것이 못됩니다. 벌써 여러 달 동안 목사님을 모시고 매일 진찰하며
증세를 주의하여 보살펴 왔습니다. 목사님이 중병환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경험 많고 조심성 많은
의사라면 불치의 병이라고 포기할 만큼 중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뭐라고 할까요?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병입니다.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군요.
창백한 목사는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그럼 더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의사는 말을 이었다. 솔직히 한 가지 묻겠습니다. 혹 실레가
된다면 용서를 바랍니다. 친구로서-하느님의 뜻을 받아 목사님의 생명과 건강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묻겠는데, 목사님은 병환의 모든 중세를 숨기기 않고 나에게 말해 주신 겁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목사는 말했다. 어린아이 장난도 아닌데 의사를 청해 놓고 병사를
청해 놓고 병 증세를 숨기다니요.
그럼 내게 모든 것을 다 말씀했다는 건가요? 로저 칠링워드는 강렬하고 지성이 집중된
번쩍이는 눈으로 목사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그렇다고 해 둡시다! 그러나 말입니다. 외면적인
증세를 말해 보았댔자 의사는 고쳐야 할 병의 중요한 증세를 반밖에 모르기 쉽습니다. 육체의
병이 병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사실 정신적 병의 한 증세에 불과한 경우도 있습니다.
내 말이 조금이라도 목사님의 비위에 그슬린다면 용서를 빌겠습니다. 목사님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누구보다도, 정신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육체가 그 정신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소위
몸과 마음이 혼연 일체가 되어 있는 분이십니다.
그 이상 물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는 이렇게 말하고 조금 당황하듯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선생은 영혼을 고치기 위한 약의 전문가는 아니니까요.
로저 칠링워드도 일어났다. 작달막하고 보기 흉한 불구의 몸으로, 볼까지 창백해진 목사와
마주 서더니 상대방이 말을 가로막은 일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전과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정신에 어떤 병이 생기면 삽시간에 육체에 상응한 형태가 나타나는 겁니다.
육체의 병을 의사가 고쳐 주기를 바라신다면 그때는 우선 의사에게 영혼 속의 상처나 괴로움을
털어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로서는 손 쓸 도리가 없으니까요.
거절합니다, 당신에겐! 이 지상의 의사에게는 거절합니다! 딤스데일 목사는 격렬하게
외치며, 이글거리는 눈을 부릅뜨고 로저 칠링워드 노인을 노려보았다. 당신에게는 싫습니다!
만일 내 병이 영혼의 병이라면 나는 영혼을 고쳐 줄 단 한 분의 의사에게 몸을 맡기겠습니다!
고치든 죽이든 따르겠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이 문제에 참견을 하다니! 죄로
괴로워하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끼어들다니!
미친 듯한 기세로 목사는 방을 뛰쳐나갔다.
야릇한 미소를 띠고 목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로저 칠링워드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되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야. 아무것도 잘못된 일은 없어! 곧 화해하게 되겠지.
그러니까 저 사람은 격정에 사로잡히면 본심을 털어놓는 모양이로군! 그렇다면 다른 일에도
똑같은 격정적인 행동을 했을 게 아닌가! 저 경건한 목사인 체하는 딤스데일 선생도 마음의
열정에 사로잡혀 한때 부당한 짓을 저지른 것일게다.
두 사람 사이에 전과 같은 우정을 되살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젊은 목사는 몇
시간 혼자 있는 동안에 자신이 그토록 몰골 사납게 흥분한 것은 신경이 어떻게 된 탓인지,
의사의 말에는 그토록 흥분시킬 만한 아무런 구실도 이유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의사로선
당연할 뿐 아니라 목사의 청에 의해 충고를 말했을 뿐인데, 그 친절한 노인을 그렇게 심하게
물리치다니 자신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후회를 하게 된 목사는 곧 의사에게 사과를
했고, 건강이 회복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오늘날까지 생명을 연장시켜 준 방법대로 치료를
계속해 주기를 부탁했다. 로저 칠링워드는 이를 쾌히 응낙했다. 그는 성심성의껏 돌보기는
했으나, 진찰이 끝나 환자 방을 나올 때는 늘 입가에 까닭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표정은
딤스데일 목사 앞에서는 볼 수 없었으나 의사가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확실히 눈에 띄게
나타났다.
참 이상한 병이군! 의사는 중얼거렸다. 좀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정신과 육체
사이에 기묘한 연결이 있어! 의학을 위해서도 이병은 철저히 규명해 봐야겠군!
앞서 말한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딤스데일 목사는 대낮에 의자에 앉은 채로 자기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 펴놓은 커다란 고딕 활자의 책은 문학 작품으로선
독자에게 잠을 오게 하는 그런 부류의 대작이었던 모양이다. 목사는 여느때에 늘 나뭇가지 위를
뛰어 다니는 작은 새처럼 가볍고 침착성이 없어 금방 놀라 도망칠 것 같은 선잠을 잤으므로
이처럼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정신이 전에 없이 자기 껍질
속에 깊숙이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별로 조심하는 일 없이 방으로
들으갔는데도 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곧장 환자 앞으로 가서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여태까지 의사에게도 보인 일이 없는 앞가슴의 옷을 풀어젖혀 버렸다.
이때 딤스데일 목사는 몸을 떨며 조금 움직였다.
의사는 잠시 멈칫하였으나 곧 방을 나갔다.
방문을 나서는 순간 로저 칠링워드의 표정은 놀라움과 기쁨으로 거칠게 일그러졌다. 그 미친
듯이 기뻐 날뛰는 모습은 눈과 입으로만 다 표현할 수 없다는 듯이 강렬하게, 그 흉측한 몸
전체로부터 터져나왔다. 힘껏 천장을 향하여 팔을 휘두르기도 하고, 마룻바닥을 발로 구르기도
하며 환희의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렇게 기쁨으로 날뛰는 순간에 로저 칠링워드 노인을 본 이가
있었다면, 고귀한 인간의 영혼이 천국에서 쫓겨나 지옥으로 끌려들어 갔을 때 악마가 어떠한
표정을 짓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악마의 광희와 다른 점은 의사의 광희 속에 놀라움과 호기심의 요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11.마음속
앞에서 말한 사건 이후 목사와 의사의 관계는 겉으로 보기엔 변함이 없었으나, 실은 그 성격이
전과 달라졌다. 로저 칠링워드의 지력은 뚜렷한 진로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가고자 계획했던 길은 아니었다. 아주 조용하고 온순한, 격정과는 인연이 먼 듯이 보이는 이
불행한 노인에게 지금까지 줄곧 잠재해 오던 악의가 바야흐로 활동을 시작해, 어쩌면 과거의
어느 누구도 원수에게 그런 앙갚음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렬한 복수를 생각게 하였다. 공포,
양심의 가책, 고뇌, 무익한 후회, 물리쳐도 되돌아오는 죄많은 생각들, 이 모든 것을 털어놓게
할 수 있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되는 것이 최상이 복수인 것이다. 무엇이나 불싸잏
여기고 용서해 주는 큰 마음을 지닌 세상으로부터도 감추어진 죄많은 슬픔을 냉혹하고 용서를
모르는 사나이 앞에 털어놓게 하는 것이다! 복수라는 부채가 이보다 더 적절하게 지불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고민을 그에게 주게 될 것이다!
이 계획은 목사의 소극적이고 민감한 태도 때문에 잘 지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로저
칠링워드는 하느님-복수자도 희생자도 다같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면서 벌해야만 할
때에 용서하시기도 하는 하느님-이 자신의 사악한 수단 대신에 내려 주신 이와같은 사태에 결코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하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계시가 천국에서 온 것이든 다른 어떤 세계에서 온 것이든 자신의 목적을 이행하는 데에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 계시의 도움으로 의사는 딤스데일 목사와의 모든 관계에 있어 목사의
외양뿐만 아니라, 영혼의 내부까지도 눈앞에 환히 드러나 그의 모든 움직임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이후부터 노인은 목사의 세계에 관찰자일 뿐 아니라, 그 세게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마음대로 목사를 조종할 수 있었다. 목사에게 심각한 고민을 주어 흥분시키고
싶으면, 희생자는 언제나 고문대 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고문대를 조종하는
손잡이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의사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목사를 공포에 떨게 만들고 싶으면, 마술사가 지팡이를 휘두르는 대로 나타나는 기분
나쁜 환영들처럼 죽음의 환영, 치욕의 환영 등 수많은 환영이 나타나 목사 주위에 떼지어
몰려들어 그의 가슴을 손가락질하는 것이었다!
비록 목사는 어떤 사악한 힘이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그리고 막연하게 느끼곤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은 완벽하리만큼 교묘한 수법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에 그것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노의사의 불구의 모습을 의심스럽게, 또 어떤 때는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본 것은 사실이다. 그 사람의 몸짓, 걸음걸이, 반백의 턱수염, 무관심한 듯한
사소한 거동, 심지어 걸치고 있는 의복의 모양까지도 목사의 눈에는 거슬려 보였다. 그것은
목사의 가슴속에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깊은 의사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증거였다. 이러한 불신과 혐오의 원인을 발견할 수 없었던 딤스데일 목사는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앓는 곳이 있으면 그 독소가 온 마음을 잠식하여 악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자신의 예감에 그 이외의 다른 원인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목사는
로저 칠링워드 노인에 대해 나쁜 감정을 뿌리뽑으려고 온 힘을 다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자신의 생활 원칙에 따라서 계속 노인과 교제를 하였으므로 그는 이 노인으로
하여금 그의 목적을 달성케 하는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셈이었다. 고독하고 불쌍한
인간이며, 희생자보다도 더 비참한 복수자인 로저 칠링워드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목표에
전력하고 있었다.
이처럼 육신은 병에 시달리고, 영혼은 암담한 고뇌에 들볶여 흉학한 적의간계에
농락당하면서도 딤스데일 목사는 목사로서 빛나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아니, 그 명성의 태반은
그 슬픔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타고난 재능과 정신적인 통찰력, 또 정서를 경험하고
전달하는 능력 등 그 모든 것은 그의 일상생활의 찌르는 듯한 고통으로 생겨난 초자연적인 활동
상태 속에 간직되어 있었다. 아직 그의 명셩은 오르막길에 있긴 했지만, 그의 명성 때문에 다른
명망 있는 성직자들의 평판은 완전히 빛을 잃었다. 그들 중에는 딤스데일 목사가 태어나기
전부터 성직과 관련된 심오한 학무의 습득에 오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이 젊은 목사보다 더욱
견실하고 해박한 학식을 지닌 학자도 있었다. 또 딤스데일 목사보다 굳건하고 예리한 정신과
무쇠나 대리석처럼 굳은 이해력을 지닌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와 같은 이해력에 교리를
적당히 배합하게 되면 상당히 훌륭하고 유능하긴 하나 뭐라 말할 수 없는 딱딱하고 틀에 박힌
부류의 목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또 책 속에 파묻혀 꾸준히 공부하고, 참을성 있게
사색하여 이룩한 재능과 천계와의 정신적인 교류로 단련된 진실로 영적이고 성자다운 목사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청렴한 생활로 말미암아 인간 세계의 옷을 걸친 채 천국으로 인도된다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성자의 모습이었다. 다만, 이들이 갖추지 못한 재능은 성령 강림절에
선택된 사도들에게 내려진 불의 혀뿐이었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마음의 언어로 전 인류 동포에게 말하는 힘을 뜻하는 것이었다. 다른 면에 있어서는
사도에 뒤지지 않는 목사들이었으나, 하느님이 그 역할에 대하여 내리신 증방의 표시로써 가장
희귀하고 최종의 것인 불의 혀 만은 갖추지 못하였던 것이다. 아마 그들로서는 이 지상의
동포들에게 가장 친숙하고 밀접한 언어나 비유로써, 최고의 진리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엇을 것이다. 진리를 말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그들이 늘 머물러 있는 고원한 세계로부터
어렴풋이 들려 올 뿐이었다.
그런 여러 가지 성격사의 특징으로 보아 딤스데일 목사는 이 마지막 부류에 속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죄악과 고뇌의 무거운 짐이 그를 가로막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이 신성의 산봉우리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대며 걸어야 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으며,
그것은 그를 가장 낮은 수준의 사람들이 있는 곳까지 끌어내렸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찬사들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대답했을 정도로 명묘한 자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무거운 짐 때문에 그는 죄를 범한 인류 형제들에 대해 참으로 친밀한 동정심이 우러나게
된 것이다. 그의 마음은 죄지은 형제들과 공명하여 떨렸으며, 죄지은 자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슬프고도 설득력이 풍부한 웅변을 통해 자기 자신의 고민을 무수한 사람들 가슴속에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제나 그의 설교는 설득력이 있었지만, 때로는 무서울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자신들을 감동시키틑 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젊은 목사야말로 성스러운
기적의 결과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리고 지혜와 힐책과 애정이 담긴 하느님의 말을 대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끔 되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목사가 밟는 땅조차도 신성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교회 처녀들은 그의 옆에 서면 안색이 창백해졌는데 종교적인 정열에 익숙한
그녀들은 자신의 흰 가슴속에 있는 정열을 신에 대한 사랑인 줄 알고 제단에 바칠 가장 적당한
제물로 생각하였다. 나이 많은 신자들은 딤스데일 목사의 허약한 몸을 보면 그가 먼저 천국에
가리라 믿었는지, 죽거든 뼈를 저 젊은 목사의 신성한 무덤 가까이 묻어 달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했다. 불쌍한 딤스데일 목사는 요즈음 자기무덤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는데, 저주받은 자가
묻히는 묘에도 과연 풀이 날까 하고 스스로 의문을 갖는 것이었다!
이 일반 대중이 그에게 바치는 존경이 목사에게 준 고뇌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컸다! 진리를
동경하고, 생명 속의 생명으로써 신성한 실체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모두 그림자와 같은
것이며, 일체의 무게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그 자신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실체가 있는 것인가? 혹은 그림자 중에서도 가장
희미한 그림자란 말인가? 그는 설교단 위에서 목청을 돋우어 자기의 본성을 고백하고 싶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검은 목사 옷을 몸에 걸치고 있는 나는,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에녹과 같이 신성하다고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나는, 내가 이 땅 위를 걸으면 그 발자취가 빛나서
뒤를 따르는 순례자들이 촉복받은 자들의 나라로 인도되리라고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나는,
여러분들의 자제에게 세례를 베풀고 여러분들의 친구들이 임종할 때 막 하직하고 온 세계로부터
희미하게 울려 오는 아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작별의 기도를 올린 일도 있는 나는,
여러분의 존경을 받고 있는 목사로서의 나는, 사실은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타락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하기 전에는 결코 내려오지 않으리라고 결심을 하고 설교단에 오른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헛기침을 하고, 길게 심호흡을 하고 이번 숨을 뿜어낼 때는 영혼의 어두운 비밀이
묻어나오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분명히 입 밖에 내어 말했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말을
했을까? 자기는 정말 비열한 사람일뿐더러 가장 비열한 사람 중에서도 더 비열한 작자이고,
극악인, 혐오의 존재, 상상할 수도 없는 악의 화신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하느님의 불 같은
노여움으로 이 더러운 육체가 그 자리에서 불타 버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보다 명백한 말이 또 있을까? 그러면 사람들은 충동적으로 일제히 의자를 차고 일어나
설교단을 더럽힌 자를 끌어내리려 해야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목사의 말을 다 듣고도 사람들은 점점 더 그를 존경할 뿐이었다. 목사의 자책하는
말 속에 얼마나 무서운 뜻이 내포되어 있는지 그들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이도 젊은데, 하느님 같은 분이다! 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지상의 성자이시다! 목사님은
자신의 순결한 영혼 속에서도 그런 죄악을 인정하는데 더구나 우리의 영혼 속에서는 얼마나
무서운 죄악을 발견하실까!
목사는 그 애매한 고백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죄지은 마음을
폭로함으로써 자신의 양심을 기만하려고 하였으나, 그로부터 위안은 조금도 얻지 못한 채 또
새로운 죄와 스스로 치욕을 인정하는 고통을 얻었을 뿐이었다. 그는 분명 진실을 말했건만
그럴싸한 거짓으로 바꾸어 놓은 셈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진실을 사랑하고
거짓을 미워했다. 그러기에 세사으이 무엇보다도 비참한 자기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목사는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그가 태어나고 자라나 교회의 훌륭한 계명보다도 타락한 옛
모마의 신앙과 합치하는 습벽을 몸에 지니게 되었다. 꼭 잠궈 놓은 딤스데일 목사의 비밀 장
속에는 피묻은 채찍이 있었다. 청교도이자 신교도인 목사는 때때로 이 채찍으로 자신의 어깨를
치며 쓰디쓴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웃음 때무에 더욱덕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곤 했다. 신앙심이
깊은 많은 청교도들과 마찬가지로 단식을 하는 것도 목사의 습관이었다.-그러나 다른 사람처럼
하늘의 묵시를 받는 매체가 되기 위해 몸을 깨끗이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고행으로써
무릎의 힘이 빠져나갈 때까지 행하는 엄격한 단식이었다. 또 목사는 거의 매일 밤 캄캄한 어둠
속이나 희미한 램프 불 밑에서 철야 기도를 올렸다. 때로는 강렬한 불빛 아래서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목사의
일과가 되었지만, 육체를 괴롭힐 수는 있었을 망정 정화할 수는 없었다. 장시간에 걸친 철야
기도로 머리는 자주 몽롱해지고 갖가지 환영이 눈앞에 어른거리기도 하였다. 그 환영들은
어두컴컴한 방 한구석에 희미하게 나타나 어슴푸레 떠오르는 일도 있었고, 그의 옆 가까이
몸거울에 비쳐 선명하게 보일 때도 있었다. 창백해진 목사를 비웃고 놀려 대며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손짓하는 악마의 무리가 되기도 하고 또는 슬픔에 짓눌려 간신히 하늘 위로 날아가는
천사의 무리가 되기도 하였다. 어떤 때에는 운명을 달리한 청년시절의 친구들이나 성자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흰 턱수염이 난 아버지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외면하고 지나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되기도 했다. 어머니의 유령 -참으로 덧없는 환영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아들에게 동정의 시선쯤은 던져 줘도 좋으련만! 마지막에는 이 환영들 때문에 황량해진 방안을
주홍 색 옷을 입은 펄의 손목을 잡은 헤스터 프린이 살며시 지나갔는데, 먼저 자기 가슴 위에
있는 주홍 글씨를 손가락질 하고, 다음에는 목사의 가슴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환영들에게 그는 한 번도 속은 일은 없었다. 어느때나 의지력을 발휘함으로써 목사는
실체가 없는 안개와 같은 환영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들이 저만치 있는 조각한 참나무
테이블이나, 가죽으로 장정하고 놋쇠 고리로 죄어진 커다란 신학 서적처럼 실질적인 물체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영들은 어떤 의미로써는 불쌍한
목사가 접촉하는 것 중에서 가장 진실하고 가장 실체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목사와 같이
허위에 찬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이 큰 불행은, 우리 인간 주위에 있는 현실에서
하느님이 정신의 기쁨과 양식으로 삼으라고 주신 진수와 실체를 빼앗겨 버리는 것이다. 정직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온 우주가 허위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잡으면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허위의 빛 속에 머물러 있는 그 자신도 한낱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며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결과가 된다. 딤스데일 목사를 이 세상에 계속 존재시키고 있는 유일한
진실은 그의 영혼 속에 들어 있는 깊은 고뇌와, 그 얼굴 위에 역력히 나타나는 고뇌의
흔적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미소를 짓거나 명랑한 표정을 짓는 힘이 발견되는 날이면, 이미
딤스데일 목사라는 인물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 불길한 환영들이 잇따라 나타나던 어느 날 밤, 목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순간이나마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여러
사람 앞에서 예배를 볼 때와 똑같은 옷차림으로 조심스럽게 차려 입고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
12.철야 기도
꿈속을 걷는 것처럼 그리고 사실상 일종의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걸어서 딤스데일 목사가
찾아간 곳은 훨씬 이전에 헤스터 프린이 자신의 수치를 처음으로 대중 앞에 드러내 놓았던
장소였다.
그 처형대는 7년이란 긴 세월 동안 비바람과 폭양에 낡았고, 그 동안 무수히 그곳에 올라선
죄인들에게 밟혀서 닳기는 했지만 여전히 예배당의 발코니 밑에 옛 모습대로 서 있었다. 목사는
계단을 올라갔다.
5월 초순의 어두운 밤이었다. 먹장 같은 검은 구름이 온 하늘과 지평선 끝까지 뒤덮여 있었다.
헤스터 프린의 형벌을 목격했던 군중들을 지금 이곳에 불러낸다 해도 한밤주으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단 위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은 고사하고 그림자조차도 분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리는 모두 잠들어 있었다. 남의 눈에 띌 염려는 없었다. 새벽녘 동이 훤히 뜰 때까지
여기 서 있는다 하더라도, 습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목사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 관절염을 고통을
주든가 감기와 기침으로 목이 막히든가 하여 다음날의 에배와 설교를 고대하고 있는 신자들을
실망케 하는 일 이외는 아무런 위험도 없었다. 목사가 밀실에서 피묻은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것을 지켜 본,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다. 그러면 목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곳에 왔을까? 회개의 흉내를 내기 위한 것일까? 목사는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희롱하고 있었다.
천사들이 얼굴을 붉히고 울며, 악마들이 부웃고 기뻐할 회개의 흉내에 불과했다. 목사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은 어딜 가나 그의 뒤를 따라 다니는 그 양심의 가책 이란 충동이었으나, 이
충동 때문에 고백의 일보 직전까지 쫓겨가곤 했지만 그 순간 양심의 가책 의 자매이기도 하고 꼭
붙어 다니는 친구이기도 한 겁쟁이 가 떨리는 힘으로 붙잡아서 뒤로 잡아당기는 것이엇다.
가엾고도 비참한 사나이였다! 이렇게 마음 약한 사람이 어떻게 죄악이란 짐을 질 수 있을
것인가? 죄악이란 무쇠와 같은 신경을 지닌 사람만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죄악의 무거운 짐을 참을 수 있든지 혹은 너무도 무겁게 느껴질 때는 과단성 있게 용기를
발휘하여 그 자리에서 죄악을 내동댕이쳐 버리든지, 둘 중 마음대로 택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러나 나약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목사는 그 어느 것도 행할 힘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이것저것 시도해 봄으로써 결국 하늘에 반항하는 죄와 보람없는 회개와 고뇌를 한데 엮어 풀 수
없는 매듭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러기에 처형대에 서서 부질없는 속죄의 행위를 하고 있을 때, 딤스데일 목사는 우주 전체가
자신의 심장 위의 주홍 색 표적에 집중되는 것 같은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사실 그의 심장에는
오래 전부터 독이빨에 물어 뜯기는듯한 육체적인 고통이 있었다. 억제할 힘도 없이, 또한 그런
의지의 노력도 없이 목사는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이 고함 소리는 밤의 어둠 속을 꿰뚫고
퍼져나가 집집마다 메아리쳐 뒤언덕에서 산울림이 되어 돌아왔는데, 그 메아리는 마치 한 떼의
악마들이 그 고함 소리에서 비참함과 공포의 냄새를 맡고 그것을 이리저리 집어 던지며 장난삼아
가지고 노는 것 같았다.
이제 됐어! 목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모든 사람들이 잠을 깨고
달려나올 것이다. 그리고 여기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 고함 소리는 겁에 질린 목사의 귀에 들린 것처럼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다. 거리는 잠이 깨지 않았다. 설령 깨있다 하더라도, 잠에 취한 그들은 고함 소리를
꿈 속의 무슨 무서운 소리로 잘못 들었든가, 마녀들의 소리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 무렵에는
이런 식민지나 호젓한 오두막 위를 마녀들이 악마와 함께 날아가며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므로 목사는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벨링햄 총독의 저택 창문을 통해 램프 불을 손에 들고, 머리에는 흰
나이트캡을 쓰고, 길고 흰 가운을 걸친 노총독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은 아니 밤중에
무덤으로부터 초혼되어 나온 유령 같았다. 분명 고함 소리에 잠이 깬 모양이었다. 또 그 집 다른
창문에는 총독의 누이동생인 히빈스 부인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그녀 또한 램프불을 들고
있었다.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도 기분 나쁜 듯 찡그린 얼굴이 뚜렷이 보였다. 부인 격자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불안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딤스데일 목사의 고함 소리를 들은
늙은 마녀는, 그 소리가 메아리쳐 울려퍼지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늘 함께 숲 속을 거닌다고
소문이 난 악마나 마녀가 피우는 소음으로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벨링햄 총독이 들고 있는 불빛을 보자 부인은 곧 자기 등불로 꺼버렸으므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구름 속으로 자기 등불은 꺼버렸으므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구름
속으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목사의 눈에는 더 이상 부인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총독은
어둠 속을 조심스럽게 내다보고 있더니, 캄캄한 어둠이 있을 뿐 별다른 일이 없음을 알자
창문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목사는 약간 진정되었다. 그러나 잠시 후 처음에는 멀리 보이다가 차차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가물거리는 등불이 눈에 띄었다. 그 불빛에 비쳐 기둥, 울타리, 격자창의 유리, 물이 가득
찬 물통이 있는 펌프, 아치형의 참나무 문, 무쇠로 된 노크 장치, 계단을 이루고 있는 통나무
등이 차례차례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딤스데일 목사는 이러한 것들을 유심히 보았다. 동시에
지금 점점 가까이 오는 발소리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최후의 날이 다가오는 소리이며, 이윽고
림프 불빛이 자기 모습을 비치게 되면 오랫동안 숨겨 온 비밀이 폭로될 것이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등불이 더 가까이 다가오자 그 환한 불빛 속에 동료 목사의 모습이 -좀더 정확히 말하면
직업상 아버지나 다름없이 마음속으로부터 있는 친구, 윌슨 목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어떤
죽어가는 사람 옆에서 기도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인 모양이라고 딤스데일 목사는 생각했다. 사실
그러했다. 이 늙은 목사는 바로 이 시각에 천국으로 떠난 윈드롭 총독의 임종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이 목사는 마치 옛날 성자들이 찬란한 후광에 휩싸인 것처럼 죄많은 밤의 어둠 속에서
뚜렷이 돋보였다. 세상을 떠난 총독으로부터 영광의 유산을 물려 받았는지, 순례자인 총독이
득의만면해서 천국의 문을 들어서는 것을 돌봐 주다 목사 자신이 먼저 천국의 영광을 몸에
지니게 되었는지 -아무튼 지금 윌슨 목사는 램프 불로 발 밑을 비치면서 집을 향해 발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 등불을 보고 딤스데일 복사는 후광이 비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아니, 오히려 비웃고 싶은 기분이 들어, 자신이 정말 머리가
이상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윌슨 목사가 한쪽 손으로 설교용의 긴 옷을 감싸 쥐고 한 손으로는 가슴앞에 램프 불을 든 채
처형대 옆을 지나갈 때, 딤스데일 목사는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안녕하십니까, 윌슨 목사님. 이리 올라오셔서 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않으시렵니까!
웬일일까! 딤스데일 목사는 정말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한순간 그는 그가 그 말을 실제로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목사의 상상 속에서 말한 것일 뿐이었다. 윌슨 목사는 조심스럽게
발 밑의 진흙길을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발을 옮겨디딜 뿐 한 번도 불길한 처형대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가물거리는 램프 불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목사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고, 지금까지의
불과 몇 분 동안이 참으로 아슬아슬한 위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처참한 장난으로써
잠시나마 마음의 통증을 가라앉혀 보려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애쓰긴 했지만.
잠시 뒤 음산한 장난기가 또다시 그의 엄숙한 환상 속으로 살짝 스며들었다. 목사는 익숙하지
않은 밤의 찬 공기에 손발이 뻣뻣해짐을 느끼며, 처형대의 계단을 내려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졌다. 아침이 찾아와도 이대로 이곳에 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일찍 일어난 사람이 새벽 어스름을 타고 나와 처형대 위에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다. 놀라움과 호기심에 미친 듯이 집집으로 뛰어다니며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죽은 죄인의 유령을 구경하라고 사람들을 불러낼 것이다. 어스름 속에 이 소란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홰를 칠 것이다. 이윽고 아침 햇살이 점차 뚜렷해 짐에 따라 나이 많은 가장들이 플란넬
가운 차림으로 허둥지둥 일어나 뛰어나오고, 뚱뚱한 부인들은 잠옷을 여유있게 갈아입을 틈도
없을 것이다. 여태껏 머리카락 하나 흐트리고 나와 본 일이 없는 예의바른 사람들도 모조리
악몽에 시달린 듯한 얼굴로 그의 앞에 나타날 것이다. 벨링햄 노총독은 제임스 왕조풍의
주름깃을 비딱하게 단 채 심각한 얼굴로 나오고, 히빈스 노부인은 스커트에 숲 속의 나뭇가지를
매단 채, 밤하늘을 쏘다니느라 한잠도 못 잤을 테니 매우 언짢은 얼굴일 것이다. 윌슨 목사도
임종을 보느라 밤중까지 있다가 이제 영광된 성자의 꿈을 꾸는 중인데, 이렇게 일찍 깨어나게
되니 몹시 못마땅한 표정일 것이다. 딤스데일 목사 교회의 장로들과 집사들도 몰려올 것이고
목사를 우상처럼 여기고 흰 가슴속에 목사를 위한 신전을 만들고 있던 처녀들도 그 흰 가슴을
목도리로 가릴 사이도 없이 허겁지겁 달려나올 것이다. 요컨대 너나할 것없이 문지방에 걸려
고꾸라질 뻔하면서 처형대로 몰려들어 놀라움과 공포에 질린 얼굴로 올려다볼 것이다. 처형대
위에서 붉은 아치 햇살을 이마에 받으며 서 있는 것은 도대체 누구일까? 다름아닌 아더 딤스데일
목사가, 치욕에 떨며 전에 헤스터 프린이 서있던 장소에 동사 직전의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려본 기괴하고도 처참한 이런 광경에 넋이 나간 목사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껄걸 웃어 대고는, 그 웃음소리에 스스로가 깜짝 놀랐다. 이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가
펄의 것이란 것을 안 목사는 가슴이 짜릿해 옴을 느꼈는데, 그것이 고통인지 기쁨인지는 알 수
없었다.
펄! 펄이지! 잠시 뒤 목사는 외치고 나서 곧 조그맣게 말했다. 헤스터! 헤스터 프린!
당신도 있는 거지?
네, 헤스터 프린이에요! 놀란 듯한 대답이었다. 목사는 그녀가 걸어가던 길쪽으로부터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발 소리를 들었다. 저하고 펄이에요.
어딜 갔었소, 헤스터? 목사는 물었다. 왜 여길 왔소?
임종하신 분 곁에 있었어요. 헤스터 프린이 대답했다. 윈드롭 총독이 돌아가셔서 수의
치수를 재 가지고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에요.
이리 와요, 헤스터. 펄을 데리고. 딤스데일 목사는 말했다. 당신과 펄은 전에 이곳에 서 본
일이 있지만, 그때 나는 함께 서지 못했소. 다시 한 번 올라와요. 셋이 함께 서 봅시다!
헤스터 프린은 펄의 손을 잡더니 말없이 계단을 올라와 처형대 위에 섰다. 목사는 그 아이의
다른 한 손을 더듬어 잡았다. 그 순간, 자기 이외의 또 하나의 생명이 세차게 그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어 그의 혈맥을 따라 도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거의 마비된 듯한 그의 기관 속에
모녀의 따듯한 생기가 전달되어 멈추었던 생명의 운동을 부화시키는 듯하였다. 세 사람은 전류가
통하는 연결동체가 된 것이다.
목사님!
펄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왜 그래, 펄?
목사는 물었다.
내일 낮에 엄마하고 나하고 함께 여기 서 주시겠어요?
펄이 말했다.
그건 안 돼, 펄. 순간 새로운 기력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줄곧 고민거리였던, 대중 앞에
폭로된다는 공포심이 새삼 그를 엄습했다. 지금 이렇게 셋이 함께 하게 된 것에 한편으론 기묘한
기쁨을 맛보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웠다. 그건 안 돼. 착한 아이지. 내일은 안 되지만, 반드시
언젠가는 엄마와 너와 같이 이곳에 서 주마!
펄은 웃으면서 잡힌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목사는 꼭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잠깐만 더 이대로 있자, 착하지.
목사는 말했다.
그럼, 내일 낮에 내 손하고 엄마 손을 잡아 주겠다고 약속해 주시겠어요? 하고 펄은 다시
물었다.
내일 낮엔 안 돼, 펄! 다른 날 꼭 잡아 줄게!
다른 날이라니, 그게 언제야?
아이는 끈질기게 물었다.
위대한 최후의 심판날이야! 목사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아이에게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날의 심판을 받는 자리에선 우리 셋이 함께
서야 한단다! 하지만 이 세상에 빛이 빛나고 있을 때는 셋이 함께 만날 수 없어!
펄은 또 웃었다.
그러나 딤스데일 목사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검은 구름에 뒤덮인 하늘에 한 줄기의 빛이
드넓게 비쳤다. 틀림없이 유성에 의해 생기는 빛이었다. 밤하늘을 종종 쳐다보는 사람들이 볼 수
있듯이 망망한 허공에서 타 없어지는 유성이었다. 그 빛은 너무도 강렬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두껍게 드리워진 구름층까지도 선명하게 비추었다. 천공이 거대한 램프 갓처럼 빛났다.
눈에 익은 거리의 풍경도 대낮처럼 환하게 비쳤지만, 유별난 빛이 낯익은 물체들을 무시무시하게
보이도록 했다. 불쑥 튀어나온 2층의 발코니와 기묘한 박공 끝이 달려 있는 목조 가옥, 둘레에
벌써 풀이 돋아난 계단과 문턱, 새로 갈어엎어 흙이 거무스름한 채마밭, 장터 한가운데이건만
광장 근처까지 양쪽에 풀이 돋아 있는 마차길 -이런한 모든 것들을 세세히 비춰 주고 있엇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새롭고 이상한 양상을 띠고 있었으며, 온 세상 만물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도덕적 해석을 내려 주는 것 같았다. 목사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서 있었다. 헤스터 프린의
가슴엔 꿰매붙인 주홍 글씨가 빛나고 있었다. 펄은 하나의 상징으로 두 사람을 연결시키는
고리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기묘하리만큼 엄숙한 빛으로 대낮처럼 밝은 광채 속에 세
사람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광채는 모든 비밀을 드러내는 빛이며, 인연 있는 사람들을 서로
결합시키는 여명과도 같았다.
아까부터 펄은 어떤 진지한 분위기를 알아챈 듯 입을 굳게 다물고, 목사에게 손을 잡힌 채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눈엔 어떤 마력이 깃들어 있었고, 목사를 쳐다보는 눈엔 요정 같은,
장나기 어린 미소가 넘쳐 있었다. 펄은 목사에게 잡힌 손을 빼어, 거리 맞은 쪽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목사는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무렵에는 유성의 출현을 비롯해 태양이나 달의 출몰처럼 구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자연
현상은 거의 초자연적인 근원으로부터 오는 계시라고 해석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밤하늘에
불붙는 창이나 불꽃의 칼, 또 활이나 화살의 전동등이 나타나면 인디언과의 전쟁이 생긴다는
징조였다. 역병이 유행할 징조는 진홍 색의 불빛이 비오듯 하는 것이었다. 길흉을 막론하고
식민지 시대로부터 독립 전쟁 시대에 이르기까지 뉴잉글랜드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 치고 이러한
자연 현상이 미리 경고하지 않은 사건이란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수많은 사람들이 그롸
같은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목격자에 의한 증언으로 그 사실을 믿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목격자들은 그런 신비스러운 광경을 상상력이라는 윤색되고 확대되고 왜곡된
매개체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며, 그 신기한 현상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마음대로 보충하여
하나의 뚜렷한 형태를 꾸미게 마련이다. 나라의 운명이 온 하늘 가득히 훌륭한 상형문자로
나타난다는 것은 참으로 장엄한 생각이다. 이처럼 거대한 두루마리 같은 하늘이지만 하느님이
국민의 운세를 그 위에 쓰시기에 그다지 넓은 것은 아니라고 우리의 선조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밤하늘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빛의 형상들이나 불가해한 초자연적인 현상들은, 새로 세워진
자신들의 나라가 하느님의 특별한 친밀감과 엄격함에 넘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의 증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인 그와 같은 두루마리 위에 나타난 계시를 보고 자기 혼자에게만
주어진 계시라고 생각했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그와 같은 경우는 극도로
혼란한 그 사람의 정신 상태를 말하는 하나의 징후에 불과할 것이다. 오랫동안 시달린 심한
비밀의 고통 때문에 병적으로 자기 성찰을 하게 된 사람이 자아 중심적인 태도를 자연의
전역에까지 미친 결과 천공자체가 자기 영혼의 역사와 운명을 기록하는 종이쪽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끔 된 것이다.
따라서 하늘을 올려다본 목사가 그곳에 붉은 선으로 거대하게 그려진 A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목사의 병든 마음에서 연유한 망상 탓이리라. 그러나 그때 구름층을 뚫고
불타는 유성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목사의
상상력이 생각해 낸 것과 같은 모양은 아니었을 것이고, 만일 다른 죄인이 보았더라면 다른
상징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정도의 막연한 형태였을 것이다.
이때 딤스데일 목사의 심리상태를 특징짓는 기묘한 사정이 또 하나 있었다. 목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동안에도 펄이 처형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셍 서 있는 로저 칠링워드
노인을 손가락질해 보이는 것을 확실히 의식하고 있었다. 목사는 기적의 글자를 찾아냈던 바로
그 시선으로 칠링워든 노인을 바라보았다. 유선의 빛은 이 사람의 얼굴에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표정을 주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다른 때와 달리 의사는 목사를
바라볼 때의 악의를 조심스럽게 감추려들지 않았다고 함이 옳을지도 모른다. 유성의 빛을 받아
으시시하게 보이는 만물의 형상에 압도되어 헤스터와 목사가 최후의 심판일을 생각케 되었다면,
로저 칠링워드의 못브은 이 두 사람에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며 음흉한 웃음을 띠고 서 있는
악마의 모습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표정이 그 만큼 선명했다고 할까, 아니면 목사의 눈에
비친 느낌이 그렇게 선명했다고 할까, 어쨌든 유성과 함께 거리나 그밖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린 뒤에도 의사의 표정은 그대로 어둠 속에 그려 놓은 듯이 남아 있었다.
헤스터, 저 사람은 누구요? 딤스데일 목사는 공포에 질려 숨가쁘게 물었다. 저 사람만 보면
소름이 끼친다오. 헤스터는 저 사람을 아오? 헤스터, 나는 저 사람이 싫소!
헤스터는 로저 칠링워드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잠자코 있었다. 저 사람을 보면 내 혼은
떨리는구려. 목사는 또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누구요, 도대체? 어떻게 좀 해 줄 수 없소? 왜
그런지 난 저 사람이 두렵소!
목사님, 저 사람이 누군지 말해 드릴게요!
펄이 말했다.
그래, 빨리 말해 다오! 목사는 자기 귀를 어린아이의 입에 갖다 대었다. 빨리!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작은 소리로.
펄은 목사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거렸다. 사람의 말처럼 들리기는 했지만, 아이들이 곧잘
뜻도 모르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혼자 노는 것과 같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옹알거림에
불과했다. 로저 칠링워드 노인에 관한 비밀 정보였다 하더라도 박학한 목사조차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으므로, 그의 정신적 혼란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었다. 마침내 요정같은 아이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나를 조롱하는 거니?
목사가 말했다.
목사님은 겁쟁이야! 거짓말쟁이야! 아이가 대답했다. 내일 낮에 우리의 손을 잡아 준다는
약속을 안 했잖아요!
그때 처형대 밑으로 다가온 의사가 말했다.
목사님, 딤스데일 목사님! 역시 목사님이셨군요! 우리 학자들은 늘 머리가 책에만 팔려
있으니까 착실한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눈을 뻔히 뜨고도 꿈을 꾸고 잠을 자면서도
걸어다니기가 일쑤니까요. 자, 목사님. 제가 댁으로 모셔다 드리죠!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목사는 몸을 떨면서 물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나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로저 칠링워드는 대답했다. 오늘 밤에는
줄곧 윈드롭 총독 각하 댁에 있었습니다. 그분을 좀 편안하게 해 드릴까 하고 있는 힘을
다했답니다. 이제 그분은 천당에 가셨으니 나도 집으로 돌아오던 길인데 그 이상한 광채가 비친
거지요. 자 갑시다, 목사님. 안 가시면 내일 주일 예배에 지장이 있을 겝니다. 아,
알았습니다.-책이로군요, 목사님의 머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공부는 이제 좀 그만하시고,
편히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밤중의 공상이 버릇이 된단 말입니다!
선생과 함께 집에 가리다.
목사는 말했다.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완전히 기력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으므로 목사는 의사가 시키는
대고 끌려갔다.
다음날은 안식일이었으므로 그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설교를 하였다. 지금까지 목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설교 가운데 가장 내용이 풍부하고, 박력이 있고, 영감이 넘친 것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 설교의 힘으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깨달았으며, 그들은 평생토록 딤스데일 목사에
대하여 신성한 감사의 마음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사가 설교단의 계단을
내려오자 흰 수염을 기른 교회당지기가 검은 장갑 한 짝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그의
장갑이었다.
오늘 아침에 죄인들이 올라가 망신당하는 처형대 위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사탄이 목사님한테
무엄한 장난을 하려던 것이 분명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탄은 바보짓을 했습죠. 깨끗한
손이야 장갑으로 가릴 필요가 있나요!
고맙소. 목사는 침착하게 대답했으나 내심 뜨끔하였다. 기억이 산란해져 지난밤의 일이 모두
꿈이나 환상처럼 여겨졌다. 정말 내 장갑같이 보이는군요!
사탄이 장갑을 훔치려고 했으니 앞으로는 장갑을 벗고 다니셔야겠습니다. 늙은 교회당지기는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웃었다. 그런데 목사님,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하늘에 나타난 커다란 주홍 글씨라는데요-A자이므로 천사(Angel)의 A를 나타낸
것으로 생각하고들 있습니다. 그 훌륭한 윈드롭 총독님이 어젯밤 천사가 되셨을 테니 그만한
전조가 있음 직도 하지 않습니까!
아니. 하고 목사는 대답했다. 난 아무 얘기도 못 들었소.
13.헤스터의 또 다른 모습
얼마 전 기묘한 상황에서 딤스데일 목사를 만나게 되었던 헤스터 프린은 목사의 상태가 말이
아님을 알고 깜짝 놀랐다. 목사의 신경은 극도로 지쳐 있는 듯하였고, 그의 정신력은
아이들보다도 더 약해져 있었다. 지능만이 본디의 힘을 유지하고 있었고 병적인 활력을 몸에
지니고 있었으나, 그의 정신은 극도로 무기력해져 거의 땅 위를 기어다닐 정도였다.
헤스터는남들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련의 사정을 환히 알고 있었으므로 목사 자신이 당연히
느껴아 할 양심의 가책 이외에 어떤 무서운 음모가 딤스데일 목사의 평온과 휴식을 헤하고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이 불쌍한 목사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느니만큼, 목사가 직감적으로
발견한 적을 막아 달라고, 세상에서 벌림받은 자기에게 애원하면서 부들무들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감동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에게 모든 도움을 청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헤스터는 생각하였다. 오랫동안 세상과 격리된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자기이외의 기준으로 선악 관념을 재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헤스터는 이 목사에
대해서, 이 세상 누구에 대해서나 진배없는,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헤스터를 다른 사람과 연결 짓고 잇는 사슬은 모두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목사와 헤스터, 두 사람 다 죄인이라는 유대의 사슬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또한 다른 모든 인연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의무를 수반하고 있었다.
현재의 헤스터 프린은 치욕의 생활을 시작했던 무렵과는 처지가 달라져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고, 펄도 이제 7살이 되었다. 수놓은 주홍 글씨를 가슴에 달고 있는 헤스터의 모습이 이미
오래 전부터 보스턴 사람들에게 낯익은 존재가 되었다. 남의 눈에 띄는 입장에 있으면소도
공사양면에 걸쳐 이익이나 편의에 아랑곳하지 않을 때에 흔히 그렇듯이, 헤스터 프린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호의 같은 것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기심이 작용하지 않은 한 미워하기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이 빨리 우러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한 미워하기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이 빨리 우러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다행한 일이다. 미움이란 본디의 적의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받지 않는 한
여유 있고 조용한 과정을 거쳐서 사랑의 감정으로 바뀌게 마련이다. 헤스터 프린의 경우는
새로운 자극도, 성가신 일도 전혀 없었다. 대중과는 싸우는 일이 없었고, 아무리 심한 처사에
불평 없이 순종했다. 사회에 대해 자신의 고통의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동정을 강요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세상의 따돌림을 받고 살아 온 몇 년 동안 나쁜 소문 없이 순결한 생활을
해 온 것이 그녀에 대한 주민들의 호감을 싹트게 했다. 인간의 기준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데다 무엇을 얻고자 하는 희망이나 꿈도 없었으니, 이 불쌍한 방황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을 덕행에 대한 순수한 열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헤스터는 남처럼 자유로이 공기를 마시고 착실히 삯바느질로 펄과 자기를 위한
생계비를 버는 것 말고는 세상의 권리를 조금도 탐내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남을 위해 도움을
베풀 때면 자기도 그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전심 전력하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자신의 곤궁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자기 것을 쪼개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는데, 이런 일에 그녀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 여자의 선행은 순탄치 않아,
날마다 그들이 문 앞에 갖다 놓아 주는 음식이나 왕후귀족의 옷에 수를 놓을 만한 솜씨로 만든
옷가지를 받고서도, 일부 매은망덕한 빈민들은 그녀에게 악담을 퍼북시가 예사였다. 이 거리에
질병이 만연했을 때에도 헤스터만큼 헌신적인 사람은 없엇다. 사실 사회 전체의 경우이건 개인의
경우이건, 참변이 있을 때는 언제나 이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 여인은 그 자리에서 자기가 할
일을 곧바로 찾아내는 것이었다. 걱정스러운 일로 침울해 있는 집으 찾아갈 떄는
손님이라기보다는 당연한 권리를 가진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행동했으며, 마치 그 집의 침울한
빛으로 말미암아 같은 인간으로서 교제할 자격이 생기는 것 같았다. 거기서는 수놓은 글씨가
빛났으며, 이 세상의 빛 같지 않은 그 빛에 위안이 담겨 있었다. 다른 곳에선 죄의 표시였던 그
글씨가 여기서는 병자의 방을 환히 비쳐 주는 촛불이 되기도 하였고, 병가가 숨을 거두려고 할
때 현세의 경계를 넘어 저승까지 그 빛을 보내 주기도 했다. 이 세상의 빛은 점차 흐려져 가고,
내세의 빛은 아직 비치지 않는 때에 병자에게 발을 내대딜 곳을 비춰 주는 등불이기도 했다.
이렇게 위급할 때에는 헤스터의 따뜻하고 포용력 있는 성격이 발휘되었다. 모든 절실한 요구를
일일이 들어줄 뿐 아니라, 아무리 큰 요구도 무궁무진하게 받아들여 주는 인정의 샘처럼
행동하였다. 치욕의 표시가 붙은 가슴이 베개를 찾는 사람에게는 더할 수 없이 폭신한 베개가
되었다. 헤스터는 사회나 본인이 다 이런 결과가 되리라고는 예상치도 않았건망 자진해서
자선의 수도녀 가 되었다. 아니, 어느 틈엔지 사회의 근심어린 손길이 그녀를 이런 직분에
임명하였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주홍 글씨는 그녀의 천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헤스터는 필요한 존재였고,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따뜻한 동정심을 발휘했던지, 사람들은
주홍글씨의 A자를 본디의 뜻으로 해석하길 거부했다. 그들은 그것을 유능(Able)'의 뜻이라고
했다. 헤스터 프린의 여인으로서의 힘은 이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그녀가 드나드는 집은 근심 걱정이 가득한, 햇빛이 들지 않는 집뿐이었다. 그러나 근심이
사라지고 햇빛이 찾아들면, 이미 헤스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그림자는 문지방을
넘어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녀가 한식구처럼 정성어린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비록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감사의 표시를 받기 위하여 뒤돌아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 삶들과 거리에서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맞대고 가리키면 지나쳐 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자칫 거만하게 보일 수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겸손에 가까웠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에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대중의 마음은 변덕쟁이 군조와 같다. 하찮은
정의라도 너무 집요하게 요구하고 나서면 당연한 공평까지도 거부하나, 관용을 바라고 애원하면,
그 폭군은 공평 이상의 것을 내주는 것이었다. 헤스터 프린의 태도를 이런 류의 애원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에 세상은 과거의 희생자인 그녀에 대하여 본인이 희망하고 있지도 않은, 때에
따라서는 그녀가 받을 자격이 있는 이상으로 친절한 표정을 보여 주었던 것이가.
헤스터의 이런 선행이 세상에 주는 감화력을 보스터 통치자나 학자와 현인들이 인정한 것은
일반 대중에 비해 훨씬 더디었다. 모든 인간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편견이 이들의 경우에는
논리라는 쇠틀 속에 갇혀 있었으므로, 그것을 탈피하기가 일반 사람보다 훨씬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들의 찌푸린 주름살은 자비로운 표정으로 바뀔 것도 같았다. 높은 지위
때문에 공중 도덕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의 동태는 대개 그러했다. 한편 일반
개개인들은 헤스터 프린의 여자로서의 과오를 깨끗이 용서하고 있었다. 아니, 그뿐 아니라
그들은 주홍 글씨를 헤스터가 오랫동안 괴로운 마음으로 감수한 죄의 상징이 아니라 그 이후로
그녀가 쌓아온 수많은 선행의 상징으로 보게 되었다.
저 수놓은 표시를 단 여자가 보이잖아요? 사람들은 다른 고장에서 온 사람등에게 말했다.
저 사람이 바로 우리 헤스터, 이 거리의 헤스터랍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친절하고, 병든
사람에겐 힘이 되어 주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겐 위안을 주는 헤스터랍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남의 불행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지껄이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으므로 지나간 옛날의 추문을 속삭이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눈에도 주홍 글씨가 수녀의 가슴에 걸려 있는 십자가오 같은 힘을 지닌 것으로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주홍 글씨는 그것을 달고 있는 이 여인에게 일종의 신성함을 주어 그녀로
하여금 어떤 위험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하였다. 설사 도둑 무리가
에워쌌다 하더라도 주홍 글씨가 그녀를 지켜 주었을 것이다. 언젠가 인디언이 그녀의 표적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고 화살이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었다.
이 상징, 아니 이 상징에 의해 제시되는 헤스터의 사회적 위치가 그녀 자신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강력사고도 기묘한 것이었다. 헤스터의 명랑하고도 품위있는 성품의 나뭇잎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이 낙인 때문에 이미 시들어 떨어진 지 오래였으므로 남은 것이라고는 거칠고 앙상하게
드러나 윤곽뿐이었다. 가령 친한 친구가 있었다 해도 혐오감을 느깨게 했을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웠던 자태도 똑같은 변화를 겪었다. 옷차림을 일부러 검소하게 한 탓도 있었고, 그녀의
동작이 남의 눈을 끌려 하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였다. 말할 수 없이 탐스럽던 머리는 잘라
버렸는지 모자 속에 완전히 감췄는지, 윤기있는 머리채를 한 번도 햇빛에 드러내 놓은 적이 없는
일도 슬픈 변화의 하나였다. 이러한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과 위엄에
찬 조상과도 같은 몸에는 열정이 끓어오를 만한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또한 애정의 여신이
베개로 삼았을 풍만한 가슴이 없어진 것도 눈에 띄는 변화였다. 여성으로서 지녀야 할 어떤
특징이 헤스터에게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것은 특히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고 난 여자의
성격이나 자태에서 나타나는 운명적인 것이며, 또 준엄한 발전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헤스터가
부드러운 마음씨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살아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그
부드러운 마음씨를 짓밟아 없애거나 아니면 가슴속 깊이 묻어 버려야 했던 것이다. 아마 후자의
경우가 더 전실에 가까운 이론일 것이다. 본디 여자다웠으나, 지금은 여자다움을 잃은 사람도
그녀를 변모시킬 마술의 손길을 만나기만 하면 언제든지 다시 여자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헤스터 프린이 앞으로 그와 같은 마술의 손길에 닿아 변모하게 될는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대리석같이 찬 헤스터의 인상은 그녀의 생활이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부터 사색적인
것으로 바뀐 때문이었다. 이 넓은 세상에 오직 혼자인 헤스터는 사회와 자신을 연결지어 주던
끊어진 사슬의 파편을 팽개쳐 버렸다. 세상의 법칙은 이제 헤스터의 마음의 법칙이 될 수는
없었다. 당시는 인간의 지성이 새로이 해방되어 수세기 이전에 비하면 한층 자유롭고 폭넓은
활동을 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무인들은 왕후와 귀족을 쓰러뜨렸고, 그보다 더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고대 원칙과 연결되어 있는 묵은 편견에 찬 사회 조직 전체를 허물고 재편성하고
있었다. 헤스터 프린은 이런 정신을 흡수하고 있었다. 헤스터가 몸에 지니고 있던 사색의 자유는
그즈음 대서양 저쪽에스는 보편적인 사상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들이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주홍 글씨로 표시된 죄보다 감히 찾아들지 못할 새로운 사상이 바닷가에 자리잡은 헤스터의
오두막에 찾아들었던 것이다. 그림자와 같은 이 방문객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만 듣고서도 그들을
맞이하는 헤스터는 악마의 방문과 다름없는 위험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극히 대담한 사상의 소유자일수록 사회의 외부적인 규칙에는 아주 온손하게 복종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들은 사상만으로 충분하며, 사상이 행동이라는 혈육을 수반할 필요는
없다. 헤스터 프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만일 펄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사정은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더라면 앤 허친슨과 같은 사람과 손을 잡을 어느 종파의
창설자가 되어 청사에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헤스터에게는 예언자적인 일면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청교도 사회를 뿌리째 뽑아 버리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그 무렵의 엄격한
재판관들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일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상적인 정열은 아이의 교육에서 그 발산처를 발견한 것이다. 이 소녀의
형태를 빌어 하느님이 헤스터에게 안겨 준 여성의 싹과 꽃을 그녀는 어떤 난관을 뚫고라도
소중히 키워야만 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외시 당한 그녀에게 이 세상은 여전히 악의를 품고
있었다. 아이 자신의 성격에도 뭔가 이상한 데가 있어 어머니의 무궤도한 정열의 소산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불쌍한 작은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일은 과연 잘된
일인가 아니면 잘못된 일인가 하고 헤스터는 쓰라린 마음으로 자신에게 묻는 것이었다.
사실상 여성 전테의 삶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의문이 헤스터의 마음속에 곧잘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아무리 행복한 여자라 할지라도 산다는 것은 받아들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일까?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에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고, 이 문제는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도외시해 버렸다. 사색하는 습관은 남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자를
침착하게 만들기는 하나, 동시에 마음을 슬프게 하기도 한다. 헤스터는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려면 우선 첫째로 사회 조직 전체를 부수고 새로
건설해야만 한다. 둘째로는 남성의 성질이라든가 혹은 본성으로 굳어 버린 오랫동안의 유젖넉인
습성 등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여자는 정당하고 적절한 지위를 획득할 수 없다. 또
마지막으로 다른 모든 곤란이 제거된다 하더라도 여성이 첫째와 두 번쨰의 개혁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시 강대한 변화를 여성 자신이 경험해야만 한다. 그런 큰 변화를 겅험하게 되면 그
결과 여성에게 가장 여성다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본질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여성이 두뇌를 써서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절대로 없다. 이 문제는 단 한 가지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즉 여성의 감정이 그녀들의 이성보다 우세를 보이게 되면 문제는
깨끗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이 그 규칙적이고도 건강한 고동을 잃고 있는 헤스터
프린은 아무런 의탁할 곳도 없이 마음 속의 어두컴컴한 미로를 방황하고 있었다. 넘을 수 없는
절벽에 부딪혀 방향을 바꾸는 일도 있으며, 깊은 구렁텅이에서 깜짝 놀라 뒷걸음질치는 일도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온통 쓸쓸하고 황량한 풍경뿐이어서, 취안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이따금 차라리 펄을 천국으로 보내 버리고, 자기 자신도 정의의 여신이 정해 주는
바에 따라 내세로 가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무서운 의문이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할 때도
있었다.
주홍 글씨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광장에서 밤을 새우던 딤스데일 목사를 만난 뒤로 헤스터에게는 새로운 사색이
생겨났고, 어떠한 노력과 희생을 바쳐서라도 달성하여야 할 목적이 생기게 되었다. 그녀는
목사가 몸부림치고 있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더 이상 몸부림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한 처참한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의 정신이 아직 광적인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 직전에 놓여 있음을 보았었다.
남모르게 회한의 바늘에 얼마나 무서운 고통을 주는 효력이 있는지 모르지만, 구원받아야 할
손길에 의해 더 무서운 독물이 그 주사바늘에 채워지고 있음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원조를 아끼지 않는 친구의 모습을 가장한 적이 늘 그의 곁에 붙어서 손 안에 넣은 기회를
이용하여 딤스데일 목사의 부서지기 위운 성질의 나사를 가지고 장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혹독한 불행을 예감케 하고 행복이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그런 곤경 속으로 목사가
빠져들어가는 것을 잠자코 방관했었다., 본디 자기에게 진실이나 용기가 부족했던 탓이 아닌가
하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로저 칠링워드의 계획에 동의하는
일마니, 자기가 당한 파멸 이상의 참혹한 파멸로부터 목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변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두 가지 길 중에서 더
처참한 길을 선택한 셈이었다. 그녀는 할 수 잇는 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실책을 보장하리라
결심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혹심한 시련을 겪는 동안, 그녀는 보다 강인해져 이제 로저
칠링워드와 대항하지 못할 일은 없을 듯하였다. 감옥에서 로저 칠링워드와 첫 대면을 하던 날,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가장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되었고, 생생한 치욕으로 반미치광이가
되어 있었으므로 감히 그와 맞서 싸우는 일은 생각조차 항 수 없었다. 그때 이후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녀는 훨씬 높은 위치에 다다라 있었다. 반면 노인은 복수를 위해 스스로 비천한
인간이 되었으므로 헤스터와 동등한 지위, 아니 그 이하로 타락했던 것이다.
요컨대, 헤스터 프린은 전 남편을 만나 그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희생자를 구하기 위해 힘써
보리라 결심했다. 얼마 안 되어 그런 기회는 닥쳐왔다. 어느 날 오후 펄을 데리고 이 반도의
호젓한 곳을 거닐고 있을 때에 한쪽 팔에 바구니를 걸치고 다른 쪽 손엔 지팡이를 짚은 노의사가
꾸부정한 모습으로 약재가 되는 나무뿌리며 약초를 찾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14.헤스터와 의사
헤스터는 펄에게 저쪽에서 약초를 캐고 있는 사람과 애기가 끝날 때까지 바닷가에 가서
조가비나 엉킨 해초를 가지고 놀고 있으라고 일렀다. 아이는 새처럼 날아가더니 작고 흰 발을
벗고 물에 젖은 바닷가를 철벅기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이따금 우뚝 멈추어 서서 썰물이
남기고 간 웅덩이를 거울삼아 들여다보았다. 웅덩이 속에서는 반짝이는 곱슬머리에 눈에는
요정같은 미소를 담은 어린 여자아이가 펄을 쳐다보고 있었다. 함께 놀아 줄 친구가 없는 펄은
그 여자아이에게 손을 잡고 달음박질하자고 불러 보았다. 그러나 물 속의 여자아이도 똑같이
손짓을 하며
여기가 더 재미있어! 네가 웅덩이 속으로 들어와!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펄이 무릎까지 물
속으로 들어갔을 때 웅덩이 속에 있는 자신의 햐얀 발이 보였다. 그때 더 깊은 것에서는
조각조각 부서진 미소가 수면 위로 떠올라 반짝반짝 빛나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의사에게 가까이 가서 말을 건넷다.
잠깐 할말이 있습니다.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이늙은 로저 칠링워드에게 얘기를 하자는 분은 헤스터이신가? 하고 대답하며 의사는
구부렸던 몸을 일으켰다. 기꺼이 듣겠소! 그런데 헤스터, 요즘 어딜 가나 당신의 평판이 좋은
것 같더군요! 바로 어젯저녁에도 어느 훌륭한 관리 양반이 당신 가슴에서 떼어 버리면 사회의
안녕 질서에 지장이 없을까를 의논했던 모양이오. 헤스터, 나는 그분에게 당장 그렇게 해도
괜찮을 거라고 얘기했소, 그게 사실이니까!
이 표시는 그분들이 마음대로 뗄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헤스터는 침착하게 대답헀다.
내가 이것을 떼어도 좋을 때가 오면 저절로 떨어져 버리든가, 아니면 다른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변하든가 하겠지요.
그렇다면 좋도록 달고 있구료. 의사는 대답했다. 여자들이란 몸에 다는 장식품에 있어선
자기 고집대로 하는 모양이니까. 그 글씨의 수가 꽤 화려해서 당신 가슴에 잘 어울린단 말이야.
이러는 동안에 헤스터는 노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지난 7년 동안에 너무나 변한 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한편 큰 충격을 받았다. 생각했던 만큼 놁어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그의
모습에는 늙어가는 흔적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근력 있고 민첩해 보였다. 그러나 헤스터의 기억에
남아 잇는 그 조용하고 지적인 학자다운 옛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열심히 풘가를
찾고 있는 듯한, 그리고 거의 사납다고 할 정도의 경계의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런
표정을 미소로써 감추려고 애썼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치 자신의 그런 의도를 스스로
비웃는 듯한 조소가 얼굴에 어른거려 그것이 오히려 보는 사라믕로 하여금 그 음흉한 배포를
한층 뚜렷하게 엿볼 수 있게 하였다. 이따금 그의 눈에서는 붉은 빛이 번득였는데 그것은 마치
노인의 영혼에 우연히 일시적인 정열의 바람을 타고 붙은 불이 가슴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이 불꽃을 서둘러 누르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을 꾸미고 있었다.
한 마디고 로저 칠링워드 노인을 인간이 상당한 기간에 겊쳐 악마의 일을 행하면 바로 그
자신이 악마로 화해 버릴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뚜렷한 표본이었다. 이 불행한 노인은 7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고뇌에 가득 찬 한 인간의 마음을 끊임없이 분석하며 희열을 느끼고, 또한 그
사람의 불과 같은 고뇌에 기름을 끼얹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이와 같이 변모하게 된
것이다.
주홍 글씨가 헤스터 프린의 가슴 위에서 불타는 것 같았다. 여기 또 한 사람이 파멸하고
있었고 그 책임의 한 부분이 그녀 자신에게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내 얼굴을 너무 열심히 쳐다보는데 뭐가 묻었소?
의사는 물었다.
나에게 눈물이 남아 있다면 울어도 시원치 않은 것이 보여요. 헤스터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 얘기는 그만두기로 하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또 한 사람의 처참한 분의 이야기니까요.
그 사람이 어떻다는 거요? 로저 칠링워드는 그것이 대단히 관심 있는 화제이고, 비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런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응수했다. 헤스터, 솔직히 말해 나는
방금 그 사람 생각을 이것저것 하고 있던 참이오. 그러니 말하고 싶은게 있으면 말해 보오.
대답해 줄 테니까.
우리가 마지막 이야기를 나눈 것은 7년 전의 일인데, 그때 당신은 우리의 옛 관계에 대해서는
일체 비밀에 붙여 달라는 강제 약속을 내게서 받았습니다. 그분의 생명이나 명예가 당신의
수중에 달려 있었기에 당신의 명령대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약속을 하면서도 불안한 구석이 없지는 않았죠. 왜냐하면 다른 모든 인간에 대한
의무는 일체 포기한 나였지만, 그분에 대한 의무만은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과의 약속은 그
의무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무엇인가가 내게 속삭였기 때문이에요. 그 이후부터 당신 만큼 그분
가까이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은 구분 뒤를 늘 따라다니며 자나깨나 그분 곁에 붙어서
그의 생각을 살피고, 그의 영혼까지 파고들어 헤치고 있습니다! 그분의 생명을 움켜쥐고
매일매일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도 그분은 아직 당신의 정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했던 약속으로 인해 나는 한 사람의 진실된 분을 배신한 결과가 된
셈이에요.
당신한테야 그밖에 별 도리가 없지 않았소? 로저 칠링워드는 물었다. 내가 손가락 하나만
놀리면, 그 사람을 설교단에서 감옥으로, 감옥에서 교수대로 쫓아낼 수도 있었단 말이오!
차라리 그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죠!
헤스터 프린인 말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무슨 짓을 했단 말이오? 하고 로저 칠링워드는 거듭 물었다. 이것만은
알아야 하오, 헤스터 프린. 제왕이 의사에게 아무리 최고의 치료비를 지불한다 해도 내가 그
불쌍한 목사를 위해 베푼만큼 정성어린 치료는 받을 수 없을 것이오. 나의 간호가 없엇더라면 그
사람의 생명은 당신네가 죄를 범한 지 2년도 되기 전에 이미 고뇌의 불길에 타버리고 말았을
것이오. 그 사람의 정신력은 헤스터, 당신과는 달라. 주홍 글씨와 같은 무거운 짐을 견뎌내는
힘이 없단 말이오. 난 기막힌 비밀을 폭로할 수도 있소! 그러나 그 얘긴 그만해 두지! 아무튼 난
의사로서 최선을 다했소. 그 사람이 지금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땅 위를 기어다닐 수 있는 것도
다 내 덕이란 말이오!
그분은 차라리 돌아가시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라요!
헤스터 프린이 말했다.
그렇고. 당신의 말이 옳소! 로저 칠링워드는 무시무시한 가슴 속의 불꽃을 헤스터 앞에
내보이며 외쳤다. 단숨에 죽는 편이 나았을 것이오! 그 사람 만큼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오. 더구나 철천지한 원수가 보는 앞에서 말이오! 그 사람도 어떤 눈치를
채고는 있소. 어떤 저주와 같은 힘이 자기 곁을 늘 따라 다니는 것을 느끼고 있소. 일종의
영감으로 악의를 품은 자의 손이 마음의 끈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다만 그 눈과
손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은 알지 못하오! 목사들 사이에 흔히 있는 미신이지만, 자신에서 귀신이
들려서 무서운 꿈이나, 절망적인 생각이나, 회한의 바늘이나, 구원에 대한 절망 등으로 인해
무덤저편에서 겪을 고통을 미리 맛보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요. 그러나 사실 그것은
끊임없이 따라 다니는 나의 그림자였소! 그자 때문에 무참히도 상처를 입고 무서운 복수라는
맹독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된 한 사나이가 사시사철 따라다닌 것이오! 자신이 악마에게
붙들렸다고 생각한 그의 예감은 옳았소. 악마가 그의 코앞에 있었으니까! 본디는 인간다운
마음을 지녔던 사람이었지만, 고통과 상처 때문에 결국은 악마가 되어 버린 사나이가 말이오!
이와 같은 말을 지껄이면서 불행한 의사는 두 손을 번쩍 쳐들었는데, 마치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갑자기 정체불명의 괴물처럼 변한 것을 보고 공포에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일생동안 몇 년 만에 한 번 있을까 한, 인간의 정신이 숨김없이 심안에 비친다는 그런
순간이었다. 아마도 그에게 지금처럼 자기 자신의 모습이 똑똑이 보인 적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만하면 그분에게 충분히 복수를 한 게 아닐까요? 헤스터는 노인의 표정을 살피면서
물었다. 그도 당신에게 진 빚을 다 갚은 셈이 아닐까요?
천만의 말씀이오! 빚이 오히려 늘었을 뿐이오! 하고 의사는 대답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의사의 태도는 사나운 기색이 수그러들고 점차 침울한 빛을 띠었다. 헤스터, 9년
전의 나를 기억하고 있소? 그때도 이미 나의 인생의 가을이었고, 그것도 겨울이 다 된
형편이었지. 그러나 그때까지 나의 생활은 성실하고, 학문적이고, 사색에 잠긴 조용한
나날이었소. 그런 나의 생활을 나의 지식을 증진시키는데, 그리고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데
충실히 바쳤었소. 나의 생활만큼 평온하고 청렴한 것은 없었을 것이오. 그 무렵의 나를 기억하고
있소? 나라는 인간이 당신이 보기에는 냉담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남에게 인정을
베풀 줄도 알고 자기를 위한 일에는 조금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며, 친절하고 성실하며
정직하고, 그리고 비록 정열적이라고 할순 없으나 변함없는 애정을 지녔던 사람이었다고
생각되지 않소? 그렇지 않소?
당신은 그 이상의 분이었죠. 헤스터가 대답했다.
그럼, 지금의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이오? 의사는 헤스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마음 속의 모든
악을 얼굴에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지금의 내가 뭐냐 하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요! 악마란
말이오! 도대체 누가 나를 이런 악마로 만들었단 말이오?
바로 나예요! 헤스터는 몸을 떨면서 소리쳤다. 나 때문이에요. 나도 그분이나 다름없는
죄인인데, 왜 나에겐 복수를 하지 않으셨어요?
당신은 그 주홍 글씨에 맡겨 뒀던 거지. 로저 칠링워드는 대답했다. 그 주홍 글씨가 할 수
없는 복수라면, 난들 어쩌겠소!
노인은 주홍 글씨를 가리키며 빙긋이 웃었다.
분명히 복수를 했어요! 헤스터 프린은 대답했다.
나의 판단에 잘못은 없었소. 의사는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란 뭐요?
나는 이제 그 비밀을 밝혀야겠습니다. 헤스터는 잘라 말했다. 그분에게 당신의 본성을 일러
줘야겠어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온 까닭에, 그것이 도리어 그분의 파멸의 원인이 되었으니, 더 이상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분의 명성, 지위, 나아가서는 목숨까지도 죽이거나 살리거나 모두 당신 손에
달렸습니다. 주홍 글씨로 인해서 진실을, 영혼 속까지 타들어오는 시뻘겋게 달군 무쇠와 같은
진실을 알게 된 나로선 그분이 처참할 만큼 공허한 인생을 계속 살아 보았댔자, 아무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기에, 당신앞에 비루하게 무릎을 꿇고서 자비를 구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분에 대해선 마음대로 하세요! 그분이나 나나 당신이나 구원될 가망은 없으니까요! 펄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이 어두운 미로에서 빠져날갈 길은 없을테니까요!
당신을 가엾게 생각지 않는 바는 아니오! 로저 칠링워드는 갑자기 치밀어오르는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 말했다. 헤스터의 말에 담긴 절망감에는 뭔가 숭고한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훌륭한 바탕을 가진 여자요. 나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났더라면 이렇게 불행한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당신이 불쌍하오. 그 훌륭한 천품을 헛되이 낭비했으니 말이오!
나도 당신이 가엾게 생각돼요. 헤스터 프린이 말했다. 증오심 때문에 참으로 현명하고
올바른 학자이던 당신이 악마로 변했으니 말예요! 이제라도 그 미움을 쫓아내고 다시 한 번
인간다운 사람이 되실 순 없나요? 그 분을 위해서라기보다 두 배나 더 당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분을 용서하고, 그분에 대한 응보는 그 권리를 지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맡겨두세요! 방금
말씀드렸듯이 이 어두운 미로를 서로 얽혀 방황하며, 제각기 뿌려 놓는 죄악 때문에 발부리가
걸려 넘어지는 우리들에게 무슨 이로운 일이 있을 리 만무하잖아요? 아니! 당시은, 당신만은
구원될 길이 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억울한 일을 당하셨으니 그분을 용서하는 것은 당신 마음에
달려 있어요. 그 유일한 권리를 그대로 버리실 작정인가요? 그 소중한 특권을 거절하시려는
건가요?
그만해 두오, 헤스터! 노인은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게는 용서할 권리가 없소. 당신이
말하는 그런 힘이 내게는 없소. 오래 전에 잊었던 예전의 내 믿음이 되살아나 우리의 행동과
고민을 전부 해명해 주는구려. 당신이 첫발을 잘못 디딘 탓으로 악의 씨를 뿌려 놓은 것이오.
그러나 그 뒤로부터는 모두가 필연적인 운명이었소. 나에게 상처를 준 당신들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일종의 전형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오. 악마의 일을 악마에게서 빼앗아 왔을 뿐 나도
악마는 아니오. 모든 게 다 운명이오. 검은 꽃이 피면 피는 대로 내벼려둘 수밖에 없소! 이제 가
봐요. 그 사람의 일도 당신 마음대로 하구려.
의사는 손을 한 번 흔들더니 다시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15.헤스터와 펄
노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헤스터 프린은 중얼거렸다.
죄받을 소린진 몰라도 저 사람이 밉구나!
헤스터는 이런 감정이 드는 자기를 꾸짖어 보았지만, 그 감정을 억누를
수도, 지워 버릴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런 마음을 억제하려 노력하면서,
먼 나라에서 있었던 아주 오래 전 일을 회상했다. 그때 그 사람은 저녁이
되면 온종일 틀어박혀 있던 서재로부터 나와 가정적이고 따뜻한 난로 곁에
젊은 아내의 미소를 마주하며 앉는 것이었다. 책 속에 파묻혀 있던 오랜
시간의 냉기를 학자의 마음에서 없애자면 이 미소로 몸을 녹이는 게
제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러한 장면이 그때는 행복으로만 여겨졌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그 뒤에 겪은 어두운 생활을 통하여 바라보니 그것은
어느 사이에 가장 추악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어찌 그런 장면이 있을 수
있었는지 그녀는 의아스러웠다. 어떻게 저런 남자와 결혼할 마음이
생겼을까! 그 남자가 미지근한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는 것을 참았을 뿐
아니라 자기도 맞잡았으며, 자신의 입술과 눈을 그 남자의 것에 합치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이 가장 후회되는 죄악으로 느껴졌다. 아직 철부지이던
자신을 설득하여 그의 곁에 있는 것을 행복하다고 믿게끔 한 것은 뒷날
그가 입은 피해와는 비교도 안 되는 훨씬 더 비열한 죄악이라고
생각되었다.
역시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어! 헤스터는 아까보다도 더 격심해져
되뇌었다. 그 사람은 나를 속였어! 내가 그 사람에게 한 것보다 그는 내게
더한 몹쓸 짓을 했던 거야! 남성들은 명심할지어다.
결혼 승낙의 표시로 상대 여성의 손만 얻었을 뿐 마음속에 넘쳐흐르는
정열까지 얻지 못한 남성은, 조심할지어다. 그 여성이 보다 강한 남성의
손에 닿아 여성으로서의 모든 감수성이 눈뜨게 되면 로저 칠링워드의
경우처럼 비참한 운명을 걷게 되리라. 또한 남성들이 그녀들에게 만족스런
현실로서 안겨 준 조용한 행복이라든가, 평온한 생활은 오히려 차디찬
대리석의 영상 같은 것으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7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그녀의 가슴에 고통의 화인으로
아로새겨진 주홍 글씨도 그녀에게 회환과 참회의 마음을 주지는 못했단
말인가?
그녀가 로저 칠링워드 노인의 불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섰던 짧은
시간에 떠오른 갖가지 감회는 그녀의 마음에 어두운 빛을 던졌다. 이와
같은 일이 없었다면 헤스터는 자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노인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 헤스터는 아이를 불렀다.
펄! 펄! 어딜 갔니?
정신 활동이 잠시도 쉬는 일이 없는 펄은 어머니가 약초를 채집하는
노인과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심심하지는 않았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처음에는 웅덩이에 비친 제 그림자를 벗하여 놀았다. 손짓해 불러도 물
속의 아이가 나오지 않자, 제가 직접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마침내
자기나 그림자 중 어느 하나는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더 재미있는
놀이를 찾아 다른 곳으로 갔다. 자작나무 껍질로 배를 만들고 조가비를
잔뜩 실어 물 위에 띄웠다. 그 배는 뉴잉글랜드의 상인보다 더 먼 바다를
향해 출범했다. 그러나 배는 겨우 바닷가 근처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펄은
살아 있는 아주 작은 참게, 여러 마리의 불가사리를, 따뜻한 양지쪽에
해파리를 끌어올려 녹여 버리기도 했다. 그 다음에는 밀물의 물결에
줄무늬를 이루고 있는 흰 거품을 잡아서 바람에 날리고는 눈송이 같은 큰
물거품이 땅위에 떨어지기 전에 잡으려고 급히 쫓아가기도 했다. 또한
바닷가에서 먹이를 쪼며 날아다니는 물새 떼를 발견한 이 장난꾸러기
아니는 앞치마에 수북하게 조약들을 주워 모아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숨어서 쫓아다니며 작은 물새에게 훌륭한 팔매질 솜씨를 보였다. 그러나
앞가슴이 하얀 잿빛 물새 한마리가 조약돌에 맞아 부러진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날아갔다. 그러자 이 요정 같은 소녀는 한숨을 쉬며 그
장난을 집어 치우고 말았다. 바닷바람과 같이 싱싱하고, 그녀 자신처럼
길들지 않은 그 어린 새를 해친 것이 마음 아팠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펄이 한 장난은 여러 가지 해초를 뜯어 모아 목도리, 망토,
머리 장식 등을 만들어 작은 인어로 분장하는 일이었다. 이 아이는 여러
가지 장식물이나 의상을 만드는 일에 어머니의 뛰어난 재능을 물려 받고
있었다. 인어 의 옷차림의 마지막 치장을 하기 위해 펄은 미끈미끈한
수초를 얼만큼 긁어와서 어머니 가슴에 달려 있는 것 같은 장식을 만들어
자기 가슴에 달았다.
그것은 A자였다. 그러나 주홍 색이 아니라 싱싱한 초록 색이었다! 아이는
턱을 가슴에 대고 그 글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목적은 그 글씨 뒤에 숨겨진 뜻을 알아내는 일이기라도 한
듯 이상한 흥미를 나타내고 있었다.
엄마에게 이 뜻을 물어볼까? 펄은 생각했다. 마침 그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펄은 어린 바닷새처럼 가볍게 뛰어서 엄마 앞에 가서는
춤을 추며, 웃는 얼굴로 자기의 가슴에 단 장식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헤스터는 잠시 말없이 펄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녹색 글씨는 아이들
가슴에 달아도 아무 뜻도 없어요. 하지만 엄마가 달고 있어야 하는 이
글씨의 뜻을 펄, 너 알고 있니?
알아요, 엄마. 아이는 말했다. 대문자 A자죠. 엄마가 책에서 가르쳐
줬잖아요.
헤스터는 물끄러미 펄의 작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눈동자 속에는
전에도 곧잘 나타나던 기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지만, 펄이 과연 이
글씨에 대해 어떤 의미를 느끼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긋에 대해 확인해 보고 싶은 병적인 욕망을 느꼈다.
엄마가 왜 이 글씨를 달고 있는지 아니?
알고말고요! 펄은 어머니의 얼굴을 명랑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따. 목사님이 가슴에 손을 얹고 다니는 거나 같은 이유지 뭐!
그 이유란 뭐지? 헤스터는 뚱딴지 같은 아이의 말에 웃었으나, 다시
생각해 보고 얼굴빛이 달라졌다. 이 글씨가 엄마말고 딴 사람의 가슴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냐?
몰라요, 엄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야. 펄은 여느때보다도
심각한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엄마와 이야기하던 저
할아버지에게 물어 봐요! 가르쳐 줄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엄마, 그 주홍
글씨의 뜻은 뭐예요? 왜 엄마는 그것을 가슴에 달고 다니죠? 왜 목사님은
가슴에 손을 얹고 다니고?
펄은 어머니 손을 자기이 두 손으로 잡더니, 여느때의 변덕스럽고 난폭한
성격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심각한 눈길로 말끄러미 어머니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헤스터는 이 아이는 지금 어린아이다운 본심을
털어놓고 자기에게 가까워지려는 게 아닌가, 모녀의 기분이 일치되는
세계를 찾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따.
그래선지 여느때의 펄과는 달라 보였다. 지금까지 헤스터는 자신의
가슴속에 깃든 모든 애정을 쏟아 펄을 키워 왔으나, 그녀로부터는 4월에
부는 산들바람은 변덕스러워 가볍고 상쾌하게 불다가도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정열적인 돌풍으로 변한다. 기분이 퍽 좋다가도 갑자기 발끈 성을
내기도 하고 가슴에 끌어안아도 쌀쌀맞게 모르는 체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알 수 없는 부드러움으로 볼에 키스를
하고,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사람의 마음에 꿈 같은 쾌감을 남겨 놓고는
딴청을 피우며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이 아이의 성질에 대한
어머니의 평가였다. 다른 사람들이 이 아이를 관찰했다면 귀염성 없는
성질만이 눈에 띄어 실제보다도 훨씬 더 음울한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펄은 놀라울 만큼 조숙하고 예민한 아이여서 엄마의 친구가 되어도
좋을 만한 나이가 된 게 아닌가 싶었으며, 엄마의 슬픔을 있는 대로 다
털어놓아도 모녀가 서로 거북하게 느끼는 일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펄의 조그만 혼돈된 성격 속에는 굽힐 줄 모르는 용기라든가, 지기
싫어하는 강한 의지, 자존심으로 발전하게 될 굳건하고 자랑스러운 태도,
허위로 보이는 숱한 일에 대해 나타내는 맹렬한 경멸심 등을 포함한 어엿한
주의 주장이 싹트기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싹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록 지금까지는 아직 덜 익은 과일처럼 씁쓸하고 맛없는 것이긴
했지만, 더없이 풍부하고 향긋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훌륭한
성격을 고루 갖춘 이 요정과 같은 아이가 장차 고귀한 여성으로 자라지
못한다면 아마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은 죄가 너무도 크기 때문일 거라고
헤스터는 생각했다.
펄이 집요하리만큼 수수께끼 같은 주홍 글씨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몸의 일부로 지니고 나온 성질 탓인 것 같았다. 세상
물정을 조금씩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치 자신의 사명이나 되는 것처럼 이
수수께끼를 풀려고 했었다. 하느님이 이 아이에게 이러한 특별한 성격을
주신 것은 정의와 보복의 계획을 이행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헤스터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처음으로 ,하느님의 계획 속에는 자비와 은혜의
계획은 함께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펄이 이
세상의 아이로서뿐 아니라 정의와 신앙을 지닌 하느님의 사자로서 나타난
것이라면, 어머니 마음속에 차디차게 자리잡고 그 가슴을 무덤처럼
만들었던 슬픔을 잊게 해 주려는 사명을 지닌 게 아닌가?
지금 헤스터의 마음에 떠오른 이 같은 생각은 마치 누가 귓속말을 해
준것처럼 뚜렷한 인상을 남겨 놓았다. 그 동안에 펄은 엄마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고개를 쳐든 채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엄마, 그 글씨의 뜻이 뭐예요? 왜 엄마는 그걸 가슴에 달고 있지? 왜
목사님은 손을 얹지?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헤스터는 생각했다. 안 왤 일이다! 가령 이
아이의 동정을 살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은 말할 수 없다!
이윽고 헤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펄은 참 바보 같구나.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세상에는 아이들이 물으면
안 되는 일이 많이 있단다! 엄마가 목사님의 가슴에 대해서 알 리가
있겠니? 그리고 이 주홍 글씨를 가슴에 달고 있는 것은 금실이 좋기
때문이야!
지금까지 7년 동안 헤스터 프린은 자신의 가슴에 단 상징에 대해 단
한번도 거짓말을 한 일이 없었다. 이 상징은 엄격하고 가혹하면서도
한편으론 수호천사와 같은 역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헤스터를 저버리고 말았다. 엄격하게 헤스터의 마음을 감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새로운 악이 스며들었거나, 아니면 오래된 악이 추방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음을 알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펄의 얼굴에는 이제 조금
전과 같은 진지한 표정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아이는 이 문제를 그대로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니었다. 모녀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는 두세 번, 저녁을 먹을 때도, 잠을 재우고
있을 때도 몇 번이고 똑같은 질문을 하였다. 그리고 이젠 곤히 잠든 줄
알았는데, 검은 눈동자를 장난스럽게 반짝이면서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묻는 것이었다.
엄마, 그 주홍 글씨의 뜻이 뭐야?
다음날 아침, 펄이 잠을 꺠자마자 베개에서 머리를 들면서 물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늘 주홍 글씨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 뒤따라 나오는 또
하나의 질문이었다.
엄마, 목사님은 왜 늘 가슴에 손을 얹고 계셔?
입 닥치지 못해, 못 되게시리! 어머니는 지금까지 보인 일이 없는
엄격한 말투로 대답했다. 엄마를 놀리면 못 써. 정 그러면 깜깜한 광 속에
가둘 테야!
16.숲속의 산책
어쩌면 더욱 극심한 고통에 직면하게 되거나 또 장래에 어떤 궁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모를 일이나, 딤스데일 목사의 우정과 신뢰를 얻고
있는 한 남자의 정체를 그에게 알려 주어야겠다는 헤스터 프린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목사가 반도의 바닷가나 부근 숲 속을 산책하는 습관이
있음을 알고 있는 그녀는 그를 만날 기회를 얻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며칠 동안은 허탕치고 말았다. 설령 그의 서재로 찾아간다 해도 나쁜
소문이 날 리는 없었으며, 목사의 청렴결백한 명성에 영향을 끼칠 염려도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주홍 글씨가 나타내는 죄에
못지않은 죄악을 고백하기 위해 그 서재를 찾아가곤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남 몰래, 아니 어쩌면 공공연히 간섭하고
나서지나 않을까 걱정되었고, 아무도 그들의 비밀을 알 턱이 없었으나 지레
의심받는 것이 두려웠으며 또 그와 이야기하는 동안보다 넓은 세계에서
호흡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헤스터는 비좁은 서재보다 탁 트인
하늘 아리서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헤스터는 어느 병자의 집으로 간호를 하러 갔을 떄
목사가 그 전날 인디언 개종자들과 함께 살고 있는 엘리어트 전도사를
만나러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오후쯤이면 돌아오리라는
것이었다. 이튿날 헤스터는 그가 올 무렵에 펄을 데리고 나섰다. 펄이 곁에
있다는 것이 간혹 불편할 떄도 있었지만, 어머니가 외출할 땐 으레
동행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반도에서 본토 쪽으로 들어가니 길은 오솔길이나 다름없었다.
그 길은 신비스러운 원시림 속으로 꼬불꼬불 휘어들고 있었다. 길 양쪽에는
하늘이 가려질 정도로 숲이 뺵뺵이 들어차 있었기 때문에 헤스터는 그녀가
오랫동안 방황해 오던 정신의 황야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날씨는
쌀쌀하고 음산했다. 머리 위에는 잿빛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지만 바람이
조금씩 살랑대고 있었다. 그로 인해 흔들리는 한 줄기 빛이 가끔씩 오솔길
위를 희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흔들리는 밝은 빛은 숲 속 저쪽 끝에만
비치고 있었다.
이 장난스러운 햇빛은 모녀가 가까이 다가가면, 저만큼 멀어져 버려
아까까지 햇빛이 뛰놀던 자리는 한층 음울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녀가 햇빛이 잘 드는 곳으로 나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걸었기 때문이다.
엄마. 펄이 말을 걸었다. 해님은 엄마가 싫은가 봐. 엄마 가슴헤 단
것이 무서워서 도망쳐 숨어 버리나 봐. 자! 저기 봐! 저쪽에서 졸고
있잖아. 엄마는 여기서 좀 기다려 봐요. 내가 뛰어가서 잡아 볼 테니. 나는
어린 아이니까, 나한테서는 도망치지 않을 거야. 내 가슴에는 아직
아무것도 달지 않았으니까!
나중에라도 달아나서는 안 돼.
헤스터는 말했다.
왜 안 돼? 펄은 막 뛰어가려다 말고 우뚝 멈춰서며 물었다. 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게 아냐?
자 빨리 뛰어가기나 해! 어머니가 말했다. 해님을 잡는 거야, 또 금방
없어지겠다.
펄은 재빠르게 달려가더니 정말 햇빛을 붙잡아 그 가운데 서서 환하게
웃었다. 온몸에 햇빛을 받고 선 펄은 달음박질 때무에 생긴 활기로 빛나고
있었다. 햇빛은 마치 동무가 생겨서 기쁘다는 듯이 혼자 서 있는 어린아이
둘레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그 햇빛의 마술적인
원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도망간단 말야!
펄은 고개를 내저었다.
봐라! 헤스터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엄마도 손을 뻗치면 조금은 잡을
수 있어.
헤스터가 손을 내밀자 햇빛은 사라져 버렸다. 아니, 사라져 버렸다기보다
펄의 얼굴 위에서 춤추고 있는 밝은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이 아이가
햇빛을 몽땅 흡수하였다가, 자신들이 더 어두운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그
햇빛을 발산하여 길을 밝혀 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펄의 특성
가운데서 헤스터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자신에게서 물려
받았다고는 이들은 거의 조상들로부터 선병과 함께 슬픔이라는 병을
유전받는 법인데, 펄은 전혀 그런 질병과는 인연이 멀었다. 아니, 어쩌면
도리어 그것이 일종의 벙인지도 모른다. 펄이 태어나기 전에 온갖 슬픔과
싸워야 했던 헤스터의 투쟁에 대한 반동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것이 이 아이의 성격에 굳은 금속과 같은 광택을 주는
기묘한 매력임에는 틀림없었다. 이 아이에게는 사람을 깊이 감동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다운 동정심을 갖게 하는 그런 비애의 마음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 펄에게는 충분한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이리 와! 헤스터는 아까 펄이 햇빛에 싸여 서 있던 곳을 둘러보며
말했다. 숲 속으로 좀 들어가서 쉬기로 하자.
엄마, 난 피곤하지 않은걸. 하고 펄은 말했다. 하지만 엄마가
이야기를 해 준다면 그렇게 할게.
이야기라니! 무슨 이야기 말야?
그야 악마 이야기지, 뭐! 펄은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으며 반은 정색을
하고 반은 장난기 어린 눈으로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숲 속에 사는
악마 얘기 말야. 무쇠 장식이 달린, 크고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니다는 악마
이야기..... 무서운 악마는 숲 속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책과 펜을 내밀고
모두 자기 피로 이름을 쓰게 한대나 봐. 그러면 악마가 가슴에 표시를
달아준대! 엄마는 악마를 만난 일이 있어?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지. 펄?
헤스터는 그 무렵에 유행하던 미신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 물어 보았다.
엄마가 어젯밤 병간호하러 간 집이 있잖아, 나로 옆 구석에 앉았던
할머니가 해 줬어.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할 떄 할머니는 내가 자고 있는 줄
알았나봐. 이 숲 속으로 악마를 만나러 와서 책에 이름을 쓰고 가슴에
표시를 단 사람은 몇 천 명이나 된대요. 그 기분 나쁜 히빈스 아줌마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래요. 그리고 엄마, 그 할머니가 그러는데 이 주홍 글씨는
악마가 달아 준 표시래. 밤중에 이 어두운 숲에서 엄마가 악마를 만날 때는
빨간 불꽃처럼 빛난다고 그러던데? 정말야, 엄마? 밤중에 악마를 만나러
가?
네가 잠이 꺠었을 때 엄마가 없었던 일이 있니?
헤스터는 물었다.
잘 모르겠어. 나를 집어 두고 가는 게 걱정이 되거든 데리고 가도 돼.
기꺼이 따라갈 텐데! 하지만 엄마, 이것만은 지금 가르쳐 줘. 악마라는 게
있어요? 엄마는 만난 일이 있어? 이게 정말 그 표시야, 엄마?
한 번만 말해 주면 엄마를 귀찮게 굴지 않지?
하고 헤스터가 물었다.
응, 모두 말해 주면.
펄은 대답했다.
지금까지 꼭 한 번 악마를 만난 일이 있단다! 이 주홍 글씨가 그
표시야!
그들은 이런 얘기를 나누며, 오솔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숲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이끼가 수북하게 낀 바위 앞에 이라자
그들은 그 위에 걸터앉았다. 아마 전세기 어느 시기에는 어두운 숲 그늘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 높이 뻗어올라갔을 거대한 노송이 있던 자리인지도
모른다. 둘이 않은 곳은 작은 골짜기였는데, 나뭇잎이 깔린 둑이 양쪽으로
봉곳이 솟아 있고, 그 둑 사이로 시냇물이 나뭇잎이 가라앉은 바닥 위를
흐르고 있었다. 냇물 위로 휘눌어진 큰 나뭇가지들이 군데군데 흐르는 물을
막고 있어 여기저기에 소용돌이와 깊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물살이 센
곳에서는 조약돌과 누렇게 빛나는 모랫바닥이 드러나 보였다. 시냇물의
흐름을 눈으로 쫓으면 숲 속으로 조금 들어간 부분에서 수면에 반사되는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수풀과 잿빛 이끼가
덮인 바위들이 들쭉날쭉한 곳까지 오면 이미 빛은 흔적오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 거목이나 화강암등은 모두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 자취를 숨기는
데 열중해 있는 것같이 보였다. 시냇불의 끊임없는 수다가 원류가 있는
태고적 숲 속의 얘기를 재잘거리거나, 못의 매끄러운 표면이 숲 속의
은밀한 신비를 모조리 반사시키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시냇물의 물줄기는 쉴새없이 부드럽고 조용하게, 마음을 어루만져
주듯 정답게 재잘거렸다. 그러나 어린시절을 슬픈 사람들과 침울한 사건들
사이에서 아무런 재미도 없이 지냈기 때문에 도통 명랑해질 줄 모르는
아이의 목소리처럼 우울하였다.
시냇물아! 어쩜 그렇게 바보 같고 기운이 없니! 펄은 시냇물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외쳤다. 어째서 그렇게 슬프니? 기운을 내! 언제나
그렇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지만 말고!
그러나 시냇물은 숲 속의 나무들 사이에서 지낸 짧은 일생을 통해서 몹시 엄숙한 경험을 해
왔으므로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같았고, 그밖에 할말은 아무것도 없는
성싶었다. 이 시냇물은 신비로운 원천에서 솟아났고, 답답하고 침울하게 그늘진 광경 속을
흘러온 점으로 봐선 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냇물과 달리 펄은 춤추고
반짝거리며, 즐겁게 지껄이면서 제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시냇물은 왜 슬퍼하는 거지, 엄마?
네게 슬픈 일이 있으면 시냇물이 그것을 가르쳐 줄 거야. 어머니는 대답했다. 지금
엄마에게 가르쳐 주는 것처럼! 그런데 펄, 엄마에게는 누군가 산길을 걸어오는 발소리와
나뭇가지를 헤치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너는 저만큼 가서 놀고 있거라. 엄마는 저기 오는 분과
이야기를 좀 할 테니.
그 사람은 악마예요?
펄은 물었다.
저기 가서 놀라니까. 어머니는 되풀이했다. 하지만 너무 숲 속으로 들어가면 안 돼요.
엄마가 부르면 곧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야 해.
그래요, 엄마. 펄은 대답했다. 하지만 만일 그 사람이 악마라면 좀더 이곳에 있게 해 줘요.
그 큰 책을 끼고 있는 것이 보고 싶으니까.
자, 어서 가요, 바보 같은 소린 하지 말고. 어머니는 초조한 듯이 말했다. 악마가 아니야.
벌써 나무 사이로 보이잖니. 목사님이시잖아!
정말! 저것 봐, 엄마, 가슴에 손을 얹고 계시잖아! 목사님이 악마의 책에 이름을 썼을 때
저곳에 표시를 달았기 때문인가? 그런데 왜 엄마처럼 가슴 위에 달지 않으실까?
자, 어서 가요. 나중에 네 이야길 다 들어 줄게! 헤스터 프린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멀리 가면 안 돼.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어야 한다.
아이는 노래를 부르면서 시냇물 쪽으로 걸어갔다. 우울한 시냇물의 속삭임에 좀더 밝은
노랫소리를 혼합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시냇물은 위안받기를 싫어하듯 이
쓸쓸한 숲 속에서 일어난 구슬픈 사연의 비밀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지껄이고 있었다. 아니,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언의 애가를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의 짧은 인생
속에 지나칠 만큼 어두운 그림자를 간직한 펄은 이렇게 불평만 하고 있는 시냇물과는 친해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오랑캐꽃, 홀아비 바람꽃, 그리고 높은 바위 틈에 나 있는 빨간
미나리풀꽃 따위를 모으기 시작했다.
요정 같은 딸아이가 가버렸으므로 헤스터 프린은 숲으로 빠지는 오솔길 쪽으로 한두 발짝
걸어가다가 그대로 울창한 나무그늘에 서 있었다. 오솔길을 걸어오는 목사가 보였다. 그는
혼자였고, 도중에서 나무로 만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의 수척한 모습은 몹시
초췌해 보였고, 절망의 빛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보스턴 거리를 걷고 있을 때나, 남의
눈에 띌 우려가 있는 곳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처럼 한적한 숲 속에서
혼자일 때 그것은 보기에 딱할 정도로 눈에 띄었다. 아마도 혼자 있다는 그 자체가 그에게는 큰
정신적 시련이었는지도 모른다. 걸음걸이조차도 모든 일이 귀찮은 듯. 마치 더 이상 발을 옮겨
놓을 이유도 의욕도 없고 그대로 가까이 있느 나무 뿌리 곁에 몸을 내던지고 일생 동안
꼼짝없건, 나뭇잎이 그 위에 덮이고, 그대로 흙이 쌓여 작은 무덤을 만들 것이다. 그러면 죽음은
스스로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확정적이었다.
헤스터의 눈에는 딤스데일 목사가 뚜렷하고 생생한 고뇌에 잠겨 있는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펄이 말판 것처럼 가슴에 손을 얹고 있을 뿐이었다.
17.목사와 교회 신자
목사는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거의 지나쳐갈 때까지 헤스터 프린은 목사를 불러 세울 수가
없었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헤스터는 입을 열었다.
아더 딤스데일!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였다. 다음에는 좀더 큰 목소리였지만 쉰 목소리였다.
아더 딤스데일!
누구십니까?
목사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마치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기분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습격을 당한 사람처럼, 불안한 듯이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무그늘 밑에 희미하게 사람 모습이 보였다. 침침한 옷차림에다 흐린 하늘과 무성한 나뭇잎
때문에 대낮인데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으므로 거기 서 있는 것이 사람인지 무슨 그림자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목사가 더듬는 인생 행로에는 이처럼 그 자신의 생각으로부텨 살짝 빠져나온
망령이 따라다녔는지도 모른다.
목사가 한 발짝 다가서니 주홍 글씨가 눈에 띄었다.
헤스터! 당신이오, 헤스터 프린? 살아 있는 당신이오?
그럼요, 살아 있고말고요! 헤스터는 대답했다. 지난 7년 동안 살아 있던 것처럼! 아더
딤스데일, 당신이야말로 살아 계신 건가요?
두 사람이 이렇게 서로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가를 확인하고 자신의 생존에마저 의심을 품어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렇게 으슥한 수 속에서의 만남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마치
이승에서 친밀하게 지내던 두 영혼이 저승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 어색하고 두려웠다. 둘 다
망령이면서 상대편 망령을 보고 겁을 먹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절박한 마남이 그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서로의 마음속에 과거의 경험과 이력을 생생하게 되살려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한 일은
위기의 순간이 아니고는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그들의 영혼이 흘러가는 순산의 거울 속에 각자
자신의 모습을 비쳐 보았던 것이다. 아더 딤스데일은 두려움에 떨면서 마지못해 하는 태도로
천천히, 송장과 같이 차디찬 손을 내밀어 헤스터 프린의 싸늘한 손을 잡았다. 비록 차디찬
악수였으나, 두 사람이 이처럼 손을 잡음으로써, 처음 만난 순간의 어색함은 사라졌다. 적어도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기분이 든것이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두 사람은 헤스터가 모습을 나타냈었던 숲 속 나무 그늘로 걸어갔다.
그리고 헤스터와 펄이 좀전에 앉아 있던 이끼더미 위에 걸터앉았다. 이윽고 말문이 트이자 아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으레 하는 인사말로 음산한 날씨에 대한 아야기, 폭풍우가 올 우려가 있다는
이야기, 다음엔 서로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와 질문을 이것저것 나누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소겡 깊이 뿌리박고 있는 문제에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접근해 갔다. 운명과
주위 사정으로 인해,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온 두 사람은 우선 하찮은 얘기를 나눔으로써
단절되었던 자신들의 친교를 회복하고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있도록 해야만 했다.
잠시 뒤 목사는 헤스터 프린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헤스터, 당신은 마음의 평화를 찾았소?
헤스터는 자시느이 가슴을 내려다보면서 쓸쓸하게 웃었다.
당신은 어떠세요?
어림없는 일이오! 절망뿐이오! 나 같은 인간이 현재와 같은 생활을 하며 절망 이외에 또
무엇을 바랄 수 있겠소. 내가 무신론자였거나, 양심이 없는 인간이었거나, 거칠고 동물적인
본능으로 살아가는 야비한 인간이었다면 벌써 오래 전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 것이오. 아니,
안정을 잃는 일도 없었겠지! 지금 내 영혼의 상태가 이꼴이니 하느님이 내게 주셨던 모든 훌륭한
능력이 본디는 선한 힘이었던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나의 정신을 괴롭히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소.
헤스터, 나만큼 비참한 사람은 없소!
이곳 사람들은 당신을 존경하고 있고, 당신도 훌륭하게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안정을 얻을 수 없으신가요?
더욱 비참하오, 헤스터! 그 때문에 더 비참해질 뿐이오! 목사는 쓰디쓰게 웃었다. 내가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은 아무런 신념 없이 일하고 있을 따름이오.
그런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오. 나처럼 타락한 영혼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소? 더렵혀진 영혼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깨끗이 할 수 있단
말이오. 사람들이 나를 존경한다지만, 차라리 경멸과 증오를 퍼부어 주었으면 좋겠소. 내가
설교단 위에 서면, 마치 내 얼굴에서 천국의 빛이라도 비쳐 나오는 것처럼 올려다보는 많은
사람들의 눈을 바라보아야만 하오! 그것이 대체 무슨 위안이오? 또 교인들이 진리를 갈망하여
마치 오순절의 하느님 말씀이나 되는 것처럼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하오! 그러나 사람들이 그토록 신망하고 있는 나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정작 검은
실체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소. 당신은 이것을 위안이라고 할 수 있겠소, 헤스터? 표면적인 나와
내면적인 나가 전혀 딴판인 나 자신의 모습에 난 차라리 웃음이 났소! 그것을 본 악마도 비웃고
있다오!
당신은 너무 자학하고 계신 거예요. 헤스터는 상냥하게 말했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뻐저리게 뉘우치시지 않으셨어요? 당신의 조는 벌써 오래전에 없어졌고, 지난 과거의 것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현재 생활은 남들이 보는 것처럼 신성한 것이에요. 이처럼 훌륭하게 일을
함으로 해서 입증되는 회한이 어찌 실체가 아니겠습니까?
그게 아니오, 헤스터. 목사는 대답했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오! 차디차게 죽은 것이어서
나에겐 아무런 쓸모도 없는 거요! 하기야 그 동안 고행은 많이 해 왔지만, 회개는 한 번도 한
일이 없소! 만일 그랬다면 이런 위선적인 법복을 벌써 오래 전에 벗어던지고 최후의 심판날에
있을 그대로의 모습을 사람들 앞에 드러냈을 것이오. 헤스터, 당신은 행복한 사랑이오. 가슴에
떳떳하게 주홍 글씨를 달고 있으니 말이오! 나의 주홍 글씨는 남모르게 불타고 있소! 7년 간이나
거짓된 삶의 고통에 시달려 온 끝에 참 모습을 알고 있는 당신과 이렇게 마주하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위안을 주는 일인지 당신은 아마 모를 것이오! 나에게 친구라도 있어 사람들의 나에 대한
칭송으로 괴로울 떄 매일같이 그를 찾아가 나의 정체가 얼마나 추악하고 비열한 죄인인가를
들려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의 영혼은 살아갈 수 있을 것이오. 그 정도의 진실만으로도
나는 구원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지금 모든 것이 거짓이오! 공허요! 죽음뿐이란 말이오!
헤스터 프린은 목사의 얼굴을 처다보았으나, 차마 입을 열지는 못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감정을 이렇게 열렬하게 토로한 그의 말은, 헤스터가 별러 온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준 셈이었다. 헤스터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라고 계신 친구, 당신의 죄를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친구로서 그 죄의 공범자였던
제가 있습니다!"
목사는 숨을 몰아쉬며 벌떡 일어서더니 마치 심장이라도 후벼낼 듯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목사는 외쳤다. "원수라고! '더구나 한지붕 밑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헤스터 프린은 비로소 이 불행한 사람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통감했다. 오랜 세월 동안 아니,
단 한 순간이었다 하더라도 악의에 찬 목적만을 지닌, 그런 사람의 수중에 그를 내맡겨
놓음으로써 원수가 바로 그 곁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딤스데일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의
마음의 자장을 혼란시키기에 충분했다. 헤스터는 이 일에 대해 지금처럼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아니, 자기가 당한 움녕에 비하면 월씬 견디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었기에 그에게
무관심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전 목사의 고통을 목격한 뒤로 그에 대한
동정심이 부드러운 물결처럼 그녀의 마음에 일어났다. 이제는 그의 심정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로저 칠링워드는 언제나 목사 곁을 맴돌며, 악의에 찬 비밀의 독을 뿌려 목사의 주변
공기를 더럽히고, 목사의 정신적 내지는 육체적인 병에 의사로서 공공연히 간섭하는 일 등의
이런 접촉의 기회를 지금까지 잔혹한 목적을 위해 사용해 왔다는 것을 헤스터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로 인해 고외에 찬 목사의 양심은 늘 흥분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건전한 고통으로
병을 고치기는 커녕 그의 정신을 혼한케 하고 타락케 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이세상에서는 정신 이삿이 될 수밖에 없고, 저 세상에 가서는 선과 진리로부터 영원히 소외되는
길밖에 없다. 저 세상에서의 소외가 이 세상에서는 정신이상의 형태로 나타나는 모양이다.
헤스터는 전에 사랑했던, 아니 이제 숨김없이 말해도 되겠지만, 아직도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자신이 이런 파멸 상태로 몰라넣은 것이다. 전날 로저 칠링워드에게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목사의 명예나 지위, 또는 생명이라도 희싱하는 편이 차라리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느니, 그의 발치 아래 낙엽 위에 쓰러져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 아더." 헤스터는 소리쳤다. "나를 용서해 줘요!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진실한 사람이
되려고 애썼습니다. 진실이야말로 내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미덕이었고, 아무리 괴로울 때도
굳세게 지켜 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행복이, 당신의 생명이, 당신의 명예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는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진실을 기만하는 일에 동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닥치는 일이 있을지라도 진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역시 잘못이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시겠는지요? 그 노인! 그 의사! 로저 칠링워드라 불리는 그 남자! 그는 나의
남편이었습니다!"
한동안 목사는 무서운 눈으로 헤스터를 쏘아보았다. 그의 분노는 그의 숭고하고 부드러운
성질과 한데 섞여 있기는 했으나, 사실상은 그의 성품 중에 악마가 당연한 자기 몫으로써
요구하고, 다시 목사의 다른 부분까지 정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부분이었다. 이토록
험악하고 분노에 찬 목사의 얼굴을 헤스터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 표정은 불과 얼마
안되는 시간 동안에 갑자기 무섭게 변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고뇌로 인해 크게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정력조차도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마침내 땅바닥에 힘없이 쓰러지더니
목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알 만도 한 일이었건마!" 목사는 중얼거렸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던 거요!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이 까닭없이 떨렸던 것은 그 비밀을 알려 준
게 아니었을까? 외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오, 헤스터, 당신은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오! 죄로 인하여 병든 마음을 -바로 그 꼴을 보고 쾌재를 부르고
있는 그 사람 앞에 드러내 놓다니! 이건 너무 참혹한 일이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추악한 일이란
말이오! 헤스터, 당신은.... 이건 당신 탓이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소!"
"그러나 전 당신에게 용서를 받아야만 합니다!" 헤스터는 울면서 그의 곁 낙엽 위에 몸을
내던졌다. "벌은 하느님께 받겠습니다! 당신에겐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헤스터는 갑자기 격정에 사로접혀 두 팔을 내던지듯하며 목사의 머리를 가슴에 힘껏
끌어안았다. 목사의 볼이 주홍 글씨에 닿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목사는 뿌리치려고
애썼으나 소용없었다. 헤스터는 놓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무서운 눈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7년이란 세월 동안 세상은 이 고독한 여인을 눈에 가시처럼 여겨 왔건만
그녀는 꿋꿋하게 참고 견디어 냈다. 뿐만 아니라 그 냉혹하고 슬픈 시선을 한 번도 외면해 본
일이 없없다. 하느님도 역시 그녀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지만, 헤스터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이
창백하고 허약하고 죄로 인해 슬픔에 짓눌린 이 사나이가 짓는 무서운 얼굴만은 헤스터로서 참을
수 없었고 견디며 살아갈 수도 없었던 것이다!
"용서해 주시겠지요?" 그녀는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무서운 얼굴 하시지 않겠죠?
용서해 주시는 거죠?"
"용서하겠소, 헤스터!" 목사는 간신히 그렇게 대답했다. 슬픔의 구렁텅이에서 울려 오는 듯한
괴로운 목소리였으나 노기는 없었다. "이젠 진심으로 용서하겠소. 하느님이 우리 둘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어야 하오! 헤스터,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인은 아니오. 타락한
목사보다도 더 괘씸한 사람이 하나 있으니 말이오! 그 늙은이의 복수는 나의 죄보다도 더
흉측하오. 그 사람은 잔인무도하게 인간 마음의 신성함을 짓밟은 것이오. 그러나 당신과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소, 헤스터!"
"절대로 하지 않았죠!" 헤스터는 속삭였다. "우리가 한 행동은 그 나름대로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느끼기도 했었고, 둘이서 그렇게 다짐하지 않았소. 잊을 리가 있겠소!"
그들은 다시 이끼 낀 나무등걸에 나람히 앉아 손과 손을 꼭 잡았다. 그들의 인생에 이토록
우울한 때가 있었던 일은 없었다. 이 순간은 그들이 겅어 온 인생길의 끝장이었으며 그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은 점점 암담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함꼐 하는
이 순간의 매력에 끌려 좀더 오래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었다. 그들 둘레의 숲은
어둠침침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슬픈 소리를 냈다. 나뭇가지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휘늘어졌고
노목이 신음하듯 삐걱거리는 소리는, 그 밑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슬픈 이야기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앞으로의 재난을 예언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그곳을 뜰 수가 없었다. 마을로 돌아가는 길은 얼마나 쓸쓸해 보이는지
몰랐다! 헤스터 프린은 다시 치욕의 업고를 짊어져야 하고, 목사에게는 허무한 명예의 껍데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금빛처럼 찬란한 햇빛도 이
음산한 숲속의 어둠보다는 소중하지 못했다. 여기서는 목사 이외에 누구도 보는 이가 없으므로
주홍 글씨도 타락한 여인의 가슴에서 불탈 필요는 없었다! 헤스터 이외에 누구의 시선도 없는
이곳에서 하느님과 인간을 배반한 아더 딤스데칠도 잠시나마 진실할 수 있었다.
목사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놀라 큰 소리로 외쳤다.
"헤스터, 큰일이오! 로저 칠링워드는 그의 정체를 폭로하려는 당신의 의도를 알고 있소,
그렇다면 우리 비밀을 잠자코 숨겨 두겠소? 이번엔 어떤 형태로 복수를 해 올까?"
"그 사람의 성격에는 이상하게 비밀을 좋아하는 데가 있습니다." 헤스터는 신중하게 대답햇다.
"또 여태껏 숨어서 복수해 오는 동안에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어요. 그 사람이 비밀을 폭로하는
일은 없으리라 봅니다. 틀림없이 다른 방법으로 흉측한 격정을 만족시킬 것입니다!"
"그럼 나는..... 그 무서운 원수와 같은 공기를 마시며 계속 살아야 한단 말이오?" 아더
딤스데일은 몸을 움츠리면서 어느 사이에 버릇이 된 행위로 걱정스러운 듯 손을 가슴에 대었다.
"생각 좀 보오, 헤스터! 당신은 강한 여자요, 나 대신 결단을 내려 주오!"
"앞으로 그 사람과 함께 살아서는 안 돼요." 헤스터는 천천히 힘주어 말했다. "당신의 마음을
더 이상 그의 사악한 눈앞에 드러내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죽는 것만 못 한 일이오!" 목사는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피하겠소? 어떤
길이 나에게 남아 있단 말이오? 당신이 그 사람의 정체를 말했을 때 내가 몸을 던졌던 이 낙엽
위에 다시 한번 쓰러지기라도 하란 말이오? 이곳에 쓰러진 채 죽어야만 한단 말이오?"
"슬프군요, 당신이 그렇게 약해지셨다니!" 그녀의 눈에 눈물이 솟았다. "약해졌다는 것마으로
죽겠단 말씀이신가요? 그 이외에는 이유가 없잖습니까!"
"하느님의 심판이 내린 것이오."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목사의 대답이었다. "내가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힘에 겨운 심판이오!"
"하느님께서는 자비심이 있습니다." 헤스터는 대답했다. "다만 당신에게 그것을 잡을 만한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나를 위해 굳센 사람이 되어 주오, 헤스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일러주오!"
"세상이 그렇게 좁은 것인가요?" 헤스터 프린은 목사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렇게
외쳤다. 그녀는 혼자 서지도 못 할 정도로 초주검 된 남자의 정신에 본능적으로 자력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저 마을 이외에는 세계가 없는가요? 저 거리 역시 불과 얼머 전까지만 해도
나뭇잎이 쌓인 황야였고,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숲과 마찬가지로 쓸쓸한 곳이
아니었습니까? 이 숲 속의 오솔길은 어디로 계속될까요? 당신은 마을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시겠죠! 사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더 계속되고 있습니다. 황야 속으로 깊숙이
이어지며 들어갈수록 인적이 없어집니다.
여기서 몇 마일만 가면 노란 낙엽 위엔 백인의 발자국이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을 겁니다.
거기까지 가면 당신도 자유로운 몸이 됩니다. 그렇게도 비참했던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 넓은 숲 속에 로저 칠링워드의 눈을
피하여 당신의 마음을 숨길 만한 나무 그늘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있기야 있지, 헤스터. 하지만 그것은 낙엽 밑뿐이오." 목사는 슬픈 미소르 띠며 대답했다.
"그러시면 넓고 넓은 바다의 길도 열려 있습니다!" 헤스터는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은 바다를
건너서 이곳에 오셨습니다. 당신이 바라시기만 하면 오신 길을 되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 이름모를 벽촌이나 대도시 런던에, 또는 독일이나 프랑스에 아니면 즐거운
이탈리아에 가면 그 사람의 힘도 미치지 못하고 알아차리지도 못 할 것입니다! 무쇠처럼 냉혹한
이곳 사람들의 의견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 사람들 때문에 당신은 지금껏 속박돼
있었습니다!"
"그런 짓은 할 수 없소!" 마치 꿈을 실현시키라는 말이라도 들은 듯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갈 힘이 없소. 죄를 지어 비참한 몸이 되었을지라도 하느님이 정해 주신 이곳에서 속세의
생활을 마칠 생각밖에 아무 생각도 없소.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내 영혼이지만,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더 하고 싶소! 나는 영혼의 파수꾼으로서는 부적당한
사람이지만, 그리고 이 어려운 영혼의 파수꾼 역할이 끝날 때면 죽음과 불명예가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은 각오하고 있지마, 그렇다 하여 이곳을 떠날 생각은 없소!"
"당신은 7년 동안이나 비참한 짐에 눌려 기가 죽어 버린 거예요." 헤스터는 그에게 용기를
주려는 강렬한 의욕을 갖고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무거운 짐을 내동댕이치고 가야만
합니다! 숲 속의 오솔길을 걸어갈 때 그것들이 거추장스러우면 안 됩니다. 바다를 건널
생각이시면 그런 것으로 뱃길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비참한 잔해는 그것이 생겨난 이 장소에
다 버리고 가시면 됩니다. 더 이상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하시는
겁니다! 한 번 실패한 것으로써 꿈을 잊었다는 말씀인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미래에는 아직도
숱한 기회와 성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행복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선행을 더할 수도
있습니다! 이 위선적인 생활을 진실된 생활로 바꿔 보는 거예요. 인디언의 스승이 되고,
전도가사 되는 것도 좋겠죠. 당신의 마음이 그런 사명을 느끼신다면, 아니면 당신의 성격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만, 문명 사회에서 현자나 명사라 불리는 사람들처럼 학자나
현인이 되면 어떠실까요. 설교를 하세요! 글을 쓰세요! 행동을 하세요! 이곳에서 힘없이
죽어가는 일 말고 무엇이든지 하세요! 아더 딤스데일의 이름을 버리고 다른 훌륭한 이름, 공포도
치욕도 느끼지 않고 불릴 수 있는 이름을 쓰세요. 당신의 목숨을 좀먹는 고통 속에서 왜
하루라도 더 머뭇거리고 있어야 합니까! 당신의 의지나 행동을 이렇게 무기력하게 하고
있잖습니까! 회개하는 힘조차 없을 정도가 아닙니까! 자, 용기를 내어 힘을 발휘하세요!"
"오오, 헤스터!" 아더 딤스데일은 외쳤다. 그의 눈에서는 헤스터의 열성에 의한 약하디약한
빛이 순간적으로 타오르는 듯했으나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무릎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에게 달음박질을 하라는 거요! 나는 여기서 죽을 수 밖에 없소! 넓고 낯설고 험난한 세계로
돌진할 기력도 용기도 없소. 혼자서는 말이오!"
그것은 극도로 쇠잔한 그의 정신을 나타내 주는 마지막 말이었다. 목사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행운조차 잡을 힘이 없었다.
목사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혼자선 말이오, 헤스터!"
"혼자서 가시라는 게 아닙니다!"
나직하게 속삭이는 듯한 대답이었다.
이리하여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한 셈이었다.
18.빛의 홍수
아더 딤스데일은 헤스터의 얼굴을 희망과 환희에 빛나는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불안한 빛은
감출 길이 없었다. 자기는 막연하게 암시만 한 것을 결단성 있게 딱 잘라 말해 버린 헤스터의
대담성에 일종의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헤스터 프린은 본디 용감하고 동적인 정신을 지니데다 오랜 세월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고립된 생활을 해 온 탓으로, 딤스데일 목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자유로운 생각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가 길잡이도 안내인도 없이 방황해 온 정신의 황야는 지금 두 사람이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결정짓기 위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울창하고 인적 없는 숲 속과 같이
광대하고 복잡하며 그림자가 짙은 것이었다. 헤스터의 지성과 감정은 사막을 고향으로 삼으며,
마치 숲 속의 인디언처럼 자유로이 방황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줄곧 소외당한 입장에서 그녀는
위정자들이 설정해 놓은 모든 인간 사회의 제도로부터 동떨어진 곳에서, 단지 그것들을 비판하고
관찰하며 살아왔으며 목사의 늘어진 칼라.법복.처형대.교수대.난롯가.교회 등에 대해서도
인디언이 느낄 정도의 존경심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운명은 그녀를 자유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주홍 글씨는 다른 여자들이 감히 발을 들여 놓지 못하는 영역에도 드나들 수 있는
통행증이나 다름없었다. 치욕과 절망, 고독 같은 것들이 스승 중에서도 가장 엄하고 과격한
스승으로서 헤스터를 굳세게 만들어 주었으나, 한편 그릇된 것도 많이 가르쳐 주었다.
이에 반해 목사는 일반적인 법칙 세계에서 벗어난 인생 체험은 해 본 일이 없었다ㅣ 가장
신성한 법칙의 하나를 벌벌 떨면서 단 한 번 범한 일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열로
인해 범한 죄였지 결코 주의 주장에서 범한 죄는 아니었다. 그 불행한 시기 이래로 목사가
병적이라 할 만큼 세심한 열의를 가지고 지켜 온 것은 행위가 아니라 모든 감정의 움직임이었고,
자신의 온갖 생각이었다. 그즈음의 목사들은 사회 조직의 지도계층에 속하였으므로 그는 그
사회의 규범이나 주의나 심지어는 편견에 의해 더 많은 제약을 받았다. 목사이기 때문에 더욱
그가 소속한 사회 질서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죄를 지은 뒤 아물지 않은 상처로 인해 늘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처참하리만큼 신경이 예민한 인간이었으므로 죄를 짓지 않은 사람보다 오히려
도독심이 굳세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헤스터 프린에게 있어 7년 동안의 고립된 생활과 치욕의 세월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한
준비 기간에 불과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더 딤스데일은 어떠한가? 이런
사람이 또 한 번 죄를 저지르게 된다면 그 죄의 정상 참작을 위하여 어떤 구실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구실이 있을 리는 없었다. 기껏해야 그가 오랜 고뇌로 녹초가 되었다든가, 마음을
괴롭히는 가책 떄문에 암담하게 혼란해졌다든가-스스로 죄인이란 것을 자인하고 도망치든가,
아니면 위선자로서 그대로 버틸 것인가로 양심이 갈팡질팡했다든가- 죽음이나 치욕의 위험을
피하고, 적의 헤아릴수 없는 책략을 모면하려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든가 -병들고 약한, 비참한
모습으로 쓸쓸한 사막과 같은 길을 방황하고 있는 이 불쌍한 순례자의 눈에, 지금 치르고 있는
무거운 숙명 대신에 인간적인 애정과 동정, 새로운 생활이 한순간 비쳤던 일 등을 정당한 이유로
손꼽을 수가 있을까. 여기서 죄악이 인간의 영혼 속에 만들어 놓은 상처는 이 인간 세계에서는
절대로 회복될 수 없다는 엄격하고도 슬픈 진리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상처는 파수꾼을 두어
지킬 수는 있다. 적은 영혼의 성 안으로 무리하게 a들어오는 일은 없을지도 모르고, 또 다음에
쳐들어올 때는 전에 성공했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택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은
아직도 남아 있고, 적은 잊을 수 없는 승리감을 다시 한번 맛보기 위해 살금살금 다가올 것이다.
목사의 마음속에 이러한 갈등이 있었다 할지라도 여기서는 상세히 서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목사가 도망갈 결심을 했다는 것, 더구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두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목사는 생각했다.
'지난 7년 동안, 잠시라도 마음에 평화와 희망을 안겨 주는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을 천국의
구원에 대한 보증으로 믿고 더 참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몸이라면, 처형 전의 사형수에게 허용되는 위안을 붙잡아도 되지 않겠는가? 또는 헤스터가
설득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길이 보다 나은 생활로 통하는 길이라면, 이 길을 택했다 해서 더
훌륭한 장래를 버리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 여인 없이는 이제 살아나갈 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힘있게 나를 격려해 주고, 이렇게 부드럽게 나를 위로해 주지 않는가! 오
하느님, 눈을 쳐들 용기조차 없는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가시는 거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 때, 헤스터는 조용히 말했다.
일단 결심하고 나니, 기묘한 기쁨의 빛이 목사의 괴로운 가슴에 환한 빛을 던져 주었다. 자기
마음의 감옥으로부터 방금 도망쳐 나온 죄수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무법지대에서 거칠다고
할 정도의 자유로운 공기를 들이 마실때와 같은 들뜬 기분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정신은 껑충
뛰어, 비참하게 땅 위를 기어다닐 때보다 훨씬 가깝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본디
타고난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이러한 기분에 뭔가 경건한 구석이 있었다 하더라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목사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다시 이런 기쁨을 맛볼 수 있다니! 기쁨의 싹은 모두 죽어 버렸는 줄 알았는데! 오, 헤스터,
당신은 나를 구해 준 천사요! 나는 병들고, 죄에 더럽혀지고, 슬펌에 잠긴 이 몸을 숲 속의 낙엽
위에 내던졌는데, 네 속의 모든 것이 다시 소생하여 자비로운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시로운
힘이 가득 차 일어선 듯한 기분이오! 이것만으로도 벌써 행복한 생활이오! 왜 이런 것을 좀더
일짝 발견하지 못했을까?"
"과거는 돌아다보지 않기로 해요." 헤스터 프린은 대답했다. "과거는 가버린 거예요, 이제
와서 과거를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보세요! 이 가슴의 표시와 함꼐 나는 과거를 모두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헤스터는 주홍 글씨를 떼어 멀리 낙엽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 신비스러운
표시는 시냇가에 떨어졌다. 한 뼘만 더 멀리 날아갔더라면 물 속에 떨어져 시냇물이 지금
속삭이고 있는 술픈 사연 외에 또 하나의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 흘러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놓은 주홍 글씨는 냇물 바로 옆에 떨어져, 마치 잃어버린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누군가
재수 없는 사람이 지나가다 줍기라도 한다면, 불가사의한 죄악의 환영으로 인해 까닭 모를
불안에 떨며 괴로워하였을 것이다.
오욕의 낙인이 없어지자 헤스터는 긴 한숨을 쉬었다. 치욕과 고뇌의 무거운 짐이 그녀의
정신으로부터 싹 사라져 버렸다. 아아! 이 얼마나 홀가분한 해방감이냐! 자유를 맛보니 비로소
지금까지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는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새로운 충동으로 헤스터는 머리를
감싸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모자를 벗어 버렸다. 순간 검고 윤기나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그 풍겅한 머리칼이 명암을 던지어 그 얼굴 모습에 부드러운 매력을 주었다.
여성의 본서으로 부터 샘솟는 듯한 부드럽고 환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넘쳐흘렀으며, 그녀의
눈매에도 빛난다. 오랫동안 창백하기만 했던 볼은 볼연지를 바른 듯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여자로서의 개성과 젊음에 넘친 모든 아름다움이, 오래 전 잊혀진 과거로부터 되살아나 처녀
시절 같은 희망과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행복과 함께 지금 이 순간이라는 마술의 굴레 속에서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지금껏 하늘과 땅의 어두움은 마치 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두사람의 슬픔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하늘이 미소라도 터뜨린
것처럼 햇빛이 나타나 어두컴컴하던 숲 속을 폭포수처럼 내리비쳤다. 그리하여 푸른 나뭇잎
하나하나까지 기쁘게 빛나고, 누렇게 떨어진 낙엽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잿빛 고목나무 줄기까지
새롭게 반짝였다. 여태껏 그늘을 이루고 있던 것이 모두 환히 빛났다. 시냇불의 흐름은 밝은
광선으로 숲 속 깊이까지 더듬어 올라갈 수 있었으며, 그 음울한 신비로움도 이제는 기쁨에 넘친
신비로움으로 변했다.
이리하여 대자연은 - 인간의 법칙에 지배당한 일도 없고, 보다 높은 진리의 광명을 받아 본
일도 없는 방자하고 이교도적인 대자연은 두 영혼의 축복에 공명한 것이다. 사랑이란 새로이
생겨난 것이든 죽음 같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든 간에 언제나 햇빛같이 밝은 빛을 만들어 낸다.
그 빛은 사람의 마음속에 넘쳐흐를 뿐 아니라, 외부 세계에까지 넘쳐흐르게 된다. 이를테면 숲이
전과 다름없이 침침한 그늘을 이루고 있다 하더라도 헤스터의 눈에는 빛나 보였을 것이고, 아더
딤스데일의 눈에도 휘황하게 보였을 것이다!
헤스터는 새로운 기쁨에 몸을 떨며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펄과 사귀셔야죠! 우리들의
펄이에요! 전에 만나 보셨지요? 정말 그랬었죠! 하지만 이젠 다른 눈으로 보셔야 해요. 그애는
참 이상한 아이예요! 나도 잘 모를지경이에요. 그러나 나 못지 않게 그 아이를 귀여워해
주시겠죠. 그애를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도 가르쳐 주셔야 해요."
"그 아이가 나를 좋아할까?" 목사는 불안한 듯이 물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아이들을 멀리 해
왔소. 아이들이 나를 못 믿어하는 눈치고, 나와 사귀기를 꺼려하기 때문이오. 펄이 두렵기까지
하오."
"어머나, 가엾게시리! 헤스터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애는 당신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 당신도
그애를 사랑하게 될 거고요. 어딘가 가까운 곳에 있을 거예요. 제가 불러 보죠! 펄! 펄!"
"저기 있군." 목사가 말했다. "저기 시냇물 건너편 햇빛이 비치고 있는 곳에 서 있소. 그래
당신은 정말 저 아이가 나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소?
헤스터는 생긋 웃고, 또 펄을 불렀다. 펄은 목사가 말한 대로 좀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아치
모양이 큰 가지 사이로 내려쬐는 햇빛을 받아 마치 빛의 옷을 걸친 환영처럼 보였다. 광선이
흔들리는 데에 따라 펄의 모습도 때로는 흐리게, 때로는 또렷하게 보였다. 그때마다 현실 세계에
있는 어린아이로 보이기도 했고, 요정같이 보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왔으므로
펄은 천천히 숲 속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펄은 어머니와 목사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심심하지 않았었다. 크고 어두운 이 숲 속은
속세의 죄악과 고통을 숲 속으로 끌어들인 사람에게는 엄숙하게 보였을지 모르나. 이 외로운
아이에게는 가장 훌륭한 놀이 상대가 되어 주었다. 침울한 숲이기는 했지만, 더없이 친절한
표정으로 펄을 맞이해 주었다. 지난 가을에 열려서 새해 봄에야 무르익은 덩굴호자 딸기를
펄에게 선사했는데, 그 열매는 다 시든 잎 위에서 핏방울처럼 빨갛게 맺혀 있었다. 펄은 이것을
따 먹으며 갓 딴 열매의 싱싱한 맛을 즐겼다. 이 숲 속의 작은 들짐승들은 펄을 위해 일부러
길을 피해 주지는 않았다. 열 마리쯤의 새끼를 거느린 뇌조가 펄을 위협하듯 달려나왔다가
자기의 난폭한 행동을 뉘우치고 새끼들에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꾸꾸 울어 대었다.
나지막한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비둘기 한 마리는 펄이 가까이 가자 환영인지 경고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울었다. 높은 나뭇가지에서 둥우리를 틀고 있는 다람쥐가 성이 난 것인지 장난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울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무튼 펄을 보고 울음소리를
내더니 나무 열매를 하나 머리 위에 내던졌다. 그것은 지난해의 나무 열매로 벌써 다람쥐가
날카로운 이빨로 갉아 먹은 것이었다. 낙엽 위를 걷는 가벼운 발 소리에 잠이 깬 여우 한 마리가
펄을 수상쩍은 듯이 바라보더니, 어디로 도망갈 것인지 그 자리에서 한잠 더 잘것이니지를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리 한 마리가 나타나서 펄의 옷 냄새를 맡자 펄이 사나운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건 좀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대자연의 숲과
그곳에서 자라고 있는 야생 동물들이 이 아이에게 뭔가 공통된 야생미를 발견했다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더욱이 펄은 양쪽에 푸른 잔디가 있는 마을의 거리나, 어머니의 오두막집에 있을 때보다도 이
숲 속에 있을 때가 더 얌전했다.
이 숲 속의 꽃들도 그 점을 알고 있는지 펄이 지나가자 나를 꺾어서 장식해 주세요, 어여쁜
아가씨. 나를 꺾어서 당신을 치장해 주세요! 하고 속삭이는 듯했다.
펄도 꽃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제비꽃이며 아네모네며 미나리풀꽃이며 또 고목에 돋아난
새파란 가지들을 꺾었다. 펄은 이것들로 머리와 허리를 장식하여, 숲 속의 어린 요정이라고
할까, 태고적 숲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 되었다. 펄이 이런 모습으로 몸치장을 하고 있을 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는 천천히 돌아왔다. 목사의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19.시냇가의 어린 요정
저애가 정말 귀여워질 거예요. 헤스터 프린은 목사와 나란히 펄을 쳐다보며 되풀이하였다.
예쁜 아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이름도 없는 꽃으로 저렇게 멋지게 치장한 걸 보세요! 숲
속에서 진주며 다이아몬드며 루비를 모았다 해도 저렇게 어울리진 않을 거예요. 참 귀여운
아이죠! 그런데 저 아이늬 이마가 누구를 닮았는지 나는 알고 있어요!
그런데 말이오, 헤스터. 아더 딤스데일은 불안한 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언제나 당신
곁을 따라 다니는 저 귀여운 아이가 얼마나 나를 놀라게 했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오. 나는
생각했었소. 아아, 헤스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엇으며 그 일을 두려워했다니
참으로 가혹한 일이었소. 저 아이가 나를 꼭 닮아 세상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을까 걱정했었소.
하지만 저 아이는 당신을 더 많이 닮았소!
그렇지 않아요! 나를 많이 닮았다니요! 헤스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만
더 세월이 흘러 보세요. 저 아이가 누구 아이라는 것이 알려져도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아무튼 저 아이는 놀라우리만큼 아름답군요. 저렇게 머리에다 꽃을 꽂고! 마치 그리운
영국에 두고 온 요정이 곱게 치장하고 우리를 마중나온 것 같아요.
두 사람은 펄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기분에 잠겨 있었다.
이 아이한테서 두 사람을 결합시키는 정리가 엿보였던 것이다. 지난 7년 동안 이 아이는 산 주홍
글씨로 세상에 알려져 있을 뿐 이나라, 거기에는 그들이 그렇게도 숨기려고 애쓴 비밀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이 화염의 글씨를 해독할 능력이 있는 예언자나 마술사가 있었다면 이 아이의
모습에 씌어진 모든 것을 확실히 읽을 수 있었을 게다. 더구나 펄은 두 사람의 생명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과거의 죄야 어찌 되었든 간에 두 사람이 함께 영원무궁토록 같이
살게 될 육체적인 결합인 동시에 정신의 표현이기도 한 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그들의
지상에서의 운명과 내세에서의 운명이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은 이곳으로 다가오는 아이에게 일종의 숭고한 느낌마저 갖게 하였다.
저 아이에게 말할 때는 정열이나, 열성이나 아무튼 보통과 다른 태도를 보여서는 안
돼요. 헤스터는 속삭였다. 우리 펄은 가끔 작은 요정처럼 변덕스럽고,엉뚱한 짓을 잘 하는
아이니까요. 특히 충분한 이유를 알기 전에는 남의 정을 받으려 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
아이에게는 강한 애정이 있어요! 나를 사랑하듯이 당신도 사랑하게 될 거예요!
당신은 짐작도 못 한 일이겠지만. 목사는 옆에 있는 헤스터 프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만나기를 한편 두려워하면서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하지만 사실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아이들은 여간해서 날 잘 따르지 않소. 내 무릎에 기어오르거나 귀에 대고
조잘대거나 하지도 않고, 나의 미소에도 응답해 주지 않는단 말이오. 먼 발치에 서서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볼 뿐이오. 심지어는 갓난아이들까지도 내가 안으면 꼬집는 것처럼 울어 댄단
말이오. 그러나 펄은 두 번씩이나 나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소. 첫 번째 일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두 번째는 당신이 저 아이와 함께 그 엄격한 총독 집에 왔을 때요.
그때는 당신이 저애와 나를 위해 참으로 용감하게 변호를 해 주셨지요! 헤스터는 대답했다.
저는 잊지 않고 있답니다. 아마 펄도 잊지 않을 거예요. 조금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처음에는 저 아이도 서먹서먹하고 낯설어 하겠지만 곧 당신을 따르게 될 거예요!
이때 펄은 건너편 시냇가에까지 와서, 이끼 낀 나무등걸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헤스터와 목사를 말없이 쳐다보고 서 있었다. 펄이 서 있는 곳은 마침 시냇물이 깊은 웅덩잉를
이룬 곳이라 잔잔한 수면에는 작은 아이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꽃과 풀을 엮어 치장한
모습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같이 느껴졌다. 수면에 비친 아이의 그림자는 형체 없는 그림자의
느낌을 아이 자신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펄은 어떤 공감의 힘에 이끌린 듯 그곳을
비추는 햇빛 속에서 환히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어두컴컴한 숲 속을 통하여 꼼짝도 않고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발치에 보이는
시냇물 속에는 또 한 아이가 -아주 똑같은 한 아이가 황금빛에 둘러싸여 서 있었다. 헤스터는
뭔가 개운치 않은 초조한 듯한 기분이 들며 펄과 자신이 멀여져감을 느꼈다. 숲 속을 돌아
다니는 동안 모녀와 단둘이 살아오던 세계로부터 멀리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려고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헤스터의 이런 느낌은 옳은 것이기도 했고 잘못된 것이기도 했다. 모녀사이가 멀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머니 탓이지 펄의 탓은 아니었다. 펄이 어머니 곁을 떠나 산책을 하는
동안 어머니의 애정 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게 되어, 그 애정의 양상이 달라졌기 때문에
어정어정 돌아온 펄은 늘 있었던 제자리를 발견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이 처한 입장에
어리둥절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망상인진 모르지만. 예민한 목사는 두 모녀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저
시냇물은 두 세계의 경계선으로 당신은 다시는 펄과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아니면 저 아이는 옛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요정 같아서 냇물을 건너지 못하도록 금지를
당한지도 모르겠구려. 저 아이를 빨리 오라고 해요. 저 아이가 저렇게 머뭇거리는 것을 보니
웬지 초조하구려.
착하지, 어서 온! 헤스터는 재촉하듯 말하며 두 팔을 벌렸다. 왜 그렇게 꾸물대지! 그렇게
늑장을 부린 일은 없었지 않니? 여기 계신 분은 엄마 친구야. 너에게도 친구가 될 거야.
앞으로는 엄마 혼자일 때보다 두 배나 더 귀여워해 주실 거다! 어서 냇물을 뛰어넘어와. 넌
아기사슴처럼 잘뛰지 않니!
펄은 이런 달콤한 말에 아무 반응도 없이, 냇물 건너편에 버티고 서 있었다. 맑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어머니의 목사를 번갈아 바라보기도 하고, 두 사람을 함께 쳐다보기도 하며 그들의
관계를 알아내어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더 딤스데일은 아이의 시선을
느끼자, 습관이 되다시피한 무의식적인 몸짓으로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마침내 펄은
기묘하고도 위엄있는 태도로 손을 내밀더니 조그만 손가락으로 어머니 가슴을 가리켰다. 수면
위에 비친 꽃으로 치장한 아이의 그림자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참 이상하구나. 왜 엄마한테 안 오니?
헤스터는 외쳤다.
펄은 얼굴을 찌푸리고 줄곧 엄마의 가슴을 손가락질하고 있어싿. 아직 갓난아이같이 해맑은
얼굴이었으므로 그 찌푸린 표정이 한층 인상적이어다. 계속 손짓해 부르는 어머니가 전에 없이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고 있었으므로 아이는 점점 화가 난 듯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냇물
속에도 인상을 찌푸리고 거만하고 화난 듯한 몸짓으로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그림자가 비쳐,
펄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빨리 오지 못하니, 펄. 엄마가 화낼 테야! 헤스터는 고함을 질렀다. 다른 때 같으면 이
아이의 이런 행동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좀더 얌전해 줬으면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냇물을 건너 이리 뛰어온! 참, 속썩이는구나. 안 오면 엄마가 간다!
그러나 펄은 아무리 엄마가 달래고 위협해도 막무가내더니 갑자기 울화통을 터뜨린 돗 손발을
마구 휘저으며 몸부림을 쳤다. 이 심한 발작과 함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숲 전체에
메아리쳐, 이유도 없이 떼쓰고 심술을 부리는 이 아이에게 수많은 아이들이 동정과 격려를
보내는 것 같았다. 또한 냇물 속에도 화관을 쓰고 띠를 두른 펄이 발을 구르며 미친 듯
몸부림치는 모습이 비쳐 보였으나, 그러는 동안에도 작은 손가락은 여전히 헤스터의 가슴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애가 왜 저러는지 알겠어요. 헤스터는 목사에게 속삭였다. 곤혹을 감추려고 몹시 애를
썼으나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이들이란 날마다 눈챂에 익히 보아 오던 것이
조금 달라지기만 해도 가만치 있지 않는 법이에요. 펄은 내가 늘 달고 있던 것을 떼어버렸다고
저러는 거예요!
헤스터, 부탁이오. 목사는 말했다. 저 아이를 달래는 방법이 있으면 곧 달래 줘요. 히빈스
부인처럼 늙은 마녀가 성내는 거라면 또 몰라도. 그는 애써 웃는 얼굴을 지으며 덧붙였다.
아이들이 저렇게 성을 내는 것은 딱 질색이요. 펄 처럼 귀여운 아이의 분도도 주름투성이의
마녀와 다름없는 초자연적인 힘이 잇으니 말이오.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 아니를 빨리 달래
줘요!
헤스터는 불을 빨갛게 붉히고 옆에 있는 목사를 한 번 쳐다보더니, 급힌 한수음 쉬며 펄
쪽으로 쉬며 펄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입을 열기도 전에 볼의 홍조는 사라지고 죽은
사람처럼 파리해졌다.
펄! 그녀는 슬프게 말했다. 네 발 밑을 좀 봐! 그래, 거기야! 네 바로 앞 말이야! 냇물
이쪽!
아이는 엄마가 말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주홍 글씨는 하마터면 물 속으로 빠질 듯한
아슬아슬한 곳에 떨어져 있었으므로 금빛 수가 물 속에 비치고 있었다.
그걸 이리 가져온!
헤스터는 말했다.
엄마가 와서 가져가요!
펄은 대답했다.
무슨 애가 저렇죠! 헤스터는 목사에게 말했다. 저 아이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은 얘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랍니다. 하지만 사실 저 지겨운 표적에 대한 저 아이의 생각이 옳아요. 나는
당분간 저 괴로움을 참아야만 하겠어요. 며칠만 지나면 되겠죠. 이 고장을 버리고 희생의 나라로
갈 수 있을 때까지! 넓은 바다라면 저 표시를 내 가슴에서 빼앗아 영원희 삼켜 버릴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며 냇가로 걸어가서 주홍 글씨를 집더니 다시 가슴에 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헤스터는 주홍 글씨를 깊은 바닷속에 버려야겠다고 희망에 찬 말을 하고 있었으나, 운명의
손으로부터 이 치명적인 표적을 다시 받아든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숙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무한한 공간 속에 이것을 내팽개치고, 모처럼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했건만 이제 또 주홍 글씨의
비참함이 원래의 자리에서 번쩍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죄악이란 이렇게 뚜렷한 형태로 나타난
경우이든, 그렇지 않은 경우이든 숙명적인 셩격을 띠게 마련인가 보다. 헤스터는 윤기 있는
머리를 틀어올려 모자 속으로 쑤셔 넣었다. 이 슬픈 글자 속에는 생명을 시들게 하는 마술이라도
숨어 있는지 헤스터의 포근한 여성미는 스러져 가는 햇빛처럼 금방 사라져 버리고 잿빛 그림자가
내리덮였다.
이렇게 쓸쓸한 모습으로 변한 헤스터는 펄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젠 엄마를
알아보겠니, 펄? 나무라는 듯한 투였으나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냇물을 건너와서 엄마라고
불러 주겠지, 이 수치의 표시를 달았으니! 다시 슬픈 엄마가 되었으니!
응, 그럴게! 아이는 대답을 하자 단숨에 냇물을 뛰어 넘어 헤스터를 두 팔로 얼싸안았다.
이젠 우리 엄마야! 난 엄마의 펄이고!
여느때에는 볼 수 없는 상냥한 태도로 펄은 어머니의 얼굴을 끌어당기더니 이마와 양쪽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어쩌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 주면서도 마음 아프게 해 주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듯이 펄은 입을 내밀어 주홍 글씨에도 키스를 했다.
이상한 짓을 하는구나! 헤스터는 말했다. 엄마를 좀 사랑해 주는가했더니 이젠 조롱하고
있구나!
왜 목사님이 저기 앉아 있지?
펄이 물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는 거야. 어머니는 대답했다. 자, 축도를 부탁하자!
목사님은 펄이 아주 좋으시대, 엄마도 좋고. 너도 목사님이 좋아질걸? 가자, 너와 이야기하고
싶으시다는구나!
목사님이 우리가 좋으시대? 펄은 영리한 눈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우리와
함께 손을 잡고 셋이서 마을로 돌아가는 거야?
지금은 안 돼, 펄. 헤스터는 대답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우리와 함꼐 손을 잡고 걷게 되실
거야. 우리 세 사람의 따뜻한 집이 생길 거다. 목사님의 무릎 위에 앉아도 되고, 너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시면서 귀여워해 주실 거야. 너도 목사님이 좋아지겠지?
언제나 가슴에 손을 대고 계실 건가?
펄이 물었다.
바보 같으니, 그런 말이 어디 있니! 어머니는 외쳤다. 자, 어서 가서 축도를 해 주십사고
해!
그러나 귀여움을 받는 아이가 자기 입장을 위태롭게 하는 경쟁자가 나타나면 본능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질투심 탓인지, 아니면 변덕스러운 성격탓인지 펄은 목사에게 매정한 태도를
보였다. 어머니는 억지로 펄을 목사 앞으로 데리고 갔는데. 펄은 뒷걸음질치며 아주 싫다는
표정을 갖가지 찡그린 얼굴로 나타냈다. 펄은 태어났을 때부터 여러 가지 찡그린 얼굴을 보여서
자기 마음먹은 대로 표정을 바꿀 수 있었으며, 그 표정 하나하나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목사는 몹시 당황하여, 혹시 키스라도 해 주면 어린아이의 환심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몸을
굽혀 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펄은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냇가로 달려가, 기분
나쁜 키스가 몸에서 씻겨 내려가도록 이마를 물에 담그고 있었다. 그 동안 두 사람은 사태의
변화로 필요하게 된 준비며 곧 이행해야 할 목적 등에 대하여 의논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은 끝을 맺게 되었다. 조그만 골짜기는 다시 침침한 고목들
틈에 쓸쓸한 장소로 남게 되었다. 그 고목들은 수많은 혀로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속삭이게
되겠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울한 시냇물은 작은 가슴에 벅차게 안겨진
이야깃거리에다가 이 새로운 것을 하나 더 얻은 셈이 되었다. 구슬픈 이야기를 속삭이며 흐르고
있는 시냇물의 흐름은 오랜 세월에 비하여 조금도 명랑해지지 않았다.
20.미로에 서 있는 목사
헤스터 프린과 펄보다 한 발 앞서 그곳을 떠난 목사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모녀의 흐릿해지는
얼굴 모습이며 윤곽만이 어슴푸레한 숲 속에 남아 있었다. 그는 생활 속에 일어난 이토록 큰
인생의 변화를 단번에 현실로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잿빛 옷을 입은 헤스터는 아직도 그
고목 옆에 서 있었다. 아주 옛날 돌풍에 쓰러져 오랜 이끼에 덮인 그 고목위에,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진 숙명의 두 사람이 걸터앉아 잠깐의 휴식과 위안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펄이 -방해가 되던 제감자가 없어졌으므로 시냇가에서 사뿐사뿐 춤을 추며
다가와서 여느때처럼 어머니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 목사는 지금까지 잠이 들어 꿈을
꾼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마음을 기묘한 불안으로 괴롭히며 흐릿하게 이중으로 번져 보이는 인상을 뿌리치기
위하여 목사는 헤스터와 함께 세운 출발 계획을 돌이켜 생각하며 다시 세밀히 검토해 보았다.
사람이 많고 큰 도시가 있는 구대륙이, 인디언의 오두막들이나, 유럽 사람들의 개척지가 해안을
따라 드문드문 늘어서 있을 뿐인 뉴잉글랜드나 미국 각지의 황야보다도 더 적절한 은신처가 될
것이라고 두 사람은 결정지었던 것이다. 목사의 건강이 숲 속 생활의 괴로움을 견디어 나가는 데
적당치 않을뿐더러 그의 타고난 재능, 교양, 성격면으로 봐서도 문명과 진보 속에서밖에
정착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 문명과 진보의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이 사람은 더
그 사회에 잘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단을 부추기듯 때마침 배 한 척이 항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배는 그 무렵 자주 뽈 수 있었던 수상쩍은 순항선으로 반드시 해적선이라고
할 수 없으나 제멋대로 바다 위를 횡행하고 있었다. 이 배는 카리브 해의 연안 부근에서 최근에
입항했는데, 사흘 뒤엔 브리스톨을 향해 출항하기로 되어 있었다. 헤스터 프린은 자칭 자선
부인회원이란 직함을 내세워 선장이며 승무원들과 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어른 둘과 아이 한
명의 배편을 헤스터 프린이 마련하기로 했는데, 주위의 사정으로 봐서 비밀은 지켜야만 했다.
목사는 적잖은 관심을 가지고 배가 출항하는 날짜를 헤스터에게 물었다. 나흘 뒷면 떠날
것이라는 대답을 듣고 목사는 잘 되었군! 하고 혼자 생각했다. 그러나 사흘 뒤에 목사는 총독
취임식에 축하 설교를 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기회는 뉴잉글랜드의 목사로서는 평생의 명예라고
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성직을 떠나려는 이 마당에 이보다 더 적절한 방법과 시기를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목사로서의 의무를 이행치 않았다거나 적당히 해치웠다는 말은 안하겠지!
하는 것이 이 모범적인 목사의 생각이었다. 이 불쌍한 목사 만큼 심오하고 예리한 자기 반성을
갖는 사람이 이처럼 비참하게 기만당해야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이처럼 서투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그 성격의 근본이 미묘한 병균의 침식을 받아
온 사실이, 이처럼 사소하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뚜렷한 증거로 나타난 일은 없을 것이다.
꽤 오랜 시일을 두고 자기 자신에게 보이는 얼굴과 타인에게 보이는 얼굴이 다른 이중인격적인
인간은 어느 얼굴이 진정한 자기 얼굴인지 혼돈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헤스터와 헤어져 돌아올 때 딤스데일 목사의 감정은 흥분하여 여느때엔 볼 수 없는 기력이
솟아났다. 숲 속의 길은 갈 때 보았던 것보다 훨씬 황량하고, 울퉁불퉁한 자연의 방해물이
많은데다 사람의 발자취도 드물었다. 그러나 목사는 물웅덩이를 건너뛰고, 몸에 얽혀드는 덤불을
헤치며 언덕길을 올라가고, 움푹 패인 데로 뛰어내렸다. 자기 자신도 놀랄 만큼 지칠 줄 모르는
원기로 험한 길을 거침없이 나아갔다. 겨우 이틀 전만 해도 바로 이 길을 숨이 차서 몇 번이나
쉬어 가며 힘없이 걷던 것을 생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눈앞에
나타난 낯익은 풍경들이 완전히 달라진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 풍경을 마자막으로 본 것이
하루이틀 전의 일이 아니라 여러 날, 아니 여러 해 전의 일인 것 같았다. 확실히 낯익은
길거리의 모습은 그대로였고, 집집마다 특징 있는 처마의 모양도 그대로였으며, 아마 이쯤이었지
하고 생각나는 곳에는 반드시 바람개비도 달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달라진
듯한 느낌이 집요하게 머리를 쳐들었다. 도중에서 만나는 아는 사람들이며 이 작은 거리에
낯익은 인간 생활의 여러 가지 모습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나이를 더 먹은
것도 아니고 젊어진 것도 아니었다. 노인들의 턱수염이 더 희어진 것도 아니고 어제까지
기어다니던 갓난아이가 오늘은 걸어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엊그제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목사의 뿌리 깊은 느낌은 사람들이
달라졌다고 알려 주는 것이었다. 자기 교회의 담벼락 옆을 지나갈 때도 같은 인상을 받게 되어
놀라고 말았다. 건물 그 자체가 낯설어 보이는 동시에 낯익어 보이기도 했으므로 딤스데일
목사의 마음은 두 갈래 생각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꿈속에서만 교회를 보아온
것인가, 아니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갖가지 형태로 나타난 이런 현상은 외면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낯익은 장면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에 중대한 변화가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에 그 사이의 하루가 마치 몇 년이나
된 것 같은 작용을 그의 의식에 일으켰던 것이다. 즉 목사의 의지와 헤스터의 의지, 그리고 그
두 의지 사이에서 태어난 운명이 이와 같은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전과 다름없는 거리였지만 숲에서 돌아온 목사는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친구들을 만났으면
이렇게 말했을느지도 모른다.
나는 자네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 아닐세! 그 사람은 숲 속 깊숙한 골찌기에 두고
왔다네! 이끼 낀 고목나무가 쓰러져 있는 음침한 냇가 옆일세. 자네들이 생각하고 있는 목사를
찾으려면 그곳에 가 보게. 그녀석의 수척한 몸, 여윈 볼, 창백하고 우울한 고통으로 일그러진
이마 등이 벗어던진 옷처럼 그곳에 팽개쳐져 있을 걸세!
물론 친구들은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니가! 하고 말하겠지만, 틀린 것은 그들이지 목사는
아니었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딤스데일 목사의 정신은, 그의 사고와 감정의 영역에 크나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마음 속의 왕국에서, 왕조와 도덕률이
완전히 변해 버렸다는 것 이외에는, 이 불운과 놀라움에 허둥대고 있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모든
충동을 적절히 설명해 주는 것은 없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목사는 무엇인가 기묘한 장난을 해 보고 싶은 충동에 사러잡혔다. 그것은
또 발작적인 동시에 의도적이었고 무의식적이면서도 그런 충동을 억제하려는 자아와는 다른,
좀더 깊은 곳에 자리잡은 자아로부터 생겨났다는 느낌이었다. 예를 들면 교회 장로 한 사람을
만났을 때였다. 정직한 노인은 아버지와 같은 애정과 장로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목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이로 보나 교회 안에서의 지위로 보나 그건 마땅한 일이었다. 그 태도에는 목사의
지위와 또 목사 자신에 대해서, 당연히 요구되는 정중한 존경심이 섞여 있었다. 사회적 지위나
재능이 뛰떨어진 사람이 보다 높은 사람을 대할 경우와 같이, 이것은 노령의 예지와 위엄이
복종과 존경에 잘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훌륭한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딤스데일
목사는 이 흰 수염의 장로와 몇 마디 말은 나누는 동안 성찬에 대해 마음속에 떠오른 불경스러운
생각을 입 밖에 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혀가 이런
무서운 말들을 지껄이지는 않을까? 본심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일을 혀가 멋대로 찬성한다고
지껄이지나 않나 하고 이가 딱딱 마주칠 정도로 떨렸으며,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두려움에 떨면서도 눈앞에 있는, 믿음이 깊고 선량한 이 노인이 목사의
불경하기 이를데없는 말을 듣고 얼마나 대경실색할까 하는 생각을 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밖에도 또 하나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부지런히 걷고 있던 딤스데일 목사는 교회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여신도를 만났다. 참으로 신앙심이 깊고 모범적인 노파로 가난하고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과부였다. 마치 비문을 새긴 비석이 잔뜩 들어선 묘지처럼 죽은 남편이나 아이들,
그리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 버린 친구들에 대한 추억이 그녀의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러한 추억은 다른 사람의 경우라면 침울한 슬픔이 되었겠지만, 30년 이상이나 계속 마음의
양식으로 삼아 온 종교적인 위안과 성서의 진리에 의해, 신앙심이 두우터워진 이 노파에게는
그것은 일종의 엄숙한 기쁨이 되었다. 더구나 딤스데일 목사가 그녀를 신도로 맞은 뒤부터는 이
노파가 속세에서 받는 유일한 위안은 목사를 우연히 만났거나, 일부러 만나러 갔거나 하였을 때,
잘 들리지 않는 귀로 정신을 집중하고 이 경건한 사람의 입술에서붜 흘러나오는 따뜻하고
향기로운, 천국의 입김이 서려 있는 복음의 진리를 듣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 딤스데일 목사는
노파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대는 순간까지도 성서의 구절은 하나도 생각나지 ㅇ낳고, 인간의
영혼 불멸설에 이의를 주장하는, 짧고도 신랄하고 반론의 여지조차 없을 듯한 몇 마디 말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것은 영혼의 큰 적인 악마의 소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말이
노파의 마음에 주입되었더라면, 그녀는 맹독이 온몸에 퍼지기라도 한 긋이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져 버렸을 것이다. 사실상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 목사는 그 뒤에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다행히 목사의 말이 지리멸렬하여 선량한 미망인이 확실한 뜻을 이해할 수 없었거나,
아니면 독특한 방법으로 적절한 설명이 가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목사가 돌아보았을 때
주름투성이의 파리한 노파의 얼굴에는 하늘나라의 빛이라고 생각디는,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희열의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이어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연로한 교인과 헤어진 다음 목사는 이번에는 교회에서 가장
나이 어린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처녀는 철야 기도가 있은 다음날인 안식일에 딤스데일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입교한 여자였다. 그날 설교의 내용은 속세의 덧없는 쾌락을 버리라.
우리의 인생이 어두워질수록 더욱 빛을 발할 뿐 아니라, 마침내 영광스러운 최후의 날, 이
세상의 모든 암흑을 몰아낼 천국의 희망을 마음속에 간직하라 라는 것이었다. 처녀는 천국에 핀
백합꽃처럼 아름답고 청순했다. 목사는 이 처녀의 순결성을 부여해주고 있음을 목사는 잘 알고
있었다. 불쌍하게도 이 처녀가 그날 오후 어머니의 겉을 떠나, 이 사나이가 지나가는 길목에
나타나게 한 것은 악마의 소행임에 틀림없다. 처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악마는 목사에게 검은
꽃을 피게 하고, 때가 되면 검은 열매를 맺을 악의 씨를 조그맣게 뭉쳐서 소녀의 부드러운
가슴에 내던지라고 속삭였다. 진심으로 자신을 믿고 있는 이 청순한 처녀의 영혼에 대하여
목사는 강대한 지배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악으로 흐려진 눈으로 한 번만 쏘아보면 더없이
깨끗한 영혼을 말려 죽이고, 단 한마디의 말로써 사악한 영혼을 조장시킬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목사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더 강한 자게력을 가지고 설교용의 긴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상대방을 못 알아본 체하고 재빨리 지나갔으므로 그 나이 어린 처녀는 목사의
무례한 태도에 얼굴이 파리해졌다. 처녀는 자신의 양심을 -포켓이나 바느질 주머니처럼
자질구레하면서도, 고운 물건이 잔뜩 들어 있는 양심의 주머니 속을 뒤적였다. 가엾게도
이것저것 자기가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잘못을 들춰내어 자신을 책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퉁퉁 부은 눈으로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다.
이 마지막 유혹을 이겨 낸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목사는 또 다른 충동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더 허황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그것은 길 한가운데 서서 거기서 놀고 있는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한 청교도 아이들을 붙잡고 아주 불순한 말은 몇마디 가르쳐 주고 싶은 충동이었다.
이와 같은 행동은 자신의 목사복 때문에라도 차마 그럴 수 없다고 자제하고 있을 때, 그
카리브 해 근처에서 온 술취한 선원 한 사람을 만났다. 지금까지의 다른 유혹은 모두 잘
참아왔으므로 타르투성이의 취한과 악수를 나누고, 건달 같은 선원들이 즐겨하는 음란한 농담을
지껄이거나 노골적이고 위세 있게 가슴이 후련해질 만큼 하느님에 대한 욕설을 연발하여
기분전환을 해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위기도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도덕심 때문이 아니라, 그의 타고난 고상한 취미와, 평소의 엄격한 목사로서의 습관 때문이었다.
이렇게 나를 성가시게 유혹하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목사는 길거리에 멈춰 서서
손으로 이마를 치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완전히 악마의 손에 넘어간
것일까? 숲 속에서 악마와 계약하고 피로 서명을 했단 말인가? 그래서 악마의 비열한
상상력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사악한 일들이 차례차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 계약의
실행을 독촉받고 있기 때문일까?
딤스데일 목사가 이처럼 이마를 치면서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 그 유명한 마녀 히빈스
노부인이 그의 곁은 지나갔다. 높은 머리장식과 호화로운 비로드의 옷참임에다, 친구 앤 터너가
토머스 오버베리 살해 사건으로 교수형이 되기 전에 그 비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노란 풀을 먹인
칼라를 달고 있었다. 목사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았는지는 모르나, 이 마녀는 우뚝 멈춰 서더니
상대방의 얼굴을 샅샅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간교한 웃음을 띠며 여느때에는 목사와 인사를
나누는 일조차 없던 그녀가 말을 걸어 왔다.
목사님, 숲 속에 갔다 오셨군요. 마녀는 높게 장식한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다음에는 미리
알려 주십시오. 기꺼이 동반해 드릴 테니까요.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말만 하면 아무리 처음
가는 분이라도 목사님이 잘 아시는 대왕님의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부인. 목사는 대답했다. 그 진지하고 예의바른 태도는 부인의 신분에도 합당하고, 목사가
지닌 교양으로 봐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양심과 인격을 걸고 고백합니담나, 부인
말씀의 뜻을 전혀 모르겠습니다! 내가 숲 속에 간 것은 대왕을 찾으러 간 게 아니며, 앞으로도
그런 분의 융숭한 대우를 받기 위해 숲 속을 찾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곳에 간 것은
나의 친구인 엘리어트 전도사를 마나, 그분이 이교도로부터 기독교로 개종시킨 귀중한 여러
영혼을 함께 축복하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하하하! 늙은 마녀는 높게 장식한 머리를 까딱거리면서 깔깔 웃었다. 그렇겠지요. 대낮에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지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그러나 한밤중 숲 속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합시다!
그녀는 노부인다운 위엄을 가지고 걸어갔지만, 가끔 돌아다보며 비밀의 연고 관계를 알고
있다는 듯 목사는 향해 웃음을 지었다.
목사는 생각했다.
결국 악마에게 내 몸을 팔아 버린 셈인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칼라에 노란 풀을 먹이고,
비로드 옷을 입은 저 노파가 대왕르로 모신다는 그 악마에게!
가엾은 목사여! 목사는 영혼을 팔아 넘기는 것과 같은 거래를 한 셈이다! 행복한 꿈에 눈이
어두워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스스로 몸을 맡겼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그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죄의 전염성 독은 눈깜짝할 사이에 그이 정신 전역에 퍼져나간 것이다. 이
독은 깨끗한 일체의 충동을 마비시키고, 온갖 더럽혀진 충동을 살아 움직이게 했다. 경멸이나
독설, 이유 없는 악의, 이유 없이 악을 구하는 충동, 선향하고 신성한 것에 대한 조소 -이러한
것들이 모두 눈을 떴고, 목사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유혹된 것이다. 이 히빈스 노부인과의 만남이
환상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면, 목사가 악한 인간들이나 사악한 영혼들의 세계에 공감과
동료의식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때 목사는 이미 묘지 근처에 있는 자기 집에 다다라 있었다. 그는 이층으로 올라가서 서재에
틀어박혔다. 집으로 오는 동안 쉴새없이 자기를 사로잡으려 했던 괴상하고 사악한 충동으로 인해
남 앞에서 정체를 폭로당하는 일 없이 무사히 집에까지 당도한 것을 그는 다행으로 생각했다.
낯익은 서재로 들어간 그는 책이며 창문이며 난로며 벽걸이로 장식한 벽 등을 둘러보았으나 모든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숲에서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줄곧 따라다니던 낯선 감정을
여기서도 느꼈던 것이다. 이 방에서 그는 연구도 하고 글을 썼을뿐더러 단식이나 철야 기도로
초주검되기도 했었다. 또한 기도를 올리며 수천 수백의 고뇌를 견딘 곳도 바로 이 방이었다!
의미심장한 고대 헤브라이 어로 쓰인 성서에서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그에게 말을 걸어 왔으며
하느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잉크가 묻은 펜과 쓰다 만 설교문 원고가
놓여 있었다. 이틀 전에 그의 생각이 중도에서 막혀 문장이 중단된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갖가지 괴로움을 겪고, 또 총독 취임 축하 설교문을 여기까지 써온 것은 바로 여위고
창백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한 발 물러서서 과거의
자기 자신을 조소하고 동정하고 부러워하는 듯한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과거의 그는 사라져 버렸다! 숲에서 돌아온 사람은 딴 사람이었고, 좀더 현명한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단순하고 소박한 과거의 자기로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관한 지식을
지닌 현명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쓰디쓴 지식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목사는 들어 오시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혹 악마가 찾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과연 그 예감은
들어맞았다! 들어온 사람은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목사는 한 속능 헤브라이 어
성서 위에 놓고, 또 한 손은 가슴 위에 얹은 채 파랗게 질려 있었다.
다녀오셨군요! 의사는 말했다. 그 훌륭하신 엘리어트 전도사는 안녕하시던가요? 그런데
목사님, 얼굴빛이 좋지 않군요. 황야를 여행하신 것이 너무 고되었던 모양입니다. 축하 설교를
하시려면 기운을 차리셔야 할 텐데, 도와 드릴까요?
아뇨, 문제없습니다. 딤스데일 목사는 대답했다. 서재에 틀어박혀만 있다가 여행을 하고,
또 그곳에서 성인 같은 전도사님을 만나 뵙고, 전에 없이 자유로운 공기를 쐬었더니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제 선생이 지어 주시는 약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좋은 약인 줄은
압니다만.
이러는 동안에도 로저 칠링워드는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신중하고도 세심한 눈길로 목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목사는 겉으로는 이렇게 태연한 체하면서도 헤스터 프린과 만난 일에
대하여 노인이 이미 알고 있든가, 아니면 적어도 눈치를 챘으리라고 확신했다. 의사 또한 목사의
눈에 자신이 이미 전처럼 신뢰하던 친구가 아니라, 증오하는 원수로 보인다는 것을 알아했다.
그러나 기묘한 일이기는 하지만 말로 어떤 사물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면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며, 어떤 문제를 회피하려 드는 두 사람은 바로 그 코앞까지 가까이 가면서도 전혀
그 문제를 건드리는 일 없이 무사히 물러서는 법이다. 따라서 목사는 로저 칠링워드가 자기들의
비밀에 대하여 확실한 말로 거론하리라는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는 독특하고
음흉한 방법으로 보다 가까이, 무서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오늘 밤만은 제 변변치 못한 의술을 이용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사실 말이지 축하
설교라는 큰 일을 앞두고 건강하셔야 한다고 있는 힘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이 고장 사람들도
목사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답니다. 내년에는 목사님이 이곳에 안 계시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모양이니까요.
그렇죠. 저 세상으로 가 버리면. 목사는 경건한 체념조의 말투였다. 하느님이 좀더 좋은
세상으로 보내 주시면 좋으련만, 정말은 앞으로 1년을 더 교회의 여러분과 함께 지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치료는 현재의 제 건강 상태로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의사는 대답했다. 상당히 오랫동안 아무 효험도 없던 제 약이 이제야
효험을 보이기 시직한 모양이지요. 목사님을 건강하게만 해 드릴 수 있다면 나는 정말 기쁠
것이고, 뉴잉글랜드 전체의 감사를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손색 없는 친구인 선생께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딤스데일 목사의 미소는 엄숙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의 친절에는 기도로 보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훌륭한 분의 기도는 황금의 사례입니다! 로저 칠링워드 노인은 방을 나가면서 말했다.
옳습니다. 그것은 천제의 조폐국 도장이 찍힌,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통용되는 금화입니다!
혼자 남은 목사는 하숙집 심부름꾼을 불러 식사를 가져오라고 한 다음 왕성한 식욕으로
먹어치웠다. 그러고 난 다음 쓰다 만 축하 설교 원고를 불 속에 집어 던지고 곧 새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무슨 영감이라도 받은 듯이 사상과 정감이 충동적으로 흘러나와 단숨에 써 내려갔다.
자기와 같은 더렵혀진 오르간의 음관을 통해 숭고하고 장엄한 신탁의 음악을 세상에 전달하는
것을 어찌 하느님이 허용하시는지 다만 놀라울 뿐이었다. 그러나 그 위문은 자연히 해결되도록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영원히 미해결로 놔두기로 하고, 목사는 열심히 기쁨에 넘쳐 원고 쓰는
일에 몰두했다. 이리하여 그날 밤은 날개 돋친 말처럼 달렸고, 목사 자신도 그 말을 타고
질주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아침이 되어 커튼 틈으로 황금빛 햇살이 비쳐들어 목사의 눈을
부시게 했다. 그는 여전히 펜을 든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헤아리기 힘들 만큼의 원고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21.뉴잉글랜드 경축일
선임 총독이 임명되는 날 아침 헤스터 프린은 펄은 데리고 마을의 광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벌써 장인들과 시민들이 많이 나와 붐비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험악한 인상을 지닌 사람들도
섞여 있었는데, 그들이 걸친 사슴가죽 옷은 이곳 식민지의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는 숲 속
개척지의 주민들임을 말하여 주고 있었다.
과거 7년 동안 다른 행사 때에도 늘 그러했지만, 이런 경축일에도 헤스터는 거친 회색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의 빛깔보다도 뭔가 형언할 수 없이 기묘한 옷 모양이 그녀의
여자로서의 매력을 완전히 가려 버려 전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희미한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에 달인 주홍 글씨 때문에 헤스터의 모습은 이 희미한 상태에서 되살아나 그 글자가
지니고 있는 도덕적인 빛 속에 뚜렷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었다. 이 거리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낯익어 온 헤스터의 얼굴은 여전히 대리석처럼 침착함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가면과도 같았다.
아니, 차라리 죽은 여자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얼어붙은 듯한 싸늘한 표정이 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이런 불쾌한 연상을 하게 되는 것은, 헤스터가 남의 동정을 살 수 없다는 점에서는
죽은 거나 다름없고, 아직도 그 속에 섞여 살고 있는 것 같은 현실 세계에서도 실은 이미 오래
전에 떠나 버렸다는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히 이날만은 지금까지 볼 수 없던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눈에나
띌 정도로 뚜렷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군가 심안을 가진 관찰자가 있었다면 7년이란
비참한 세월 동안 군중의 시선을 종교적 의무로서, 회오로서, 인내에 인내를 거듭해 온 헤스터가
지금 마지막으로 자진해서 군중의 시선과 맞섰으며, 오랫동안 고통받아 오던 것을 이제 승리와
흡사한 것으로 바꾸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주홍 글씨와 주홍 글씨를 단 여인을 마지막으로 보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희생물이기도 하고, 종신 노예처럼 여겨지던 헤스터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얼마 안
있으면 당신네들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가 버릴 것입지다! 앞으로 몇 시간 뒷면 깊고
신비스러운 바다가 당신네들이 내 가슴에 불타게 했던 표시를 영원히 흔적도 없이 삼켜 버릴
것입니다!
동시에 또 이처럼 가슴에 깊이 뿌리박고 이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에 헤스터의
마음속에 서운해하는 마음이 생겨났으리라고 상상한다 해도 인간의 심리에 비추어 볼 때 과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며, 모순된 것만도 아닐 것이다. 여인으로서 한창 나이의 태반을 통해
맛보아야 했던 쑥이나 알로에의 쓴 잔을 마지막으로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마셔 버리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있었던 게 아닐까? 앞으로 그녀의 입술에 닿을 인생의 술은 황금으로
조각한 잔에 부은 진하고 향기롭고 달콤한 술일 것이다. 아니면 지금까지 마셔온 쓰디쓰
술찌끼를 먹은 탓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나른한 권태감을 남기게 될 것이다.
펄은 화려하고 산뜻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이 태양처럼 눈부신 환상적인 소녀가 우중충한
회색 옷을 걸친 여인에게서 태어났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으며, 이 아이의 옷을 치장해 주는
데 발휘됐을 호화롭고 섬세한 상상력이 헤스터의 검소한 옷에 뚜렷한 특이성을 주었던 -한층
힘드는 일이었던 상상력과 같은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 옷은 펄에게 너무나 잘
어울려 마치 그 아이의 성품이 저절로 유출되어 형상화 된 듯하였다. 나비의 날개나
꽃잎으로부터 그 아름다운 색채를 분리할 수 없듯이 이 아이의 복장과 성격은 표리 일체가 된
것이다. 게다가 떠들썩한 경축일인 이날, 펄의 모습에는 기묘하게 침착성을 잃은 흥분이
엿보였으며, 그것은 마치 가슴에 장식된 다이아몬드가 가슴의 고동에 따라 가지각색으로 빛나는
것과 흡사했다. 아이들이란 언제나 가까운 사람들의 동요에 공명하는 법이어서, 특히 집안에
근심거리가 있다든가 또는 큰일이 닥쳤다든가 할 때에는 어떤 종류의 일이든 반드시 알아채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어머니의 불안한 가슴 위에 장식된 보석이라 할 수 있는 펄이었으므로,
이 아이의 설렘 그 자체는 헤스터의 대리석 같은 이마에서 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 동요를
무언중에 말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흥분 때문에 어머니 곁을 얌전히 따라갈 수만은 없었던 펄은 새처럼 그 둘레를
깡충깡총 뛰고 있었다. 끊임없이 재작거리며, 때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귀아프게 불렀다.
그들이 광장에 이르러, 사람들이 와글대고 활기에 넘쳐 있는 것을 보자 펄은 점점 더 침착성을
잃었다. 왜냐하면 평소에 이 일대는 도시의 상업 중심지라기보다 마을의 교회당 앞에 있는
쓸쓸한 풀밭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리는 장쇼였기 때문이다.
엄마, 이게 웬일이야? 펄은 큰 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왜 다들 일을 안하지? 온 세상이 다
노는 날인가? 저것 봐, 대장장이가 있어요! 검정투성이의 얼굴을 깨끗이 씻고, 새 양복을
입었어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이지만, 누군가 친절한 사람이 흥겹게 이끌어 줘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저쪽에 간수 브랫킷 할아버지도 계셨어. 나를 보고 끄덕이며 웃고 계시던데. 왜
그러지, 엄마?
갓난아기 때의 너를 알고 있어서 그러는 거야.
헤스터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나를 보고 웃는 건 기분 나빠요. 불쾌하고 침울한 얼굴에 눈처리가
무서운 할아버지니까! 펄은 말했다. 엄마는 회색 옷에 주홍 글씨를 달고 있으니까 끄덕이면서
대꾸해도 될 거야. 그런데 엄마, 저기 보세요, 낯선 사람들이 얼굴이 굉장히 많아요. 인디언도
있고 뱃사람도 있어요! 저들이 이 광장에 뭣하러 왔죠?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헤스터는 말했다. 총독님과 판사님들이
지나가시는 거야. 또 목사님이며, 높고 훌륭한 분들도 가시지. 악대와 군인들을 앞장세우고
행진하는 거란다.
그럼 그 목사님도 계시겠네? 펄이 물었다. 엄마가 나를 시냇가에 데리고 갔을 때처럼,
목사님이 나한테 두 손을 내밀어 주실까?
그야 목사님도 계시지. 어머니는 대답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는 체도 안하실 거고, 너도
인사를 하면 안 된다.
참으로 이상하고 슬픈 목사님이시네! 아이는 이렇게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두운 밤에는
우리를 불러 엄마와 내 손을 잡아 주겠지! 오전에 저 처형대 위에 섰을 때처럼, 또 숲 속에서
고목만이 귀를 기울이고 좁은 하늘 만이 보고 있을 때는 엄마와 이끼더미 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셨는데! 내 이마에도 입을 맞취 주었지만 시냇물로는 여간해서 씻어낼 수 없었어! 하지만
지금처럼 환한 대낮이거나 여러 사람 앞에서는 우리는 서로 모르는 체 해야 하거든! 언제나
감슴에 손을 얹는 이상하고 슬픈 목사님이야!
조용히 해요, 펄! 그런일은 아직 너는 몰라도 돼요. 어머니는 말했다. 이젠 목사님 생각은
하지 말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나 보란 말이야. 오늘은 모두들 얼굴이 얼마나 평랑해 보이니,
아이들은 학교가 파했고, 어른들은 일터나 밭에서 일을 끝내고 와서 즐겁게 지내려는 거야.
오늘은 새로운 분이 총독님이 되시는 날이야. 그러니까 다들 명랑하고 즐겁게 사람들이 모여
나라가 처음 세워진 이후로 줄곧 이렇게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단다. 가난하고 낡은 세계가
없어지고, 살기 좋은 훌륭한 시대가 닥쳐오기라고 하듯이 말야!
사람들의 얼굴을 밝게 하고 있는 진기한 명랑함에 대해서는 헤스터가 설명한 바 그대로였다.
이렇게 북적대는 연중행사에 청교도들은 약한 인간성에 대해서 허용해 주어도 좋다고 인정되는
즐거움과 공적인 기쁨을 모두 한데 몰아서 압축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싸 평소에
쌓였던 우울한 구름을 완전히 몰라내려 했던 것이다. 단 하루의 경축일인 이날만큼은 그 침울한
얼굴 표정도 누그러지는 법이지만, 다른 사회에서라면 범사회적인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 보일
정도의 심각한 표정은 역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 시대의 기풍이나 풍 속의 특징이었던 회색 내지 검은 색의 음색을 너무
지나치게 과장하여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이 보스턴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날 때부터
청교도적인 침울성을 타고나 것은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본디 영국인이었고, 그들의 아며지
대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밝고 풍족한 시대에 살았던 것이다. 이 시대야말로 영국민의 생활을
전체적으로 개관할 때, 지금까지 세계에 알려진 어느 시대보다 장려하고 웅대하고 기쁨에 넘친
시대였다. 이러한 전통적 취미를 좇았다면 뉴잉글랜들의 이주민들은 공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열리는 날에는 불꽃놀이.연회.가장행렬 등으로 장식했을 것이다. 장엄한 의식을 거행함에
있어서도 장엄한 기분과 즐거운 오락을 결부시켜 국민의 몸에 걸치는 예복에다 괴상하리만큼
화려한 수를 놓는 것쯤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곳 식민지에서 정치상의 새해가
시작되는 이날을 축하하는 자세에도 이런 종류의 시도가 다소나마 그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총독의 임명이란 연중행사에 관련하여 뉴잉글랜드의 선조가 시작한 관습에는 화려한 수도 런던의
대관식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시장 취임식 떄 보았던 황려했던 기억을 어설프게나마 바영하고
있었다. 비록 훨씬 동떨어진 경향은 있었지만, 그대로 하나늬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
공화국의 선조이며 창건자인 정치가나 목사나 군인들은 위풍당당한 외관상의 의식이나 의례를
갖추는 일을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외관은 옛 관습에 따라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합당한 옷차림과 같은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위 인사들이 대중
앞에서 행진을 함으로써 구성된 지 얼마 안되는 정부의 단순한 기구에 필요한 위엄을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종교와 동일시되던 각종 노동에 대해서도 이날만은 그에 따르는
규정을 완화해 준다기보다 대체로 묵인하는 형편이었다. 물론 엘리자베스 여황 시대나 제임스 왕
시대의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일반 대중을 위한 오락 시설도 없었고, 하프를 타며
전설적인 가요를 노래하는 음유 시인도 없었고,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원숭이를 구경시키는
광대도 없었으며, 마술을 흉내내는 마술사도 없었다. 그리고 아마 몇 백 연도 더 묵은 이야기일
테지만 여전히 재미있는, 일반 대중을 웃기는 점에서는 아직도 다를 바 없는 재담을 늘어 놓는
익살꾼도 없었다. 이렇게 사람을 즐겁게 하는 여러 분야의 재주꾼들은 엄격한 법적 제재를 받을
뿐 아니라, 그 법률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반 대중에 의해서도 엄격히 억제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그런대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이주민들이 아주 예사날 영국에
살았을 때 시골의 축제일이나 마을 잔디밭에서 구경하거나 긱접 참가한 일이 있는 운동 경기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필요 불거결의 용기나 담력을 위해서도
신천지에 보존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레슬릴 시합은 콘훨 지방과 데본셔 지방의 방식이
저마다 다르기는 했지만, 광장의 겨기저기서 시합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육척봉
시합이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사람들의 흥미를 끈 것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쳐형대 위에서 두 검술 사범이 방패와 칼을 들고 시작한 모범 시합이어싿. 이 시합은 관리가
제지하여 중단되는 바람에 관중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 관리는 처형대와 같은 시성한 장소가
이렇게 모독당하여 법의 위엄이 손상되는 것을 묵인할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그 무렵의 대중들은 경축일을 즐긴다는 점에선, 우리들처럼 시대적으로 훨씬
차이가 있는 후대 자손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2세, 즉 초기 이주민들의 다음 세대야말로 청교도주의가 가장 어두운 색채를 때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국민의 얼굴빛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그 뒤 수십 년이 지나도 그 그림자를
완전히 없애 버릴 수는 없었다. 우리는 잊혀진 놀이의 방밥을 다시 한 번 배워야 할 것이다.
광장에서 볼 수 있는 인생은 대체로 영국에서 이민해 온 이주민들이 지닌 슬픈 회색이나 갈색,
또는 흑백의 빛깔을 띠고 있었지만, 그 중에는 색다른 빛깔이 섞여 있어 약간의 활기를 띠고
있었다.
군중과 좀 떨어진 곳에 한 떼의 인디언들이 서 있었는데 그 엄숙하고 굳은 표정은 청교도들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이처럼 물감을 더덕더덕 칠한 야만인의 모습은 세련되지는 못
하였을망정 이 광장 안에서 가장 거칠어 보인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가장 난폭해 보이는 모습은
총독 취임의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상륙한 선원들 -카리브 해에서 온 한 무리의 선원들이었다.
얼굴은 까맣게 타고, 수염이 터부룩한 난폭자인 이들은 짧은 나팔바지의 허리를 혁대로
졸라맸는데, 세공을 하지 않은 금장식을 단 이도 있고, 장검이나 단검을 매달고 있기도 했다.
야자나무 잎으로 만든 챙 넓은 모자 밑으로는 기분좋게 장난치고 있을 때도 짐승처럼 잔인한
눈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묶어 놓고 있는 행동의 규범을 아무런 불안이나
걱정도 없이 마구 짓밟고 있었다. 관리들의 코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웠다. 이곳 주민들이 그런
짓을 했다면 한 모금에 1실링의 벌금을 치르게 되었을 것이다. 또 그들은 호주머니에서 술병을
꺼내어 포도주나 화주를 병째 들이키고는 놀라서 바라보는 군중들에게도 호기롭게 병을 내밀어
권했다. 선원들이 육지에서 이처럼 무법자와 같이 행동하는 것뿐 아니라, 본디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해상에서 저지르는 불합리한 행위에 관해서도 자유가 허용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도독이 아무리 엄격했다고는 하나 역시 불환전했다는 점을 말해 준다. 그 무렵의 뱃사람들은
오늘날의 기주으로 보자면 해적으로 처벌받을 존재였다. 이를테면 지금 화제로 삼고 있는
선원들도 당시의 뱃사람치고는 그다지 흉악한 표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스페인의
무역선을 약탈한 죄를 범했으니만큼 현대 법정에 나간다면 전원이 다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아득한 옛날 그 무렵의 바다는 제 마음대로 출렁거리며 파도치고 거품을 일게 했으며,
미쳐 날뛰는 폭풍에 지배될 뿐이었으므로 인간의 법률로는 달랠 도리가 없었다. 바다의
무법자들도 직업을 버리고 일단 결심만 하면 당장에라도 육지로 올라와 성실하고 믿음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일생 동안 불합리한 일을 계속하고 있는 그들과 거래를 하거나
간간이 교제하는 일도 그다지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검은 망토에 풀을
먹인 칼라, 거기다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쓴 청교도의 장로들도 선원들의 떠들어 대는 무례한 꼴을
보아도 그저 너그럽게 웃어 넘기는 것이었다. 또한 의사인 로저 칠링워드 노인과 같은 점잖은
시민이 수상한 선장과 함께 다정하게 속삭이며 광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하더라도
특별히 놀라거나 비난을 하는 일은 없었다.
선장은 참으로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군중들 틈에서도 유별나게 눈에 띄었다. 양복에는
수없이 리본을 달았으며 모자에는 금테를 둘렀을 뿐 아니라 그 둘레에도 금사슬을 감았고,
끝에는 깃털을 꽂고 있었다. 허리에는 칼을 찼고 이마에는 칼자국이 나 있었는데, 머리카락을
내려 이러한 상처를 가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삼아 드러내 놓으려는 것 같았다.
육지에 사는 사람이 이런 옷차림이나 얼굴을 버젓이 내놓고 거리를 활보했다간 당장 재판관 앞에
불려가 단단히 심문을 받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벌금형이나 금고형, 혹은 수갑을 차고 갇히든지,
아니면 군중 앞에 거경거리가 되는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선장의 경우는 마치
물고기에 번쩍이는 비늘이 달려 있듯이 모든 것이 선자의 신분에 합당한 차림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의사와 헤어진 다음 브리스톨 행 배의 선장은 광장을 어슬렁어슬렁 돌아 다니다가, 이윽고
헤스터 프린이 서 있는 곳까지 오자 상대방을 알아본 듯 서슴지 않고 말을 걸었다. 헤스터가 서
있는 곳은 언제나 그러했지만, 그녀의 둘레에는 마술의 원처럼 동그란 공간이 나 있었다. 그
둘레에서 사람들은 서로 밀리고 밀치고 하면서도 그 속으로는 아무도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았고,
감히 그런 마음을 먹는 이도 없었다. 그것은 주홍 글씨가 운며으이 여인을 가두어 놓고 있는
강한 정신적인 고립 같은 것은 나타낸 것이었다. 헤스터 자신이 사양하는 탓도 있었지만, 이곳
사람들이 전처럼 불친절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역시 본능적으로 멀리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이 공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즉 헤스터와 선장은 남이 엿들을까 봐 걱정할 필요 없이 말을 나눌 수
있었다. 헤스터 프린에 대한 세상의 평판이 일변하여 있었기 때문에, 이 거리에서 가장 정조
관념이 굳기로 이름난 부인일지라도 이 선장과 이야기를 했다면 좋지 못한 소문거리가 되었을
일이지만, 헤스터의 경우엔 그다지 뒷공론을 자아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부인. 선장은 말했다. 부인이 부탁한 것보다도 침대를 하나 더 마련하도록
급사놈에게 일러 둬야겠어요! 이번 항해에선 괴혈병이나 발진티푸스 같은 병이 발생할 염려는
절대로 없습니다! 선의 외에 또 한 사람의 의사가 더 타게 되었으니까요. 걱정되는 것은 약품과
환약뿐이에요. 스페인 배와 거래할 약품이 잔뜩 쌓여 있으니까요.
뭐라고요? 헤스터는 표정에 나타난 이상으로 깜짝 놀라면 물었다. 누가 또 탈 사람이 있단
말인가요?
아니, 모르고 계십니까?
선장은 큰 소리로 외쳤다.
이곳에 사는 의사로, 칠링워드라고 하던가요! 당신네들과 함께 우리 배의 식사를 하고
싶다더군요. 당신도 아실 텐데요. 당신네들과 동행이 되고, 당신이 말씀하시던 그분하고도
친구가 된다고 했으니까요. 그분은 고약한 이곳의 청교도 통치자들에게서 쫓겨나는
몸이라던가요!
물론 두 분은 친한 사이입니다. 헤스터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으나 내심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 왔으니까요.
선장과 헤스터 프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광장 반대쪽 구석에 서서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군중의 말소리나 웃음 소리, 갖자기 기분이나
관심거리 등으로 떠들썩한 광장을 가로질러 전달되는 그 미소는 무섭고도 은밀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22.행렬
헤스터 프린이 정신을 가다듬어 이 새롭고 놀라운 사태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웃 거리에서 군악 소리가 가까이
들려 오기 시직했다. 관리들이나 시민들의 행렬이 공회당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음을 알리는 음악이었다. 공회당에서는 관례에 따라 딤스데일 목사가 총독
취임 축하의 설교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이윽고 행렬의 선두가 천천히 위풍당당한 모습을 나타냈고, 길 모퉁이를
돌아서 광장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우선 군악대가 앞장서 왔다. 악대는 여러
종류의 악기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가락도 잘 맞지 않았으며 솜씨도
대단치 않았다. 그러나 드럼과 클라리온의 조화가 군중에게 호소하려는 큰
목적, 즉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다 높고 보다 웅장하게 보이려는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었다. 펄은 처음에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으나 아침부터 줄곧
어찌할 바를 모르던 흥분이 잠시 가라앉았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잠자코
악대를 바라보았다. 마치 파도 사이에 뜨느 해조처럼 여유있게 굽이치는 음악의
물결에 몸으 맡기고 아득히 먼 곳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악대
뒤를 이어 행렬의 친위대 구실을 하고 있는 보병 중대의 병기와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이 햇빛에 반사되자 다시 흥분된 상태로 되돌아갔다. 이 군대는
금전에 팔린 용병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전원이 애국적인 정신에 고무된
사람들로서, 성당 기사단을 본떠서, 군사학을 배우고, 평시에는 가능한 한도
내의 무술과 전략을 습득하는 일종의 군사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이 군대의 품격에 대한 높은 평가는 중대 각 개인의 당당한
태도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실 대원 중에는 북해 연안 지대를 비롯해 유럽
각지로 종군하여 용사의 이름과 명예를 받을 만한 자격을 훌륭하게 얻은 자도
있었다. 더구나 빛나는 강철로 몸을 단장하고, 번쩍이는 투구 위에 깃털을
휘날리고 있는 모습은 현대인이 아무리 차려 입어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위대 바로 뒤에 따라온 상급 문관들쪽이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외모에 나타난 위엄있는
태도만 보다러도 군인들의 거만한 걸음걸이는 우습기 짝이 없다고 할 것까지는
없어도 좀 저속하게 보였다. 이 당시에는 이른바 재능이라는 것이 현재 만큼
중요시되지 않았고, 인간에게 착실하고 위엄있는 성격을 갖추게 하는 육중한
요서들이 훨씬 중요시되던 시대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선조들로부터 존경심이란
유산을 물려 받았으나 자손들에게 이르러서는 그 정도가 훨씬 미약해졌고,
공직자를 선출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서는 그 힘은 뚜렷하게 약해졌다. 이런
변화는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아마 서로 비슷한 정도일 것이다. 당시 이 황량한
해안지대에 이주해 온 영국인들은 노인의 백발이나 위엄있는 이마, 오랜 시련을
겪은 고결함, 견실한 지식이나 충실한 경험, 언제나 변함없는 느낌을 주며
일반적으로 관록이란 정의에 속하는 무게 있고 침착한 성질에 대해서 존경심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초기 정치간인 브래드스트릿, 엔디콧, 더들리, 벨링햄
등은 대중에게 선출되어 권좌에 올랐으나 반드시 재능있는 사람이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뛰어난 두외와 지성에 의해서보다는 근엄하고 중후한 인품에 의해
돋보였었다.
용기와 독립의 정신을 지닌 그들은 곤란한 위기에 처하면, 노도를 막아내는
안벽처럼 단호히 국민의 안녕을 위해 봉기했던 것이다. 이렇나 특질은 새
식미지 관리들의 네모난 얼굴과 잘 발달한 육중한 체격 등에 여실히 나타나
있었다. 이 타고난 위엄있는 태도에 관한 한, 이들 실제적 민주주의 선구자들이
귀족원에 참가하거나, 국왕의 추밀 고문관으로 임명된다 하여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이 관리들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바로 그 고명한 청년 목사였으며, 이
사람으로부터 경축일을 축하하는 설교를 듣게 되어 있었다. 그 당시는
정치가라는 직업보다도 목사라는 직업이 훨씬 더 지적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성직에 대한 고매한 동기는 접어 두더라도 사회에서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는
직업이었던 만큼 격렬한 야심을 품은 사람도 이 목사라는 직업에 강한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력까지도 인크리스 메이더의 경우처럼 훌륭하게
목사의 수중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딤스데일 목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그가
뉴잉글랜드의 해안에 발을 붙인 이래 행렬에 끼어 행진하고 있는 이때처럼 힘찬
걸음걸이도 아니었고, 자세도 구부러지지 않았으며, 손을 힘없이 가슴 위에
올려놓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이 목사를 보다 정확한 눈으로 보았단면 그 힘은
육체적인 것인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힘이었고,
천사가 그에게 북돋아 준 것이었는지는 모른다. 오랜 시간에 걸쳐 몰두한
사고의 용광로, 그 백열 속에서만 증류될 수 있는 강렬한 영혼의 술이 그에게
원기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목사의 민감한 기질이 하늘 위로 치솟아
올라가듯 울려 퍼지느 음악 소리에 자극되어 활력을 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표정은 넋나간 사람 같았으므로 음악 소리가 딤스데일 목사의 귀에
들렸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확실히 육체는 여느떄와 다른 기세로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정신은 그 영역의
깊숙한 곳에서 이윽고 그곳에서 출발하려는 당당한 사상의 흐름을 정리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기에 목사는 주변의 것이라고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정신력이 허물어져 가는
육체에 힘을 주어 그 무거운 짐을 의식하지 못한 채 걷게 하여 그 자체보다
나은 정신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비범한 지성을 지닌 사람의 경우, 몹시
병약해져 있을 때에도 이러한 위대한 노력의 힘을 때때로 갖게 되며, 이 힘을
얻기 위해 며칠분의 생명을 투입한 나머지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죽은
사람처럼 생기를 잃게 된다.
목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헤스터 프린은 뭔가 무서운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 또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목사가 이젠 자신의 세계와는 전혀 동떨어진, 손이 닿을 수 없는
속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헤스터는 서로 한 번쯤은 눈길을 나눌 수
있으리라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어두운 숲 속의 광경을
돌이켜보았다. 애정과 고뇌에 찬 작은 골짜기와 이끼 낀 통나무에 손을 마주
잡고 앉아서 슬프고 정열적인 이야기를 우울한 시냇물 소리에 실려 보내던 일을
생각했다. 그때는 서로가 얼마나 깊이 이해했던가! 그런데 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란 말인가? 지금은 전혀 낯선 사람 같기만 했다! 그는 지금 위엄있고
덕망있는 장로들의 행렬에 끼어 화려한 음악에 휩싸여서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지나갔다. 사회적 지위로 보더라도 그녀의 손길이 닿을 수 없었고 그의
정신세계에는 더욱 그녀의 손이 미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환영이었나보다. 그토록 선명하게 꾼 꿈이었는데도 목사와 자기 사이에는
어떠한 현실적인 인연도 맺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헤스터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아무리 강인한 헤스터라 할지라도 그녀 또한 여자였다. 두 운명의
무거운 발길이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이런 판국에 목사가 이렇게 두 사람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빠져나가 버리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두 손을 내밀어 더듬어도 그는 잡히지 않았다.
펄은 어머니의 심적 동요를 이내 알아차렸다. 아니면 목사에게 손닿을 수
없는 서먹서먹한 기분을 스스로 느꼈는지도 모른다.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펄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참새처럼 이리저리 퍼득거리며 불안해 하였다.
행렬이 모두 지나가자 펄은 헤스터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엄마, 저분이 시냇가에서 나에게 입맞춰 주던 그 목사님이야?
펄, 제발 잠자코 있어요! 어머니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숲 속에서 있었던
일은 광장에서 이야기하면 안 돼요.
저분은 같은 목사님 같지 않은데. 얼굴이 이상한 걸 뭐. 아이는 계속
말했다. 그런 얼굴이 아니었으면 쫓아가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키스해
달라고 부탁해 보려고 했는데, 어두운 숲 속에서 해 주신 것처럼 말이야. 그럼
목사님은 뭐라고 하셨을까, 엄마? 가슴을 손으로 누르고 나를 흘겨보며 저리
가라고 하셨을까?
뭐라고 말하고말고가 없잖니, 펄. 헤스터는 대답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키스는 광장에서 하면 안 돼요, 하고 말씀하셨겠지. 바보 같으니라고,
네가 목사님께 말을 걸지 않기가 천만다행이다!
딤스데일 목사에 대한 이와 비슷한 기분을 달리 표명한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이 고장 사람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그녀는 해치웠다. 즉, 여러 사람이
보느 앞에서 주홍 글쌔의 여인과 말을 나눈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히빈스
노부인이었다. 그녀는 3단 주름깃에 수를 놓은 흉의, 게다가 황금 손잡이가
달린 단장을 짚은 화려한 옷차림으로 행렬 구경을 나왔던 것이다. 이 노부인은
당시 빈번히 일어나던 마술 행각의 장본인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므로 군중들은
길을 비켜났다. 그 호화로운 주름 속에 역병이라도 숨어 있는 것처럼 부인의
옷자락이 닿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더구나 헤스터 프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것을 보자 히빈스
노부인에 대한 공포감은 곱절로 늘었고, 광장에 있던 사람들은 두 여자가 서
있는 곳에서 슬금슬금 물러났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더라도 여느 사람은 납득이 안 갈 거예요! 노부인은
헤스터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저 목사 말이오!
세상에서는 살아 있는 성인이라고 떠받들고 있고, 사실상 그런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군요! 하지만 저 사람이 행렬 속에 끼어 걸어가는 것을 본다면, 바로
며칠 전에 서재를 빠져나와 숲 속에서 쉬고 있었다고 누가 알겠어요! 아무리
입으로는 헤브라이 어의 성서 문구를 외고 있었다고 해도 말이오. 하하하,
우리는 그 뜻을 알고 있지 않소, 헤스터 프린! 하지만 정말 저 사람이 그
목사라니 아무래도 믿을 수 없어오. 지금 악대 뒤를 따라가고 있는 교회
사람들은 어떤 분이 바이올린을 켜고 있을 때 나와 함께 장단맞춰 춤을 추던
사람들이요. 우리와 손을 잡고 춤을 추던 사람 중엔 인디언의 기도사나
랩란드의 마술사도 있었다오. 그러나 세상 물정을 아는 여자가 보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오. 그러나 말이오, 저 목사는 어떻소! 당신과 숲 속 오솔길에서
만난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소, 헤스터?
부인, 부인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헤스터 프린은 히빈스
노부인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대답했으나, 그토록 많은 사람들과
악마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자신있게 단언하는 데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으며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딤스데일 목사님처럼 학식 있고 신앙심이 두터운
분을 저는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흥, 바보 같은 여자로군! 노부인은 헤스터의 코 끝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내가 그토록 자주 숲 속을 드나드는데, 누구누구가 거길 갔는지
모른단 말이오? 춤출 때 머리에 썼던 화환의 잎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더라도
다 알아요! 헤스터, 당신 일도 알아요. 그 표시가 보이니까. 환한 곳에서야
물론이고, 어두운 곳에서도 불쏙처럼 타고 있으니 말이오, 당신은 그것을
공공연히 달고 다니니까 전혀 문제가 안 되지만, 저 목사는 말이오. 잠깐 귀를
빌립시다! 마왕님은 서명 날인한 자기 부하들 가운데서 딤스데일처럼 계약을
세상에 공표하기를 꺼려하는 자가 있으면, 그 표시를 대낮에 세상 사람들 앞에
폭로하도록 하는 방법을 쓰신단 말이오. 저 목사가 늘 가슴에 손을 엊고 감추려
하는 것은 뭐겠소? 헤스터 프린!
뭐죠, 그게, 히빈스 아줌마? 퍼링 재촉하듯이 물었다. 보셨어요?
아무것도 아녜요, 아가씨! 히빈스 노부인은 정중히 절을 하면서 말했다.
언젠가는 네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거야. 떠도는 말로는 너는 하늘의 제왕인
마왕님의 직계라는 말이 있던데! 언제든 날씨가 맑은 밤에 나와 함께 하늘로
날아가 아버지를 만나 뵙지 않겠니? 그러면 왜 목사님이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지 알게 될 거다!
광장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들릴 만큼 높은 소리로 웃으며 그 기분 나쁜
노부인은 사라져 버렸다.
이때 교회당에서는 예식이 시작되기 전의 기도도 끝나서 설교를 시작한
딤스데일 목사의 목사리가 들려나왔다. 헤스터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교회당 근처로 가까이 갔다. 신성한 건물 안은 초만원이 되어 들어설 틈도
없었으므로 처형대 바로 옆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곳은 목사의 설교가 전부
들릴 만큼 가까운 위치여서 분명치는 않으나 그의 특징있는 목소리가 갖가지
억양을 타고 물렬처럼 흘러 나왔다.
목사의 음성은 그 자체가 천부의 자질을 타고난 것이어서 그의 설교 내용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 어조와 억양만으로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모든 음악과 마찬가지로 그의 목소리는 인간의 마음의 언어인
정열과 비애, 그리고 고귀한 정서와 부드러운 감동을 전해 주고 있었다. 교회당
벽을 통해 들려 오는 그의 말소리는 확실치가 않았으나 온몸으로 귀 기울여
듣고 있는 헤스터는 깊은 공감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알아듣기 힘든 말
자체와는 관계없이 그녀에게는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좀더 분명히 들렸던라면
그의 목소리가 오히려 성가신 매개물이 되어 정신적 의미를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차차 가라앉는 듯한 저음이 들리는가 하면, 이윽고 부드럽고
힘차게 조금씩 고조되어 가는 그의 목소리는 마침내 그 풍부한 음랴의 두렵고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 속으로 헤스터를 휘감아 버렸다. 그러한 목사의 음성은
때로 장중하면소도 비애에 찬 기조음이 언제나 그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높게
또는 낮게 울리는 고뇌의 표현 -괴로움에 허덕이는 인류의 속삭임 같기도 하고,
울부짖음 같기도 한 이 음조는 사람들의 슬픔을 일깨웠다! 때로는 이 깊은
비애의 음조조차 들리지 않고 황량한 침에 한숨 소리만이 가냘프게 들렸다.
목사의 음성이 높아져 경쾌하고 낭랑하게 울릴 때에도, 억누를 수 없이 치솟는
힘으로 우렁차게 쏟아져 나올 때에도, 한없는 폴과 힘에 차서 교회당 벽을 뚫고
밖으로 넘쳐나와 세상 각지로 펴져 나가지 않나 싶을 만큼 교회당 안을 가득
메울 때에도, 귀를 기울인 사람들은 여전히 그 저변을 흐르는 나직한 기조음을
-고통의 절규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죄를 범한 인간의 슬픔에 짓눌린 심정이 그 죄와 슬픔의 비밀을
인류의 위대한 마음에다 호소함으로써 모든 순간에 온갖 말로 동정과 용서를
구하는 하소연의 소리였다. 그것은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목사에게 독특한
힘을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깊고 나직하게 계속되는 저음이었다.
설교를 듣는 동안 내내 헤스터는 처형대 밑에 동상처럼 서 있었다. 목사의
음성이 그녀를 이곳에 붙들어 놓지 않았다 하더라도 역시 그녀의 생애에 치욕의
첫 장면을 아로새겨 놓은 이곳에는 피할 수 없는 흡인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돈된 생각이라고 하기엔 좀 막연한 것이었으나,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하나의 예감이 언제부턴가 그녀의 뇌리에 떠오르곤 하였다. 즉, 그때
이전이나 이후의 그녀의 생애가 모두 이 장소와 결부되어 있고, 그녀의 생활에
통일성을 준 일종의 거점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 동안 펄은 어머니 곁을 떠나 혼자서 제멋대로 광장을 쏘다니며 놀고
있었다. 그 환한 빛으로 침울한 군중의 기분을 자극하고 있는 모양은 마치
빛나는 깃털을 가진 새가 우거진 풀숲 사이를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침침학
우거진 숲 전체를 밝게 해 주는 것과 같았다. 이 아이의 동작은 마치 파도가
궆이치듯했지만 가끔 날카롭고 불규칙적인 데가 있었다. 이것은 그 아이의
활발한 정신 작용을 말해 주는 것이다. 특히 오늘은 어머니의 심적 동요에
힘입어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발끝으로 서서 춤추고 돌아다녔는데도 여느때보다
힘든 줄을 몰랐다. 언제나 지칠 줄 모르는 그녀의 호기심을 끄는 것이 있으면
펄은 곧장 그리고 뛰어가서,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자기것인 양 차지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써 자신이 조금이라고 억제당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청교도들이 가령 미소를 지었단
하더라도, 그 조그만 몸과 그 움직임 속에 반짝이는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기이한 매력을 바라볼 때에 이 아이를 악마의 소생이라고 생각치 않을 수가
없었다. 펄이 인디언 역시 자기보다 훨씬 야생적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것
같으면, 인디언 역시 자기보다 훨씬 야생적인 주인공이 눈앞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다음에 펄은 독특한 조심성을 보이면서도 역시 타고난
대담서으로 선원들이 서 있는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갔다. 인디언이 육지의
야만인이라면, 이들은 검푸른 바다의 야만인이었다. 그들은 펄의 모습을 보자
놀라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하면서, 이는 바다의 물거품이 소녀로 바뀌어 밤에
뱃머리에서 번쩍이는 바닷불의 넋을 타고 나온 거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들 선원 중 헤스터와 말을 주고받던 선장은 이 같은 펄의 모습에 완전히
매혹된 나머지 그녀에게 살짝 입맞추기 위해 손을 내밀어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펄을 잡는다는 것은 하늘을 나는 새를 잡는거나 마찬가지임을 알자,
그는 모자에 감았던 금시슬을 끌러 아이가 있는 쪽으로 던져 주었는데, 그것을
금방 목으로부터 허리로 감은 펄의 솜씨가 어찌나 능숙했던지 그것은 이미
신체의 일부가 되다시피하여 금사슬을 감고 있지 않은 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기 주홍 글씨를 단 여자가 네 엄마지? 선장은 물었다. 네 엄마한테 가서
내 말 좀 전해 줄래?
내 맘에 드는 얘기라면 전해 드리죠.
펄은 대답했다.
그럼 이렇게 전해 다오. 얼굴이 검고 들이 굽은 의사와 다시 한 번 의논한
결과 너의 엄마도 잘 아시는 치구를 의사가 배까지 모시고 가겠단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네 엄마는 너와 엄마 두 사람 준비만 하시면 된다고, 알겠니? 요 마녀
아가씨야.
우리 아빠는 하늘의 제왕인 마왕님이라고 히빈스 아줌마가 말해 주셨어요!
펄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외쳤다. 나를 욕하면 아빠한테 일러 줄거예요.
그렇게 되면 아저씨 배는 폭풍으로 혼날 거예요.
광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어머니 있는 데로 돌아온 펄은 선장의 말을
전했다. 헤스터의 꿋꿋하고 침착한, 꾸준히 견뎌 오던 정신도 눈앞에 닥치는
암담하고 냉혹한 운명 앞에 맥이 풀리고 말았다. 목사와 자신이 비참한
미궁으로부터 빠져날 수 있는 길이 막 열리려는 순간에 운명이 잔혹한 조소를
띠며 두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고 나섰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장의 말을 전해 듣고 마음이 혼란해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헤스터는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광장에 모인 근처에서 온
많은 사람들은 진작부터 주홍 글씨에 관한 소문 -밑도끝도없는 과장된 소문을
듣고 두려운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그러무르
다른 놀이에 싫증이 난 이들은 시골 사람 특유의 무례하고 뻔뻔스러운 태도로
헤스터 프린의 주변으로 둘러섰을 뿐, 더 가까이 접근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신비스러운 상징이 자아내는 혐오감의 원심력으로 그 자리에 묶여 있었다.
게다가 구경꾼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주홍 글씨의 뜻을 알게 된 선원들도
햇볕에 탄 무법자다운 얼굴을 사람들 틈으로 들이밀었고, 심지어 인디언들까지
백인의 호기심이 던지는 싸늘한 그림자의 여세를 몰아 사람들 틈을 헤치고
들어와선 뱀 같은 까만 눈으로 헤스터의 가슴을 뚷어지게 쳐다보았다. 찬란하게
수놓을 표적을 가슴에 단 이 여인을 가운데서도 아주 고귀한 신분의 사람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거리의 주민들까지도, 그 장소를 어슬렁거리면소 이젠 그다지
이상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을 그 치욕의 표시를 냉담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낯익은 그들의 시선을 다른 고장 사람들의 그것보다 한층 더 헤스터 프린을
괴롭혔다. 7년 전 감옥에서 나오는 자신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여인들의
얼굴도 눈에 띄었다. 단 한 사람, 가장 젊고 동정심 많던 여자만이 눈에 띄지
않았다. 헤스터가 그 여자의 수의를 직접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타들어가는
듯한 주홍 글씨를 얼마 안 있으면 내던지게 될 이 마지막 고비에, 그것을
처음으로 가슴에 달던 날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과 주목의 초점이 되었고,
그 때문에 그녀의 가슴을 한층 더 아프게 태우게 되었음은 얄궂은 운명이었다.
헤스터가 이 치욕에 찬 마술의 원 안에 서 있을 동안 목사는 성단 위에서
청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중은 송두리째 목사의 정신세계에 휘어잡혀
있었다. 교회에 서 있는 덕망 높은 목사! 광장에 서 있는 주홍 글씨의 여인! 이
두 사람의 가슴에 똑같은 치욕의 낙인이 불타고 있으리라는 무엄한 추축을 누가
감히 할 수 있었으랴!
22.주홍 글씨의 나타남
마치 굽이치는 파도처럼 청중들의 영혼을 드높은 곳으로 떼미러 가던 설교도
마침내 끝났다. 하느님의 계시를 듣고 난 직후인 양 엄숙한 침묵이 한순간
흘렀다. 이어서 소곤대는 소리와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력한
주술에라도 걸린 듯 타인의 정신 세계로 이끌려 갔던 청중들이 이제 막
주슐에서 깨어나 두려움과 경탄에 가득 차서 제정신으로 돌아가는 듯싶었다.
그리고 잠시 뒤 청중들은 교회 입구로 쏟아져 나와싿. 이제 설교가 끝났으니
그들이 지금 막 풀려 나온 속세의 생활을 유지해 가는 데 알맞은 공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교회 안의 공기는 설교자의 불꽃 같은 연설과 그의
사상이 풍기는 짙은 향기가 숨막히도록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밖으로 나오자 청중의 감격은 말로 변했다. 거리에서도 광장에서도 목사에
대한 찬사가 사방에서 물 끓듯 일어났다.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자신들의 느낌을 서로 토론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들의
일치된 말에 의하면, 오늘 설교를 한 목사만큼 성스럽고 고귀하고 열렬한
정신으로 설교한 사람은 여지껏 없었다는 것이다. 또 이 목사의 경우처럼
의심할 나위가 없는 하나님의 영감이 사람의 입술을 통해 밝혀진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영감이 목사에게 강림하여 눈앞에 놓인 설교문
원고로부터 보다 높은 영감의 세계로 그를 끌어올려 청중뿐 아니라 본인
자신에게도 놀라운 사상과 감동으로 충만하게 하였던 것이다. 설교의 주제는
하느님과 인간 사회의 관계에 대한, 특히 지금 황야에 건설되고 있는
뉴잉글랜드와 연관된 것이었다. 설교가 끝날 무렵 예언자와 같은 정신이
목사에게 강림하여서 이스라엘의 옛 예언자들이 모국에 가해질 심판과 멸람을
예고한 데 반하여, 목사는 새로 모인 선민들을 위해 고원하고 영광에 넘친
운명을 예언한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 전체를 통해 볼 때
그것은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의 비탄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어떤 침통한
비애감이 밑바닥 깊이 깔려 있었다. 그렇다!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있는
목사, 또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숨 없이는 천당으로 갈 수
없는 목사는 자기의 요절을 예감하고 있었다. 마침내 슬퍼하는 사람들을 뒤에
두고 그는 떠나야 할 것이다. 지상에 오랫동안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는 이
생각이 설교자가 집어낸 인상을 더 한층 강조해 주었다. 그것은 마치 천사가
하늘로 날아가며 사람들 머리 위에서 아름다운 날개를 한순간 퍼덕여 그것은
그늘인 동시에 눈부신 광채였다. 황금의 진리를 우박처럼 쏟아 놓은 것 같았다.
세상의 각 분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휘황하게 빛나는 전무후무한 인행의 한 시기를 맞이하는 법인데, 이 시기가
지나간 다음이 아니고서는 흔히 깨닫지 못한다.
딤스데일 목사에게도 이처럼 찬란하고도 승리에 넘친 인생의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이 순간, 목사는 가장 우월하고 자랑스러운 최절정의 자리에 서 있었다.
그것은 성직 자체가 하나의 높은 지위였던 초기의 뉴잉글랜드에 있어서도,
타고난 재능과 풍부한 학식과 설득력 있는 웅변과 청렴결백한 명성에 의해서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지위였다. 선거 축하 설교가 끈나고 강단위에
머리를 숙였을 때 목사가 획득한 지위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 동안
헤스터 프린은 가슴에 주홍 글씨를 단 채 여전히 처형대 옆에 서 있었다!
또다시 교회 입구에서 울려나오는 악대의 금속음과 친위대의 규칙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행렬은 교회당으로부터 공회당으로 향하기로 되어 있었다.
공회당에서 연회가 있은 다음 이날의 의식은 끝날 예정이었다.
이리하여 다시금 덕망있고 위엄있는 장로들의 행렬이 군중 사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총독과 관리들, 노인들과 목사들, 각계의 저명한 사람들의 행렬이
다가오자 군중은 양쪽으로 공손히 길을 비켰다. 행렬이 광장에 이르렀을 때
군중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이 환호성은 아직도 귀에 쟁쟁한 설교의 강렬한
음조로 인해 흥분된 청중의 열정이 저절로 폭발한 것이었다. 누구나가 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러한 충동을 느꼈으며, 동시에 옆 사람에게서도 똑같은
충동을 느꼈다.
교회 안에서는 억제되었던 감동이 푸른 하늘 밑에서는 그 감격이 하늘
꼭대기까지 울려퍼질 듯한 환호성이 되어 터져나왔던 것이다.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은 돌풍이나 우뢰소리, 또는 바다의 포효 소리보다도 한층 더
인상적인 음향을 만들어 냈다. 동일한 감동으로 충만한 가운데 그들의 목소리는
거대한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울려퍼졌고 또한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하나로
묶어 놓았다.
뉴잉글랜드 땅에서 일찍이 이런 환호성이 일어난 일은 없었다. 뉴잉들랜드
땅에 이 설교자 만큼 동포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인물은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목사 자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눈부신 후광이 그의 머리둘레에
비치지나 않았을까? 정신의 힘으로 영화되고, 열렬한 숭배자들에 의해서
성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행렬 속에 끼어 걸어가는 그의 발길이 정말 떵의
먼지를 밟고 있었을까?
군인들과 관리들의 대열이 다가오자 그들 중에 끼어 있는 목사에게로 모든
사람의 눈길이 집중되었다. 목사의 모습이 보다 뚜렷이 보일 만큼 가까이
다가오자 환호성은 속삭이는 소리로 바뀌어졌다. 승리와 영광의 절정을 누리고
있는 그가 어째서 저토록 창백해 보인단 말인가? 그의 기력은.....천국에서
내린 힘으로 하느님의 계시를 전달할 때까지 그의 기력을 북돋아 주던 영감은
그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고 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조금 전까지
목사의 볼을 이글거리게 했던 홍조도 타다 남은 장작개비 속에서 스러져 가는
불길처럼 꺼져 버렸다. 이처럼 핏기 없는 그의 얼굴은 도저히 산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며 걷는 그의
모습은 도저히 생명력을 지닌 사람으로는 볼 수 없었다!
동료 목사 한 사람이 -존 윌슨 목사였다-지력과 감각을 잃어 가는 딤스데일
목사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재빨리 다가와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목사는
와들와들 떨면서도 단호히 이 노인의 팔을 뿌리쳤다. 그는 여전히 걷고 있긴
했으나, 그러한 동작을 걷고 있는 것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면 모르되, 그
모양은 마치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의 뒤뚱거리는 걸음마와
같았다. 이렇게 비틀거리며 당도한 곳은 바로 처형대 맞은편이었다. 이미
비바람에 낡아 버린 이 처형대는 오래 전 헤스터가 펄의 손목을 잡고 서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는 또한 주홍 글씨가 달려 있었다! 목사는 여기서 우뚝
멈춰 섰다. 악대는 아직도 장엄하고 즐거운 행진곡을 연주하며 목사를 축하연
장소로 재촉하고 있었으나 목사는 그 자리에 발을 멈춰 버린 것이다.
벨링햄은 조금 전부터 근심스러운 듯이 목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행렬을 빠져나와 목사를 부축하려 했다. 아무래도 곧 쓰러질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벨링햄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막연한 암시 따위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는 위인이었지만, 목사의 표정에는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한편 군중들도 놀라운 기색으로 목사를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목사의 몸이 이렇게 지상에서 약해지는 것은 정말은 하늘나라에서의
그의 정신력이 그만큼 강해지는 것을 위미하는 데 불과한 것이었다. 가령
목사가 그들의 눈앞에서 승천하여 하늘나라의 빛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해도
이처럼 신성한 사람에게는 있음직한 기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목사는 처형대 쪽을 향해 두 팔을 내밀었다.
헤스터, 이리 오구려! 펄, 너도 이리 오너라!
두 모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소름이 끼칠 듯하였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워 보였고, 이상하게 의기야야한 데가 있었다. 펄은 여느때와
다름없는 새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목사에게 달려가더니 그의 무릎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헤스터 프린 또한 천천히 다가갔으나, 목사가 있는 곳까지 못미처
발을 멈췄다. 이때 목사의 의도를 방해하려는 듯이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군중들을 헤치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어둡고 침착성을
잃은데다 사악새 보였으므로 지옥에서 솟아난 듯하였다. 그것은 어떻든간에
노인은 군중 속에서 뛰쳐나와 목사의 팔을 잡았다.
이 미친 사람아!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노인은 속삭이듯이 말했다. 저
여자를 물리쳐요! 이 아이도 내버려두고! 그러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이오!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고, 불명예 속에 죽을 거야 없지 않소! 나는 아직도
당신을 구해 줄 수 있소! 당신은 성직에 똥칠을 할 참이오?
이 악마 같은 사람! 이미 때는 늦어소! 목사는 이렇게 대답하며
두려우면서도 단호한 눈길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당신의 힘은 이미 엣날
이야기가 됐소, 하느님의 도움으로 나는 이제 당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단
말이오!
목사는 다시 주홍 글씨의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헤스터 프린. 가슴을 찌르는 듯한 열렬한 목소리로 그는 외쳤다. 7년전
나의 막중한 죄와 비참한 번미에 대해 내가 하지 못한 일을 이 마지막 순간에
행하도록 도와주시는 두렵고도 자비로운 하느님의 이름에 의하여 어서 이리 와
주오! 당신 힘으로 나를 감싸 주오! 당신 힘으로 말이오, 헤스터. 그러나
당신의 힘을 하느님이 나에게 허락해 주신 의지대로 따르게 해주오! 이
비참하게 배신당한 노인은 온 힘을 다하여 자기의 힘과 악마의 힘까지 동원하여
반대하려고 하오. 자, 헤스터, 이리 오시오! 저 처형대까지 따라와 주오!
군중들은 야단 법석이었다. 목사 둘레에 서 있던 고위고관들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영문을 몰라 하느님이 행하려는 듯한
심판을 그저 말없이 서서 지켜볼 뿐이었다. 목사가 헤스터의 어깨에 기대어
허리를 그녀의 팔에 의지하며 처형대로 다가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불의의 자식인 펄의 작은 손은 여전히 목사의 손에 꽉 잡혀 있었다.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그 뒤를 따랐다. 마치 이 세 사람이 주연으로 되어 있는
죄악과 슬픔의 연극에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마지막 장면에 등장할 자격이
있다는 것 같았다.
노인은 험악한 눈초리로 목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세상 어느 구석을 찾아보아도 당신이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비밀 장소는
없었을 거요. 하늘과 땅 어딜 뒤져보나 이 처형대밖엔 없었을 테지!
이곳으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뿐이오!
목사는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떨고 있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헤스터 쪽을
돌아다보았으나 그의 눈에는 의혹과 불안의 표정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이러는 편이 차라리 낫지 않소, 헤스터? 목사는 속삭였다. 우리가
숲속에서 꿈꾸던 일보다는.
모르겠어요! 전 모르겠어요! 헤스터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더
낫다고요? 글쎄요, 이대로 우리도 죽고, 펄도 우리와 함께 죽는 것이 더 나을
거예요!
당신과 펄은 하느님이 명하시는 대로 따라야 하오. 목사는 말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오! 그러나 나에겐 지금 내 눈앞에 하느님이 뚜렷이 보여
주신 뜻을 실행하도록 해 주오. 헤스터, 나는 얼마 살지 못할 사람이오.
그러니. 빨리 내 죄를 고백하고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치욕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오.
헤스터 프린에게 몸을 의지하고, 펄의 손목을 잡은 채 딤스데일 목사는
점잖은 관리들과 동직자인 목사들과 군중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군중들은
깜짝 놀랐지만, 눈물겨운 동정심이 넘쳐흘렀다. 뭔가 중대한 일대
사건이-죄악에 가득 차 있을망정 고뇌와 후회에 넘친 인생의 일대 사건이-지금
눈앞에 전개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오를 조금 넘어선 태양은
목사를 내리쬐어 정의의 여신이 주관하는 법정에서 자신의 유죄를 아뢰기 위해
대지에 우뚝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뚜렷이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뉴잉글랜드의 주민 여러분! 목사는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람들의 머리위로
울려퍼진 그 목소리는 높고 엄숙하고 위엄이 있었으나 한없이 떨렸으며, 양심의
가책과 고뇌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듯 절규애 가까운 쉰 목소리였다. 나를
사랑해 주셨던 여러분! 나를 성스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해 주셨던 여러분!
보십시오! 이 세상의 큰 죄인이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겨우! 이제야 겨우!
7년 전에 이 여인과 함께 섰어야 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여인의 굳센 팔은
여기까지 내가 겨우 기어온 힘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이 무서운 순간에도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해 주고 있습니다. 헤스터가 달고 있는 주홍 글씨를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누구나가 다 이것을 보고 몸을 떨었습니다! 이 여인이
어디 있든지, 비참한 업고를 짊어진 이 여인이 안식처를 구하기 위해 어디엘
가든지 이 글씨는 그 둘레에 공포와 소름끼치는 혐오를 자아내는 기분 나쁜
빛을 던져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또 한 사람의 죄악과 치욕의
낙인에는 몸을 떠는 일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목사의 비밀은 모든 것을 고백하지 못한 채 끝나 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를 넘어뜨리려는 육신의 쇠약, 특히 정신의 쇠약을 그는
안간힘을 다하여 극복했다. 그는 부축했던 손을 뿌리치더니 두 모녀보다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낙인은 그 사니아에게도 찍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말해 버리려고
결심한 듯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하느님께선 그것을 보셨습니다! 천사들은
쉴새없이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악마도 그 모든 것을 알고, 불타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만짐으로써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묘하게도 사람들
눈을 속이고 죄많은 속세에서 자기만이 순결하여 슬프다는 듯이, 천국에 있는
동료를 만나지 못하여 외롭다는 듯이, 여러분들 사이를 걸어다녔던 것입니다!
이제 죽음을 앞두고 그 남자는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다시 한번 헤스터의 주홍
글씨를 봐 주십시오! 이 불가사의하고 무서운 주홍 글씨도 그 남자의 가슴에
찍혀 있는 표적에 비하면 한낱 그림자에 불과하며, 그 남자 자신의 빨간 낙인도
그의 깊은 가슴속이 타고 있는 상징에 불과한 것입니다!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의심하는 분이 이곳에 계십니까? 보십시오! 그 심판의 무서운 증거를
보십시오!
목사는 발작적인 태도로 자신의 가슴에서 성직자가 다는 늘어진 밴드를
잡아뜯었다. 표적은 마침내 나타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못브을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일 것이다. 한순간 공포에 질린 군중의 눈길은 이 무서운
기적 위에 집중되었다. 목사는 격심한 고통의 고비를 넘기고 마침내 승리를
거둔 사람처럼 얼굴에 홍조를 띤 채 서 있었다. 그러나 잠시후 그는 처형대
위에 털썩 쓰러져 버렸다! 헤스터는 그의 몸을 안아 일으켜 그의 머리를 자기
가슴에 기대게 했다. 로저 칠링워드 노인은 생기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게서 도망쳤구나! 노인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기어코
내게서 도망쳤구나!
하느님이 당신을 용서하시기를 바라오! 목사는 말했다. 당신도 큰 죄를
지은 셈이니까!
목사는 가물거리는 시선을 노인으로부터 헤스터와 펄쪽으로 옮겨갔다.
사랑스런 나의 펄...... 그는 힘없이 말했다. 영혼이 깊은 잠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목사의 얼굴에는 부드럽고 평화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무거운 업고를 벗어나서 이제 이 어린아이와 장난이라도 치고 싶을 만큼 상쾌한
기분이었다. 착하지, 펄, 이제 내개 키스해 주겠니? 숲 속에서는 싫다고
그랬지! 이젠 해 주겠지?
펄은 목사의 입술에 키스했다. 주문은 풀려 버렸다. 이 야성적인 아이도
크나큰 비극의 장면을 목격함으로써 인간적인 동정심이 움트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버지의 볼에 떨군 눈물은 인간 세상의 기쁨과 슬픔 속에서 성장하여
언제나 세상과 싸우는 일 없이 훌륭한 여성이 되겠다는 약속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제 어머니에 대해서도 고뇌의 사자로서의 역할을 이제 환전히 끝낸
것이다.
잘 있어요, 헤스터!
목사는 말했다.
이젠 영영 못 뵙는 것입니까? 헤스터는 얼굴을 목사 얼굴 가까이 갖다대며
속삭였다. 함께 영생을 누릴 수는 없을까요? 우리는 이 모든 고통과 슬픔으로
우리의 죄값을 다 치른 셈입니다. 당신은 그 밝은 임종의 눈으로 저 세상을
보고 계시는군요! 무엇이 보이는지 말씀해 주세요.
조용히 해요. 헤스터, 조용히! 목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엄숙히 말했다.
우리가 깨뜨린 율법! 지금 이렇게 무참하게 폭로된 죄악! 이것만은 당신도
언제나 염두에 둬 주오! 나는 두렵소! 두렵소. 헤스터! 우리가 하느님을
잊어버렸을 때, 서로의 영혼에 대한 존경을 깨뜨려 버린 그때 이미 우리가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 영원하고도 순결하게 결합되고자 하는 희망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소!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실뿐 아니라 자비로운 마음을
지니고 계시오! 특히 내가 고뇌에 허덕일 때 그 자비심을 보여 주셨소. 나의
가슴에 이 타들어가는 듯한 책고를 주신 것도 그러하오! 여기 있는 음흉하고
무서운 노인을 시켜 그 책고를 언제나 빨갛게 타오르게 하신 것도 그러하오!
나를 이곳에 오게 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승리와 치욕을 짊어지고 죽게 하신
것도 그러하오. 이런 고통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나는 영원히
파멸해 버렸을 것이오! 하느님의 이름을 찬미할지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 잘 있소.
이 마지막 말은 목사의 마지막 숨결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때까지 조용하던
군중은 두려움과 놀라움이 담신 이상하리만큼 나직한 소리를 터뜨렸다. 그들의
기묘한 감정은 사자의 영혼을 뒤따라 무겁게 흐르로 있는 이 웅성거림으로 겨우
표현될 뿐이었다.
24.뒷이야기
며칠이 지난 뒤, 앞서 이야기한 광경에 대하여 작가의 의견을 정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처형대에서 목셕한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 광경을 목격했던 군중 사람들의 대부분은 불행한 목사의
가슴에 주홍 글씨가, 헤스터 프린이 달고 있던 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주홍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축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상상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임은 말할나위도
없었다. 헤스터 프린이 처음으로 치욕의 표시를 달던 그날, 딤스데일 목사도
자기 몸에 심한 책고를 가하러 고행을 시작했으며, 그 뒤 온갖 방법으로 그
고행을 부질없이 실행해 왔다고 단언하는 이도 있었다. 아니, 그 목사의 낙인은
훨씬 뒤에 나타난 것이라고도 했다. 즉 지력과 힘이 풍부한 마술사인 로저
칠링워드 노인의 마술과 약물 힘이 작용하여 비로소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목사의 그 특별히 예민한 감수성과 정신이 육체에
미치는 놀라운 작용을 정말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 무서운 상징은 한시도
쉴새없니 움직이고 있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을 나타낸
것이라고 수근거렸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의견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택하든
그것은 독자의 마음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 광경을 목격했고, 잠시도 딤스데일 목사로부터
눈을 뗀 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목사의 가슴에는 갓난아기의 가슴처럼
아무 표적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묘한 얘기다. 이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목사는 임종시에, 헤스터 프린이 오랫동안 주홍 글씨를 가슴에 달게 된 그
죄악과 목사와의 사이에 어떠한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았거니와
막연하게나마 암시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았거니와 막연하게나마
암시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 훌륭한 목격자들에 의하면 목사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또한 군중들이 자신을 성자나 천사처럼
숭앙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타락한 여인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둠으로써, 아무리 훌륭한 인간도 그 여인과 마찬가지로, 실은 한낱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평생을 인간의 영적인 행복을 위해 바친 목사는 자신의 죽음을 하나의
우화로 만들었다. 하느님의 무한의 순결성에 비한다면 인간은 모두 똑같은
죄인이라는 슬프고도 위대한 교훈을 자신의 숭배자들의 가슴속에 명기시키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주로 의지해 온 근거는 지금까지 작자가 취급해 온 견해를
뚜렷이 확인해 주고 있다. 여기서 불쌍한 목사의 비참한 경험이 남긴 수많은
교훈 가운데서 한 가지만 적어 두기로 하자.
진실하라! 진실하라! 진실하라! 비록 최악의 죄가 아닐지라도 최악의 죄를
예상케 하는 성질을 숨기지 말고 세상에 제시하라!
딤스데일 목사가 죽은 뒤 로저 칠링워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노인의 모습에
나타난 변화만큼 놀라운 것은 없었다. 그의 모든 기력이 지상에서 행할 악마의
작업이 없어지게 되자 이 인간성을 잃은 사나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인인
악마가 일거리를 장만해 주고 그만큼의 보수를 지불해 주는 곳으로 옯겨가느
일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오랫동안 친근하게 점촉해 온 이들
인물들에 대해서 자비를 베풀어 주고 싶다.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죽었을 때 벨링햄 총독과 윌슨 목사가 집행인 되었던
유언장에서, 노인은 영국과 미국에 있는 막대한 재산을 헤스터 프린의 딸인
펄에세 유산으로 물려 주었다.
이리하여 그때까지도 악마의 소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던 어린 요정
펄은 대륙에서 그 무렵 으뜸가는 유산 상속자가 된 것이다. 이 사실이 세상
사람들의 두 모녀에 대한 판단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은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다. 그리고 이 모녀가 뉴잉글랜드에 머물러 있었다면 결혼 적령기가 된
펄을 그 자유분방한 피를, 매우 돈독한 청교도의 혈통을 지닌 사나이와 섞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사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주홍 글씨의 여인은
펄과 함께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 뒤 가끔 막연한 끈소문이 바다를 건너
전해지기는 했지만 두 사람에 대하여 믿을 만한 소식은 전혀 없었다. 주홍
글씨의 전말은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마력은 여전히 남아 있어
불쌍한 목사가 숨진 처형대며 헤스터 프린이 살던 바닷가의 오두막 등은 무서운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느 날 오후 이 오두막 입구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ㄷ.
요 몇년 동안 한 번도 열린 일이 없는 무이었는데 여인이 자물쇠를 열었는지,
또는 썩은 나무와 쇠붙이가 잡기만 해도 부서졌는지, 아니면 여인이 그림자처럼
그러한 방해물을 뚫고 들어갔는지, 아무튼 그 여인은 오두막 속으로 들어갔다.
문턱에서 여인은 멈춰 서더니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이렇듯 혼자서,
더구나 예전과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지난날 그처럼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못견디게 쓸쓸하고 처량하게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망설임은 겨우 한순간이었지만, 가슴에 주홍 글씨를 다는 데는
그 한순간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헤스터 프린은 본디의 옛집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저버렸던 치욕의
표시를 몸에 달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 펄은 어디로 갔을까? 살아 있다면
탐스럽게 피어난 꽃 같은 처녀가 되었을 것이다. 그 요정과 같았던 아이가
요절하여 숫처녀로 묻혔는지, 또는 현란하고 야성적이던 성질이 온순해져
여자다운 조용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여인으로 자라났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확실한 소식을 들은 이도 없었다. 다만, 이 주홍 글씨의
여인이 홀로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동안 어딘가 타국에 살고 있는 사람의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문의 봉인이 찍힌 편지가 가끔 왔었는데, 영국의 계보 기록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 문장이었다.
요컨대 펄은 살아 있을 뿐 아니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며, 늘 어머니를
염려하며, 이 슬프고 외로운 어머니를 자기 집 난롯가에 모시고 위로해 드리고
싶어했다고 그즈음 수다쟁이들은 믿고 있었다. 그 뒤 100년 쯤 지나서 이
이야기를 조사했던 세관 검사관 퓨 씨도 그렇게 믿고 있었고, 또 최근에 부임한
퓨씨의 후임자도 역시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헤스터 프린에게는 펄이 가정을 이루고 있는 미지의 나라보다도 이
뉴잉글랜드에 보다 더 진정한 생활이 있었다. 이 곳에는 그녀의 죄와 슬픔이
있었고, 아직도 그녀가 바쳐야 할 참회도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헤스터는 이
땅에 되돌아온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말해 온 이 암담한 이야기의 상징을 다시 가슴에 단 것이다.
그 이후로 그것은 다시는 그녀의 가슴에서 떠나는 일이 ㅇ벗었다. 그러나
괴롭고 근심에 잠긴, 그리고 헌신적인 헤스터의 일생이 흐르는 동안 주홍
글씨는 세상 사람들의 모욕과 비난을 자아내는 낙인이 아니라, 함꼐 슬퍼하고
위안을 주는 그 어떤 상징, 또한 두려움과 존경섞인 눈으로 쳐다보는 상징이
되었다. 젊은 시절 한 때 헤스터는 혹 자신이 예언자로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어리석은 상상을 한 일도 있었지만, 신성하고 신비로운 진리의 사명이,
죄악과 수치로 머리를 못 드는 여인, 일생을 슬픔 속에 지내야만 할 여인에게
맡겨질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깨달았다. 장차 계시를 지니고
올 천사나 사도는 고상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라야 할 것이다. 그것도
어두운 슬픔이 아닌, 영혼의 기쁨을 통하여 슬기로워진 여인. 인생의 참다운
시련을 통해 얻어진 신성한 사람이 인간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아는
여인이라야만 한다.
헤스터 프린은 이렇게 말을 맺자 슬픔이 찬 눈으로 주홍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뒤 새로운 무덤 하나가 낡고 움푹 팬
무덤옆에 생겼다. 이곳은 뒤에 킹스 교회 공동묘지가 된 곳이다. 그 무덤은
헐고 움푹 팬 무덤 바로 옆이기는 했지만, 무덤과 무덤 사이에는 조금의 간격이
있어서 그곳에 잠들고 있는 두 유해는 교제할 권리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의 비석이 두 무덤에 같이 쓰이고 있었다. 그 주위 일대에는 가문을 새긴
비석들이 많이 서 있었으나 간소한 판석 하나로 되어 있는 이 비석에는 방패
모약의 가문 같은 것이 새겨져 있어, 지금도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면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그 가문의 디자인을 문장용어로 표현하면
이제 끝난 이야기의 간단한 제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음침하여, 그림자보다도 더 어둡게 불타는 한 점의 빛으로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검은 가문 바탕에 주홍 글씨 A>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퍼온글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