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또 몇 달이 흘렀다. 2006년 9월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56년 전에 헤어졌던 북한가족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어른들은 다 돌아 가셨고 다섯 남매 중에서 둘은 죽고 셋만 남았는데 고향에는 둘째 남동생만 살아남아있고 여동생 둘은 함경북도와 함경남도에서 어려운 생활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함경북도 모처에 산다는 내 바로 손애래 여동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다. 그러면서 현지를 언제 방문할 것인지를 알려주면 현지상황을 파악해서 상봉할 수 있도록 주선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는 정말 잠이 오지 아니했다. 매일 밤 고향에 대한 꿈만 꾸고 향수병이 심해갔다.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던 세월이 왜 그리 더디든지. 답답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가게 마련이었고 나는 10월20일 한국 행 비행기를 탔다.
마침 한국에서는 나의 아들이 옥수중앙교회의 장로가 되는 장로 임직식이 있어 참석을 했다. 중국 쪽에 있는 분들과 약속된 날이 돌아와 11월 14일 중국 연길 행 비행기를 타고 2시간 여 만에 목적지에 도착을 했다. 마중나온 안내원을 만나 준비된 자동차로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연길시내를 지나면서 변화된 중국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시내를 벗어나 동북 방향으로 차가 달리는데 또 한번 놀랐다. 중국에서도 최오지인데 도로포장이 너무나 잘된 때문이었다. 잠깐 달린 것 같은데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북한과 중국 국경지역에 있는 소도시였다. 그곳은 조선족들이 80%정도 살아가는 곳이라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여동생을 상봉할 수 있는 날을 16일 밤 1시에서 2시 사이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날 그 날 일정은 상황을 보아가면서 진행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15일, 두만강을 중심으로 관광하기로 했다. 중국 쪽 국경도로를 따라 남향을 향해가면서 북한 쪽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글귀가 생각났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고 또 흐르니 옛 물이 있을 소냐. 나는 저 북쪽하늘을 바라보면서, 물도 옛 물이 아니지만 산도 옛 산이 아니어서 그저 한탄만 했다. 민둥산 밑으로 마을들이 보이는데 사람들 모습은 안 보였다. 안내원 말은 낮에는 집단 농장이나 일터에 가서 일하기 때문에 인적들 보기 힘이 든다고 했다. 집은 거의 일정한 규모로 지어져 있었고, 이미 겨울이어서 나무마다 앙상한 가지만 있기에 마을은 그저 삭막하기만 했다.
나는 얼마
전 다큐멘터리 영화로 본 북한탈출 현장을 생각하면서 몸서리치를 쳤다. 북한 탈출을 시도하다 물에 떠내려가다 죽고, 강을 건너다
북한 경비병에 총에 맞아 죽는 현장을 그린 영화였다.그 비참했던 현장이 바로 이곳이 라고 생각하니 무심이 흘러만
가는 강물을 보면서 또 소름이 끼쳤다. 강을 따라 가면서 강 건너편을 눈을 뗄 수가 없다.
출발한지 1시간이 좀 지나 오늘 목적지인, 중국 쪽에서 북쪽 도시를 바라보기 위한 관망대에 도착했다. 이 관망대는 저 앞에 펼쳐진 한 도시를 바라보기 위한 관망대라고 한다. 그 도시가 무엇이 유명해서
관광객의 관망대란 말인가?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저 앞에 보이는 도시가 함경북도 최북단의 도시인데 바로
성경에 나오는 아골 골짜기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루빨리 저곳에도 자유의 종소리, 복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간구했다. 돌아오는 중간에 조선족이 한다는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안내원은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곳이오, 목사님으로서는 아주 중요한 곳 이니 잘 보시라'고 했다. 한 시간 쯤 후에 내린 곳은 윤동주 시인의 생가였던 것이다. 나는 깜작 놀랐다. 널따란 마당에 내리자 마자 커다란 시비가 한 눈에 들어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 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주변에는 울타리가 없었다. 생가는 오랜 세월에 낡아졌고 초라하지만 그가 공부하던 자리가 보전 되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다시 한번 시인을 추모했다.
16일, 역시 두만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강 건너 북한땅에는 인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간간이 보이는 것은 국경수비대의 막사들뿐이었다. 약 2시간쯤 갔을 때 면소재지 만한 크기의 마을이 나왔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조선족이 하는 식당이 있는데 한 번 가보자고 했다. 놀라운 것은 그 집 앞에 조그마한 도랑이 있는데 그 도랑이 국경이 란다. 펄쩍 뛰면 건널만한 넓이었다. 우리는 그 식당에서 그 강에서 잡았다는 생선으로 매운탕과 생선요리를 잘 먹고 그 집을 나와 강둑 길을 따라 올라가니 북한 쪽을 가는 다리가 있는데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은 볼 수가 없었다. 강 건너편 북한 쪽에도 꽤 큰 마을이 보였는데 그곳도 면소재지 정도인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다시 국경 도로를 따라 동북쪽으로 달려갔는데, 강건너를 바라보니 거기에는 산에 나무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곳은 혁명가들의 유적지들이 있어 나무들을 잘 가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삼각지라고 하는 곳에 도착했는데 중국 쪽 마지막 종착지라고 했다. 이곳 관망대는 높은 산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동해바다가 보였다.
중국 측에서는 동해를 보면서도 가지 못하는 지리적인 여건을 몹시 아쉬워한다고 했다. 이곳은 바로 북한과 러시아로 이어지는 국경이기 때문이다. 관망대에서 북한쪽을 바라보니 문득
고인이 된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연.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임 가신 강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 진 두만강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그 님이보고 싶구나.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아스라이 멀리 보이는 저 북녘의 국경도시가 왜 그런지 안쓰럽기만 했다. 두만강 북쪽은 러시아 땅이다. 발 밑에 보이는 러시아쪽만해도 움직이는 차들과 오가는 사람들이 잘 보였다. 집들도 꽤 크게 보인다. 러시아쪽에는 국경이 비교적 개방 되어서, 쉽게 러시아 쪽을 방문 할 수가 있어 시내를 관광하고 돌아 올 수가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그리 멀리 느껴지지 않았고, 오늘밤 동생을 만나기로 한 일이 온통 내 마음 속과 머리 속을 뒤흔들었다.
일각이 여삼추라 했던가. 왜 그리 시간이 안 가는지. 1시에서 2시가 왜 그렇게 긴지. 그래도 시간이 흘러 11시가 되었다. 그때 북한쪽 비상 연락선 담당자와 연결이 되었고 그쪽 상황을 점검한 다음 내 동생을 확인하고자 내 동생을 바꾸라고 했는데 잠깐 기다리라는 말이 떨어지고, 곧 문 여는 소리가 들리면서 전화는 급히 끊어지고 말았다.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날 밤 누이동생과의 연결은 실패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비상연락망을 통해 들어온 소식은 비극적이었다. 전날 밤 그 문 여는 소리는 바로 내 동생의 사위요, 나에게는 조카 사위인 사람이 정황을 포착하고 들이닥친 것이었다.. 고발한 사위에게는 한달치 양곡이 상금으로 주어졌단다. 천지간 어디에 이런 일이 있겠는가? 비통하고 통탄하고 땅을 치며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55년의 꿈은 이렇게 사라져버렸다. 공산당에게는 당이 먼저지 가족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더 뼈저리게 새기면서 쓸쓸히 돌아섰다.
안내원들은 우리 보기가 미안하다고 마치 자기들이 잘못 한 것처럼 너무너무 죄송하다고 했다. 한 많은 그날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아침은 지난밤을 지워버리듯 쌀쌀한 날씨지만 햇빛을 몰고 올라왔다. 오늘은 북한 평양에서 귀한 손님께서 오신단다. 이 손님은 일 년에 두 번씩 중국을 왕래하면서 복음을 무역하는 일꾼으로써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진기한 이야기을 들었고 바로 이 무역꾼이 우리가족의 상황을 전해준 분이란다. 이 날은 그 손님과 함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이 조그마한 도시를 돌아보면서 이쪽과 저쪽으로 연결 되어있는 다리를 보면서 중국 쪽에 국적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북한쪽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혹 있다고도 한다. 지척이 천리라고 했던가. 한눈에 보이는 저곳이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죽음의 땅이런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어떤 소식을 막연하게 기다리면서 오늘은 용정을 돌아 보기로 했다.
어제 온
손님은 또 어디론가 바람처럼 가버렸고 우리는 용정을 찾아가서 용정 중학교 앞에 가서 자동차를 주차시키고 걸어서 시내 구경을 나섰는데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용정 우물이다. 용이 이 우물에서 올랐다 하여 용정 이라 하고 그 옆에도
그 옛날 고국을 떠나 낮 설은 타향에서 가진 고난을 받으면서 살아온 동포들의 흔적들을 바라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과 난민신분으로 몇 대를 살아 왔다는 어느 동포의 말을 들으면서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할지를 몰라 그저 고생들 많이 하셨습니다 라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나는 숙소로 돌아오면서 혹시 동생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했는데 마침 동생이 풀려났다는 전갈이 와 있었다. 나도 북한 사정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도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몹시 걱정을 했는데 풀려났다니 한시름 놓고 돌아오게 되었다. 통화를 하지 못해 섭섭한 마음은 금할 수가 없으나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북한 형제들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만 하기로 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모든 일은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진다 라고 믿고 살아가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