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 하.원문

2014.07.08 08:31

제니 조회 수:3324

분노의 포도 []

The Grapes of Wrath

존 스타인벡

19

옛날 캘리포니아는 멕시코에 속했었고 그 땅은 멕시코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험상스러운 누더기를 걸친 다혈질의 미국 사람들이 떼로 밀려들었다. 그들은 땅에 굶주렸고 땅에 대한 소유욕이 대단했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 땅을 차지했다. 사터(1803-1880, 캘리포니아를 개척한 독일인)의 땅을 훔쳤고 궤레로(1782-1839, 멕시코의 대통령)의 땅을 훔쳤고 불하하는 공유지를 탈취해서 분할했고 옥신각신 시비를 하고 싸우고 광포하게 날뛰었다. 그리고 그들은 빼앗은 땅에서 총을 들고 지켰다. 집과 곳간을 세우고 땅을 갈라 곡식을 심었다. 이렇게 하면 임자가 됐고 임자라는 것은 다름아닌 소유권을 의미하게 되었다.

당시의 멕시코 사람들은 나약하고 배가 고팠다. 그들은 저항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미국 사람들처럼 그렇게 광포하게 싸우며 빼앗기를 원치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땅을 차지한 사람들은 그저 임시로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영영 지주가 되어 버렸고, 그들의 자식들은 그 땅에서 또 자식들은 낳았다. 그들에게서 땅에 대한 굶주림이 사라졌다.

땅에 대한 광포한 굶주림, 물과 흙과 그 위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하늘에 대한, 파랗게 돋아나는 식물과 통통하게 살쪄가는 뿌리들에 대한 욕심이 사라졌다. 그들은 이런 것들은 이제 충분히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기름진 땅에 대한 멱을 따는 욕심이나 그 땅을 가는 번뜩이는 쟁기의 칼날, 그리고 씨앗, 공중을 가르는 풍차의 날개 등에 대한 더 이상의 굶주림이 없었다.

이제 그들은 첫 새벽에 일어나서 잠을 덜 깬 새들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고 그들의 삶 속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대지-논밭을 매러 나가려고 동이 트기를 기다리면서 집과 곳간에 불어 닥치는 바람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없어졌고 곡식은 다 달러로 헤아려졌다. 땅은 원금에 이자를 가산해서 값이 매겨졌고 곡물은 심기도 전에 매매가 되어 버렸다. 흉작이나 가뭄이나 홍수는 이제 사람이 죽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금전상의 약간의 손실을 의미했다. 모든 사람들의 정이 돈과 더불어 얄팍해졌고 인생의 정열도 이익과 더불어 점점 빠져 나갔으며, 그들은 이미 농부가 아닌 곡물 상인들이 되었고 곡식을 거두기도 전에 팔아 버리는 작은 제조업자들이 되고 말았다.

장사를 잘 못하는 농부들은 장사를 잘하는 자들에게 땅을 빼앗겼다. 아무리 영리하고 땅에 대한 애착심이 강한 자라 할지라도 장사를 잘 못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점점 시간이 감에 따라 사업가들이 농장을 소유하게 되었고 농장의 규모가 커진 대신 농자의 수효는 적어졌다.

이제 농사는 산업이 되고 말았다. 지주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로마의 귀족이 되어갔다. 그들은 노예들을 사들였다. 물론 노예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중국인들, 일본인들, 멕시코인들, 그리고 필리핀인들이었다. 사업가들은 이 사람들이 쌀과 콩을 주식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임금을 많이 줄 필요도 없고 많이 주어 봤자 그걸 제대로 쓸 줄도 모른다고 했다. 그 사람들이 먹고 사는 꼴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변할 기미가 보이면 국외로 추방하면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곳곳마다 농장들은 규모가 비대해 갔고 지주들은 그 숫자가 적어졌다. 농토 위에 진짜 농사꾼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 그리고 외국에서 사들여 온 농노들은 채찍에 시달리고 굶주리며 공포에 떨다가, 나중에 그 일부는 자기들의 나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가혹한 환경 속에서 너무 난폭해져서 처치되거나 아니면 추방되기도 했다. 농장들은 점점 커졌고 지주들은 적어졌다.

농작물도 달라졌다. 곡식을 심어야 할 논밭에 과수가 들어섰다. 사람들이 먹고 살아야 하는 채소는 골짜기에 심어졌다. 상추, 양배추, 엉겅퀴, 감자 등 모두 허리를 굽혀 가꾸어야 하는 채소들이다. 낫이나 쟁기나 쇠스랑들을 쓸 때에는 허리를 펴도 되지만 상추밭의 이랑 속에서는 마치 빈대처럼 사람이 기어야 했고 목화밭의 이랑 사이에서는 허리를 굽히고 기다란 자루를 끌고 다녀야 했으며 양배추 밭머리를 지날 때에는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참회자처럼 무릎으로 기어가야 하는 것이다.

농장주들은 이미 자기들의 농장에서 일을 하지 않게까지 되어버렸다. 그들은 서류상으로만 일을 했다. 그들은 땅을 잊었고 땅 냄새와 감촉을 망각했다. 단지 자기들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기억했고, 그 땅으로부터 언제 소득을 올렸으며 언제 손해를 보았는가를 기억할 뿐이었었다.

농장들 중의 어떤 것은 그 규모가 너무나 커져서, 한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따지고 생각하고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너무나 커졌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이자나 소득의 계산을 전담해야 할 장부 기록 직원을 몇 씩 두어야 할 판이었다. 토양을 검사하고 다시 풍작을 거두게 하기 위해서 화학 기사가 필요했고 농노들이 몸뚱이를 움직일 수 있는 한 빨리빨리 움직이는지 어떤지를 감시하기 위해서 감시 책임자를 두어야 했다.

이와 같은 농장주는 실로 하나의 상인이 되었고 상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임금을 지불했고 먹을 것을 팔았고 돈을 다시 회수했다. 얼마 뒤에는 그는 전혀 임금을 지불하지 않게 되었다. 장부 기록의 수고마저 덜게 되었다. 이런 농장에서는 식량을 신용으로 대부했다. 거기에서 일을 하면 거기에서 먹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나면 회사에 빚만 지고 잇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농장주들은 농장에서 전혀 일을 안 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부분이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눈으로 직접 확인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리하여 토지를 잃은 사람들은 밀려나야 했다. 캔자스, 오클라호마, 텍사스, 뉴멕시코, 네바다, 알칸소 등 각처에서 밀려났다. 한 가족 한 가족들이 먼지에 시달리다가 트랙터 때문에 쫓겨났다. 차에 가득 실은 짐꾸러미, 집 없고 굶주린 사람들의 포장이 길바닥에 깔렸다. 2만 명, 5만 명, 10만 명, 20만 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배고프고 불안해서 산과 고개를 넘어 물결처럼 쏟아졌다. 배가 고파서 일자리를 얻으려고 불안하게 움직였다. 물건들을 들고 밀고 끌고 따고 줍고 깎고 짐을 지고 하는 어떠한 일이라도 먹을 것만 주면 다 하려 했다. 새끼들이 배를 곯고 있는 것이다. 살 곳도 없다. 개미처럼 일을 찾아서, 먹이를 찾아서 버둥거리며 주로 땅을 찾아서 이 지역 저 지역으로 전전했다.

우리는 이민족이 아니다. 벌써 일곱 세대에 걸친 미국 민족이다. 그전에는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영국인, 독일인이었지만 말이다. 우리 집안에도 미국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유공자가 있다. 남북전쟁 때에도 모두 가담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여하튼 가담했으며, 우리는 모두 토박이 미국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배가 고팠고 성미가 사나웠다. 집터를 찾았으나 오직 미움과 천대만을 받았다. 오키들! 지주들은 그들을 미워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점잖고 그들은 억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기들은 배가 부르고 그들은 억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지주들은 자기들의 조상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으리라. 사납고 굶주린 사람들이 무기를 가지면 순한 사람들로부터 땅을 빼앗기가 얼마나 쉬운 일인가를! 지주들은 그들을 미워했다.

도회지에서도 상인들은 그들을 미워했다. 그들은 물건을 살 돈이 없었던 것이다. 상인들은 돈이 없는 사람들을 제일 경멸했다. 반대로 그들로부터 찬미와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돈만 있으면 되었다. 도회지 사람들, 졸부들, 그리고 소심한 은행가들도 오키들을 싫어했다. 그들한테서는 아무런 소득도 얻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노동자들도 오키들을 싫어했다. 왜냐하면, 배고픈 사람은 먹기 위해 일을 해야 하며 그 배고픈 사람이 일을 한다면 자기들이 하는 일의 대가를 조금이라도 덜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는 그 누구도 더 좋은 임금을 받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땅을 잃은 이주민들은 캘리포니아로 밀려들었다. 25만에서 30만 명이나 된다고 했다. 그들의 발길 뒤로도 새로운 트랙터가 밀려오고 있었고 소작인들은 계속 쫓겨나고 있었다. 길바닥 위에 새로운 물결이 일었다. 땅과 집을 잃고 불안에 시달려 온 위험스러운 사람들의 물결이었다.

캘리포니아 사람들이 축제와 출세와 오락과 사치와 은행 거래 제도를 통한 재산의 안전보호 등 여러 가지 것을 원하고 있는 데 반해, 이들 새로 생긴 야만인들은 원하는 것이 단지 두 가지 밖에 없었다. 즉 땅과 먹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었다.

캘리포니아 사람들의 소망은 뜬구름같이 모호한 것이었지만, 오키들의 소망은 바로 길바닥에 널려 있었고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물기가 번지르르 흐르는, 파고 갈아 부치고 싶은 논과 밭, 아름답고 푸른 들판, 손으로 만져서 부스러뜨려 보고 싶은 흙, 냄새도 향기로운 풀, 그 예리한 향기가 목구멍을 찌를 때까지 씹어보고 싶은 보리 줄기.

경작도 하지 않고 굶주린 사람이 옆에 아내를 앉히고 뒤 칸에 아이들을 태운 채 차를 몰고 가다가 휴한지를 보게 된다. 그 휴한지는 그에게 잉여소득이 아니라 당장 먹을 것을 생산해 줄 수 있는 땅이다. 그러니 뼈만 남은 아이들에게는 휴한지가 죄악이며 하나의 범죄라고 느껴질 것이다. 이런 사람이 차를 몰고 가면서 도처에서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 땅을 조금만 갖게 되면 자식들에게 기운을 차리게 해줄 수 있고 아내에게 다소의 안락을 누리게 해줄 수 있을 텐데, 이런 유혹은 언제나 그의 앞에 놓여 있다. 들판은 그를 자극했고 물이 철철 넘치는 회사의 수리 시설이 그를 자극했다.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그는 황금색의 오렌지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검푸른 나무에 누런 오렌지알들이 살쪄 있었다. 그러나 과수원 안에는 파수꾼이 총을 들고 순찰을 하고 있으므로 아무도 그것을 따서 배고픈 자식에게 먹일 수가 없었다. 값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똥값으로 투매될 것이 아닌가!

그는 고물차를 몰고 시내로 들어간다. 일자리를 찾아서 농장들을 순례한다. 오늘 밤은 당장 어디서 자야 하나?

오호라, 강 저쪽 기슭에 후버빌(1930년대에 시 교외에 세운 실업자 수용 부락)이 있군. 거기에 가면 오키들이 떼를 이루고 있겠군. 그는 고물차를 몰고 후버빌로 간다. 그는 두 번 다시 묻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도회지마다 강의 한쪽 끝에는 후버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남루한 동네는 물 가까이에 있다. 집들은 모두 천막이다. 풀로 엮어서 종이를 발랐다. 커다란 쓰레기 더미들같이 생겼다. 이런 곳은 언제나 후버빌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기의 가족들을 그리로 몰고 들어가서 후버빌의 시민이 된다. 남자는 되도록 물 가까운 데를 골라 천막을 친다. 천막조차 없는 사람은 시의 쓰레기 처리장에 가서 빳빳한 종이를 주워 조각조각 붙여 집을 짓는다. 비가 오면 종이 집은 젖어서 씻겨 내려간다. 그는 후버빌에 정착한 뒤 일자리를 찾아 시골길을 헤맨다. 그나마 몇 푼 안 남았던 돈은 일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느라 휘발유를 사는 데에 다 들어가 버린다. 저녁때가 되면 남자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들을 나눈다. 쭈그리고 앉은 채 그들이 보고 왔던 땅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3만 에이커의 농장이 있다오. 정말 거기 가면 있다니까! 제기랄, 그런 땅이 한 다섯 에이커만 있으면 거기에다 무얼 갈까? 먹을 만한 것은 하나도 빼지 않고 다 갈아 먹을 거야.

그 한 가지만 알았소? 그런데 거기에는 말이야, 야채도 없고 닭도 없고 돼지도 없더라고. 단지 한 가지만 심었다오. 목화 말이오. 아니면 복숭아나 상추 같은 것뿐이오. 그런데 또 한 군데에 가보면 온통 닭밖에 없거든. 문간 앞 마차에다 심어도 될 만한 것까지 몽땅 사서 먹는다 이 말씀이야.

제기랄, 돼지가 암놈 수놈 두 마리만 있다면 나 같으면 무얼 할지 모르겠네.

그게 당신에겐 없기 때문이지 없으니깐 그렇지.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한다? 이러다간 애들마저 굶겨 죽이겠어.

캠프장에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한다. 샤프터에 가면 일이 있대요. 그래서 한밤중에 차에 짐을 싣느라고 법석이 벌어지고 국도는 혼잡을 이룬다. 일자리를 찾아 모두들 러시를 이룬다. 샤프터에 가면 이미 사람들은 너무 밀려 일할 사람의 다섯 배가 몰려와 있다. 일자리를 얻으려는 골드러시다. 일자리에 미쳐서 그들은 한밤중에 살짝 빠져 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길가에는 온갖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다. 먹을 것은 만들어 내는 땅이 깔려 있다.

그건 임자가 있다. 내 것이 아니다. 우리도 한 조각 얻을 수 없을까? 아주 조금만 말이다. 바로 저쪽의 한 조각만. 맨 잡초만 우거졌군. 저 땅만 가지면 우리 식구들을 실컷 먹여 살릴 만한 감자를 심고도 남겠네. 그건 우리 것이 아니야. 거기에는 잡초만 우거져야 해.

이따금씩 어떤 사람들은 시도를 해본다. 밭 속으로 들어간다. 두어 뼘의 땅에서 풀을 뽑은 다음 파고 심는다. 좀도둑처럼 들어가, 대지로부터 그 작은 것이나마 거두어 보고 싶은 본능이다. 잡초로 뒤덮인 숨겨진 땅이다. 당근과 순무 씨앗을 한 줌 뿌린다. 훔친 땅에 감자를 심기 위해서 밤에 살짝 이어 나간다.

그 가장자리의 잡초는 그대로 두어라. 그러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큼직한 잡초도 한가운데에 좀 남겨 두어라. 저녁이 되면 아무도 모르게 김을 매고 녹슨 깡통에 물을 떠다 붓는다.

그러던 어느 날 보안관이 나타난다. 여보시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소?

저 아무 나쁜 짓도 하지 않았어요.

내가 당신 하는 짓을 쭉 보았는데. 이건 당신 땅이 아니잖아? 당신은 남의 땅을 침입하고 있는 거야.

그 땅을 내가 어떻게 부셔 버린 것도 아니고 아무런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이 쭈그리고만 앉아서 사는 놈들 같으니! 그러다가 얼마 안 가서 그게 제 땅이라고 우겨대려고? 한 번 경을 쳐야 알겠어? 그게 네 땅인 줄 알아? 어서 썩 나가!

그래서 조그맣게 돋아났던 당근 싹은 발굽에 문드러지고 순무의 파란 잎은 짓밟혀 버린다. 잡초들이 다시 제자리에 들어선다. 딴엔 그 보안관 보의 말이 옳다. 왜냐하면 농작물이 있으면 그것은 소위 소유권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땅을 파고 당근을 캐먹고 나면 그것을 경작한 사람은 땅의 소유권을 주장해 싸울 수 있다. 그런 놈은 빨리 쫓아내야 한다. 그러다가 그놈은 그 땅이 제 것인 줄로 알게 된다. 그놈은 잡초에 묻힌 그 작은 땅 조각을 위해 목숨까지 걸고 싸울 놈이다.

우리가 그 순무를 짓밟아 버렸을 때 그 놈이 지었던 표정 보았소? 그놈은 아무나 닥치는 대로 죽여 버릴 기세를 하고 있더군. 우리는 이런 놈들을 꼭꼭 눌러 두어야지 만일 그냥 두었다가는 이 고장을 몽땅 빼앗기게 될 거야.

객지에서 건너온 이방인 놈들!

물론 그놈들도 같은 말을 하고는 있지만 절대로 같지가 않지. 그놈들이 하고 사는 꼴을 봐. 어디 우리 점잖은 사람들 가운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어? 천만에!

저녁때가 되면 그들은 쭈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한 사람이 흥분해서 말한다. 우리가 한 20명이라도 단합해서 땅 한 조각이라도 빼앗아 봅시다. 우리도 총이 있지 않소? 그걸 들고 가서 정면으로 대듭시다. ‘우리를 밀어내려거든 어디 밀어내 보라.’고 말이오. 왜 그렇게 못한단 말이오?

그놈들은 우리를 마치 생쥐 잡듯이 모조리 죽일 거요.

그럼 어느 편이 좋겠소? 여기 이렇게 굶고 있겠소? 아니면 총이라도 맞아 죽겠소? 땅속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포대 조각으로 엮어 만든 집에서 사느냐 둘 중의 하나요. 당신은 새끼들이 지금 죽는 게 좋겠소, 아니면 한 2년 뒤에 영양실조로 죽는 게 좋겠소? 어느 쪽이오? 우리가 일주일 동안 내내 무얼 먹고 연명해 왔는지 아시오? 쓰디쓴 쐐기풀하고 밀가루 튀긴 것뿐이라오. 그 밀가루는 어디서 얻었는지 아시오? 뚜껑 달린 짐차 바닥을 훑어 모은 거라오.

캠프장에 이야기꽃이 만발한다. 보안관 보들은 뚱뚱한 엉덩이에 권총을 늘이고 캠프장을 왔다 갔다 하며 거드름 피운다. 그들에겐 좀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다. 저 사람들을 잘 감시해야지, 그렇지 않다가는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저 사람들은 남부의 흑인들만큼이나 위험한 존재들이다. 만일 단합만 하면 아무도 저지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을 발휘할 존재들이다.

방울뱀 같은 놈들! 쓸데없이 구슬릴 필요가 없다. 무어라고 군소리를 하거든 우선 한 방 갈기고 보는 거다. 꼬마가 경관을 죽인다면 어른들은 어떻게 할 텐가? 요는 그들보다 더 사나워야 한다. 거칠게 다루고 겁을 주어야 한다.

그들이 겁을 안 먹으면 어쩐다? 그들이 저항하고 대들어 마주 쏘면 어쩐다? 그들은 어렸을 때 무기를 다루어 본 자들이다. 총은 그들 생활의 연장이다. 그들이 겁을 안 먹으면 어쩐다? 만약 그들이 롬바인들이 이태리에서 했듯이(568년 이태리 침입), 독일인들이 고르(고대 서구의 대지역, 5세기경부터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됨)에서, 그리고 터키인들이 비잔티움(현 이스탄불. 1453년 터키인이 침입함)에서 했듯이 작당을 해서 토지 위를 진군해 오면 어쩌겠는가? 그들은 땅에 굶주리고 있으며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무기로 들고 있으니 잡동사니 집단으로 군대를 투입해도 막기 곤란할 것이다.

학살과 테러를 해도 그들을 저지할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의 창자뿐만 아니라 새끼들의 뱃속까지 쪼르륵 소리가 나도록 굶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겁을 줄 수는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런 사람들은 위협에 대해서만큼은 이미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후버빌에서 사람들이 지껄이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는 땅을 인디언한테서 빼앗았지요.

이봐요, 이건 옳은 일이 아녜요.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 말이에요.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라고요. 나는 도둑이 아니란 말이오.

아니라고요? 당신 엊그제 밤에 베란다에서 밀크 한 병을 훔쳤잖아? 또 구리철사를 훔쳐서 고기하고 바꾸어 먹고.

그렇지만 그건 애들이 배가 고파서 그런 거지.

여하튼 도둑질은 도둑질이잖아?

당신 아시오? 그 페어필드 목장이 어떻게 해서 지금 사람 손에 들어갔는지 말이오? 알겠소? 그건 말이오, 몽땅 관청 땅이었어요. 그런 것도 다 해먹었단 말이오. 페어필드라는 영감이 말이오, 샌프란시스코의 바에 돌아다니면서 술주정뱅이 건달들을 한 3백 명쯤 잡았대요. 그 건달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지 뭐요. 페어필드 영감이 그 건달들을 술과 밥으로 배가 터지게 먹여놓고, 그 땅이 아주 넘어가자 영감이 건달들한테서 땅을 인수했다오. 그 영감 말이, 그 땅은 에이커 당 술 한 되씩 들었다 이거요. , 그러니 당신 이건 도둑질이겠소, 아니겠소?

물론 그건 옳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영감이 그것 때문에 감옥에 가지는 않았잖소?

물론 감옥에는 안 갔소. 그리고 그 친구 말이오, 보트를 마차에 실어 놓고 ‘땅이 온통 물바다이기 때문에 보트를 타고 왔다.’고 보고한 그 친구, 그 친구도 감옥에는 안 갔지. 또 국회의원들과 입법부를 몽땅 매수 한 사람도 감옥에는 안 갔다고.

캘리포니아 주의 어디를 가다 후버빌에는 말이 많다.

그러면 한 차례씩 벼락이 떨어진다. 난민캠프장에 무장경관들의 기습이 휩쓸고 지나가는 것이다. 모두 나가라는 철거령이다. 보건부의 명령인즉 이 캠프장은 공공 위생에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란 말이오?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다. 캠프촌 저쪽 끝에 장티푸스가 발생했다. 당신들은 그 병을 사방에 전염시킬 작정인가? 우리는 당신들을 쫓아내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다. , 어서 나가라. 30분 뒤에 우리는 여기에 불을 지를 거다.

30분 뒤에 종이 집과 풀로 엮은 집을 태우는 연기가 하늘을 찌르고 사람들을 태운 차가 한길 위에 줄을 지어 늘어선다. 다른 후버빌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캔자스에서도 앨칸소에서도 그리고 오클라호마, 텍사스, 뉴멕시코에서도 트랙터들이 밀려들어 소작인들을 밀어낸다. 캘리포니아에는 30만 명이 밀려들고 앞으로도 더 들어올 추세다. 캘리포니아 주의 곳곳엔 길목마다 사람들로 들끓는다. 끌고 밀고 들고 일하고 싶어서 미쳐있는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온다. 한 사람의 손이 들어야 하는 짐 하나마다에 다섯 사람의 손이 뻗어오고, 한 사람의 배에 찰 만한 음식에 다섯 사람의 입이 벌려진다.

그리고 커다란 사회 변혁이 일어나면 자기들의 토지를 결국 빼앗겨야 하는 대지주들, 그들도 역사에 접근하는 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를 읽는 눈이 있으며 ‘재산이 너무 소수의 손아귀에 편중되면 결국 빼앗기고 만다.’는 위대한 사실을 알고 있다. 또 이와 함께 ‘대다수의 사람이 춥고 배고프면 그들은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힘으로 빼앗는다.’는 부수적인 사실도 알고 있다. 또 ‘억압은 피압박자들을 강화하고 단합시킬 뿐’이라는, 모든 역사를 통해 자연히 증명되어 온 작은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대지주들은 이 같은 역사의 세 가지 가르침을 외면한다. 땅은 점점 소수의 손에 넘어가고 땅을 잃은 사람들은 늘어가며, 대지주들은 모든 노력을 그들의 억압에만 기울인다. 그들은 큰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최루가스를 사는 데 돈을 쓰고, 폭동을 사전에 진압하기 위해 정탐꾼들을 풀어 난민들의 쑥덕공론을 살핀다. 경제체제의 변화에 무심하니 그 변화에 맞춰진 계획이 수립되지 못하며, 단지 폭동을 분쇄하기 위한 수단을 연구하기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폭동의 원인은 점점 뿌리가 깊어져 간다.

사람들을 일터로부터 쫓아내는 트랙터도, 짐을 운반하는 벨트 라인도, 물자를 생산하는 기계도 늘어만 간다. 점점 더 많은 가족들이 길바닥에 쏟아져 나오고, 부자들이 가진 큰 재산의 부스러기를 찾아 길가에 깔려 있는 땀을 탐내며 흩어진다.

대지주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연합체를 구성하고, 난민들을 위협하고 살해하고 또는 가스를 뿌리는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서 자주 만난다. 그들은 언제나 한 가지 커다란 공포감에 싸여 있다. , 30만이라는 대군중이 만약 어느 한 지도자 밑에 단합하여 움직이게 된다면 그 결말이 어떠하겠는가, 라는 것이다.

그 굶주리고 비참한 생활에 허덕이는 30만 명이 만약 자신들의 입장을 제대로만 안다면 모든 땅은 그들의 것이 될 것이요, 이 세상의 모든 가스와 총을 갖다 놓아도 그들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큰 재산을 갖게 됨으로써 인간 이하로 되어 버린 대지주들은 자신들의 파멸을 향하여 줄달음치고 결국은 자신들을 파멸시킬 모든 수단을 사용하게 된다. 모든 소소한 수단, 모든 폭력, 후버빌에 대한 모든 습격, 누추하기 이를 데 없는 캠프촌에서 거들먹거리며 힘쓰는 모든 보안관 보, 이런 것들은 다가올 바로 그날을 조금 연기시키기는 하지만 그날이 꼭 오지 않을 수 없도록 그 필연성을 더욱 다지고 있다.

저쪽 네 번째 천막에 있는 어린애 얘기 들어 봤소?

아니, 난 지금 막 들어오는 길이라오.

그 애가 자면서 울고 때굴때굴 구르고 하더래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애가 병균에 감염된 줄로 알고 소독약을 먹였더니 그만 애가 죽어 버렸대요. 그 어린애가 걸린 병은 무슨 흑설병인가 봐요. 먹을 것을 제대로 못 먹어서 생기는 병이랍디다.

불쌍한 놈 같으니!

참 안 됐어요.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그 애를 묻지도 못하고 있대요. 읍내의 공동묘지에 가야 하겠지요.

참 기가 막힌 일도 다 있군.

사람들이 손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작은 은전들이 집혀 나온다. 그 천막 앞에는 은전이 소복이 쌓인다. 그 집 가족들이 그걸 발견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량한 민족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친절한 민족이다. 하느님이시여, 이 선량한 사람들로부터 언젠가는 가난을 거두어 주옵소서. 하느님, 어린것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하옵소서.

대지주들의 연합회는 언젠가는 이런 기도가 그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최후의 날일 것이다.

20

짐꾸러미의 꼭대기에 올라탄 가족들, 어린애들과 로자샤안, 코니, 그리고 목사는 뻣뻣한 자세로 서로 끼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존 삼촌이 안에 들어가 수속을 밟고 있는 동안 베이커즈 필드의 검사관 사무소 앞의 뙤약볕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윽고 들 것이 나오더니 트럭으로부터 길게 말아 싸놓은 시체 꾸러미가 내려졌다. 검시가 진행되는 동안 가족들은 뙤약볕에 앉아 있었다. 사인이 확인되자 증명이 즉시 떨어졌다.

앨과 톰은 시가지를 따라 거닐면서 가게의 진열장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보도 위를 다니는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을 지켜보기도 했다.

드디어 아버지와 어머니와 존 삼촌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시무룩하게 기가 죽어 있었다. 존 삼촌이 짐 위에 올라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앞자리에 들어갔다. 톰과 앨이 돌아와 톰이 운전대를 잡았다. 그는 조용히 앉아서 무어라고 지시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검은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앞만 내다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입가를 비볐다. 그녀의 시선은 먼데에 가있었고 피로에 젖어 빛을 잃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어.

“저도 알아요.”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님한테 좀 더 훌륭한 장례를 치러 드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늘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톰이 곁눈질로 비스듬히 그들을 쳐다보았다.

“읍내 공동묘지예요?

“그래!” 아버지는 현실 속으로 빨리 돌아오고 싶었는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면서 말했다.

“우리는 충분한 돈이 없었을 뿐이야.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어.

그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도 언짢게 생각지 마오. 아무리 하려고 해도. 무슨 수를 써도 안 되는 일을 어찌하겠어? 향료대에, 관 값에, 목사를 불러야 해. 또 묘지터를 사야 하니 말이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의 10배는 있어야 그걸 다 치를 테니 어쨌든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다했어.

“알고 있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난 다만 어머님이 장례 치르는 일을 늘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는지 그게 마음에 걸려서 그래요. 잊어야지 할 수 없지요.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며 입가를 닦았다.

“거기에 있는 직원은 사람이 아주 좋더군요. 제법 …높은 티를 내기는 해도 사람은 썩 좋아 보입디다.

“그렇더군.” 아버지가 말했다.

“그 친구는 우리한테 사실대로 말해 주더군.

어머니는 손으로 머릿단을 빗어 뒤로 올렸다. 그녀의 턱이 굳어 있었다.

“우리도 마련해야지.” 그녀 목소리에는 어딘가 비장한 각오가 엿보이는 듯했다.

“우리도 앉을 자리를 얻어야지. 일자리를 구해 안정을 찾아야지. 어린애들 배를 곯려서야 되나. 어머님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지. 어머님은 특히 장례 때는 언제나 좋은 음식을 잡수셨으니까.

“우리, 어디로 가야지요?” 톰이 물었다.

아버지는 모자를 벗어들고 머릿속을 긁적거렸다.

“캠프장으로 가자.” 그가 말했다.

“우리가 일자리를 얻을 때까지는 그나마 몇 푼 가진 것으로 아껴 쓸 수밖에는 없지. 저쪽 변두리로 몰고 가보자.

톰이 차에 발동을 걸었다. 그들은 시가지를 거쳐서 변두리 쪽으로 차를 몰았다. 다리 근처에 오자 천막과 판잣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톰이 말했다.

“여기쯤에서 멈추지요. 동정을 살피면서 어디를 가야 일자리가 있는지 좀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그는 경사가 급한 진흙길로 차를 몰고 내려가서 캠프장의 가장자리에 멈추었다.

캠프장에는 전혀 질서가 없었다. 작은 회색빛 천막, 판잣집, 그리고 차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첫 번째 집은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꼴이 가관이었다. 남쪽 벽은 녹이 다닥다닥 슬은 석 자의 골진 함석으로 되어 있고, 동쪽 벽은 판자 두 장 사이에 사각형으로 된 곰팡이 낀 융단을 핀으로 꽂은 것이었으며, 북쪽 벽은 루핑 종잇조각에 너덜거리는 포장 쪼가리를 이은 것이었고, 서쪽 벽은 포대 여섯 장을 이어서 댄, 그런 식이었다. 사각형의 골조는 다듬지 않은 버드나무로 세워 놓기만 했고 그 위에 잇지도 않은 풀이 덥수룩하게 올려 있었다. 포대조각으로 덮여 있는 출입구 쪽에는 잔 살림살이가 흩어져 있었다. 5갤런 들이 기름 깡통이 취사 스토브였고 그것은 한쪽으로 넘어져 있었다. 다른 한쪽엔 녹슨 연통이 찔러져 있었다. 빨래를 삶는 큰 가마솥이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고 상자 몇 개가 아무데나 흩어져 있었다. 앉기도 하고 밥상도 되는 모양이었다. T형의 포드 세단 한 대가 두 바퀴짜리 트레일러와 함께 이 움막집 바로 옆에 서있었다. 캠프장 주위에는 걷잡을 수 없는 썰렁한 절망감이 감돌고 있었다.

움막 바로 옆에는 천막이 쳐있었다. 오래 되어서 희끄무레했지만 그런대로 깔끔했고 제대로 세워져 있었다. 그 앞에는 상자 몇 개가 벽에 붙어 서있었다. 출입구 밖으로 스토브 연통이 나와 있었고, 천막 문간의 흙바닥은 깨끗이 쓸고 물이 뿌려져 있었다. 빨래를 물에 담아놓은 양동이가 상자 위에 있었다. 이런 집은 천막이지만 깔끔하고 야무진 데가 있었다. A형의 로드스터와 직접 손으로 만든 듯한 침대를 싣고 있는 트레일러가 천막 옆을 받치고 있었다.

그 옆에는 큼직한 천막이 서있었다. 누덕누덕 떨어지고 찢어진 조각들이 철사로 이어져 있었다. 팔락팔락 늘어뜨린 옆구리의 포장이 걷어 올려 있고, 안에 네 개의 널찍한 매트리스가 땅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한쪽 옆으로는 빨랫줄이 쳐 있었고 줄에는 보라색 무명 옷가지와 작업복들이 걸려 있었다.

모두 한 40여 개의 천막과 움막이 있었고, 그 옆에는 각각 다른 모양의 차가 한 대씩 서있었다. 늘어서 있는 천막의 줄에 어린애들이 서 있다가 새로 온 트럭을 보더니 그 쪽으로 다가왔다. 작업복을 입고 맨발이었으며 머리는 먼지를 뒤집어써서 잿빛이었다.

톰이 트럭을 세우고 아버지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여긴 깨끗하지 못한데 다른 데로 가볼까요?

“일단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왔다 갔다 할 여유가 없다. 아무 데든 간에 우선 일자리부터 알아봐야겠다.

톰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가족들이 짐 위에서 밑으로 내려 왔다. 모두 신기하다는 듯이 캠프장을 살폈다. 루시와 윈필드는 먼 길을 오던 그동안의 습관에 따라 누가 시키기도 전에 양동이를 들고 물이 있어 보이는 버드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줄지어 서있던 아이들이 길을 터주었다가 그들이 지나가자 다시 줄에 들어섰다.

첫 번째 움막의 포장이 열리더니 아낙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의 회색 머리는 땋아서 끈으로 동여매어져 있었고 더러운 가운을 헐렁하게 걸치고 있었다. 얼굴은 쭈글쭈글 시들어서 생기가 없었고 휑하니 뚫린 눈 밑은 움푹 패여 있었다. 입은 힘없이 벌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도 천막을 좀 칠 수 있겠습니까?

내밀어졌던 고개가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잠시 조용하더니 포장이 다시 젖혀지고 셔츠 바람의 털보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남자의 뒤에서 보고만 있었고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털보가 말했다.

“안녕들 하쇼?

그러면서 그의 불안한 눈초리가 새로 온 사람들을 하나씩 뜯어보고 있었다. 사람들을 살펴보다 트럭에 실은 짐까지도 훑어보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금방 댁의 아주머니한테 여기 좀 내려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보았지요.

털보는 아버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질문이 무언가 좀 깊이 생각을 해보아야 할 매우 곤란한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뜸을 들이다가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 근처에 아무데나 좀 자리를 잡겠다는 거죠?

“그렇소. 우리가 내리기 전에 가서 만나 보아야 할 이 땅 임자라도 어디 있는지 해서 말이오.

털보는 한쪽 눈을 거의 감다시피 하고 서서 아버지를 뜯어보았다.

“당신들도 여기에 캠프할 거요?

아버지가 발끈 화를 냈다. 반백의 여자가 움막 밖을 내다보았다.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소?” 아버지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 여기에 천막을 치려면 치시구려. 내가 말리지는 않을 테니.

톰이 비웃듯 중얼거렸다.

“그 사람이 임자군.

아버지가 노여움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물었다.

“누가 이 땅 임자냐 이 말이오? 그래서 돈을 얼마나 내야 하느냔 말이오.

털보는 턱을 쑥 내밀었다.

“임자가 어디 있소?” 그가 오히려 되처 물었다.

아버지가 돌아섰다.

“제기랄 것 같으니!” 그가 말했다.

여자의 고개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털보가 턱을 위협적으로 하고 앞으로 다가섰다.

“임자가 누구냐고요? 당신 말해 보시오. 어느 놈이 우리를 여기서 내쫓는단 말이오?” 그가 따지듯 대들었다.

톰이 아버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버지는 가서 잠이나 한숨 푸욱 주무세요.” 그가 말했다.

털보가 입을 벌린 채 서서 더러운 손가락을 아래쪽 잇몸에 대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는 약삭빠른 눈초리로 톰을 뜯어보더니 뒤로 돌아서서 여자의 뒤를 따라 천막 안으로 사라졌다.

톰이 아버지 쪽으로 돌아섰다.

“뭐 저따위가 있어요?” 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버지가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그는 캠프장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 천막 앞에 다 낡은 뷔크 한대가 서있었다. 지붕은 날아가고 없었다. 한 젊은이가 밸브를 갈면서 앞뒤로 몸을 꼬다가 조드네 트럭을 쳐다보았다. 그는 혼자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털보가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젊은이는 일을 멈추고 어슬렁거리며 건너왔다.

“안녕하시오.?” 그가 인사를 했다.

그의 파란 눈은 재미있다는 듯 반짝거렸다.

“당신들이 지금 금방 우리 시장님하고 만나는 걸 보았지요.

“그 사람 뭐가 그 따위요?” 톰이 물었다.

젊은이가 킬킬거렸다.

“그 사람 좀 돈 사람이라오. 누구나 다 돌았겠지만 그 사람은 좀 심한 편이지요. 나도 잘 모르겠소.

아버지가 말했다.

“난 우리도 여기에 천막을 좀 쳐도 되겠느냐고 물어봤던 거요.

젊은이는 기름 묻은 손을 바지춤에 씩씩 닦더니 말했다.

“그럼요. 누가 못 하게 하겠어요. 당신들은 지금 건너오는 길이시오?

“그렇소. 오늘 아침에 들어왔지요.” 톰이 말했다.

“전엔 후버빌에 와 보신 적이 없어요?

“후버빌이 어디요?

“여기가 바로 후버빌이지요.

“오, 그래요!” 톰이 말했다.

“우린 지금 막 들어오는 길이오.

윈필드와 루시가 그 사이에 물 양동이를 함께 들고 돌아왔다.

어머니가 말했다.

“얼른 천막을 치자. 난 녹초가 됐다. 모두 좀 자자꾸나.

아버지와 존 삼촌은 짐을 풀고 범포와 침대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트럭에 기어올랐다. 톰은 젊은이 쪽으로 건너가 그가 고치던 차 쪽으로 같이 걸어갔다. 밸브를 가는 조임쇠가 노출된 틀 위에 놓여 있었고 밸브를 갈 때 바르는 황색 배합물이 들어 있는 깡통이 진동조 위에 찔려 있었다.

톰이 물었다.

“아까 그 나이깨나 먹은 털보는 왜 까탈을 부리는 거요?

젊은이는 조임쇠를 집어 들고 하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앞뒤로 몸을 틀면서 밸브 자리에 밸브를 놓고 갈아댔다.

“그 시장님 말이오? 어찌 알겠소. 아마 보안관이 죽어서 둔갑이라도 한 모양이지요?

“그게 무슨 소리요?

“경찰이 하도 이리저리 쫓아 대니까 그 사람 아직도 머리가 빙빙 돌고 있는 모양이오.

톰이 물었다.

“경찰은 왜 괜한 사람을 쫓아 대지요?

젊은이가 일손을 멈추고 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누가 아오?” 그가 말했다.

“당신은 이제 막 와서 모르지만 곧 알게 될 거요. 어떤 놈은 와서 이래라 하고, 또 다른 놈은 와서 저래라 하는 거요. 당신도 한군데에 조금만 오래 있어 보시오. 보안관 보가 얼마나 사람을 들볶는지 알게 될 거요.

그는 밸브를 집어 들어 밸브 자리에 복합제를 발랐다.

“그런데 사람을 들볶아서 뭐하겠다는 거요?

“나도 모른다고 하지 않소? 어떤 놈들은 우리한테 투표권도 주기 싫다는 거요. 우리가 자꾸 쫓겨 다녀야 우리가 투표를 못 하게 되니까. 또 구제를 받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다는 사람도 있다오. 또 어떤 사람 말은 우리가 한 군데에 오래 모여 있으면 우리 같은 사람들끼리 무슨 단체라도 조직할까 봐서 그런다는 거요. 여하튼 무어가 무언지 모르겠소. 우리가 늘 쫓겨 다니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오. 당신도 조금 있어 보시오. 알게 될 테니.

“우리는 비렁뱅이들이 아니잖소?” 톰이 우겼다.

“우리는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오.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이오.

젊은이는 죔쇠를 밸브의 구멍에 맞추면서 말을 멈췄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톰을 쳐다보았다.

“일자리를 구한다고요?” 그가 말했다.

“그래, 당신은 일자리를 구하시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무얼 찾고 있는 줄 아시오? 다이아몬드라도 찾고 있는 줄 아시오? 나부터도 발바닥이 닳아빠지도록 찾아다닌 것이 무엇이었겠소?

그는 몸을 앞뒤로 굽히면서 밸브를 갈았다.

음산한 천막, 너저분한 살림살이들, 고물 자동차들, 햇볕에 쬐어 밀리고 있는 우툴두툴한 매트리스들, 먹을 것을 끓이느라 불에 시커멓게 그슬린 구멍과 그 위에 놓인 깡통들, 이 모든 처참한 광경이 톰의 눈에 하나하나 박혀 들어왔다.

그는 조용히 물었다.

“일자리가 그렇게 없나요?

“모르겠소. 있기야 하겠지요. 여기에 농작물은 없으니까 지금 그런 일은 없을 거고, 포도도 조금 지나야 딸 거고 목화도 그렇고, 우린 이 밸브만 다 갈면 바로 떠날 거요. 나하고 집사람하고 애들하고 말이오. 북쪽에 가면 일자리가 많다는 말을 들었소. 우리는 북쪽으로 올라갈 거요. 그 샐리너스 근처로 말이오.

톰은 저쪽에서 아버지와 존 삼촌과 목사가 천막 다리에다 범포를 올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안에서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깐 매트리스를 쓸고 있었다. 어린애들이 동그랗게 둘러서서 새로 온 사람들이 살림을 차리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말이 없는 아이들은 하나 같이 더러운 얼굴에 맨발이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말이오. 웬 친구가 구인광고 쪽지를 돌렸는데 오렌지 색깔로 된 종이였다오. 그러면서 여기에 오면 농사일을 할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고 하던데요.

젊은이가 코웃음을 쳤다.

“여기엔 지금 우리 같은 난민이 30만 명이나 몰렸다 합디다.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어느 가족이든 그 쪽지를 다 보았던 모양이오.

“하지만 만약 사람을 쓸 필요가 없으면 무엇 때문에 일부러 수고스럽게 그런 쪽지를 박아 뿌리겠소?

“보시오, 머리를 좀 쓰라고요.

“하지만 난 그걸 알고 싶다 이거요.

“이거 보시오.” 젊은이가 말했다.

“가령 당신이 일감이 있어서 한 사람을 쓰고 싶다고 합시다. 그 일을 하려고 하려는 사람이 딱 한 사람밖에 없으면 당신은 그 사람이 요구하는 품삯을 치러야 하오. 하지만 일을 할 사람이 백 명이 있어 보시오.

그는 연장을 놓았다. 그의 눈이 굳어지고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백 명이 있다 이거요. 그 사람들이 다 애새끼들이 있고 그 애새끼들이 다 배가 고프단 말이오. 가령 그놈의 10센트짜리 동전 한 닢으로 애새끼들이 먹을 버섯을 한 상자 산다 합시다. 5센트 한 닢으로 가령 그만 못한 무엇이라도 산다 합시다. 일할 사람이 백 명이 있는데 말이오. 품삯으로 단돈 5센트만 주겠다고 해보시오. 백 명의 사람들은 그 동전 한 닢을 서로 차지하려고 멱을 따고 싸운단 말이오. 내가 마지막에 했던 일에서 얼마를 받았는지 아시오? 한 시간에 15센트 줍디다. 열 시간 일해 봤자 1달러 50센트라오. 그나마도 그 자리에 붙어 있을 수도 없지요. 거기까지 가려면 휘발유도 써야지요.

그는 화가 나서 숨을 헐떡이며 눈에는 증오의 빛까지 시퍼렇게 번뜩였다.

“그러니까 그런 구인 광고 쪽지 같은 걸 뿌렸다 이거요. 들판에서 죽어라고 부려먹고 나서 한 시간에 고작 15센트씩 던져 주고 남은 돈으로 그까짓 종이쪽지는 얼마든지 더 찍어 낼 수 있다고요.

톰이 말했다.

“참 치사하군요.

젊은이가 거칠게 웃어댔다.

“만약 당신이 여기에 더 있다가 여기서 무슨 장미꽃 냄새라도 나거든 부디 날더러 좀 와서 맡아보라고 알려 주시오.

“하지만 일이 있긴 있잖소?” 톰이 우겼다.

“아, 그래도 이 모든 농작물이 다 일구어져 있는데, 과수원이며 포도밭이며 채소밭이며 오면서 보니까 너무 많은 듯도 하던데, 그걸 그럼 누가 다 가꾼단 말이오.? 사람이 어차피 있을 거 아니오?

차 옆의 천막 안에서 어린애가 울었다. 젊은이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더니 그의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톰은 죔쇠를 집어 들고 그것을 밸브의 구멍에다 맞추어 손을 앞뒤로 흔들면서 갈기 시작했다. 어린애의 울음이 멈추었다. 젊은이가 나오더니 톰을 지켜보았다.

“당신도 잘 만지는군요. 그것 참 잘 됐소. 그건 꼭 필요한 거요.” 그가 말했다.

“내가 말한 걸 어떻게 생각하시오?” 톰이 말했다.

“오다 보니 농작물들이 많더라고요.

젊은이는 발뒤꿈치를 세우고 쭈그리고 앉았다.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일하던 무척 큰 복숭아 과수원이 있었소. 일 년 내내 아홉 사람의 인부가 꼭 붙어 있어야 할 정도요.

그는 자기 말에 힘을 주듯 말을 멈추었다.

“복숭아가 다 익었을 때에는 두어 주일 동안 3천 명이 필요하지요. 그렇게 사람을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복숭아가 다 썩어 버린다오. 그러면 그놈들이 어떤 수작을 하는지 아시오? 사방에 당신이 말한 거와 같이 쪽지를 뿌리지요. 그러면 3천 명이 필요한데 6천 명이 몰려들지요. 품삯은 얼마든지 깎아서 주고 싶은 대로 줄 수 있지요. 그 품삯을 받기 싫으면 좋다는 거요. 얼마든지 그거라도 받고 일할 사람이 있으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그거라도 감수하고 받지요. 그러다보면 그 일이 다 되는 거요. 한 고장이 온통 복숭아 천지요. 몽땅 한꺼번에 익어 버리지요. 당신이 그걸 따는 동안 그 많던 복숭아가… 일을 하니까 그렇게 한 차례 치르고 나면 그 고장 일대에서는 할일이 없어져 버리는 거요. 주인 녀석은 더 이상 당신이 필요 없다, 이거지요. 3천 명이 몽땅 떨려나는 거요. 일이 끝났으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도둑질도하고 술도 퍼마시고 난장판을 벌이기가 일쑤지요. 거기에 당신 꼴은 또 말이 아니고, 다 낡은 천막이나 움막 속에서 사는 신세밖에 안 되지요. 땅은 참 아름다운 땅인데 그만 냄새가 나서 지긋지긋해지는 거요. 아무델 가도 환영하는 곳이 없어요. 아무데를 가도 발길로 걷어 채이고 떠밀리고, 바로 그게 이 세상이오.

톰은 자기네 천막 쪽으로 시선을 돌려 어머니를 보았다. 그녀는 피로에 지친 무거운 몸으로 잔 쓰레기들을 긁어모아 불을 피우더니 냄비를 불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어린애들의 동그라미가 더 죄어들었고 크게 뜬 조용한 눈들이 어머니가 놀리는 손의 동작을 하나하나 유심히 쳐다보았다.

등이 꼬부라진 아주 상노인 한 사람이 한 천막으로부터 마치 오소리처럼 기어 나와 코를 킁킁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두 팔을 뒷짐 지고 어린애들 틈에 끼어 어머니를 구경하고 있었다. 루시와 윈필드는 어머니 옆에 서서 낯선 아이들 쪽으로 퉁명스런 시선을 보내고 있다.

톰이 화가 나서 말했다.

“그 복숭아는 지금 당장이라도 까야 할 것 아니오? 도대체 복숭아 익는 철은 언제쯤이오?

“물론 이제 따야지요.

“가령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까짓 거 다 썩어도 모른다.’고 해보시오. 틀림없이 얼마 안 가서 품삯이 오를 테니!

젊은이는 일거리에서 눈을 들어 톰을 비웃듯이 쳐다보았다.

“여보시오, 당신 참 희한한 생각을 하는구려. 과연 참 훌륭한 생각이지만 혼자만 갖고 있으시오.

“난 피곤하오.” 톰이 말했다.

“밤새도록 차를 몰고 와서 시비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소. 너무 지쳐서 끄떡만 해도 다툴 것 같고. 그렇게 너무 빈정거리지 마시오. 난 몰라서 물어보는 거니까.

젊은이가 씩 웃었다.

“내가 빈정거리는 게 아니오. 당신은 전에 여기에 없었으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오. 여기서도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보시오, 사람들이 단합하려면 누군가 지도자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소? 그래야 상대방하고 얘기라도 할 테니까. , 그렇게 나서는 사람이 입을 벌리기가 무섭게 그놈들은 그 사람을 잡아다가 족치고 발길로 차서 감옥에 집어넣어 버린다오. 그리고 다른 지도자가 또 나서면 그놈을 또 잡아 족치는 거요.

톰이 말했다.

“사람은 감옥에 가도 그 안에서 먹기는 할 거 아니오?

“새끼들이 굶으니까 문제지요. 당신 같으면 새끼들을 굶겨 놓고 자기는 감옥에 들어가서 밥이 먹히겠소?

“그렇군요.” 톰이 천천히 말했다.

“그래요.

“문제가 또 있지요. 요주의 인물 명단이란 것 들어 봤소?

“그게 무어요?

“당신이 입을 열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모으려고 해보시오. 그러면 알게 될 거요. 그놈들은 당장 당신의 사진을 찍어다가 그걸 사방에 뿌려 두지요. 그럼 당신은 어디에서도 일자리를 못 구하게 되는 거요. 만약 단신 집에 애들이 있으면 그 애들까지…”

톰은 모자를 벗어 그것을 손아귀에 쥐고 비틀었다.

“그럼 주는 대로 받아라, 아니면 굶어 죽어라 이거요? 입을 까불면 굶어 죽는 다 이거요?

젊은이는 한 손으로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휘저었다. 그 원 속에 누추한 천막들과 다 낡은 차들이 들어가 있었다.

톰은 어머니 쪽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녀는 앉아서 감자를 벗기고 있었다. 어린애들은 더 바싹 다가서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나 같으면 그런 일자리는 사양하겠소. 빌어먹을, 나나 우리 가족들이 개나 돼지 같은 짐승은 아니니까. 개새끼들, 어느 놈이든지 걸리기만 해봐라. 발길로 차버릴 테니!

“경찰들이 하는 식으로?

“경찰식이든 무슨 식이든 말이오.

“당신 좀 돌았군요.” 젊은이가 말했다.

“당신은 금방 잡혀가오. 당신은 지위도 명예도 재산도 없소. 당신의 입과 코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시궁창에 처박힐 거라고요. 그리고 신문에 한 줄 기사로 나는 거요. 무언지 알겠소? ‘부랑자, 죽은 채로 발견되다.’ 그러면 그걸로 만사 끝이오. 앞으로 그런 기사가 얼마든지 눈에 띌 테니.

톰이 말했다.

“그 부랑아 옆엔 다른 놈 시체가 또 하나 나란히 누워 있을 거요.

“당신 정말 돌았소?” 젊은이가 말했다.

“그래 봤자 무어가 좋소?

“그래 당신 같으면 어쩌겠소?

그는 기름으로 얼룩진 젊은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젊은이의 눈에 엷은 막이 가려진 듯했다.

“난 아무것도 안 하겠소. 그런데 고향이 어디시오?

“우리 가족 말이오? 오클라호마의 샐리소 근처요.

“지금 막 들어오는 길이요?

“오늘 들어왔지요.

“여기에 오래 있을 거요?

“모르겠어요. 일자리가 생기면 아무데라도 옮겨 가야죠. 왜요?

“아니오.” 그의 눈에 막이 또 내려앉았다.

“가서 한잠 잘 자두어야지.” 톰이 말했다.

“내일은 모두 나가서 일자리를 구하러 돌아다녀야 하니까.

“어디 잘해 보시오.

톰은 돌아서서 자기네 천막 쪽으로 걸어갔다.

젊은이는 밸브용 복합제 깡통을 들고 그 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날 좀 보오!” 그가 소리쳤다.

톰이 돌아섰다.

“뭐요?

“좀 해줄 얘기가 있소.

그는 손가락으로 오라는 시늉을 했다. 손가락에는 끈적거리는 약품이 묻어 있었다.

“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어디를 가든 쓸데없이 말썽은 일으키지 마시오. 아까 그 털보 보셨지요?

“저쪽 천막에 있는 사람 말이오?

“그렇소. 벙어리처럼 생겨 가지고 멍청하니 마치 정신 나간 사람 같잖소?

“그 사람이 어쨌다는 거요?

“경찰이 오면 말이오, 경찰은 언제나 들락거리지만, 바로 그 사람처럼 하란 말이오. 그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 알아듣는 식으로 말이오. 그게 경찰이 제일 좋아하는 우리의 행동이요. 누굴 두들겨 팰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오, 그건 마치 자살과도 같은 짓이오. 그저 멍청이가 되시오.

“그 개새끼들이 나를 짓밟아도 나는 앉아서 가만히만 있으란 말이오?

“아니, 이거 보시오. 내가 오늘밤 당신한테 가지요. 내가 잘못 보았는지는 몰라도 언제나 이 근처에는 밀고하는 놈이 있다고요. 좀 위험한 일인지 모르지만, 나도 애새끼까지 있고 하니까, 여하튼 오늘밤에 당신한테 가겠소. 당신이 만약 경찰을 보거든 그저 병신 같은 오키가 되어서 꿀 먹은 벙어리 노릇만 하란 말이오, 알겠소?

“우리가 무얼 하자는 얘기라면 벙어리라도 좋소.” 톰이 말했다.

“걱정 마시오. 우리는 그냥 멍청이같이 모가지만 늘어뜨리고 있지는 않소. 어린애들은 조금만 굶으면 죽어 버려요. 2, 3일만 굶겨 보시오.

그는 하던 일로 되돌아갔다. 밸브 자리에 약제를 발랐고 손을 앞뒤로 빨리 움직였다. 그의 얼굴은 둔탁하게 흐려져서 말없이 일만 하고 있었다. 톰은 천천히 자기의 천막 쪽으로 돌아왔다.

“병신, 바보, 천치가 돼라?”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버지와 존 삼촌이 마른 버드나무 가지들을 한 아름씩 안고 캠프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것을 불가에 내려놓더니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나무 한번 잘해 왔다.” 아버지가 말했다.

“제법 먼데까지 가야겠던데.

그러더니 그는 삥 둘러서 있는 아이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이고, 얘들아! 너희들 다 어디서 왔니? 고향이 어디니?

아이들이 부끄러운지 발가락만 내려다보았다.

“이 아이들이 음식 냄새를 맡고 온 모양이에요.” 어머니가 말했다.

“얘 윈필드야, 거기 좀 비켜라.” 그녀는 윈필드를 밀어젖히고 나가면서 말했다.

“오늘은 스튜를 좀 해먹어야겠어요. 집을 떠난 뒤부터 우리는 아무 요리도 해먹지 못했어요. 여보, 당신 저 가게에 가서 고기를 좀 사오세요. 여기에다 하면 스튜가 잘 되겠어요.

아버지가 일어서더니 어슬렁거리고 걸어 나갔다.

앨은 차의 후드를 올려놓고 기름이 엉겨 있는 엔진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톰이 가까이 가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형은 말똥가리 새처럼 표정을 하고 있군.” 앨이 하는 말이었다.

“그래 꼭 봄비를 맞는 두꺼비처럼 즐겁구나.

“형, 이 엔진 좀 봐. 이만하면 좋지?” 앨이 손가락질을 했다.

톰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괜찮은 것 같다.

“괜찮다고? 제기랄, 그 정도가 아니야, 아주 훌륭해. 기름이고 무어고 한 방울도 튀겨 내지 않았어.

그는 점화전 나사를 틀어 그 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보았다.

“좀 굳어졌지만 말라 있군.

톰이 말했다.

“너 차 한번 제대로 골랐다. , 나한테 그 소리 듣고 싶은 거지?

“사실 나는 하루 종일 겁이 나서 죽을 뻔했어. 가다가 고장이나 나면 어쩌나, 전적으로 내 책임인데 하고 말이야.

“아냐, 넌 제대로 한 거야. 정비나 잘해 두어라. 내일 아침에는 또 일자리를 찾으러 나가야 하니까.

“잘 구를 거야. 차에 대해서는 걱정도 하지 마.” 앨이 말했다.

그는 주머니칼을 꺼내 점화전 끝을 칼로 긁었다. 톰은 천막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케이시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맨발의 한쪽 발을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톰이 그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겠어요?

“무어가?” 케이시가 물었다.

“아저씨의 그 발가락 말이에요.

“아, 난 그냥 앉아서 생각을 좀 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아저씨는 항상 태평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끄떡없는 모양이지요?” 톰이 말했다.

케이시는 엄지발가락을 들어 올리고 둘째 발가락을 누르면서 조용히 웃었다.

“자기 자신이 뒤틀리지 않게 골치 아픈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세.

“아저씨한테 그 재미있는 얘기 못 들은 지도 꽤 오래 되는데요. 요새도 그렇게 늘 생각만 하세요?” 톰이 물었다.

“그럼, 늘 생각하지.

톰은 헝겊 모자를 벗었다. 이젠 더럽게 다 구겨져 차양은 새 주둥아리처럼 뾰족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모자 띠를 돌려 뜯어내고 대신 신문지를 접어서 띠로 만들었다.

“땀이 하도 나니까 줄어들었군요!” 그가 말했다.

그는 꿈틀거리는 케이시의 발가락을 쳐다보았다.

“아저씨, 생각 좀 잠깐 그치고 제 얘기 좀 들어 보실래요?

케이시는 뻣뻣해진 목을 돌려 댔다.

“언제나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있으면 얼마 안 가서 사람들이 느끼는 기분을 알 수 있지. 언제나 그걸 계속하는 거야. 사람들 말을 듣고 그들을 느끼고 있다네. 그들은 마치 다락방에 들어간 새처럼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어. 그러다가 밖으로 나가려고 먼지투성이의 창문에 부딪쳐서 날개를 부러뜨리지.

톰은 눈을 큼직하게 뜨고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스무 자 가량 떨어져 있는 회색빛 천막을 내다보았다. 물에 빤 청바지와 셔츠와 옷가지들이 천막 줄에 걸려 있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바로 제가 그와 비슷한 얘기를 하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아저씨는 이미 다보고 있군요.

“다 보았지.” 케이시가 맞장구를 쳤다.

“우리같이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떼를 이루고 있네.

그는 머리를 수그리고 뻗은 손을 천천히 이마에 올려 머릿속으로 가져갔다.

“나는 줄곧 지켜보고 있었지. 우리가 멎는 곳마다 그것을 보았어. 사람들은 고기 한 조각이 먹고 싶고, 그러다가 그것이 생겨도 이미 진이 빠져 버려 먹지도 못하더군. 사람은 너무 배가 고프면 견디지 못하는 법이야. 그러면 나한테 찾아와 기도를 해달라는 거야. 더러는 할 수 없이 기도를 해줄 때도 있었지.

그는 세워 올린 무릎을 손으로 감싸 쥐고 다리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기도를 해주면 배고픈 것이 가라앉으리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지.”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기도를 마구 남발했고, 사람들의 모든 괴로움이 마치 파리 잡는 끈적끈적한 종이에 파리들이 다닥다닥 붙듯이 그 기도에 붙어서, 기도가 괴로움을 싣고서 멀리멀리 떠나 버린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런데 그 기도가 이제는 아무런 효험도 없더란 말이네.

톰이 말했다.

“기도를 해보았자 고기 한 전 안 생깁디다. 돼지 새끼를 잡아야 돼지고기를 먹게 되더군요.

“그렇지.” 케이시가 말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도 우리 사람들의 품삯을 올려 주시지 않았지. 여기 있는 사람들도 점잖게 살고 싶고 자식들을 제대로 먹여 키우고 싶은 거야. 그리고 그들도 늙으면 집 문간에 앉아 지는 해를 내다보고 싶은 거지. 젊을 때는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여자하고 같이 자고도 싶은 거야. 일도 하고 또 먹고 마시고도 싶은 거야. 바로 그거라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그 근육을 힘껏 휘둘러서 피로해지고 싶은 거야. 아이고! 이거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떠벌이고 있는 거지?

“모르겠는데요?” 톰이 말했다.

“무언지 좋은 얘기 같군요. 그런데 아저씨는 어느 때나 일에 대들어서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있을 것 같으세요? 우리는 일자리를 얻어야 해요. 돈도 이제 거의 바닥이 난 모양이던데. 아버지는 할머니 묘에 박을 페인트칠이 된 판자를 사느라고 5달러를 써버렸지요. 인제 얼마 없을 거예요.

바싹 마른 잡종 갈색 강아지 한 마리가 천막 주위로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그놈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사람이 조금만 움직여도 달아났다. 두 남자가 있는 줄 모르고 다가왔다가 개는 고개를 쳐들더니 놀라 옆걸음으로 뛰어 달아났다. 귀가 뒤로 처지고 앙상한 꼬리를 밑으로 감추었다. 천막을 돌아서 보이지 않게 숨어 도망가는 그 개를 케이시는 지켜보았다.

그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나는 아무에게도 도움 되는 일을 못하고 있네. 나 자신에게나 또는 남을 위해서나 말이네. 그래서 나는 혼자 멀리 떠나볼까도 생각했지. 나는 자네 가족의 밥을 먹고 있고 자네 가족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나? 그러면서 자네 가족에게 아무것도 못 해주고 있거든. 혹시 나도 안정된 일자리를 얻으면 그때는 자네 가족에게 진 빚의 일부라도 갚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만.

톰은 입을 멀리고 아래턱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는 마른 갓냉이 줄기를 주워 그걸로 아랫니를 툭툭 두드렸다. 그의 눈은 캠프촌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색 천막과 풀, 깡통, 종이 등으로 엮어 놓은 움막집들을 물끄러미 보며 그가 말했다.

“덜햄 담배나 한 쌈지 있었으면 좋겠네요. 담배 피워 본 지도 되게 오래 되었군요. 맥 알레스터에서는 담배를 피웠는데… 차라리 감옥에라도 돌아가고 싶을 정돈데요.

그는 다시 이를 툭툭 두들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목사 쪽으로 돌아섰다.

“아저씨, 혹시 감옥 같은 데에 가본 일 있으세요?

“아니.” 케이시가 말했다.

“한 번도 없었어.

“아직은 가지 마세요.” 톰이 말했다.

“아직은 같이 계세요.

“조금이라도 빨리 일자리를 찾아 나서면 그만큼 빨리 일자리를 얻을 거야.

톰은 눈을 반쯤 감고 그를 살피다가 다시 모자를 썼다.

“이거 보세요.” 그가 말했다.

“여기는 목사들이 말하는 그런 밀크와 꿀의 땅이 아니에요. 여기는 아주 야비한 짓들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라고요.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서부를 찾아오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무서워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경찰을 풀어 우리에게 겁을 주어 되돌려 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다네. 그런데 왜 나더러 감옥에 가봤는지를 묻지?” 케이시가 말했다.

톰이 천천히 말했다.

“감옥에 있으면 말이에요. 무어라고 할까, 여러 일들을 감각이나 눈치 같은 것으로 알게 되지요. 여럿이 모여 얘기를 하도록 놓아두지 않지요. 한 두어 명 정도는 몰라도 여러 명은 절대로 안 되지요. 그러다보면 자연히 눈치 같은 것이 발달하지요. 무슨 일이 터지려 하면, 예를 들어서, 가령 한 남자가 너무 오래 갇혀 있어서 머리가 좀 돌아 버려 기다란 걸레 자루 같은 것으로라도 간수의 대가리를 한 대 갈겨 주려고 한다든지 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벌써 알 수 있지요. 그리고 탈옥 사건이나 무슨 폭동 같은 게 일어나려 할 때도 누가 가르쳐 줄 필요도 없어요. 누구나 감각으로 알게 되니까요. 아시겠어요?

“그래?

“그냥 계세요.” 톰이 말했다.

“여하튼 내일까지라도 같이 계세요. 무언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아까 저쪽에서 웬 젊은 사람하고 얘기를 해 보았는데 그 친구는 꼭 늑대처럼 약삭빠르고 빈틈이 없더군요. 지나치게 빈틈이 없더군요. 자기 일에만 정신을 쏟고 좀 순진한 편인 데다가 마음은 약한, 그런 늑대지요. 재미있는 친군데 무슨 나쁜 짓은 안할 사람입디다. 바로 가까이에 닭장이 있더군요.

케이시가 그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무슨 말을 물어볼 듯했지만 입을 꼭 다물고 말았다. 그는 발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보더니 잡고 있던 무릎을 놓고 발가락이 보이도록 발을 앞으로 뻗었다.

“그래, 지금 당장은 안 가기로 하세.” 그가 말했다.

톰이 말했다.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조용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사이에, 그런 때 흔히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요.

“남아 있겠네.” 케이시가 말했다.

“그럼 내일은 우리가 다 나가서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일자리를 구해 봅시다.

“그렇게 하세!

그렇게 말을 하면서 케이시는 발가락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톰은 물러앉아 팔꿈치를 괴고 눈을 감았다.

천막 안에서 로자샤안이 뭐라 말하는 소리와 코니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남은 시커먼 그림자를 던졌고 양쪽 끄트머리에 떨어지는 햇살은 날카롭고 따가웠다. 로자샤안은 매트리스에 누워있고 코니는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가서 어머니를 좀 도와 드려야겠어요.” 로자샤안이 말했다.

“도와 드리려고 해도 갔다가 곧 돌아와 버리곤 했지만요.

코니의 눈은 시무룩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난 같이 따라오지 않고 고향에 남아 밤낮 트랙터에 관한 공부나 해 3달러짜리 일자리라도 얻을 것을 그랬어. 하루 3달러면 넉넉하게 잘 살 수 있을 거야. 매일 밤 영화구경도 갈 수 있고 말이야.

로자샤안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당신은 밤에 라디오에 관한 공부를 하실 거 아녜요?

“그래, 물론이지. 자립만 하게 되면 돈을 좀 벌겠지.

그녀는 팔꿈치를 괴고 몸을 돌렸다.

“당신 혹시 벌써 단념해 버린 건 아니지요?

“아니, 아니, 그야 물론 아니지. 하지만 우리가 살러 온 데가 이런 데일 줄은 몰랐어.

“그럼, 그럼, 나도 알고 있어. 얼른 자립을 해야지. 돈도 좀 벌어야 하고… 고향에 그냥 남아 트랙터 공부나 하는 편이 나올 뻔했는지 몰라. 하루에 3달러를 받고 거기에다 가외로 수당까지 받는대.

로자샤안의 눈이 타산을 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을 때 그는 그녀가 자기를 재어 보고 계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자립만 하게 되면 나도 공부를 할 거야.” 그가 말했다.

그녀가 사납게 말했다.

“우리 애를 낳기 전까지는 우리 집을 마련해야해요. 이 아기를 천막 같은 데에서 낳을 수는 없어요.

“그렇고말고.” 그가 말했다.

“내가 자립만 해봐.

그는 천막 밖으로 나와서 불 위이에 쭈그리고 있는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로자샤안은 다시 몸을 굴려 벌렁 누워 천막의 천정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재갈을 물리듯 입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불 옆에 무릎을 꿇고 작은 나뭇가지를 꺾어 넣으면서 불꽃이 스튜 냄비에 잘 닿도록 불을 살피고 있었다. 불은 펄럭하고 솟았다가 사그라지고, 커졌다가 다시 작아지곤 했다. 어린애들이 열댓 명쯤 모여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스튜요리 냄새가 코끝에 와 닿자 애들은 코를 조용히 벌름거렸다. 햇빛은 먼지로 더러워진 그들 머리 위를 내리쬐었다. 애들은 그냥 거기에 서있기가 멋쩍었지만 떠나지를 않았다.

어머니는 배고픈 아이들의 둘레 안에 들어와 있는 한 작은 계집애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래도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좀 큰 편이었다. 그 아이는 한쪽 발을 딛고 다른 한 쪽의 맨발 발등으로 종아리 뒤쪽을 비비며 서있었다. 두 손을 뒤로 돌려 뒷짐을 지고 작은 회색 눈동자로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줌마가 해달라고 하시면 나뭇가지를 잘라 드리겠어요.” 아이가 자청했다.

어머니가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먹으라고 할까봐서 그러는 거지?

“그래요, 아줌마.” 그 아이는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어머니는 나뭇가지 자른 것을 냄비 밑에 밀어 넣었다. 불길이 빠지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너 아침밥도 안 먹었니?

“안 먹었어요, 아줌마. 여기에는 일자리도 없어요. 아빠는 무어든지 팔아 버리려 해요. 휘발유를 사서 다른 데로 떠나려고요.

어머니가 올려다보았다.

“여기 있는 아이들은 아무도 아침밥을 안 먹었니?

동그랗게 서있는 아이들은 불안스럽게 발을 옮겨가며 끓고 있는 냄비에서 시선을 돌렸다. 한 작은 사내아이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난 먹었어요. 나하고 우리 형하고. 그러고 쟤들 둘도 먹었고요. 내가 봤어요. 우리는 잘 먹었어요. 우리는 오늘밤 남쪽으로 떠나요.

어머니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넌 배 안 고프지? 여기 있는 걸 가지고 다 나누어 줄 수는 없구나.

작은 사내아이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우리는 잘 먹었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뛰어가더니 한 천막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그 아이를 하도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키 큰 계집아이가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불이 꺼지려고 해요. 제가 살려 드릴까요?

루시와 윈필드는 동그라미 안에 서서 제법 냉정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애들과는 좀 떨어져서 그 음식이 자기들 것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시는 그 키 큰 계집애 쪽으로 차갑고 노여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더니 쭈그리고 앉아 어머니한테 나뭇가지를 끊어 주었다. 어머니는 냄비 뚜껑을 열고 나무 막대로 스튜를 저었다.

“너희들 중에 배가 안 고픈 사람도 있어 참 잘됐다. 아까 그 꼬마도 그렇지?

큰 계집애가 코웃음을 쳤다.

“아녜요! 아까 걔는 괜히 뻐기느라 그래요. 얼마나 으스대는지 몰라요. 저녁밥을 못 먹으면 무어라 하는지 아세요? 간밤엔 밖에 나오더니 자기 집에서 닭고기를 먹었다나요? 그래서 밥 먹을 때 들여다보았더니 다른 집하고 똑같이 밀가루반죽 튀긴 걸 먹잖겠어요?

“그래?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며 사내아이가 달아난 천막 쪽을 내다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그 계집애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희는 캘리포니아에 온지 얼마나 되니?” 그녀가 물었다.

“응, 6개월쯤 됐어요. 관청에서 준 캠프에서 잠깐 살았어요. 그러다가 북쪽으로 갔는데 돌아와 보니까 그 캠프가 꽉 차버렸어요. 거긴 살기가 아주 좋은 곳이었어요.

“그게 어딘데?” 어머니가 물었다.

그녀는 루시 손에서 나뭇가지를 받아 불을 더욱 활활 지폈다. 루시는 계집애가 미워 잔뜩 흘겨보고 있었다.

“위드팻치 너머에 있어요. 변소하고 목욕탕도 깨끗하고 또 빨래통에 빨래도 할 수 있고 먹는 물도 깨끗하고 사용하기 간편하게 되어 있어요. 밤에는 사람들이 음악도 연주하고 토요일 밤엔 춤도 추었어요. 그렇게 좋은 데는 없어요. 어린이 놀이터도 있고요, 변소에 화장지도 놓아주었고요. 걸려 있는 조그마한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변소에 물이 흘러 나와요. 아무 때나 찾아와 천막 안을 들여다보는 그런 경찰도 없고요. 그 캠프를 운영하는 사람은 참 점잖아요. 찾아와서 이야기도 잘하고 하나도 건방지지 않고 무섭지도 않아요. 우리도 거기에 다시 가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난 그런 얘기는 못 들었구나. 나도 빨래통에서 빨래할 줄도 아는데 말이다.

계집애가 신이 나서 계속했다.

“아이, 그리고요. 거기에는 파이프 속에 더운 물이 들어 있어요. 샤워 탕에 들어가면 아주 뜨뜻해요. 그런데는 처음 봤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지금은 다 찼다니?

“예, 지난번 물어 보았을 때는 다 찼다고 그랬어요.

“돈이 많이 들겠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돈은 든대요. 그렇지만 돈이 없으면 일을 해주고 갚으면 돼요. 일주일에 두 시간씩 청소도 하고 쓰레기통도 치워 주고 그런 일 말예요. 밤에는 음악도 있고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도 하고, 바로 파이프 안에는 더운 물도 나오고 그렇게 좋은 데는 정말로 없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도 그런 데로나 갔으면 참 좋겠다.

루시는 참을 대로 참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 할머니는 바로 트럭 위에서 돌아가셨어.

계집애가 의아해서 루시를 쳐다보았다.

“정말이야, 그랬어.” 루시가 말했다.

“그래서 검시관이 할머니를 데려갔어.

그런 뒤 루시는 입을 꼭 다물고 말없이 나뭇가지를 뚝뚝 분질렀다. 윈필드는 누나의 대담한 공격에 눈을 깜박거렸다.

“바로 트럭 위에서 그랬지, ?” 그는 누나의 말을 되받았다.

“검시관이 큰 바구니에다 감아 갔어.

어머니가 말했다.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냐. 너희들 둘 다 그런 소리 하면 쫓겨난다.

그녀는 불에 나뭇가지를 더 지펴 넣었다.

앨이 캠프장 아래쪽으로 어슬렁거리고 가다 밸브를 갈고 있는 젊은이를 보았다.

“거의 다 돼가는군요.

“두 개 남았어요.

“이 캠프장에는 여자 애들이 없나요?

“나는 아내가 있소.” 젊은이가 대답했다.

“나는 여자 같은 건 생각할 여유도 없다오.

“나는 여자 생각할 여유는 얼마든지 있는데요? 다른 거 생각할 여유는 없어도 말이에요.

“당신도 좀 배가 고파 보면 안 그럴 거요.

앨이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생각만큼은 변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내가 조금 아까 같이 애기하던 그 사람도 당신하고 같이 왔지요? 안 그렇소?

“그래요. 우리 형 톰이요. 우리 형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사람을 죽인 일도 있는 사람이라오.

“그래요? 무엇 때문에?

“싸웠지요. 상대방이 형한테 칼을 들이댔거든요. 그러니까 형은 삽을 집어 들고 대가리를 부수어 준 거지요.

“그랬군요. 그래 재판은 어찌 되었소?

“그건 싸움이었으니까 그냥 풀려났지요. .” 앨이 말했다.

“싸움할 사람 같지가 않던데?

“예, 싸움 안 해요. 하지만 우리 형은 다른 사람한테 당하고 가만히 있지는 않지요.” 앨의 목소리는 의기양양했다.

“참 조용한 사람이지요. 하지만 조심하시오!

“그래서 나도 오늘 같이 얘기를 해보았지만 별로 심술이 있는 사람은 아닙디다.

“아니지요. 건드리지만 않으면 꼭 파이같이 좋은 사람이지요. 하지만 일단 화가 났다 하면 그때는 조심해야지요.

젊은이는 마지막 밸브를 갈았다.

앨이 곰살맞은 투로 말했다.

“그 밸브를 원상태로 실린더 위에 올려놓는 심부름 좀 해드릴까?

“할 일만 없다면 좀 도와주시오.

“잠은 좀 자야겠는데.” 앨이 말했다.

“하지만 난 고장 난 차를 보면 근질근질해서 그냥 놓아두지를 못하거든요. 손을 좀 보아드려야지, .

“좀 도와주면 고맙겠소.” 젊은이가 말했다.

“내 이름은 프로이드 노울즈요.

“앨 조드입니다.

“알게 되어서 반갑소.

“저도 그렇습니다.” 앨이 말했다.

“개스킷을 갈지 않고 그냥 쓰실 건가요?

“그래야지 할 수 없군요.

앨은 주머니칼을 꺼내서 밸브 틀을 긁었다.

“제기랄, 난 이 엔진 창자 속같이 좋은 게 없더군요.” 그가 말했다.

“여자는 어쩌고?

“그렇죠. 여자하고! 롤즈를 한번 다 뜯었다가 분해해서 맞추어 보았으면 좋겠어요. 요전에 한 번은 캐딜락 16의 후드를 열고 들여다보았는데, 진짜 그렇게 희한한 건 처음 보겠더군요. 샐리소에서 말이에요. 어떤 식당 앞에 그 16형이 서 있기에 내가 후드를 열어 보았지요. 웬 사람이 나오더니 하는 말이 ‘당신 무엇 하는 거요?’ 하기에, ‘잠깐 구경 좀 했소. 참 근사한데!’ 그랬더니 그 사람은 그냥 서있더군요. 그 사람은 자기 차지만 엔진 속은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모양입디다. 그냥 서서 구경만 하는 거예요. 맥고모자를 썼는데 돈푼이나 있게 생겼더군요. 줄무늬가 있는 셔츠를 입고 안경까지 썼어요. 우리는 서로 말도 안 하고 그냥 들여다보고만 있었는데 한참 있다가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당신 한번 운전해 보려오?’”

“어럽쇼!” 프로이드가 말했다.

“엉뚱한 제안이지 뭐요? ‘한 번 운전해 보겠느냐.’ 이거예요. , 그런데 나는 그때 기름이 묻어 아주 더러운 청바지를 입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차가 더러워질 텐데요.’ 했더니 ‘자, 한 번 해보시오.’ 하는 거예요. ‘이 블록을 한 바퀴만 돌아보시오.’ 그래서 어디 한번 해

보자면서 운전석에 앉아 그 블록을 여덟 바퀴나 돌았지요. 야아, 참 그 맛이란!

“근사했어요?” 프로이드가 물었다.

“말 마쇼!” 앨이 말했다.

“그 차를 한 번 뜯었다가 맞추어 볼 수만 있다면 무슨 대가라도 내놓겠습디다.

프로이드는 흔들고 있던 팔을 좀 늦추었다. 그는 마지막 밸브를 집어 들더니 그걸 쳐다보았다.

“당신도 고물차에 익숙해져야 할 거요. 16형 같은 것은 몰아 보기 어려울 테니까.

그는 조임쇠를 차의 발판에 올려놓고 끌을 집더니 밸브 틀을 긁기 시작했다. 땅딸막하게 생긴 여자 두 사람이 모자도 안 쓰고 발도 벗은 채 양동이에 밀크 같은 물을 들고 지나갔다. 그들은 양동이의 무게 때문에 뒤뚱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땅만 보고 걸어갔다. 오후 한나절의 해는 반쯤 내려가 있었다.

앨이 말했다.

“당신은 좋아하는 게 별로 없는 모양이지요?

프로이드는 끌을 더 세게 문질렀다.

“나는 여기에 6개월이나 있었소.” 그가 말했다.

“나는 집사람하고 애들한테 먹일 감자와 고기를 얻기 위해 죽어라고 일하고 열심히 이 주안을 돌아다녔다오. 마치 들토끼처럼 뛰어다녔지만 그래도 안 되는 데야 어쩌겠소?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먹을 만큼 벌기란 쉽지가 않더군요. 이젠 그만 지쳤어요. 그것뿐이라오. 인제 편안히 누워서 쉬고 잠잘 수 있는 처지는 벌써 지나 버렸고 그저 지친 거요. 인제 어찌해야 할지 엄두조차 안 나는 판이라오.

“좀 안정된 일자리가 그렇게 없나요?” 앨이 물었다.

“그런 자리는 없소.” 그는 밸브 틀에 덮여 있는 때를 끌로 밀어 떼어버리고 그 둔탁하게 생긴 금속을 기름 묻은 걸레로 닦았다. 녹이 다닥다닥 슬어 있는 포장 달린 자동차 한 대가 캠프장 속으로 굴러들어 왔다. 그 안에는 거무스름한 얼굴을 한 남자가 넷이나 타고 있었다. 차는 천천히 캠프장 안을 굴러갔다.

프로이드가 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좋은 일 있소?

차가 멎었다. 운전하던 남자가 말했다.

“많이 돌아다녀 보았지만, 이 고장에는 일할 만한 데가 한 군데도 없더라고요. 그만 딴 데로 떠나야겠어!

“어디로요?” 앨이 소리쳤다.

“그걸 누가 알겠소? 여하튼 여기는 볼 장 다 보았으니까.

그는 클러치를 넣고 나서 천천히 캠프장을 걸어내려 갔다.

앨은 그들을 쳐다보았다.

“한 사람씩 돌아다니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한 사람이 한 군데씩 가보면 걸릴 가능성이 더 많으니까.

프로이드는 끌을 내려놓고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요.” 그가 말했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려면 기름이 들거든요. 기름이 1갤런에 15센트요. 네 사람이 차 네 대를 타 보시오. 그러니까 한 사람 당 10센트씩 거둬 기름을 같이 사는 거라고요. 무슨 얘긴지 알아듣겠소?

“형!

앨은 자기 옆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서있는 윈필드를 돌아보았다.

“형, 엄마가 스튜를 다 만들었다고 빨리 와서 먹으래.

앨은 바짓가랑이에 손을 닦았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먹었구나.” 그가 말했다.

“다 먹고 나서 도와 드리지요.

“하고 싶지 않으면 꼭 올 필요는 없소.

“아니오. 꼭 해드리지요.

그는 윈필드를 따라 조드 일가의 천막으로 향했다. 거기는 대만원이었다. 낯선 아이들이 스튜 냄비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도 바싹 달라붙어 있어서 음식을 퍼내는 어머니의 손이 그들을 스칠 정도였다. 톰과 존 삼촌은 그녀 옆에 서있었다.

어머니가 난처한 듯 말했다.

“아휴,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식구들도 다 먹어야 할 텐데, 여기에 있는 이 아이들은 다 어떻게 하지?

아이들은 빳빳하게 서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얼굴들은 무표정하게 굳어 있었고, 눈만이 기계적으로 냄비로부터 그녀가 들고 있는 양철 접시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냄비에서 접시로 왔다 갔다 하는 숟가락을 쫓고 있던 아이들의 눈은, 그녀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접시를 존 삼촌에게 건네주자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존 삼촌이 스튜 속에 숟가락을 넣었다. 무표정한 눈들이 숟가락을 따라 올라갔다. 감자 한 조각이 존 삼촌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무표정한 눈들은 그가 감자를 먹으면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궁금하다는 듯 시선이 일제히 그의 얼굴로 향했다. 그 맛이 좋을까? 저 사람은 그것을 좋아할까?

존 삼촌은 그제야 아이들을 의식한 듯했다. 그는 천천히 감자를 씹더니, “자, 이거 너나 먹어라. 난 시장하지 않다.”면서 톰에게 접시를 내밀었다.

“삼촌은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드셨어요.” 톰이 말했다.

“그래, 안다. 그런데 배가 좀 아프구나. 어째 시장하지도 않고.

톰이 조용히 말했다.

“접시를 천막 안으로 가져가서 잡수세요.

“배고프지 않대도 그러는구나.” 존 삼촌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가도 저 아이들이 보일 거다.

톰이 아이들 쪽으로 돌아섰다.

“자, 저리 가거라. 어서들 가.” 그가 말했다.

둥그렇게 둑을 쌓고 있던 눈들이 스튜를 떠나 어리둥절한 채 톰의 얼굴에 와 멎었다.

“이제 그만들 가거라. 여기 있어도 소용없어. 너희들에게 다 줄 만큼 많지도 않으니까.

어머니가 스튜를 퍼서 양철 접시에 담았다. 너무 적은 분량이었다. 그 접시들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저 아이들을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녀가 말했다.

“접시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세요. 남으면 애들에게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주지요. , 이건 로자샤안 몫이니까 갖다 주세요.

그녀는 애들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너희들 가서 조그맣고 납작한 나무를 하나씩 주워 오너라. 이걸 조금씩 나누어 줄 테니까. 그러나 싸우면 안 된다.

모여 있던 아이들은 말없이 그러나 아주 기민한 동작으로 흩어졌다. 어떤 애들은 나뭇가지를 찾으러 뛰어다녔고 어떤 애들은 자기네 천막으로 달려가 숟가락을 들고 왔다. 어머니가 접시에 스튜를 다 분배하기도 전에 그들은 모두 돌아왔다. 조용히 말도 없이 쭈뼛거리고들 있었다.

어머니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쩌면 좋지, 이걸! 식구들 것을 훔쳐 줄 수도 없고. 식구들도 먹어야 하니까. 얘들아, 루시, 윈필드, ! 빨리 접시를 가져가지 않고 뭣들 하니?” 그녀가 사납게 소리쳤다.

“어서 천막 속으로 들어가!

그런 뒤 그녀는 미안한 얼굴로 기다리던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많이는 없다, ?”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 냄비를 여기에 내놓을 테니까 너희들 다 조금씩 맛이나 보아라. 별로 요기도 안 되겠다만.” 그녀는 말을 더듬거렸다.

“어쩔 수가 없구나. 너희한테 안 줄 수도 없고.

그녀는 냄비를 들어서 그것을 땅바닥에 놓았다.

“가만히 있어. 이거 너무 뜨겁다.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는 그 광경을 보지 않기 위해서 얼른 천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족들은 접시를 하나씩 들고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밖에서는 아이들이 각자 나무막대와 숟가락과 더러운 깡통을 들고 냄비에서 스튜를 조금이라도 더 퍼내느라고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아이들이 새까맣게 둘러싸서 냄비는 보이지도 않았다. 아이들은 말이 없었고 싸우지도 다투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조용하고 진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치 목석같은 사나움이 엉켜 있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돌리고 그쪽을 보지 않으려 했다.

“앞으론 저런 짓도 못 하겠어. 그냥 우리 식구끼리 먹고 말아야지.” 그녀가 말했다.

이젠 냄비 바닥을 박박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언덕처럼 쌓여 있던 어린애들은 일제히 흩어져 버리고 다 긁어 먹은 냄비만이 덩그러니 땅바닥에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빈 접시들을 쳐다보았다.

“먹은 것 같지도 않겠네요.

아버지가 일어서더니 대답도 없이 천막을 나갔다. 목사는 혼자 속으로 쓸쓸하게 웃으면서 손으로 머리를 괴고 뒤로 누워 버렸다. 앨이 일어섰다.

“저쪽에 차 고치는 사람 좀 가서 도와주어야지.

어머니는 접시들을 모아 밖으로 씻으러 갔다.

“루시! 윈필드!” 그녀가 불렀다.

“지금 곧 가서 물 한 양동이 길어 오너라.

그녀는 애들에게 양동이를 집어 주었고 애들은 강 쪽을 향해서 뛰어나갔다.

억세고 넓적한 얼굴의 한 부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옷에는 먼지와 때가 묻어 줄이 가있었고 기름이 얼룩덜룩했다. 자존심이 무척 센 탓인지 그녀의 턱은 높이 치켜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얼마쯤 거리를 두고 선 채 도전적인 태도로 어머니를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접근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는 대답을 하면서 끓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앉으며 상자 하나를 앞으로 밀었다.

“좀 앉으세요.

그 여자가 가까이 왔다.

“아니, 앉지 않겠어요.

어머니는 어안이 벙벙해서 여자를 쳐다보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세요?

여자는 두 손을 엉덩이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당신은 제발 당신 네 아이들이나 거두고 남의 아이들일랑 좀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의 눈이 커졌다.

“내가 어쨌다는 거죠?

여자는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 집 애가 스튜 냄새를 풍기면서 돌아왔어요. 당신이 주었다고 그러더군요. 그까짓 스튜 좀 해먹는다고 너무 뻐기고 너무 잘난 체하지 마시라고요! 제발 그런 짓 좀 삼가세요! 나는 그런 일 아니어도 얼마든지 골치 아픈 일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녀석이 들어와서 무어라고 하는지 아세요? ‘왜 우리는 스튜를 안 해먹어?’”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다.

어머니가 바짝 다가섰다.

“앉으세요. 앉아서 얘기 좀 해요.

“아니, 앉지 않을래요. 내가 내 식구들을 먹이려는데 당신이 그 스튜를 갖고 와서 망쳐 놓았단 말예요.

“자, 앉으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건 우리가 마지막으로 해먹은 스튜예요. 인제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는 해먹지 못할 거예요. 가령 아주머니가 스튜를 요리하고 있는데 어린아이들이 잔뜩 몰려와서 킁킁거리고 둘러서 있으면 어쩌시겠어요? 우리 식구끼리만 먹으려 해도 넉넉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어린것들이 그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안 주고 어떻게 합니까?

여자의 손이 엉덩이에서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눈이 잠시 어머니를 뜯어보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휙 발길을 돌려 잽싸게 나가버렸다. 여자는 한 천막 속으로 들어가더니 포장을 찰싹 닫아 버렸다. 어머니는 그녀 뒤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다시 무릎을 꿇고 접시를 설거지하기 시작했다.

앨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형!” 그가 불렀다.

“어머니, 형 안에 있어요?

톰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왜 그래?

“나하고 같이 가봐.” 앨이 흥분해서 말했다.

그들은 같이 걸어갔다.

“그런데 뭐냐?” 톰이 물었다.

“가보면 알아. 기다려.

그는 톰을 이끌고 고장 난 차 있는 데로 갔다.

“이쪽은 프로이드 노울즈 씨야.” 그가 인사를 시켰다.

“그래. 아까 만나서 이야기도 해봤다. 안녕하쇼?

“인제 거의 다 고쳐 가는군요.” 프로이드가 말했다.

톰은 밸브를 위에 손가락을 굴려 보았다.

“그런데 넌 무슨 생각이 난거냐, ?

“프로이드 씨가 금방 내게 얘기한 게 있어. 얘기 좀 해 보세요, 프로이드 씨.

프로이드가 말했다.

“이런 얘기는 안 해야 하지만 당신들한테는 알려주지요. 어떤 사람이 와서 그러는데 북쪽에 일자리가 있답디다.

“저 북쪽에?

“예, 산타클라라 계곡이라는 곳이요. 아주 훨씬 북쪽이지요.

“그래요? 어떤 일인데요?

“자두하고 배를 따는 일이오. 그리고 깡통 일하고. 시간이 아주 급하대요.

“여기서 얼마나 되죠?” 톰이 물었다.

“그야 모르지요. 아마 한 2백 마일쯤?

“그거 무척 먼 거린데?” 톰이 말했다. “우리가 도착해서도 일이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겠소?

“글쎄, 그거야 모르지요. 아마 한 2백 마일쯤?

“그거 무척 먼 거린데?” 톰이 말했다.

“우리가 도착해서도 일이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겠소?

“글쎄, 그거야 모르지요.” 프로이드가 말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고, 또 그 친구 말이 자기 형한테서 편지가 왔었는데 벌써 떠났다더군요. 그러면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고 부탁합디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든다고. 우리는 밤중에 떠나야 해요. 거기에 도착해서 일을 순서대로 생각해 봐야겠어요.

톰이 그를 가만히 살폈다.

“살짝 빠져 나가야 할 건 뭐요?

“사람들이 너무 몰려 아무도 일자리를 얻지 못하죠.

“야, 너무 멀다.” 톰이 말했다.

프로이드는 조금 언짢아진 모양이었다.

“간단히 귀띔만 해주는 거지, 꼭 가자는 건 아니지요. 여기 있는 당신 동생이 나를 도와주기에 당신한테만 알려 주는 거요.

“여기에 일자리가 없다는 건, 당신 확실하오?

“이보시오. 나는 지난 3주일 동안을 안 간 데 없이 샅샅이 헤맸다고요. 일자리는 고사하고 어디 가서 잠깐 손질 한 번 못 해봤다고요. 당신도 직접 돌아다니면서 보고 휘발유나 없애고 싶다면 해보시구려. 난 같이 가자고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가면 그만큼 내 기회가 줄어드는데, .

톰이 말했다.

“내가 트집을 잡는 게 아니오. 길이 하도 머니까 얼른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러는 거지. 그리고 여기서 일자리를 얻어서 셋방이라도 얻어 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중이라고요.

프로이드가 참을성 있게 말했다.

“당신들이 오늘 막 들어온 줄도 알아요. 당신들이 이 고장을 알려면 아직 멀었어요. 나한테 알려 달라면 많이 배우게 될 거요. 당신들은 여기에서 절대로 정착하지 못하오. 당신들을 붙잡아 놓을 일이 없으니까. 그리고 당신들의 창자가 당신들을 여기에 정착하게 놓아두지 않을 거요. , 그게 다요.

“그래도 한 번 찾아보기라도 했으면 좋을 텐데.” 톰이 자신 없게 말했다.

세단 한 대가 캠프장으로 들어와 바로 옆 천막 앞에 멎었다. 작업복에다 파란 셔츠를 받쳐 입은 남자가 내렸다. 프로이드가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좋은 일 있었소?

“이 고장에는 아무데를 가도 손 하나 까딱할 일이 없어요. 목화 따는 철이나 되기 전에는 다 틀렸소.

그러더니 그는 남루한 천막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것 보았소?” 프로이드가 말했다.

“그렇소. 잘 알겠소. 그만하면. 하지만 제기랄, 200마일이라니!

“아무튼 당신들은 아무데에도 정착하기는 어려울 거요. 그쪽으로 결심을 하는 게 나을 거요.

“가는 게 낫겠어, .” 앨이 말했다.

톰이 물었다.

“어머니는 다른 데로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인제 완전히 기진맥진하신 모양이야.

프로이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당신들을 억지로 북쪽에 끌고 가려는 건 아니오. 좋을 대로 하시오. 다만 내가 들은 정보를 알려준 것뿐이니까.

그는 차의 발판에서 기름투성이가 되어 있는 개스킷을 집어서 그것을 조심스럽게 밸브 틀에 맞추고 눌렀다.

그가 앨에게 말했다.

“자, 그 엔진 후드, 손 좀 봐주겠소?

무거운 엔진 후드를 후드의 볼트 위에 조용히 내려놓고 그것을 고르게 부착시키고 있는 동안 톰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 한번 가서 의논해 봐야겠는걸.” 그가 말했다.

프로이드가 말했다.

“나는 당신네 가족들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은 원하지 않으니까 그런 줄 아시오. 그것도 당신 동생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말도 안 했을 거요.

앨이 말했다.

“틀림없이 갈 거요. 다른 사람들이 가든 안 가든 나 혼자라도 말이오. 남의 차에 좀 얹혀서라도 가야겠어요.

“가족들은 놔두고?” 톰이 물었다.

“그럼! 청바지에 빳빳한 돈을 꽉 채워 돌아올 테야. , 안 돼?

“어머니는 그런 거 좋아하지 않으실 거다.” 톰이 말했다.

“아버지도 그런 건 아주 질색일 것이고.

프로이드는 나사를 맞추어 손가락으로 돌릴 수 있는 데까지 돌려놓았다.

“나도 집사람하고 가족들을 몽땅 데리고 떠났죠.” 그가 말했다.

“고향에서라면 가족들이 서로 흩어진다는 건 아예 생각지도 못했을 거요. 절대로 그런 짓은 안 했을 거요. 그런데 우리는 모두 북쪽으로 갔다가 나만 이쪽으로 내려왔던 거요. 가족들은 다 북쪽으로 가고. 그래서 지금은 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지요. 그 뒤로 사방에 물어보기도 하고 찾아보기도 했지만.

그는 엔진 후드의 볼트에 스패너를 대고 고르게 힘을 주어 틀었다. 나사 하나마다 한 번씩 틀면서 나사 전부를 다 틀었다.

톰은 차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천막이 줄지어 서있는 아래쪽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천막과 천막 사이에 나무토막이 두들겨 박히는 중이었다.

“천만에, 어머니가 널 보내시지 않지.” 그가 말했다.

“글쎄, 내 생각으론 혼자 간편하게 가는 것이 일을 얻기도 더 쉬울 것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머니가 말을 안 들으실 거다.

볼썽사납게 생긴 남자들을 태운 차 두 대가 캠프장 안으로 굴러들었다. 프로이드는 고개를 들었지만 이번에는 묻지도 않았다. 먼지에 덮인 그들의 얼굴은 비통함과 반항심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제 해가 기울고 있었고, 황금빛 햇살이 후버빌 위에 그리고 그 뒤의 버드나무 위에 비치고 있었다. 어린애들이 천막 안에서 나와 캠프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또 여자들도 천막에서 나와 조그맣게 불을 피웠다. 남자들은 떼를 지어 쭈그리고 앉아서 그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품 시보레 쿠페 한 대가 국도를 벗어나 캠프 쪽을 향해 내려왔다. 그 차는 캠프장의 한복판에 와서 멎었다.

톰이 말했다.

“저게 누구요? 여기 사람들이 아닌데?

프로이드가 말했다.

“모르겠소. 아마 경찰인 모양이오.

차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나오더니 차 옆에 섰다. 그의 동료는 자리에 앉은 채 남아 있었다. 쭈그리고 앉았던 남자들은 다 그쪽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중단했다. 불을 피우고 있는 여자들도 살금살금 그 번쩍거리는 차를 훔쳐보았다. 애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커다란 원을 이룬 채 조금씩 조심스럽게 좁혀 들고 있었다.

프로이드는 자기의 스패너를 내려놓았다. 톰이 일어섰다. 앨은 손을 바지에다 쓱쓱 닦았다. 세 사람은 시보레 쪽으로 다가갔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카키 바지에다 플란넬 셔츠를 입고 있었다. 차양이 납작한 스텟슨 모자를 썼다. 종이쪽이 한 다발 이 그의 셔츠 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만년필과 노란 연필 몇 자루가 그 종이 다발이 떨어지지 않도록 밖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 호주머니에는 쇠뚜껑이 달린 공책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남자들의 한쪽 무리에 다가갔다. 사람들이 조용히 그리고 수상쩍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그를 쳐다보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눈동자의 홍채 밑에 흰자위가 보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톰과 프로이드와 앨이 어슬렁거리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남자가 말했다.

“당신들 일하고 싶소?

그래도 사람들은 조용히 그리고 의심스럽게 쳐다보기만 했다. 캠프 안에 있던 남자들이 다 가까이 모여들었다.

쭈그리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하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물론 일하고 싶지요. 그 일이 어디 있습니까?

“투레어 군이오. 과일이 지금 한창 철을 만나서 과일 따는 일손이 많이 모자라는 모양이오.

프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이 사람을 뽑으시오.

“글쎄, 나는 땅을 계약하고 있는 사람이오.

사람들은 이제 바싹 몰려 있었다. 작업복을 입은 한 남자가 까만 모자를 벗고 기다랗고 까만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올리며 물었다.

“품삯이 얼마요?

“글쎄, 아직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한 30센트 정도일 거요.

“왜 당신이 모르시오? 당신이 계약을 한다면서, 그렇잖아요?

“그건 그렇지만요.” 카키 바지의 남자가 말했다.

“그건 말이오, 과일의 시세에 따라 달라지는 거요. 그것보다 조금 더 줄 수도 있고 조금 덜 줄 수도 있지요.

프로이드가 앞으로 나갔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제가 가지요. 당신은 땅을 계약하는 사람이니까 허가증이 있을 거요. 그 허가증 좀 잠깐 보여주시오. 그리고 우리보고 가서 일하라는 명령을 내리시오. 그러고 나서 언제 어디서 우리가 얼마를 받게 된다는 것에 서명하시오.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갈 거요.

그 남자는 난처한 얼굴을 하고 돌아섰다.

“당신 나더러 사업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경영 방침까지 가르쳐 줄 작정이오?

프로이드가 말했다.

“우리가 당신을 위해 일을 하게 되면 그건 우리 사업도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는 소리는 마시오. 나는 일손이 필요하다 했소.

프로이드도 지지 않고 말했다.

“당신은 사람이 얼마가 필요하고 품삯을 얼마 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아 참, 답답하네. 아직 모른다고 하지 않소?

“그걸 모르면 당신은 사람을 고용할 권리가 없어요.

“나는 내 사업을 내 방식대로 경영할 권리가 있단 말이오. 당신들이 만약 여기에 이렇게 쭈그리고 있고만 싶다면 좋아요. 나는 나가서 루레어 군에 갈 사람들을 구할 거요. 사람은 얼마든지 필요하니까.

프로이드가 모인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프로이드가 말했다.

“이런 일로 나는 두 번이나 당한 사람이오. 어쩌면 이 분은 한 천 명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거기에다 한 5천 명쯤 모아 놓을 거요. 그래 놓고 한 시간에 한 15센트 정도 줄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여러분들은 배가 고프니까 그거라도 받으려고 할 거요. 사람들 고용하려면 사람을 떳떳하게 모집해서 계약서를 쓰고 얼마를 준다고 분명히 해야 합니다. 허가증 좀 보자고 했더니 펄펄 뛰니, 그런 허가증도 없는 사람은 사람을 고용하도록 되어 있지 않은 겁니다.

계약 청부인은 시보레 쪽으로 돌아서서 소리를 질렀다.

“조우!

그와 같이 온 사람이 차창 밖으로 내다보았다. 차 문을 휙 열더니 내의가 그의 허리에 두른 벨트에서 대롱거렸다. 그의 갈색 셔츠 위에는 보안관 보의 별 표시가 핀으로 붙여져 있었다.

“왜 그러쇼?

권총집이 그의 엉덩이 위에서 좌우로 왔다 갔다 했다.

“조우, 당신 이 사람 전에 어디서 본 일이 없소?

보안관 보가 물었다.

“어느 쪽이오?

“이 사람.

계약을 제안한 사람이 프로이드를 가리켰다.

“무어라고 하는데요?

보안관 보가 프로이드를 보고 미소 지었다.

“빨갱이처럼 얘기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거야.

“으음.

보안관 보가 프로이드의 옆모습을 관찰하기 위해서 천천히 돌았다. 프로이드의 얼굴은 서서히 달아올랐다.

“다들 알겠소?” 프로이드가 소리쳤다.

“만약 이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경찰을 데리고 올 리가 없소?

“이 친구 본 일이 있소?” 먼저 사람이 보안관 보를 추궁했다.

“으음, 그런 거 같은데요. 지난주에 그 폐차장 박살났을 때, 이 친구가 거기에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것 같군요. 오오라! 틀림없이 바로 그 친구야!

갑자기 미소가 그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저 차에 타!” 그가 말했다.

그러더니 그는 권총 끝을 감싸고 있는 후크를 끌렀다.

톰이 재빨리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당신, 그 사람에 대해 아무 증거도 없지 않소?

보안관 보가 휙 돌아섰다.

“너도 같이 가고 싶거든 아가리를 또 한 번 벌려 봐! 그러고 보니 그때 이 두 놈이 눈에 띄더라니.

“지난주라면 나는 이 캘리포니아에 오지도 않았던 때요.” 톰이 말했다.

“너는 혹시 다른 주에서 수배중인지도 모른단 말이야. 입 좀 닥치지 못하겠어?

계약꾼은 사람들 쪽으로 돌아섰다.

“당신들은 이 고약한 빨갱이들 말은 듣지 마시오. 이 자들은 상습적인 난동 분자들이오. 그들은 당신네들을 곤궁에 빠뜨릴 거요. , 나는 당신네들 전부를 투레어 군에 고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보안관 보가 그들 쪽을 돌아다보았다.

“가보는 게 좋은 생각일 거요.” 그가 말했다.

그 엷은 미소가 그의 얼굴에 되돌아 왔다.

“보건 당국에서 이 캠프를 치워야겠다고 그래요. 더군다나 여기에 빨갱이들이 끼어들었다고 말이 나가면 누군가 해를 입을 거요. 당신들은 몽땅 투레어 군으로 나가는 것이 현명할 거요. 여기서는 할 만한 일거리가 하나도 없지 않소? 이렇게 친절하게 일러주는 데도 안 가고 여기 있다가는, 괜히 곡괭이라도 든 패거리를 만날지도 모르지요.

계약꾼이 말했다.

“나는 사람을 쓰겠다고 하지 않소? 일이 하기 싫으며 마음대로 하시오.

보안관 보가 미소를 지었다.

“일이 하기 싫다면 이 나라에서 발을 붙일 데가 없지요. 그런 놈은 싹싹 밀어내야 돼.

프로이드는 뻣뻣하게 보안관 보 옆에 서있었다. 프로이드의 엄지손가락이 그의 벨트 위에 걸렸다. 톰이 슬쩍 그의 거동을 살폈다. 그러고 나서 얼른 시선을 땅바닥에 깔았다.

“얘기는 끝났소.” 계약꾼이 소리쳤다.

“투레어 군에 일꾼들이 필요해요. 일은 얼마든지 있소.

톰은 천천히 프로이드의 손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양손 손목의 근육이 피부 밑에서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톰 자신의 손에도 힘이 주어지고 있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혁대 벨트에 꽉 걸렸다.

“그럼, 그만두시오. 내일 아침에는 사람이 다 차서 한 사람도 못 들어 올 테니 알아서들 하시오.

계약꾼은 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럼, !” 보안관 보가 프로이드를 가리켰다.

“저 차에 타!” 그는 큼직한 손을 뻗어서 프로이드의 왼쪽 팔을 잡았다.

프로이드는 몸을 휙 돌리면서 단숨에 주먹을 날렸다. 그의 주먹이 넓적한 얼굴을 철썩하고 갈겼다. 그 동작만큼이나 달아난 그는 천막의 늘어선 줄을 요리조리 빠져 나갔다. 보안관 보가 비틀거렸다. 톰은 넘어가 보라는 듯이 자기의 발을 그 앞에 뻗었다. 보안관 보는 육중하게 나가떨어져 구르더니 권총을 쥐었다. 프로이드는 천막의 줄을 따라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보안관 보는 땅에 쓰러진 채 총을 쏘았다. 천막 앞에 있던 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관절이 없어진 손을 들여다보며 악을 쓰고 울고 있었다. 손가락만이 손바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찢어진 살은 하얗게 핏기가 가셔 있었다. 저쪽 아래에서 프로이드가 버드나무 쪽으로 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보안관보는 땅바닥에 앉아서 총을 다시 들더니 쏘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사람들 틈에서 케이시 목사가 나타나더니 보안관 보의 목을 발길로 걷어찼다. 그 육중한 몸집이 나가떨어져 의식을 잃는 사이에 그는 얼른 뒤로 물러섰다.

시보레의 모터가 부르릉거리더니 먼지를 일으키면서 달아나 버렸다. 차는 국도에 올라서서 쏜살같이 달려갔다.

여자는 자기 천막 앞에서 아직도 찢어진 자기의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상처에서 핏방울이 조금씩 떨어졌다. 그녀의 목에서 킬킬거리고 웃는 히스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하더니 우는 소리 웃는 소리가 숨을 쉴 때마다 더욱 높아져 갔다.

보안관 보는 먼저 바닥에 입을 처박고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톰이 그의 권총을 주웠다. 탄창을 꺼내 관목 속으로 던져 버리고 탄알이 들어 있는 부분을 뽑아냈다.

“이런 녀석은 총을 가질 권리가 없어.” 그가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총을 땅바닥에다 냅다 내동댕이쳐 버렸다.

손이 떨어져 나간 여자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그녀의 히스테리는 더 높아져 이젠 웃음소리가 비명에 가까웠다.

케이시가 톰 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자넨 빨리 피하게.” 그가 말했다.

“저쪽 버드나무 숲에 가서 기다리게 있게. 그놈은 자네를 보았단 말이야.

“난 안 가려는데요?” 톰이 말했다.

케이시가 고개를 바싹대고 속삭였다.

“그놈들이 자네의 지문을 채취할 거야. 자네는 가석방 조건을 어겼어. 거기에 돌아가게 된단 말이야.

톰은 가만히 한숨을 들이마셨다.

“제기랄, 그걸 깜빡 잊었군!

“빨리 가!” 케이시가 말했다.

“저놈이 깨어나기 전에 말이야.

“그놈의 총을 가졌으면 좋겠는데.” 톰이 말했다.

“안 돼. 놓고 가게. 돌아와도 괜찮을 때쯤 휘파람을 길게 네 번을 불 테니.

톰은 어슬렁거리면서 빠져 나갔다. 그러나 사람들의 무리로부터 좀 떨어지자 그는 걸음을 빨래했다. 그리고 강을 따라 서있는 버드나무 숲속으로 사라졌다.

앨이 쓰러져 있는 보안관보 쪽으로 다가섰다.

“아휴, 맙소사!” 그는 신이 난다는 듯 말했다.

“야아, 멋지게 한방 먹여 놓았구나.

사람들은 아직도 쓰러져 있는 의식불명의 보안관 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사이렌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그쳤다. 다시 한 번 울렸다 이번에는 훨씬 가까워졌다. 갑자기 사람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잠시 발을 구르더니 각자 자기 천막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중에는 앨과 목사만이 남았다.

목사가 앨 쪽을 돌아보고 말했다.

“어서 들어가 있어, 어서어서 천막 안에 가있어.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래요? 아저씨는요?

케이시가 그를 보고 웃었다.

“누군가 뒤집어써야 돼. 나는 자식이 없으니까 괜찮아. 기껏해야 감옥에 집어넣겠지.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앉아 있는 게 적성에 맞거든.

앨이 말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요.

“어서 들어가라니까.” 케이시가 사납게 말했다.

“저리 나가라고.

앨이 뾰로통했다.

“난 아무 명령도 안 받아요.

케이시가 부드럽게 말했다.

“만약 자네가 집안 전체의 일을 망쳐 놓으면 가족들은 다 골치 아픈 처지가 된단 말이야. 난 자네야 상관 않지만,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괴로움을 받으신단 말이야. 잘못하면 톰이 또 알렉스터에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고.

앨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럼, 좋아요. 하지만 아저씨는 무척 미련한 사람이군요.

“그렇지, 그럼. 그렇고말고.” 케이시가 말했다.

사이렌이 거듭거듭 비명을 질렀다. 그럴 때마다 소리는 가까워졌다. 케이시는 보안관 보 옆에 무릎을 꿇고 그를 바로 뉘여 놓았다. 남자는 신음소리를 내더니 눈을 깜박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려 했다. 케이시가 그의 입술에 묻은 먼지를 닦아 주었다. 가족들은 이제 천막 속에 들어가서는 포장들을 내리고 있었다. 기울어 가는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회색빛 천막을 청동색으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국도 위에서 타이어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고 뚜껑이 열린 차가 잽싸게 캠프장으로 굴러들어 왔다. 소총으로 무장한 네 사람이 쏟아져 나왔다. 케이시는 일어나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짓들을 한 거요?

“내가 당신네 경관을 때렸소.

무장한 사람들 중 하나가 보안관 보 쪽으로 갔다. 그는 이제 겨우 의식을 회복한 듯 일어나 앉으려 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소?

“예.” 케이시가 말했다.

“이 사람이 거칠게 나오기에 내가 한 번 때렸소. 그랬더니 이 사람이 총을 쏘더군요. 저쪽에 있던 한 여자를 쏘았지요. 그래 내가 다시 한 번 갈겼죠.

“맨 처음 당신이 무어라고 했는데요?

“나는 말대답을 했을 뿐이오.” 케이시가 말했다.

“저 차에 타시오.

“그러지요.” 케이시는 대답을 하고 뒷자리에 기어 들어가 앉았다.

두 사람이 보안관 보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그는 자기의 목을 조심조심 어루만져 보았다.

케이시가 말했다.

“저 아래쪽 천막에 총을 맞은 여자가 있는데 저이가 잘못 쏘아서 지금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고 있소.

“글쎄, 그런 건 나중에 알아볼 일이오. 여보게, 마이크, 이 친구가 자네를 친 사람인가?

의식이 흐리멍덩한 그는 가까스로 케이시를 응시했다.

“아닌 것 같은데.

“바로 나였소.” 케이시가 말했다.

“상처가 지끈거려서 사람도 잘 몰라보는군.

마이크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당신이 아닌 것 같은데. 제기랄, , 아파 죽겠네!

케이시가 말했다.

“나는 아무 군소리 없이 따라가겠소. 저 여자한테 한번 가보시오.

“그 여자가 어디 있소?

“저쪽 천막이오.

보안관 보들의 지휘관인 듯한 자가 손에 총을 들고 그 천막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천막 포장 옆에서 무어라고 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그가 나오더니 다시 돌아왔다.

그는 약간 자랑스럽게 말했다.

“에잇, , 45구경이란 놈은 지독한 거야. 지혈대를 채워 놓았더군. 가서 곧 의사를 보내 주기로 하지.

보안관 보 두 사람이 케이시 좌우에 각각 자리를 잡았다. 지휘관이 호루라기 신호를 보냈다. 캠프장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포장들을 꼭꼭 내려 닫고 모두 천막 안에 들어가 있었다. 엔진이 걸리고 차가 한 바퀴 뺑 돌더니 캠프장 밖으로 빠져 나갔다. 자기를 감시하는 두 사람 사이에 케이시가 자랑스럽게 앉아서 고개를 쳐들고 그 질긴 목줄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어렸고, 그의 얼굴에는 이상한 정복감 같은 것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들이 가버리자 사람들이 천막에서 다시 나왔다. 해는 이제 산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저녁빛이 파리하게 캠프장에 깃들었다. 동쪽으로는 산들이 아직도 햇빛의 여운으로 노란 색깔을 띠고 있었다. 여자들은 꺼진 불가에 다시 보였다. 남자들도 다시 모여 쭈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도란거렸다.

앨은 천막에서 기어 나와 톰에게 휘파람을 불어 주려고 버드나무 숲 쪽으로 갔다. 어머니가 나와 나뭇가지로 불을 피웠다.

“여보!” 그녀가 말했다.

“우린 많이 먹을 것 같지가 않은데요. 점심을 워낙 늦게 먹었으니까요.

아버지와 존 삼촌은 천막에 붙어 있었다. 그들은 어머니가 날감자를 벗겨 기름이 끓고 있는 프라이팬 속에다 썰어 집어넣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데 그 목사는 무엇 때문에 그런 연극을 하는 거지?

루시와 윈필드가 바싹 가까이 와서 얘기를 들으려 했다.

존 삼촌은 기다란 손톱으로 땅을 깊이 파헤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죄에 대해 알고 있어 내가 한 번 죄에 대해 물어 보았더니. 나한테 얘기를 해주더군. 하지만 그 사람 말이 맞는지 어쩐지 모르겠더군. 그 사람 말은 누구든지 자기가 죄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 죄가 있는 거라는군.

존 삼촌의 눈은 피로와 슬픔에 젖어 있었다.

“나는 여태까지 아무도 모르게 비밀을 가지고 살아왔어.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어떤 일을 했단 말이야.” 그가 말했다.

어머니가 불을 피우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서방님.” 그녀가 말했다.

“하느님한테만 얘기하세요. 그런 죄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면서 공연히 부담감만 늘이지 마세요. 그건 좋은 일이 아녜요.

“그게 마음에 걸려 못 살겠으니 말이오.” 존 삼촌이 말했다.

“자, 그런 얘기는 하지 마세요. 저 강으로 나가세요. 머리를 물속에 넣고 거기에서 소곤거려 보세요. 강물에 다 씻겨내려 갈 테니.

어머니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저 사람 말이 맞아.” 그가 말했다.

“말을 하면 좀 속이 후련해지지. 허나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더 퍼뜨리는 것밖에 안 되거든!

존 삼촌은 햇빛으로 누렇게 물든 산을 바라보았다. 산들이 그의 눈에서 반사되었다.

“저 산을 번쩍 들어 무너뜨렸으면 좋겠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할 수 없는 일이지. 자꾸 그 생각만이 내 마음 속을 찔러 오니, 이걸…”

그의 등 뒤에서 로자샤안이 어지러운 듯 비틀거리면서 천막 밖으로 나왔다.

“코니는 어딜 갔어요?” 그녀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한참 동안이나 없던데, 어딜 갔지?

“나도 못 보았다.”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보면 네가 찾더라고 들여보내마.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요.” 로자샤안이 말했다.

“코니가 나 혼자만 남겨 두고 나가다니, 어떻게 하라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딸의 부어 있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 울고 있었구나.” 그녀가 말했다.

눈물이 새삼스럽게 로자샤안의 눈에 괴었다.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 기운을 차리지 못하면 안 된다. 여기에는 식구들이 다 와있지 않니? 기운을 차려. 이리 오너라. 같이 감자나 좀 벗겨라. 너는 제 성질이 나서 그러는 거다.

로자샤안은 다시 천막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어머니의 엄한 눈길을 피하려 했으나 그 위엄을 도저히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불가로 돌아왔다.

“이렇게 혼자 놔두고 나가는 수가 어디 있담.” 그녀는 투덜거렸다.

눈물은 말라 있었다.

“넌 일을 해야 한다.” 어머니가 말했다.

“천막 속에 우두커니 앉아만 있으니까 괜히 제 성질에 볶이게 되는 거야. 난 그동안 너를 다스릴 시간 여유가 없었지만 인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 이 칼을 들고 감자 좀 벗겨라.

로자샤안은 무릎을 꿇고 시키는 대로 했다.

그녀는 사납게 쏘아 붙였다.

“그이가 나타나기만 해봐. 가만두지 않을 테야.

어머니가 조용히 웃었다.

“오히려 뺨이나 찰싹 얻어맞을라. 너 혼자 괜히 들볶고 까부는 거 아니냐? 그 사람이 네 뺨이라도 한 대 갈겨 철이 들게 해준다면 난 그 사람을 업어 줄란다.

로자샤안의 눈은 분해 달아올랐지만 아무 소리도 못하고 말았다.

존 삼촌은 그 넓적한 엄지손가락으로 녹슨 못을 땅속 깊숙이 밀어 넣었다.

“나는 얘기를 해야겠어.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그럼 얘기해 봐! 제기랄, 누굴 죽였단 말이야?

존 삼촌은 자기 청바지의 시계 주머니 속에 엄지손가락을 집어넣고 접혀 있는 더러운 돈을 한 장 꺼냈다. 그는 그것을 펼치더니 보여주었다.

5달러짜리야.” 그가 말했다.

“그걸 훔쳤어?” 아버지가 물었다.

“아냐, 내가 가지고 있던 거야. 간수하고 있었지.

“그럼 그건 네 거잖아?

“그래. 그렇지만 그걸 가지고 있을 권리는 없는 거지.

“그게 뭐가 죄가 되나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건 서방님 거잖아요.

존 삼촌이 천천히 말했다.

“그냥 갖고만 있었던 게 아니고 나는 그걸로 술을 마시려고 감추어 왔던 거야. 나는 내가 꼭 술에 취해야 될 때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내가 속이 뒤집힐 때는 꼭 취해야 하니까.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 목사가 톰을 살리려고 자기를 희생했단 말이야.

아버지는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거리더니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얘기를 들었다. 루시가 고양이처럼 팔꿈치로 기어서 다가왔고 윈필드도 따라서 가까이 다가왔다. 로자샤안은 칼끝으로 감자에다 깊은 구멍을 파고 있었다. 저녁빛이 짙어 갔고 사방은 더욱 파리한 빛을 띠었다.

어머니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이가 톰을 구했는데, 왜 서방님이 꼭 취하셔야 하는지 전 모르겠네요.

존 삼촌이 비통하게 말했다.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요. 참 끔찍한 일이지요. 그 사람은 그 일을 그렇게 태연하고도 쉽게 해버렸어요. 그냥 저쪽에 나가서 ‘내가 했소.’라는 말 한 번으로 끝내 버렸어요. 그놈들이 그 사람을 끌고 갔지요. 그러니 나는, 나는 술을 먹고 취해야지요.

아버지는 아직도 고개만 끄덕거렸다.

“나는 그런 얘기를 왜 해야만 하는지 알 수가 없군.” 그가 말했다.

“꼭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으면 그냥 훌쩍 나가서 잔뜩 퍼마시고 오면 되지, 그거야.

“때가 오면 나도 무언가 한 가지 해서 영혼으로부터 그 큰 죄를 싹 씻어 버릴 거야.” 존 삼촌이 슬프게 말했다.

“나는 놓쳤어. 나는 뛰어들지 못했어. 그래서 기회가 없어진 거야. 늦은 거야. 이거 봐!” 그가 말했다.

“돈 있지? 2달러만 줘.

아버지는 마지못해 주머니에 손을 넣어 가죽지갑을 꺼냈다.

“술 취하기 위해 7달러까지 필요하지는 않겠지? 샴페인 같은 걸 마시지는 않을 테니까.

존 삼촌은 자기의 돈을 내밀었다.

“자, 이 돈을 가져가고 나한테 2달러를 달라고. 2달러만 있으면 넉넉히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어. 나는 쓸데없이 낭비하는 죄를 짓고 싶지 않아. 다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쓸 거야. 늘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 더러운 지폐를 받고 삼촌에게 2달러를 주었다.

“자, 옜다.” 그가 말했다.

“한 번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돼. 좋은 일 나쁜 일을 자기에게 가르쳐 줄 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야.

존 삼촌은 은화를 받았다.

“내가 술 먹는다고 화내지 마. 나는 꼭 먹어야 한다는 걸 알잖아?

“그래, 그래, 제기랄.” 아버지가 말했다.

“속은 빤해 가지고.

“나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늘 밤을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모른다고.

존 삼촌이 말하면서 어머니 쪽을 돌아보았다.

“내일 밤에 하는 편이 낫다는 그런 식의 말은 하지 마시오. ?

어머니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안 해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안 할 테니 어서 가세요.

그는 일어나더니 석양 속을 쓸쓸히 걸어 나갔다. 그는 콘크리트 국도 위로 걸어가서 길을 건너 식료품 가게에 들어갔다. 칸막이 문 앞에서 그는 모자를 벗더니 그것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뒤꿈치로 그것을 짓이기면서 자신을 학대했다. 그는 자기 까만 모자를 다 찢고 더럽혀 거기에 버려두었다. 그러고 나서 가게에 들어섰다. 철사로 망을 쳐놓고 위스키 병들을 세워 놓은 선반 쪽으로 걸어갔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이들은 존 삼촌이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로자샤안은 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감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엾기도 하지.” 어머니가 혀를 찼다.

“저이를 위에서 좋아할 몰라. 혹시 내가 만일… 아냐, 그렇지 않았을 거야. 저렇게 마음이 곧은 이도 없는데.

루시가 먼지 속에서 옆으로 굴렀다. 그녀는 자기 머리를 윈필드의 머리에 바싹 대고 그의 귀를 잡아 자기의 입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소곤거렸다.

“나는 취할 거다.

윈필드는 코를 드르렁거렸으나 입은 꼭 다물었다.

두 아이는 멀리 기어가 버렸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천막 주위를 기다가 깡충거리며 뛰었다가 킥킥거리고 소리를 내면서 천막으로부터 달아나곤 했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고 웃었다. 루시는 눈을 옆으로 뜨고 사지의 힘을 헐렁하게 빼고 혀를 늘어뜨리더니 힘없이 터덜거리면서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야, 취했다.” 그녀가 말했다.

“이봐라.” 윈필드가 소리쳤다.

“나 좀 봐. 내가 여기 있잖아? 내가 존 삼촌이야.

그는 자기의 두 팔을 퍼덕거리면서 숨을 헐떡거리고 어지러워질 때까지 빙빙 돌았다.

“아냐.” 루시가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거야. 내가 존 삼촌이다. 굉장히 취했다, .

앨과 톰은 조용히 버드나무 사이를 걸어 나왔다. 그들은 애들이 미친 것처럼 비틀거리고 있는 데까지 왔다. 어둑어둑한 저녁빛이 이젠 아주 짙어졌다. 톰이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쟤들, 루시하고 윈필드잖아? 저애들이 혹시 어떻게 된 걸까?

그들은 가까이 가보았다.

“너희들 미쳤니?” 톰이 말했다.

애들이 멈추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했다.

“그냥 놀고 있는 거야.” 루시가 말했다.

“그건 이상한 놀인데?” 앨이 말했다.

루시가 자못 건방지게 말했다.

“그것보다 더 이상한 놀이도 얼마든지 있어.

앨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는 톰한테 말했다.

“루시가 숨도 안 쉬고 뛰고 있어. 아까부터 계속 뛰는 거야. 한참 까불 때니.

루시는 앨의 등 뒤에서 제 얼굴을 비비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제 입을 잡아당겨 보기도 하고 작은 오빠 쪽으로 혀를 날름거리기도 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으로 약을 올리고 있었지만 앨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놀이를 시작하려고 윈필드를 쳐다보았지만 이미 흥이 깨져 버렸다. 둘 다 그걸 느끼고 있었다.

“우리 강에 가서 물에다 머리를 집어넣어 볼래?

윈필드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그들은 버드나무 사이로 걸어갔다. 아직도 앨 때문에 골이 나있었다.

앨과 톰은 저녁놀을 보며 조용히 걸어갔다.

톰이 말했다.

“케이시 아저씨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나는 알 것 같아. 우리 가족들에게 해준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더구나. 참 이상한 사람이야. 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지 말이야.

“목사를 했기 때문에 그런가봐.” 앨이 말했다.

“목사들은 무슨 조그만 일을 갖고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잖아?

“코니는 어디 갔을 것 같니?

“똥이나 싸러 갔겠지.

“되게 멀리 간 모양이다.

그들은 벽 쪽 가까이 붙어 천막 사이로 걸어갔다. 프로이드의 천막 근처에 왔을 때 누군가 가만히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천막 포장 가까이 쭈그리고 앉았다. 프로이드가 포장을 조금 들추었다.

“당신들 떠날 거요?

“글쎄, 어떨까. 그렇게 하는 게 낫겠죠?” 톰이 말했다.

프로이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당신 아까 그 새끼가 떠드는 것 못 들었소? 빨리 다른 데로 가지 않으면 그 새끼들은 여기에 불을 지르고 당신들을 쫓아낼 거요. 놈들이 그렇게 얻어맞고도 안 돌아온다 생각한다면 당신들이 좀 모자란 거지. 그 공개 도박장의 젊은 놈들이 오늘밤 우리를 잡으러 올 거요.

“그럼, 우리도 가야겠군요.” 톰이 말했다.

“당신은 어디로 갈 거요?

“물론 북쪽으로 가야지요. 아까 말한 그쪽으로.

앨이 말했다.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이 근처에 관청에서 만든 캠프촌이 있다던데요? 그게 어디요?

“아, 거긴 꽉 찼을 거요.

“어딘데요?

“여기서 남쪽으로 99호선 국도를 한 12마일이나 14마일 정도 가면돼요. 동쪽으로 돌아서 위드팻치 말이오, 바로 그 근처요. 하지만 보나마나 거기는 꽉 찼을 거요.

“거기는 아주 좋다던데요.” 앨이 말했다.

“그럼요, 거긴 괜찮지요. 거기에 가면 우리도 개가 아니라 사람대접을 받지요. 경찰 나부랭이도 없고. 그런데 다 찼어요.

톰이 말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말이오. 보안관 보 녀석이 왜 그렇게 더럽게 굴었냐는 거요. 녀석은 꼭 문제를 일으키려고 온 놈 같더라고요. 아무나 사람을 건드려서 시비를 걸려는 놈이더라고요.

프로이드가 말했다.

“난 여기는 잘 모르지만, 저 북쪽에서 나도 그런 놈을 하나 알고 있었는데 사람은 괜찮더군요. 그 친구 말이 보안관 보는 누구든지 잡아넣어야 한다는 거요. 한사람 잡아넣으면 보안관 보는 일당으로 75센트를 받는대요. 그중에서 잡혀온 사람 위해 25센트 정도만 식비로 쓰고 나머지는 쓱싹하는 거지요. 만약 한 사람도 못 잡아들이면 부수입이 전혀 없는 거지요. 그런데 자기는 일주일 동안에 아무도 못 잡았대요. 그러니까 자기 위에 있는 보안관이 아무나 잡아오든지 아니면 경찰 옷을 벗든지 하라고 충고를 했다는군요. 오늘 아까 왔던 그 친구도 꼭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 문제를 만들러 온 놈 같더라고요.

“우리도 떠나야겠군.” 톰이 말했다.

“잘 가시오. 프로이드 씨.

“잘 가시오. 어쩌면 만날지도 모르겠군요. 아마 만나게 되겠지요.

“잘 가시오.” 앨이 말했다.

그들은 어두운 캠프장을 거쳐서 자기네 천막으로 돌아왔다. 불 위에서 감자 튀기는 프라이팬이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두꺼운 감자조각을 뒤적거렸다. 아버지는 무릎을 움켜잡고 가까이 앉아 있었다. 로자샤안은 천막 밑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오, 톰이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우리는 빨리 여기를 떠나야 돼요.” 톰이 말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냐?

“그 프로이드란 친구가 그런데 그놈들이 오늘밤에 와서 이 캠프에 불을 지를 거래요.

“무엇 때문에 그런다니?”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잖아?

“경찰을 두들겨 준 일밖에 없지요.” 톰이 말했다.

“우리가 그런 건 아니잖아?

“경찰 녀석이 우리를 쫓아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더군요.

로자샤안이 물었다. “오빠, 코니 보았수?

“응.” 앨이 대답했다.

“어디로 가는지 강을 따라서 저 남쪽으로 가던데.

“그래? 그쪽으로 가버렸어?

“모르겠어.

어머니가 딸 쪽을 돌아보았다.

“얘, 로자샤안, 너희들 이상한 애기만 하고 이상한 짓만 하더구나. 그 코니가 너더러 뭐라던?

로자샤안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냥 고향에 남아 트랙터나 공부했더라면 그게 나을 뻔 했겠다고 그랬어요.

모두 말이 없었다. 불을 쳐다보는 로자샤안의 눈에 불꽃이 어른거렸다. 프라이팬 속의 감자가 탁탁 소리를 냈다. 로자샤안은 훌쩍이더니 손등으로 코를 닦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코니 그 녀석은 못써. 나도 가만히 두고 보았지만 용기도 없고 작업복을 입은 주제에 허영만 너무 심해.

로자샤안은 벌떡 일어나더니 천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매트리스 위에 드러눕더니 배를 깔고 엎드려 두 팔을 겹쳐 팔베개를 했다.

“붙잡아 보았자 소용없을 걸요.” 앨이 말했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쓸 만 한 놈이 못 되면 있어도 필요 없어.

어머니가 천막 안을 들여다보았다. 로자샤안은 매트리스에 엎드려 있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런 소리 마세요.

“그 녀석 못쓴다니까.” 아버지가 우겼다.

“언제나 무얼 하겠다는 말만 늘어놓고 있거든. 하긴 무얼 해, 제까짓 놈이. 그 녀석이 여기 있을 때는 내가 아무 소리도 안 했지만 이제 그 녀석이 도망쳐…”

“쉿!” 어머니가 가만히 말했다.

“야, 무어가 무서워 쉬쉬하는 거야. 도망간 놈을 도망갔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숟가락을 들고 프라이팬 쪽으로 돌아앉았다. 기름이 끓으면서 툭툭 튀었다. 그녀는 불에다 작은 나뭇가지를 지펴 넣었다. 불길이 펄럭이고 솟더니 천막을 밝게 비췄다.

어머니가 말했다.

“로자샤안이 어린애를 낳을 거예요. 그럼 그 아기는, 반은 코니예요. 아빠가 몹쓸 놈이란 소리 들으면서 아기가 자라서야 되겠어요?

“아니라면서 뻔 한 거짓말하는 것보다는 낫지.” 아버지가 말했다.

“그건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가 가로챘다.

“그저 아빠가 죽었다고 해두는 거예요. 코니가 죽었으면 당신도 그 사람한테 나쁜 소리는 안 하실 거 아녜요?

톰이 끼어들었다.

“에이 참, 이게 무슨 짓들이에요. 코니가 아주 갔는지 안 갔는지도 아직 모르잖아요? 지금 그럼 얘기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얼른 한 숟가락씩 떠먹고 또 떠나야 해요.

“떠난다고? 지금 막 왔는데?

어머니가 불이 타고 있는 어둠 속에서 아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설명을 했다.

“그놈들은 오늘밤에 이 캠프촌을 몽땅 불 질러 버려요. 어머니도 아시죠? 그놈들이 와서 우리 살림살이를 몽땅 태워 버리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고, 아버지도 또 존 삼촌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을 거 아녜요? 우리는 몽땅 대들어서 싸울 거란 말예요. 그래서 끌려가서 사진을 찍히고 하면 첫째로 내가 곤란하다고요. 오늘도 그 목사가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내가 거의 그런 꼴이 될 뻔했어요.

어머니는 뜨거운 기름 속에서 감자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이제 그녀가 단안을 내렸다.

“자, 어서들 오너라.” 그녀가 말했다.

“얼른 이걸 먹자. 그리고 얼른 떠나야겠다.

그녀는 양철 접시를 꺼내 놓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존 삼촌은 어떡하지?

“존 삼촌은 어디 가셨어요?” 톰이 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말했다.

“술을 마시러 갔단다.

“아휴!” 톰이 말했다.

“하필이면 이런 때를 골라서! 어느 쪽으로 가셨어요?

“모르겠다.” 아버지가 말했다.

톰이 일어섰다.

“다들 저녁을 먹고 짐들을 챙기세요. 내가 가서 존 삼촌을 찾아올게요. 아마 저 길 건너편 가게에 가셨겠지요.

톰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집집마다 천막 앞에 조그맣게 불을 피워 놓고 있었다. 그 불빛은 남자들 그리고 남자들의 나루한 얼굴 위에 비치고 있었다. 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어린 아이들도 보였다. 몇몇 천막 속에서는 기름등잔이 켜져 있는 것이 포장 사이로 보였고 불빛이 사람들의 그림자를 큼직하게 천막 천에 비추고 있었다.

톰은 걸어가서 콘크리트의 국도를 건너 그 작은 식료품점으로 갔다. 그는 칸막이 문 앞에 잠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주인인 듯한 남자가 작달막한 몸집에 텁수룩한 수염을 달고 눈을 반짝이면서 카운터에 기대 신문을 읽고 있었다. 가게 안에는 사방에 깡통이 산더미처럼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여 있었다. 톰이 들어서자 그가 올려다보았다. 그는 마치 총을 겨냥하듯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어서 오시오.” 그가 말했다.

“뭐가 떨어졌습니까?

“우리 삼촌이 떨어졌습니다.” 톰이 말했다.

“아니, 우리 삼촌이 떨어져 나가셨든지 했을 건데요.

반백이 다 된 주인은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약간 걱정이 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코끝을 가볍게 만지작거리더니 가려운지 살살 긁었다.

“당신네들은 언제나 가족들끼리 서로 잃어버리는 모양이오?” 그가 말했다.

“하루면 열두 번도 더 사람을 찾으러 오는군. ‘이러이러한 이름에 이러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우리가 다 북쪽으로 갔다고 좀 전해 주시겠습니까?’ 언제나 그런 식이라오.

톰이 웃었다.

“예, 혹시 코니라고 하는 꼭 늑대같이 생긴 젊은 코흘리개를 보시면 지옥으로나 가 버리라고 해주시오. 우린 다 남쪽으로 가니까. 하지만 내가 찾고 있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오. 혹시 한 예순 살쯤 되는 영감 하나가 까만 바지를 입고 머리는 희끗희끗해 가지고 여기에 와서 위스키를 마시지 않았어요?

그 반백의 남자의 눈이 밝아졌다.

“아, 그랬소. 나도 그런 일은 처음 보았소. 그이가 문 앞에 오더니 모자를 벗어 땅에다 태질을 치고는 발로 짓이여 버리더군요. , 이게 그 모자요.

그는 다 떨어진 먼지 묻은 모자를 카운터 밑에서 꺼내 놓았다.

톰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맞아요. 바로 이거요.

“아, 그이가 말이오. 위스키 두병을 달래더니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병마개를 따서 그걸 그대로 들이키더군요. 나는 여기서 술을 팔기만 하지, 마시는 장소의 허가는 없다오. 그래서 ‘이거 보세요. 여기서는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가지고 밖으로 나가세요.’ 했지요. 그랬더니 바로 밖으로 나가더군요. 내가 보기에는 한 서너 모금도 안 들어갔을 거요. 그걸 그대로 다 들이키더니 병을 던져 버리고 문간에 기대서더군요. 눈을 멀겋게 뜨고 하는 말이 ‘잘 먹었소!’ 그러더니 가버렸지요. 나는 평생 그렇게 술을 마시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오.

“가 버렸어요? 어느 쪽으로? 지금 바로 찾아야 해요.

“그것도 내가 우연히 보았지요. 나는 그런 술꾼은 처음 보았소. 그러기에 어떻게 하나 하고 그 뒤를 내다보았지요. 북쪽으로 걸어갑디다. 차가 한 대 오더니 그이를 환하게 비추더군요. 그이는 강둑 아래로 내려가는데 다리가 좀 휘어지고 비틀거리며 걸어가더군요. 또 술 한 병을 이미 마개를 따서 들고 가는데 아직 멀리까지는 못 갔을 거요. 그 걸음으로는.

톰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 분을 찾아야 해요.

“이 모자 가져가려오?

“예, 주세요. 아마 필요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소?” 반백의 주인이 물었다.

“술을 마시면서 하나도 즐겁지가 않은 모양이던데?

“좀 우울한 분이요. ,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코니라는 애송이를 보시면 우리는 다 남쪽으로 갔다고 해주시오.

“그런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어디 다 기억을 할 수가 있어야지요.

“뭐 그렇게 너무 신경 쓰실 건 없어요.” 톰이 말했다.

그는 존 삼촌의 더러운 까만 모자를 들고 칸막이문을 나섰다. 그는 콘크리트길을 건너서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갔다. 그의 발치 아래 움푹 들어간 들판에 후버빌이 있었다. 작은 모닥불이 피어 있었고 등잔불이 천막 사이로 보였다. 캠프장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렸다. 느릿느릿한 곡조가 아무런 연결도 없이 툭툭 울리는 것이, 아마 누가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톰은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길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몇 발짝 가다 멈추고 귀를 기울여 보았다. 4분의 1마일 정도나 가서야 그는 그가 귀를 기울이고 찾던 소리를 들었다. 톰은 고개를 세우고 잘 들어 보았다.

둔탁한 목소리가 노래를 했다.

“내 마음을 예수께 바쳤다네. 그래서 예수는 나를 집으로 부르신다네. 내 마음을 예수께 바쳤다네. 그래서 예수는 내 마음의 고향이라네.

노래는 질질 끌리더니 나중에는 중얼거리는 소리로 변했다. 그러다가 아주 멎었다. 톰은 둑 위에서 노랫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조금 가다가 그는 서서 다시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는 아주 가깝게 들렸다. 나지막하고 곡조 없는 목소리였다.

“오, 매기가 죽던 밤, 그녀는 나를 옆에 불러서 이 낡은 빨간 플란넬 속바지를 주었지. 자기가 입던, 무릎이 불룩하게 나온 그…”

톰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갔다. 까만 형체가 땅바닥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가까이 접근해 가서 앉았다. 존 삼촌은 술병을 기울였다. 술이 술병에서 엎질러져 나왔다.

톰이 조용히 말했다.

“잠깐 기다리세요. 어디로 들어가지요?

존 삼촌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요?

“벌써 저를 잊으셨어요. 제가 한 번 마실 때 삼촌은 네 번이나 마셨어요.

“아니다. . 너 날 놀리지 마라. 난 여기 혼자서 있었다. 넌 여기 없었다.

“전 틀림없이 지금 여기 있어요. 저에게 한 모금 안 주세요?

존 삼촌은 술병을 또 기울였다. 술이 엎질러졌다. 그는 병을 흔들었다. 병이 비어 있었다.

“인제 없다.” 그가 말했다.

“죽고 싶어 못 견디겠다. 죽고 싶은 생각이 자꾸 나는구나. 지금이라도 죽었으면. , 피곤하다, 피곤해. , 날 깨우지 마라.

그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아 버렸다.

“관을 써야겠다. 금관을 써야겠다.

톰이 말했다.

“자,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삼촌. 우리는 지금 떠나야 해요. 절 따라오세요. 가서 짐꾸러미 위에서 주무세요.

존 삼촌은 고개를 저었다.

“안 간다. 다들 가거라. 난 안 간다. 여기서 쉬련다. 돌아가 봤자 소용없다. 아무한테나 도움이 안 된다. 좋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내 죄를 속바지처럼 질질 끌고 다니게 된다. 아니, 안 간다.

“어서 가세요. 삼촌이 안 가시면 우리는 다 못 가요.

“다들 가라고. 나는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인간이야. 나는 다 틀렸어. 내 죄만 끌고 다니고 다른 사람들까지 더러운 때를 묻히고.

“삼촌은 다른 어느 사람보다도 죄가 없어요.

존 삼촌은 머리를 가까이 대더니 한쪽 눈을 살짝 찡긋해 보였다. 톰은 별빛 속에서 그의 얼굴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내 죄는 아무도 모른다. 예수님밖에 모른다. 예수님은 안다.

톰은 무릎을 꿇었다. 톰이 애원했다.

“어서 가세요. 삼촌.

“안 간대도 그러는구나. 피곤하다. 바로 여기서 그냥 자련다. 바로 여기서.

톰은 바싹 다가섰다. 그는 주먹을 삼촌의 턱 끝에 댔다. 그는 두어 번 휘두르는 연습을 했다. 거리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어깨에 힘을 주고 턱에 정확하게 일격을 가했다. 존 삼촌의 턱이 치켜 솟더니 그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다시 일어나 앉으려 했다. 그러나 톰은 무릎으로 그를 깔고 있었고 그가 다시 팔꿈치로 일어나려고 하자 톰은 또 한 방을 날렸다. 존 삼촌은 땅바닥 위에 완전히 뻗어 버렸다.

톰이 일어섰다. 그리고 몸을 굽혀 흐느적거리는 몸뚱이를 들쳐 어깨에 짊어졌다. 흐느적거리는 몸무게에 눌려서 그는 비틀거렸다. 존 삼촌의 늘어뜨린 손이 그의 잔등을 툭툭 건드렸다. 그는 천천히 둑을 올라 헐떡거리면서 국도 위에 올라섰다. 차가 한 대 지나가면서 맥없이 뻗어있는 사람을 들쳐 업고 가는 그를 비추었다. 차가 잠깐 속도를 늦추더니 그대로 부르릉 하고 가 버렸다.

후버빌에 돌아왔을 때 톰은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는 길가로 내려서서 자기네 트럭으로 돌아왔다. 존 삼촌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힘없이 몸을 꿈틀대고 있었다. 톰은 그를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놓았다.

그가 갔다 오는 사이에 캠프가 뜯겨 정리되어 있었다. 앨이 보따리들을 트럭으로 나르고 있었다. 방수 범포는 짐을 쌀 수 있도록 다 준비되어 있었다.

앨이 말했다.

“빨리 왔는데!

톰이 변명했다.

“억지로 모셔 오느라고 주먹을 썼지.

“다치시게 하지 않았니?” 어머니가 물었다.

“괜찮을 거예요. 인제 정신이 나시나 본데.

존 삼촌은 맥없이 땅에 누워 있었다. 이따금씩 충동적으로 토하고 있었다.

“너 먹을 감자 좀 남겨 놓았다. .

톰이 킬킬거리고 웃었다.

“지금은 먹을 생각이 안 나요.

아버지가 말했다.

“됐다. 그럼, , 그 천막을 올려라.

트럭에 짐이 다 올라가고 떠날 채비가 되었다. 존 삼촌은 이미 잠에 떨어져 있었다. 톰과 앨은 그를 들어서 차의 짐꾸러미 위에 올려놓았다. 트럭 뒤에서 윈필드가 토하는 시늉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고 루시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다 됐군.” 아버지가 말했다.

톰이 물었다.

“로자샤안은 어디 갔어요?

“저쪽에 있다.” 어머니가 말했다.

“어서 와라, 로자샤안. 다들 떠난다.

로자샤안은 턱을 가슴에 묻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톰이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자, 가자.”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난 안 갈래.”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넌 가야 해.

“코니를 찾아야 해. 그 사람이 올 때까지 난 안 갈래.

차 세 대가 캠프장을 빠져 나갔다. 길에 올라 국도에 들어선 고물차들은 천막 뜯어낸 것과 사람들을 싣고 있었다. 덜거덕거리고 국도에 올라서더니 그 차들은 희미한 라이트로 길바닥을 비추며 천천히 굴러갔다.

톰이 말했다.

“코니가 우리를 찾아올 거다. 내가 아까 가서 저 가게에 다 우리가 가는 데를 알려 놓았어. 코니가 제대로 찾아 올 거야.

어머니가 다가와서 그의 옆에 섰다.

“얘, 로자샤안, 어서 가자, ?” 그녀가 조용히 타일렀다.

“기다릴래요.

“우린 기다릴 수가 없지 않니.

어머니가 몸을 아래로 굽혔다. 딸의 팔을 잡고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그 사람이 우리를 찾아올 거다.” 톰이 말했다.

“걱정 마. 찾아온다. 인제 봐라.

그들은 로자샤안을 가운데에 두고 같이 걸어갔다.

“혹시 그 사람은 자기가 공부할 책을 가지러 갔는지도 몰라.” 로자샤안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어머니가 말했다.

“아마 그랬을 거다.

그들은 그녀를 트럭 쪽으로 데리고 가서 부축해서 짐 위에 올려 주었다. 그녀는 포장 밑으로 기어들어 깜깜한 굴속으로 사라졌다. 풀로 엮은 움막집에 있던 털보가 쭈뼛거리며 트럭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뒷짐을 지고 어물어물하더니 말했다.

“혹시 쓸 만한 물건 가운데 버리고 가시는 것 없으세요?

아버지가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별것이나 뭐 있어야지 말이오.

톰이 물었다.

“아저씨 네는 안 가세요?

털보는 한참 동안 그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아뇨.

“아까 그 사람들이 여기에다 불을 질러 다 쫓아낼 거요.

털보의 불안한 눈이 땅 쪽으로 내리깔렸다.

“나도 알지요.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소.

“그걸 알면서 왜 안 떠나시오?

그의 낭패스러운 시선이 잠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시선이 다시 땅 쪽으로 떨어졌다. 꺼져 가는 불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모르겠소. 짐을 꾸리려면 시간이 하도 걸리니까.

“그나마 다 태워 버리면 아무것도 안 남게요?

“알고 있소. 당신들 혹시 우리가 쓸 만한 것을 버리고 가는 건 없겠죠?

“싹 쓸어 버렸소.” 아버지가 말했다.

털보는 멍청하게 돌아가 버렸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된 거냐?”아버지가 물었다.

“경찰한테 맞아 머리가 돈 사람이래요.” 톰이 말했다.

“사람들이 다들 그러던데요? 머리를 너무 많이 얻어맞았데요.

두 번째 차가 캠프장을 빠져 나가 국도에 오르더니 휑하니 굴러가 버렸다.

“자, 타세요. 아버지, 이렇게 하지요. 아버지하고 나하고 앨하고 앞에 타고, 아니, 어머니가 앞자리 가운데에 타고요. 앨하고 저는…”

톰은 자리 밑에 손을 뻗어 커다란 멍키 스패너를 꺼냈다.

“앨은 맨 꽁무니에 타라. 이걸 가지고 있다가 만일 어떤 놈이 올라타려고 하거든 이걸 한 대 안겨주라고.

앨이 스패너를 들었다. 뒤로 올라가더니 그는 다리를 꼬고 자리를 잡고서 스패너를 들었다. 톰은 자리 밑에서 재크손잡이를 꺼내더니 그것을 바닥의 브레이크 페달 옆에 놓았다.

“자, 됐다.” 그가 말했다.

“어머니가 가운데로 타세요.

아버지가 말했다.

“난 손에 아무것도 안 가졌다.

“그럼, 아버지가 재크손잡이를 쓰세요.” 톰이 말했다.

“제발 아버지가 그걸 안 쓰시게 돼야 할 텐데.

그는 시동을 걸었다. 크랭크가 소리를 내며 돌았다. 엔진이 걸렸다가 꺼지더니 다시 걸렸다. 톰은 라이트를 켜고 낮은 기어를 걸고 캠프를 빠져 나갔다. 희미한 라이트가 열심히 길을 비춰 주고 있었다. 그들은 국도에 올라서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톰이 말했다.

“사람이 화가 날 때도 있는 모양이지요.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얘야, . 너 나한테 말했지, 나한테 약속했잖아? 인제 그런 짓은 안 하겠다고 말이다.

“알았어요, 어머니.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데 보안관 보들이 말예요. 어머니는 엉덩이에 살이 안 찐 보안관 녀석을 본 일이 있어요? 그 녀석들이 되지 못하게 엉덩이를 흔들어 대고 권총을 들먹거리잖아요. 어머니.” 그가 말했다.

“녀석들이 법대로만 한다면 우리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법대로 하는 게 아니라고요. 사람의 기를 죽이려고 하는 짓이라고요. 사람을 질질 끌려가는 강아지 새끼처럼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들을 흩어 놓으려고… 정말이에요. 정말, 이제 보세요, 어머니. 남자가 자기의 위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은 경찰을 두들겨주는 도리밖에 없는 그런 때가 올 거예요. 그 놈들은 우리들의 위신을 짓밟고 있거든요.

어머니가 말했다.

“너 약속했잖니, . 그게 바로 그 얌전하던 우리 고향의 후로이드가 하던 식이란다. 난 걔들 어머니도 잘 알아. 경찰 놈들이 걔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까 그렇게 된 거야.

“열심히 노력할게요, 어머니. 하느님께 맹세코 그렇게 할게요. 어머니도 내가 얻어맞은 개새끼처럼 배를 땅에 깔고 기어 다니면 좋겠어요?

“제발 빈다. 제발 그런 일에 가까이 가지 말라, . 우리 가족이 흩어지게 된다. 너는 그런 데에 가담하지 마라.

“조심하겠어요, 어머니. 하지만 엉덩이 녀석들이 나를 건드리면 나는 한바탕 뒤덮어 줄 거예요. 그게 법대로만 한다면 얘기는 달라요. 하지만 캠프를 태운다는 것은 법이 아니거든요.

차가 흔들거리며 굴렀다. 앞쪽에 빨간 등불이 한 줄로 국도 위에 펼쳐져 있었다.

“우회 길목인가 보지요.” 톰이 말했다.

그는 차의 속력을 늦추더니 아주 멈췄다. 그러자 사람들 한 떼가 트럭을 감싸고 몰려들었다. 그들은 곡괭이와 엽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철모와 어느 지방의 것인지 모를 재향군인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한 남자가 차창 안으로 몸을 굽혔다. 위스키 냄새가 먼저 들어와 코를 찔렀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가는 거요?” 그 사람은 술기운이 올라 있는 얼굴을 톰의 얼굴 가까이에 들이대고 물었다.

톰은 조심스럽게 손으로 바닥을 더듬어 재크손잡이를 잡았다. 어머니가 그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톰이 말했다.

“글쎄요.

그러더니 그의 목소리가 비굴한 콧소리를 내며 울렸다.

“우리는 여기가 객지요. 들으니까 투레어라고 하는 곳에 일자리가 있다기에.

술 취한 사람이 말했다.

“그럼, 당신들은 길이 틀렸소. 여기 우리 고장에서는 당신들 오키는 필요 없소.

톰의 어깨와 팔이 다시 뻣뻣해졌다. 그는 전신에 경련을 일으켰다. 어머니가 그의 팔뚝에 매달렸다. 트럭 앞은 무장한 사람들로 둘러싸였다. 그들 중의 약간은 군대식으로 차리기 위해서 짧은 군복 상의와 샘프라운 식 혁대를 차고 있었다.

톰이 또 훌쩍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럼, 어느 쪽으로 가야 되지요?

“오른쪽으로 돌아서 북쪽으로 가시오. 그리고 목화가 다 될 때까지는 돌아오지 말란 말이오.

톰은 전신을 떨었다.

“알았습니다.” 톰이 말했다.

그는 차를 거꾸로 돌리려 방향을 틀었다. 그는 오던 길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그의 팔을 놓고 가만히 쓰다듬었다. 톰은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얘야, 그런 거 신경 쓰지 마라.” 그녀가 말했다.

“신경 쓰지 마라.

톰은 창밖으로 코를 풀어 버리고 소매로 눈을 닦았다.

“개새끼들!

“네가 잘한 거다.” 어머니가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참말로 잘한 거다.

톰은 흙바닥으로 된 샛길로 들어서서 한 백 야드쯤 달리더니 라이트와 모터를 껐다. 그는 재크손잡이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너 어딜 가니?” 어머니가 물었다.

“좀 내려다보려고요. 우리는 북쪽으로 안 갈 거예요.

빨간 등불들이 국도 위에 흔들리고 있었다. 등불들이 흙바닥 길의 입구를 가로질러서 계속 앞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얼마 뒤에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후버빌 쪽에서 불꽃이 벌겋게 솟아올랐다. 불빛은 더 커지고 더 퍼져 나갔다. 그리고 타닥 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톰이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는 한 바퀴 돌아 라이트도 켜지 않고 흙바닥 길을 달려갔다. 국도에 올라서서 그는 다시 남쪽으로 차를 돌리고 라이트를 켰다.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냐? .

“남쪽으로 가요.” 그가 말했다.

“그 개새끼들이 누구를 밀어내, 밀어내기는. 그렇게는 안 될 걸. 거기를 통과하지 않더라도 시내를 돌아갈 수는 있어요.

“그나저나 어디로 가는 거냐? 대관절?” 아버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난 알고 싶다.

“그 관청에서 만들었다는 캠프를 찾아보려고요.” 톰이 말했다.

“어떤 친구가 그러는데 거기에는 보안관 보가 안 나타난대요. 어머니, 나는 그놈들을 피해야겠어요. 암만 해도 한 놈쯤 죽여 버릴 것 같아서 겁이 나요.

“너무 급하게 굴지 마라.” 어머니가 타일렀다.

“톰, 급하면 안 된다. 이번엔 참 잘했다. 너도 얼마든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래요. 그러다보면 난 아주 줏대도 위신도 없는 놈이 될 거예요.

“참아라.” 그녀가 말했다.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얘야, 다들 돌아가셨어도 우리는 남아서 살아야 할 게 아니냐? 우리는 산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도 우리를 아주 없애 버리지는 않겠지. 우리가 국민인데 어떻게 하겠니? 우리는 살아야…”

“언제나 얻어맞고만 있어요.

“나도 안다.” 어머니가 웃었다.

“그러니까 우리도 거칠어지는 거겠지. 돈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고 나서 죽더라. 그리고 그 사람들의 자식들은 다 병신들이고. 그래서 죽어 버리고. 하지만 톰, 우리는 안 그렇잖니? 어떤 사람이라도 건드리지 마라. 세상이 달라지는 때가 꼭 올 거야.

“어떻게 아세요?

“어떻게든지 안다.

그들은 시내로 접어들었다. 톰은 중심가를 피하기 위해서 옆길로 들어섰다. 가로등 불빛으로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잔잔했으나 이상한 표정이 그녀 눈 속에 들어 있었다. 마치 동상에 박혀 있든 시간을 초월한 것 같은 눈이었다. 톰은 오른손을 내밀어서 어머니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는 손을 뺐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을 많이 하시는 것은 평생 처음 보았네요.

“나도 그렇게 말을 많이 해야 했던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그는 샛길을 통해서 시내를 빠져나갔다. 그런 다음 다시 돌아서서 건너왔다. 한 교차로에서 그는 ‘99호선’이라 쓰인 간판을 보았다. 그는 그 길을 타고 남쪽으로 차를 달렸다.

“여하튼 그놈들, 우리를 북쪽으로 밀어내지는 못했어요.” 그가 결연하게 말했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가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거예요. 비록 밤중에 기어서 가는 한이 있더라도.

트럭의 라이트가 비치는 희미한 불빛이 널따랗고 까만 국도 위를 따라 앞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21

일자리를 찾아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주민들이었다. 웬만큼 땅이라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 40에이커의 땅을 파먹고 살다가 거기서 죽어가던 사람들, 40에이커 땅에서 수확한 농작물을 먹거나 또는 굶거나 했던 그들은 이제 서부 전역을 누비고 있었다. 그들이 일자리를 찾아 쫓아다녀 국도는 사람들의 물결로 넘쳤으며 강둑마다 사람들이 줄을 지었다. 그 뒤로도 더 많은 사람들이 밀어 닥치고 있었으니 그 넓은 국도가 움직이는 사람들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중서부와 남서부 지방에는 산업 발달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지 않은 순수한 본토박이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기계와 더불어 변화하지 않았고 기계의 위험성이나 기계의 위력을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기계의 역설 속에서 자라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감각은 아직도 산업 생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민감하고 날카로운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계들이 그들은 밀어냈고 그들은 국도 위로 몰려나왔던 것이다. 그 대이동이 그들을 변화시켰고 국도가, 국도 연변의 캠프가, 배고픔에 대한 공포가, 그리고 배고픔 그 자체가 그들을 바꾸어 놓았다. 밥을 못 먹은 아이들이 그들을 변화시켰고 끊임없는 이동이 그들에게 변화를 일으키게 했다. 그들은 이주민이었다. 적의에 찬 대접이 그들을 변화시켰고 집합시켰고 단결하게 했으니, 이것은 또 도회지 사람들로 하여금 무장하여 침략군이라도 격퇴시키겠다는 듯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도회지 사람들은 곡괭이를 들어 부대를 이루었고 엽총을 든 상점 점원들, 회사원들이 같은 동족들에 대항하여 넓은 친지를 지키고 있었다.

이주민들이 국도를 메우고 들어오면서 서부에는 공포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재산깨나 있는 사람들은 재산 때문에 떨었다. 배고픈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배고픈 사람들의 눈동자를 보았다. 부족한 것을 모르던 사람들이 이주민들의 눈동자 속에서 궁핍으로 인한 노여움의 불꽃을 목격했다.

그래서 도회지 사람들과 어설픈 변두리 지방 사람들까지 한데 뭉쳐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 그들은 대개, 누구나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렇듯이, 자기들은 선량하고 침략자들만 나쁘다고 스스로 믿었다. 그들은 말했다. 고약한 오키들은 더럽고 무식하다. 그놈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성적인 미치광이들이다. 이 고약한 오키들은 도둑놈들이다. 무엇이든지 훔쳐간다. 재산권에 대한 하등의 의식조차 없는 개새끼들이다.

그런데 마지막 말은 옳은 말이었다. 아무런 재산도 가져 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소유권의 무서움을 알 수가 있겠는가! 수세에 몰린 쪽에선 말했다. 그놈들은 너무 더러워 병을 옮긴단 말이야. 그래서 학교에도 같이 넣어 줄 수가 없단 말이야. 그놈들은 이방인들이라고. 너 같으면 네 누이가 그런 놈들하고 나돌아 다니면 좋겠어?

그래서 서부의 터줏대감들은 억지로라도 자신들을 잔인하게 만들려고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소대, 부대를 이루었고 곤봉과 가스와 총으로 무장을 했다. 우리는 이 공장의 주인이다. 우리는 오키들이 마음대로 하게 둘 수는 없다. 이 무장한 사람들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밤에도 훈련을 받는 사원들은 실상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없었고 작은 가게의 주인들은 서랍 속에 들어 있는 채무 문서 보따리밖에 가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빚이 있는 것도 상당한 것이요. 우선 일자리가 있다는 것만 해도 그게 어딘가! 사원들은 생각했다. ‘나는 일주일에 15달러를 받고 있는데 그놈의 오키들이 12달러를 받고 일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가게 가진 상인들은 생각했다. ‘빚이 없는 사람들하고 어떻게 경쟁을 할 수 있겠는가?

이주민들은 국도 위에 물결쳤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기아와 궁핍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에게는 논리도 체계도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똑같이 굶주린 수많은 사람들과 궁핍이 있을 뿐이었다. 한 사람 분량의 일이 있으면 열 사람이 덤벼들었다. 덤벼들어서 형편없는 품삯을 놓고 서로 다투었다. 그 사람이 30센트 받고 일하겠다는 마는 25센트로 하겠다는 식이었다.

그 사람이 25센트로 하겠다면, 나는 20 센트로도 좋소.

아니오. 내가 하겠소. 나는 배가 고프오. 15센트만 받겠소. 먹을 것만 주시오. 애새끼들이 있소. 나를 좀 보시오. 사방에 부스럼이 나는데 그냥 놔두면 온몸이 어떻게 되겠소? 비바람에 맞아서 떨어진 과일이라도 좀 주시오. 그러면 창자가 좀 일어날 테니, 나요? 난 고기 한 조각만 주어도 하겠소.

이것은 썩 수지가 맞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품삯은 자꾸만 내려가는데 물가는 그대로 변동이 없으니 말이다. 대지주들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그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더 많은 구인광고 쪽지들을 뿌렸다. 품삯은 내려가고 물건 값은 그대로였다. 이렇게 하다가는 얼마 안가서 농노제도가 다시 생길 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지주들과 회사들이 새로운 묘안을 궁리해 냈다. 대지주가 통조림 공장을 산다. 복숭아와 배가 다 익어갈 때쯤 해서 그들은 과일 값을 생산가 이하로 낮췄다. 그리고 대지주이며 통조림 공장 주인으로서 그는 통조림 원료로서의 과일을 싼값에 사들이고 과일 통조림 값은 비싸게 책정해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그러다보니 통조림 공장이 없는 군소 농장주들은 농장을 잃게 되었다. 대농장주들이 그것들은 인수했다. 은행이나 회사들이 통조림 공장을 사들이게 되었다. 시간이 감에 따라 농장의 수효가 줄어들었다. 군소 농장주들은 잠깐 도회지에 들어와 외상값을 받아 탕진해 버렸고, 친구와 친척들을 다 잃어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들도 국도 위에 올라섰다. 그래서 길목마다 사람이 들끓었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서 살인적으로 미쳐 날뛰었다.

회사, 은행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갉아먹고 있었으나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들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했고 곡창마다 가득 찼으나 굶주린 사람들은 길바닥에 깔렸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구루병에 걸렸다. 펠라그라 피부병이 만연해서 아이들의 옆구리엔 부스럼이 다닥다닥 일었다. 대재벌들은 기아와 분노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품삯으로 지불되어야 할 돈이 가스와 총과 하수인과 스파이와 문제아 명단 작성과 훈련 등등의 비용으로 나갔다. 국도 위에는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이동하면서 일을 찾아 헤맸다. 분노가 영글어 가고 있었다.

22

톰 조드가 시골길 따라 차를 달려 위드팻치 캠프를 찾은 것은 아주 늦은 시각이었다. 변두리라서 그런지 불빛도 거의 없었다. 다만 그들 뒤의 뿌연 하늘만이 베이커즈 필드 방면을 가리켜 주고 있었다. 트럭은 천천히 털털거리면서 굴렀고 길 앞에서는 도둑고양이들이 뛰어 다녔다. 어떤 사거리에 나서자 작은 목조 건물들이 옹기종기 몰려 서있었다.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고 아버지는 자리에 앉은 채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톰이 말했다.

“어딘지 잘 모르겠는데요.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람들한테라도 물어 봐야겠는데요.

그는 인도의 표지가 있는 데서 차를 멈추었다. 또 차 한대가 와서 건널목에 멎었다.

톰이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여보세요. 큰 캠프가 있다는 데가 어딘지 아세요?

“곧장 가시오.

톰은 건너편 쪽으로 차를 몰았다. 몇 백 야드쯤 가서 차를 멈추었다. 높은 철조망이 길 쪽에 면해 있고 널찍한 대문을 두고 차도가 그 안으로 뚫려 있었다. 대문 안에 조금 들어가서 조그마한 집이 있었고 창에 불이 밝혀 있었다. 톰이 안으로 차를 꺾었다. 갑자기 차체 전체가 공중으로 뛰더니 다시 쿵하고 떨어졌다.

“제기랄!” 톰이 말했다.

“그렇게 높은 둔덕이 있는 줄은 몰랐네.

수위가 베란다에서 일어나 차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너무 세게 부딪쳤군요.” 그가 말했다.

“다음에는 좀 천천히 들어오시오.

“도대체 이게 뭐요?

수위가 웃었다.

“어린애들이 여기에 많이 나와서 놀지요. 그래서 차들을 좀 천천히 몰고 다니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사람들이 잊어먹더군요. 그런데 그 둔덕을 한번 들이받고 나면 다들 정신을 차린다고요.

“오오라, 그렇군요. 아무데도 고장이 없어야 할 텐데. 그런데 여기에 혹시 들어갈 자리가 있겠어요?

“캠프가 딱 하나 있어요. 모두 몇 분이시오?

톰이 손가락으로 세어 보았다.

“어머니, 아버지, , , 로자샤안, 존 삼촌, 루시하고 윈필드, 그런데 맨 나중 둘은 애들이오.

“그럼, 어디 한번 맞추어 봅시다. 캠프 칠 도구는 있으시오?

“큼직한 범포하고 침대가 있지요.

수위가 차 발판으로 올라섰다.

“저쪽 줄의 끝으로 몰고 가서 오른쪽으로 도시오. 당신네는 위생반의 네 번째에 드시는 거요.

“그게 뭐지요?

“화장실과 샤워와 세탁조 같은 거요.

어머니가 물었다.

“여기에는 세탁조도 있고 수돗물도 나오나요?

“그럼요.

“오오, 하느님!” 어머니가 흐느낌에 가까운 탄성을 발했다.

톰은 천막의 줄을 따라 깜깜한 속을 달려갔다. 위생반 건물에 희미한 불이 켜져 있었다.

“이쪽으로 차를 넣으세요.” 수위가 말했다.

“참, 좋은 자리지요. 여기에 들었던 사람들이 막 나갔어요.

톰이 차를 세웠다.

“바로 여기요?

“예, 여기요. 내가 사무실에 가서 당신한테 사인을 해줄 테니까 다른 분들은 짐을 내리도록 하세요. 들어가서 쉬시오. 아침에 캠프 위원회에서 당신을 불러 수속을 할 거요.

톰은 눈을 내리뜨고 슬쩍 물어봤다.

“경찰들 말이오?

수위가 웃었다.

“여기에 경찰은 없소. 우리가 만든 경찰이 있지요. 여기 사람들은 자치적으로 경찰을 뽑는다오. , 따라오시오.

앨이 트럭에서 뛰어내려 어슬렁거렸다.

“여기에 머물 거야?

“그래.” 톰이 말했다.

“내가 사무실에 갔다 올 테니까 너하고 아버지하고 짐 좀 내려라.

“좀 조용히 하세요.” 수위가 말했다.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자고 있어요.

톰은 수위를 따라 사무실 계단을 올라가 낡은 책상과 의자가 있는 조그마한 방으로 들어섰다. 수위가 책상에 앉더니 용지를 꺼냈다.

“성명?

“톰 조드.

“그게 아버지요?

“예.

“당신은?

“똑같이 톰 조드요.

이런 질문이 계속되었다. 어디서 왔고 캘리포니아 주에 얼마나 있었고 어떤 일을 해왔는가 하는 것들이었다. 수위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꼬치꼬치 따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것을 만들어야 한다오.

“그러시겠지요.

“그런데 돈이 좀 있으시오.

“조금 있지요.

“극빈자는 아니오?

“조금은 있지요. 왜 그러시오?

“에에, 캠프장을 차지하면 일주일에 1달러를 내야 해요. 그런데 돈이 없으면 쓰레기를 치운다든지 청소를 한다든지 뭐 그런 일을 해서 대신 할 수도 있어요.

“그럼, 우리는 일을 하겠어요.

“내일 위원들을 만나게 될 거요. 그러면 캠프 사용상의 주의라든지 규칙 같은 것을 알려줄 거요.

톰이 말했다.

“그런데 그게 뭐지요. 도대체 무슨 위원회요?

수위는 의자 뒤로 몸을 기대고 앉았다.

“아주 잘들 운영하고 있다오. 위생반이 다섯 개가 있어서 각 반마다 중앙위원을 선출해요. 그래서 그 중앙위원회가 규칙을 만들지요. 그 사람들 말이 그대로 통하는 거요.

“혹시 그 사람들이 까다롭게 구는 건 아니오.

“그러면 뽑을 때처럼 언제든지 투표해서 갈아치울 수 있는 거요. 여태까지는 잘들 해왔어요. 어떻게 했는지 아시오? 당신 그 호리 로라 목사들은 설교를 하고 교회 헌금도 걷고 하면서 일 년 내내 사람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는 것을 아시죠? 그런데 그들이 와서 이 캠프에서 설교를 하려고 했지요. 그리고 여기 있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데려다가 설교를 듣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그 문제가 중앙위원회에 올라갔지요. 회의 결과가 어떻게 된지 아세요? 위원들 하는 말이, ‘어떤 목사라도 이 캠프에 와서 설교는 할 수 있지만 헌금은 절대로 못 걷는다.’ 이거요. 그건 나이 많은 사람들한테는 좀 서운한 결과가 되어 버렸지요. 그 뒤로부터는 여기를 찾아오는 목사는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톰이 껄껄 웃더니 물었다.

“그럼, 여기서 캠프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다 공정하다 이거요? 여기에 사는 사람들 말이오?

“그렇다니까요.

“그런데 아까 그 경찰이라는 건 무어요?

“중앙위원회라는 것이 질서를 유지하고 규칙을 만들지요. 그리고 부녀자들이 있어요. 그 여자들이 당신 어머니를 찾아갈 거요. 그 여자들은 애들을 돌보고 위생반 일을 해요. 당신 어머니도 하는 일이 없으면 부모가 일 나가는 집의 애들을 돌볼 수도 있고, 그러다가 일자리가 생기면 또 다른 여자가 그 일을 맡지요. 바느질도 하고 그러는데, 부모같이 나이 먹은 여자들이 와서 가르치지요. 여기서는 모든 일이 다 그런 식이라오.

“그럼 경찰은 없다는 얘기요?

“그런 건 없지요. 어떤 경찰관도 허가 없이는 여기에 못 들어오게 돼 있다오.

“가령 어떤 놈이 술주정이라도 하면서 싸우고 못되게 굴면 그때는 어떻게 하는 거요.

수위는 연필로 잉크를 흡수하는 종이를 쿡쿡 찍었다.

“처음 한 번은 중앙위원회에서 경고를 하지요. 두 번째는 아주 따끔하게 경고를 하다가 세 번째에는 캠프에서 아주 쫓아내 버리는 거요.

“어럽쇼, 난 그런 건 도저히 믿을 수 없는데요? 바로 오늘밤에도 저쪽 강가에서 보안관 보하고 벙거지를 쓴 녀석들이 캠프촌 하나를 완전히 불 지르고 사람들은 쫓아낸 걸요?

“여기는 안 들어온다오.” 수위가 말했다.

“어떤 때는 밤에 남자들이 울타리를 따라 순찰도 돌지요. 특히 무도회 같은 행사가 있을 때는.

“무도회가 다 있어요? 제기랄!

“이 고장 가운데서도 제일 멋지게 한다오. 매주 토요일 밤에.

“아, 그럼 왜 이런 걸 더 많이 안 만드는 거요. 당국 놈들은?

수위가 시무룩했다.

“그건 당신이 직접 알게 되겠죠. 어서 가서 좀 쉬시오.

“안녕히 계세요.” 톰이 말했다.

“우리 어머니도 여기가 마음에 드실 거요. 오랫동안 제대로 대접을 못 받으셨어요.

“푹 쉬세요.” 수위가 말했다.

“잠을 좀 자시오. 이 캠프에선 모두 일찍 일어난다오.

톰은 나란히 서있는 천막들 사이에 난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그의 눈은 별빛에 익숙해졌다. 사람이 다니는 길은 깨끗이 쓸려져 물까지 뿌려져 있었다. 천막 속에서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캠프 전체가 윙윙거리고 드르릉거렸다.

톰은 천천히 걸었다. 위생반의 네 번째 건물에 가까이 왔다. 그는 의아스럽게 그것을 쳐다보았다. 칠도 안 한 나지막하고 초라한 건물이었다. 옆은 뚫어졌지만 지붕이 있는 그 아래에 세탁물 통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가까이에 그의 트럭이 보였다. 그는 조용히 그쪽으로 갔다. 범포가 이미 펼쳐져 있고 캠프 속은 조용했다. 그가 가까이 접근하자 트럭 그림자 속에서 사람의 모습이 움직이더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톰, 너냐?

“예.

“쉿!” 그녀가 말했다.

“모두들 잠들었다. 다 녹초가 된 모양이다.

“어머니는 왜 안 주무셨어요?” 톰이 말했다.

“너를 좀 보고 자려고 했다. 다 잘 되었니?

“아주 훌륭해요.” 톰이 말했다.

“어머니한테 얘기 안 해줄래요. 아침에 사람들이 와서 알려줄 거예요. 어머니도 이곳이 마음에 드실 것 같아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여기에는 더운 물도 나온다더라.

“그렇대요. , 가서 좀 주무셔요. 언제 주무시려고 지금까지 안 주무셨는지 모르겠네, 정말.

그녀가 궁금해 하면서 물었다.

“너 무얼 나한테 얘기 안 하겠다는 거니?

“얘기 안 할래요. 어서 주무세요.

갑자기 그녀는 소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다그쳤다.

“네가 나한테 숨기려는 말이 뭔지 그 생각을 하느라고 어떻게 잠이 오겠니? 얘도 참?

“아무것도 아녜요. 어머니.” 톰이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시면 바로 다른 옷을 꺼내 갈아입으세요. 그러면 아실 거예요.

“난 무엇이나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잠이 안 온다.

“주무셔야 돼요.” 톰이 재미있다는 듯 킬킬거렸다.

“주무셔야 돼요.

“잘 자거라.”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몸을 굽히고 어두운 천막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톰은 트럭의 꽁무니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는 차의 판자 바닥에 벌렁 누워서 두 손으로 머리를 괴고 팔뚝을 귀에 받쳤다. 밤이 좀 시원해졌다. 그는 저고리의 가슴에 단추를 걸고 다시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머리 위에선 반짝이는 별들이 날카로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가 잠에서 깨어보니 아직도 어두웠다. 무언가 부딪치는 작은 소리가 그를 잠에서 깨웠다. 톰은 귀를 기울이고 쇠와 쇠가 부딪치는 그 소리를 들어 보았다. 그는 뻣뻣해진 몸을 움직이면서 새벽 공기 속에서 몸을 떨었다. 캠프는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톰은 일어나서 트럭의 옆구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동쪽으로 검푸른 산들이 솟아 있었고 그 산들의 뒤쪽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산 능선의 가장자리가 불그스름해지더니 위쪽이 점점 거무스름하고 차가운 빛을 띠어 가다가 서쪽 지평선 가까이에서는 아주 깜깜한 밤하늘과 섞여 버렸다. 골짜기 아래에는 땅이 희끄무레한 연보라색으로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톰은 줄지어 늘어선 천막들을 내려다보았다. 천막들은 땅보다 조금 더 연한 회색빛에 불과했다. 한 천막 옆에는 낡은 철제스토브의 갈라진 틈에서 오렌지 빛의 불꽃이 힐끗 펄럭이고 있었다. 두툼하고 짤막한 연통에서 잿빛 연기가 솟아올랐다.

톰은 트럭 짐칸 울타리를 넘어 땅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천천히 스토브 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한 젊은 여자가 스토브 옆에서 무언가 하고 있었다. 그녀는 팔에 어린애를 안고 있었고 어린애는 여자의 겨드랑이 밑으로 고개를 박은 채 우유를 빨고 있었다. 그녀는 스토브의 아래쪽 문을 열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하면서 뚜껑을 열고 불을 만지고 있었다. 어린애는 계속 우유를 빨았고 여자는 어린애를 이쪽 팔 저쪽 팔로 옮겨 가면서 어린애를 편하게 추슬렀다. 그러면서도 여자는 일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여자는 아주 능숙하게 다루면서 불을 만지고 있었다. 오렌지색 불꽃이 스토브의 갈라진 틈 사이로 날름거리면서 천막 위에 펄럭이는 빛을 던지고 있었다.

톰이 가까이 다가갔다. 베이컨과 빵을 굽는 냄새가 났다. 동쪽 하늘이 성큼 밝아 왔다. 톰은 스토브에 접근해서 두 손을 스토브 쪽으로 뻗었다. 여자가 그를 올려다보면서 고개를 까딱했다. 두 갈래로 묶은 그녀의 머리채가 흔들렸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인사를 하더니 다시 팬 속의 베이컨을 뒤적거렸다.

천막의 포장이 펄럭이면서 한 젊은이가 나오고 그 뒤에 좀 더 나이가 든 남자가 따라 나왔다. 그들은 청색 줄무늬의 반지와 윗도리를 입었는데, 새 옷이라 그런지 물이 잘 먹어 빳빳했고 놋쇠 단추가 반짝이고 있었다. 두 남자가 다 얼굴이 매섭게 생기고 서로 비슷하게 닮아 있었다. 젊은 사람은 시커먼 턱수염이 나있고 나이가 든 쪽은 희끗희끗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머리와 얼굴엔 축축한 물기가 있었고 손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수염에도 물방울이 대롱거렸다. 볼때기는 물기가 묻어서 불그스름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동이 터오는 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품을 하면서 산 능선의 햇빛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톰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녕하쇼?” 나이 든 쪽이 인사를 했다.

그의 얼굴은 아주 다정하지는 않았으나 무뚝뚝한 것도 아니었다.

“안녕하쇼?” 톰이 말했다.

그들의 얼굴에서 물기가 서서히 말라갔다. 그들은 스토브에 다가와서 손을 쬐었다. 여자는 하던 일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잠깐 어린애를 내려놓고 손을 머리 뒤로 돌려 두 개의 머리채를 끈으로 한데 묶었다. 머리채가 그녀의 동작에 따라 너울거리며 흔들렸다. 그녀는 양철 컵을 커다란 상자 위에 꺼내 놓고 양철 접시와 칼과 포크를 차려 놓았다. 그러고 나서 기름 속에서 베이컨을 뒤적이더니 그걸 접시에 퍼내놓았다. 베이컨이 오그라들면서 바삭바삭 소리를 냈다. 그녀는 녹이 슬어 있는 솥뚜껑을 열고 팬 속에 4분의 1가량 들어 있는 비스킷을 꺼냈다. 비스킷 냄새가 진동하자 두 남자는 다 같이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젊은 쪽이 말했다. “야, 구수하다!

나이 든 남자가 톰에게 물었다.

“조반 하셨소?

“아니오, 아직. 우리 가족들은 이쪽이지요. 아직 잠도 깨지 않았는데, 좀 더 자야 될 것 같군요.

“그럼, 여기 같이 앉읍시다. 다행히도 오늘은 충분히 준비했군요.

“예, 감사합니다.” 톰이 말했다.

“냄새가 어찌나 좋은지 체면도 못 차리겠군요.

“그렇군요.” 젊은 쪽이 말했다.

“이렇게 좋은 냄새는 평생 처음 맡아 보는 것 같은데.

그들은 상자 쪽으로 가서 그것을 둘러싸고 쭈그리고 앉았다.

“이 근처에서 일을 하쇼?” 젊은이가 물었다.

“그럴 생각이오.” 톰이 말했다.

“우리는 바로 어젯밤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아직 돌아다녀 볼 시간도 없었지요.

“우린 열이틀 동안 일을 했지요.” 젊은이가 말했다.

스토브 옆에서 일을 하고 있던 여자가 말했다.

“그래서 옷까지 새로 사 입었지요.

두 남자가 자기들의 빳빳한 청색 옷을 내려다보면서 다소 겸연쩍게 웃었다. 여자는 베이컨 접시와 갈색으로 잘 구워진 큼직한 비스킷과 베이컨 국물 한 사발과 커피 주전자를 차려 놓고 자기도 상자 옆에 와서 쭈그리고 앉았다. 어린애는 아직도 여자의 겨드랑이 밑에서 우유를 빨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접시에다 먹을 것을 덜고 비스킷 위에 베이컨 국물을 끼얹고 커피에 설탕을 탔다. 나이 많은 남자는 입에 음식을 가득 넣더니 질근질근 씹으면서 마시고 삼키고 했다.

“야 참, 맛 좋군!” 그는 말을 하면서 다시 입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

젊은이가 말했다.

“우리는 열이틀 동안은 잘 먹고 지냈지요. 우리 식구가 한 번도 끼니를 거르지 않았으니까. 일을 하고 품삯을 받고 먹을 것을 사 먹었다오.

그는 다시 대들어서 접시를 가득 채우더니 거의 미친 듯이 먹어댔다. 그들은 끓여 놓은 커피를 마셨다. 커피찌꺼기는 땅에 버리고 잔을 다시 채웠다.

아침 햇빛에 색깔이 감돌기 시작했다. 불그스름한 색채였다. 식사를 마치고 동쪽으로 등을 돌려대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에 아침빛이 내리쬐었다. 산 그림자와 산 위에서 비쳐 오는 아침빛이 그들의 눈에 비쳐 반사되고 있었다.

“어서 나가 보아야겠구나.” 나이 많은 남자가 말했다.

젊은이가 톰 쪽으로 돌아섰다.

“이보세요.” 그가 말했다.

“우리는 파이프 묻는 일을 하고 있는데, 같이 가볼 생각이 있으면 당신을 끼워줄 용의는 있소.

톰이 말했다.

“그거 참 고마운 얘기군요. 이렇게 아침까지 대접을 받아서 참 감사합니다.

“만나게 되어서 반갑소.” 나이 든 남자가 말했다.

“당신이 희망한다면 같이 일할 수 있게 얘기해 보지요.

“희망하다마다요.” 톰이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우리 집에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요.

그는 자기네천막 쪽으로 급히 갔다. 몸을 굽혀 안을 들여다보았다. 침대의 덧이불 밑에서 누군가 살짝 움직였다. 루시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머리카락이 눈 위에 헝클어지고 옷은 다 구겨져 쭈글쭈글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기어 나오더니 그대로 서있었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는 잠에서 깨어나 맑고 잔잔했으며 전혀 장난기가 없었다. 그가 뒤를 돌아다보니까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휴, 우리 루시가 많이 컸구나.” 그가 말했다.

그녀는 갑자기 부끄러운지 시선을 피했다.

“내 말 들어 봐라.” 톰이 말했다.

“너 아무도 깨우면 안 된다. 그리고 식구들이 깨면 오빠가 일자리가 있을 것 같아서 나갔다고 해, ? 엄마보고 오빠는 이웃집에서 아침밥 먹었다고 하고, 알았니?

루시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은 이제 작은 소녀의 눈으로 돌아갔다.

“너 아무도 깨우면 안 된다.

톰이 거듭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그는 새로 사귄 사람들한테 돌아갔다. 루시는 조심스럽게 위생반에 다가가더니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톰이 돌아와 보니 두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여자는 밖에 매트리스를 꺼내 놓고 어린애를 그 위에 내려놓은 채 접시를 닦고 있었다.

톰이 말했다.

“가족들한테 내가 어디에 가는지를 말해 주려고 다녀왔지요. 아직 일어나지 않았더군요.

세 남자는 천막들을 따라 길을 걸어내려 갔다.

캠프촌은 이미 깨어 움직이고 있었다. 새로 피운 불 옆에서 여자들은 고기를 썰기도 하고 아침에 먹을 도넛을 빚기도 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천막과 자동차 주위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하늘은 이제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무실 앞에서 한 야윈 노인이 마당을 조심스럽게 청소하고 있었다. 사무실 앞에서 한 야윈 노인이 마당을 조심스럽게 청소하고 있었다. 갈퀴를 어찌나 조심스럽게 긁는지 갈퀴 지나간 자리가 똑바로 깊게 남았다.

“영감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지나가면서 젊은 남자가 말했다.

“응, 그래. 천막세를 때워야지.

“아이고, 그놈의 천막세!” 젊은이가 말했다.

“저 영감은 지난 주 토요일 밤에 술이 취해 갖고 자기 천막 안에서 밤새도록 노래를 불렀다오. 그래서 위원회에서 저런 일을 시킨 거지요.

세 사람은 길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길가에는 호두나무가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해가 산등성이 위로 한쪽 얼굴을 내밀었다.

톰이 말했다.

“좀 이상하게 되었군요. 아침까지 얻어먹고도 제 이름조차 안 가르쳐 드렸네요. 당신들도 안 가르쳐 주시고, 저는 톰 조드입니다.

나이 든 남자가 그를 힐끗 돌아보더니 가만히 웃었다.

“당신은 이 고장에 온지 얼마 안 되었죠?

“얼마 안 되었지요. 한 이삼 일 밖에.

“그런 거 같더라니. 좀 이상하지만 당신도 자기 이름을 가르쳐 주는 그 버릇을 그만두어야 하오.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맨 우리 같은 사람들 천지라고. 어쨌든 나는 티모시 윌러스고 여기 이애는 아들 윌키라오.

“알게 돼서 반갑습니다.” 톰이 말했다.

“당신들은 여기에 오신지 오래 되셨군요?

“한 열 달쯤 되었지요.” 윌키가 말했다.

“바로 작년에 홍수가 지나가고 난 뒤에 여기에 왔지요. 죽을 고생을 다 했다오. 말씀 마시오. 거의 굶어 죽을 뻔했지요.

그들의 발걸음이 길바닥 위에서 뚜벅뚜벅 소리를 냈다. 남자들이 한 트럭 실려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맥없이 가라 앉아 있었다. 모두 트럭 짐칸 바닥에서 긴장된 모습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가스 회사로 일을 나가는군.” 티모시가 말했다.

“품삯도 괜찮은 데지.

“우리도 트럭을 가지고 나올 걸 그랬지요?” 톰이 말했다.

“아니오.

티모시가 몸을 굽혀 호두알을 하나 주워들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걸 눌러 보더니 철조망 울타리에 앉아 있는 찌르레기 새를 겨냥해 던져 버렸다. 새가 날아올라 호두는 그 밑으로 지나가 버렸다. 새는 다시 철조망에 내려앉더니 뾰족한 주둥이로 반질반질한 깃털을 문질렀다.

톰이 물었다.

“그런데 차가 없으세요?

윌러스 부자는 말이 없었다. 톰은 그들의 얼굴을 살피면서 그들이 그걸 좀 창피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윌키가 말했다.

“우리가 일을 하는 데는 여기서 한 1마일 밖에 안 돼요.

티모시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우린 차가 없소. 하나 있는 것을 팔아먹었다오. 도리가 없었지요. 먹을 것이 떨어졌으니 말이오. 먹을 것도 없고 모든 것이 다 떨어졌더군요. 일자리도 없을 때고, 차를 사러 오는 놈들은 매주일 있습디다. 와서는 배를 곯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차를 사간다오. 배를 쫄쫄 곯고 있는 사람을 보면 숫제 똥값밖에 안 주지요. 우리가 그 꼴이었다오. 단돈 10달러 주더군요.

그는 길바닥에다 탁 하고 침을 뱉었다.

윌키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지난주에 베이커즈 필드에 갔었지요. 그랬다가 어느 폐차장에서 우리 차를 보았지요. 바로 그 폐차장에 놓여 있는데 가격표를 보니 75달러 딱지가 붙었더라고요.

“어쩔 수가 없었소.” 티모시가 말했다.

“그놈들이 우리 차를 도둑질해 가도록 놓아두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놈들한테서 무얼 도둑질 해 오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 도리가 없었던 거요. 우리는 아직 도둑질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그런 지경에 가까이 간 거지요.

톰이 말했다.

“우리도 고향을 떠나기 전에는 여기에 오면 일자리가 많다고 들었거든요? 사람을 구하는 광고 쪽지를 보았지요.

“그랬을 거요.” 티모시가 말했다.

“우리도 보았지요. 그런데 와보니 일이 그렇게 많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품삯은 자꾸만 내려가고 그러다보니까 먹고 살 일이 걱정이 돼서 이젠 그만 지쳐 버렸다오.

“지금은 일자리가 있잖아요?” 톰이 말했다.

“있긴 있는데 그것도 오래 갈 것 같지가 않소. 주인이 괜찮은 사람이오. 조그마한 장소인데 우리 하고 같이 일을 하지요. 그런데 그 일도 얼마 안가서 일이 끝날 거란 말이오.

톰이 말했다.

“그런 판에 왜 나까지 데리고 가세요. 내가 오면 그만큼 일거리가 없어질 텐데, 당신들 자신의 목을 자르는 셈이잖아요?

티모시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모르겠소. 아마 아무 정신이 없는 모양이오. 우리는 모자를 하나씩 사서 쓰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될 것 같소. 저기 오른쪽에 우리가 가는 데가 있소. 일도 하기가 나쁘지 않고, 시간당 30센트나 받지요. 또 일을 시키는 사람도 무던하더군요.

그들은 국도를 벗어나 작은 야채밭이 섞인 과수원을 통해 자갈길을 걸어 내려갔다. 나무들이 서있는 뒤에 조그맣고 하얀 농가가 서있었다. 나무 몇 그루가 그늘을 던지고 있고 곳간 뒤엔 포도밭과 목화밭이 있었다. 세 남자가 농가를 지나 걸어가자 미닫이문이 꽝, 하는 소리를 내더니 햇볕에 그을린 땅딸막한 남자 하나가 뒤쪽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해를 가리는 종이 모자를 쓰고 마당을 건너오면서 소매를 걷어붙였다. 햇볕에 그을린 두터운 눈썹이 아래로 축 처지도록 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볼때기도 햇볕에 그을려서 쇠고기처럼 시뻘건 색깔이었다.

“안녕하쇼, 토마스 씨.” 티모시가 말했다.

“안녕하쇼.” 남자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티모시가 말했다.

“여기 이 젊은이는 톰 조드라는 사람인데, 혹시 이 사람도 여기에 일자리를 하나 주실 수 있을까 해서 데려왔습니다.

토마스가 톰 쪽으로 찌푸린 얼굴을 돌렸다. 그러다가 가는 살짝 웃었는데, 그 이마는 아직도 펴지지 않았다.

“그럽시다. 같이 일하도록 해주지요. 나는 누구든지 다 쓰겠소. 그러다가 백 명이라도 쓰게 되겠구먼.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티모시가 변명조로 입을 열었다.

토마스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렇소. 나도 생각한 거요. 그건.

그는 몸을 휙 돌리더니 세 사람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소. 지금까지 나는 시간당 30센트를 주어 왔소. 그렇지요?

“그렇습니다만, 토마스 씨.

“그리고 나도 30센트 어치의 가치가 있는 노동을 당신들한테서 받았고.

그의 묵직하고 단단하게 생긴 두 손이 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우리도 매일 열심히 일을 했는데요.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고 오늘 아침은 당신들한테 시간당 25센트밖에 못 주게 되었소. 그걸 받고 일을 하든지 그만두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그의 얼굴은 화가 나서 더욱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티모시가 말했다.

“우리가 일을 열심히 했다고 토마스 씨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걸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고, 나는 이제 내 사람을 내 마음대로 쓰지 못할 것 같소.”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이거 보시오. 나는 여기에 65에이커의 땅이 있소. 당신들도 농업조합이라는 것, 얘기 들어 보았소?

“그럼요.

“그런데 나도 거기에 가입이 되어 있소. 어젯밤에 회합이 있었는데, 이제부터 농업조합을 누가 운영하게 되었는지 아시오? 서부 은행에서 하게 되었다고요. 그 은행이 이 골짜기 땅을 대부분 소유하고 있지요. 그리고 자기들 소유가 아닌 땅은 다 대부증서로 가지고 있다오. 그래 어젯밤 그 은행에서 나온 직원이 나한테 하는 말이, ‘당신은 시간당 30센트를 주고 있다던데 25센트로 깎으셔야 할 거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우리 일꾼들은 일을 잘해서 30센트를 주어도 그 가치가 있다.’고 했더니, 그 친구 말이 ‘그런 얘기가 아니라, 이제 노임이 25센트로 고정되었다 이거요. 당신이 만약 계속 30센트를 준다면 당신은 쓸데없는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오. 뿐만 아니라 당신, 내년에도 종전과 마찬가지로 수확 담보 대출금이 필요하지요?’”

토마스가 말을 멈추었다. 그의 입술에서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알겠소? 이제 노임은 25센트요. 그걸로 만족하시오.

“우리는 일을 열심히 하느라고 했는데.” 티모시가 맥없이 말했다.

“아직도 못 알아듣겠소? 은행이 2천 명을 고용하고 있고 나는 불과 세 사람을 고용하는 셈인데, 거기에다가 나는 지불해야 할 대부증서가 있단 말이오. 그래서 무언가 좋은 수라도 있으면 말해보오. 내가 따를 테니, 나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소.

티모시가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무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당신들 여기 좀 기다리고 있어 보오.

토마스는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걸어갔다. 문이 그의 등 뒤에서 쾅 소리를 냈다. 이윽고 그가 돌아왔다. 그는 손에 신문을 한 장 들고 있었다.

“당신들 이걸 보았소? , 내가 읽어 주지. ‘시민들이 빨갱이 선동분자에 분개하여 난민 캠프를 불태움. 어젯밤 지방 난민촌을 배회하는 선동분자들에 격분한 일단의 시민들이 천막들을 몽땅 불사르고 선동분자들을 군 밖으로 철수하도록 경고하였음.’”

톰이 입을 열었다.

“아, 그건 나도….” 그러다가 그는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었다.

토마스는 신문을 조심스럽게 접어서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말했다.

“이 사람들은 조합에서 내보낸 사람들이오. 나는 그놈들을 다 잡아내고 싶단 말이오. 그런데 내가 이런 소리를 했다는 사실을 그놈들이 혹시라도 알게 된다면 나는 당장 내년부터 이나마 농사도 못 지어 먹게 되는 거요.

“그거 참 무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티모시가 말했다.

“선동꾼들이 있다면 그건 색출하고 격분하고 할 만한 일이겠지요.” 토마스가 말했다.

“나는 그 수작을 너무 오래 보아 왔소. 그놈들은 임금을 깎아 내릴 때가 되면 으레 빨갱이 선동자가 나왔다고 하는 거요. 빌어먹을! 안 그런 때가 없었다고! 나를 함정에 몰아넣은 거라고. , 그럼 당신들은 어떻게 할 거요. 25센트요.

티모시가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일을 해야겠습니다.

“저도요.” 윌리가 말했다.

톰이 말했다.

“나는 벌써 배가 불러 오는데요? 물론 나도 일하겠습니다. 나는 일을 해야 할 입장입니다.

토마스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입과 턱을 닦았다.

“이 일도 얼마나 더 계속될지 모르겠소. 당신들도 그걸 받아 가지고 어떻게 가족들을 먹여 살릴지 알 수가 없군.

“그거라도 일만 계속 있으면 되지요.” 윌키가 말했다.

“일이 없을 땐 사람 죽겠더군요.

토마스가 자기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자, 다들 가서 또 좀 파봅시다.” 하며 그가 말했다.

“아 참, 내 말 좀 들어 보오. 당신들은 다 관청에서 내준 캠프촌에 살고 있소?

티모시가 긴장하면서 대답했다.

“그런데요.

“그런데 매주 토요일 밤에는 무도회를 합니까?

윌키가 빙그레 웃었다.

“그럼요.

“그럼 요번 토요일에는 조심들 하시오.

갑자기 티모시가 긴장했다. 그가 바짝 다가섰다.

“그게 무슨 얘기세요? 나는 중앙위원인데요. 내가 좀 알아야겠어요.

토마스가 좀 걱정스런 표정이 되었다.

“내가 이런 소리 했다고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오.

“그게 무언데요?” 티모시가 추궁했다.

“우리 조합이라는 데서 그 캠프촌을 좋아하지 않소. 거기에는 보안관 보를 들여보낼 수가 없단 말이오. 거기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규율을 정하고 사니까. 그리고 내가 듣기로는 체포영장이 없으면 거기서는 사람을 체포하지도 못하는 모양이더군요. 그런데 거기서 만약 큰 싸움이라도 일어나서 총을 쏘고 난동이 벌어지면 보안관이 무더기로 들어갈 구실이 생기고 그 캠프를 쓸어낼 수 있게 된다는 얘기요.

티모시의 표정이 일변했다. 어깨가 빳빳해지고 긴장하면서 눈초리가 차가워졌다.

“무슨 뜻이지요?

“어디서 들었단 말하면 안 되오.” 토마스가 불안하게 말했다.

“그 캠프에서 싸움이 벌어질 거요, 토요일 밤에. 그러면 미리 대기해 놓은 보안관 보들이 달려든다 이거요.

톰이 물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꾸미는 겁니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데요.

“왜 그런지 알려 주겠소.” 토마스가 말했다.

“그 캠프에 있는 사람들은 점차 사람대접을 받는 데 익숙해지고 있소. 그런 사람들이 다른 캠프촌에 갔을 때 그들은 호락호락 다루기 어려운 존재들이 되는 거요.

그는 다시 얼굴을 닦았다.

“자, 어서 가서 일이나 합시다. 제기랄, 나도 이런 얘기를 아무한테나 하면 안 되는 건데. 당신들이 사람이 좋아 그냥 말이 나와 버렸군요.

티모시가 그의 앞에 나서더니 야위고 딱딱한 손을 뻗었다. 토마스가 손을 잡았다.

“아무한테도 그런 얘기 안 할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무런 싸움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일이나 하러 갑시다.” 토마스가 말했다.

“그리고 한 시간에 25센트요.

“그렇게 받지요.” 윌키가 말했다.

토마스가 집 쪽으로 걸어갔다.

“금방 나올게요. 당신들 먼저 시작하시오.” 그가 말했다.

미닫이문이 쾅하고 닫혔다. 세 남자는 페인트칠을 해놓은 곳간을 지나서 밭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갔다. 그들은 옆에 콘크리트로 만든 파이프가 놓여 있는 좁고 기다란 도랑이 있는 데까지 왔다.

“여기가 우리가 일하는 곳이라오.” 윌키가 말했다.

그의 아버지가 곳간을 열고 곡괭이 두 자루와 삽 세 자루를 꺼내 주었다.

그러면서 톰에게 말했다.

“자, 이게 당신 애인이오.

톰이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아이고, 곡괭이가 뛰는걸. 이거 어디 길이 안 들어서!

“한 열한 시까지만 해보시오.” 윌키가 의미 있게 말했다.

“그러다보면 촉감이 매끄러워질 거요.

그들은 도랑 끝까지 걸어갔다. 톰은 저고리를 벗어서 흙더미 위에 던져두었다. 모자를 치켜 쓰면서 도랑 속으로 내려섰다.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의 곡괭이가 공중에 치솟더니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톰의 입에서 힘을 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곡괭이가 공중에 솟았다가 떨어졌고, 떨어지면서 땅속에 박혀 땅을 파헤쳤다.

“어럽쇼, 아버지, 여기 일류 곡괭이 꾼이 있는데요! 새로 온 이 총각이 저 곡괭이 아가씨하고 금세 잉꼬부부가 되어 버렸어요.” 윌키가 말했다.

톰이 말했다.

“나도 경력이 제법 있는 솜씨라고요. 끙끙, 경력이 한 해 두 해가 아니지요. 감촉이 약간 돌아오는데? .

흙이 그의 앞으로 자꾸 파헤쳐졌다. 해는 이제 과일 나무들을 밝게 비쳤고 포도덩굴에 매달린 잎사귀들이 초록색 잎에 금빛 찬란한 햇빛을 받고 있었다. 여섯 자 가량을 파고 나서 톰은 한쪽 옆으로 비켜서서 이마를 닦았다. 윌키는 그의 뒤에서 팠다. 삽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길게 뻗어 가는 도랑가에 쌓아 놓은 흙더미가 높아졌다.

“나도 그 중앙위원회 얘기를 들어 보았는데, 아저씨도 위원 중 한 분이군요?” 톰이 말했다.

“그렇지요.” 티모시가 대답했다.

“그건 일종의 책임이오. 그 사람들 말이오, 다들 열성이더군. 또 캠프에 사는 사람들이 다들 잘 협조해 주기도 하고… 그 대지주 놈들이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그렇게 못살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정말 왜 그러는지 모르겠단 말이오.

톰이 도랑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윌키가 밖으로 비켜섰다.

톰이 말했다.

“아까 그이가 말하던 무도회 하는 날 벌어진다는 싸움은 어떻게 하지요. , 도대체 그 사람들은 왜 그 따위 연극을 꾸밀까요?

티모시가 말했다.

“우리가 무슨 조직체라도 만들까 봐서 겁이 나니까. 어쩌면 그 사람들 생각이 맞는 생각이오. 우리 캠프 자체가 일종의 조직체요. 거기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지키고 자율적으로 일을 해내고 있지요. 이 고장 근처에서도 제일 훌륭한 현악 밴드까지 있다오. 아주 어려운 사람들한테는 가게에서 다소 외상까지 해주지요. 5달러 정도의 식량은 얻어갈 수 있고, 그래도 캠프는 잘 운영되어 나가거든요. 우리는 여태까지 법률적인 문젯거리로 골치를 앓아본 적은 없었다오. 대농장주들은 바로 그게 겁이 난 거요. 그렇다고 우리를 함부로 감옥에 집어넣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겁이 난 거지요. 우리가 자치적으로 잘해 나가다보면 자기들이 무서워하는 다른 일까지도 잘해 나갈 줄로 아는 모양이오.

톰이 도랑에서 기어 나와 눈 위의 땀을 닦았다.

“저기 북쪽 베이커필드 근처에서 선동분자들이 어쩌고저쩌고 했다는 그 신문기사 얘기 들었잖아요?

“아, 그거요?” 윌키가 말했다.

“그 사람들이 심심하면 하는 수작이지요.

“그런데 내가 바로 거기에 있었지요. 선동분자고 무어고 아무것도 없었다오. 그 사람들은 대체 무엇보고 빨갱이라고 하는 거요. 빨갱이가 무어요?

티모시가 도랑 속의 작은 둔덕을 긁고 있었다. 태양이 하얀 후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빨갱이가 무언지 알고 싶은 사람이 많다오.” 그가 웃었다.

“우리 캠프에서 누군가 그걸 알아낸 사람이 있었지요.

그는 말을 하면서 퍼낸 흙더미를 삽으로 다독거렸다.

“하인즈라고 하는 놈이 있는데 한 3만 에이커의 땅에 복숭아, 포도 같은 것을 심어 놓고 또 거기에 통조림 공장하고 양조장까지 가진 놈입니다. 그 친구가 항상 입버릇처럼 그 빨갱이 타령만 했었지요. ‘그 죽일 놈의 빨갱이들이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다. 이 개새끼들을 우리나라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말이오. 그런데 서부로 건너온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사람 하나가 그 말을 듣고 있더니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하는 말이 ‘하인즈 씨, 저는 이쪽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빨갱이 놈들이 무업니까?’ 했더니, 그 하인즈란 자가 한다는 소리가 ‘그놈들은 25센트를 주면 30센트를 달라고 하는 놈들.’이라 했답니다. 그래 그 젊은이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또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그렇다면 하인즈 씨, 저는 개새끼는 아니지만 그런 것이 빨갱이라고 한다면, 저는 30센트를 받고 싶어 하니까 그리고 그건 누구나 다 그러니까, 그럼 우리는 다 빨갱이가 되는 겁니까?’ 하고 반문했다는군요.

티모시는 도랑 바닥을 따라 흙을 골랐다. 삽이 지나간 자리마다 단단한 흙이 햇빛에 반들거렸다.

톰이 웃었다. “그럼, 저도 그렇겠네요.

그의 곡괭이가 쳐들렸다가 아래로 찍혔고 흙이 깨어져 나갔다.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굴러 내려 코 옆으로 미끄러지더니 목덜미에서 반짝 빛났다.

“야, !” 그가 말했다.

“곡괭이는 참 좋은 연장이야. , 곡괭이하고 싸우지만 않으면 말이오. 끙끙, 사람하고 곡괭이하고 마음이 맞아서 살살 다루기만 하면 참 좋은 연장이지요. .

세 남자가 한 줄로 서서 일을 해 나갔다. 도랑이 길어졌고 아침나절의 햇살이 그들 위에 따갑게 내리쬐었다.

톰이 나가자 루시는 잠시 위생반의 문간 속을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그녀의 자랑을 들어주는 상대역이 되는 윈필드가 없을 때면 그녀는 용기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녀는 콘크리트 바닥 위에 한쪽 맨발을 올려놓다가 다시 물러섰다. 천막들이 늘어선 저쪽 아래에서 한 여자가 나오더니 양철 스토브에다 불을 피웠다. 루시가 그쪽으로 몇 발짝을 떼었다. 그러나 멀리 가지는 못했다. 그녀는 자기네 천막 문간 쪽으로 다가가서 안을 살폈다. 존 삼촌이 입을 벌린 채 목구멍에서 침이 쿨럭 거리는 소리로 코를 골면서 한쪽 옆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덧이불을 덮고 머리를 안쪽으로 대고 있었다. 천막의 앞쪽 가까이에 로자샤안과 윈필드가 누워 있었고 윈필드 바로 옆에는 자기가 누웠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삼베 같은 담황색을 띠고 있는 윈필드의 머리에 눈이 멎었다. 그렇게 쳐다보고 있노라니까 윈필드가 눈을 떠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아직 졸린 빛을 띠고 있었다. 루시는 손가락으로 입을 막고 다른 손으로 나오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윈필드는 눈을 굴려 로자샤안을 바라보았다. 불그스름하게 홍조를 띤 그녀의 얼굴이 윈필드 옆에 와있었고 입은 살짝 벌어져 있었다. 윈필드는 가만히 담요를 쳐들고 밖으로 빠져 나왔다. 천막 밖으로 미끄러져 나와서 루시와 합류했다.

“너 일어난 지 오래 됐니?” 그가 소곤거렸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를 이끌고 나가서 천막에서 멀어지자 말을 꺼냈다.

“나는 밤새도록 자지 않고 깨어 있었어.

“안 그래. 이 거짓말쟁이야.” 윈필드가 말했다.

“좋아, .” 그녀가 대들었다.

“내가 거짓말쟁이라면 난 너한테 아무것도 말 안 해줄 테야. 어떤 사람이 칼에 맞아서 죽은 것도, 또 곰이 한 마리 들어와서 어린애를 데려간 얘기도 다 안 해줄 거야.

“곰 같은 거 안 왔어.” 윈필드가 자신 없이 말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어 올리고 작업복 바짓가랑이 밑을 끌어내렸다.

“그래, 곰 같은 거 안 왔다 해도 좋아.” 그녀가 비꼬는 말투로 대들었다.

“또 카탈로그에서 본 것 같은 접시같이 생긴 거랑 하얗게 된 거랑 다 없었다고 해도 좋아.

윈필드가 심각한 얼굴이 되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위생반 쪽을 손가락질했다.

“저 안에?” 그가 물었다.

“난 거짓말쟁이니까, .” 루시가 말했다.

“너한테 얘기해 주어 봤자 소용없잖니?

“우리 같이 가볼래?” 윈필드가 말했다.

“난 벌써 갔다 왔어.” 루시가 말했다.

“난 앉아도 보고 또 들여다보기도 하고 그랬다.

“앉아 보지도 않고 들여다보지도 않았어, .” 윈필드는 좀처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위생반 건물 안에 들어갔다. 이제 루시는 용기가 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대담하게 건물 안에 성큼 들어섰다. 큰 방의 한쪽으로 변기가 줄을 지어 있었고 변기마다 그 앞에 문이 달려서 작은 칸막이가 되어 있었다. 변기가 하얗게 반들거렸다. 그 맞은편 쪽으로 벽에는 손 씻는 새면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또 출입구와 맞은편 벽으로 샤워 칸막이가 네 개 있었다.

“저것 봐.” 루시가 말했다.

“저게 화장실이야. 난 카탈로그에서 보았단 말이야.

아이들은 변기 쪽으로 가까이 가보았다. 루시는 갑자기 태연한 척 하면서 치마를 올리고 거기에 올라앉았다.

“내가 여기 와 보았다고 그랬잖아.” 그녀가 말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물통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났다. 윈필드는 당황했다. 그의 손이 변기 씻어 내리는 손잡이를 누른 것이다. 물이 쏴 하는 소리가 났다. 루시가 껑충 뛰어올라 멀리 달아났다. 그녀와 윈필드는 한가운데에 서서 변기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물이 씩씩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난 몰라, 네가 그랬어.” 루시가 말했다.

“네가 만져서 고장이 난 거야. 난 보았다니까.

“내가 안 했어. 정말이야.

“내가 보았는데?” 루시가 말했다.

“너는 뭐든 좋은 것은 그냥 놔두지 못해.

윈필드는 턱을 쑥 빠뜨렸다. 그는 루시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턱도 떨렸다. 루시가 순간적으로 후회했다.

“걱정 마, .” 그녀가 말했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할게. 그전부터 고장이 난 것처럼 하면 돼. 여기에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하자, ?

그녀는 그를 이끌고 건물 밖으로 빠져 나갔다.

산등성이를 핥고 넘어온 해가 이제 위생반 건물의 함석지붕 위를 비췄고, 회색빛 천막과 줄지어 있는 샛길을 비추었다. 캠프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석유 깡통과 쇠붙이 조각으로 만든 스토브마다 불이 피워지고 있었다. 연기 냄새가 공중이 퍼져 올랐다. 여남은 천막들의 포장이 걷히고 사람들이 천막 사이의 길에 나와 서성거렸다. 조드네 천막 앞에는 어머니가 서서 길을 위아래로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보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난 또 걱정을 했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너희가 어딜 갔는가 하고.

“구경 좀 했어.” 루시가 말했다.

“그런데 큰 오빠는 어딜 갔니? 너 보았니?

루시가 제법 거드름을 피웠다.

“그럼, 내가 알아. 큰 오빠가 나를 깨워 엄마보고 얘기하랬어.

그녀는 일단 말을 멈추고 자신의 대견스러운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래, 어떻게 됐니?” 어머니가 추궁했다.

“엄마보고 얘기하랬어.

그녀는 말을 멈추고 윈필드가 자기의 이 대견스러운 역할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어떤지를 살폈다. 어머니가 손등을 루시 쪽으로 하고 손을 치켜들었다.

“그래, 어떻게 됐니?

“큰 오빠는 일거리가 생겼대.” 루시가 얼른 말했다.

“일하러 간댔어.

그녀는 치켜들고 있는 어머니의 손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그 손이 도로 내려오더니 루시의 어깨를 껴안더니 다시 놓았다. 루시는 당황해서 땅바닥을 내려다보더니 화제를 바꾸었다.

“엄마, 저기에 화장실이 있어. 하얀 거야.

“너, 거기 갔다 왔니?” 어머니가 물었다.

“나하고 윈필드하고.

그러더니 그녀는 조금 전의 약속을 배반하고 말했다.

“윈필드가 변기를 고장 냈어.

윈필드는 시뻘게졌다. 그는 루시한테 눈을 흘겼다.

“누나도 들여다보았어.” 그도 심통이 나서 일렀다.

어머니는 걱정이 되었다.

“얘들이 무슨 짓을 했나? 어디 가보자.

그녀는 애들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했니?

루시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서 씩씩거리고 쏴 하는 소리가 났어. 지금은 안 나지만.

“너희들이 어떻게 했는지 엄마한테 말해 봐.” 어머니가 추궁했다.

윈필드가 할 수 없이 변기 쪽으로 갔다.

“난 힘껏 누르지 않았어. 여기 이걸 좀 만져 봤을 뿐이야.” 그가 말했다.

물이 다시 쏴아 하는 소리를 내자 그는 펄쩍 뛰어 달아났다. 어머니는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웃었다. 두 아이는 골이 잔뜩 난 눈초리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건 원래 이렇게 사용하는 거다.” 어머니가 말했다.

“엄마는 전에도 이걸 본 적이 있다. 변을 다보고 나면 이걸 누르는 거다. 알았니?

그런 것도 몰랐다는 수치감은, 애들로서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컸다. 그들은 문밖으로 나가 천막 사이의 길에 서서, 어떤 식구 많은 직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그들이 나가는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다가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녀는 샤워 칸막이에 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세면대에 가서 하얀 자기로 된 세면기를 손으로 쓰다듬기도 했다. 물을 조금 틀어 놓고 손을 대고 있다 물이 뜨거워지자 얼른 손을 뺐다. 한참 동안 세면대를 쳐다보다 꼭지를 돌려 더운물과 찬물을 각각 조금씩 틀어 세면기를 채웠다. 그러고 나서 뜨뜻한 물로 끼얹고 있는데 뒤에서 콘크리트 바닥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한 남자가 정말 놀랐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서있었다.

그가 거칠게 말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죠?

어머니는 숨을 참고 섰다. 물이 턱 아래로 흘러 옷을 적시고 있는 것을 느꼈다.

“저, 잘 몰랐는데요.” 그녀가 변명하듯 말했다.

“저는 여기가 우리 입주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곳인 줄 알았지요.

나이 든 남자는 그녀를 보며 상을 찡그렸다.

“여기는 남자용이오.” 그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는 문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문에 붙은 ‘남자용’이라는 표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것 보세요. 이걸 못 보셨나요?

“예, 못 보았어요.” 어머니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제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없나요?

남자의 노여움이 가셨다.

“아주머니는 지금 막 들어오셨습니까?

그가 좀 더 친절한 어조로 물었다.

“한밤중에 들어왔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럼 아직 위원회 사람들과 만나 보지 못하셨군요?

“무슨 위원회인가요?

“아, 부인위원회지요.

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위원회에서 곧 아주머니를 찾아가서 모든 것을 안내해 줄 겁니다. 새로 들어오신 분들을 돌보아 드리게 되어 있지요. 부인용 화장실에 가시려면 이 건물의 맞은편으로 가시면 됩니다. 저쪽으로.

어머니가 불안하게 물었다.

“부인위원회에서 저희 천막에 오신다는 말씀이에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곧 갈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거의 뛰다시피 해서 천막으로 돌아왔다.

“여보.” 그녀가 불렀다.

“그리고 서방님, 어서 일어나요. , , 너도 일어나서 세수해라.

아직 졸음이 채 가시지 않은 눈을 한 가족들이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다들 일어나세요. 얼른 일어나서 세수도 하고 머리도 빗어요.

존 삼촌은 안색이 창백한 게 몸이 안 좋아 보였다. 그의 턱에는 불그스름하게 타박상 자국이 나있었다.

아버지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위원회 사람들이 온대요.” 그녀가 소리쳤다.

“위원회가 있대요. 부인위원회에서 우리 천막에 찾아온대요. 어서 일어나서 세수하세요. 그리고 다들 코를 골고 자고 있는 사이에 톰은 일을 나갔어요. , 이제 일어나세요.

그들은 졸린 듯 천막 밖으로 나왔다. 존 삼촌은 약간 비틀거렸고 그의 얼굴로 보아 좀 아픈 모양이었다.

“저쪽 건물에 들어가서 세수를 하세요.” 어머니가 지시했다.

“어서들 아침을 먹고 위원회 사람들을 기다려야 해요.

그녀는 캠프장 한쪽에 쌓여 있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워 불을 피우고 아침 끓일 것을 올려놓았다.

“그렇지, 옥수수빵하고.”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옥수수빵하고 고깃국물, 그게 빠르겠다. 빨리 해야겠다.” 그녀는 계속 중얼거렸다.

루시와 윈필드가 의아스런 표정을 짓고 옆에 지켜서 있었다.

아침밥을 짓는 연기가 캠프장에 온통 피어오르고 사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로자샤안은 헝클어진 머리를 빗질도 하지 않은 채 졸음 가득 찬 눈으로 천막을 기어 나왔다. 어머니는 옥수수 알을 손바닥으로 되어 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딸의 헝클어진 머리와 쭈글쭈글 구겨진 옷에 눈이 갔다.

“너도 빨리 깔끔하게 하고 나서라.” 그녀가 매섭게 말했다.

“바로 가서 세수를 하고 와. 너 그 새 옷 있잖니? 내가 빨아 두었다. 머리도 좀 빗고. 눈 속의 졸음 좀 좇아버려.

어머니는 자못 흥분해 있었다.

로자샤안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몸이 안 좋아요. 코니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코니가 안 오면 아무것도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아요.

어머니가 정면에서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노란 옥수수알들이 그녀의 손과 손목에 다닥다닥 붙었다.

“얘, 로자샤안!” 그녀가 엄격하게 말했다.

“바로 일어나지 못하겠니? 너도 참 어린애같이 보채는구나. 이제 곧 부인위원회에서 온다고 했어. 그 사람들이 왔을 때 가족들이 이렇게 지저분한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몸이 안 좋은데 어떻게 해요?

어머니가 그녀 앞으로 다가서더니 옥수수가 묻은 손을 뻗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자기 기분을 자기 혼자만 속에 넣어 두어야 할 때가 얼마든지 있는 거야.

“막 토할 것 같아, 엄마.” 로자샤안이 우리 소리를 냈다.

“그래 가서 토해라. 입덧이 심할 때에는 다 그런 거다. 누구나 다 토하는 거야. 찬찬히 가다듬고 좀 깔끔하게 해봐. 발도 깨끗이 씻고 네 그 구두를 신어라. 머리도 얌전하게 땋고.

그녀는 하던 일로 돌아갔다.

기름이 담긴 프라이팬이 불 위에서 지글거렸다. 그녀가 옥수수빵 반죽을 손가락으로 떠 넣자 기름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녀는 냄비 속에 기름과 밀가루를 반죽해서 거기에 물과 소금을 치고 고깃국물을 저었다. 깡통 속에서 커피가 끓기 시작하더니 커피 냄새가 온통 진동했다.

아버지가 위생반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돌아오자 어머니가 고개를 들어 그를 찬찬히 살폈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여보, 톰이 일자리를 얻었다 했소?

“아, 그렇다니까요. 식구들이 다 일어나기도 전에 나갔어요. 당신도 저 상자 안에서 깨끗한 작업복이나 하나 찾아 입으세요. 그리고 여보, 내가 너무 바빠서 꼼짝도 못 하겠으니까 루시하고 윈필드하고 데려가서 귀때기하고 모가지 좀 씻어 주세요. 아주 새빨갛게 되도록 뽀독뽀독 씻으세요.

“당신, 왜 이렇게 설쳐대는 거야.

어머니가 소리쳤다.

“인제 우리 가족도 좀 체면을 차려야 해요. 그동안에는 먼 길 오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지만 인제는 좀 깔끔하게 하고 살아야지요. 당신도 때 묻은 작업복일랑 천막 속에 벗어 던지세요. 깨끗하게 빨아 놓을 테니.

아버지는 천막에 들어가더니 푸르스름하게 색이 바랜 빨아놓은 작업복에 셔츠를 입고 나왔다. 그러더니 놀라 어리둥절해 하는 어린애들을 억지로 끌고 위생반 건물로 갔다.

그들 뒤에다 대고 어머니가 소리쳤다.

“귀때기 뒤를 뽀독뽀독 씻으세요.

존 삼촌이 남자용 화장실 문간에 나와 밖을 내다보더니 다시 들어갔다. 그는 오랫동안 변기 위에 앉아 골치가 아픈지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어머니는 프라이팬 가득 부풀어 오른 옥수수빵을 들어내고 기름 속에 새로 도넛 만들 반죽을 숟가락으로 떠 넣고 있었다. 그때 한 그림자가 떨어졌다. 그녀는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하얀 옷을 입은 한 작은 남자가 그녀 뒤에 서있었다. 바싹 야윈 갈색 얼굴에 주름이 쭈글쭈글했고 명량해 보이는 눈매를 하고 있었다. 뱁새처럼 마른 사람이었다. 그의 하얀 옷은 깨끗했지만 모서리의 박은 자리는 닳아서 해져 있었다. 그가 어머니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머니는 그의 하얀 옷을 쳐다보며 의구심으로 얼굴이 굳어졌다.

“안녕하세요?” 그녀도 인사를 했다.

“조드 부인이십니까?

“예.

“저는 짐 로울리란 사람입니다. 여기 캠프 관리책임자지요. 혹시 불편하신 점 없으신지 해서 들렀습니다. 필요한 건 다 있으신가요?

어머니는 여전히 그를 수상쩍게 뜯어보았다.

“예, 대개 다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로울리가 말했다.

“어젯밤 들어오실 때 저는 자고 있었습니다. 마침 빈자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군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어머니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주 좋군요. 특히 그 빨래통이 훌륭하던데요.

“부인이 빨래를 하러 나갈 때 보십시오. 이제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그런 광경은 못 보셨을 겁니다. 꼭 무슨 회의를 하는 것 같더군요. 조드 부인, 어저께는 어떻게 한지 아세요? 거기에서 모두 합창을 했지 뭡니까. 찬송가를 부르면서 모두 박자에 맞추어 빨래를 비비더군요. 정말로 볼 만 했습니다.

어머니 얼굴에서 의심이 사르라져 갔다.

“참 재미있었겠네요. 선생님이 총 책임자세요?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여기서 사는 분들이 저를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답니다. 자기들 스스로 캠프를 깨끗이 유지하고 질서를 지키고 모든 것을 알아서 해버리는군요. 그런 사람들은 처음 보았습니다. 또 공회당에 모여 의복도 만들고 장남감도 만들어 내지요. 그런 사람들은 정말 처음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자기가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린 아직 빨래도 못 했어요. 차를 타고 오느라 깨끗하게 할 수가 없더군요.

“그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는 말하면서 코를 킁킁거려 냄새를 맡았다.

“그런데 이 구수한 커피 냄새, 아주머니네 건가요.

어머니가 웃었다.

“예, 냄새가 참 좋지요? 밖에서 맡으면 커피는 냄새가 더 좋은가 봐요.

그러면서 그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선생님이 저희 식구들하고 같이 조반이라도 해주시면 참 영광스럽겠어요.

그는 불가에 다가와 쭈그리고 앉았다. 이제 어머니의 저항감은 싹 가셔 버렸다.

“같이 좀 잡수세요. 별로 좋은 것은 없지만 같이 들어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작은 남자가 그녀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저는 아침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커피는 한 잔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냄새가 너무 좋군요.

“예, 그러세요.

“천천히 하십시오.

어머니는 깡통의 커피를 양철 컵에다 따랐다.

“우리는 아직 설탕도 못 구했어요. 오늘 나가 좀 구해야겠어요. 설탕을 좋아하시면 이건 맛이 없으실 텐데요.

“설탕은 필요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설탕을 타면 커피 맛이 없어지지요.

“저는 조금 타는데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그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자기와 가까워질 수 있었는지 의아스러운 생각마저 들어, 갑자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그에게 무슨 딴 뜻이라도 있지 않나 했으나 그의 얼굴에는 그저 친절한 표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하얀 저고리의 안단이 닳아서 해져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더욱 안심이 되었다.

그는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부인위원회에서 오늘 아침 댁에 찾아 올 겁니다.

“우린 아직 옷도 빨아 입지 못했는데요.” 그녀가 말했다.

“옷이나 좀 빨아 입을 때까지는 오시지 말아야 할 텐데요.

“그런 건 다 피차 아는 사정 아닙니까?” 관리책임자가 말했다.

“그들도 다 들어올 때는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상관없습니다. 여기 캠프의 위원들은 다 좋은 분들이지요. 그런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답니다.

그는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일어섰다.

“그럼, 또 가봐야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저쪽 사무실로 건너오십시오. 저는 늘 거기에 있습니다. 커피 참 잘 먹었습니다.

그는 상자 위에 다른 컵과 나란히 컵을 놓고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천막을 따라 걸어내려 갔다. 어머니는 그가 지나가면서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서서 어쩐지 울고 싶은 생각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아버지가 애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귀를 너무 싹싹 문질렀는지 애들 눈은 아직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애들은 얌전해져서 뽀얗게 씻은 얼굴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윈필드 콧잔등은 햇볕에 그을어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이것 봐, 여기에 때 가죽이 두 겹은 덮여 있더군. 아프다고 어떻게나 아우성치는지 매를 좀 맞았지.

어머니가 애들을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깨끗한데요. 옥수수빵하고 고깃국하고 잡수세요. 어서어서 좀 치우고 천막 속도 정돈해야겠어요.

아버지가 애들 접시와 자기 것을 챙겨 놓았다.

“톰 녀석이 어디에 일자리를 얻었는지 모르겠군.

“글쎄요.

“그 녀석이 얻었으면 우리도 구할 수 있겠지.

앨이 흥분해서 천막으로 달려왔다.

“야! 참 희한한 곳이야!

그는 말하면서 제 음식을 갖다 먹고 커피를 따라 마셨다.

“어떤 사람이 저쪽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아세요? 트레일러에 집을 짓고 있어요. 바로 저쪽에. 저 천막 뒤에. 그 안에 침대도 있고 스토브도 있고 무어든지 다 들어 있어요. 그 안에서 그대로 사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참 편리하겠던데요. 아무데나 차를 세우면 거기서 그대로 살 수가 있겠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조그만 거라도 집이 좋겠다. 조금만 형편이 피면 바로 작은 집 한 칸 마련했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말했다.

“얘, . 우리 아침밥 먹고 나서 너하고 나하고 존 삼촌하고 트럭을 타고 나가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럼요.” 앨이 말했다.

“나는 차고 같은 데 취직을 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자동차 일이 재미가 있어요. 그래서 반 토막짜리 고물이라도 포드를 한 대 구해서 노란 페인트를 싹 발라 막 신나게 몰고 다닐 거예요. 저쪽 길 아래에서 아주 예쁜 아가씨를 보았어요. 그 아가씨한테 윙크를 한번 해주어야겠어요. 말도 못 하게 예뻐요.

아버지가 엄하게 말했다.

“야, 이놈아, 계집애 뒤꽁무니만 따라다닐 생각 말고 일자리부터 구해야 한다.

존 삼촌이 화장실에서 나오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어머니가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세수도 안하셨군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몹시 아프고 마음이 편치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서 천막에 들어가 좀 누우세요. 아주 안 좋으신가 봐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죄지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벌을 받아야 해요.

그는 불안한 태도로 쭈그리고 앉더니 커피를 따랐다.

어머니는 프라이팬에 남은 옥수수빵을 집어내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냈다.

“여기 캠프 관리책임자가 와서 여기에 앉아 커피를 들고 갔어요.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 무엇 때문에 벌써 들락거려?

“그냥 잠깐 들렀어요.” 어머니가 명랑하게 말했다.

“잠깐 앉아서 커피만 마시고 갔어요. 그렇게 맛이 있는 커피를 먹어 보기 어렵다면서 우리 커피 냄새를 맡던데요?

“무엇 때문에 왔대?

“아무 용무 없이 그저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나 보러 온 거예요.

“그럴 리가 없는데.” 아버지가 말했다.

“그 친구는 아마 무슨 낌새라도 엿보려고 냄새를 맡으러 온 거야.

“안 그렇다니까 그래요.” 어머니는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

“저도 냄새 맡으러 온 사람쯤은 당신보다 잘 알아요.

아버지는 커피 잔에 남은 찌꺼기를 땅에 뿌렸다.

“당신 인제 그런 것도 버리지 마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여기는 아주 청결한 곳이에요.

“제기랄, 그러다가는 너무 청결해 아무도 못 들어와 살겠네.” 아버지가 심통 나서 말했다.

“얘, , 빨리해라. 일자리를 구하러 나가 보자.

앨은 손으로 입을 닦으면서 말했다.

“다 됐어요.

아버지가 존 삼촌 쪽으로 돌아섰다.

“같이 나가겠어?

“응, 나가야지.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가야겠어.

앨이 트럭에 탔다.

“휘발유를 넣어야겠는데.” 그는 말하면서 시동을 걸었다.

아버지와 존 삼촌이 앨 옆에 올라타자 트럭은 길을 따라 굴러갔다. 어머니가 그들이 떠나는 뒤를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양동이를 집어 들고 위생반 건물의 빨래터에 갔다. 그녀는 양동이에 더운물을 담아 천막으로 돌아왔다. 양동이 안에 접시들을 집어넣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로자샤안이 돌아왔다.

“너 먹을 것 쟁반에다 차려 놓았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딸의 기색을 찬찬히 살폈다.

로자샤안의 잘 빗어 올린 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피부가 불그스름하게 홍조를 띠어 밝아 보였다. 조그맣고 하얀 꽃무늬가 아로새겨져 있는 파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발에는 결혼 때에 신었던 굽 높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어머니의 시선을 받으며 그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너 목욕했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로자샤안이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기에 가 있었더니 웬 여자가 와서 목욕을 했어요. 그거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조그마한 칸막이 안에 들어가면 손잡이 같은 것이 있는데 그걸 틀면 물이 좌르르 쏟아져 나와요. 더운 물이든 찬물이든 마음대로 틀 수 있어요. 그래서 나도 했어요.

“나도 가서 해야겠다.” 어머니가 말했다.

“여기만 다 치우고 나도 바로 가야겠는데 어떻게 하는 건지 네가 좀 가르쳐다오.

“나는 매일 할래요.” 딸이 말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나를 보고, 또 내 배가 부른 것을 보더니 무어라 한 줄 아세요. 여기에 매주 한 번씩 오는 간호사가 있대요. 나도 그 간호사를 한번 만나 볼래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아기가 튼튼해지는지 알려 준대요. 여기 있는 여자들은 다 간호사한테 진찰을 받는대요. 그래서 나도 해볼래요.” 딸 입에서 말이 줄줄 흘러 나왔다.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지난주에는 어떤 천막에서 어린애를 낳았대요. 그래서 캠프촌 전체가 온통 잔치를 했대요. 사람들이 옷도 갖다 주고 어린애한테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오고 어떤 집에서는 유모차까지 보냈대요. 고급 버드나무 가지로 엮어서 만든 거래요. 또 어린애한테 이름도 지어 주고 케이크도 해주었대요. 정말 재미있었겠어요.”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흥분을 가라 앉혔다.

어머니가 말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 틈에서 살게 되어 마음이 한결 편하구나. 나 목욕 좀 하고 오마.

“정말 훌륭해요.” 딸이 말했다.

어머니는 양철 접시들을 닦아 한쪽에 쌓았다.

그녀가 말했다.

“우린 조드네 집안이다. 우리가 벌벌 떠는 사람이 어디 있니? 할아버지도 보아라. 독립전쟁에도 당당히 참가하시지 않았니? 우리도 빚을 지기 전까지는 땅마지기나 짓던 어엿한 농촌 집안이었는데. 그런데 그놈들이 닥쳐오지 않았니? 그놈들이 우리에게 엉뚱한 짓을 한 거다. 그놈들이 올 때마다 나는 꼭 매를 맞는 것 같더구나. 우리 모두가 말이다. 그리고 니들즈에서도 그 경찰관 놈 말이다. 그놈도 나한테 얄궂은 짓을 했어. 아주 괘씸한 생각이 들게 해놓았단 말이다. 사람한테 창피한 생각을 가지게 하고 말이다. 이제 난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다. 다 진짜 동족들이다. 그리고 그 관리책임자, 그 사람도 찾아와서 여기에 쭈그리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가지 않았니. 그 사람은 ‘조드 부인, 이건 이렇고, 조드 부인, 저건 저렇고, 지내시기에 불편하신 점이 없으시냐?’고도 하고 ‘조드 부인’하면서 얼마나 자상하게 해주니?

그녀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나도 다시 사람이 된 것 같구나.

그녀는 마지막 접시를 챙겨 올려놓았다. 그녀는 천막 속에 들어가더니 옷상자를 뒤져 신발과 깨끗한 옷을 꺼냈다. 또 자기 귀걸이를 싼 작은 종이쌈지를 찾아냈다.

그리고 로자샤안 옆을 지나가면서 말했다.

“얘, 그 부인위원들이 오거든 내가 곧 올 거라 해라.

그녀는 위생반 건물 옆을 돌아 사라졌다.

로자샤안은 상자 위에 뒤뚱거리는 몸을 내려놓고 결혼식 때 신었던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까만 에나멜가죽에 나비 모양의 리본이 멋지게 붙어 있었다. 몸을 아래로 구부리자 옷매무새를 여기저기 만져 보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혼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길 건너 쪽에서 한 뚱뚱한 여자가 사과 상자에 빨랫감을 잔뜩 담아 가지고 빨래통 쪽으로 걸어갔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서 거무스름했고 좀 사나워 보이는 눈매가 아주 새까만 색깔이었다. 무명 포대를 잘라 만든 큼직한 앞치마를 깅엄 무명 드레스 위에 걸치고 있었고 남자 신발같이 생긴 갈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녀는 로자샤안이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면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렇군!” 그녀는 소리를 지르더니 명랑하게 웃었다.

“그 안에 무어가 들어 있을까요?

로자샤안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땅에 깔았다. 가만 고개를 들고 보니 여자의 까만 눈이 아직 자기를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로자샤안이 어물어물 대답했다.

여자는 사과상자를 땅에 내려놓았다.

“살아 있는 혹이 하나 달렸군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즐거운 암탉처럼 웃어댔다.

“어느 쪽을 더 원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아마 아들 같아요. 틀림없이 아들일 거예요.

“색시는 지금 막 들어왔구려. 그렇지요?

“간밤에 왔어요. 아주 늦게.

“여기에 더 있을 거죠?

“저는 모르겠어요. 일자리를 얻으면 그냥 있어야지요.

한 가닥 그림자가 여자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더니 그 까만 눈매가 더욱 사나워졌다.

“일자리만 얻으면, 그건 우리 누구나가 다 하는 소리라오.

“우리 오빠는 오늘 아침에 벌써 일자리를 구했어요.

“그래요? 아마 운이 좋았던 게죠. 운만 기대하고 있으면 운이 안 붙지요.

그러면서 그녀는 바싹 다가섰다.

“사람은 누구나 꼭 한 가지 운을 얻을 수 있어요. 다른 운은 더 얻지 못하는 거죠. 아주 착한 색시가 되어야 해요.” 그 여자는 아주 사나운 어조로 말했다.

“착한 색시가 되시오. 만약 죄를 짓게 되면 그 뱃속에 든 어린애를 조심해야 해요.

여자는 로자샤안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 캠프에서도 망측한 일들이 있다오.” 그녀가 음침하게 말했다.

“토요일 밤마다 무도회가 있는데 스퀘어 댄스만 하는 게 아니고 아주 꼭 껴안고 돌아가는 짓들을 한다오. 나도 보았지만.

로자샤안이 경계하는 어조로 말했다.

“저도 춤을 좋아해요. 스퀘어 댄스를 잘 추어요. 다른 춤은 못 추어 봤지만.

그 거무스름한 여자가 음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그 망측한 춤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느님께서는 그런 것을 다 보고 계시지요. 못 보신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요.

“그럼요, 아주머니.” 그녀가 가만 대답했다.

여자는 거무스름한 주름진 한쪽 손을 로자샤안의 무릎에 위에 얹었다. 그녀의 손이 닿자 로자샤안이 움찔했다.

“자, 내가 한 가지 주의를 해주지요. 여기엔 예수를 정말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졌다오. 매주 토요일 밤만 되면 현악단 연주가 시작되고 다들 찬송가를 불러야 할 시간에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니까, 글쎄? 나는 그걸 보고 그 근처에는 절대 안 가요. 또 내 식구들도 거기엔 얼씬도 못하게 하지요. 꼭꼭 껴안고만 있으니 참 망측하기도 하지.

여자는 말에 힘을 주느라고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그뿐 아니라오. 이제는 연극까지 하더라고요.

그녀는 약간 뒤로 물러나면서 자기가 한 그런 애기를 로자샤안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배우들 말예요?” 색시가 놀라며 물었다.

“아니지!” 여자가 소리쳤다.

“벌써 지옥에 떨어져 버린 그런 딴따라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같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요. 우리 같은 족속들이 말이요.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까지 끼어 있고, 애들한테 어울리지도 않는 역을 시키고 있단 말이오. 나는 근처에도 안 갔지만 그런 짓들을 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인제 이 캠프에도 마귀들이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게 되었나 보군 그래.

로자샤안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에, 글쎄. 나는 그게 좋다거나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오. 아기 예수 연극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좋은 사람도 많아요. 하지만 나는 내 발로 나서서 그것이 좋다 하고 싶지는 않아요. 더군다나 여기서 하는 것은 아기 예수 연극도 아니고 그건 몽땅 거짓이고 죄악이고 마귀들의 장난이라오. 또 자기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것처럼 둔갑해 활개치고 다니고 행렬을 하고 떠들어대고 그것도 모자라 춤까지 추고 마구 껴안고 난장판을 벌이니 말이에요.

로자샤안이 한숨을 흘렸다.

“그게 어디 한두 사람이어야 말이지.” 거무스름한 여자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믿음이 깊고 양같이 순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은 이제 발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돼요.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눈을 가릴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아야지.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들의 죄를 하나하나 다 적어 두시고 조목조목 다 따지고 계시니까. 하느님도 다보고 계시지만 나도 다보고 있다오. 하느님은 그래서 벌써 두 사람을 내쫓아 버리셨지요.

로자샤안이 탄성을 발했다.

“그래요?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격렬한 도를 더해 갔다.

“내가 보았다오. 꼭 색시처럼 어린애를 가진 여자가 딴따라같이 연극을 하고 사내하고 껴안고 춤도 추는 것을. 그러더니…”

여자의 목소리는 더욱 사납고 불길한 음조를 띠었다.

“그 여자는 점점 말라가서 나중에는 가죽만 남게 되어 어린애를 유산하고 말더라고요.

“어머나!

로자샤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죽어서 핏덩어리가 나왔지요. 물론 그 여자한테 더 이상 말 한 마디 해주는 사람도 없고 그 여자는 다른 데로 떠나 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죄는 지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그런데 똑같은 일을 저지른 사람이 또 하나 있었지요. 그 여자도 피골이 상접하도록 말라 가더니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하룻밤은 그 여자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지요. 그러다 이틀 만에 다시 돌아왔어요. 누구를 찾아갔다 왔다더군요. 근데 불렀던 배가 푹 꺼져 버렸다니까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생각했느냐면 말이에요, 그 관리책임자 있지요? 그 사람이 여자를 데려가서 어린애를 떼게 했어요. 그 남자는 죄 같은 것은 믿지도 않는 사람이니까요. 자기 말로 나한테 그러는데요. , 죄는 다른 게 죄가 아니고 배고픈 게 죄래요. 추운 게 죄고, 색시한테 하는 말이지만 그 사람이 나보고 하는 말이 그런 일에서 자기는 아무 하느님도 찾을 수 없대요, 글쎄. 아까 그 여자들도 못 먹어 말라 버렸다나요. 그래 내가 그 남자에게 한번 호되게 해주었지요.

여자는 벌떡 일어서서 뒤로 물러섰다. 여자 눈매가 다시 사나워지면서 뻣뻣한 손가락으로 로자샤안의 얼굴 쪽을 가리켰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물러가라!’ 막 소리를 쳤지요. ‘나도 이 캠프에 마귀가 활개를 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 마귀가 누군지 인제 알겠소. 당신은 사탄이야, 물러가!’ 그랬더니 정말 그 남자는 물러가더군요. 벌벌 떨고 꽁무니 빼며 하는 말이 ‘제발, 제발 여기 사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불행이라고? 그럼 그 사람들 영혼은 어떻게 되라고? 그리고 그 뱃속에서 죽은 아기들과 딴따라 놀이를 하다가 스스로 멸망하고 만 그 불쌍한 죄인들은 다 어떻게 하라고?’ 그랬더니 그 사람은 그저 쳐다보고만 있다가 죄악에 병든 어두운 웃음만 남기고 달아나 버렸지요. 그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진짜로 증언하는 사람들을 만났던 셈이지요. 내가 그랬다니까요. ‘나는 예수님을 도와서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소. 그러니까 당신이나 다른 죄인들이나 다 도망갈 구멍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오.’”

여자는 더러운 빨래 상자를 땅바닥에서 집어 들었다.

“내가 경고했지만 색시도 주의해요. 뱃속에 있는 불쌍한 어린 것을 생각해서 죄를 짓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돼요.

그러더니 여자는 거창한 걸음걸이로 활보를 하며 걸어갔고 눈에는 믿음이 넘쳐 빛을 발하고 있었다.

로자샤안은 그녀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머리를 두 손에 파묻고 손바닥에 대고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며 우는 소리를 냈다. 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 옆에서 들렸다. 그녀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쳐들었다. 바로 그 조그마한 흰 옷을 입은 관리책임자였다.

“걱정 말아요, 색시.” 그가 말했다.

“아무 걱정 말아요.

그녀는 눈물이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도 했어요. 남자와 껴안고 춤을 추었어요. 그 여자한테는 말을 안 했지만 저도 샐리소에서 했어요. 코니하고 말예요.” 그녀가 울부짖었다.

“괜찮다니까 그래요.” 그가 말했다.

“그 여자는 제가 유산할 거래요.

“그 여자는 그런 사람이지요. 그래서 나는 늘 그 여자가 하고 다니는 짓을 살피고 있어요. 그 여자는 좋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지요.

로자샤안은 젖은 코를 훌쩍거렸다.

“그 여자는 색시 둘이 이 캠프에서 유산한 것을 알고 있어요.

관리책임자가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거 보세요!” 그가 말했다.

“내 말 좀 들어 보세요, 색시. 나도 그 색시들을 알지요. 그 색시들은 너무 피로하고 너무 배가 고팠어요. 일도 너무 많이 하고 또 털털거리는 트럭을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너무 돌아 다녔어요. 그러다 결국 병에 걸려 버렸지요. 그들 잘못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아까 그 여자가 그러는데…”

“걱정 말라니까요. 그 여자는 사람들한테 그런 걱정거리를 만들어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아저씨보고도 마귀라고 하던데요?

“그러는 줄도 알아요. 그건 내가 그 여자한테 그런 짓을 못하게 하기 때문이지요. 그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예요.

그러더니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버렸다.

로자샤안은 그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깨가 흔들거렸다. 아직 그 남자의 야윈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어머니가 돌아왔다. 깨끗해진 얼굴이 불그스름하고 곱게 빗어 올린 머리가 아직도 축축한 채 하나로 동여 매여져 있었다. 무늬가 있는 드레스를 걸치고 갈라진 낡은 구두를 신고 귀에 작은 귀걸이까지 매달고 있었다.

“나도 했다.” 그녀가 말했다.

“거기 들어가서 뜨뜻한 물을 틀어놓고 실컷 뒤집어썼다. 어떤 여자가 그러는데, 하고 싶은 사람은 매일 매일 가서 할 수 있다더라. 그런데 그 부인위원회에서는 벌써 다녀갔니?

“아뇨!” 딸이 말했다.

“그래, 넌 마냥 퍼질러 앉아 무엇 하나 치우지도 않았구나?” 어머니는 양철접시들을 치우면서 말했다.

“어서 좀 치워야겠다. , 어서! 자루도 치우고 땅바닥도 한 번 쓸어라.

그녀는 연장들을 주워 챙기고 프라이팬을 상자에 담아서 상자를 천막 안에 들여놓았다.

“침대도 좀 반듯하게 해라.” 그녀가 명령했다.

“난 그 뜨뜻한 샤워 물 같이 신기한 건 못 보았다.

로자샤안은 맥없이 어머니의 명령만 따랐다.

“어머니, 코니가 오늘은 올까요?

“글쎄, 올지도 모르고 안 올지도 모르지. 그걸 어떻게 알겠니?

“어디로 찾아와야 할 지 틀림없이 알고 있을까요?

“그야 알고 있지.

“어머니, 혹시 사람들이 천막들을 불태울 때 코니를 죽이지는 않았을까요?

“그 사람은 안 죽었다.” 어머니는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 사람은 아무 때나 자기 떠나고 싶으면 아무데로나 떠날 수 있다. 꼭 토끼처럼 민첩하고 여우처럼 약으니까.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올 때가 되면 올 거다.

“어머니…”

“어서 일이나 해라.

“어머니, 춤을 추고 연극을 하고 하면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린애를 유산하게 되는 거예요?

어머니는 일손을 멈추고 두 손을 엉덩이 위로 가져갔다.

“그런데 너 그건 무슨 소리냐? 너는 연극 같은 건 안 했잖니?

“여기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했대요. 그래서 한 여자가 어린애를 사산했대요. 꼭 무슨 심판이라도 받은 것처럼 어린애를 핏덩어리로 쏟아 버렸나 봐요.

어머니가 딸을 노려보았다.

“누가 그 따위 소리를 하던?

“지나가던 웬 여자가 그랬는데, 또 하얀 옷 입은 자그만 남자가 와서 그렇지 않다고 하고 갔어요.

어머니는 상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얘, 로자샤안, 너 인제 제발 그 성질 좀 작작 부리려무나. 제 성질을 달달 볶아서 억지로 울고 싶어서 그러니? 너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겠구나. 우리 집안에 어디 그런 사람이 있었니? 무슨 일이 닥쳐도 그저 태연하게 처리하는 게 우리 집안 내력이다. 아마 코니 그 사람이 너한테 쓸데없는 말을 지껄여서 그런 게로구나. 그 사람은 작업복을 입은 주제에 너무 허영만 세더라.

그러더니 그녀는 엄하게 말했다.

“얘, 로자샤안, 너도 하나의 인간이고 또 인간들은 너 말고도 얼마든지 많다. 너는 네 위치를 알아야 한다. 나도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만 세상에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죄를 뒤집어씌워 나중에는 자기 자신이 하느님이 보기에 아주 몹쓸 인간인 것처럼 망상에 빠져 버리는 사람도 있더라.

“그래도 어머니…”

“아니다. 아무 소리 말고 어서 일이나 해라. 너는 하느님이 걱정만 할 만큼 그렇게 큰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비천한 사람도 아니다. 자꾸 이렇게 성질을 부리고 쫑알거리면 내 손으로 그 주둥아리를 틀어막아 줄 테다.

그녀는 불 아궁이 속에 재를 쓸어 넣고 아궁이 가장자리에서 돌멩이들을 치웠다. 길 저쪽에서 위원회 사람들이 오는 것이 보였다.

“어서 일이나 해라. 저기 부인회 위원들이 온다. 빨리 일이나 해라. 그래야 나도 딸 자랑을 할 게 아니냐.”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다시 들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이 부인위원회 사람들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부인 셋이 단정하고 깔끔하게 차리고 오고 있었다. 한 여자는 가는 몸매에 실 같은 머리를 하고 쇠붙이 테가 달린 안경을 끼었고 또 한 여자는 체구가 작고 통통한 편으로 회색빛 곱슬머리와 조그맣고 예쁘장한 입을 하고 있었다. 세 번째 여자는 꼭 매머드 같은 몸집으로, 허리도 굵고 허벅지도 굵고 가슴도 커서 마차 끄는 말처럼 근육이 단단하고 힘이 세 보이고 든든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위원들은 위엄 있게 길을 걸어내려 왔다.

그들이 도착할 때쯤 어머니는 가까스로 등을 돌려 섰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어머니 쪽으로 돌아서서 한 줄로 나란히 섰다. 덩치 큰 여자가 두툼한 목소리를 냈다.

“안녕하세요, 조드 부인이시죠?

어머니는 불의의 습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몸을 휙 돌렸다.

“예, 그런데요.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시죠?

“우리는 위원회에서 나왔어요.” 큰 여자가 말했다.

“제4위생반의 부인위원회에서요. 사무실에서 아주머니 이름을 알았지요.

어머니는 수선을 떨었다.

“우리는 아직 치울 것도 제대로 치우지 못하고 있는데요. 좀 앉으셔서 커피라도 한 잔 드시지 않겠어요?

체구 큰 여자가 말했다.

“제시 부인, 우리 이름부터 좀 소개해 드리지요. 조드 부인한테 우리 이름부터 알려 드리세요. 제시 부인이 위원장이에요.

제시라는 여자가 자못 사무적으로 말했다.

“조드 부인, 여기 이 분이 애니 리틀필드 부인이고, 또 이쪽이 엘라 서머즈 부인, 제가 제시 불리트예요.

“이렇게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어머니가 말했다.

“좀 앉으세요. 아직 앉으실 만한 자리도 없습니다만, 커피나 한 잔 얼른 끓이지요.

“아직 괜찮아요.” 애니가 공식적인 태도로 말했다.

“너무 염려 마세요. 우리는 댁에서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알아보려고 잠깐 들렀어요. 불편하신 점이 없으신지 해서요.

제시 불리트가 제법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애니 부인, 제가 위원장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면 고맙겠어요.

“아, 그렇죠. 하지만 내주부터는 제가 할 테니까요, .

“그러니까 내주까지만 기다리세요. 우리는 매주 위원장을 바꿔 가면서 하지요.” 그녀가 어머니한테 설명했다.

“그래, 커피 좀 안 드시겠어요?” 어머니가 아쉬운 듯 물었다.

“아녜요. 감사합니다.” 제시가 책임 있는 말을 했다.

“우리는 우선 조드 부인에게 위생반을 안내해 드리겠어요. 그러고 나서 부인이 원하신다면 부인클럽에 가입시켜 드리고 하실 만한 일을 정해 드리지요. 물론 의무적으로 가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회비가 드나요?

“비용은 아무것도 없고 일을 조금 하시는 것뿐이지요. 그리고 부인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 우리 위원회의 위원으로 뽑히실 수도 있고요.” 애니가 말을 가로챘다.

“제시 이 분은 우리 캠프 전체의 책임을 맡고 있는 아주 중요한 위원회 인물이세요.

제시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만장일치로 뽑혔지요.” 그녀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조드 부인한테 우리 캠프 운영에 대해 좀 말씀해 드려야겠군요.

어머니가 말했다.

“여기 얘가 딸아이예요. 로자샤안이라고 해요.

“아, 그러세요.” 그들이 말했다.

“같이 나오시지 뭐.

체구 큰 제시가 말했다. 그녀의 태도는 권위와 친절로 가득 차 있고 말솜씨에 상투적인 티가 났다.

“조드 부인께서는 우리가 괜히 남의 일에 참견하고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여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사용하는 물건들이 많아요. 그리고 우리들이 스스로 만든 규율도 있고요. 이제 같이 위생반으로 가보실까요? 바로 저기죠. 모든 사람이 같이 사용하고 또 같이 돌보아야 하는 시설이지요.

그들은 빨래통들이 이십여 개나 놓여 있는 지붕이 없는 건물 쪽으로 같이 걸어갔다. 그 중 여덟 개의 통에 여자들이 매달려 허리를 굽히고 옷을 비비고 있었다. 물기를 비틀어 짠 옷들이 깨끗한 시멘트 바닥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건 아무 때나 희망하실 때 사용할 수 있어요.” 제시가 말했다.

“다만 한 가지, 돌아가실 때 뒷손질만은 깨끗이 해주셔야 하지요.

빨래를 하던 여자들이 호기심에 차서 돌아보았다.

제시가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이분들은 새로 들어오신 조드 부인과 따님 로자샤안이세요.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어머니에게 인사를 보냈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이며 말했다.

“여러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시는 사람들을 이끌고 화장실과 샤워실로 들어갔다.

“여기는 벌써 다녀갔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리고 목욕까지 했지요.

“예, 바로 그렇게 사용하는 시설이지요.” 제시가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도 똑같은 규칙이 있어요. 언제든 깨끗이 해야 하거든요. 매주 새 위원들이 있어서 걸레질을 하지요. 아마 부인도 그 위원이 되실 거예요. 비누는 각자 자기 것을 가지고 와야 해요.

“비누도 좀 사야겠군요.” 어머니가 말했다.

“뭐든 다 떨어졌어요.

제시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근엄하게까지 들렸다.

“부인도 전에 이런 시설을 써보신 일이 있으세요?

그녀는 물으면서 화장실을 손가락질했다.

“예, 바로 오늘 아침에 써보았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제시가 한숨을 흘렸다.

“그럼 됐어요.

엘라 서머즈가 말했다.

“바로 지난주에도…”

제시가 사납게 가로챘다.

“서머즈 부인, 또 말씀드리지만…”

엘라가 양보했다.

“아, 그러세요.

제시가 말을 이었다.

“지난주에 부인이 위원장을 하셨을 때 다 하셨잖아요. 이번 주에는 좀 안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지난주의 그 여자 얘기 좀 들려 드리세요.” 엘라가 말했다.

제시가 말했다.

“물론 남의 얘기나 하고 다니는 게 우리 위원회의 할 일은 아니니까 누구라고 이름까지 대지는 않겠어요. 지난주에 한 여자가 들어왔어요. 우리 위원들이 찾아가기도 전에 여기 와서 자기 남편 바지를 입고 이 여자 화장실에 들어왔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변기는 너무 낮고 또 너무 크기가 작아, 구부리고 앉다가 허리를 부러뜨리겠다.’는 거예요. ‘왜 더 높이 만들지 않았느냐.’고요.

위원들은 우월감을 담은 미소를 지었다.

엘라가 또 끼어들었다.

“그렇게 말하더군요. ‘한 번에 변을 많이 볼 수가 없다.’고요.

엘라는 제시의 매서운 시선을 간신히 피했다.

제시가 말했다.

“화장지 사용이 문제예요. 여기 있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도 가져가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그녀는 혓바닥을 한 번 세게 찼다.

“그래서 이 캠프에 사는 사람들 전체가 화장지 값을 조금씩 내게 되어 있어요.” 그녀는 잠시 잠잠해지더니 털어 놓듯 말했다.

“우리 제4위생반에서는 다른 데보다도 화장지를 더 많이 쓰고 있어요. 누군가 훔쳐가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요. 그 얘기가 전체 회의에까지 나왔어요. ‘제4위생반 여자 화장실에서는 화장지를 너무 많이 쓴다.’는 거예요. 바로 회의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더라고요.

어머니는 숨을 죽이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훔쳐 가요? 그걸 훔쳐서 무얼 할까요?

“글쎄 말이지요.” 제시가 말했다.

“우리는 전에도 이런 문제 때문에 속을 썩인 일이 있었어요. 그때는 아이들 셋이서 종이를 잘라다가 인형을 만들더군요. 그래서 애들을 잡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누가 가져가는지 알 수가 없군요. 화장지 두루마리를 갖다 걸기가 무섭게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회의에서까지 말썽이 났지요. 한 부인은 거기에 종을 달아놓고 두루마리가 돌아갈 적마다 소리가 나게 만들어 놓자고 하더군요. 그러면 드나드는 사람마다 누가 얼마나 사용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고요.

그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여하튼 모르겠어요. 저는 일주일 내내 고민했지요. 여하튼 누군가 우리 위생반에서 화장지를 훔쳐 가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문간 쪽에서 누군가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불리트 부인!

위원들이 돌아보았다.

“불리트 부인, 저는 위원 여러분이 하시는 말씀을 다 들었어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여자가 문간에 서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불리트 부인, 그 회의를 할 때에는 제가 차마 일어설 수가 없어서 그냥 있었어요. 사람들이 웃고 창피를 주고 할까 봐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요.

“도대체 무슨 애기시죠?” 제시가 앞으로 나아갔다.

“저어, 제가, 아니 저희 집 식구가, 아니 훔친 건 아니에요, 불리트 부인.

제시가 더 대들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고백자의 얼굴에 땀방울이 구슬처럼 흘렀다.

“우리는 어쩔 수가 없었어요, 불리트 부인.

“그게 뭔 소린지 좀 차근차근 얘기해 보세요.” 제시가 말했다.

“우리 위생반 전체가 화장지 때문에 창피스런 누명을 쓰고 있어요.

“불리트 부인, 우리는 일주일 내내 어쩔 수가 없었어요. 아시겠지만 저희 집에는 딸애가 다섯이나 있어요.

“걔들이 그걸 갖고 어쨌어요?” 제시가 기분 나쁜 말투로 물었다.

“그냥 썼을 뿐이에요. 정말이에요. 거기에서 사용했을 뿐이에요.

“걔들이 그렇게 많이 사용할 권리는 없잖아요? 네댓 장이면 충분할 것을 가지고. 도대체 걔들이 어찌 되었다는 거지요?

고백자가 우는 소리를 냈다.

“설사를 했어요. 다섯 애들이 다요. 저희는 돈이 넉넉지 못해요. 그래서 애들이 설익은 포도를 먹었어요. 다섯 애들이 전부 지독한 설사를 만났어요. 십 분마다 화장실에 드나들었어요.” 그녀는 자기 딸들을 변명했다.

“하지만 걔들이 훔친 것은 절대로 아니었어요.

제시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 말을 해주어야지요. 말을 해야 알잖아요? 말을 안 해주니까 우리 위생반이 창피를 당하는 게 아녜요? 설사는 누구나 다 하는 거고요.

기가 죽은 목소리가 거의 우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못 먹게 해도 설익은 포도를 못 먹게 할 수가 없군요. 그러니까 애들은 자꾸 더 악화되어 가고요.

엘라 서머즈가 즉각 대꾸했다.

“구제반, 구제반에 가서 도움을 받으셔야겠네요.

“엘라 서머즈 부인!” 제시가 말했다.

“인제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어요. 부인이 위원장이 아니라고요.

그러더니 그녀는 홍당무가 되어 서 있는 작은 여자 쪽으로 돌아섰다.

“조이스 부인, 돈이 하나도 없으세요?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땅으로 떨어뜨렸다.

“예, 없어요. 하지만 우리도 아무 때나 일만 생기면 일을 할 수 있어요.

“자, 고개를 드세요.” 제시가 말했다.

“그건 아무 죄도 아니에요. 저 건너 위드팻치 가게에 가셔서 먹을 것을 좀 가져가세요. 우리 캠프에서는 거기서 20달러까지는 외상을 얻을 수 있어요. 5달러어치만 가져가세요. 그리고 일자리가 생기면 그때 중앙위원회에 갚으세요. 조이스 부인도 그런 건 아시잖아요?

그러더니 그녀는 엄함 말투로 말했다.

“무엇 때문에 애들을 그렇게 배고프게 하세요.

“우린 그래도 아직까지 남한테 얻어먹거나 구걸은 안 했어요.” 조이스 부인이 변명했다.

“그거 구걸이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제시가 발끈했다.

“우리는 내내 그런 일을 해왔어요. 이 캠프에는 자선이나 구걸 같은 것은 전혀 없어요. , 어서 뛰어가서 아무거나 먹을 것을 좀 가져가세요. 그리고 전표만 나한테 갖다 주세요.

조이스 부인이 겁먹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다가 저희가 영영 못 갚게 되면 어떻게 하죠? 그동안 너무 오래 일자리를 못 얻었는데요.

“갚을 수 있으면 갚으세요. 갚을 수 없을 때에는, 그건 우리가 알 바도 아니고 부인이 그렇다고 어쩌겠어요? 어떤 사람은 외상도 안 갚고 그냥 가 버리더니 두어 달 뒤에야 돈을 보내온 경우도 있었어요. 부인도 이 캠프 안에서 어린애들을 배고프게 굶길 권리는 없어요.

조이스 부인이 어물어물 말했다.

“예, 그러지요, 부인.

“그 어린애들한테 치즈 조각이라도 갖다 주세요.

제시가 명령하듯 말했다.

“그러면 설사에도 좋을 거예요.

“그러겠어요, 부인.

그 여자가 허둥지둥 물러갔다.

제시가 노기등등한 얼굴을 위원들 쪽으로 돌렸다.

“저 여자는 그렇게 체면만 차릴 권리가 없는 거예요. 적어도 우리끼리 사는 이 안에서는 그럴 권리가 없어요.

애니 리틀필드가 말했다.

“그 여자는 여기에 오래 살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마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어쩌면 전에 한두 번 남의 자선을 받았든지 아니면… 그런데 제시 부인, 너무 내 말을 가로막으려고 하지 마세요. 나도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어요.

그러더니 그녀는 어머니 쪽을 반쯤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이 남한테 구차스러운 꼴을 한번이라도 당해보면 그건 영원히 지워 버릴 수 없는 상처가 되어 버리는가 봐요. 이것은 물론 자선행위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누구든 그런 짓을 한 번 하고 나면 언제까지나 잊히지 않거든요. 아마 틀림없이 제시 부인은 그런 꼴을 한 번도 안 당해 보셨을 거예요.

“예, 안 당해 보았어요.” 제시가 말했다.

“저는 경험이 있어요.” 애니가 말했다.

“지난겨울이었어요. 우리는 쫄쫄 굶고 있었지요. 저하고 애들 아빠하고 애들까지요.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군요. 어떤 사람이 구세군에 가보라고 했어요.

그녀 눈이 자못 매서워졌다.

“우리는 너무나 배가 고팠어요. 밥을 얻어먹으러 갔는데 사람을 기어가게 했어요. 위신도 체면도, 아무것도 없이 다 빼앗겨 버렸지요. 저는 정말 구세군 사람들이 미워요. 아마 조이스 부인도 그런 구걸 같은 것을 해봤던 것 같아요. 부인은 이것이 구걸이나 자선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에요. 조드 부인, 이 캠프에선 아무도 그렇게 구걸하게 되어 있지 않고 또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자선을 베푼다거나 물건을 준다거나 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물론 캠프 자체에다 주면 캠프에서 나누어 줄 수는 있지만요. 우리는 아무런 자선도 안 받겠다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거칠고 사납기까지 했다.

“저는 구세군을 증오해요. 저는 저희 남편이 여태까지 남에게 얻어맞는 것을 본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구세군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지 않겠어요?

제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저도 들었어요. 들어서 알고 있어요. , 조드 부인을 좀 안내해 드려야지요.

어머니가 말했다.

“정말 훌륭하군요.

“재봉실에 가볼까요?” 애니가 제의했다.

“틀이 두 대 있어요. 홑이불도 시치고 드레스도 만들지요. 부인도 아마 거기에서 일하고 싶으실 거예요.

위원회 사람들이 어머니를 찾아왔을 때 루시와 윈필드는 눈에 띄지 않게 자취를 감추었다.

“얘, 우리도 따라가서 엿들어 보자.” 윈필드가 제의했다.

루시가 그의 팔을 꼭 잡았다.

“안 돼. 저 사람들, 저 개새끼들 때문에 우리가 끌려가 몸을 씻었단 말이야. 난 저 사람들하고 같이 가기 싫다.

윈필드가 말했다.

“너도 내가 화장실 변기를 고장 냈다고 일렀지? 나도 네가 저 사람들한테 무어라고 했는지 일러줄 거야.

한 가닥 그림자가 루시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얘, 그러지 마. 난 네가 진짜 고장 낸 것이 아니니까 그걸 알고 말한 거야.

“거짓말 마. 알지도 못했으면서.” 윈필드가 말했다.

루시가 말했다.

“우리 돌아다녀 볼래?

그들은 줄지어 서있는 천막들을 따라 어슬렁거리고 갔다. 천막마다 들여다보면서 수줍게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위생반의 맨 가장자리에는 좀 평평한 땅이 있었고 거기에 크로케를 하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 천막 앞에서 노파 하나가 벤치에 앉아 구경을 하고 있었다. 루시와 윈필드가 달음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붙여 줘!” 루시가 외쳤다.

“우리도 끼어 줄래?

놀던 아이들이 쳐다보았다.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계집애가 말했다.

“다음 판에 들어와라.

“지금 들어가자, .” 루시가 말했다.

“안 돼. 다음 판까지는 들어오지 마.

루시가 위협적인 태도로 코트 안에 들어섰다.

“나도 할 거다.

머리를 늘어뜨린 계집애가 공채를 꼭 움켜쥐었다. 루시가 대들어서 그 아이를 때리고 밀고 하더니 그 아이 손에서 공채를 낚아챘다.

“나도 공놀이를 하겠단 말이야!” 그녀가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지켜보던 노파가 일어나 코트 안으로 걸어왔다. 루시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지면서 공채를 움켜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노파가 말했다.

“같이 놀아라. 너는 요전 주일에도 랠프랑 잘 놀았지?

아이들은 공채를 땅에 놓고는 말없이 코트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더니 멀찌감치 서서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루시는 그들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더니 공을 툭 쳐서 그 뒤를 쫓아갔다.

“윈필드야, 이리 와! 공채 하나 가지고.” 그녀가 소리쳤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돌아다보았다. 윈필드가 구경만 하고 있는 아이들 틈에 끼어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까짓 거 아랑곳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녀는 다시 공을 치면서 발길로 먼지를 차올렸다. 혼자서 신나는 척 해보였지만 아이들은 묵묵히 서서 구경만 했다. 루시는 공 두 개를 나란히 놓고는 두 개를 다 쳐버렸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다시 구경하는 아이들 쪽을 돌아보다가 다시 돌아섰다.

“너희들도 와서 놀자.” 그녀가 말했으나 아이들은 말도 없이 주춤하고 물러섰다.

잠시 그녀는 애들을 노려보더니 공채를 내던지고 울면서 집으로 뛰어갔다. 그제야 아이들은 코트 안에 들어갔다.

머리를 늘어뜨린 계집애가 윈필드에게 말했다.

“너 다음 판에 끼어 줄게, ?

지켜보던 노파가 애들을 타일렀다.

“아까 걔가 돌아와서 같이 놀자면 그렇게 해야 한다. 에이미야, 네가 심술을 부렸어, 아까는.

아이들의 놀이가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조드네 천막 속에서는 루시가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트럭이 아름다운 길을 따라 과수원을 지나 달렸다. 복숭아가 익어가고 있었다. 가지가 옆으로 퍼져 반쯤은 울타리를 넘어 길가로 뻗쳐 있었다. 호두나무가 줄줄이 늘어서 있고 그 아래 포도밭에는 푸릇푸릇한 포도알들이 영글어 가고 있었다. 출입구 쪽에 가까워질 때마다 앨은 속력을 늦추었다. 출입구 문간마다 쪽지가 붙어 있었다. ‘일이 없음, 들어오지 마시오.

앨이 말했다.

“아버지, 인제 과일 철이 되어가니까 곧 일감이 많아지겠어요. 여기는 참 이상한 동네인데요? 물어 보기도 전에 일이 없다 하니.

그는 차를 천천히 몰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무작정 들어가서 어디에 가면 일거리가 있는지 알아보아야겠구나. 그래 볼 만한 일이다.

청색 작업복에 청색 셔츠를 받쳐 입은 남자 하나가 길 가장자리를 따라 걷고 있었다. 앨이 그 남자 옆에 차를 세웠다.

“여보세요, 형씨!” 앨이 말했다.

“혹시 이 근처에 일을 할 만한 데가 없을까요?

남자가 걸음을 멈추더니 씩 하고 웃었다. 그의 입속에는 앞니가 보이지 않았다.

“모르겠는데요. 당신은 아시오? 나는 일주일 내내 헤매 보았지만 한 군데도 걸리지 않는군요.

“그 관청에서 만든 캠프에 사세요?” 앨이 물었다.

“그렇지요.

“그럼, 이리 오세요. 저 뒤에 타세요. 같이 찾아봅시다.

남자가 차의 옆구리를 기어 넘어 짐 칸 바닥에 내려섰다.

아버지가 말했다.

“암만 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것 같구나. 하지만 찾아보긴 해야지. 우리는 지금 어디로 다니면서 찾아보아야 할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

“캠프에서 다른 사람들하고 먼저 얘기라도 해볼 걸 그랬어요.

앨이 말했다.

“삼촌, 인제 좀 어떠세요?

“좀 아프다.” 존 삼촌이 말했다.

“사방 안 아픈 데가 없다. 죄에 대해 벌 받고 있는 거다. 집안 식구들한테 죄와 벌을 끼치지 않을 만한 다른 데로 가야 되겠다.

아버지가 존 삼촌의 무릎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내 말 좀 들어봐. 가긴 어딜 가. 제발 그런 소린 하지도 마. 우리 식구가 다 뿔뿔이 흩어지잖아? 아버님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노아하고 코니는 달아나고 또 목사는 감옥에 가버렸잖아?

“우리는 목사를 찾아 한 번 꼭 만나보아야 할 것 같아.” 존 삼촌이 말했다.

앨은 기어 손잡이에 달린 동그란 꼭지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삼촌은 그런저런 생각할 만큼 건강하지 못하세요. 그런 거 다 집어치우세요. 인제 그만 캠프에 돌아가 사람들한테 물어보지요. 어디로 가야 일자리를 알아보기라도 할 수 있는지. 이렇게 하다가는 꼭 물속에 들어가서 스컹크를 사냥하자는 것 같지 않아요?

그는 트럭을 세우고 창밖으로 몸을 빼내어 뒤에 대고 소리쳤다.

“어이, 이거 보세요! 우리는 캠프로 돌아가서 어디로 가보아야 할지 좀 물어 보겠어요. 공연히 이렇게 휘발유만 태우고 다닐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남자가 트럭의 옆구리 아래로 몸을 굽혔다.

“나도 좋아요. 발목까지 아플 정도요. 게다가 요기 한 번 못 해보았으니, .

앨은 길 한복판에서 차를 빙그르 돌려 뒤로 돌아섰다.

아버지가 말했다.

“너희 어머니가 되게 야단치겠다. 더구나 네 형은 그렇게 쉽게 일자리를 구했는데 말이다.

“형도 아직 모르잖아요?” 앨이 말했다.

“그냥 찾아보러 갔는지도 몰라요. 나는 꼭 차고 같은 데나 갔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런 건 빨리 배울 것 같아요. 취미도 있고요.

아버지가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그들은 묵묵히 캠프로 돌아왔다.

위원회 사람들이 가버린 뒤 어머니는 천막 앞에 내다 놓은 상자 위에 멍청히 앉아 로자샤안을 쳐다보았다.

“얘야, 내가 요사이 몇 년 동안에 이렇게 건강이 좋은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아까 그 여자들 친절하지?” 그녀가 말했다.

“나는 육아실에서 일을 한대요.” 로자샤안이 말했다.

“아까 그 여자들이 그랬어요. 그런 일을 하면 어린애를 다루는 방법을 배울 거예요. 나중에 어떻게 기르는지도 알게 될 거고.

어머니가 좋아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 식구들이 다 일자리만 얻으면 얼마나 좋겠니. 다들 일을 하고 돈도 조금씩 들어오고 하면 말이다.

그녀의 시선이 허공 속을 휘저었다.

“남자들이 일을 하고 우리도 여기에서 일을 하고 주위 사람들은 친절하고. 우리가 조금만 형편이 피면 말이다, 나는 제일 먼저 아담하게 생긴 스토브부터 하나 사야겠다. 그렇게 비싸지도 않을 거다. 그 다음에는 천막도 하나 장만하고, 아주 큼직한 걸로. 또 중고품이라도 침대에 받칠 스프링도 있어야 하고. 지금이 범포는 그저 밥 먹는 자리에다 쳐두고 말이다. 토요일 밤에는 무도회에 나가서 춤도 추어야지. 그 사람들 말이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으면 초대해도 괜찮다 하는구나. 우리도 좀 초대할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마 남자들은 부르고 싶은 친구들이 있을 거다.

로자샤안은 길 아래쪽을 내다보았다.

“나보고 유산할 거라고 하던 그 여자 말예요…”

“얘, 그 얘기는 인제 그만두어!” 어머니가 타일렀다.

로자샤안이 조용히 말했다.

“그 여자를 보았어요. 이쪽으로 오는가 봐요. 그래요! 저기 와요. 어머니, 저 여자 여기 오지 못하게…”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사람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말했다.

“저는 샌드리예요, 리스베스 샌드리. 오늘 아침에 댁의 따님을 만났지요.

“안녕하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행복하게 지내세요?

“예, 아주 행복해요.

“구원을 받으셨나요?

“늘 구원을 받아 왔지요.” 어머니 얼굴이 굳어져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참 반가운 얘기군요.” 리스베스가 말했다.

“여기에는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답니다. 댁에서도 참 끔찍한 곳에 오셨군요. 사방 주위에 사악과 죄가 득실거리는 곳이지요. 악한 무리들이 하도 들끓고 악한 일들이 하도 많아서 순한 양떼 같은 사람들이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운 곳이에요. 사방에 맨 죄인들뿐이에요.

어머니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면서 입을 꼭 다물었다.

“제가 보기에는 모두들 좋은 사람들 같던데요.” 한참 만에 어머니가 말했다.

샌드리 부인의 눈이 휘둥그fp졌다.

“좋다고요!”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꼭 껴안고 망측스런 춤이나 추고 돌아가는 것이 좋다 생각하세요? 당신의 영원한 그 영혼도 이 캠프 안에서는 구원을 받을 가망이 없어요. 간밤에 위드팻치에 나가 보았지요. 거기에서 목사가 무어라고 했는지 아세요? '이 캠프에는 죄악이 많다.'는 거예요.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벌고 싶어 하고, 자기들이 지은 죄를 뉘우치고 울어야 할 시간에 서로 껴안고 춤만 추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그 목사가 한 말이에요. '이곳에 나오지 않은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라는 거예요. 목사의 말을 듣고 있으니까 마음이 참 후련해지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알 수 있었지요. 우리는 춤을 추지 않았으니까 안전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어머니의 얼굴이 시뻘겋게 되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더니 샌드리 부인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가세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만 가세요! 당신한테 가라고 하다가 나까지 또 죄를 짓게 하지 말고 어서 가세요. 어서 가서 실컷 울고 신음이나 하세요.

샌드리 부인은 입이 벌어진 채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더니 사납게 대들었다.

“나는 당신들도 신자들인 줄 알았지요.

“그래요 우리는 신자예요.” 어머니가 말했다.

“아니, 신자가 아닌데요. 당신들은 지옥 불에 타고 있는 죄인들이에요. 당신네들 모두가! 그리고 나는 가서 집회 때 그 말을 꼭 하겠어요. 나는 당신의 그 시커먼 영혼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나는 저 색시의 뱃속에서 죄 없는 어린애가 당신들 때문에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로자샤안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어머니는 허리를 굽혀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썩 가세요!”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마세요. 당신 같은 사람을 나도 전에도 본 일이 있어요. 그런 짓을 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거죠, 그렇죠?

어머니가 샌드리 부인에게 대들었다.

한동안 여자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뒤로 젖혀 마구 울부짖기 시작했다. 눈알은 위로 굴러 올라가고 어깨와 팔은 옆구리 아래로 축 늘어지고 한 줄기의 굵은 침이 마치 밧줄처럼 그녀의 입 귀퉁이로 흘러 내렸다. 그녀는 거듭해서 몇 번이고 울부짖었다. 흡사 짐승이 짖어 대는 것 같았다. 다른 천막들로부터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겁이 나서 묵묵히 다가왔다. 여자는 천천히 무릎을 꿇더니 울부짖는 소리가 몸부림을 치는 신음소리로 변해갔다. 그녀는 비스듬하게 자빠지더니 팔과 다리가 뒤틀렸다. 떠있는 눈망울 아래로 하얀 자위가 드러나 있었다.

한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귀신이, 귀신이 붙은 거요.

어머니는 팔과 다리를 뒤틀고 있는 그 형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가 작은 관리책임자가 마침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가 물었다.

사람들은 그가 들어가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 그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쯧쯧, 참 안 되었군. 누가 좀 이 여자를 천막에 안아다 주겠어요?

말없이 서있던 사람들이 발을 굴렀다. 두 남자가 여자 위에 몸을 굽혀 여자를 들어 올렸다. 한 사람은 겨드랑이 아래를 들고 또 한 사람은 다리를 들었다. 그 여자를 날라 가자 사람들이 그 뒤를 천천히 따랐다. 로자샤안은 천막 안에 들어가서 드러눕더니 담요를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관리책임자가 어머니를 보더니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나뭇가지에 눈을 돌렸다. 그는 피곤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때려 주셨나요?

어머니는 물러가는 사람들 뒤를 응시하다 고개를 살살 저었다.

“아녜요. 하지만 때려 주려 했어요. 오늘만 해도 두 번이나 우리 딸을 괴롭혔어요.

관리책임자가 말했다.

“그 여자를 때리지는 마세요. 그 여자는 아픈 사람입니다. 몸이 성하지 못하지요.” 그러더니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여자가 나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가족들하고 전부. 그 여자 한 사람이 나머지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문젯거리지요.

어머니는 기분을 가라앉혔다.

“또 한 번만 오면 그때에는 정말 때려줄지 몰라요. 저도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내 딸을 다시는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

“조드 부인, 걱정하지 마세요.” 그가 말했다.

“앞으로 그 여자를 만나지 않게 될 겁니다. 그 여자는 꼭 새로 들어온 사람들만 찾아갑니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그 여자는 다른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물론 저는 죄인이에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렇지요. 그야 누구나 죄인이지요. 하지만 그 여자가 말하는 그런 죄인은 아니지요. 여하튼 그 여자는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아닙니다, 조드 부인.

어머니가 고마워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듣고 있니, 로자샤안? 그 여자는 아픈 사람이란다. 정신이 돌아버린 사람이야.

그래도 딸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했다.

“선생님한테도 미리 말씀드리지만요,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나면 저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아마 때려 줄 거예요.

그가 할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부인의 마음이 어떠신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발 좀 참으십시오. 그것만 부탁드립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그는 샌드리 부인이 들려 간 천막 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겨갔다. 로자샤안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딸의 얼굴 위에 덮인 담요를 가만히 들어 올렸다.

“그 여자는 좀 미친 여자라고 하는구나. 그 허튼 소리 하나도 신경 쓸 것 없다.” 그녀가 말했다.

로자샤안이 겁먹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그 여자가 불에 타 죽는다 할 때, 난 정말 불길이 막 솟아오르는 것 같았어요.

“그건 다 거짓말이야.”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 피곤해 죽겠어요.” 딸이 소곤거렸다.

“모든 일이 다 피곤해 죽겠어요. 좀 잠이나 잤으면.

“그래 좀 자거라, 그럼. 여기는 참 좋은 곳이다. 어서 푹 자거라.

“그 여자 또 오면 어떻게 해?

“인제 못 올 거다.”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밖에 나가서 앉아 있으마. 그리고 얼씬도 못 하게 해주마. 어서 좀 쉬어 두려무나. 넌 이제 곧 육아실에 가서 일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어머니는 발을 디디고 일어서서 천막 출입구 쪽에 가서 앉았다. 상자를 깔고 앉아 팔꿈치를 무릎 위에 괴고 턱을 손바닥에 받치고 있었다. 캠프의 움직임이 보였고 애들의 뛰노는 소리와 쇠붙이를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귀에 들렸지만 그녀의 눈은 똑바로 앞만 내다보고 있었다.

길을 따라오던 아버지가 그녀를 발견하고 옆에 와서 쭈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편을 쳐다보았다.

“일자리가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없어.” 그가 부끄러운 듯이 대답했다.

“다 찾아보았지만…”

“앨하고 존 삼촌하고 트럭은 어딜 갔어요.

“앨은 무얼 좀 고치고 있어. 연장을 몇 가지 빌어 그 자리에서 고쳐야 하는 모양이야.

어머니가 슬픈 얼굴을 지으면서 말했다.

“여보 여긴 참 좋은 곳이에요. 당분간은 여기서 잘 지내겠어요.

“일자리만 얻으면 그렇지.

“그래요! 일자리만 생기면.

그는 아내의 울적한 기분을 느끼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당신은 또 무엇 때문에 그런 우거지상 하고 있는 거야. 여기가 그렇게 좋다면서 왜 그러지?

그녀는 남편을 빤히 쳐다보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참 이상하잖아요. 여태까지 늘 길바닥에서만 살았지요. 밀리고 달리고 했잖아요. 그런데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이, 이런 데에 와서 보니 사람들이 그렇게 친절하게 마음에 들어요. 그러다보니까 우선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세요? 전에는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던, 뒤에 묻어 두었던 일만 자꾸 생각이 나잖아요. 그날 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그 자리에 묻어드리고 나는 여태까지 길바닥에서만 살았어요. 뛰고 털털거리고 달리고 하면서 말예요. 하지만 그건 그렇게 괴롭지 않았어요. 그런데 여기에 와서 보니 모든 게 더 괴롭기만 해요. 그리고 어머님도 그렇고 또 노아도 그렇게 혼자 떠나 버리고! 강을 따라 아무데로나 가버리고 그런 일이 다는 아니지만 그 일부예요. 그런 일들이 이제 와서 떠오르는군요. 어머님은 극빈자가 되셨고 극빈자로 묻히셨어요. 그게 아파 못 견디겠어요. 너무도 아픈 일이에요. 노아란 놈은 강을 따라 어디론지 가버리고, 그놈은 그게 무슨 짓인지도 모르고 있어요. 거기가 어떤 세상인지도 모르고 가 버린 거예요. 우리도 알 수 없는 전혀 딴 세상이지요. 그놈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길이 없어요. 영영 모를 거예요. 코니도 혼자 빠져 나갔지요. 전에는 그런 저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런 일들이 자꾸 머리에 떠올라요. 우리는 이제 이만큼 좋은 데에 오게 되었으니까 기뻐해야 할 텐데도 말예요.

아버지는 그녀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 입만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감겨져 있었다.

“그 산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도 기억이 나요. 노아가 가 버린 그 강가에 마치 늙은이 이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던 그 산 말이에요. 아버님이 누워 계시던 땅에 깔렸던 나무나 풀을 베어 낸 그루터기들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고향 집에 있던 그 깃털 꽂힌 작두를, 하도 오래 써서 움푹 패고 닭 피가 묻어 시커멓게 된 그 모습도 아직 눈에 선해요.

아버지 목소리도 어머니처럼 착 가라앉은 음조를 띠었다.

“나는 오늘 기러기를 보았소. 까맣게 높이 떠서 남쪽으로 가는데 아주 보기가 좋더군. 그리고 찌르레기 새들이 전깃줄에 앉아 있고 울타리에 비둘기가 내려앉더군.

어머니가 눈을 떠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또 회오리바람이 부는데 꼭 사람이 들판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뛰어가는 것 같았어. 기러기들은 자꾸 남쪽으로만 내려가고 말이야.

어머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보, 생각나요? 그전에 고향에서 우리가 늘 하던 얘기요. ‘금년에는 겨울철이 이르다.’고 했잖아요. 기러기 떼가 날아가면 언제나 그런 얘기를 했어요. 겨울은 때가 되면 오는 것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런 얘기를 했어요. ‘어, 겨울이 빨리 오는데?’ 우리가 그때는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전깃줄에 매달린 찌르레기 새를 보았는데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더군.” 아버지가 말했다.

“또 그 비둘기 말이야. 비둘기처럼 조용히 앉아있는 짐승도 없을 거요. 철조망 울타리에, 아마 한 쌍인가 봐, 나란히 앉아 있더군. 그리고 회오리바람은 키가 꼭 사람만큼이나 높이 솟아서 들판을 춤을 추고 지나가더라고. 꼭 사람 같았어.

“고향 생각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는 우리 고장도 아니지만 그런 거 이제 다 잊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노아도 다 잊어버리고.

“그놈은 늘 이상했어. 요는 다 내가 잘못한 거야.

“그런 소리 다시 안 하기로 했잖아요? 걔는 결국 제대로 살지도 못했을지 몰라요.

“하지만 내가 너무 몰랐어.

“그만두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걔는 좀 이상했어요. 혹시 저 혼자 강가에 살면서 재미있게 지낼지 누가 알아요. 그렇기만 하면 그게 나은 거죠. 이제 그런 걱정까지 할 수가 없어요. 여기는 참 좋은 곳이에요. 그리고 당신도 금방 일자리를 얻게 될 거예요.

아버지가 하늘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기 좀 봐! 기러기가 또 날아가는데? 아주 한 떼가 가는군. 여보, 겨울이 빨리 오려나 봐.

그녀가 킬킬거리고 웃었다.

“당신은 자기가 하면서도 왜 그런지 모르는 일이 있어요.

“저기 존이 오는군.” 아버지가 말했다.

“자, 이리 와서 앉아.

존 삼촌이 끼어들었다. 그는 어머니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우리는 아무 목적지도 없이 그저 방황만 하면 왔군.” 그가 말했다.

“앨이 좀 만나야겠다고 하는데 가 봐. 아마 타이어를 사야 되는 모양이야. 거죽이 한 꺼풀만 남았대.

아버지가 일어섰다.

“그 녀석이 어디 가서 좀 싸게 사야 할 텐데. 인제 돈도 달랑달랑하는군.

“저 아래쪽. 저 다음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돼. 지금 빨리 갈아 끼우지 않으면 터져서 튜브까지 망가질 거라는군.

아버지가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갔다. 그의 눈은 커다랗게 V자를 그리면서 하늘 위를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좇고 있었다.

존 삼촌은 땅바닥에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더니 땅바닥에 떨어뜨렸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그는 어머니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일거리가 없더군요.

“샅샅이 찾아보지 않으셨지요?” 어머니가 말했다.

“문간마다 쪽지들을 붙여 놓았어요.

“글쎄요, 톰은 아마 일자리를 구했을 거예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까요.

존 삼촌이 넌지시 말했다.

“그놈도 코니나 노아처럼 어디로 가 버렸는지도 알 수 없지요.

어머니가 존 삼촌 쪽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더니 그녀 시선이 다소 누그러졌다.

“서방님도 확실히 아시는 일이 있죠?” 그녀가 말했다.

“그런 일도 있으시죠? 톰은 일자리를 얻었어요.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꼭 돌아와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걔는 참 착하지요. 안 그래요.

소형차와 트럭들이 캠프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위생반으로 몰려갔다. 남자들은 모두 깨끗한 작업복과 셔츠를 손에 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정신이 든 것처럼 말했다.

“서방님, 애 아버지한테 가셔서 가게에서 콩과 설탕하고 튀김용 고기와 당근 좀 사오라고 해주세요. 뭐든지 좀 근사한 것을 사오라고 그러세요. 오늘밤은 오랜만에 좀 좋은 것을 먹어야겠어요.

23

이주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도, 먹고 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면서도 늘 즐거움을 찾았고 즐거움을 파냈고 즐거움을 만들어 냈으니, 그들은 너무도 즐거움에 굶주린 사람들이었다. 때로 즐거움은 오가는 대화 속에 들어 있었고 그들은 유쾌한 농담 속에서 인생이라는 산을 기어올랐다. 캠프 안에 사람 다니는 통로를 따라, 강가의 둑 위에서, 그리고 플라타너스 아래에서도, 아무데서나 이야기꾼들이 생겼고 사람들은 그 재주 있는 이야기꾼들의 잡담을 듣기 위해 희미한 불빛을 둘러싸고 모여들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귀를 기울였고 그들이 모여들면 이야기는 더 크게 꽃을 피웠다.

나는 제로니모 토벌군에 징집되었던 사람이라오.

그래서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고 조용한 눈들이 꺼져 가는 불빛을 반사시킨다.

인디언들은 아주 약은 놈들이오. 꼭 뱀같이 엉큼하고 조용할 땐 또 까딱 소리도 안 내요. 마른 나무 잎사귀를 밟고 가면서도 바삭 소리 하나 내지 않더군요. 그런 것을 여러 번 보았어요.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면서 발바닥 밑에 부서지는 마른 잎사귀들의 바삭거리는 소리를 속으로 기억해 보는 것이다.

계절이 바뀌고 구름이나 끼면 참 좋지 않은 시기지요. , 그 군대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거 보았소? 열 번 일을 시켜 보면 열 번 다 망쳐 버리는 게 군대라오. 인디언 백 명을 토벌하려면 대개 군대를 3연대나 투입한다니까요.

그러면 사람들은 귀를 세운다. 얼굴까지 긴장되어 듣고 있다. 이야기꾼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자기 이야기 속에 끌어들이면서 과장된 어조와 어마어마한 표현을 써가며 떠들어댄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야기 자체가 거창한 이야기이고, 사람들도 그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거창해지기 때문이다.

산둥성이 끝에 한 용감한 인디언이 해를 등지고 서있었지요. 자기가 눈에 띄게 서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서있더군요. 발가벗고 해를 등진 채 말이오. 아마 미친 사람인지도 모르지요. 팔까지 펼쳐 들고 서있었다고요. 꼭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말이오. 400야드 될까 하는 거리였지요. 우리는 이쪽에서 다들 고개를 들고 쳐다보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바람에 대어 보았지요. 그러면서도 그냥 엎드리고만 있지, 누구 하나 총을 쏘지 못하더라고요. 그 인디언은 무언가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요? 우리가 도저히 못 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오. 총만 치켜들고 엎드려 있었지 어깨에 대고 겨냥을 하는 사람조차 없더라고요. 그 인디언만 그냥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 머리띠하고 깃털이 하나 꽂혀 있는 것을. 그게 빤히 보여요. 발가벗고 있는 게.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엎드려서 쳐다보고만 있는 거요. 그 인디언도 물론 까딱도 안 했고요. 그러자 우리 대장이 발끈하더군요. ‘빨리 쏘아라! 이 미친놈들 같으니 쏘아!’ 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우리는 그냥 엎드리고만 있는 거예요. ‘내가 다섯을 셀 테니 그때까지 안 쏘는 놈은 다 경을 칠 줄 알아라!’ 대장이 소리를 질렀지요. 그래서 우리는 천천히 총을 내렸지요. 누가 먼저 쏘아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평생 그렇게 슬픈 심정이 되어 본 역사가 없다오. 그래서 나는 그 인디언의 배에다 겨냥을 했어요. 인디언을 쏠 데는 거기밖에 없으니까. 그러자 놈은 퍽 하고 쓰러지더니 떼굴떼굴 굴러 버렸지요. 그래서 우리가 올라가 보았어요. 별로 큰 놈도 아니더군요. 멀리서는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보이더니 몸뚱이가 온통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어요. 혹시 당신들도 꼿꼿하게 예쁘게 생긴 장끼를 본 일이 있어요? 깃털 하나하나가 꼿꼿하게 서로 알록달록하고 심지어 그 눈까지 예쁜 색깔이 도는 그런 꿩 말이오. 그걸 한방 쏘아 보시오. 떨어진 걸 주워 들면 기분이 어때요? 피투성이가 되어서 몸을 뒤틀고 있는 것이 꼭 우리가 무슨 아름다운 것을 망가뜨린 것 같은 기분이 되지요? 그걸 먹어 버려도 기분이 개운해지지 않잖아요? 그건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망쳐 놓았기 때문이지요. 그건 무슨 짓을 해도 원래 모습대로 고쳐지지가 않는 모양이오.

그러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불이 타면서 불꽃을 살짝 일으키기도 한다. 그들은 마치 불빛으로 자신들 마음속을 비쳐 보기라도 하는 듯하다.

해를 등지고 두 팔을 벌리고 있을 때, 그때는 그 조그만 인디언도 마치 하느님처럼 커 보이더라고요.

또 어떤 사람은 20센트를 가지고 먹을 것과 오락을 저울질해 보다가 아마 매리스빌이나 투레어나 아니면 세레스나 마운틴뷰 같은 데로 영화구경을 갔던 모양이었다. 그는 머릿속에 영화 장면의 기억을 가득 담고서 캠프에 돌아온다. 그리고는 자기가 구경한 것을 떠들어댄다.

한 돈 많은 녀석이 있었는데 그 녀석은 가난뱅이의 행세를 하고 또 한 돈 많은 여자 역시 가난한 것처럼 하고 다녔는데, 이 두 사람이 하루는 햄버거 집에서 만나게 되었지요.

왜냐고?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영화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왜 그 사람들이 가난뱅이 행세를 했느냐고? 돈 많은 것에 아예 신물이 나도록 질려 버린 거요.

말똥이다!

당신, 얘기 듣고 싶소, 듣기 싫소?

어디 한번 해보시오. 물론 얘기는 듣고 싶소만 내가 만약 돈이 많다면, 돈만 좀 있다면 말이오, 난 그 돼지고기나 한번 실컷 먹어 보겠소. 고기를 토막토막 잘라서 장작처럼 쌓아 놓고 먹고 싶은 대로 실컷 먹겠소. 어서 얘기나 하시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이 가난뱅이인 줄로 알지요. 그러다가 두 사람이 한꺼번에 감옥에 잡혀 들어가게 돼요. 하지만 빠져 나오면 상대방한테 부자라는 사실이 탄로가 나니까 그냥 있는 거요. 그런데 교도관은 두 사람이 다 가난뱅이인 줄 알고 아주 더럽게 구는 거요.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알고 난 뒤에 그 교도관 녀석이 하는 짓이라니 참 보지 않으면 모르지요. 거의 기절해서 죽는 시늉을 하더군요.

그런 사람들이 감옥에는 왜 들어가오?

두 사람이 어떤 과격파들 집회에서 붙잡히게 돼요. 그 사람들은 물론 과격파는 아니지만 그냥 우연히 그런 데 가게 된 거요. 서로 돈 때문에 결혼을 안 하려고 하지요. 알겠소?

그래서 그 개새끼들은 서로 거짓말을 꾸며대기 시작하는 거요?

영화에서는 퍽 좋게 나오더군, 사람들한테도 친절하고 말이오. 알겠소?

나도 영화관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는데 바로 내 자신의 애기 같더군요. 아니 내 자신보다 더 좋고 내 인생보다도 더 좋고, 그러니까 모든 것이 너무 훌륭합디다.

그런 슬픈 구경거리가 아니더라고. 나는 슬픈 일이 너무 많은 사람이오. 나는 그런 건 딱 질색이라오.

그렇지요. 하지만 영화니까 믿을 필요는 없지. 하다 말았는데 그래서 그 두 사람 말이오, 결혼을 했어요. 그러니까 자연히 정체가 드러나게 되고. 그런데 아주 건방진 놈이 하나 있었는데, 그놈은 이 남자가 실크 모자를 쓰고 나타나니까 기절초풍을 해서 거의 죽으려고 하더군요. 그것이 끝나고 나니까 뉴스영화가 나오는데 독일 군대가 발을 차올리면서 행진하는 게 무척 웃깁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지만 누구나 돈만 조금 있으면 얼큰히 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픈 마음이 사라지고 전신이 훈훈해지는 것이다. 고독감도 씻을 수가 있다. 왜냐하면, 남자들은 대개 친구를 좋아하고 적과 싸워 무찔러 버리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개울가에 앉아 있으면 발밑의 흙이 부드럽게 느껴진다. 여태까지의 실패가 잠들고 앞날의 위협도 무섭지가 않은 것이다. 배고픈 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온 세상이 부드럽고 안락하기만 하며 자기가 처음에 바라던 목적지에 이미 가있게 되는 것이다. 별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하늘은 마냥 부드럽기만 하다. 죽음은 친구가 되고 잠은 죽음의 형제가 된다. 옛날 추억들이 가까이 다가온다. 발이 아주 예쁘게 생긴 아가씨와 고향에서 춤을 추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말, 아주 옛날의 일이지만, 그 말과 그 안장. 그 안자에 아로새겨져 있는 가죽의 무늬. 그게 언제였던가? 같이 이야기라도 할 아가씨를 찾아야지. 그거 좋은 일이다. 같이 잘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여기는 어찌 이렇게 한 덩어리가 되어 밀착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 두 가지는 결국 같은 게 아닐지? 언제까지나 깨지 말고 이렇게 취해 있었으면 좋겠다. 누가 말리랴? 그러면 안 된다고 어느 놈이 감히 그래? 혹시 목사들이? 옳지, 그 사람들도 일종의 취한 상태지. 말라빠져 애도 못 낳는 여자들? 하지만 그런 여자들은 너무도 비참해서 아무것도 모를 거야. 사회개혁 운동가들? 그놈들은 실제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지 못하는 놈들이지. 저희들이 어떻게 알겠어? 아니, 저 별들이 저렇게 가깝고 다정하고, 그래서 이 세계에 대한 사랑과 우애를 발견했어. 이 세계 안의 모든 것은 신성한 거야. 모든 것, 나까지도.

하모니카는 가지고 다니기가 간편하다. 네 그 바지 뒷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봐. 그리고 손바닥에다 탁 치면 때나 호주머니 속의 먼지나 담배 가루 같은 것이 다 빠진다고. , 준비됐지? 하모니카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할 수가 있어. 가냘픈 한 가락의 곡조도 불 수 있고 화음을 맞출 수도 있고 또 화음으로 리듬을 맞추어 가면서 멜로디를 낼 수도 있지. 거기에다 두 손으로 조작하면 음악을 마음대로 만들 수도 있어. 피리소리처럼 구슬프게 우는 음악도, 오르간처럼 가득 차 부풀어 오르는 소리도, 언덕 위의 풀피리처럼 날카롭고 애조 띤 소리도 아무거나 다 낼 수 있어. 그러고 나면 아무 때나 호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면 되고 그건 언제나 너와 함께 있고 네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어. 자꾸 불다 보면 새 기술이 생기고 손으로 소리를 조작할 줄도 알게 되고 입술로 소리를 비틀기도 하고. 그런 것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거지. 어디라고 정해진 자리가 없어. 아무 데서나 좋아. 때로는 대낮에 혼자 그늘 속에 가서 불어도 좋고, 저녁을 먹고 나 다음 여자들이 설거지를 하며 왔다 갔다 할 때 천막의 출입구 포장 앞에서도 좋고, 발은 가볍게 땅을 구르고 눈썹은 리듬에 맞추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거야. 그걸 잃어버리거나 고장이 나더라도 그까짓 거 뭐 별로 대단한 손해도 아니거든. 25센트만 주면 또 하나 살 수가 있지.

기타는 더 돈이 든다. 이건 따로 배워야 한다. 왼손 손가락들엔 공이가 박혀야 되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뼈처럼 공이가 굳어야만 제대로 연주하게 된다. 왼손 손가락들은 펴라. 마치 거미의 다리처럼 쭉 펴라. 플랫 위에 어디든지 다 뻗칠 수 있도록 쭉 펴야 한다.

이건 우리 아버지가 쓰던 악기다. 나한테 C선을 가르쳐 줄 때 나는 아직 너무 어렸었지. 내가 아버지만큼 할 줄 알게 되니까 아버지는 더 이상 안 하시더군. 그저 문간에 앉아 듣기만 하면서 발로 박자만 맞추었어. 내가 잠깐 쉬려고 하면 아버지가 상을 찡그려서 할 수 없이 이걸 다시 집어 들었지. 그러면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편안한 자세로 앉아 ‘어서 해라. 멋지게 한번 해봐라.’ 하는 거야. 악기는 참 좋은 악기야. 이 대가리 쪽을 보라고. 반질반질하게 닳았지. 이 나무가 이렇게 닳아빠질 때까지는 노래를 한 백만 곡도 더 연주했을 거야. 언젠가는 달걀처럼 움푹 팰 거야. 그래도 위에다 살을 입힐 수도 없고 어떻게 고쳐 쓸 수도 없고, 점점 소리만 낡아 가는 거야 할 수 없지. 저녁때 한번 연주해 보라고. 옆집 천막에 하모니카가 있잖아? 둘이서 같이 연주를 하면 더 멋지게 들리겠지.

바이올린은 귀하기도 하지만 배우기도 어려워 플랫도 없고 어떻게 가르쳐 줄 수도 없는 거야. 그냥 어른들이 하는 것을 듣다가 얻어들은 풍월로 배우는 거니까. 두 소리를 한 번에 내는 법은 가르쳐 줄 수도 없어. 그건 아주 비법인걸. 하지만 나는 잘 관찰을 해 보았다고. 할 때 보니까 이렇게 하더군. 바람 소리처럼 날카롭고 예리한 바이올린 소리는 아주 빠르고 신경질적이고 까실까실하단 말이야.

이건 뭐 대단한 바이올린도 아니야. 값도 한 2달러밖에 안 주었을 거야. 4백년이나 된 바이올린도 있다더군. 그런 건 꼭 위스키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소리가 난대. 5, 6만 달러쯤 나가는 모양이야. 나도 잘 모르지만 꼭 거짓말 같단 말이야. 지독한 악기도 다 있지? 어디 춤이나 한번 추겠어? 활줄에 로진을 잔뜩 발라서 문질러 주지. 그래 놓으면 삑삑거리는 소리가 나지. 1마일 밖에까지 말이야.

하모니카와 기타와 바이올린. 이 세 개가 저녁에 모인다. 리일 곡을 연주하면서 발로 박자를 맞춘다. 기타의 굵직하고 깊숙한 현 소리가 가슴속의 심장처럼 울리고 하모니카의 날카로운 소리에 곁들여 바이올린의 삐삐거리는 소리가 섞인다. 사람들은 더 바싹 다가앉아야 한다. 그렇게 안 할 수가 없다. , ‘병아리 무도곡’이다. 발을 굴려 박자를 맞추면서 한 젊은 말라깽이 녀석이 빠른 스텝을 세 번 밟는다. 두 팔이 맥없이 쳐진다. 스퀘어가 바싹 죄어들어 춤이 시작된다. 맨바닥 위라서 소리는 둔하지만 발뒤꿈치로 땅을 구른다. 손들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머리카락이 처져 내리고 숨들을 헐떡거린다. 이제 한쪽으로 가서 몸을 좀 기대야겠다.

저 텍사스 청년 좀 보라지. 휘청거리는 다리로 스텝 하나 밟을 때마다 네 번이나 땅을 친다. 저렇게 잘 흔들고 돌아가는 놈은 처음 본다. 저 제로키 소녀를 마치 공 놀리듯 돌리고 있는 것 좀 보라고. 소녀의 뺨은 시뻘겋게 달아 있고 발가락 끝이 튀어나올 지경이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면서 가슴 들먹이는 것 좀 봐. 그 소녀가 지친 줄 알아? 어지러운 줄 알아? 천만에. 텍사스 녀석의 눈에 머리카락이 들어간 거야. 입을 쩍 벌리고 숨을 못 쉬는 거지. 그런데도 발짝 하나 땔 때마다 네 번씩 구르는 것은 실수가 없거든. 그 녀석은 아마 그 체로키 소녀하고 끝까지 출 거야.

바이올린이 삐삐거리고 기타가 둥둥 울린다. 입으로 오르간을 연주하는 사람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있다. 텍사스 청년과 체로키 소녀는 마치 개처럼 헐떡이면서 땅바닥을 두드려 댄다. 늙은이들은 자기들의 손을 쓰다듬으며 서있다. 살짝 미소만을 지은 채 발만 동동 굴려 본다.

고향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건 학교 안에서 그랬지. 큼직한 달덩이가 서쪽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그이하고 나는 둘이 걸었다. 목이 너무 타서 서로 말도 못 했다. 한마디도 못 했다. 얼마 안 가서 건초를 쌓아 놓은 더미가 있었다. 바로 거기에 올라가서 누웠다. 그 텍사스 청년이 소녀를 데리고 스텝을 밟으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라지는 것을 아무도 못 볼 줄 알고 있겠지. 오오, 하느님! 나도 그 텍사스 청년하고 같이 갔으면 좋겠다. 얼마 안 있으면 달이 떠오를 시간이다. 소녀의 아버지가 딸을 데리러 나왔다가 그만두는 것을 나는 보았지. 그래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는 아는 것이다. 차라리 찾아오는 가을을 막고 나무속에서 빨아들이는 물기를 막는 편이 낫지, 그걸 어찌 막을 것인가? 이제 곧 달이 올라오겠다.

연주를 더 계속해. 사랑의 이야기를 담은 그런 음악을 말이야. ‘라레도의 거리를 지나노라면’을 해 봐.

불은 다 꺼져 버렸다. 다시 피우면 오히려 쑥스럽다. 조그만 달 조각이라도 곧 떠오를 것이다.

관개 수로의 도랑가에서 한 목사가 기염을 토하고 사람들이 악을 쓰고 있다. 목사는 호랑이처럼 뚜벅뚜벅 걸으면서 말소리로 사람들을 매질하고 있다. 사람들은 땅에 엎드려 울부짖고 있다. 그는 사람 속을 들여다보고 따져 보고 저울질해 보고 달래 주기도 하다가, 모두가 땅에 엎드리자 몸을 굽혀 억센 완력으로 한 사람씩 일으켜 세우고 고함을 지른다.

‘예수 그리스도여, 저들을 받아 주옵소서!’ 그리고서 그들을 한 사람씩 물속에 집어 던진다. 그들이 모두 허리까지 차는 물속에 들어가자, 자기를 바라보는 그들의 겁먹은 눈초리를 보면서 그는 강둑 위에 무릎을 꿇고 그들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모든 남자와 여자들이 땅에 엎드려 울게 되도록 기도를 드린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물방울을 흘리면서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은 채 그를 지켜본다. 그리고 질퍽거리는 신발을 신은 채 그들은 캠프로 돌아와 자기들 천막에 들어가 신기한 이야기를 조용히 주고받는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눈처럼 하얗고 깨끗해졌다. 우리는 다시 죄를 짓지 않을 거다.

어린애들도 척척한 옷을 입은 채 겁이 나서 서로 소곤거린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다시 죄를 짓지 않을 거다.

죄라는 것이 무언지 모조리 알았으면 좋겠어. 한번 해보게.

이주민들은 길바닥 위에서나마 그들 나름대로의 겸허한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24

토요일 아침, 세탁조가 붐볐다. 여자들이 나와서 드레스와 깅엄 천으로 된 것들, 그리고 무명 같은 것을 빨아서 햇볕에 널기도 하고 부드럽게 다리기도 했다. 오후가 되자 캠프는 더욱 활기를 띠었고 사람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린애까지 열을 올리고 여느 때보다 더 소란을 피웠다. 오후 한나절쯤 되자 아이들 목욕이 시작되었고 아이들이 하나하나 붙들려 가서 억지로 목욕을 하다 보니 놀이터의 소음은 점차 잦아들었다. 다섯 시까지는 대개의 아이들이 모두 깨끗하게 목욕을 마치고 몸이나 옷을 더럽히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다. 그들이 빨아 놓은 뻣뻣한 옷들을 입고 조심스럽게 돌아다니는 것은 보기에도 딱했다.

큼직한 야외 공개 댄스장에서는 한 패의 위원들이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전선줄은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도 다 징발됐다. 읍내의 쓰레기처리장까지 뒤졌다. 집집마다 연장그릇이나 상자를 뒤져 전선에 감는 테이프를 내놓았다. 다닥다닥 이어 붙인 전선이 댄스장에 길게 이어지고 병 주둥이를 떼어내 절연체 대용품을 만들었다. 오늘밤은 처음으로 댄스장 바닥에 불을 켜는 것이었다. 여섯 시가 되자 남자들이 일에서 돌아오고, 일을 찾아다니다가도 돌아왔다. 새로 목욕 인파가 몰려들었다. 일곱 시까지는 저녁식사가 끝났다.

남자들은 각자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었다. 깨끗이 빨아 둔 작업복에 깨끗한 청색 셔츠에다 때로는 점잖은 검정색도 입었다. 처녀들은 반들반들하게 다려 놓은 무늬가 있는 드레스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머리는 얌전하게 땋아서 리본까지 달았다. 언제나 걱정만 일삼는 아낙네들은 가족들을 살피면서 저녁 설거지를 했다. 댄스장에서는 현악 밴드가 연습을 하고 있었고 밴드의 주위에는 아이들의 벽이 두 겹이나 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열을 올리며 흥분하고 있었다.

중앙위원회 의장인 에즈라 휴스턴의 천막에서는 위원들 다섯 사람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휴스턴은 바싹 마른데다가 키가 훌쩍 크고 고생에 찌들어서 시커멓게 그을린 모습에 칼날처럼 번득이는 눈매를 하고 각 위생반에서 하나씩 나온 위원들에게 말했다.

“무도회를 망치고 난장판을 벌일 거라는 정보를 우리가 미리 입수한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그가 말했다.

물통처럼 통통하게 생긴 제3반의 대표가 입을 열었다.

“그놈들은 그저 찍소리도 못 하게 한번 본때를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소.

“그건 안 돼요.” 휴스턴이 말렸다.

“그건 그 사람들 주문을 들어 주는 꼴이 되지요. 그 사람들은 여하튼 무슨 소요라도 일어나면 바로 경찰을 불러들이고 우리가 질서가 없다고 하려는 거요. 그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이미 그런 재주를 부린 적이 있어요.

그는 고개를 돌려 제2반에서 나온 검은 얼굴에 근심을 잔뜩 담고 있는 젊은 청년 쪽을 바라보았다.

“울타리를 순찰하면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막을 사람들을 다 모아놓았지?

어딘지 슬픈 표정을 담고 있는 얼굴의 청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모두 열두 사람입니다. 절대로 사람을 치지 못하도록 주의를 해놓았어요. 그냥 밖으로 밀어내기만 하라고요.

“자네 좀 나가서 윌리 이튼 씨를 좀 오시라고 하겠나? 이튼 씨가 오락부장이지, 아마, 안 그렇던가?

“그런데요.

“그럼, 좀 오시라고 해.

청년이 나갔다. 이윽고 그는 힘줄이 울퉁불퉁하게 나온 텍사스 남자를 하나 데리고 들어왔다. 윌리 이튼은 연약하게 생긴 턱이 길쭉했고 머리카락은 먼지 같은 색깔이었다. 팔과 다리가 길어 느슨해 보였고 팬 핸들 지방 태생의 햇볕에 그을린 회색빛 눈매를 하고 있었다. 그는 천막 안에 들어서자 피식 웃으며 두 손을 손목 위에서 원을 그리며 돌렸는데, 그 폼이 무언가 불안해 보였다.

휴스턴이 말했다.

“오늘 밤 일에 관해서 이야기 들으셨지요?

윌리가 씩 웃었다.

“예, 들었지요.

“그래서 무언가 손을 써야 되지 않겠소?

“그렇지요.

“어떻게 하실 거요?

윌리 이튼은 명랑하게 웃었다.

“보통 때는 오락위원이 다섯 사람이지만 오늘은 20명을 추가했지요. 모두 다 든든한 장정들이오. 모두들 춤을 추면서 눈과 귀를 번쩍 뜨고 열심히들 살필 겁니다. 무슨 시비나 싸움이 일어날 낌새만 있으면 바로 그들이 한데 모이기로 되어 있지요. 계획을 아주 세밀하게 짜두었지요. 전혀 눈치도 채지 않도록 말이오. 그저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가는 거지요. 그러면 문제의 인물은 그 사람한테 묻혀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서 밖으로 쫓겨나게 되어 있지요.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합니다.

윌리가 즐거운 듯이 웃었다.

“그렇게 주의를 해두었지요.

“아주 잘 알아듣게 말을 해두세요.

“다들 알고 있어요. 정문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살피도록 다섯 사람을 배치해 두었어요. 일을 터뜨리기 전에 미리 점을 찍어 두자는 거요.

휴스턴이 일어섰다. 무쇠 같은 색깔을 띠고 있는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거 보세요, 윌리 씨. 우리는 그놈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단 말이오. 정문 근처에는 보안관 보 놈들이 나와 있을 거요. 그놈들에게 피를 흘리게 하면 당신은 바로 붙들려 가게 되오.

“거기까지 다 생각을 해두었어요.” 윌리가 말했다.

“그놈들을 뒷길로 해서 들판으로 데리고 나갈 청년들이 다 배치되어 있다고요.

“좋아요. 아주 완전히 된 것 같소.” 휴스턴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렇지만 윌리 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잘 좀 하세요. 당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거요. 그놈들을 절대로 다치게 하면 안 됩니다. 몽둥이나 칼이나 권총 같은 물건을 쓰면 야단나는 거요.

“천만에요!' 윌리가 말했다.

“놈들한테 책잡힐 흔적은 하나도 남기지 않을 거요.

휴스턴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신을 철석같이 믿어 버리면 좋겠지만, 윌리 씨, 만약 그놈들한테 손을 대려거든 절대로 표시가 나지 않도록, 특히 피가 나지 않을 데를 손대도록 해 달라 이겁니다.

“그렇고말고요!” 윌리가 말했다.

“당신이 선발한 그 장정들을 다 괜찮은 놈들이겠지요?

“그럼요.

“좋아요. 만약 사태가 좀 까다롭게 돌아가면 나는 오른쪽 구석 댄스장 저쪽에 붙어 있을 테니까요.

윌리는 거수경례를 하는 시늉을 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휴스턴이 말했다.

“아이고, 모르겠다. 윌리의 부하들이 아무도 죽이지 말아야 할 텐데. 보안관놈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이 불쌍한 캠프를 못 건드려서 그럴까? 왜 우리를 그냥 놔두지 못하는 거지?

2반에서 나온 시무룩한 청년이 말했다.

“저는 선랜드토지가축회사가 있던 자리에서 살았었는데 열 사람 앞에 하나 꼴로 경관을 붙여 놓았어요.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사람이 2백 명이나 되는 곳에 수도꼭지는 꼭 하나밖에 없고요.

똥똥한 남자가 말했다.

“이 사람아, 제레미. 나한테는 그런 말 하지도 말게. 나도 거기에 있었어. 판잣집이 쫙 깔려 있지. 줄잡아서 한 서른다섯 채는 돼. 그런 게 열다섯 줄이야. 전체 가호에 변소는 열 개밖에 없고 그 냄새는 십 리 밖에까지 난다니까. 보안관 보 한 놈이 나한테 지독한 소리를 하더군. 그놈은 근처에 앉아 있다 그러는 거야. ‘그 망할 놈의 관청에서 마련해 준 캠프에 사는 놈들! 다른 가정에서 온수를 쓰니까 제 놈들도 더운 물을 쓰려고 하고, 수세식 변소가 좋다니까 그 주제에 또 수세식 변소를 쓰고 싶어 하는 거요. 그 망할 놈의 오키들은 무어든지 그런 거만 보면 환장을 해요. 그 캠프에서는 빨갱이 집회를 하는 모양이오. 이른바 모든 사람을 구제하는 방법을 의논한답시고 말이오.’ 이 따위 소리를 지껄이더라니까.

휴스턴이 물었다.

“그래 다들 그놈을 그냥 놓아두었소?

“아니, 그래서 거기에 한 조그만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묻더군요. ‘그 구제라는 게 무슨 뜻이요?’ 그러자 그 보안관 보 녀석 말이, ‘구제라는 말은 우리 납세자들이 세금을 내면 당신네 같은 더러운 오키들이 다 떼어먹는다는 뜻이오.’ ‘우리도 물품세를 내고 휘발유세, 담배세를 다 내는데요.’ 그 작은 남자가 말하니까, 그놈 하는 말이, ‘농부들은 목화 값을 파운드당 4센트씩이나 정부에서 받고 있는데 그게 다 구제’라는 거요. ‘또 철도회사와 해운회사들도 정부에서 보조금을 받고 있는데 그게 다 구제가 아니냐?’는 거요. 그러니까 그 작은 남자가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없으면 그 많은 농작물을 어떻게 다 거두어들이겠습니까?’ 하고 따지더군요.

똥똥한 남자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보안관 보 녀석이 뭐래요?” 휴스턴이 물었다.

“아, 그랬더니 녀석이 발끈 화를 내는 거요. ‘당신들 같은 그 경을 칠 빨갱이들이 언제나 사람들을 들쑤시고 선동하는 거요! 당신 나 좀 따라와야겠소.’ 그러더니 그놈은 그 작은 남자를 끌고 가서 감옥에 집어넣고 부랑죄라는 명목을 걸어서 두 달 동안이나 콩밥을 먹였다오.

“일자리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 부랑자로 몬단 말이요?” 티모시 윌리스가 물었다.

똥똥한 남자가 픽하고 웃었다.

“당신도 그만한 건 아시잖아요?” 그가 말했다.

“부랑자는 다른 게 부랑자가 아니고 어느 놈이고 경찰의 비위에 거슬린 놈은 다 부랑자 되는 거요. 그러니까 그놈들이 바로 우리 이 캠프를 미워하는 거 아니오? 경찰이 여기에는 얼씬도 못 하니까 싫겠지요. 여기는 미국이지 캘리포니아가 아니오.

휴스턴이 한숨을 쉬었다.

“언제까지나 여기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러다가는 멀지 않아 여기도 쫓겨나겠구먼. 나는 여기가 참 맘에 드는데, 사람들도 다 좋고 말이오. 그놈들은 우리하고 무슨 원수가 졌기에 가만두지 못하고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고 못살게 굴까? 만약 그놈들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으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그놈들과 싸우게 될 거요. 틀림없어요.

그는 자기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되도록 자중하고 평화적으로 해야 하오. 우리 위원회가 자제력을 잃고 기분대로 화나는 대로 행동할 권리는 없으니까요.” 그는 자신에게 일깨워 주듯 말했다.

3반에서 나온 똥똥한 사람이 말했다.

“우리 위원회 전체가 머리가 돌았다 생각하는 사람 있다면 어디 한번 우리를 시험해 보라지. 우리 3반에서 싸움이 벌어졌어요. 여자들끼리 말이오. 서로 이름을 부르며 욕을 퍼붓더니 나중에는 쓰레기를 던져대더군. 부인위원회에서 그걸 제대로 다룰 수가 없었는지 나를 찾아왔어요. 싸움을 중앙위원회에 걸어 달랬지요. 그래서 내가 여자들 문제는 여자들 자신들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지요. 우리가 그런 쓰레기 싸움까지 말려들기는 싫다고요.

휴스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참 잘하셨소.

밖에는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감에 따라 현악단의 연습하는 소리가 점점 높아갔다. 불빛이 번쩍거리는 속에서 남자 두 사람이 댄스장에 연결된 전깃줄을 점검하고 있었다. 한 청년이 기타를 들고 ‘다운 홈 블루스’를 노래하면서 교묘한 솜씨로 화음 반주를 했다. 두 번째 코러스에 가서 하모니카 세 개와 바이올린 하나가 가담했다. 천막에서 나온 사람들이 댄스장 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깔끔한 데님 무명옷을, 그리고 여자들은 깅엄 무명옷을 차려 입고 있었다. 그들은 댄스장 가까이까지 와서 조용히 선 채 기다렸다. 불빛을 받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열기에 차서 밝아 왔다.

지정석 주위에는 높은 철조망이 쳐있었고 울타리를 따라 한 50보 간격으로 망을 보는 사람들이 풀밭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손님들을 태운 차들이 속속 도착했다. 소농장주들과 그들의 가족들, 그리고 다른 캠프에 사는 이주민들이었다. 손님들은 정문을 통과하면서 자기를 초대해 준 이 캠프 내의 거주자의 이름을 댔다.

현악단은 라일 무도곡을 연주했고 소리도 있는 대로 크게 내고 있었다. 이제는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쟁이들은 자기들의 천막 앞에 앉아서 굳어진 얼굴에 경멸의 빛을 띠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말도 주고받지 않았고 죄악만 지켜보면서 목전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조드네 천막 속에서 루시와 윈필드가 남은 음식을 모조리 뒤져서 후딱 먹어 치우고 댄스장 쪽으로 달려갔다. 어머니가 그들을 도로 불러 들였다. 두 아이들의 턱을 손으로 받쳐 치켜 올리더니 콧구멍을 들여다보고 귀때기를 잡아당겨서 귓속도 살피고 나서 아이들을 위생반에 보내어 손을 한번 씻게 했다. 아이들은 위생반 건물 뒤로 돌아서 그대로 댄스장 쪽으로 달아나서 밴드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어린애들 틈에 끼어 버렸다.

앨은 저녁을 마치고 톰의 면도날을 갖고 면도를 하는 데 반 시간이나 걸렸다. 그는 몸에 찰싹 붙는 모직 양복에다 줄무늬가 있는 셔츠가 있었다. 목욕도 하고 머리도 깔끔하게 벗어서 뒤로 넘겼다. 목욕탕에서 사람이 다 나가고 잠시 혼자만 있게 되자 그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옆으로 살짝 돌아서서 미소를 지울 때의 옆모습이 어떤지를 살폈다. 보라색 와이셔츠 밴드를 팔뚝에 맨 다음 그 찰싹 붙는 저고리를 걸쳤다. 화장지를 뜯어서 그걸로 노란색 구두를 문지르고 있는데 한 지각생이 목욕을 하러 들어왔다. 앨은 허겁지겁 위생반 건물을 나와서 댄스장 쪽으로 발을 옮기며 눈이 휘둥그레져 가지고 처녀들을 살폈다. 댄스장 가까이에서 한 예쁘장한 금발 소녀가 천막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어정어정 다가가서 자기의 셔츠가 잘 보이도록 저고리를 활짝 벌렸다.

“오늘밤 춤 안 추시겠어요?” 그가 물었다.

소녀는 얼굴을 돌려 버리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 좀 걸었다고 해서 안 될 것 있어요? 오늘밤 나하고 춤이나 한번 안 추시겠어요?

그러면서 그는 소녀의 태도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왈츠도 출 줄 아는데.

소녀는 수줍은 듯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해요? 왈츠 못 추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나같이 추는 사람은 없을 거요.” 앨이 말했다.

음악소리가 커졌다. 그는 한쪽 발을 박자에 맞추어 굴렀다.

“자, 갑시다.

웬 덩치 큰 여자가 천막 밖으로 고개를 내밀더니 앨 쪽을 향해 얼굴을 찡그렸다.

“걔 건드리지 말고 어서 가시오.” 그녀가 사납게 말했다.

“인제 곧 시집을 갈 거요. 걔 신랑이 곧 데리러 온다고요.

앨은 소녀 쪽으로 경쾌한 윙크를 보내더니 음악에 맞추어 발을 구르고 어깨와 팔을 흔들면서 가버렸다. 소녀가 그의 뒤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접시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여보, 존하고 나하고는 사람들을 좀 찾아가서 일자리나 물어 보고 오겠어.

그는 어머니에게 설명을 하더니 존 삼촌을 데리고 관리책임자의 집 쪽으로 걸어갔다. 톰은 가게에서 산 빵을 한 조각 잘라 접시 속 스튜의 고깃국물에 찍어 먹었다. 그가 자기 접시를 어머니에게 집어 주자 그녀는 그것을 양동이의 더운물 속에 넣고 씻어서 로자샤안에게 닦으라고 주었다.

“너는 춤추러 안 가니?” 어머니가 물었다.

“가야지요.” 톰이 말했다.

“나는 위원이 됐어요. 찾아오는 사람들을 돌봐주게 되어 있어요.

“벌써 감투를 썼니?” 어머니가 말했다.

“아마 일자리가 있으니까 그런 것도 시키는 모양이구나.

로자샤안이 몸을 돌려 접시를 치웠다.

그걸 본 톰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말했다.

“야, 너 점점 커지는구나!

로자샤안이 살포시 얼굴을 붉히며 어머니한테 다른 접시를 받아 들었다.

“그래, 자꾸 커진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리고 점점 더 예뻐지잖아?” 톰이 말했다.

로자샤안은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서 고개를 수그렸다.

“오빠, 자꾸 그러지 마!” 그녀가 가만 말했다.

“그럼! 예뻐지고말고.” 어머니가 말했다.

“애를 배면 여자는 예뻐지는 거야.

톰이 웃었다.

“저렇게 커지다가는 손수레라도 타고 다녀야겠는데?

“아이 그만해, 오빠!” 로자샤안이 소리를 지르며 천막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머니가 킬킬거리고 웃었다.

“너 자꾸 걔를 건드리지 마라.

“그래야 좋아하는 걸요?” 톰이 말했다.

“그렇기는 해도 괜히 쓸데없이 걱정하기 쉽다. 더군다나 지금 코니 때문에 잔뜩 화가 나있단다.

“아따, 그까짓 놈은 잊어버리는 게 나을 걸요. 그놈은 아마 지금은 미합중국 대통령이 되는 공부를 하고 있을 텐데.

“걔를 자꾸 고민하도록 건드리지 마라. 아직 걱정거리 많은 애다.

윌리 이튼이 가까이 오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톰 조드지요?

“그런데요.

“내가 오락위원장인데 당신이 좀 도와주어야겠소. 당신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소.

“그럼요. 뭐든지 같이하지요.” 톰이 말했다.

“여기 이분이 우리 어머니예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윌리가 말했다.

“당신을 처음에는 정문에 배치했다가 나중에 댄스장으로 보내겠소. 사람들이 들어올 때 잘 보고 있다 막을 놈은 막으시오. 다른 사람하고 같이하게 될 거요. 나중에 댄스장에 들어가서 춤도 추면서 계속 살피도록 하시오.

“알았습니다. 그대로 하지요.” 톰이 말했다.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무 문제가 없을까요?

“염려 마세요. 아주머니.” 윌리가 말했다.

“자, 그럼 가지요. 어머니, 이따 댄스장에 나오세요.

두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정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어머니는 씻은 접시를 상자 위에 쌓았다.

“이리 나온!” 그녀는 소리를 쳐도 아무 대답이 없자 다시 불렀다.

“얘, 로자샤안, 밖으로 나오너라.

딸이 천막에 나왔다. 그러더니 접시 닦는 일을 계속했다.

“오빠가 괜히 널 놀리느라고 그러는 거야.

“알아요. 그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것이 싫어요.

“그걸 어떻게 안 보겠니? 누구나 보겠지.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여자가 임신한 것을 보면 마음이 흐뭇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좀 재미도 있고 즐겁게 느껴지는 거야. 너는 춤추는 데에 안 가니?

“가고 싶었는데, 모르겠어요. 코니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머니, 정말 코니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인제 못 참겠어요.

어머니가 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런 줄 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로자샤안, 우리 집안사람들에게 수치스러운 누명을 끼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안 그래요, 어머니.

“그럼, 안 그래야지. 우리는 갖은 고초를 다 겪어 왔지만 그래도 남한테 수치스러운 짓은 안 하고 살아오지 않았니?

딸의 입술은 떨렸다.

“난… 난 춤추러 안 갈래요. 갈 수 없어요. 어머니, 난 어쩌면 좋아요?

그녀는 털썩 주저앉아서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어머니는 행주에 손을 닦고 로자샤안 앞에 쭈그리고 앉더니 로자샤안의 머리에 두 손을 얹었다.

“아이 딱하지. 이렇게 착한 애가! 엄마가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너무 걱정 마라.” 어머니가 달랬다.

그리고 딸의 관심을 끌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이제부터 너하고 나하고 무얼 하는지 아니? 저기 춤추는 데 가자. 거기 가 앉아서 구경이라도 하자. 혹시 누가 와서 같이 추자고 하면 네가 몸이 좀 안 좋다고 하마. 몸이 아프다고 말이다. 그저 앉아서 음악이나 들으렴.

로자샤안이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 나 춤 못 추게 하실 거죠?

“그래.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해주세요.

딸이 한숨을 내쉬면서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어머니, 난 어떻게 해요? 어쩌면 좋을지 몰라요. 정말 몰라요.

어머니가 그녀의 무릎을 쓰다듬었다.

“이봐라. 날 좀 봐라. 내 말 좀 들어봐.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 잘될 거다. 조금만 참아라. 정말이다. , 일어나라. 가서 세수하고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고 춤추는 데에 구경이나 가자.

그녀는 로자샤안을 위생반 건물 쪽으로 데리고 갔다.

아버지와 존 삼촌은 한 무리의 다른 남자들과 함께 사무실 현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우리는 오늘 일자리를 얻을 뻔했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꼭 한 발짝 늦었어요. 가니까 벌써 두 사람을 잡아 놓았더군요. 그런데 참 우스운 일도 다 있습니다. 거기에 허수아비 같은 고용책임자가 있는데 그 사람 말이, ‘우리는 금방 두 사람을 썼소. 물론 시간당 20센트짜리 인부라면 더 쓸 수도 있지요. 그런 인부는 얼마든지 더 써주겠소. 당신들 캠프에 돌아가면 20센트짜리 인부를 얼마든지 써주는 데가 있다고 전해 주시오.’ 하더라고요.

쭈그리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흥분이 되는지 몸을 움직였다. 시커먼 모자 그늘에 얼굴이 가려진 어깨가 딱 벌어진 한 남자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쓰다듬더니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빌어먹을 놈들 수작, 나도 다 알지요! 그런 식으로 사람을 쓰는 거요. 배고픈 사람들을 말이오. 20센트를 받아서는 식구들 입에 풀칠도 못 하잖소? 하지만 그거라도 감지덕지해서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을 오라 했다가 또 가라 했다가 하는 거요. 망할 놈들! 인제 그러다가는 우리가 오히려 돈을 내야 일을 하게 될 거요.

“우리는 그거라도 할 걸 그랬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는 아무 일자리도 없으니까 그거라도 해두는 건데 잘못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그 허수아비 같은 놈이 있는데, 그놈들 인상을 보니까 기분이 안 좋습디다.

까만 모자가 말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머리가 돌 지경이라오. 나도 어떤 사람한테 가서 일을 했는데 곡식을 거둘 수가 없는 거요. 그 곡식을 팔아서 들어오는 수익금보다 거두어들이는 비용이 더 나간다는 거요.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만.

“내 생각에는…” 아버지가 말을 멈추었다.

둘러앉은 사람들이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내 생각에는 우리에게 땅이 한 조각만 있다면, 여자는 거기에다 시장에 내다 팔 채소 같은 거나 좀 심고 돼지하고 닭이나 몇 마리 기르고 남자들은 나가서 일을 하면서 애들을 학교라도 보내고 하면 되겠는데. 그런데 여기는 그런 학교도 없는 모양입디다.

“우리 애들은 학교에 가도 재미가 없대요.” 까만 모자가 말했다.

“왜 재미가 없어요? 그 학교들은 아주 좋던데.

“옷도 다 떨어진 누더기에 신발도 못 신고 있는데, 다른 아이들은 양말까지 신고 깔끔한 바지를 입고 다니면서 ‘야, 오키, 오키!’ 하고 놀린다는군요. 우리 집 녀석은 학교 가면 날마다 싸우고 옵디다. 또 싸움도 잘하지요. 아주 야무지게 생긴 새끼지요. 날마다 싸움을 안 할 수가 없더래요. 옷이 다 찢어지고 코피를 흘리면서 집에 돌아오지요. 그러면 또 제 어미한테 얻어맞지요. 그래서 내가 놔두라고 한다오. 그 불쌍한 어린 녀석을 때려 주면 무얼 할 거요? 녀석은 다른 애들 여러 놈을 두들겨 준 모양이오. 그 비싼 바지 입은 아이들을 말이오. 제기랄, 나도 모르겠소.

아버지가 말했다.

“자, 그러니 나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우리는 돈도 다 떨어졌다오. 우리 아들놈은 임시나마 일을 하고는 있지만 그걸로 식구들이 다 먹을 수는 없을 테고. 여하튼 가서 그 20센트짜리라도 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까만 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텁수룩한 턱이 불빛에 드러났다. 힘줄이 돋아나 있는 목줄기에는 마치 편평한 융단처럼 구레나룻 수염이 덮여 있었다.

“그렇소!” 그가 침통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걸 하시오. 나는 25센트짜리 인부요. 그런데 당신은 20센트를 받고 내 밥통을 빼앗아 가는 거요. 그러다가 내 배가 고프면 또 나는 15센트로 당신 밥통을 빼앗을 거요. 좋소, 어서 가서 하시오.

“그러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오?” 아버지가 물었다.

“나로서도 당신이 25센트를 받게 해주기 위해서 굶어 죽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요?

까만 모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턱이 다시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모르겠소, 나도 모르겠소.” 그가 내뱉듯이 말했다.

“하루 종일 죽도록 일만 하고 배는 배대로 곯으면서 늘 골치 아픈 생각만 해야 하니. 애들도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한다오. 인제 그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없어요. 생각을 하면 미칠 것 같소.

둘러앉은 사람들은 불안스럽게 발을 또닥거리고 있었다.

톰은 정문에 서서 춤을 추러 오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밝은 조명이 사람들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윌리 이튼이 말했다.

“눈을 좀 잘 뜨고 보시오. 내가 주울 비텔라를 보내 줄 테니까. 체로키 피가 반쯤 섞인 놈인데 괜찮은 놈이지요. 잘 보고 있다가 수상한 놈 있거든, 알겠지?

“오케이.” 톰이 말했다.

농장주의 가족들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처녀들은 머리를 땋았고 총각들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주울이 가까이 오더니 톰의 옆에 붙어 섰다.

“나하고 같이 합시다.” 그가 말했다.

톰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매부리코에 높은 광대뼈가 거무스름하게 튀어나왔고 턱이 홀쭉하게 미끄러져 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반쯤 인디언이라 들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완전 인디언 같은데요?

“아니오.” 주울이 말했다.

“반이오. 차라리 완전 인디언이었더라면 좋겠소. 그러면 지정 보류지 있을 테니까. 그 인디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잘 해놓고 산다오.

“저 사람들 좀 보시오.” 톰이 말했다.

손님들이 정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농장주 가족들, 그리고 주로 개울가에 캠프를 친 이주민들이었다. 애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구 뛰려고 하고, 어른들은 애들의 손을 꼭 잡아 묶고 있었다.

주울이 말했다.

“여기에서 하는 춤은 재미있는 점이 있지요.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쥐뿔도 가진 것은 없지만 그래도 친구들한테 이런 데라도 놀러 오라고 초대할 수 있으니까 그것으로라도 한몫 보는 셈이오. 또 다른 데 사는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우리 캠프 사람들을 좀 알아주는 것도 같고. 나는 땅을 좀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 가서 일을 했는데 그 사람도 여기에 춤을 추러 오지요. 내가 오라고 했더니 왔더군요. 애인이나 부인도 데리고 올 만 한 데라서. 어허! 저쪽 좀 보시오.

젊은 남자 셋이 정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청바지를 입은 젊은 일꾼들이었다. 그들은 한데 붙어 가까이 오고 있었다. 정문에서 수위가 그들에게 몇 마디 물었다. 그들은 뭐라 대답하더니 통과했다.

“저놈들 좀 잘 보아야 하겠는데?” 그가 말하면서 수위 쪽으로 갔다.

“저 세 사람은 누가 초대했어요?

“제4반에 사는 잭슨이라는 사람이랍디다.

주울이 톰 쪽으로 돌아왔다.

“바로 저놈들이 수상한데?

“어떻게 아오?

“모르지만 그냥 기분이 그런 것 같소. 그놈들 태도가 좀 불안해 보이는데 당신이 좀 따라가서 윌리에게 그놈들을 잘 살피라고 전하시오. 그리고 윌리에게 4반에 잭슨이라는 사람이 진짜 있는지 좀 알아보라고 하시오. 그놈들을 잘 좀 조사해 보라고 말이오. 여기는 나 혼자 지킬 테니까.

톰이 그 세 젊은이 뒤를 어슬렁거리고 따랐다. 그들은 댄스장 쪽으로 조용히 가더니 군중 끝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톰은 윌리가 밴드 가까이에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왜 그래?” 윌리가 물었다.

“저기 세 놈 말이오.

“그런데?

“그놈들 말이 제4반 잭슨이란 사람한테 초대를 받았다는데 좀 수상해서 말이오.

윌리가 목을 길게 뽑아 두리번거리더니 휴스턴을 불러 자기 쪽으로 오게 했다.

“저기 세 놈들 말이야.” 그가 말했다.

“제4반에 사는 잭슨이라는 사람을 찾아서, 저놈들을 진짜 초대했는지 물어 보아야겠어.

휴스턴이 발길을 돌려 걸어갔다. 이윽고 뼈만 앙상한 말라빠진 캔자스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 사람이 잭슨이오.” 휴스턴이 말했다.

“이거 보세요, 잭슨 씨. 저기 세 놈들 보이지요?

“그런데요?

“당신이 저 사람들을 오라고 했어요?

“아뇨.

“전에 본 일이 있는 놈들이오?

잭슨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늘을 쳐다보았다.

“아, 그래요. 전에 그레고리 집에서 같이 일을 했었어요.

“그래서 당신 이름을 아는군요.

“그렇지요. 바로 옆에서 일을 했으니까.

“알았어요.” 휴스턴이 말했다.

“당신은 그놈들 옆에 가지 마시오. 그놈들이 얌전하게만 하면 내쫓지 않아도 되오. 고맙소, 잭슨 씨.

“수고하세요.” 그가 톰에게 말했다.

“저놈들이 좀 수상한데요.

“주울이 보긴 잘 보았군요.” 톰이 말했다.

“그 사람은 잘 볼 거요.” 윌리가 말했다.

“인디언 피가 섞였으니까 냄새 하나는 잘 맡을 거라고요. 내가 가서 저놈들을 우리 위원들에게 미리 알려 놓아야겠군.

열대여섯 가량 먹어 보이는 소년 하나가 군중 틈을 비집고 달려 나왔다.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휴스턴 앞에서 멈추었다.

“휴스턴 씨.” 그가 말했다.

“저는 제자리에 가있었어요. 그런데 유칼리나무가 있는 그 여섯 사람이나 타고 있는 차가 와 있고 또 북쪽 큰 길 쪽에 네 사람이 탄 차가 와 있었어요. 제가 가서 성냥을 빌려 달라면서 보니까 그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어요.

휴스턴의 눈이 사납게 굳어졌다.

“윌리 씨.” 그가 불렀다.

“당신은 우리가 말한 대로 다 손을 써 놓았지요.

윌리가 여유 있게 웃었다.

“염려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휴스턴 씨.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마시오. 조심해야 해요. 될 수 있는 한 조용히 그리고 점잖게 수습합시다. 내가 좀 만나 보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우리 천막에 가 있겠소.

“여하튼 해봅시다.” 윌리가 말했다.

춤이 아직 정식으로 시작되지는 않고 있었다. 윌리가 무대 위로 올라갔다.

“여러분, 스퀘어 댄스의 짝을 정하십시오.” 그가 소리쳤다.

처녀 총각들 그리고 젊은 남녀가 왔다 갔다 하더니 널따란 무도장 위에 여덟 쌍이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여자들은 손을 앞으로 뻗어서 손가락을 꿈틀거리고 있었고 남자들은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었다. 무도장 주위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엷은 미소를 띠고 어린애들이 뛰쳐나가지 못하게 붙들고 있었다. 멀리서 예수쟁이들이 굳은 얼굴에 경멸의 눈초리를 빛내며 이 죄악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니와 로자샤안은 벤치에 걸터앉아 구경을 하고 있었다. 사내 녀석들이 와서 로자샤안에게 춤을 권할 때마다 어머니가 말했다.

“아니, 얘는 몸이 아파요.

그러면 로자샤안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눈을 반짝거렸다.

사회자가 무대 한복판에 나와서 손을 치켜들었다.

“자, 준비됐죠? 그럼 시작!

음악이 울려 나왔다. ‘병아리 무도곡’이 순간적으로 짜릿한 선율을 타고 퍼졌다. 바이올린이 삐삐거리고 하모니카가 날카로운 콧소리를 냈으며 기타가 굵직한 저음을 깔았다. 지휘자가 빙빙 도는 순서를 불렀고 스퀘어가 거기에 따라 움직였다. 앞으로 갔다 뒤로 돌았다 하면서 손을 뺑뺑 돌려 여자를 공기 놀리듯 돌려댔다. 지휘자가 열광하면서 발을 굴러 박자를 맞추며 앞뒤로 돌았고 춤추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 다니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자세로 선회하는 순서를 불러댔다.

“부인을 돌리고, 멋진 폼으로 깨끗이 몸을 놀려요. 손을 잡고 돌다가 다시 놓고, , 다 나가세요.

음악이 높아졌다가 다시 내려갔다. 움직이는 발굽들이 마치 북을 치듯이 마룻바닥을 두드리면 박자를 맞추었다.

“오른쪽으로 돌고, 왼쪽으로 돌았다가, 흩어져서, 흩어져서 뒤로, 뒤로 나란히.” 지휘자는 높게 떨리는 단음으로 노래 부르듯 외쳤다.

얌전하게 빗어 올린 아가씨들 머리는 이제 다 흩어져 있었다. 남자들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혔다. 차츰 열기를 더해가자 능숙한 춤꾼들은 살짝살짝 중간 스텝까지 넣고 있었다. 마룻바닥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구경을 하고 있던 늙은이들도 리듬에 맞추어 자기들의 손을 가만히 쓰다듬었고 발을 동동거렸다. 그들은 살며시 미소를 머금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머니가 로자샤안의 귓전 가까이에 고개를 기대었다.

“너는 아마 모를 거다만 너희 아버지도 한때는 참 춤깨나 잘 추었단다.” 어머니가 빙긋이 웃었다.

“이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까 옛 생각이 나는구나.

구경하는 사람들 얼굴마다 옛날을 추억하는 미소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20년 전 머스코기 근처에 한 눈먼 바이올린 악사가 있었단다.

“한 발짝 뗄 때마다 발꿈치를 네 번씩이나 두들기는 사람을 본 일이 있어요.

“다코타에 사는 스웨덴 계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아니? 마룻바닥에 후춧가루를 뿌리면 여자들 치맛자락이 펄럭거려 여자들을 더 자극시킨다더라. 여자들이 마치 나이 먹은 노처녀나 말괄량이들처럼 흥분해서 열을 올린대. 스웨덴 사람들은 그런 짓을 한다는구나.

멀리에서는 예수쟁이들이 밖에 나가지 못해서 애를 태우고 있는 자기네 아이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보아라. 저 사람들은 지금 부지깽이를 타고 지옥으로 줄달음치고 있는 거다. 우리 하느님의 아들딸들이 저런 일을 보게 되다니 참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면 그들의 아이들은 말없이 속만 태우고 있었다.

“자, 한 바퀴만 더 돌고 나서 좀 쉬겠어요.” 지휘자가 소리쳤다.

“이제 곧 쉴 테니까 이번에는 부인들을 힘껏 돌려주세요.

여자들은 땀이 흥건히 배어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들은 입을 벌린 채 아주 경건할 정도로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총각들은 기다란 머리채를 뒤로 치켜 넘기고 날뛰면서 발가락 끝을 꼿꼿이 세워 올리고 발꿈치를 또닥거렸다. 스퀘어가 들어갔다 나갔다 하며 너울거렸고 엇갈리고 교차하고 뒤로 돌고 가로질러 선회하면서 음악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갑자기 음악이 멎었다. 춤추던 사람들도 피로에 젖어 우뚝 서있었다. 어린애들은 어린들의 팔을 뿌리치고 무도장 마루에 뛰어 들어갔다. 서로 붙잡고 미친 듯 날뛰며 미끄러지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남의 모자를 빼앗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악단 단원들은 일어서서 한 번씩 기지개를 켜더니 다시 앉았다. 기타들만 조용한 가락을 연주하고 있었다.

윌리가 다시 나서서 소리쳤다.

“다시 스퀘어 짝을 맞추세요.

춤출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서 새 짝을 찾기 위해 허둥거렸다. 톰은 세 청년들 가까이에 지켜서 있었다. 그는 그 중 한 명이 사람들 틈을 헤치고 마루 위에 올라가 짝을 짓고 있는 한 여자 쪽으로 돌진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얼른 윌리에게 손짓을 했고 윌리는 바이올린 주자에게 무어라 소곤거렸다. 바이올린 주자는 활을 한 번 죽 당겼다. 20명가량의 젊은이들이 마루 위를 가로질러 서서히 다가왔다. 세 남자가 스퀘어 가까이까지 진출했다.

그 중의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이 아가씨하고 출 거야!

금발의 소년 하나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 아가씨는 내 짝이오.

“잔소리 마, 이 개새끼야!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세 남자가 어느 사이에 청년들의 벽에 포위되어 있었다. 누구 손인지도 모르게 그들 팔목을 움켜잡은 사람들이 있었다. 세 남자를 둘러싼 벽이 서서히 무도장 밖으로 움직여갔다.

윌리가 소리를 질렀다.

“자, 시작!

음악이 울렸다. 지휘자가 구호로 박자를 맞추는 가운데 발굽들이 마룻바닥을 두들겨 댔다.

휘장을 씌운 순찰차 한 대가 정문으로 들어섰다. 운전자가 소리를 질렀다.

“문 열어! 여기에 난동이 벌어졌다지?

수위는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아, 아니오. 무슨 난동이오? 저 음악 소리 좀 들어 보시오. 당신들은 누구요?

“보안관 보란 말이오.

“영장이 있으시오?

“난동이 일어나면 영장 같은 건 소용없는 거요.

“아무런 시끄러운 일이 없는데요.” 정문 수위가 버텼다.

차에 탄 사람들은 음악소리와 지휘자의 구호를 들었다. 그러더니 차가 천천히 후진해 네거리까지 물러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 남자를 나포한 청년들은 그들의 손을 모두 뒤로 하여 묶고 입을 틀어막았다. 어두운 데까지 끌고 와서는 뭉쳐있던 사람들은 한쪽을 텄다.

톰이 말했다.

“아주 멋지게 해치웠군.

그는 한 놈을 뒤에서 꼭 움켜잡고 있었다.

윌리가 무도장으로부터 그들 쪽으로 달려왔다.

“아주 잘했어. 인제 여섯 명만 있으면 되겠어. 휴스턴 씨가 이 친구들을 좀 만나 보시겠대.” 그가 말했다.

휴스턴 씨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이게 그 사람들이군?

“그래요.” 주울이 말했다.

“바로 움직일 찰나에 잡아 버렸지요. 이놈들은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했어요.

“어디 좀 봅시다.

붙잡힌 사람들은 휴스턴 쪽으로 돌려세워졌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휴스턴이 플래시를 들고 세 사람을 하나씩 비춰 보았다.

“자네들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누가 시켜서 그랬어?

“제기랄, 우리가 하긴 무얼 했다고 그래요? 우리는 그냥 춤 좀 추려고 그랬는데요.

“이야기를 바른대로 해. 이 사람아.” 주울이 말했다.

“아까 그 소년을 때려 주려 했지?

톰이 말했다.

“휴스턴 씨, 이 친구들이 시비했을 때 누가 휘파람을 불더군요.

“그랬어. 나도 알았어. 경찰들이 바로 정문에 나타났지.

그는 다시 돌아섰다.

“자네들을 해치지 않을 테니 어서 말해 봐. 누가 시켜서 우리 무도회를 난장판으로 만들려고 한 거지?

그는 대답을 기다려 보았다.

“자네들도 우리와 같은 어려운 사람들 아닌가?” 휴스턴이 비통하게 말했다.

“우리하고 같은 족속이란 말이야. 대체 어떻게 오게 됐나? 물어 보나마나 다 뻔한 일이지만.

“빌어먹을!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오?

“그래, 누가 보냈나? 누가 돈을 주고 가라고 했지?

“아직 돈도 못 받았소.

“끝내 돈은 못 받을 거야. 싸움을 안 했으니 돈은 못 받게 됐지. 내말 맞았지?

붙들린 놈 중 하나가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우리는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휴스턴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는 조용히 말했다.

“좋다. 그럼 말하지 마라. 그런데 내 말 좀 들어 봐. 자네들과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한테 칼을 들이대지 마. 알겠어? 우리는 질서를 지키고 또 즐겁게 지내면서 평화롭게 살려는 사람들이야. 그걸 파괴하려고 하지 말란 말이야. 자네들도 좀 생각해 봐. 그렇게 하면 자네들은 마치 자기 자신들을 해치고 있는 게 아닌가?

“자, 다들 저 사람들을 뒤쪽 울타리 너머로 쫓아 버리시오. 그리고 절대로 구타하지 않도록.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오.

청년들이 세 남자를 데리고 캠프 뒤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휴스턴은 그들의 뒤를 지켜보고 있었다.

주울이 말했다.

“이놈들을 발길로 한 대씩만 차줍시다.

“안 돼. 그러지마.” 윌리가 외쳤다.

“그건 하지 말자고 했어.

“한 번씩만 살짝 해줄 거요. 울타리 너머로 날아갈 만큼만 말예요.

주울은 한 번 꼭 차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안 된다니까 그래.” 윌리가 말렸다.

“이 사람들아, 내 말 좀 들어봐.” 그가 말했다.

“이번에는 자네들을 그냥 곱게 돌려보내 주지만, 가서 이렇게 전하란 말이야. 만약 이런 일이 또 일어나면 그때에는 어떤 놈이 오더라도 그냥 나가지는 못할 거라고 말이야. 뼈다귀를 모조리 부러뜨려주겠다고 말이야. 가서 그놈들한테 그렇게 전하라고. 휴스턴 씨의 말이 자네들도 우리와 똑같은 어려운 사람들이라고 그러는데, 아마 그렇겠지. 그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그들은 울타리 가까이까지 왔다. 울타리에 앉아서 망보던 사람들이 일어서 다가왔다.

“좀 일찍 돌아가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윌리가 말했다.

세 남자는 울타리를 기어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청년들은 재빨리 무도장으로 돌아갔다. 스토링 밴드에서는 ‘그리운 댄탁커’ 음악이 흐느껴 울리고 있었다.

건너편 사무실 가까이에는 아직도 어른들이 쭈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음악 소리가 거기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세상은 차차 변해가고 있어요. 어떻게 변해 가는지는 몰라도 말이오. 아마 우리는 그 좋은 세상을 못 보고 죽을지 모르지만, 여하튼 무슨 변화가 오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요. 사람들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지를 못하는 것 같아요. 하도 흥분을 하고 있어서 차근차근하게 생각들을 못 할 지경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자 까만 모자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고 그의 텁수룩한 얼굴에 불빛이 떨어졌다. 그는 땅바닥에서 잔돌들을 주워 모아 마치 공기놀이를 하듯이 엄지손가락으로 툭툭 튀기고 있었다.

“나는 모르겠군요. 당신 말마따나 변화가 오기는 오는 모양이오. 오하이오의 아크론에서 일어났던 일을 누가 이야기해 주는데, 거기에 있는 고무회사에서 그랬답디다. 품삯이 쌀 줄 알고 산간 지대에 사는 사람들을 고용했다지요. 그런데 산골짜기에서 온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노동조합에 가입했대요. 그러다보니까 아주 엉뚱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지요. 상인들이니 재항군인 나부랭이니 하는 자들이 다 훈련을 시작하면서 ‘과격파!’라는 구호를 고함치고 다녔다오. 그자들은 당장 노동조합을 아크론에서 쫓아내려는 거였죠. 목사들은 날마다 설교를 늘어놓지, 신문들은 입을 모아 떠들어대지. 또 고무회사에서는 곡괭이 자루를 준비하고 최루가스를 사들였대요. 그러니 속을 모르는 놈들은 그 산골짜기 놈들이 지독한 악당들인 줄 알 거 아니오?

그는 말을 멈추더니 손가락 장난을 할 돌멩이를 더 주워 모았다.

“지난 3월이었는데 어느 일요일 날, 그 산골짜기에서 온 사람들 한 5천 명이 교외로 칠면조 사냥을 나갔대요. 5천 명 이 총을 지고 시내로 한복판을 행진했지요. 그래서 칠면조 사냥을 마치고 다시 시내로 행진해 돌아 왔지요. 그 이상 아무 다른 짓을 한 것이 없다고요.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아무 문제가 없더래요. 시위대원들도 곡괭이를 도로 거두어 버리고 상인들은 장사를 하고, 곤봉 세례를 받은 사람도 없고 몸에 타르와 새털 같은 것을 발라서 사형을 당한 사람도 하나도 없었더래요. 죽은 사람은 물론 하나도 없고.

오랫동안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까만 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는 사정이 아주 고약해지기만 하군요. 그놈들은 난민 캠프에 불이나 지르고 사람까지 마구 때리니 말이오. 나는 좀 생각을 해보았지요. 우리도 다 총이 있으니까 그 칠면조 사냥 클럽이 나 만들어서 일요일마다 모임이나 갖는 게 어떨까 하고 말이오.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땅으로 내리깔았다. 그들은 불안스레 발을 다독거리면서 체중을 양쪽 발에 번갈아 옮기며 서있었다.

25

캘리포니아의 봄은 아름답다. 골짜기마다 과일 나무에 연분홍색 꽃이 피어 향기를 뿜어내고 낮게 깔린 물이 마치 바다를 이루는 듯했다. 그러면 포도덩굴 순이 마디마디 뒤틀린 포도덩굴로부터 부풀어 올라 나무줄기를 뒤덮고 폭포처럼 매달리기 시작한다. 파란빛으로 가득 찬 언덕은 마치 둥글고 풍만한 젖가슴처럼 부풀어 오른다. 평평한 채소밭에는 몇 마일씩 기다란 이랑이 뻗어 있어 파릇파릇한 상추나 갸름한 양배추, 그리고 엉겅퀴가 마치 속세를 벗어난 듯한 풍경을 이룬다.

나무마다 새잎이 터져 나오고 꽃잎들은 떨어져서 땅위에 희고 붉은 융단을 깔아 놓는다. 꽃봉오리들이 부풀고 커져서 색깔을 더해 간다. 앵두, 사과, 복숭아, , 그리고 열매 속에 꽃을 감추는 무화과 등이다. 캘리포니아 방방곡곡이 과일과 채소 농사를 서두르면 나무마다 과일이 무성하게 열리고, 열매의 무게에 눌린 가지들이 점점 무겁게 휘어져 내려가 그 밑에 나뭇가지들을 괴기 위한 작은 말뚝들이 받쳐진다.

이렇게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들이기까지에는 온갖 이해와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숨은 공이 있는 것이다. 종자를 실험하고 토양 속에 숨어 있는 무수히 많은 농작물의 천적을 물리칠 수 있는 기술을 꾸준히 발전시키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두더지, 해충, 녹병균, 고사병충 등 농작물을 해치는 병이나 벌레도 가지가지다. 이런 사람들은 종자와 뿌리를 개량하고 완전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또 해충이 가까이하지 않도록 나무에 약재를 뿜고 포도에 유황 처리를 하고, 병균이나 부패균이나 다른 병에 걸린 부분을 잘라내는 화학 기술자들이 있다. 예방의학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들도 있는데, 그들은 화단에서 과일을 좀먹는 해충이나 딱정벌레를 찾아내고 병든 나무를 격리시키고 뿌리를 뽑아서 태우고 하는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어린 나무와 포도덩굴을 접붙이는 사람들은 제일 현명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작업은 마치 외과의사들이 수술을 하는 것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나무껍데기를 벗겨 접목을 하고 상처를 감고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감싸주는 작업을 하기 위해선 외과의사와 같은 솜씨와 마음씨를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풀을 뜯고 뜯은 풀을 간 땅속에 놓아 기름진 밭을 만들고, 물기가 땅 표면까지 스며 오르도록 흙을 깨고, 밭 가장자리의 흙을 다독거려 물이 괴도록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나무가 빨아먹을 물을 가로채는 잡초의 뿌리를 뽑아내면서 농부들은 밭이랑을 따라 움직인다.

밤낮없이 열매는 부풀고 꽃은 무더기를 이루면서 기다란 포도덩굴 위에 피어오른다. 날이 갈수록 볕이 따뜻해지고 잎사귀들은 검푸른 색을 띠어 간다. 자두가 새알처럼 갸름해지고 나뭇가지들은 열매의 무게에 눌려 말뚝 위에 늘어진다. 딱딱하고 작은 배가 제법 모양을 갖추어 가고 복숭아는 엷은 솜털을 입는다. 포도 꽃이 작은 꽃잎을 터뜨리기 시작하고 작은 구슬같이 무성하게 영글어 간다.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 작은 과수원을 가꾸는 사람들은 열매를 지켜보면서 주판을 놓아 본다. 이제 풍년이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흐뭇해진다. 그들의 지식이나 경험을 충분히 살려서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지식으로 전혀 딴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작달막하고 말라빠진 밀 이삭들이 큼직하고 굵직한 알맹이를 품고 익어 간다. 시디신 사과가 커지면서 점점 단맛이 오르고, 나무들 틈바구니에 끼여 자라면서 작은 알맹이들을 새나 날짐승들에게 먹여 주던 포도 덩굴이 이제 수천 가지의 색깔을 품게 된다. 검붉은 것, 파리하게 푸른 것, 연분홍빛을 띠어 가는 것, 보랏빛 속에 노란색을 섞은 것 등 가지가지가 다 저마다 특이한 맛을 지니고 자란다. 실험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품종을 개발해 낸다. 넥타린 복숭아와 40여 종의 자두, 그리고 종이처럼 얇은 껍질을 가진 호두 같은 열매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종자를 고르고 접붙이고 개량하고 자신들을 격려하고 땅을 일구어 수확을 늘리면서 부지런히 일한다.

버찌가 맨 먼저 익는다. 1파운드에 1센트 반이다. 제기랄, 그렇게 싼 품삯으로 어떻게 버찌를 따랴? 까만 것, 빨간 것이 그득그득 단맛을 품고 있다. 버찌 알마다 새들이 이미 반쯤 쪼아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알맹이 속에 노란 말벌들이 윙윙거리고 들락거린다. 그러면 버찌씨가 땅에 떨어져 같이 묻어 떨어진 까만 살점과 함께 말라 버린다.

부드러워진 자두에 단맛이 오른다. 그래도 이 자두는 따서 말려 유황처리까지 할 수는 없다. 아무리 싼 품삯이라도 그 품삯이 안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자두는 그대로 땅에 깔려 보랏빛 융단이 되고 만다. 맨 먼저 껍질에 살짝 주름이 가면 파리 떼가 대들어 포식을 한다. 그러면 골짜기 안이 온통 자두가 썩는 달콤한 냄새로 가득해진다. 알맹이 살이 시꺼멓게 변하고 그대로 땅바닥에 시들고 만다.

배는 노랗고 부드러워진다. 톤당 5달러씩이다. 50파운드짜리 40상자에 5달러씩이다. 나뭇가지를 치고 살충제를 살포하고 밭도 갈았으니 이제 과일을 따야 한다. 딴 과일을 상자에 넣고 상자를 트럭에 싣고 그것을 다시 깡통 공장에 운반하면 40상자에 5달러다. 아무리 해보았자 못해 먹을 장사다. 어찌하랴? 그 노란 열매가 땅에 떨어져서 그대로 박살이 난다. 노란 말벌이 알맹이 속으로 파고든다. 그러면 발효하고 썩는 시큼한 냄새가 사방에 풍겨 나온다.

포도도 마찬가지다. 좋은 포도주는 도저히 만들 수 없다. 좋은 포도주는 사먹을 수가 없다. 좋은 포도, 노란 말벌이 갉아 먹은 포도 할 것 없이 몽땅 덩굴에서 뜯어내서 그것을 줄기째, 때가 묻은 채, 썩은 채 몽땅 짓이기는 것이다.

그래도 양조장 술통 속에는 곰팡이와 포름산이 있다. 유황과 타닌산도 들어 있다. 발효하는 냄새는 무르익는 포도주의 냄새가 아니고 부패와 화학 약품의 냄새다. 그러면 어떠랴! 어찌 되었든 그 안에는 알코올이 들어 있으니 됐다. 그걸 마시면 다 취하게 마련이다.

소지주들은 갚아야 할 빚이 마치 밀물처럼 서서히 늘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무에 살충제를 뿌렸으나 과일은 하나도 팔아먹지를 못한 것이다. 나뭇가지를 치고 접목을 했으나 열매는 따보지도 못한 것이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과일은 땅위에서 썩어 가기만 하는 것이다. 양조장 술통 속에서 썩어 가는, 짓이겨 놓은 포도가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다. 그런 포도주를 맛보면 포도 맛은 하나도 없다. 그저 유황과 타닌산과 알코올 맛뿐이다.

이 알량한 과수원도 내년에는 대지주의 소유 중 일부가 될 것이다. 이걸 가지고 있는 사람은 빚 때문에 숨이 막혀 버릴 것이다. 포도밭도 은행 소유가 될 것이다. 오직 대지주들만 살아남게 될 것이다. 그들은 통조림공장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배 네 개를 갖고 껍질을 벗겨서 반 토막을 자르고 거기에 적당히 솜씨를 부려 깡통에 넣기만 하면 15센트짜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통조림이 된 배는 상하지 않는다. 몇 년이라도 갈 수 있다.

과일 썩는 냄새가 방방곡곡에 퍼지면 그 달콤한 썩는 냄새는 온 땅 위에 하나의 슬픔을 깔아 버린다. 접목도 할 줄 알고 씨앗을 기름지게 해서 살찌게 할 줄도 아는 사람들이, 그들의 작물을 가지고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과일을 개량해 낸 사람도 그들의 과일을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체계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이 커다란 실패는 마치 커다란 슬픔처럼 되어 온 나라에 뒤덮여 오는 것이다.

과일의 제값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포도덩굴의 뿌리가, 나무의 뿌리가 모두 파헤쳐져야 한다. 이거야말로 무엇보다도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트럭에 가득 실은 오렌지가 땅바닥에 마구 내동댕이쳐진다. 과일을 얻으려고 몇 마일씩이나 걸어온 사람들도 이것은 가져갈 수가 없다. 차만 조금 타고 나가면 얼마든지 딸 수 있는 것을 무엇 때문에 여남은 개에 20센트씩 주고 사가겠는가? 고무호스를 들고 있는 사람이 오렌지 더미 위에 석유를 뿌려 댄다. 그는 사람들의 죄악에 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일을 얻으러 온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일을 못 먹어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이 수백만 명이나 되는 판에 그 황금빛 산더미 위에 마구 석유를 뿌려대는 것이다. 과일 썩는 냄새가 온 천지를 진동한다. 기선의 연료로 커피를 땐다. 곡식을 태워서 난방을 해도 좋다. 곡식은 잘 타고 불기가 좋은 것이다. 강물에 감자를 쓸어 넣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걸 건져가지 못하도록 강둑 양쪽에 감시원을 배치하라. 돼지를 잡아 그대로 땅속에 묻어라. 고기 썩은 것이 땅속에 그대로 스며들게 해야 한다.

법으로는 어떻게도 적발해 낼 수 없는 범죄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울어보아도 다 나타낼 수 없는 슬픔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모든 성공을 거꾸러뜨리는 실패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땅이 기름지고 나무들이 줄을 지어 똑바로 서있고 든든한 나무 둥우리 위에 백 가지 열매가 무성하게 여물어도, 펠라그라로 죽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검시관들은 사망증명서를 떼어야 한다. 영양실조라고, 왜냐하면, 음식은 썩어 문드러져야 하고 썩도록 강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물 속에서 감자를 건지려는 사람들이 어망을 들고 나온다. 망을 보는 사람이 그들을 제지한다. 배고픈 사람들은 덜거덕거리는 차를 타고 와서 버린 오렌지를 주우려 하지만 석유가 뿌려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묵묵히 서서 물에 떠내려가는 감자를 지켜보고 도랑가에서 잡고 있는 돼지 멱따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지만, 그것은 곧 땅속에 파묻혀서 그 위에 석회가 겹겹이 발라진다. 산더미처럼 쌓인 오렌지가 썩어 물이 질컥질컥 흐르는 것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사람들의 눈에는 낭패의 빛이 떠오르고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가 서린다.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의 포도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분노가 충만하고 그 포도 수확기를 위하여 알알이 더욱 무겁게 영글어 가는 것이다.

26

기다란 작대기 같은 구름이 석양 위에 걸려서 그 끝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어느 저녁, 위드팻치 캠프에서는 조드 가족들이 저녁을 마치고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접시 설거지를 하려다 말고 잠시 머뭇거렸다.

“뭐라도 해야지, 이거 안 되겠는데.” 그녀가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윈필드 쪽을 손가락질했다.

“저애 좀 보세요.

모두가 그쪽을 돌아보자 그녀는 다시 말했다.

“자면서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몸을 뒤틀어요. 저 얼굴색 좀 보세요.

가족들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땅바닥만 쳐다보았다.

“우리는 밀가루 반죽만 끓여 먹으며 여기에서 한 달이나 지냈어요. 톰이 닷새 동안 일을 했을 뿐 나머지 가족들은 여태 빈둥거리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일자리는 없고, 이제는 얘기하기도 무서워요. 돈은 다 떨어졌는데 다들 겁만 내고 말도 못 꺼내고 있으니 어쩌면 좋아요? 저녁이 되면 다들 밥만 뚝딱 떠먹고 어정거리고 나가서 이런 말이 나올까봐 겁을 내지만, 인젠 말을 해야겠어요. 로자샤안도 애 낳을 달이 얼마 안 남았어요. 걔 안색 좀 보세요. 인제 탁 까놓고 애기들 좀 해보세요. 인제 무슨 수라고 궁리해 내기 전에는 다들 나가지 마세요. 여기 앉아서 머리를 좀 짜보세요.

모두 땅바닥만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창칼을 꺼내서 두꺼운 손톱을 다듬었다. 존 삼촌은 깔고 앉은 나무상자의 가시를 뜯고 있었다. 톰은 아랫입술을 꼬집어 뜯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놓더니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우리도 찾느라고 찾아보았어요. 휘발유를 사지 못하면서부터는 그나마도 쭉 걸어 다녔어요. 가보았자 소용없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집집마다 찾아가 보고 대문마다 두드려 보았어요. 그런데 만만찮은 일이에요. 아무 소용이 없는 줄 알면서도 나가 헤맨다는 것이 말예요.

어머니가 사납게 말했다.

“너부터 그렇게 낙심해서 어떻게 하니? 가족들이 모두 쓰러지게 된 판에 아무도 낙심해 버릴 권리는 없다.

아버지는 깎은 손톱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떠나야겠어.” 그가 말했다.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만, 여기는 참 살기도 좋고 사람들도 좋아서 말이야. 인제 별 수 없이 후버빌 같은 데 가서 살아야 할 모양이다.

“가야 하게 생겼으면 가야지요. 하지만 첫째, 가족들이 먹어야 해요.

앨이 끼어들었다.

“제가 트럭에 기름을 한 탱크 넣어 두었어요. 그래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한 거예요.

톰이 웃었다.

“앨 녀석이 까불기만 하고 속만 썩이는 줄 알았더니 제법 분별이 있단 말이야.

“자, 다들 궁리를 해봐요.”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 식구들이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있는 꼴을 나는 더 이상 못 보겠어요. 하루 더 먹을 식량이 남았고 그게 떨어지면 아무것도 없어요. 로자샤안이 해산할 때가 되면 제대로 먹어야 해요. 무슨 수라도 궁리해 내세요.

“여기는 온수도 나오고 화장실도 깨끗…” 아버지가 말을 꺼냈다.

“우리는 화장실을 먹고 살 수는 없어요.” 톰이 말했다.

“오늘 매리스빌에서 사람을 채용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과일 따는 일이래요.

“그래, 매리스빌이라도 못 갈 건 없잖으냐?” 어머니가 말했다.

“글쎄, 모르겠어요.” 톰이 말했다.

“어쩐지 좀 수상했어요. 억지로 데려가려 하면서도 돈을 얼마 주겠다는 말을 끝까지 안 하더군요. 자기도 정확하게 모른대요.

“우리가 매리스빌에 가자. 돈을 얼마 주든지 상관없다. 여하튼 가야겠다.

“너무 멀어요.” 톰이 말했다.

“거기까지 갈 휘발유 값도 없어요. 거기까지 가지도 못해요. 어머니는 머리를 짜내라고 하지만 우리 역시 언제나 궁리를 해온 걸요.

존 삼촌이 말했다.

“누가 그러는데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투레이 근처에 목화 따는 일이 곧 생길 거라던데. 그 사람 말이, 거기는 그렇게 멀지도 않다는구먼.

“여하튼 우리는 떠나야 해요. 그리고 빨리 떠나야겠어요. 여기가 아무리 살기가 좋더라도 여기에 더 이상 주저앉아 있을 수 없어요.

어머니는 양동이를 들고 더운물을 길어 오려고 위생반 건물 쪽으로 갔다.

“어머니가 자꾸 화를 내시는데?” 톰이 말했다.

“요즘엔 어머니가 화를 내시는 걸 가끔 보게 되는군. 몹시 속이 상하신 모양이야.

아버지가 숨을 돌리며 말했다.

“어쨌든 그럭저럭 말이 나왔구나. 나도 밤새도록 골치만 썩이고 있었지만 이제 다 터놓고 이야기나 해 보자.

어머니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물 양동이를 들고 돌아왔다.

“무슨 수라도 생각해 냈어요?” 그녀가 물었다.

“지금 연구 중이에요. 목화 일이 있다는 북쪽으로 가 보면 어떨까요? 이 고장에는 있을 만큼 있어 보았고 아무 일거리도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보따리를 싸서 북쪽으로 가보기로 할까요? 목화가 다 여물 때쯤 해서 거기에 도착할 거예요. 나도 오랜만에 목화나 좀 만져 보고 싶어요. , , 너 휘발유는 만탱크로 넣어 두었니?

“거의 만탱크야. 2인치쯤 모자라지만.

“그거 가지면 아마 거기까진 갈 거다.

어머니는 접시를 양동이로 가져가려다 말고 물었다.

“그래?

톰이 말했다.

“어머니가 이겼어요. 떠나야 할 것 같아요. 어때요, 아버지?

“가야겠다.”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는 그쪽으로 돌아다보았다.

“언제요?

“일단 갈 바에는 기다릴 필요가 없지. 내일 아침에라도 떠나야지.

“아침에 떠나야 해요.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인제 먹을 게 똑 떨어졌어요.

“그런데 어머니, 내가 가기 싫어서 그런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도 지난 두 주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어요. 배를 채우기는 했지만 먹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어머니는 접시를 양동이에 담갔다.

“우리는 아침에 떠나는 거다.

아버지가 콧방귀를 뀌었다.

“세상이 변했어.” 그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옛날엔 집안일을 남자가 결정했는데 이젠 여자가 다 이러니 저러니 한단 말이야. 인제 부지깽이를 들고 나올 때도 멀지 않았구나.

어머니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깨끗한 양철 접시를 꺼내 상자 위에 얹으며 웃었다.

“당신도 몽둥이를 집으시구려. 먹을 것도 있고 식구들이 안정되게 살 만한 곳이 있을 때에는 당신도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권위를 지킬 수가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해요. 일하는 것도 그렇고 생산하는 것도 그렇고, 당신이 만약 제대로만 하고 있다면 물론 당신의 몽둥이도 위력을 발휘할 것이고, 여자들은 코를 훌쩍거리면서 생쥐들처럼 설설 기어야겠지요. 하지만 지금 당신은 몽둥이만 들었지. 여자들을 달래 주지도 못하고 오히려 싸움만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여자도 부지깽이를 치켜들고 있으니까요.

아버지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린애들 앞에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애들한테 유익한 소리를 해줄 생각만 하지 말고 애들 뱃속에 베이컨이나 좀 넣어 주구려.”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는 기분이 언짢아져 일어서더니 걸어 나갔다. 존 삼촌이 뒤를 따랐다. 어머니는 양동이 물속에서 손을 부지런히 놀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눈으로 그들이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더니 톰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너희 아버지 말이 옳다. 너희 아버지는 누가 뭐라 해도 끄떡도 안 한다. 결코 나한테 몽둥이 같은 걸 휘두르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톰이 웃었다.

“괜히 약을 올려 드리는 거지요?

“그래.” 어머니가 말했다.

“남자란 자꾸 걱정만 하고 있다가는 간장이 녹아 나중에는 벌렁 자빠지고 배짱도 기력도 없이 뻗어버리지만, 살살 약을 올려 주면 노발대발하다가 그대로 잘되는 수가 있는 거다. 너희 아버지가 아무 말도 안 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밸이 꼴려서 못 견딜 거다. 인제 두고 봐라. 무얼 하더라도 제대로 하고 말 거다.

앨이 벌떡 일어섰다.

“나도 좀 나갔다 올래.” 그가 말했다.

“트럭이나 잘 정비해 두어라.” 톰이 일렀다.

“다 되어 있어.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어머니한테 일러서 한바탕 야단을 맞힐 거다.

“다 됐다니까.

앨은 거드름을 피우면서 늘어선 천막들을 따라 걸어 나갔다.

톰이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 나도 피곤해 죽겠어요. 나한테도 좀 약을 올려 주지 않을래요?

“너는 인제 제법 철이 들었다. , 톰 너는 약을 올려 줄 필요가 없다. 내가 너한테 기대야겠다. 너 이외에는 모두가 좀 남 같구나. 너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다.

그는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 그거 싫은데요? 나도 앨처럼 나가고도 싶고 아버지처럼 화도 내보고 싶고 또 삼촌처럼 술도 취해보고 싶은데.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넌 그럴 수 없다, . 내가 안다. 네가 어릴 때부터 난 알고 있다. 너는 그렇게 못 한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도 있다. 앨도 보아라. 그놈은 계집애 꽁무니나 따라 다니는 애송이가 아니냐?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너는 어릴 때부터 그렇지가 못했어.

“왜 안 그래요? 지금도 그런데.” 톰이 말했다.

“넌 안 그렇다. 너는 무엇이든 자기 자신 이상의 것을 생각하곤 했지. 네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나는 다 알았다. 네가 아무리 말을 안 하고 있어도 나는 다 알고 있었다.

“자, 어머니 그 얘기는 그만두세요.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그건 어머니 머릿속에서 생각해 낸 거예요.

그녀는 나이프와 포크를 접시 위에다 포개어 놓았다.

“하기야 그게 다 내 머릿속에서 생각해 낸 건지도 모른다. , 로자샤안, 이건 네가 좀 닦아서 치워라.

로자샤안은 숨을 헐떡거리며 일어섰다. 불룩 튀어나온 그녀의 배가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녀는 상자 쪽으로 느릿느릿 가더니 닦아 놓은 접시를 집었다.

톰이 말했다.

“배가 너무 나오니까 눈까지 튀어나오게 생겼구나.

“그렇게 자꾸 놀리지 말라니까 그러는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로자샤안은 지금 몸조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 거다. 너는 나가서 작별인사라도 할 사람이 있거든 하고 오너라.

“그래야겠어요.” 톰이 말했다.

“거기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좀 알아두기도 해야 하겠고요.

어머니가 딸에게 말했다.

“너희 오빠는 너한테 듣기 싫으라고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루시하고 윈필드는 어딜 갔지?

“걔들을 아버지 뒤를 따라갔어요. 내가 보았어요.

“그래? 그냥 두어라.

로자샤안은 느린 동작으로 몸을 놀렸다.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지켜보았다.

“너 몸은 괜찮은가 보구나. 볼때기가 불룩해지는 거 같다.

“다들 우유를 먹으라고 하는데 나는 안 먹었는걸요?

“그래. 우리가 어디 우유를 먹을 여유가 있었니?

로자샤안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코니가 가버리지 않았으면 지금쯤 우리는 집도 하나 있고 밤에 공부도 하고 할 텐데. 또 우유도 많이 먹어서 아주 튼튼한 아기를 낳을 텐데, 지금 이 아기는 우유를 안 먹어서 아주 약할 거예요.

그녀는 앞치마 호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무엇인가 꺼내서 입속에 가져갔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 그게 무어니? 무얼 먹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얼 먹었니? 내가 본걸?

“부서진 석회 조각이에요. 큰 덩어리가 하나 있기에 주웠어요.

“그건 흙덩어리를 먹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그거라도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요.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무릎을 벌리고 치마를 팽팽하게 펼쳤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나도 임신을 했을 때 석탄을 먹은 적이 있었다. 아주 큼직한 석탄을 먹었다. 그랬다가 할머니한테 들켜 야단을 맞았지. 그런 짓을 하면서 공연히 어린애 핑계를 대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은 아예 할 권리도 없는 거야.

“남편도 없어요! 우유도 없고요!

어머니가 말했다.

“만약 네가 성한 사람일 것 같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다. 네 얼굴이라도 한번 쥐어박았을 거야.

그녀는 일어서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더니 로자샤안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이봐라!” 그녀의 손바닥에는 조그만 금 귀걸이가 놓여 있었다.

“너한테 주마.

색시의 눈이 반짝했으나 곧 옆으로 떨어졌다.

“나는 귀에 구멍을 뚫지 않았어요.

“내가 뚫어 주마.

어머니가 다시 천막 안에 들어가더니 상자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잽싸게 바늘에 실을 꿰어 두 겹을 만들어서 실 가닥 여러 군데에 매듭을 만들었다. 다른 바늘에 실을 꿰어 또 매듭을 만들었다. 그러고서 상자 속에서 코르크 조각을 찾아냈다.

“아프면 어떻게 해요, 아프면?

어머니가 다가섰다. 딸의 귓불 뒤에 코르크를 대고 바늘을 귓불에 찔러 코르크로 빠져 나오게 했다.

딸이 몸을 움찔했다.

“아앗, 아파!

“인제 끝났어.

“아야, 아야!

“그럼 다른 쪽도 해보자.

그녀는 코르크를 다른 쪽 귀에다 대고 바늘을 꿰었다.

“아얏!

“엄살을 떠는구나! 인제 다 끝났다.

로자샤안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바늘을 뽑아 치우고 양쪽 귓불의 실 끝을 잡아당겼다.

“자, 됐다.” 그녀가 말했다.

“인제 하루에 매일 하나씩만 뽑아내면 한 보름 뒤에는 너도 귀걸이를 해달 수 있다. , 이건 네 것이다. 넣어 두려무나.

로자샤안은 자기 귓불을 가만히 만져 보더니 손가락에 조그맣게 묻은 핏자국을 쳐다보았다.

“많이 아플 줄 알았는데 조금 따끔하고 말았어요.

“진작 할 걸 그랬다.” 어머니가 말하면서 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득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자, 인제 그 접시나 다 닦아서 치워라. 아기도 튼튼하게 낳을 거다. 귓불도 뚫지 않고 애를 낳을 뻔했구나. 하지만 이젠 안전하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거예요?

“물론 상관이 있지. 있고말고.” 어머니가 말했다.

앨은 통로를 따라서 무도장 쪽으로 걸어갔다. 깔끔하게 생긴 한 작은 천막 앞에서 그는 휘파람을 불더니 다시 걸어갔다. 땅바닥 가장자리까지 가서 그는 풀밭 위에 주저앉았다.

서쪽 하늘 위에 뜬 구름도 이젠 붉은 기운이 가시고 가운데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앨은 다리를 긁적거리며 저녁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금발머리의 소녀 하나가 가까이 걸어왔다. 용모가 예쁘장하고 얼굴선이 깔끔했다. 그녀는 앨 옆의 풀밭에 앉더니 침묵을 지켰다.

앨은 소녀의 허리에 손을 감고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그러지 마. 간지러워.” 소녀가 말했다.

“우리는 내일 떠난대.” 앨이 말했다.

그녀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내일? 어디로?

“북쪽으로.” 그가 가볍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결혼할 거잖아?

“그럼, 언제든지 꼭 하게 되겠지.

“당장 하겠다고 했잖아!” 그녀가 발끈 소리를 질렀다.

“당장이 가능해야 말이지.

“약속을 해놓고!” 그는 손가락을 더 멀리까지 놀려 댔다.

“가 버려! 결혼한다고 해놓고!” 그녀가 소리쳤다.

“물론 결혼해야지.

“떠난다면서?

앨이 오히려 물었다.

“왜 그러지? 아기라도 배었어?

“아냐.

앨이 웃었다.

“난 단지 쓸쓸한 시간을 좀 메운 것뿐이야, 알았어?

그녀는 턱을 불쑥 내밀어 보이고는 벌떡 일어섰다.

“앨 조드, 내 앞에서 썩 없어져 버려! 다시는 안 만날 테야.

“정말, 왜 자꾸 이러는 거야?

“지옥으로나 가버려!

“잠깐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같이 따라갈 줄 아는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 남자들은 자기 말고도 얼마든지 있다고!

“잠깐만 기다려 봐.

“뭐가 잠깐이야! 어서 가버려!

앨이 별안간 뛰어오르더니 그녀의 발목을 잡고 넘어뜨렸다. 그에게 붙잡힌 채 넘어진 그녀는 앙탈을 했고 그는 악을 쓰는 그녀의 입을 한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녀는 그의 손바닥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그는 손등을 컵 모양으로 도톰하게 올리고 입을 막은 채 손으로 그녀를 꽉 죄어 눌렀다. 잠깐 사이에 그녀는 조용해졌고, 또 잠깐 사이에 그들은 마른 풀밭 위에서 킬킬거리고 있었다.

“그럼, 우리는 곧 돌아올 거야.” 앨이 말했다.

“나는 주머니에 돈을 한 뭉치 넣어 가지고 올 테니까. 그때는 우리 둘이서 할리우드에 가서 영화구경도 하자고.

그녀는 뒤로 벌렁 누워 있었다. 앨이 그녀 위에 몸을 굽혔다. 저녁별이 그녀 눈동자에 반짝이고 시커먼 구름이 그녀 눈동자에 반사되어 비쳤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갈 거야.” 그가 말했다.

“얼마나 걸리면 돌아오겠어.” 그녀가 물었다.

“넉넉잡고 한 달이면 되겠지.” 그가 말했다.

땅거미가 깔려오고 있었다. 아버지와 존 삼촌은 다른 집 가장들과 함께 사무실 바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들은 밤하늘의 천기를 보며 미래를 점쳐 보기도 했다. 하얀 옷 입은 체구 작은 관리책임자는 베란다의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있었다. 일그러지고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다. 휴스턴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도 가서 좀 쉬시는 게 좋겠구려.

“그래야 할 것 같은데요. 3반에서 간밤에 어린애를 낳았어요. 나도 인제 제법 산파 솜씨가 괜찮아지는데요?

“무어든지 다 할 줄 알아야지요.” 휴스턴이 말했다.

“장가를 들고 가족을 거느리는 사람은 다 알아야 해요.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는 내일 아침에 떠납니다.

“그래요? 어디로 가시오?

“저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 볼 생각이오. 목화 일이 있는 데라면 아무데나 주저앉을 생각이니까요. 하도 오래 일을 안 했더니 인제 먹을 것도 다 떨어졌어요.

“거기에 가면 일이 있답니까?” 휴스턴이 물었다.

“그건 모르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아무 일도 없는 것이 확실하니까 그렇지요.

“조금 있으면 일이 생길 거요.” 휴스턴이 말했다.

“우리는 더 기다려 볼 생각이오.

“우리도 가기는 싫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여기는 사람들 인심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군요. 그리고 저 화장실이나 다른 모든 것이 아주 훌륭해요. 하지만 먹을 것을 먹어야 살지요. 휘발유가 한 탱크 있어서 그걸 가지면 조금 갈 수 있을 것 같군요. 여기서는 매일 목욕을 했는데, . 이렇게 깨끗한 데는 평생 처음 보았소. 이상한 일이지요. 전 같으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안 했는데, 이젠 목욕을 안 하면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더군요. 매일 목욕을 하면 그렇게 되는 모양이지요?

“전에는 냄새가 나도 코에 들어오지 않았겠지요.” 관리책임자가 말했다.

“그런지도 모르죠. 여기에 그냥 있었으면 좋겠는데.

체구 작은 남자는 두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눌렀다.

“오늘 밤에도 어린애를 또 하나 낳을 것 같은데요?” 그가 말했다.

“우리 집에도 얼마 안 있으면 하나 나올 텐데요. 그놈을 여기서 나으면 좋을걸. 정말 꼭 여기서 낳고 싶은데.” 아버지가 말했다.

톰과 윌리와 혼혈아 주울이 무도장 옆에 앉아 발을 흔들고 있었다.

“덜햄 담배가 한 쌈지 있는데 한 대 피우겠소?” 주울이 말했다.

“그래, 한 대 피웁시다.” 톰이 말했다.

“담배 피워본 지도 무척 오래 됐구먼.

그는 갈색 담배를 조심스럽게 말았다. 부스러기를 하나도 흘리지 않으려고 손을 얌전하게 놀렸다.

“당신이 가버리면 섭섭하겠소. 참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윌리가 말했다.

톰이 담배에 불을 댕겼다.

“나도 생각을 많이 해보았다오. 빌어먹을! 나도 여기에 그냥 있고 싶어 죽겠소.

주울이 덜햄 담배쌈지를 받아 넣으면서 말했다.

“참 어려운 일이오. 우리 집에 계집애가 하나 있는데, 여기에 올 때 걔를 어디 학교에나 집어넣을까 했지요. 그런데 이놈의 살림이 어디 정처가 있어야지요. 한 군데에 박혀 있질 못하니까. 조금 있다가 다른 데로 옮아가야 하고 또 다른 데로 끌고 다니다가 학교는 아예 생각도 못 하게 되었지요.

“우리도 이제 그 후버빌 같은 데는 다시 가지 말아야 할 텐데, 정말 이젠 무서울 정도요.” 톰이 말했다.

“보안관 보 녀석들이 마구 쫓아내지요?

“나는 그러다 한 놈이라도 죽여 버릴 것 같아 겁이 나요.” 톰이 말했다.

“나도 그런 데 잠깐 있어 보았는데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오. 보안관이 와서는 한 친구가 말대답을 했다고 잡아가더군요. 나는 불안해서 그 꼴은 못 보겠소.

“스트라이크 같은 것 해본 일 있소?” 윌리가 물었다.

“없어요.

“나도 많이 생각해 보았다오. 그 보안관 놈들이 어째서 우리 캠프에 못 들어오는 줄 아시오? 다른 데처럼 들어가서 난장판을 벌이지 못하잖소? 우리 사무실에 있는 그 꼬마 관리책임자가 막는 줄 아시오? 천만에 라고요.

“그럼 누가 막지요?” 주울이 물었다.

“그건 말이오, 우리가 다 같이 단합해 있으니까 못 들어오는 거요. 보안관도 이 캠프에서 어느 한 사람을 끄집어낼 수가 없으니까요. 그저 캠프 전체에다 대고 눈을 흘기고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거요. 누구든지 걸리면 크게 고함만 지르면 되는 거요. 그러면 2백 명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테니까요.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사람이 그러더군요. 우리도 그런 걸 아무데서나 할 수 있다고요. 단결만 하면 된대요. 2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상대로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으니까요. 꼭 만만한 사람을 골라서 한 사람씩 끄집어내지요.

“그렇지요.” 주울이 말했다.

“그리고 조합을 만든다고 해도 말이오. 지도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러면 그놈들은 그 지도자만 잡아간단 말이오. 그러면 그 조합이고 뭐고 어떻게 남아나겠소?

“그러니까 우리는 그 문제를 언젠가는 연구해야 할 거요.” 윌리가 말했다.

“나는 여기에 일 년이나 있었지요. 그런데 노임은 자꾸 내려가기만 합디다. 지금 노임으론 식구들 입에 풀칠도 못 한다니까요. 그것도 점점 더 심해 가기만 하지요. 그냥 앉아서 굶고만 있어 봤자 무슨 소용이오?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일을 안 시키고 놀려 두어도 소나 말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걱정은 안 할 거요. 하지만 사람을 부리는 놈은 사람을 털끝만치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니, , 알 수 없는 일인 것이, 사람값이 말 값보다 못하게 되었다니까요.

“그러니 생각하기도 괴롭소.” 주울이 말했다.

“그렇다고 생각을 안 할 수도 없고. 나는 어린 딸이 있어요. 얼마나 예쁘게 생겼는지 아시오? 하도 예쁘게 생겨 언젠가 한번은 이 캠프에서 상을 준 일도 있었지요. 그 어린애가 어떻게 되었겠소? 점점 바싹 말라 가는 거요. 나는 인제 도저히 못 참겠소. 어린애가 너무 예쁘고 가여워요. 암만 해도 한바탕 터뜨려야겠어요.

“어떻게요?” 윌리가 물었다.

“무얼 하겠단 말이오? 무얼 훔치다가 감옥에 가겠다는 거요? 아니면 사람을 죽여 교수형을 받겠다는 거요?

“그야 모르지요.” 주울이 말했다.

“그걸 생각하면 분통 터져 죽을 지경이오. 아주 미쳐버릴 정도요.

“나는 인제 그 무도회에도 다 나갔군요.” 톰이 말했다.

“그렇게 훌륭한 무도회는 정말 처음 보았는데 어떻게든지 돌아와 보겠소. , 그럼 잘들 계시오. 어디서든 또 만납시다.

그는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꼭 만납시다.” 주울이 말했다.

“잘들 계시오.

톰은 어둠 속으로 걸어가 버렸다.

조드네 천막에서는 어둠 속에서 루시와 윈필드가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도 애들의 곁에 누워 있었다.

루시가 소곤거렸다.

“엄마!

“응? 너 아직 자지 않니?

“엄마, 우리 이사 가는 데에 크로케 놀이 하는 데가 있어?

“모르겠다. 어서 자거라. 내일 아침에 일찍 떠날 거다.

“여긴 크로케 놀이 하는 데도 있으니까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어.

“쉿!” 어머니가 말했다.

“엄마, 윈필드가 오늘밤 어떤 애를 때렸어.

“그러면 못 써.

“나도 알아. 나도 하지 말라고 그랬어. 그런데 윈필드가 걔 코를 때렸어. 그래서 피가 막 줄줄 흘렀어.

“그런 얘기 하지 마라. 얘기를 그렇게 하면 얌전하지 못한 거야.

윈필드가 돌아누웠다.

“그 자식이 우리보고 오키랬어.” 그는 골이 난 말투로 말했다.

“그 자식이 저는 오리건에서 왔으니까 오키가 아니고 우리는 고약한 오키랬어. 그래서 내가 두들겨 주었어.

“쉿! 그러면 못 쓴다. 그런 소리 좀 듣는다고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잖니?

“그래도 그런 소리 하면 가만 안 둘 테야.” 윈필드가 사납게 말했다.

“쉿! 인제 그만 자거라.

루시가 말했다.

“걔 옷에 흘린 피가 얼마나 많았는지 너 아니?

어머니가 담요 밑에서 한 손을 꺼내 손가락으로 그녀 볼때기를 꼬집었다. 계집애는 잠시 뾰로통하더니 조용히 훌쩍거리면서 울었다.

위생반 건물에 들어간 아버지와 존 삼촌은 나란히 바로 붙은 화장실 칸에 들어가 앉았다.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천천히 보고 나가야겠군.” 아버지가 말했다.

“여긴 참 좋단 말이야. 어린애들이 이 수세식 변소를 처음 써보면서 물이 내려가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랬었는지 기억나지?

“나도 불안하던데, .” 존 삼촌이 말했다.

그는 작업복을 무릎 있는 데까지 얌전하게 내렸다.

“나는 자꾸 나빠지는 것 같아. 죄책감만 들고.

“죄책감은 무슨 죄책감이야?” 아버지가 말했다.

“돈도 한 푼 없으면서. 아무 소리 말고 가만히 있어. 죄도 아무나 짓는 줄 알아? 돈이 있어야 짓지. 최소한도 2달러는 있어야 죄를 지을 수가 있어. 지금 우리한테 2달러가 어디 있어?

“그건 그렇지만 나는 자꾸 죄가 되는 생각만 드니까 그렇지.

“마음대로 해. 아무 조건도 없이 죄만 생각하든지 말든지.

“나쁜 생각만 해도 죄가 되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야.” 존 삼촌이 말했다.

“그건 돈이 안 들어서 좋군.” 아버지가 말했다.

“사람은 죄를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내 걱정일랑 하지 말고 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해봐. 무슨 어려운 일만 생기려고 하면 꼭 그놈의 죄 때문에 말썽을 부리는군.

“나도 알고 있어.” 존 삼촌이 말했다.

“일이 공교롭게 그렇게만 되는군. 나는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걸 아직 반도 털어놓지 않았어.

“그런 건 혼자만 넣어둬.

“여기 이 깨끗한 화장실도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군.

“그럼, 저 숲 속으로나 들어가라고. , 어서 바지를 끌어올리고 가서 잠 좀 자야겠어.

아버지는 작업복 멜빵을 제자리에 갖다 매고 고리를 찰칵 채웠다. 변기를 부시고 나서 변기 안에서 물이 맴도는 동안 그걸 지켜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가 천막 속의 사람들을 깨워 일으켰을 때는 아직 사방이 어두운 때였다. 밤에만 켜는 보안등의 희미한 불빛이 위생반 건물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길을 따라 늘어선 천막들에서 사람들이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말했다.

“자, 다들 일어나요. 어서 떠나야 해요. 곧 해가 뜨겠어요.

그녀는 삐걱거리는 조명등잔의 갓을 쳐들고 심지에 불을 붙였다.

“자, 어서 일어나요!

천막 안 바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담요와 덧이불이 홀랑 벗겨지고 잠이 덜 깬 눈들이 불빛에 부스스 떠졌다.

어머니는 내복 위에 드레스를 걸치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는 커피가 없어요. 빵만 조금 있어요. 그건 가면서 길에서 먹을 거예요. 어서 일어나 차에 짐이나 꾸려요. , 어서 어서. 시끄럽게 하면 안 돼요. 이웃 사람들을 깨우면 안 되니까요.

이윽고 모두가 잠을 깨고 일어섰다.

“너희도 멀리 가지 마라.”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가족들 모두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남자들은 천막을 걷어 트럭에 실었다.

“잘 펴서 평평하게 실어라.” 어머니가 일렀다.

짐의 맨 꼭대기에 매트리스를 싣고 범포를 짐칸 옆구리의 말뚝에다 붙들어 매었다.

“자, 이만하면 잘됐어요.” 톰이 말했다.

어머니는 식은 빵 한 접시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래, 잘됐다. , 다들 하나씩만 먹어야지 이게 전부다.

루시와 윈필드가 빵을 하나씩 집어들고 짐꾸러미 위에 기어 올라갔다. 애들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차갑고 딱딱한 빵을 손에 든 채 다시 잠이 들었다. 톰이 운전석에 들어가 앉더니 시동이 잠시 걸렸다가 이내 멎었다.

“야, 인마, !” 톰이 소리쳤다.

“너 배터리를 끊어 놓았잖아?

앨이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

“내가 휘발유를 구해 두지 않았으면 어떻게 갈 뻔했어?

톰이 갑자기 킬킬거리고 웃었다.

“어떻게 갈지는 몰라도 여하튼 네가 실수했잖아? 크랭크는 네가 돌려야겠다.

“그건 내 실수가 아니란 말이야.

톰은 좌석 밑에서 크랭크를 찾아 꺼냈다.

“그래, 내 실수다.” 그가 말했다.

“그 크랭크 이리 줘.

앨이 그걸 집어 들었다.

“내 팔뚝이 달아나지 않게 점화전의 불꽃을 죽여 놓고 있어줘.” 그가 말했다.

“그래, 알았다. 그 꼬리를 잡아 틀어라.

앨이 끙끙거리면서 크랭크를 돌렸다. 엔진이 걸리고 터덜터덜하더니 톰이 조심스럽게 점화전을 조절하는 사이에 부르릉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는 점화전의 스파크를 올리고 절기판을 내렸다.

어머니가 그의 옆으로 올라왔다.

“우리가 캠프 안 사람들을 다 깨워 놓았다.” 그녀가 말했다.

“다시 잠들겠지요.

앨은 다른 쪽 문으로 올라탔다.

“아버지하고 존 삼촌은 짐꾸러미 위에 타셨어.” 그가 덧붙였다.

“또 주무실 모양이야.

톰이 정문 쪽으로 차를 몰고 나갔다. 수위가 사무실 밖으로 나오더니 플래시를 켜가지고 차를 이리저리 비쳐 보았다.

“잠깐 기다리시오.

“왜 그러시오?

“아주 나가시는 거요?

“예.

“그럼 장부에서 지워 두어야겠소.

“그러시지요.

“어디로 가는지 길을 아시오?

“글쎄, 북쪽으로 가볼 생각이오.

“그럼 잘해 보시오.” 수위가 말했다.

“잘 계시오.

트럭은 커다란 둔덕을 천천히 기어 넘어 국도로 들어섰다. 톰은 전에 오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위드팻치를 지나 99호선에 접어들 때까지 서쪽으로 방향을 잡더니 거기에서 베이커즈 필드 쪽으로 차머리를 돌려 널따랗게 포장된 길을 달렸다. 그들이 도시 변두리에 가까이 왔을 때쯤에 날이 밝기 시작했다.

톰이 말했다.

“사방 보이는 곳마다 음식점이군. 저들 음식점마다 가면 다 커피가 있겠지. 저쪽에 저 야간 영업소 좀 봐. 저기엔 아마 뜨끈뜨끈한 커피가 십 갤런은 있을 거야.

“아이, 형도 참 쓸데없는 소리 하네.” 앨이 말했다.

톰이 그를 건너다보면서 씩하고 웃었다.

“너 또 계집애를 낚았더구나. 내가 다 보았다.

“그랬어? 그게 어쨌다는 거야?

“어머니, 쟤가 오늘은 좀 이상한데요? 어째 영, 친하게 지낼 수가 없는데요.

앨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도 얼마 안 있으면 혼자 내 발로 걸어 나갈 테야. 나도 가족이 없으면 훨씬 더 편하게 앞길을 개척하겠어.

톰이 말했다.

“너는 아홉 달도 못 가 가족을 만들 거다. 네가 돌아가는 꼴을 내가 다 보았단 말이야.

“형, 돌았어?” 앨이 말했다.

“나는 차고 같은 데 취직을 해서 의젓하게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을 거라고.

“게다가 너는 아홉 달 안에 마누라에 애까지 함께 가질 거다.

“안 그런다고.

톰이 말했다.

“넌 영리한 애다, . 인제 너는 대가리를 얻어맞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가는 거다.

“어떤 놈이 나를 때려?

“그런 짓을 할 놈은 어디나 있는 거야.” 톰이 말했다.

“형은 전에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해서…”

“인제 그만두어라.”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았다.” 톰이 말했다.

“내가 널 좀 놀려 준 거다. , 너한테 나쁜 소리를 하려 한 건 아니야. 난 네가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다.

“난 아무 여자도 좋아하지 않아.

“그럼 좋다. 좋아하지 마라.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하고 시비를 할 수는 없을 거다.

트럭이 도시의 변두리에 이르렀다.

“저 핫도그 가게 좀 봐. 한 백 군데도 넘겠네.” 톰이 말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얘, , 나한테 따로 넣어 둔 1달러가 있다. 너 그거라도 가져가서 커피를 마시고 오겠니?

“아녜요, 어머니. 그냥 농담을 한 거예요.

“꼭 마시고 싶다면 돈을 주마.

“싫어요.

앨이 말했다.

“그럼, 그 커피 소리 좀 하지 마.

톰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이 근처에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그날 밤 우리가 지나오던 길이 바로 저기잖아?” 그가 말했다.

“인제 그날 밤 같은 일은 다시 안 만나야 할 텐데. 그날은 일진이 안 좋았던가 보더라.” 어머니가 말했다.

“아주 고약한 날이었어요.

해가 오른쪽으로 떠올랐고 커다란 그림자가 트럭을 따라 달리면서 길가에 있는 농장 울타리의 말뚝 위로 펄럭거렸다. 불탔던 자리에 후버빌이 다시 세워져있는 것을 옆쪽으로 보면서 그들은 곧장 달려갔다.

“저기 보세요!” 톰이 말했다.

“사람들이 새로 들어왔어요. 옛날하고 똑같은 모습이 되었는데요.

앨도 서서히 심통이 풀리는 듯했다.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저 사람들은 열 번도 스무 번도 더 쫓겨났대요. 보안관들이 와서 불을 지르면 버드나무 숲에 가서 숨어 있다가 다시 나와 짚이나 마른 풀을 주워 엮어서 움막을 짓는대요. 그러니 꼭 땅쥐 놀음이지요. 그런 일을 하도 많이 겪다보니까 그 사람들은 화도 안 낸대요. 좀 좋지 않은 날씨를 만난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지요.

“그날 밤은 나한테는 정말 고약한 날이었어.” 톰이 말했다.

그들은 널따란 국도를 달려갔다. 햇빛이 약간 오싹하게 느껴졌다.

“아침엔 좀 시원해지네? 겨울이 다가오는 모양이군.” 톰이 말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가 돈을 좀 모아야 할 텐데. 겨울에는 천막 같은 데서는 살기가 어려울 걸.”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얘, . 우리는 겨울에 집에서 살아야 한다. 꼭 그리해야 한다. 루시만 해도 괜찮지만 윈필드는 아직 약해서 안 된다. 또 비가 올 때에도 집에서 살아야 한다. 이 고장엔 비도 억수같이 퍼붓는다더라.

“집을 얻도록 해볼 테니까 집에서 편히 쉬세요, 어머니. 집을 얻어드릴 거예요.

“지붕하고 마룻바닥만 있어도 살겠다. 애들을 땅바닥에만 안 재우면 말이다.

“그렇게 해볼게요, 어머니.

“너한테 지금부터 부담감을 주고 싶지는 않다만.

“한번 해보겠어요.

“나도 인제 가끔 무서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머니가 말했다.

“인제 용기도 다 잃어버린 모양이다.

“어머니가 용기를 잃을 때도 있어요?

“밤에는 그렇더라, 어떤 때는.

트럭 앞쪽에서 픽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톰이 핸들을 꼭 움켜쥐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트럭이 쿨렁하고 멎었다.

톰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걸렸구나.

그는 운전석 뒤에 등을 기대고 물러앉았다. 앨이 껑충 뛰어내려서 오른쪽 앞바퀴 쪽으로 갔다.

“큰 못이 하나 박혔어.” 그가 외쳤다.

“타이어 때울 것 있니?

“없어.” 앨이 말했다.

“다 써버렸어. 타이어 조각은 있는데 풀이 없어.

톰이 고개를 돌려 어머니 쪽을 보고 씁쓸히 웃었다.

“어머니가 그 돈 있다는 말을 괜히 하셨어요.” 그가 말했다.

“돈을 안 쓰고 고쳐야겠는데.

그가 차에서 내려 펑크 난 타이어 쪽으로 갔다.

앨은 납작해진 타이어에 불쑥 나와 있는 큰 못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기야!

“이 고장에 딱 하나밖에 없는 못이 박혔구나.

“많이 고장 났니?” 어머니가 소리쳤다.

“별거 아녜요. 그래도 좀 손을 보아야겠어요.

가족들이 짐꾸러미 위에서 하나씩 내려왔다.

“펑크냐?

아버지가 묻더니 납작해진 타이어를 보고 잠잠히 있었다. 톰은 어머니를 일어나게 하고 좌석 밑에서 타이어 때우는 연장이 들어있는 깡통을 꺼냈다. 그는 말아 놓은 고무조각을 펴서 꺼내고 시멘트 튜브를 가만히 눌러 짰다.

“거의 말라 버렸군.” 그가 말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되겠어. , 됐다. , 그 뒷바퀴 좀 괴어라. 차를

잭으로 좀 쳐들어야겠다.

톰과 앨은 손발이 잘 맞았다. 그들은 뒷바퀴에다 돌을 괴고 앞바퀴 축에 잭을 걸어 절름발이가 된 바퀴를 들어올렸다. 그러고 나서 타이어를 떼어냈다. 그들은 구멍이 뚫린 자리를 찾아내고 헝겊 조각을 휘발유통에 집어넣었다가 꺼내서 그것으로 타이어에 뚫린 구멍의 가장자리를 닦았다. 앨이 타이어를 무릎 위에 찰싹 대고 붙들고 있는 사이에 톰은 시멘트튜브를 두 조각으로 잘라 주머니칼로 시멘트 액을 긁어 고무 위에 살살 발랐다. 그는 고무를 아주 조심스럽게 만졌다.

“자, 내가 타이어 조각을 자르는 동안에 충분히 마르겠지.

그는 파란 고무조각을 잘라 죽 잡아 폈다. 톰이 조심스럽게 땜질을 하는 사이에 앨은 타이어를 꼭 움켜잡고 있었다.

“됐다. 저쪽 운전대 발판으로 가져가라. 내가 망치로 좀 두들겨 줄 테니까.

그는 때운 자리를 골고루 두들겼다. 그리고서 타이어를 펼쳐 때운 가장자리를 살폈다.

“이만하면 끄떡없겠다. 가장자리만 찰싹 붙으면 펌프로 불어 주지. 어머니, 돈이 굳을 모양인데요.

앨이 말했다.

“우리도 스페어타이어가 있어야겠어. 미리 하나 장만해 놓아야겠어. 틀까지 끼워 바람도 팽팽하게 넣어둔 스페어타이어만 있으면 한밤중이라도 갈아 끼울 수가 있잖아?

“우리에게 스페어타이어를 살 만한 돈이 생긴다면 우선 커피하고 고기나 좀 사먹어야겠다.” 톰이 말했다.

아침이라서 아직 차의 왕래는 많지 않았지만 이따금씩 차들이 국도 위를 부르릉거리고 지나갔다. 해는 점점 뜨거워지고 밝아졌다. 가늘게 한숨짓는 듯한 선바람이 남서쪽으로부터 불어오고 커다란 골짜기 양쪽에 솟은 산들은 희끄무레한 아지랑이에 가려져 윤곽이 희미했다.

톰이 한참 타이어에 펌프질을 하고 있는데 북쪽으로부터 달려오던 오픈카 한 대가 길 건너편에 와서 멎었다. 회색빛 양복을 입은 거무스름한 남자 하나가 차에서 내려 트럭 쪽으로 걸어왔다. 머리에는 모자를 쓰지 않고 있었다. 미소를 짓는 그의 이는 거무스름한 얼굴 속에서 아주 새하얗게 드러나 보였다. 왼손 가운뎃손가락에는 굵직한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다. 조끼에 늘어뜨린 가는 금줄에 조그마한 축구공이 대롱거리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그가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톰이 펌프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남자는 희끗희끗한 짧은 머리털 속에 손가락을 넣어 긁적거리며 말했다.

“당신들은 일자리를 구하는 중이요?

“예, 그렇습니다. 땅속까지 찾아갈 판입니다.

“복숭아를 딸 수 있겠소?

“우리는 그건 안 해보았는데요.” 아버지가 말했다.

“무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톰이 얼른 말했다.

“아무거나 다 딸 수 있습니다.

남자는 금으로 만든 축구공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여기서 한 40마일쯤 북쪽에 가면 일거리가 얼마든지 있소.

“정말 그 일자리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톰이 말했다.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려 주시면 당장 달려가지요.

“여기서 북쪽으로 픽스리라는 데를 찾아가시오. 35, 6마일쯤 될 거요. 여기에서 동쪽으로 돌아서 한 6마일만 가면 되오. 거기에 가면 아무한테나 후퍼농장이 어디냐고 물어 보시오. 일거리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

“그러지요.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어디에 가면 많은지 아시오?

“그럼요.” 톰이 말했다.

“저 아래에 있는 위드팻치 캠프에 가면 사람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나는 곧장 그리로 가 보아야겠군. 사람을 더 많이 써야 하니까. 잘 기억해 두시오. 픽스리에서 동쪽으로 돌아 후퍼농장이 나올 때까지 곧장 동쪽으로 가면 되는 거요.

“알았습니다.” 톰이 말했다.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는 지금 일자리를 못 구해서 걱정을 하던 판이었습니다.

“좋아요. 그럼 어서 가보시오.

그는 돌아서서 자기 차에 올라타고 남쪽으로 차를 몰고 가버렸다.

톰은 펌프 위에 체중을 걸었다.

“한 사람 앞에 스무 번씩이에요.” 그가 외쳤다.

“하나, , , 넷…”

스물이 되자 앨이 펌프를 받았다. 그리고는 아버지, 삼촌의 차례로 교대해 갔다. 타이어가 불룩해지고 매끈해졌다. 세 번씩 차례가 돌아가니까 펌프가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인제 그만하고 어디 좀 보자.” 톰이 말했다.

앨이 잭을 풀고 차를 내려놓았다.

“충분히 들어갔어.” 그가 말했다.

“너무 많이 넣었나 봐.

그들은 연장을 도로 차 안에 집어넣었다.

“자, 가자.” 톰이 소리쳤다.

“인제 드디어 일자리가 생기나 보다.

어머니가 다시 가운데에 앉았고 이번에는 앨이 차를 몰았다.

“좀 살살 몰아라. 너무 급하게 몰아붙이지 말고.

그들은 해가 반짝 뜬 들판을 뚫고 달렸다. 산허리에서 아지랑이가 걷히고 겹겹이 짙은 보라색으로 물든 산봉우리마다 깨끗한 갈색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트럭이 지나가자 울타리에 앉았던 산비둘기들이 푸드덕거리고 날아올랐다. 앨은 무의식중에 차의 속력을 올리고 있었다.

“좀 살살 해.” 톰이 주의를 주었다.

“그렇게 몰아붙이다가는 차가 날아갈라. 거기까지는 어떻게든지 도착해야 하니까. 오늘 당장에라도 좀 일을 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어머니가 흥분해서 말했다.

“남자 넷이 일을 시작하면 나는 당장 외상도 얻을 수 있겠구나. 우선 커피부터 사야겠다, 네가 하도 커피 타령을 하니까. 그리고 밀가루하고 베이킹파우더하고 고기 조금하고,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는 아직 사지 말아야겠다. 그건 좀 있다가 먹기로 하고, 주말쯤에나 먹자. 그리고 비누를 꼭 사야지. 그런데 어디서 자리를 잡고 앉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녀는 계속 중얼거렸다.

“그리고 우유를 사야겠다. 로자샤안 때문에 우유를 꼭 사야 해. 걔는 우유를 먹어야 한다. 간호사 여자가 그러더라.

뜨거운 국도 위에 뱀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지나갔다. 앨이 그쪽으로 차를 몰아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제 길로 차를 돌렸다.

“땅쥐 잡는 뱀이다.” 톰이 말했다.

“살려 두지 그랬니?

“난 그게 싫어.” 앨이 유쾌하게 말했다.

“난 뱀이란 종자는 무조건 다 싫어. 그걸 보면 뱃속이 꿈틀거려.

국도를 달리는 아침나절의 교통량이 늘어갔다. 차문에 회사 상표를 페인트로 칠한 번들번들한 쿠페차를 타고 가는 세일즈맨들, 뒤에 쩌렁쩌렁 소리를 내는 쇠사슬을 끌고 가는 빨갛고 하얀 휘발유 탱크를 실은 트럭들, 식료품 도매상에서 물건을 배달하러 나가는 넓적하고 네모진 문이 달린 상자 모양의 트럭들이었다. 국도를 따라 기름지고 풍성한 시골풍경이 펼쳐졌다. 과수원들은 한창 철을 만나 나뭇잎들이 시퍼렇게 우거져 있었고, 포도덩굴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사이로 파란 줄기를 뻗어 땅바닥에 시퍼런 융단을 깐 듯 무성했다. 수박밭이 있었고 곡식을 심은 밭도 있었다. 푸른 들에 점점이 하얀 집들이 박혀 있었고, 지붕 위에는 빨간 장미가 피어 있었다. 해는 황금빛으로 따사로웠다.

트럭 앞자리에 앉은 어머니와 톰과 앨은 흐뭇한 행복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이렇게 마음이 흐뭇해 보기는 정말 오랜만이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복숭아를 많이 따면 우리는 집도 한 칸 얻을 수 있겠다. 두어 달 동안은 집세라도 내고 말이다. 어떻든지 집은 꼭 얻어야 한다.

앨이 말했다.

“나는 저축을 할래요. 저축을 좀 해서 도회지에 나가 차고 같은 데에 취직을 해야겠어요. 좋은 방에서 살고 식당 같은 데 가서 밥을 먹을래요. 매일 밤마다 영화구경이나 가고. 그렇게 돈이 많이 들지도 않아요. 카우보이 영화 말예요.

핸들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라디에이터가 부글거리면서 수증기를 뿜었다.

“거기에 물을 부어 놓았니?” 톰이 물었다.

“그럼, 그런데 바람이 뒤쪽에서 부나 봐. 그래서 라디에이터가 자꾸 끓어오르지?” 앨이 말했다.

“참, 날씨 한번 좋구나.” 톰이 말했다.

“맥 알레스터 형무소에서 일을 할 때는 밖에 나가 무슨 일을 할지 그 궁리만 했었는데, 곧장 어디론가 가버릴 생각만 했지. 아주 갈 데로 가고 다른 데는 아무데도 거들떠보지 않으려고 말이야. 벌써 옛날 일 같구나. 거기에 있던 것이 한 일 년 전쯤의 일 같아. 거기에 있던 간수 한 놈이 아주 더럽게 굴었지. 한번 쥐어박아 주려고 별렀는데. 그놈 때문에 나는 경찰만 보면 화가 나는 모양이야. 경찰 녀석들은 모조리 그놈 얼굴하고 똑같은 느낌이야. 그 놈은 가끔 얼굴이 빨개지더라. 꼭 돼지같이 생겨 가지고 말이야. 서부에 형이 하나 있었다는데, 죄수들을 가석방시켜 주고 그 사람들을 형한테 보내서 품삯도 안 주고 부려먹는단 말이야. 그러다가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 않으면 가석방 조건을 위반했다고 해서 다시 감옥에 집어넣는 거야.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여하튼 사람들 말이 그랬어.

“인제 그때 일은 생각하지도 마라.” 어머니가 타일렀다.

“나는 먹을 것이나 잔뜩 들여놓아야겠다. 밀가루하고 기름하고.

“생각할 건 생각하는 게 좋아요.” 톰이 말했다.

“탁 덮어놓고 잊어버리려 하면 오히려 더 신경이 써지는 걸요. 거기에 머리가 좀 이상한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얘기는 아직 안 했어요. 건달같이 생긴 녀석인데 아주 쾌활했어요. 남한테 절대 해롭게 하지 않는 녀석인데 늘 탈옥하겠다는 생각만 했지요. 그래서 다들 그 녀석을 건달이라 불렀어요.” 톰은 혼자서 웃었다.

“이제 그 생각은 그만두어라.” 어머니가 말했다.

“그 사람 얘기 좀 더 해봐, .” 앨이 말했다.

“괜찮아요, 어머니.” 톰이 말했다.

“녀석은 언제나 탈옥을 하겠다고 벼르고만 있었어요. 늘 계획을 세웠고 계획을 마음속에다 넣어 두지를 못했지요. 얼마 안 있으면 사람들이 다 알아 버리게 되지요. 간수까지 알게 돼요. 그러다가 막상 탈옥을 감행하려는 찰나에 붙들려서 다시 끌려 들어오지요. 한번은 자기가 담을 넘어갈 장소를 그림으로 그렸어요. 물론 사람들한테 그림을 다 보여 주었지만 다들 가만히 있었어요. 녀석은 살짝 빠져 나갔는데 모두들 모르는 척했지요. 어디선가 밧줄을 하나 가져다가 그걸로 담을 넘어갔어요. 담 밖에는 큼직한 보자기와 자루를 가진 간수들이 여섯 명이나 있었는데, 그 건달이 밧줄을 타고 살며시 내려가자마자 간수들이 보자기로 덮쳐서 그대로 끌고 들어 왔어요. 입까지 틀어 막혀 감방으로 끌려왔더군요. 감방에 있던 사람들은 하도 우스워서 허리가 부러질 뻔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그만 그 건달의 마음에 큰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에요. 그저 계속 울기만 하면서 멍청하게 왔다 갔다 하더니 병이 들어 버렸어요. 감정이 너무 상했던 모양이지요. 핀을 가지고 자기의 팔목을 찔러서 피를 흘리고 죽어 버렸어요. 너무 비관했던 거지요. 사람 자체는 별로 나쁘지 않았는데, 참 멀쩡하게 돌아 버린 사람도 많은가 봐요.

“그런 얘기는 하지도 마라.” 어머니가 말했다.

“나도 후로이드라는 애를 잘 아는데 걔도 본래는 나쁜 아이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하도 못살게 굴어서 그렇게 된 거야.

해는 점점 중천으로 옮아갔고, 트럭의 그림자는 가늘어져 이제 바퀴 밑으로 깔렸다.

“저쪽 길 건너가 픽스리일 거야.” 앨이 말했다.

“조금 아까 푯말을 보았어.

그들은 조그마한 읍내를 뚫고 들어가 약간 좁은 길로 접어들어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길 양쪽에 과수원들이 줄을 지어 마치 과수원 사이의 통로를 지나는 것 같았다.

“쉽게 찾아가야 할 텐데.” 톰이 말했다.

“아까 그 사람이 후퍼농장이랬지?” 어머니가 말했다.

“아무한테 물어보아도 다 알 수 있다고 했다. 근처에 구멍가게라도 있으면 좋겠다. 남자가 넷이나 일을 하니까 외상이라도 좀 텄으면 좋겠다. 외상만 준다면 오늘은 정말 근사한 저녁을 차려주고 싶구나. 스튜를 한번 먹음직하게 해주게 말이다.

“그리고 커피하고요.” 톰이 말했다.

“나는 덜햄 담배나 하나 사주세요. 담배 피워본 지도 오래 됐는데요.

저만큼 길 앞은 차들로 꽉 막혀 있었다. 하얀 모터사이클이 길 가장자리에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사고라도 난 모양인데.” 톰이 말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주 경찰관 하나가 가죽장화 신고 샘브라운 혁대를 매고 다가왔다. 그가 손을 번쩍 들자 앨은 차를 멈추었다.

경찰관이 차의 옆구리에 와서 은밀한 태도로 물었다.

“어딜 가시오?

앨이 말했다.

“누가 그러는데 이쪽으로 가면 복숭아 따는 일이 있다던데요?

“일자리를 구하는 거요?

“물론이오.” 톰이 말했다.

“좋소.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시오.

그는 길가로 걸어가더니 앞에다 대고 소리쳤다.

“또 하나 왔어요. 차 여섯 대가 되었어요. 이 여섯 대 한 조를 먼저 들여보내는 게 좋을 거요.

톰이 소리쳤다.

“이봐요, 무슨 일이지요?

경찰관이 어슬렁거리며 돌아왔다.

“저쪽 앞에서 약간 옥신각신이 있었소. 당신네들은 걱정할 것 없어요. 그냥 통과시킬 테니 이 줄만 쭉 따라 가시오.

모터사이클이 발동을 거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자동차들의 행렬이 움직여 나갔고, 조드네 트럭이 맨 꽁무니에서 따라갔다. 모터사이클 두 대가 앞에서 안내를 했고 뒤에서 두 대가 따라왔다.

“혹시 길이 막혔는지 몰라.” 앨이 말했다.

“경찰이 넷씩이나 우리를 데리고 갈 필요가 없잖아? 기분이 좋지 않은걸.

앞의 모터사이클이 속력을 올렸다. 고물 자동차들이 뒤따라 속력을 냈다. 앨은 앞차에 바싹 붙으려고 애를 썼다.

“여기 가는 사람들도 다 우리하고 같은 사람들인데. 어쩐지 기분이 안 좋은걸?” 톰이 말했다.

갑자기 앞서가던 경찰들이 길을 벗어나서 자갈이 깔려 있는 넓은 출입문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자동차들이 뒤를 쫓았다. 모터사이클에서 모터소리가 진동했다. 길옆 도랑가에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뭐라고 소리들을 지르는지 입을 벌리고 불끈 쥔 주먹들을 휘두르면서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육중한 몸집을 한 여자 하나가 자동차 쪽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는 모터사이클이 그녀 앞길을 가로막았다. 철조망으로 된 높다란 출입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고물 자동차 여섯 대가 문을 통과하고 나니 문이 닫혔다. 모터사이클 네 대는 다시 뒤로 돌아서더니 아까 왔던 데로 돌아갔다. 경찰관들이 가버리자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다. 두 남자가 자갈밭 길옆에 서있었다. 그들은 각각 엽총을 들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가시오. 어서 가보시오. 무얼 기다리는 거요?

여섯 대의 차가 움직였다. 모퉁이를 하나 돌자 바로 복숭아 농장으로 들어섰다. 지붕이 납작한 상자같이 생긴 집들이 한 50채 들어서 있었다. 집집마다 문과 창이 달려 있었다. 캠프 한쪽 가장자리에 높은 물탱크가 세워져 있었다. 맞은편 끝에는 조그마한 식료품 가게가 서있었다. 납작하고 네모난 집들이 줄줄이 들어선 끝에는 각각 무장한 남자들이 두 사람씩 서있었다. 차 여섯 대가 멎었다. 장부를 들고 기록하는 사람 둘이 여섯 대의 차를 순서대로 찾아 다녔다.

“일을 하고 싶소?

톰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이게 어떻게 되는 거요?

“그건 당신이 알 바가 아니오. 일을 할 거요?

“물론 일을 하고 싶지요.

“성명?

“조드요.

“남자가 몇 사람이요?

4명이요.

“여자는?

2명이요.

“모두들 일을 할 수 있소?

“글쎄, 할 수 있겠지요.

“좋소. 그럼 63호 집을 찾아가시오. 품삯은 한 상자에 5센트씩이오. 과일이 조금이라도 터진 것이 들어 있으면 안 되오. 알았소? , 어서 가시오. 당장 일을 시작해야 하오.

차들이 다시 움직였다. 네모꼴로 된 집들의 문간마다 숫자가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60.” 톰이 말했다.

“저기가 60호군. 그러니까 그 뒤쪽이겠어. 61, 62, 여기다.

앨을 작은 집의 문간 바로 옆에 차를 세웠다. 가족이 짐꾸러미 위에서 내려와 어리둥절해 갖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보안관 보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가족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성명이 뭐죠?

“조드요.” 톰이 불안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떤 데지요?

보안관 보 하나가 기다란 일람표를 꺼냈다.

“여기에는 없는데? 당신 이 사람들 본 일 없어? 운전면허증을 좀 보자고. 아니, 없는 모양이야. 이 사람들은 괜찮은 것 같아. 이거 보시오. 우리는 당신들하고 아무 문제도 일으키고 싶지 않소. 당신네들 할 일만 하고 남의 일에는 일절 상관하지 마시오. 그러면 아무 일도 없을 테니.

두 보안관 보는 몸을 휙 돌려서 가 버렸다. 먼지가 쌓인 통로 끝에까지 가서 그들은 상자를 깔고 앉았다. 그들의 위치는 집들 사이의 통로를 똑 바로 내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톰이 그들 뒤를 응시했다.

“저 사람들은 우리를 정말 편안하게 해주는군.

어머니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바닥에는 식용유가 버려져 있었다. 단간 방 속에 녹슨 양철 스토브가 하나 있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양철 스토브는 벽돌 네 개로 받쳐져 있었고 녹슨 스토브 파이프가 지붕 속으로 박혀 있었으며 식용유 냄새와 땀내가 범벅을 이루고 있었다.

로자샤안이 어머니 옆에 와 섰다.

“우리, 여기서 살 거예요?

어머니는 잠시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그렇단다. 한번 싹 씻어 내면 괜찮겠다. 싹싹 닦아 내야겠다.

“나는 천막이 더 좋은데.” 딸이 말했다.

“여기는 그래도 방바닥이 있잖니?” 어머니가 말했다.

“여기는 비가 온데도 새지는 않는다.

그녀는 문 쪽으로 돌아섰다.

“짐을 끌러 봐라.

남자들이 묵묵히 짐을 내렸다. 그들은 적이 겁이 났다. 그 많은 상자 집들이 온통 조용했다. 아낙네 하나가 문 앞 통로를 지나갔으나 새로 들어온 사람들 쪽으로는 시선 한번 보내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여자는 치마 끝이 낡아서 너덜거리는 더러운 깅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무언가 불안한 생각이 루시와 윈필드에게도 들었던 모양이다. 여느 때처럼 금방 달려 나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그들은 트럭에만 매달려 있었고 가족들 곁에만 붙어 있었다. 그저 멍청하게 먼지 쌓인 통로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윈필드는 짐을 꾸리는 철사를 한 가닥 주워 구부렸다 폈다 하더니 끊어 버렸다. 두 조각 중에 짧은 것을 가지고 크랭크 모양을 만들더니 손에 넣고 빙글빙글 돌렸다.

톰과 아버지가 매트리스를 집안에 운반하고 있는데 직원이 찾아왔다. 그는 카키 바지에 파란 셔츠를 입고 까만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은테 안경을 쓴 그의 눈은 두꺼운 렌즈 속에서 힘없이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고, 눈동자가 볼록렌즈 한복판을 뚫고 그들을 응시했다. 그는 톰을 쳐다보기 위해서 몸을 앞으로 굽혔다.

“당신네를 장부에 기입해야겠어요.” 그가 말했다.

“일하실 분이 몇이지요?

톰이 말했다.

“남자만 넷이요. 일이 힘든 일이오?

“복숭아를 따는 일이오.” 직원이 말했다.

“청부 일이지요. 상자 당 5센트라오.

“꼬마들이 같이 도와서 해도 안 될 건 없겠군요.

“조심만 하면 안 될 것도 없지요.

어머니가 문간에 와 섰다.

“나도 집안이 정리만 되면 바로 나가서 거들련다. 우리는 당장 먹을 것도 없습니다. 품삯은 지금 바로 받을 수 있나요?

“아, 지금 바로 현금을 드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 가게에 가시면 앞으로 받으실 액수 범위 안에서 외상을 할 수가 있지요.

“자, 그럼 빨리 가야겠군.” 톰이 말했다.

“나는 오늘밤 고기하고 빵을 좀 먹어야겠어.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가면 되지요?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가는 길이니까 나하고 같이 갑시다.

톰과 아버지와 앨과 존 삼촌은 직원을 따라 먼지 쌓인 통로를 거쳐 과수원 속 복숭아나무 사이를 걸어갔다. 작은 잎사귀들이 이제 막 누르스름한 색깔을 띠어가고 있었다. 둥그런 열매들이 누렇고 빨갛게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나무 사이마다 빈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일꾼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나무에서 복숭아를 따다가 양동이에 담고, 양동이의 복숭아를 다시 상자에 담고, 다음에는 그 복숭아 상자를 들고 계산하는 데로 운반하고 있었다. 계산하는 데서는 복숭아를 담은 상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트럭을 기다리고 있었고, 직원들이 복숭아 딴 일꾼들 이름을 하나하나 적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네 사람이 더 왔어요.

안내를 하고 가던 직원이 다른 직원에게 말했다.

“좋아요. 전에 복숭아를 따 보신 일이 있으시오?

“안 해보았습니다.” 톰이 말했다.

“그럼 조심해서 따시오. 알을 조금이라도 깨뜨려도 안 되고 바람 든 것을 담아도 안 되오. 복숭아 알이 깨져 있으면 장부에 올리지 못하니까요. 저기 양동이가 있어요.

톰은 3갤런 들이 양동이 하나를 집어 들고 쳐다보았다.

“바닥이 구멍투성인데요?

“그렇지요.” 눈이 나쁜 직원이 말했다.

“그렇게 해놓아야 아무도 훔쳐가지 않거든요. , 그럼 저쪽 밭으로 갑시다.

조드 일가의 남자 네 사람은 각기 양동이를 하나씩 들고 과수원으로 들어갔다.

“무척 급하게 몰아대는군.” 톰이 말했다.

“제기랄, 난 차고 같은 데서 일하는 게 훨씬 좋겠다.” 앨이 말했다.

여태까지 잠자코 밭으로 따라오고 있던 아버지가 앨을 돌아보았다.

“너 그 소리 좀 닥치지 못하겠니?” 그가 갑자기 소리쳤다.

“너는 꼭 잠꼬대 같은 소리나 하고 투정이나 하고 황소우는 소리나 하고 있는데, 너도 인제 일을 해야 해. 큰소리만 치고, 건방진 녀석 같으니라고. 이 녀석, 몽둥이찜질을 해줄까 보다.

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제 금방이라도 발작을 터뜨릴 기세였다.

톰이 그에게 다가가서 달랬다.

“야, . 빵하고 고기 말이다. 그걸 벌어야 하는 거다.

복숭아나무에 다가간 그들은 과일을 양동이에 떨어뜨렸다. 톰은 서둘러 일을 했다. 한 양동이가 찼다. 그것을 갖다 상자에 주르르 쏟았다. 세 양동이를 붓고 나니 가득 찼다.

“인제 5센트 벌었군.

그는 소리를 지르고는 상자를 집어 들고 급히 계산소로 달려갔다.

“자, 5센트 어치 가져왔어요.” 그가 계산하는 직원에게 말했다.

직원은 상자 안을 들여다보더니 복숭아를 두어 개 뒤적거렸다.

“그건 저쪽에 갖다 놓으시오. 그건 안 되겠어요.” 그가 말했다.

“복숭아 알에 상처를 내지 말라고 했잖소? 양동이에 마구 쏟아 담았군, 그렇지요? 복숭아마다 다 부서져 있으니 말이요. 그건 계산하지 못하겠소. 하나하나 살살 담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헛일을 하는 거요.

“왜 그렇단 말이요, 제기랄!

“자, 좀 살살 하시오. 일 시작하기 전에 내가 주의를 주지 않았소?

톰은 시무룩해져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좋아요, 좋아.

그는 말하고 얼른 세 사람이 일하고 있는 데로 돌아갔다.

“그거 다 퍼내 버려야겠어요.” 그가 말했다.

“그것도 다 내 것과 마찬가지군요. 그런 건 안 받는데요.

“무어야? 왜 그런대!” 앨이 발끈했다.

“살살 따야 한대. 양동이에다 막 떨어뜨리면 안 된대. 하나씩 내려놓아야 한대.

모두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 조심스럽게 손을 놀렸다. 한 상자 차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

“무슨 방법을 연구해야겠어.” 톰이 말했다.

“루시하고 윈필드하고 로자샤안이 와서 상자에 담으면 일이 체계가 잡히겠어.

그는 새로 담은 상자를 계산소에 가져갔다.

“이만하면 5센트짜리가 되겠소?

계산소 직원이 상자 안을 조사해 보더니 말했다.

“아까보다 낫군요.

그는 상자를 계산에 넣었다.

“좀 살살 하세요.

그들은 급히 제자리에 돌아갔다.

5센트 벌었다. 5센트 벌었어.” 그가 말했다.

“그렇게 스무 번만 하면 1달러가 되는군.

그들은 오후 한나절을 꾸준히 일했다. 루시와 윈필드가 얼마 뒤 그들 있는 곳을 찾아왔다.

“너희도 일을 해야 한다.” 아버지가 말했다.

“너희, 그 복숭아를 조심해서 상자에 담아라. , 여기. 한 번에 한 개씩 해라.

어린애들은 쭈그리고 앉아 양동이로부터 복숭아를 꺼내 담았다. 양동이가 줄을 지어 애들 앞에 밀려들었다. 가득 찬 상자는 톰이 들고 가 계산을 했다.

“이게 일곱이고, 이것까지 여덟이오.” 그가 말했다.

40센트 벌었군. 40센트면 고기라도 좀 사먹겠는데.

오후가 지나갔다.

루시가 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이, 피곤해. 좀 쉬어야겠어.” 그녀가 우는 소리를 냈다.

“가면 안 된다. 더 해라.” 아버지가 말했다.

존 삼촌의 속도가 느려졌다. 그는 톰이 두 양동이 따는 사이에 한 양동이밖에 따지 못했다. 그의 속도는 그대로 달라지지 않았다. 한나절이 지나자 어머니가 터덜거리고 나왔다.

“좀 일찍 나오려고 했는데 로자샤안이 쓰러졌군요. 좀 기운을 잃었나 봐요.” 그녀가 말했다.

“너희 복숭아를 먹었구나.” 그녀가 애들에게 말했다.

“그러다가 배탈 날라.

어머니는 다부진 몸을 재빨리 놀렸다. 그녀는 양동이를 던져 버리고 자기 앞치마에 따 담기 시작했다. 해가 기울 때쯤 그들은 스무 상자를 땄다.

톰이 스무 번째 상자를 내려놓았다.

1달러요.” 그가 말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지요?

“어두울 때까지 하세요. 복숭아가 보일 때까지.

“인제 외상을 좀 얻을 수가 있겠지요? 어머니가 가셔서 먹을 것을 좀 준비해야겠는데.

“그러세요. 1달러어치 쪽지를 하나 떼어 드리지요.

그는 종이쪽지에 무어라 쓰더니 그걸 톰에게 건네주었다. 톰은 그것을 어머니에게 갖다 주었다.

“여기 있어요. 가게에 가시면 1달러어치 물건을 살 수 있어요.

어머니는 양동이를 내려놓고 어깨를 폈다.

“할 만하지? 처음 해보지만. 그렇지 않니?

“그럼요. 인제 금방 익숙해지겠는데요, . 얼른 가서 먹을 것이나 좀 사오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무엇들을 먹을까?

“고기요.” 톰이 말했다.

“고기하고 빵하고 설탕이 들어 있는 커피 한 주전자하고요. 고기도 큼직한 걸로 사세요.

루시가 우는 소리를 했다.

“엄마, 피곤해.

“그럼 따라오너라.

“그놈들은 일을 시작할 때부터 피곤했어.” 아버지가 말했다.

“꼭 들토끼처럼 까불고 날뛰는 놈들이야. 그놈들은 그저 핀으로 꼭 찍어 두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겠구나.

“우리도 정착만 하면 애들을 바로 학교에 보내야 해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가 스적스적 걸어갔고 애들은 슬금슬금 어머니 뒤를 따랐다.

“우리도 날마다 일을 해야 해?” 윈필드가 물었다.

어머니가 걸음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는 윈필드 손을 꼭 잡고 걸어갔다.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런 일도 해보는 게 좋은 거야. 또 너도 집안을 위해 일을 할 수도 있고. 우리 식구가 다 같이 일하면 얼마 안 가 좋은 집에 살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다 같이 도와야 해.

“그래도 너무 힘들어.

“그래, 엄마도 안다. 엄마도 피곤하다. 누구나 다 피곤한 거야. 그럴 때에는 다른 일을 생각하면 돼. 학교에 가면 무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 되는 거야.

“난 학교 같은 거 안 다닐래. 루시도 안 간대. 학교에 다니는 애들, 우리도 보았단 말이야. 그 개새끼들! 엄마, 애들이 우리보고 오키라고 놀려. 나도 보았어. 난 학교 안 갈래.

어머니는 아들의 노란 머리 위를 애처롭게 내려다보았다.

“이런 때에 가족들한테 떼를 쓰고 마음을 어지럽히면 안 돼.” 그녀가 애원했다.

“살림이 안정이 되면 그때에는 어리광을 해도 좋지만 지금은 안 돼. 그렇지 않아도 걱정거리가 너무 많단다.

“나는 복숭아를 여섯 개 먹었어.” 루시가 말했다.

“넌 이제 설사를 하겠다. 우리 집 있는 데서는 변소도 멀던데.

회사 구내매점은 골이 파진 함석으로 지어진 큼직한 가건물이었다. 진열장도 없었다. 어머니는 칸막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남자 하나가 카운터 뒤에 서있었다. 그의 머리는 완전히 벗어진 대머리였고 희끗희끗 세어 있었다. 커다란 갈색 눈썹이 그의 두 눈을 덮어 누르고 있어서 그의 얼굴은 좀 놀라고 겁이 난 것 같은 표정으로 보였다. 가는 코가 기다랗게 내리뻗어 마치 새의 주둥이처럼 구부러졌고 콧구멍 속에는 갈색 수염이 살짝 나있었다. 그의 파란 셔츠 소매 위에는 까만 공단으로 된 소매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어머니가 들어갈 때 그는 한쪽 팔꿈치를 카운터 위에 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찬찬히 그녀를 훑어보았다. 활 모양으로 된 그의 눈썹이 더욱 치켜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1달러짜리 전표를 가져왔는데요.

1달러어치를 가져가시지요.” 그는 말하더니 낄낄 소리 내 웃었다.

“그러지요. 1달러어치, 1달러어치요.

그는 손을 저어 물건들을 가리켰다.

“아무거나 가져가세요.

그리고서 소매 덮개를 단정하게 걷어 올렸다.

“고기나 한 조각 가져가겠어요.

“무어든지 다 있어요.” 그가 말했다.

“햄버거도 있고, 햄버거 가져가시겠어요? 1파운드에 20센트요.

“아이고, 그렇게 비싸요. 지난번 다른 데서는 15센트에 산 것 같은데요.

“글쎄요.” 그가 가만히 웃었다.

“예, 비싸기도 하고 싸기도 하지요. 만약 햄버거 두어 파운드 사러 시내까지 나가 보세요. 휘발유가 1갤런은 들 거요. 그러니까 여기서 사는 게 결코 비싸기만 한 건 아니지요. 휘발유 값이 안 드니까요.

어머니가 야무지게 말했다.

“댁에서 사 오실 때는 휘발유 1갤런이 안 들었을 텐데요.

그는 유쾌하게 웃어댔다.

“아주머니는 너무 외곬으로만 생각하시는군요.” 그가 말했다.

“우리는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팔고 있는 거요. 우리가 사는 경우라면 그야 얘기는 다르지요.

어머니는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대고 상을 찡그리며 생각해 보았다.

“맨 기름기하고 뼈 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뼈까지 다 요리할 수 있다고 보장하지는 않겠어요.” 그가 말했다.

“또 그걸 내 자신이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요. 나더러 먹으라고 해도 안 먹을 물건은 얼마든지 있지요.

어머니는 잠시 그를 사납게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려고 애를 쓰며 말했다.

“좀 더 싼 고기는 없나요?

“국을 끓이는 사골이 있지요. 1파운드에 10센트입니다.

“하지만 그건 맨 뼈다귀뿐이잖아요?

“뼈다귀뿐이지요.” 그가 말했다.

“그래도 사골 국물이 아주 좋지요.

“삶을 고기는 없나요?

“아, 있지요. 1파운드에 두 조각쯤 되지요.

어머니가 말했다.

“식구들이 고기를 먹어야겠는데, 모두 고기를 사오라 했어요.

“그야 누구든 고기를 원하죠. 또 먹어야 하고. 햄버거가 제일 좋을 겁니다. 거기서 나오는 기름은 받아 고깃국을 하면 돼요. 아주 훌륭합니다. 하나도 버릴 것 없으니까요. 뼈도 버리지 마세요.

“돼지고기는 얼마예요?

“아이고, 인제 점점 더 고급만 찾으시네.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 같은 명절 때 음식만 생각하시는군요. 그건 1파운드에 35센트요. 칠면조 고기는 좀 싸게 팔 수 있어요. 그게 지금 없지만.

어머니가 한숨을 흘렸다.

“햄버거 2파운드만 주세요.

“그러세요.” 그는 얄팍한 고기를 초 종이에 말아 쌌다.

“또 다른 건 안 사세요?

“빵을 좀 주세요.

“여기 있어요. 아주 큼직한 덩어리지요. 15센트요.

“그건 12센트짜리 빵이에요.

“그렇지요. 시내에 나가서 12센트로 사세요. 휘발유 1갤런하고 해서 말이오. 또 다른 것은 없으세요? 감자 같은 것.

“네 감자 좀 주세요.

어머니가 자못 위협적인 태도로 그에게 다가섰다.

“인제 그 얘기 충분히 들었어요. 시내에서 얼마 하는지 다 알고 있다고요.

작은 남자는 입을 꼭 다물었다.

“그럼 시내에 가서 사세요.

어머니는 자기 손가락 마디를 내려다보았다.

“이 가게는 어떻게 된 거지요? 댁에서 경영하세요?

“아, 아니요. 난 그저 점원이지요.

“그럼, 사람을 그렇게 비웃으실 이유는 없지 않으세요? 그래서 뭐가 좋으세요?

그녀는 자기의 주름진 반들거리는 손을 쳐다보았다. 작은 남자는 잠자코 있었다.

“그럼 이 가게는 누가 경영하지요?

“후퍼농장 회사랍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가격을 매기는군요?

“그렇습니다, 아주머니.

그녀는 약간 미소를 띠고 올려보았다.

“누구나 여기에 들어와서 저 같은 얘기를 하고 화를 내지요?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렇습니다, 아주머니.

“그래서 그렇게 농담을 하셨군요?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지저분한 일 하시면서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그렇게 말을 비꼬아 하실 건 없잖아요?” 그녀 목소리는 조용했다.

작은 남자는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말이 없었다.

“그렇잖아요?”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고기가 40센트, 빵이 15센트, 감자가 25센트, 그래서 80센트군요. 커피도 있으세요?

“제일 싼 것이 20센틉니다, 아주머니.

“그러면 꼭 1달러군요. 우리 일곱 식구가 일을 했어요. 그게 우리 저녁거리예요.

그녀는 자기의 손을 살폈다.

“다 싸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세요, 아주머니.” 그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감자를 종이가방에 집어넣고 주둥이를 조심스럽게 오므렸다. 그는 힐끗 어머니를 훔쳐보더니 다시 손을 놀렸다. 그녀는 그를 지켜보고 있다가 가만히 웃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을 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먹고 살아야지 어떻게 합니까?” 그는 말을 시작하더니 이윽고 좀 도전적인 말투로 변했다.

“누구든지 먹고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닙니까?

“누구라니, 어떤 누구 말이에요?” 어머니가 물었다.

그는 봉지 네 개를 카운터에 놓았다.

“고기, 감자, , 커피, 그래서 꼭 1달럽니다.” 그가 말했다.

그녀는 그에게 전표쪽지를 건네주고, 그가 이름을 기입하고 액수를 적는 동안 그를 지켜보았다.

“자, 그럼 피차 계산이 끝났습니다.” 그가 말했다.

어머니가 보따리를 집어 들었다.

“아, 그런데 설탕이 없군요. 우리 아들 톰이 설탕을 가져오라고 했는데요. , 지금 우리 집 식구들이 밖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우선 설탕을 좀 주시겠어요? 그럼 전표를 나중에 갖다 드릴게요.” 그녀가 말했다.

작은 남자는 외면을 했다. 되도록 어머니로부터 먼 곳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건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건 규칙입니다. 할 수 없어요. 문제되면 제 목이 달아납니다.

“하지만 지금 밖에서 일을 하고 있다니까요. 지금 벌써 10센트 어치는 더 했을 거예요. 설탕 10센트 어치만 주세요. 우리 톰이 커피에 설탕을 원했어요. 그걸 꼭 가져오라고 했는데요.

“아주머니, 그건 곤란합니다. 규칙이니까요. 전표가 없으면 물건을 못 드립니다. 여기 지배인이 그걸 늘 잔소리한답니다. 그것만큼은 정말 못 합니다. 제가 붙들려 갑니다. 사람들이 늘 붙들려 갑니다. 늘 그래요. 그건 할 수 없습니다.

10센트 가지고 그래요?

“얼마라도 그럽니다, 아주머니.

그는 애원하듯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 얼굴에서 무서운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10센트짜리 한 닢 호주머니에서 꺼내더니 그것을 현금등록기 속에 쩔렁 소리를 내며 떨어뜨렸다.

“자, 그럼.” 그는 안도의 빛을 띠며 말했다.

그는 카운터 아래에서 작은 봉지를 꺼내서 주둥이를 열더니 그 안에 설탕을 조금 집어넣고 봉지를 저울에 달아 보더니 설탕을 조금 더 넣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인제 되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전표를 가져오시면 내 돈 10센트를 도로 찾지요.

어머니는 남자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물건을 자세히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을 뻗어 작은 설탕 봉지를 자기의 물건 보따리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문간 쪽으로 발을 옮겼다. 문까지 와서 그녀는 돌아섰다.

“저는 한 가지 배웠어요.” 그녀가 말했다.

“날마다 그리고 언제나 그걸 배우고 있어요. 만약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마음이 괴롭거나 사정이 어려워지거나 할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세요. 도와주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뿐이에요. 가난한 사람들이 정말 도울 줄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더군요.

그녀가 나가고 칸막이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작은 남자는 카운터에 팔꿈치를 괴고 서서 놀란 눈으로 그녀 뒤를 지켜보았다.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른 얼룩고양이 한 마리가 카운터로 껑충 뛰어오르더니 천천히 남자 쪽으로 다가갔다. 고양이는 그의 팔뚝에 대고 비스듬히 얼굴을 비비더니 손을 뻗어 볼때기 쪽으로 가져갔다. 고양이가 큰소리로 울었다. 꼬리 끝이 앞뒤로 흔들렸다.

톰과 앨과 아버지, 그리고 존 삼촌은 날이 아주 어두워져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들의 발걸음이 다소 무거워진 듯했다.

“손을 뻗어서 복숭아를 따는 것만 해도 등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지 않니?” 아버지가 말했다.

“하루 이틀만 지나면 괜찮을 거예요.” 톰이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 저녁을 먹고 나서 좀 나가 보고 싶은데요. 아까 밖에서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소동을 벌였는지 해서 말이에요. 자꾸 그 생각이 떠올라서 못 견디겠어요. 같이 가실래요?

“안 갈란다.”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얼마 동안은 일만 하고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련다. 하도 오래 골치를 썩였더니 이젠 못 참겠다. 그냥 좀 앉아 있다 잠이나 자야겠다.

“너도 안 갈래, ?

앨은 고개를 돌렸다.

“우선 이 안이나 둘러보겠어.” 그가 말했다.

“그럼 존 삼촌은 안 가실 거고, 나 혼자서 가야겠군. 자꾸 가보고 싶어지는걸.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 것보다도 나는 훨씬 더 호기심이 나는 일이 있구나. 그 경찰관 놈들이 그렇게 몰려 있던 거 말이다.

“그 사람들도 밤에는 없겠지요.” 톰이 말했다.

“난 그런 거 신경 쓰지 않겠다. 너도 그런 데 간다는 소릴랑은 어머니한테 하지도 마라. 괜히 너희 어머니가 또 걱정을 하다가 죽어 버릴라.

톰이 앨 쪽을 돌아보았다.

“넌 궁금하지 않니?

“난 이 캠프나 한 바퀴 둘러볼래.” 앨이 말했다.

“계집애를 찾아볼래?

“난, 내 일이나 알아서 하겠어.” 앨이 샐쭉해서 말했다.

“그래, 난 꼭 가보아야겠다.” 톰이 말했다.

그들은 과수원을 지나 빨간 집들이 줄줄이 서있는 사이의 통로로 접어들었다. 누런 석유 등잔불들이 몇몇 집 문간에서 새어 나왔고, 그 안 어둑어둑한 그림자 속에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그림자가 비쳤다. 통로의 맨 끝에는 무릎에 총을 괴어 놓은 채 아직까지도 파수꾼이 앉아 있었다.

파수꾼 옆을 지나다가 톰이 걸음을 멈추었다.

“저어, 목욕 좀 할 만 한 데가 있을까요?

파수꾼은 희미한 불빛 속에서 톰을 뜯어봤다. 한참 뒤 그가 말했다.

“저기 저 물탱크가 보이세요?

“예.

“거기에 가면 호스가 있다오.

“더운물도 있나요.

“이봐요. 당신은 자기가 누군 줄 아시오? 대체 J. P. 모르간이나 되시오?

“아니오.” 톰이 말했다.

“천만에요. 그런 얘기가 아니오. 그럼 수고하시오.

파수꾼은 가소롭다는 듯 투덜거렸다.

“더운물? 사람 웃기네. 왜 깨끗한 욕실은 안 찾소?” 그는 조드네 사람들을 시무룩하게 쳐다보았다.

다른 파수꾼 하나가 모퉁이를 돌아왔다.

“왜 그러나, ?

“아, 저 망할 놈의 오키가 말이야, ‘더운물이 나오느냐.’는 거야.

새로 온 파수꾼이 총 개머리판 쪽으로 땅바닥을 짚었다.

“그건 저쪽에 있는 관청에서 만들어 준 캠프 얘기야.” 그가 말했다.

“틀림없이 녀석은 거기 있었던 모양이야. 우리가 그놈의 캠프를 싹 쓸어 없애 버리기 전엔 암만 해도 귀찮겠어. 이젠 깨끗한 이부자리까지 내놓으라 할 판이군. 틀림없어.

맥이 물었다.

“정문 사정은 좀 어떤가? 무슨 얘기 못 들었나?

“거긴 진종일 고함치고 야단이지. 주 경찰이 그럭저럭 진압을 했지만 말이야. 그 중에서 좀 빤질빤질하고 까부는 놈을 족치기로 했어. 키 크고 바싹 마른 녀석 하나가 뒤에서 조종을 한다나 봐. 오늘밤에 녀석을 붙잡아 버릴 거야. 그러면 다 조용해지겠지.

“너무 싱겁게 끝나면 우리도 일자리가 없어지게?” 맥이 말했다.

“아냐, 우리 일자리는 있어. 이 망할 놈의 오키들 같으니! 이놈들은 꼼짝 말고 지켜야 해. 조금 잠잠해지면 우리가 그놈들을 좀 쑤셔주면 되는 거야.

“품삯을 깎으면 좀 소란해질 거야.

“그럼,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자네, 우리 일자리 걱정은 할 필요도 없어. 후퍼가 여기에 있는 한은 말이야.

조드네 집에서 밥 짓는 불길이 올랐다. 햄버거 조각이 기름 속에서 씩씩 소리를 냈다. 감자 튀기는 소리도 요란했다. 집안은 연기로 가득 찼다. 노란 등잔불빛이 묵직한 그림자를 기다랗게 벽 위에 던졌다. 어머니가 불가에서 잽싸게 몸을 놀리고 있었고, 로자샤안은 상자 위에 앉아 무거운 배를 무릎으로 받치고 있었다.

“좀 괜찮으냐?” 어머니가 물었다.

“음식 냄새 때문에 죽겠어요. 배도 고프고.

“문간에 가서 앉아 있어라.” 어머니가 말했다.

“어차피 그 상자도 부셔야겠다.

남자들이 몰려들어 왔다.

“야아, 고기 냄새구나!” 톰이 말했다.

“또 커피 냄새도 나고. 냄새 한번 독하다. 아이고, 배고파 죽겠네. 복숭아는 실컷 먹었지만 아무 소용도 없군. 어머니, 어디 가서 좀 씻을까요.

“물탱크 쪽으로 가거라. 거기 가서 씻어라. 지금 막 루시하고 윈필드를 보냈다.

남자들이 다시 나갔다.

“얘, 로자샤안. 어서 저만큼 나가 있어라.” 어머니가 일렀다.

“문간에 가 앉든지 아니면 자리에 누워라. 그 상자는 부셔야겠다.

색시는 두 손으로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매트리스 쪽으로 무거운 걸음을 간신히 옮겨 가서 앉았다. 루시와 윈필드가 살그머니 들어와서 소리 없이 벽 옆에 붙어 서서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했다.

어머니가 그들을 건너다보았다.

“방이 어두워 너희들 야단맞지 않는 게 다행이다.”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윈필드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다.

“물은 묻었지만 암만 해도 깨끗하지는 않은 것 같다.

“비누도 없는데, .” 윈필드가 핑계를 댔다.

“그래, 없다. 좋다. 오늘은 비누를 못 샀다. 내일은 하나 사야겠다.

그녀는 다시 불가로 돌아갔다. 접시를 꺼내 놓고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 앞에 고기 두 조각씩하고 감자 큰 것 하나씩이었다. 접시마다 빵을 썰어서 세 쪽씩 놓았다. 고기가 다 프라이팬에서 꺼내지자 그녀는 고기 기름을 접시마다 조금씩 따라 주었다. 남자들이 다시 들어왔다. 얼굴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어 윤이 났다.

“먹어도 돼요?” 톰이 소리를 질렀다.

모두 접시를 들었다. 그리고 모두 조용히 그리고 굶주린 늑대들처럼 먹었고 접시 바닥에 묻은 기름까지 빵조각으로 닦아 먹었다. 어린애들은 한쪽 구석으로 가서 자기들의 접시를 방바닥에 놓고 마치 짐승처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톰은 마지막 남은 빵 조각을 꿀꺽 삼켰다.

“어머니, 더 있어요?

“없구나.” 그녀가 말했다.

“그게 전부다. 너는 1달러를 벌었고, 그게 1달러어치란다.

“그래요?

“여기는 비싸더라. 기회가 있을 때 시내에 나가 사와야겠더라.

“난 아직 양이 안 찼는데요.” 톰이 말했다.

“내일은 하루 몫을 다 해주마. 내일 밤에는 좀 잘 해먹어 보자.

앨은 소매로 입을 씻었다.

“바람이나 좀 쐐야겠어.” 그가 말했다.

“기다려. 같이 나가자.

톰이 그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어둠 속에서 톰은 동생 곁으로 다가섰다.

“너 정말 나하고 같이 안 가겠니?

“싫어. 아까 그랬잖아? 나 혼자서 좀 돌아볼래.

“그래, 좋다.” 톰이 말했다.

그는 혼자 돌아서서 통로 아래로 내려갔다. 집안에서 나온 연기가 땅바닥에 나지막하게 깔려 있었다. 등잔 불빛은 문과 창문의 그림자를 길에까지 던지고 있었다. 문간마다 사람들이 나와 쭈그리고 앉아서 어둠 속을 내다보고 있었다. 톰은 그들의 시선이 자기를 따라오면서 그들의 고개가 같이 돌아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통로 끝까지 땅바닥 길이 계속되며 나무 그루터기가 깔린 밭을 통해서 까만 건초더미가 별빛 속에 희미하게 보였다. 달은 갸름한 조각이 되어 서쪽으로 낮게 떠있었고 은하수의 기다란 형체가 구름처럼 머리 위에 또렷이 보였다. 톰은 땅바닥 위를 사뿐히 디디고 걸어갔다. 노란 나무 그루터기가 깔린 밭을 마주 보고 있는 시커먼 땅이었다.

그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정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도랑의 둑이 길가에 나타났다. 도랑 속에서 물이 풀숲을 스치며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둑 위에 올라서서 시커멓게 흐르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물속에 별들이 길게 반사되고 있었다. 앞쪽으로 국도가 보였다. 가끔 스치고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이 국도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톰은 다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별빛 속에서 그 높은 철조망 문이 눈에 들어왔다.

길옆에서 사람의 모습이 움직였다.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거 누구요?

톰이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톰은 그의 손에 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더니 플래시 불빛이 톰의 얼굴 위에 펄럭였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가는 거요.

“아, 산보나 좀 하려고 왔는데요. 그러면 안 되나요?

“다른 쪽으로 가는 게 좋을 거요.

톰이 물었다.

“여기서는 밖에도 못 나가나요?

“오늘밤은 못 나가요. 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나는 호루라기를 불어서 사람을 불러다 당신을 붙잡을 거요.

“제기랄,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시오.” 톰이 말했다.

“그게 문제가 된다면 물론 나는 돌아가지요. 내가 무슨 상관이오.

시커먼 그림자가 긴장을 푸는 듯했다. 플래시가 꺼졌다.

“알겠소. 이건 다 당신들을 위해서 그러는 거요. 저기 있는 저 미친 피켓들이 당신을 잡아갈 거요.

“피켓이라니요?

“저 망할 놈의 과격파들 말이오.

“아, 그래요?” 톰이 말했다.

“난 그건 몰랐지요.

“당신도 들어올 때 그 사람들을 보았지요?

“그냥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더군요. 그래도 경찰들이 하도 많이 있기에 잘 몰랐어요.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지요.

“어서 돌아가 보시오.

“나야 상관없습니다.

그는 몸을 휙 돌려 뒤로 걸어갔다. 그는 길을 따라 백 야드 정도를 걸어가다가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관개수로 가까이에서 몸부림치는 듯한 너구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멀리, 아주 멀리에서 개가 사납게 짖어댔다. 톰은 길가에 주저앉아 귀를 기울였다. 높이 뜬 매 한 마리가 날카롭게 울어댔고 나무 그루터기 사이에서 짐승들이 살살 기어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양쪽으로 솟은 지평선을 둘러보았다. 어느 쪽이나 시커먼 테두리만이 보일 뿐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어서서 길의 오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루터기 밭으로 접어들어 건초 더미를 쌓아 놓은 만큼이나 키를 낮추고 몸을 굽힌 채 걸었다. 천천히 걷다가 이따금씩 귀를 기울여 보았다. 드디어 그는 철조망이 있는 데까지 왔다. 든든하게 생긴 가시철조망이 다섯 겹이나 쳐져 있었다. 울타리 옆에서 뒤로 드러누워서 맨 아래의 철조망 밑으로 고개를 디밀고 손으로 철조망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발로 몸을 밀면서 밖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막 일어서려 하는데 한 무리 남자들이 국도의 끝을 걸어갔다. 톰은 그들이 멀찍이 앞서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어나서 그들 뒤를 따랐다. 길가에 혹시 천막 같은 것은 없나 해서 살펴보았다. 차가 몇 대 지나갔다. 시내가 들을 가로질러 흘렀고 시내 위로 조그마한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국도를 연결하고 있었다. 톰은 다리 난간 바깥을 넘겨다보았다. 깊은 골짜기 아래에 천막이 하나 보였고 그 안에서 등잔이 타고 있었다. 그가 잠시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데 천막의 벽에 사람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눈에 띠었다. 그는 울타리를 기어올라 관목과 작은 버드나무 사이를 뚫고 골짜기 속으로 깊이 내려갔다. 골짜기 아래에 내려서니 작은 도랑가에 가느다랗게 오솔길이 지나가고 있었다. 천막 앞에는 한 남자가 상자를 깔고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톰이 말했다.

“누구시오?

“아, 아니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오.

“여기 누구 아는 사람이 있으시오.

“아니라니까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라고요.

천막 안에서 다른 사람이 고개를 내밀었다.

“왜 그래?

“케이시 아저씨!” 톰이 외쳤다.

“아니, 케이시 아저씨, 이게 어찌된 일이세요?

“아이고, 이거 톰 조드가 아닌가! 어서 들어오게, ! 어서 들어와.

“아는 사람이오?”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말했다.

“아는 사람이냐고? 알다 뿐이오? 서부로 올 때 같이 나온 사람이오. , 어서 들어오게, .

그는 톰의 팔뚝을 꼭 쥐고 천막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다른 세 남자가 땅바닥에 앉아 있었고 한 가운데에 등잔이 타고 있었다. 사람들이 수상쩍게 쳐다보았다. 시커멓고 궁상스럽게 생긴 얼굴을 한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만나게 되어서 반갑소.” 그가 말했다.

“케이시한테서 얘기는 들었소. 당신이 말한 그 사람이오?

“바로 그렇소. 그 사람이오. 그런데 가족들은 어디 있나? 여기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지?

“누가 그러는데 이리 가면 일거리가 있다 그럽디다.” 톰이 말했다.

“그래서 왔더니 주 경찰들이 쫙 깔려 있다가 우리를 다짜고짜 이 농장 안에 끌어넣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 한나절 내내 복숭아를 땄지요. 농장 안에 들어갈 때 보니까 사람들이 많이 서서 고함을 지르더군요. 이상해서 물어 보니까 아무도 안 가르쳐 줍디다. 그래서 무슨 영문인가 하고 지금 슬슬 나와 보는 길이지요. 대체 아저씨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목사가 몸을 앞으로 굽혔다. 노란 등잔불빛이 그의 높고 창백한 이마에 떨어졌다.

“감방이라는 데는 좀 이상한 곳이더군.” 그가 말했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광야를 헤매면서 무언가를 찾아보겠다고 나섰잖아? 그래서 어떤 때는 무언가 진짜 잡히는 것 같기도 했다고. 그런데 내가 정말로 무얼 깨닫게 된 것은 감옥 속이었어.

그의 눈초리는 날카롭고 유쾌해 보였다.

“아주 커다란 감방인데 말이네, 그게 항시 만원이야. 새 사람이 들어오고, 또 늘 나가는 거야. 물론 나는 그 사람들하고 다 이야기를 해보았지.

“그랬겠죠.” 톰이 말했다.

“늘 이야기를 하시니까 아저씨는 만일 교수대에 올라간다 하더라도 사형수하고 하루 종일이라도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실 거예요. 아저씨같이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도 없지요.

천막 안 남자들이 킬킬거렸다. 쭈글쭈글 시들어 버린 작은 남자가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늘 이야기를 하지.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그 이야기가 듣기 싫지 않으니.

“그전에 목사를 하셨지요.” 톰이 말했다.

“그런 얘기를 하시던가요?

“하더군요.

케이시가 씩 웃었다.

“그래서 말이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도 깨닫기 시작했지. 그 감방에 있던 사람들은 더러는 술주정뱅이도 있었지만 대개는 절도범으로 잡혀 온 사람들이었다네. 남의 것을 훔치기는 했어도 그건 꼭 필요한 것을 훔치고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던 사람들이란 말이야. 알겠나?” 그가 물었다.

“도리가 없다니요?

“다들 선량한 사람들이라고. 알겠어? 그 사람들이 나빠진 것은 단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깨달았어. 모든 문제의 근본이란 바로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네. 그건 내가 일부러 연구해 낸 것도 아니야. 하루는 말이야, 감방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는 콩을 주더군. 한 친구가 고함을 지르더군, 별일은 없었지만 그 누구는 고개가 빠져 나갈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어. 모범수가 오더군. 안을 들여다보더니 그대로 가버렸지. 그러자 이번에는 또 한 친구가 소리를 질러댔어. 그러다보니 감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몽땅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거야. 모두 똑같은 장단으로 미쳐 버린 거야. 마치 감방 안이 터져서 불쑥 튕겨져 나가는 것 같더라고. 어럽쇼! 결국 일이 벌어졌지. 간수 놈들이 뛰어오더니 이번에는 다른 음식을 주더라고. 다른 걸 말이야, 무언지 알겠나?

“모르겠는데요.” 톰이 말했다.

케이시는 턱을 두 손으로 괴었다.

“암만 가르쳐 주어도 모를 걸세. 자네도 직접 알게 되겠지. 그런데 모자는 어디 있나?

“안 쓰고 왔어요.

“자네 누이는 어떤가?

“배가 꼭 황소만큼 크지요. 틀림없이 쌍둥이를 밴 모양이에요. 배를 수레에 끌고 다녀야 할 판인데, 요새는 두 손으로 부둥켜안고 다니지요. 그런데 아까 그 얘기 하다가 말았지요?

쭈글쭈글 시든 남자가 말했다.

“동맹 파업을 일으켰다오. 지금 스트라이크를 벌이는 중이지요.

“한 상자에 5센트니까 많이 주는 건 아니지만 굶어 죽지 않을 정도지요.

5센트요? 쭈글쭈글한 남자가 소리쳤다.

5센트라! 지금 그놈들은 5센트씩 쳐줍디까?

“그러더군요. 그래 우리는 오늘 1달러 50센트를 벌었지요.

무거운 침묵이 천막 안에 깔렸다. 케이시는 문을 통해 어두운 바깥쪽을 내다보았다.

“이거 보게, .”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도 여기에 일을 하러 왔다네. 5센트씩 준다고 해서 말이네. 우리 같은 사람이 구름같이 몰려왔지 무언가. 여기까지 막상 와서 보니까 그놈들은 2센트 반을 주겠다는 거야. 그걸로 어떻게 입에 풀칠을 하겠나? 게다가 어린애들까지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한 거야. 그랬더니 우리를 몰아내더군. 경찰이라는 경찰은 다 출동하고 말이야. 그래 놓고 그놈들은 지금 5센트씩 주는 거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스트라이크가 가라앉으면 그놈들이 앞으로도 5센트씩 줄 줄 아나?

“그야 모르지요.” 톰이 말했다.

“어쨌든 지금은 5센트를 주니까.

“이거 보게.” 케이시가 말했다.

“우리가 같이 캠프를 치려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그놈들이 우리를 돼지처럼 쫓으면서 마구 헤쳐 버린 거야. 닥치는 대로 때리면서 돼지처럼 몰아대는 거야. 물론 우리도 얼마 견디지 못할 거야. 어떤 사람들은 이틀씩이나 굶었다네. 자네는 오늘밤에 돌아가야 하나?

“그래야지요.” 톰이 말했다.

“돌아가거든 사람들한테 이 사정을 알려주게.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를 옮겨놓는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의 등에 칼을 찌르고 있는 줄 모르고 있는 거야. 그놈들이 우리만 완전히 쫓아버리고 나면 품삯이 절반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니 말이야.

“내가 가서 그런 사정을 얘기하지요.” 톰이 말했다.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총을 가진 놈이 그렇게 많이 깔려 있는 건 처음 보았어요. 그놈들은 우리가 서로 얘기라도 주고받을 수 있게 해줄지 모르겠군요. 또 거기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서 시간을 보내는 일도 없더군요. 그저 고개만 푹 수그리고서 만나도 인사를 나누는 법도 없는 모양입디다.

“그래도 한번 이야기나 해보게, . 인제 보게, 우리가 떠나기가 무섭게 품삯이 반으로 떨어질 테니. 2센트 반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이 사람아? 그건 복숭아 1톤을 따서 갖다 바치고 고작 1달러를 받는다는 이야기야.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자네도 그걸로 참지는 못할 거야. 그걸로 먹고 살 수가 없을 테니까.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지.

“어디, 사람들한테 이야기나 해봅시다.

“자네 어머니는 좀 어떠신가?

“아주 괜찮으세요. 어머니는 관청에서 만들어 준 캠프에 있고 싶어 했지요. 목욕탕도 있고 더운물도 나오니까.

“그렇군. 나도 들었어.

“거기는 살기가 썩 좋더군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그렇지. 결국 나와 버렸지요.

“나도 그런 데 갔으면 좋겠네.” 케이시가 말했다.

“한번 가보았으면 좋겠어. 그런 데는 경찰이 없다더군.

“사람들이 스스로 자치적으로 하거든요.

케이시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무슨 문제가 안 일어나던가? 싸움이나 도둑질이나 술주정 같은 거 말이네.

“그런 거 없어요.

“그래도 고약하게 구는 놈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캠프에서 쫓아내지요.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은 모양이지?

“그런 거 없다니까요.” 톰이 말했다.

“우리는 거기에 한 달이나 있었지만 그런 놈은 꼭 하나밖에 없었어요.

케이시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다른 남자들을 둘러보았다.

“알겠나?” 그가 소리를 질렀다.

“아까도 말했지만 경찰 녀석들은 문젯거리를 막기보다는 오히려 만들어 낸단 말이야. 이거 보게 톰. 들어가서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도록 해보게. 한 이틀 걸리면 할 수 있을 걸세. 지금 복숭아가 한창 익어 있어. 사람들한테 그런 사정을 알리게.

“그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을 거예요.” 톰이 말했다.

“그 사람들은 지금 5센트를 받고 있고 또 다른 일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사람들예요.

“하지만 스트라이크가 가라앉는 순간 그 사람들은 어디에 가서 5센트를 받겠나?

“그래도 그 사람들이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 같지가 않은 걸요. 당장 5센트를 받고 있는 것, 그것만이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부니까요.

“글쎄, 여하튼 말이나 해보게.

“아버지는 안 하실 거예요.” 톰이 말했다.

“내가 알지만 아버지는 그런 건 알 바가 아니라고 모른 체할 거요.

“그렇군.” 케이시가 불안하게 말했다.

“그것도 그렇겠네. 한바탕 난장판이 벌어져야 다들 알게 되겠지.

“우리는 먹을 것이 다 떨어졌어요.” 톰이 말했다.

“그러다가 오늘밤엔, 모처럼 고기를 먹어 보았지요. 많이 먹지는 못했어도 먹긴 먹었어요. 그런 판에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 때문에 자기 고기를 버릴 것 같아요? 로자샤안도 우유를 먹어야 한대요. 사람들 몇이 밖에서 아우성을 친다 해서 어머니가 그 뱃속에 든 어린애를 굶길 것 같아요?

케이시가 비통하게 말했다.

“다들 사정을 좀 냉정하게 알았으면 좋겠네. 사람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을 좀 깨달아 주었으면 좋겠단 말이네. 아이고, ! 나도 지쳐서 모든 게 다 귀찮아지네. 기진맥진해 버렸어. 내가 한 사람을 알았는데 감방에 있을 때 새로 들어온 사람이야.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일을 꾸미던 사람이었어. 그래서 조합을 하나 만들었는데 자경단원들이 몰려와서 다 깨버렸어. 그래서 어떻게 된 줄 아나? 그 사람을 도와주려고 했던 사람들이 몰려와서 오히려 그 사람을 쫓아내 버렸지. 그 사람하고는 누구도 어울리기를 꺼려했고, 그 사람하고 같이 있는 것조차 남의 눈에 띌까 봐 겁을 냈어.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가시오. 당신 때문에 우리까지 위험해요.’ 하더라는 거야. 그 사람은 이것이 무척 섭섭해서 괴로워하다 이렇게 대답했다더군. ‘당신들이 사실을 알기만 해도 이렇지는 않을 거요. 프랑스혁명만 해도 그랬소. 그걸 꾸며낸 사람들은 다 모가지가 잘려서 죽었다오. 늘 그런 거요. 그건 너무 당연한 거요. 이런 일을 그저 재미로 한 건 아니잖소? 그걸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한 거요. 그게 바로 당신의 운명이니까 한 거요. 워싱턴을 보시오. 혁명을 일으켰지요. 그 뒤에 그 개 같은 새끼들이 그를 배반하지 않았소? 또 링컨도 마찬가지였지요. 결국 같은 사람들이 그를 죽이라고 소리를 지른 거요. 그래 늘 그런 법이요.’라고.

“별로 재미있는 얘기 같지 않은데요?” 톰이 말했다.

“물론 재미있는 얘기는 아니지. 그 사람도 감옥에서 그러더군. ‘여하튼 할 수 있는 데까지 일을 해보는 거요. 그러고 나면 알 수 있는 것이, 조금씩이라도 전진을 해나가다 보면, 물론 후퇴를 하는 수도 있지만 완전히 후퇴해 버리는 일은 없지요.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오. 그렇게 조금씩 전진하다보면 결국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나갈 일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법이오.’라고 말이네.

“또 설교군요.” 톰이 말했다.

“입심은 여전하시군요. 내 동생 앨 말예요. 그놈은 늘 계집애 꽁무니만 따라 다니는 게 일이지요. 다른 건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한 며칠 있으면 또 계집애를 하나 낚을 거예요. 진종일 그 생각만 하고 밤이 돼도 또 그 생각이지요. 다른 일은 세상이 올라가든 거꾸로 내려가든 상관도 없는 놈이오.

“그야 그렇지.” 케이시가 말했다.

“그야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지. 우리도 다 마찬가지지.

밖에 앉아 있던 남자가 천막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그 쓸데없는 소리 작작 하라고. 인제 듣기도 싫어.” 그가 말했다.

케이시가 바깥쪽으로 그를 내다보았다.

“왜 그래?

“모르겠어. 괜히 속이 상하는구먼. 꼭 미친 고양이 같이 안달이 나서 죽겠어.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모르겠다니까.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야.

“이 사람 괜히 신경이 곤두서 있구먼, 그래.” 쭈글쭈글한 남자가 말했다.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갔다. 조금 뒤에 그가 천막 안을 들여다보았다.

“큼직한 구름장이 시커멓게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어. 아마 천둥이라고 칠 것 같군. 그래서 이 사람이 신경질이 난 모양이야. 그 천둥 때문에 말이야.

그는 다시 고개를 밖으로 돌려 버렸다. 나머지 두 남자도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케이시가 조용히 말했다.

“속이 상하는 건 누구나 다 마찬가지야. 경찰 녀석들이 떠드는 소리 못 들었나? 우리를 얼마나 못살게 굴고 이 고장에서 쫓아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나? 그놈들은 내가 말을 많이 하니까 나를 주모자로 아는 모양이야.

쭈글쭈글한 남자가 다시 고개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어이, 케이시, 잔불을 끄고 이리 좀 나와 봐. 저기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인데.

케이시가 심지를 틀었다. 불꽃이 오므라들더니 펄럭하고 꺼졌다. 케이시가 더듬어 밖으로 나갔고 톰이 그 뒤를 따랐다.

“무언가?” 케이시가 조용히 물었다.

“모르겠어. 잘 들어봐!

사방이 고요한 속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만 들렸다. 이따금씩 귀뚜라미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섞였다. 그런데 그 소리 배경 속에서 간간이 다른 소리가 들렸다. 길가에서 희미한 발자국 소리였다. 강둑 위의 진흙을 밟는 소리와 시냇물 아래쪽의 수풀을 헤치는 소리였다.

“진짜로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잘 모르겠는걸.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혹시 신경과민이 되어 있는 건지 말이야.” 케이시가 모두를 안심시켰다.

“우리는 모두가 신경과민이 되어 있어. 암만 해도 확실치 않은데? 자네도 들리나, ?

“무슨 소리가 나긴 나는데요.” 톰이 말했다.

“정말 들려요. 암만 해도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 같은데요.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쭈글쭈글한 남자가 속삭였다.

“저쪽 다리 밑으로 가지. 이 천막을 떠나기가 섭섭한걸.

“다들 가자고.” 케이시가 말했다.

그들은 개울가를 따라 조용히 걸어갔다. 교각과 교각 사이가 구멍이 휑하게 뚫린 동굴처럼 앞에 나타났다. 케이시는 몸을 굽히고 그 사이를 통과했다. 그 뒤를 톰이 따랐다. 그들 발이 물속에 빠졌다. 한 삼십 걸음쯤을 그렇게 나아갔다. 헐떡거리는 그들의 숨이 다리 천장에 부딪쳐 메아리쳤다. 다리 밑을 통과하고 나서 그들은 몸을 폈다.

별안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저기 있다!

플래시 불이 두 가닥 비쳐와 몸 위에 떨어지면서 그들 눈을 부시게 했다.

“거기 서라!” 어둠 속에서 고함 소리가 터졌다.

“바로 저 놈이야. 저 번들거리는 놈이야. 바로 저놈이야.

케이시가 망연하게 플래시 불빛을 응시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거 보오. 당신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소. 당신들은 어린애들을 굶어 죽게 하는 심부름을 하고 있는 거요.

“닥쳐, 이 개새끼야.

키가 작달막하고 똥똥한 남자가 불빛 속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하얀 곡괭이 자루를 들고 있었다.

케이시가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소.

똥똥한 남자가 곡괭이 자루를 휘둘렀다. 케이시가 피하려 몸을 굽혔으나 곡괭이 자루는 머리통 옆을 갈기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케이시가 비스듬히 쓰러지더니 불빛 밖으로 떨어져 버렸다.

“아이고, 이 사람 조지, 자네 그놈을 죽여 버리지 않았나?

“그놈한테 불을 좀 대봐.” 조지가 말했다.

“그 개새끼한테 똑바로 비춰 봐.

플래시 불빛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리저리 비추더니 케이시의 깨진 머리통을 찾았다.

톰은 목사를 내려다보았다. 불빛이 똥똥한 남자의 다리를 스쳐서 하얀 곡괭이 자루를 비쳤다. 톰이 살짝 뛰었다. 그는 몽둥이를 가볍게 뺏어 들었다. 첫 번째는 그 몽둥이가 살짝 빗나가 어깨를 친 것같이 느껴졌지만 두 번째는 상대방의 머리를 정통으로 명중시켰다. 육중한 남자가 아래로 가라앉자 그의 대가리에 석 대를 더 갈겼다. 불빛이 허둥거리며 춤을 추었다. 아우성소리가 울리고 나무숲을 헤치며 달아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톰은 쓰러진 남자 위에 버티고 섰다.

순간 몽둥이가 자기의 머리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옆으로 휘두른 일격이었다.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한 충격이었다. 그는 몸을 낮게 굽히고 물줄기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물을 튀기며 쫓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그는 방향을 바꾸어 수풀 속으로 몸을 움츠리고 들어갔다. 칙칙하게 우거진 덩굴 옻나무 숲이었다. 그는 조용히 누웠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고 불빛이 물줄기를 따라 춤을 추었다. 톰은 몸을 꿈틀거려서 숲속 깊숙이 기어들어 갔다. 숲을 빠져서 과수원으로 나왔다. 아직도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고 강바닥을 수색하고 있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몸을 낮추고 잘 갈아 놓은 밭 위를 내달았다. 흙덩어리가 부스러지면서 그의 발아래에 굴렀다.

앞쪽에 밭의 경계를 이루는 관목이 보였다. 관개 수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서있는 관목이었다. 그는 울타리를 뚫고 살짝 들어가서 포도 덩굴과 흙 딸기 숲속에 몸을 들이밀었다. 거친 숨을 헐떡거리면서 그는 조용히 누워 있었다. 얼굴이 얼얼하고 코가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코가 짜부라져서 피가 턱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는 배를 깔고 엎드려 정신이 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도랑가로 기어 나갔다. 시원한 물에 얼굴을 씻고 자기의 파란 셔츠 끝을 찢어 물에 적셔 가지고 터진 볼때기와 코에다 대고 눌렀다. 물기가 스며들면서 상처가 화끈거렸다.

시커먼 구름장이 하늘 위를 지나가서 별빛이 하늘을 얼룩지게 하고 있었다. 밤은 다시 고요해졌다.

톰은 물속에 들어가자 발바닥 밑으로 흙이 푹 꺼지는 것을 느꼈다. 두어 걸음을 떼어 도랑을 건너 맞은 편 둑에 올라섰다. 옷이 축 늘어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옷이 철썩거렸고 구두가 질퍽거렸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신발을 벗고 물을 뺏다. 바짓가랑이 아래를 쥐어짜고 윗도리를 벗어 물기를 짰다.

국도를 따라 플래시 불빛이 춤을 추고 있었고 시내 바닥에서는 아직 수색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톰은 신발을 신고 그루터기 밭을 조심스레 가로질러 갔다. 신발도 이제 질퍽거리지 않았다. 그는 감각으로 그루터기 밭 건너 쪽을 향해서 내달았다. 드디어 그는 캠프 안의 집들 사이의 통로에 이르렀다. 조심스럽게 집 쪽으로 다가갔다.

경비원 하나가 무슨 소릴 들었는지 “누구야!” 하고 소리 질렀다.

톰은 땅바닥에 엎드려서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플래시 불빛이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살살 기어서 자기네 집으로 돌아갔다. 문이 돌쩌귀 위에서 삐걱 소리를 냈다. 조용하고 찬찬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자못 긴장되어 있었다.

“누구야!

“어머니, 톰이에요.

“어서 좀 자거라. 앨은 아직 안 들어왔다.

“계집애라도 하나 낚았나 보지요.

“어서 좀 자거라.” 그녀가 가만히 말했다.

“저쪽 창 밑에 가서 자거라.

그는 자기 자리를 찾아가 옷을 다 벗고 알몸이 되었다. 담요를 덮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얼하고 무감각하던 얼굴의 상처가 아파 왔고 머리 전체가 방망이질을 하는 것 같았다.

한 시간 가량이나 지나서야 앨이 돌아왔다. 그는 살금살금 다가오더니 톰의 젖은 옷을 밟았다.

“쉿!” 톰이 말했다.

앨이 소곤거렸다.

“형, 아직 안 자? 왜 옷이 젖었어?

아버지가 몸을 뒤척거리며 반듯하게 돌아누웠다. 그가 코를 고는 소리가 방안에 가득 메아리쳤다.

“형, 춥겠네.” 앨이 말했다.

“쉿, 아침에 얘기해 줄게. 어서 자거라.

조그맣고 네모진 창문이 깜깜한 방 속에서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톰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얼굴에 난 상처가 이제야 감각이 돌아와 화끈거리고 쑤셔댔다. 볼때기의 뼈가 아팠고 부러진 코가 부어올라 몸을 뒤척일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그는 작은 네모꼴 창문 속으로 별들이 미끄러져 가다 사라지는 것을 응시했다. 이따금씩 감시원들이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새벽닭이 울었다. 멀리서 들리는 그 소리와 함께 창문이 밝아왔다. 톰은 자기의 부어오른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그의 몸이 움직이자 앨이 잠꼬대를 하면서 무어라 중얼거렸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옹기종기 붙어있는 집집마다 사람들이 일어나 웅성거리고 나무 빠개는 소리, 냄비가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방속에 어머니가 일어나 앉았다. 톰은 잠 때문에 부어오른 그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창 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담요를 걷어치우고 옷을 찾았다. 여전히 앉은 채로 옷을 머리 위로 올려서 아래로 끌어내려 입었다. 그녀가 일어서자 허리에 걸렸던 옷이 발목까지 내려왔다. 그런 뒤 맨발인 채로 살살 창가로 걸어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점점 밝아 오는 아침 햇살을 내다보면서 그녀는 손가락을 부지런히 놀려 머리채를 끌러내고 머리를 만지작거리더니 다시 묶었다. 그런 다음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몸을 까딱도 하지 않은 채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창가에 서려 있는 그녀의 얼굴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몸을 돌려 깔려있는 이불 사이를 조심스럽게 밟고 가서 등잔 갓을 치켜들고 심지에 불을 붙였다. 아버지가 몸을 뒤척이더니 그녀를 보고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보, 돈 좀 있수?

“응? 왜 그래? 60센트짜리 전표가 있는데.

“그럼 얼른 일어나서 밀가루하고 라드 기름하고 좀 사오세요. 빨리요.

아버지가 하품을 했다.

“가게는 아직 안 열었을 텐데.

“열라고 깨우세요. 식구들이 무얼 좀 먹어야지요. 그리고 어서 나가서 일을 해야지요.

아버지는 억지로 작업복을 입고 더러운 윗도리를 걸쳤다. 그러고는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면서 느릿느릿 문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잠이 깨어 생쥐처럼 이불 속에서 방안을 살피고 있었다. 이제 희미한 빛이 방안에 스며들고 있었으나 아직 해가 채 뜨지 않아 아무런 빛깔도 없었다. 어머니가 방바닥 이불을 둘러보았다. 존 삼촌도 깨어 있었다. 앨은 아직도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톰에게로 옮아갔다. 그녀는 잠시 그를 빤히 들여다보더니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은 부어올라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입술 위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있었다. 볼때기에는 찢어진 살이 한데 엉겨 붙어 있었다.

“얘, .” 그녀가 불렀다.

“너 웬일이냐?

“쉿!” 그가 말했다.

“떠들지 마세요. 싸움에 말려들었어요.

“톰!

“어쩔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

그녀는 아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너 무슨 일 있었구나?

한참만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예, 문제가 좀 있어요. 일을 못 나가겠어요. 숨어 있어야겠어요.

어린애들이 손과 무릎으로 기어 다가왔다. 호기심에 찬 눈을 굴리고 있었다.

“어머, 오빠 왜 그래?

“그런 소리 하면 안 돼!” 어머니가 말했다.

“가서 세수나 해.

“비누도 없어.

“그냥 물로 해.

“오빠 왜 그래?

“그런 소리 하면 안 된대도. 아무한테든 그런 소리 하면 큰일 난다.

아이들은 멀찍이 달아나 야단맞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두고 쭈그리고 앉았다.

어머니가 물었다.

“아주 큰일이냐?

“코가 깨졌어요.

“아니, 그 사건이 말이다.

“예, 좀 크게 벌어졌어요.

앨이 눈을 뜨고 톰을 쳐다보았다.

“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니?” 존 삼촌이 물었다.

아버지가 쿵쿵거리고 돌아왔다.

“벌써 다 열어 놓았더군.

그는 스토브 옆의 마룻바닥에다 밀가루 봉지와 라드 기름 봉지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냐?” 그가 물었다.

톰은 한쪽 팔꿈치로 몸을 버티며 일어나려다가 다시 누워 버렸다.

“아이고, 안 되겠어. 어차피 얘기해야 할 일이니까 다 얘기해야겠군. 그런데 애들은 어떻게 하지요?

어머니는 벽 쪽에 기대 쭈그리고 있는 애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냉큼 가서 세수나 하라니까.

“아니에요, 어머니.” 톰이 말했다.

“걔들도 들어야겠어요. 알아두어야 할 것 같아요. 모르고 있으면 함부로 입을 놀릴 테니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아버지가 물었다.

“다 얘기하겠어요. 어젯밤에 밖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이 왜 그런지 하고 나가 보았어요. 그랬다가 케이시를 만났어요.

“그 목사 말이냐?

“그래요. 아버지. 그 목사가 바로 스트라이크를 주모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붙잡으러 왔어요.

“누가 붙잡으러 왔다는 거냐?

“모르지요. 언젠가 밤에 우리를 국도에서 되돌려 보낸 그런 사람들 같아요. 곡괭이 자루를 들고 있더군요.” 그는 잠시 말을 멎었다.

“그놈들이 목사를 죽였어요. 머리를 갈겨 버렸어요. 나도 거기에 서 있다가 그만 정신이 돌아 버렸어요. 그래서 곡괭이 자루를 뺏어 들었지요.

그는 말을 하면서 어두운 밤에 벌어졌던 장면과 그 플래시 불빛을 희미하게 기억해 보았다.

“그래서 그 녀석을 갈겨 버렸어요.

어머니는 숨이 막혔다. 아버지가 바짝 긴장하면서 조용히 물었다.

“그래 그놈을 죽였니?

“모르겠어요. 나도 내 정신이 아니었으니까요. 죽이려고 했어요.

어머니가 물었다.

“그래, 그놈들이 너를 보았니?

“모르지요. 모르기는 해도 아마 보았을 거예요. 우리한테 플래시를 비췄으니까.

어머니는 아들의 눈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여보.” 그녀가 말했다.

“상자를 좀 빠개 주세요. 아침을 지어 먹어야지요. 어서 일을 나가셔야지요. 그리고 너희들, 루시하고 윈필드! 누가 뭐라고 묻거든 오빠가 아프다고 해야 한다. 알겠니? 쓸데없이 주둥아릴 놀리면 오빠가 또 감옥에 붙잡혀 가는 거야, 알았어?

“알았어.

“서방님이 애들을 좀 감시하세요. 아무한테도 지껄이지 않게요.

아버지가 물건들을 담아두었던 상자를 빠개 주자 그녀는 불을 지폈다. 밀가루 반죽을 만들고 나서 커피도 한 주전자 불에 올려놓았다. 가벼운 송판에 불이 붙으면서 굴뚝에 불꽃이 펄럭거리고 올랐다.

아버지가 상자를 다 빠개 놓더니 톰 쪽으로 다가왔다.

“케이시 그 사람은 참 착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그런 일에 말려들었을까?

톰이 침통하게 말했다.

“한 상자에 5센트를 받으려고 한 거예요.

“그건 우리도 지금 그렇게 받고 있지 않니?

“그래요. 말하자면 우리는 그 스트라이크를 깨는 일을 도와 준 셈이었어요. 그놈들은 여태까지 2센트 반을 주었대요.

“그걸 가지고 어떻게 먹고 살아?

“못 먹고 살지요.” 톰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거예요. 그나저나 스트라이크도 어젯밤에 다 깨져 버렸을 거예요. 우리도 오늘부터는 2센트 반씩을 받게 될지 모르지요.

“그 짐승만도 못한 놈들 같으니라고!

“그런데 아버지! 케이시 아저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더군요. 그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해서 지워지지 않는군요. 거기에 누워 머리통이 납작하게 깨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지요. 에잇, 그 개새끼들!

그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래, 어떻게 해야 되지?” 존 삼촌이 물었다.

앨이 벌떡 일어섰다.

“제기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결심을 했어. 난 나가 버릴 테야.

“아니 그건 안 된다, .” 톰이 말했다.

“지금 집안에 네가 없으면 안 된다. 오히려 내가 나가야 할 판이다. 나는 오히려 위험인물이다. 내가 내 발로 디디고 일어나게만 되면 나는 나가야겠다.

톰이 말을 이었다.

“너는 집에 남아 있어야 한다. 네가 남아서 트럭을 끌어야지 누가 하겠니, ?

“그러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다. 다 네 가족 아니냐? 어쩌겠니? ? 나는 오히려 집안을 위태롭게 할 존재다.

앨은 화가 나서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나는 차고 같은 데 취직을 하고 싶은데 왜 못 하게 하는 거야?

“나중에는 그렇게 하자.

톰은 동생을 힐끗 보고 나서 매트리스에 누워 있는 로자샤안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멀뚱거리고 있었다.

“너도 걱정 마라.” 그는 누이에게 소리 질렀다.

“걱정 마라. 오늘 우유를 좀 사다 줄 테니까.

그녀는 천천히 눈만 깜빡거리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는 알아 두어야겠다. , 너는 그놈을 죽였니?

“모르겠어요. 너무 어두웠으니까요. 그런데 어떤 놈이 나를 때렸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죽였을 거예요. 그 개새끼를 죽여 버렸을 거예요.

“얘, !” 어머니가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라.

국도 쪽에서 많은 자동차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버지가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사람들이 떼를 지어 새로 들어오는구나.” 그가 말했다.

“그놈들은 스트라이크를 완전히 진압한 모양이군요.” 톰이 말했다.

“아마 오늘부터는 2센트 반일 거예요.

“그렇더라도 계속 일을 할 수가 있으니 우선 밥은 먹지 않겠니?

“그렇지요.” 톰이 말했다.

“바람에 떨어진 복숭아나 먹겠지요. 그거라도 먹으면서 연명은 하겠지요.

어머니는 도넛을 뒤적거리면서 커피를 저었다.

“이봐라.”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옥수수가루를 사다 먹어야겠다. 옥수수가루 죽을 해먹어야겠어. 그리고 휘발유 값만 넉넉히 되면 다른 데로 떠나야겠다. 여기는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톰을 혼자 내보내고 싶지도 않고, 절대로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

“어머니, 그건 안 돼요. 내가 있으면 괜히 위험해진단 말예요.

그녀의 턱이 굳어졌다.

“위험하면 위험한 대로 하는 거다. , 어서들 와서 이거나 먹자. 어서 먹고 가서 일을 해야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 나도 세수만 하고 바로 뒤따라 나가겠다.

그들은 기름에 튀긴 도넛을 먹었다. 어찌나 뜨거운지 입안에서까지 지글거렸다. 커피 주전자를 내려다가 각자 자기 컵에 따라 마시고 나서 또 따라 마셨다.

존 삼촌이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여기는 암만 해도 우리가 마음을 붙이고 살 곳이 못 되는 것 같다. 그게 다 내 죄가 커서 그런 거다.

“아이고, 그놈의 소리 좀 작작해!” 아버지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제 그 죄 타령을 할 시간 여유가 없다고. , 다들 일어나. 어서 가보자. 너희들 꼬마들도 와서 거들어라. 네 어머니 말이 옳다. 우리는 여기를 떠나야겠다.

모두 나가자 어머니가 접시와 컵을 들고 톰에게 다가왔다.

“조금이라도 먹어 두어라.

“못 먹겠어요, 어머니. 너무 아파 씹지를 못하겠는 걸요.

“그래도 먹어 봐라.

“아니, 못 먹겠어요.

그녀는 자기 매트리스 가에 앉았다.

“너 나한테 말 좀 해봐라.” 그녀가 말했다.

“상황이 어떤지를 좀 정확히 알아야겠다. 도대체 케이시가 어떤 짓을 했니?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어째서 그를 죽였다니?

“케이시 아저씨는 그냥 플래시 빛을 받고 서있었어요.

“무어라고 말을 하던? 그 사람이 하던 말 기억 안 나니?

톰이 말했다.

“케이시 아저씨가 그랬어요. ‘당신들은 사람들을 굶겨 죽일 권리가 없소.’ 그랬더니 뚱뚱한 놈이 그를 보고 빨갱이니 개새끼니 하고 욕을 퍼부었어요. 그러자 케이시 아저씨가 ‘당신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거요.’ 하니까 다짜고짜로 몽둥이를 휘두르지 않아요?

어머니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두 손을 한데 모아 비볐다.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던…? ‘당신들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고?

“예.

어머니가 말했다.

“할머니가 그 말을 들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 나도 그때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도 안 해보았어요. 어떤 짓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너는 괜찮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랬구나. 네가 아예 거기에 가질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너는 꼭 해야만 할 일을 한 거다. 나는 네가 한 일에 아무런 잘못도 인정할 수가 없다.

그녀는 스토브에 가서 설거지물에다 행주 조각을 축였다.

“자, 이걸 네 얼굴에다 얹어 봐라.” 그녀가 말했다.

그는 뜨뜻한 헝겊을 코와 볼 위에 갖다 대면서 뜨거워서 몸을 꿈틀했다.

“어머니, 나는 오늘밤 혼자 나가겠어요. 식구들을 괜히 고생시킬 수는 없어요.

어머니가 발끈 화를 내면서 말했다.

“얘, ! 내가 모르는 사정도 물론 많을 거다. 하지만 네가 혼자 나간다 해서 식구들이 더 편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식구들을 더 괴롭히는 일이다. 우리도 땅을 가지고 살던 때가 있지 않았니? 그때만 해도 우리 집안에는 엄연한 질서가 있었고 우리 집 땅의 경계선도 있었다.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어린것들이 생겨나고, 우리는 언제나 한 덩어리로 한 가족으로 살아왔고 모든 것이 깨끗하고 질서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와서 아무것도 제대로 되어가는 것이 없구나. 집안 꼴이 말이 아니고 나도 이제 어떻게 걷잡을 수가 없다. 앨 녀석은 늘 쏘다니기만 하며 집을 뛰쳐나가지 못해서 안달이고 존 삼촌은 그저 질질 끌려 다니기만 하고 아버지조차 자기 체신을 못 지키고 있다. 이제 가장의 위치마저 잃어 가고 있는 것 같아. , , 이렇게 집안이 흐트러지다가는 가족들이 남아나지 않게 생겼다. 그리고 로자샤안도 말이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딸의 큼직한 눈을 찾았다.

“저 애도 인제 곧 어린애를 낳을 텐데.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안 남게 생겼다. 나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여태까지 집안을 꾸려 나가느라고 해왔지만 말이다. 철없는 윈필드도 이렇게 가다가는 어떻게 되겠니? 마구 날뛰기만 할 테고 루시도 꼭 짐승처럼 제멋대로 되어갈 테니 정말 의지할 데가 없게 생겼다. 얘야, . 제발 가지 마라. 그냥 남아서 집안을 도와다오.

“알았어요.” 그는 피곤하게 대답했다.

“나가야 하긴 하지만 안 나가겠어요. 나도 다 알고 있어요.

어머니는 설거지통에 가서 접시들을 씻어 행주질을 했다.

“너 간밤에 안 잤구나?

“예.

“그래, 어서 좀 자라. 네 옷이 젖었더라. 스토브 옆에 걸어 말려 주마.

그녀는 할 일을 다 마쳤다.

“내가 나갔다 오마. 나도 나가 좀 따야겠다. , 로자샤안, 혹시 누가 오거든 톰이 아프다 해라. 알겠니?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야 한다. 톰아, 좀 자 두어라. 혹시 봐서 오늘밤에라도 여길 떠나자.

그러면서 그녀는 성큼 아들 쪽으로 다가왔다.

“너 살짝 달아나는 건 아니지?

“안 가요, 어머니.

“안 가지? 너 틀림없지?

“안 가요. 여기 있을 게요.

“그럼 됐다. , 로자샤안, 내가 한 말 잘 알아 두어라.

그녀는 밖으로 나가 문을 꼭 닫았다.

톰은 조용히 누워 이었다. 이윽고 엷은 졸음이 그를 무의식 상태로 이끌어 가더니 다시 살짝 깨워 주다가는 다시 가라앉혀 주었다.

“오빠!

“응! 왜 그래?

그는 엷은 잠에서 깜짝 놀라 깨어 로자샤안을 건너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너 왜 그러니?

“오빠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야!

“그래, 제발 큰소리 좀 내지 마라. 너 다른 사람한테 알려 주려고 그러니?

“그러면 어때?”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전에 그 할머니가 그랬단 말이야.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는지 알아? 이제 나는 좋은 아기를 낳기는 다 글렀어. 코니도 가버리고 나는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어. 우유도 못 먹는단 말이야.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발작을 일으켰다.

“그런데 오빠는 사람까지 죽였어. 아기가 제대로 태어날 가망이 하나도 없어졌어. 틀림없이 기형아를 낳게 될 거야. 기형아란 말이야. 나는 춤도 한번 안 추었어.

톰이 일어났다.

“쉿! 너 그러다가 사람들을 불러들이겠다, .

“그래도 좋아. 나는 기형아를 낳는단 말이야! 나는 남자하고 껴안고 춤도 한번 안 추었단 말이야!

그는 그녀 옆에 가까이 다가갔다.

“조용히 해.

“저리 비켜. 오빠는 사람을 한 사람 죽인 것도 아냐.

그녀 얼굴은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말소리가 흐려졌다.

“오빠는 보기도 싫어!

그녀는 얼굴 위에 담요를 뒤집어썼다.

숨이 막힐 듯 억지로 참는 울음소리가 톰의 귀에 들려 왔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방바닥을 살폈다. 그러다가 그는 아버지 침대 쪽으로 갔다. 매트리스 끝에 소총이 하나 놓여 있었다. 38미리 구경의 레버조작 식으로 된 윈체스터 연발총으로 기다란 총체가 묵직했다. 톰은 그걸 집어 들고 탄알이 들어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레버를 떨어뜨려 보았다. 방아쇠도 약간 잡아당겨 보았다. 그런 뒤 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소총 개머리판을 위로 하고 총구를 아래로 해 옆에 내려놓았다. 로자샤안의 소리가 훌쩍훌쩍 우는소리로 변해 갔다. 톰은 다시 누워 담요를 뒤집어썼다. 상처가 난 볼을 담요로 덮고 숨 쉴 구멍만 조금 터놓았다. 그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하느님, , 하느님!

밖에서 자동차 몇 대가 한꺼번에 지나가면서 사람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몇 사람이오?

“우리 세 사람밖에 없어요.

25호 집으로 들어가시오. 문간에 번호가 붙어 있소.

“알았습니다. 그런데 품삯이 얼마지요?

2센트 반이오.

“제기랄, 그걸 가지고 어떻게 먹고 살지요?

“그게 여기 품삯이오. 그거라도 감사하게 받을 사람이 남쪽에서 지금 2백 명이나 올라오고 있소.

“하지만 날 좀 보세요!

“자, 어서 가시오! 그거라도 받고 일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데로 가시오. 나는 당신들하고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는 사람이오.

“그렇지만…”

“이거 보시오. 그 삯은 내가 매긴 것이 아니고 나는 그저 당신들을 접수만 하는 사람이오. 그거라도 마음 있으면 하는 거고 없으면 관두는 거요. 싫거든 지금이라도 돌아서서 다른 데로 가버리면 된단 말이오.

25호라고 그러셨지요?

“그렇소. 25.

톰은 매트리스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방안에서 살살 걷는 소리가 그를 깨웠다. 그는 손으로 더듬어 소총을 잡고 방아쇠에 긴장된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는 얼굴에서 담요를 벗겼다. 로자샤안이 그의 매트리스 옆에 서있었다.

“왜 그러니?” 톰이 물었다.

“오빠는 자.” 그녀가 말했다.

“오빠는 잠이나 자. 내가 문을 지킬게.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할게.

그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좋아.” 그는 말하면서 이불을 다시 쓰고 누웠다.

해질녘에 어머니가 집에 돌아왔다. 그녀는 문간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더니 톰이 걱정할까봐 노크를 한 뒤에 “나다.” 하고 가만히 말했다. 그녀는 봉지를 들고 문을 열었다. 톰은 벌떡 일어나 매트리스 위에 앉았다. 상처가 마르고 아물어 살갗이 빤질거렸다. 왼쪽 눈은 거의 감겨 있는 상태였다.

“그 사이에 누가 왔던?” 어머니가 물었다.

“아뇨.” 그가 말했다.

“아무도 안 왔어요. 품삯이 떨어졌더군요.

“그걸 어떻게 알았니?

“사람들이 밖에서 지껄이는 소리를 들었지요.

로자샤안이 퉁명스런 얼굴을 하고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톰이 엄지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가 한바탕 난리를 쳤대요.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바로 자기한테만 몰아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렇게 얘 속을 썩여 줄 바에야 나는 차라리 나가 버려야겠어요.

어머니가 로자샤안 쪽으로 돌아섰다.

“너 무슨 짓을 했니?

딸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집안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판에 어떻게 훌륭한 아기 낳겠어요?

“닥쳐라. 닥치지 못하겠니?” 어머니가 말했다.

“네 기분이 어떤지는 알겠다. 그리고 너도 어쩔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제발 좀 잠자코 있어라.

그녀는 톰에게 돌아섰다.

“얘, , 네 누이한테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물론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도 잘 안다. 누구든지 어린애를 낳을 때는 자기한테만 화살이 돌아오는 것 같고, 사람들이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다 자기에 대한 모욕 같이만 들리는 법이다. 그런 건 아무 신경도 쓰지 마라. 로자샤안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걔도 그런 감정이 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걔를 속상하게 해주고 싶지는 않아요.

“아무 소리 말고 그저 입만 닥치고 있어라.

그녀는 가지고 온 봉지를 싸늘하게 식어 있는 스토브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은 별로 벌지도 못했다.” 그녀가 말했다.

“아침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여기를 떠나야겠다. , . 너 나무 좀 빠개 주겠니? 아니, 넌 못 하겠구나. 인제 상자도 여기 이거 하나밖에 안 남았구나. 그거라도 부숴야지. 다들 집에 돌아올 때 나무를 좀 주워 오라고 말해 두었다. 죽을 좀 끓이고 거기에다 설탕을 좀 타야겠다.

톰이 일어서서 마지막 남은 상자를 밟아 조각을 냈다. 어머니는 스토브 한쪽 끝에만 불을 피우고 스토브의 한쪽 구멍으로만 조심스럽게 불길을 살폈다. 냄비에 물을 붓고 그것을 불 위에 놀려 놓았다. 불 위에서 냄비는 덜거덕거리고 씨근거렸다.

“오늘 복숭아 따는 일은 어땠어요?” 톰이 물었다.

어머니는 컵을 옥수수 가루 속에 쑤셔 넣었다.

“그건 얘기하기도 싫다. 오늘 진종일 생각을 했는데, 전에는 우리도 농담을 하고 살지 않았니? 근데 인제 농담도 안 나오는구나. 참 생각만 해도 괴로운 일이다만 농담이라고 나온다는 게 고작 야비하고 쓰라린 농담밖에 없구나. 그리고 아무 재미도 없는 얘기뿐이다. 어떤 사람이 오늘 그러더라. ‘인제 불경기도 끝났어요. 들토끼가 뛰어가는 걸 보고도 그걸 쫓아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니까요.’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아서 ‘그건 불경기가 끝나서 그런 게 아니지요. 인제 들토끼를 잡을 여유도 없는 거지요. 그걸 잡아서 젖이나 짜내고는 그냥 놓아 주는 거지요. 당신이 본 놈은 아마 젖이 말라붙은 놈이었던 모양이오.’ 하는 거야. 바로 이런 식이란다. 아무 재미도 없는 농담이 부질없이 오가는 거란다. 전에 존 삼촌이 인디언을 잡아서 개종을 시켜 갖고 집에 데려왔을 때처럼 그런 멋이 없어졌단 말이다. 그 인디언이 존 삼촌의 자루에 담아놓은 콩을 깨끗이 먹어 치우고 게다가 위스키까지 마시고 자기네 종교를 배반한 그런 재미있는 얘기는 이제 들어 볼 수가 없게 된 거지. , . 시원한 물수건으로 얼굴이나 좀 닦으려무나.

밤이 깊어 갔다. 어머니는 등잔에 불을 붙여서 못에 걸었다. 그녀는 불을 지피면서 옥수수 가루를 조금씩 더운물에 집어넣었다.

“얘, 로자샤안, 너 이 죽 좀 저어 줄래?” 그녀가 말했다.

밖에서 뛰어가는 사람들 발자국 소리가 또닥거렸다. 문이 활짝 젖혀지며 열리더니 벽에 쾅하고 부딪쳤다. 루시가 달려 들어왔다.

“엄마!” 그녀가 외쳤다. “엄마, 윈필드가 막 까무러쳤어.

“어디서 그랬니? ?

루시가 숨을 헐떡거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갖고 쓰러졌어. 복숭아를 너무 많이 먹고 하루 종일 설사를 하더니 쓰러졌어. 아주 하얗게 되었어.

“어디 가보자!” 어머니가 나섰다.

“로자샤안, 네가 죽을 좀 보아라.

그녀는 루시와 함께 나가, 어린 딸 뒤를 헐레벌떡 좇아갔다. 석양 속에서 세 남자가 그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중 가운데 남자가 윈필드를 품에 안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들에게 달려갔다.

“우리 애예요.” 그녀가 소리쳤다.

“이리 주세요.

“제가 안아다 드리지요. 아주머니.

“아니에요, 어서 이리 주세요.

그녀는 어린애를 번쩍 안아 들고 돌아섰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해요.

“괜찮습니다. 아주머니. 어린애가 아주 약하군요. 무슨 기생충이 있는 모양이지요?

어머니는 서둘러 돌아왔다. 윈필드는 기진맥진해 어머니 품안에 늘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애를 안고 집에 들어와 무릎을 꿇고 그를 매트리스에 내려놓았다.

“얘야, 어떻게 된 거니? 말 좀 해 봐라.” 그녀가 물었다.

그는 눈을 뜨고 힘없이 쳐다보더니 고개를 흔들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루시가 말했다.

“엄마, 아까 내가 말했잖아? 윈필드는 하루 종일 설사를 했단 말이야. 조금 있다가 또 하고, 또 하고 했어. 복숭아를 너무 많이 먹었어.

어머니가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은 없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맥이 빠졌구나.

톰이 다가와 등잔을 바짝 들이댔다.

“내가 보면 알아요.” 그가 말했다.

“너무 배가 고팠어요. 기운이 없어서 그래요. 우유를 한 깡통 갖다가 먹여 보세요. 우유를 죽에다 타서 먹여 보세요.

“윈필드야.” 어머니가 불렀다.

“어디가 아프니?

“어지러워.” 윈필드가 말했다.

“머리가 빙빙 돌고 어지러워.

“그렇게 지독한 설사 처음 보았어.” 루시가 자못 거창하게 말했다.

아버지와 존 삼촌과 앨이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들 팔에는 나뭇가지와 덤불조각이 수북했다. 그들은 나무를 스토브 가에 내렸다.

“이번엔 또 뭐야?” 아버지가 물었다.

“윈필드가 아파요. 우유를 좀 먹여야겠어요.

“어럽쇼! 인제 다들 까다롭게 구는군.

어머니가 말했다.

“오늘 우리가 얼마 벌었죠?

1달러 42센트.

“그럼 바로 가셔서 우유 한 깡통만 사다 주세요.

“그 녀석은 또 왜 아프대?

“누가 알아요? 여하튼 아픈 걸 어떡해요. 어서 갔다 오세요.

아버지가 투덜거리면서 문 밖으로 나갔다.

“너 그 죽 좀 저었니?

“네, 저었어요.

로자샤안은 시키는 대로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손을 더 빨리 놀렸다.

앨이 투덜거렸다.

“제기랄, 어머니! 이게 뭐야? 진종일 어두울 때까지 일한 것이 겨우 죽이야?

“얘야 앨, 돈을 좀 모아야 되지 않니? 너도 알지, 돈 남은 것은 몽땅 휘발유를 사야 하니까 그렇잖니?

“그렇지만, 어머니! 사람이 일을 하려면 고기라도 먹어야 할 게 아니에요?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앉아라.”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제일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하지 않니? 그게 뭔지 너도 알지?

톰이 물었다.

“그게 나에 관한 일이에요?

“그건 밥을 다 먹고 나서 얘기하자.” 어머니가 말했다.

“앨, 우리는 이제 출발할 만큼 충분한 휘발유가 있지? 안 그러니?

“한 4분의 1탱크쯤 있어요.” 앨이 말했다.

“나한테도 좀 얘기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톰이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얘, 너 그 죽이나 좀 잘 저어라. , 커피를 좀 타자. 설탕은 죽에다 타든지 커피에 타든지 해야지 두 군데에 다 타지는 못하겠다.

아버지가 큼직한 우유 깡통을 들고 돌아왔다.

11센트나 주었어.” 그는 자못 기분이 상한 듯 말했다.

“이리 주세요!

어머니가 깡통을 받아 들고 그것을 땄다. 그녀는 진한 우유를 컵에다 따라서 그것을 톰에게 건네주었다.

“윈필드한테 주어라.

톰이 매트리스 옆에 무릎을 꿇었다.

“자, 이거 마셔라.

“못 마시겠어. 다 토할 것 같아. 그냥 내버려 둬.

톰이 일어섰다.

“지금은 못 먹을 거예요. 어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머니가 컵을 받아 창틀 위에 얹어 놓았다.

“이거 아무도 손대지 마라.” 그녀가 경고를 했다.

“윈필드 거다.

“나는 우유 맛도 못 보았어요.

“그래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너는 아직도 성한 편이 아니냐? 이 어린 녀석은 아파서 누웠잖니? 그 죽이 꽤 진해서 먹을 만하지?

“그래요, 인제 하도 뻑뻑해서 잘 저어지지도 않아요.

“됐다. 그럼 먹자. 설탕 여기 있다. 한 사람 앞에 한 숟가락씩만 타라. 각자 설탕을 죽에 타든지 커피에 타든지 마음대로 해라.

톰이 말했다.

“나는 죽 같은 데에는 소금하고 후추를 타는데.

“그럼 너는 소금을 타려무나.” 어머니가 말했다.

“후추는 떨어졌다.

상자가 다 없어져, 가족들은 이제 매트리스에 앉아 죽을 먹었다. 가족들은 각자 손수 퍼서 몇 그릇씩 먹었고 솥은 거의 바닥이 났다.

“윈필드 먹을 걸 좀 남겨 두어라.” 어머니가 말했다.

윈필드가 일어나 우유를 마셨다. 그는 갑자기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죽 그릇을 두 다리 사이에 끼워 놓고 남은 것을 모조리 떠먹더니 그릇 옆에 붙은 찌꺼기까지 긁어 먹었다. 어머니는 깡통에 남은 우유를 컵에 따라 아무도 몰래 로자샤안에게 주면서 한쪽 구석에 가서 먹으라고 했다. 그리고 뜨거운 블랙커피를 컵마다 따라 컵들을 돌렸다.

“자, 인제 얘기 좀 해주시겠어요?” 톰이 말했다.

“궁금해 죽겠어요.

아버지가 불안하게 말했다.

“루시하고 윈필드는 안 들었으면 좋겠다만… 애들은 좀 밖에 내보낼 수 없을까?

어머니가 말했다.

“아니에요. 걔들도 이제 다 큰 애들로 취급해 줘야 해요. 아직 이르기는 하지만요. 할 수 없어요. 루시하고 윈필드하고, 너희도 여기서 들은 얘기 어디 가서 하면 안 된다.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다가는 우리 집이 풍비박산이 되는 거야. 알았어, 너희?

“얘기 안 할게요.” 루시가 말했다.

“우리도 다 컸어요.

“그래, 그런 얘기 하면 안 된다.

모두 커피 잔들을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등잔의 작은 불꽃은 마치 조그마한 나비의 날개처럼 벽 위에 노란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자, 인제 얘기해 주세요.” 톰이 말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당신이 하세요.

존 삼촌이 커피를 엎질렀다.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그놈들은 품삯을 깎았다. 그리고 새 일꾼들이 잔뜩 몰려왔다. 그 사람들은 어찌나 굶주렸는지 그저 빵 한 조각만 주어도 일을 할 사람들이더라. 복숭아를 따러 가면 벌써 다른 사람이 먼저 따버리는 거야. 이 농장의 복숭아도 얼마 안 가서 다 따버리겠더라. 사람들은 남이 따지 않은 나무를 차지하느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더구나. 어떤 놈들은 싸움질까지 하더구나. 한 사람이 자기 나무라고 버티니까 다른 사람도 그 나무에서 따려고 다투는 거지. 그들은 저 엘센트로에서까지 올라왔더라. 아귀 떼같이 굶은 사람들이야. 빵 한 조각을 얻어먹으려고 하루 종일 일하는 거야. 그래 내가 가서 계산하는 직원한테 그랬다. ‘한 상자에 2센트 반을 받고는 일을 못 하겠소.’ 그랬더니 그 친구 하는 말이, ‘그럼 다른 데로 가시오. 이 사람들은 그거라도 다 할 수 있으니까요.’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 사람들도 배가 어지간히만 차면 그렇게는 안 할 거라니까, 그 친구는 ‘그 사람들 배가 다 차기 전에 우린 이 복숭아를 다 따 버릴 거요.’ 하더라고.” 아버지가 말을 멈췄다.

“이놈의 복숭아는 악마야.” 존 삼촌이 말했다.

“그놈들 말이 오늘밤에 일꾼들이 3백 명이나 더 들어온다던데?

톰이 말했다.

“그런데 다른 얘기는 어때요?

아버지는 잠시 조용했다.

“얘, . 그게 네 얘기 같더라.

“나도 그렇지 않나 생각했지요. 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모두 그 얘기만 하는 것 같더라.” 존 삼촌이 말했다.

“경호원들을 풀어 놓고 있고 린치를 가한다는 얘기를 하는 놈도 있더라. 물론 그 문제의 인물을 붙잡았을 때의 얘기지만.

톰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있었다. 마치 눈이라도 한번 깜빡하는 순간에 무슨 변이라도 일어날지 모른다는 식으로 겁먹고 있는 것 같았다.

“글쎄, 그 일을 저지른 그놈들이 케이시를 죽인 다음에 저지른 거라니까요.

아버지가 말을 가로챘다.

“그런데 그놈들 얘기는 그렇지 않더라. 그놈들 얘기는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이 먼저 손을 댔다는 거야.

톰은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오, 하느님!

“그놈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악감을 품고 있는 거다. 내가 들은 바로는 그렇다. 선전원들이나 조합원들을 모두 동원해 그 일 저지른 사람을 꼭 찾고야 말겠다는 거다.

“그래서 인상착의를 알고 있대요?” 톰이 물었다.

“글쎄, 정확히는 모르는 것 같더라. 하지만 내가 들은 바로는 그 사람도 한 대 맞은 걸로 알고 있더라. 그래서 그 사람도 어딘가 표시가…”

톰은 천천히 손을 올려 상처가 난 볼때기를 더듬었다.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그 사람들 말이 왜 그래요?

“걱정 마세요, 어머니!” 톰이 말했다.

“그놈들은 자기들 멋대로네요. 그 선전원 놈들이 하는 말은 자기들한테 유리하고 상대방한테 불리한 말이면 무엇이든지 그대로 통하는 거니까요.

어머니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톰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아들의 입술을 특히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너, 전에도 약속했지.” 그녀가 말했다.

“어머니, 나는, 아니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은 어디로든지 가버려야 해요. 혹시 그 사람이 나쁜 일을 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좋다. 목이라도 매달라고 하면 매달자. 나는 나쁜 짓을 했으니까 그 벌을 받아야지.’ 하지만 그 사람은 하나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스컹크를 한 마리 죽인 것보다 더 기분이 나쁘지가 않으니까요.

루시가 끼어들었다.

“엄마, 나하고 윈필드하고는 알고 있어. 그 사람을 우리 때문에 감옥에 집어넣지 않아도 돼.

톰이 킬킬거렸다.

“그 사람은 처벌을 원치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이라도 똑같은 일을 얼마든지 저지를 테니까요.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 가족들한테 괴로움을 끼치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 나는 아무래도 떠나야 해요.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입을 막고 목청을 가다듬기 위해서 기침을 했다.

“그건 안 된다.” 그녀가 말했다.

“네가 숨을 곳은 없다. 너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가족은 믿을 수 있지 않니? 우리는 너를 숨길 수 있다. 그리고 네 얼굴 다 나을 때까지 먹을 것도 제대로 먹을 수 있게 해주마.

“그래도 어머니…”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너는 못 간다. 우리는 너를 데리고 갈 거다. , , 너 나가서 트럭을 뒤로 해서 문간에 대라. 지금 생각이 났다. 차 바닥에 매트리스를 하나 깔아 톰이 얼른 거기에 들어가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또 하나 얹어 굴속처럼 만들면 된다. 톰이 그 굴에 들어가 있으면 우리가 그 앞에 벽을 치고 앉는 거다. 한쪽 구석으로 숨을 쉬게 하고 말이다, 알겠니? 이러쿵저러쿵하지 마라. 바로 그대로 하는 거다.

아버지가 투덜거렸다.

“집안에 남자는 찍소리도 못 하겠군. 여자 혼자서 이러니저러니 다 해버리니, . 우리가 어디 가서 안정만 해봐. 보기 좋게 한 대 갈겨 줄 테니까.

“그런 때만 되면 그렇게 하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어서 일어나라, . 이만하면 충분히 어두워졌다.

앨이 밖으로 나갔다. 그는 트럭을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트럭 꽁무니를 문간 계단 가까이에 갖다 댔다.

어머니가 말했다.

“자, 빨리 해라. 그 매트리스를 먼저 실어!

아버지와 존 삼촌이 그것을 문간 너머로 던졌다.

“자, 이번에는 이걸 실어라.

사람들이 달려들어 두 번째 매트리스를 실었다.

“인제, , 너 얼른 뛰어올라 가서 그 안으로 들어가라. 빨리!

톰은 재빨리 차에 뛰어올라 바닥으로 들어갔다. 그는 매트리스 하나를 잘 펴서 깔고 또 하나를 머리 위에 썼다. 아버지가 그것을 꺾어 양쪽 가를 세우고 활 모양으로 된 부분이 톰을 가리게 했다. 톰은 트럭의 짐칸 옆구리 판자 사이로 밖을 볼 수가 있었다. 아버지와 앨과 존 삼촌이 재빨리 짐을 실었다. 담요를 톰의 얼굴 위에 씌우고 양쪽에다 양동이를 세우고 마지막 남은 매트리스를 뒤에다 깔았다. 단지나 냄비, 그릇, 그리고 허드레 옷가지들이 아무렇게나 실렸다. 이런 것들을 담을 상자를 이미 다 뜯어 땠던 것이다. 짐을 거의 다 실었을 때쯤 경비원이 손에 총을 들고 다가왔다.

“무엇들 하는 거요?” 그가 물었다.

“다른 데로 가는 거지요.” 아버지가 말했다.

“왜 그러시오?

“다른 데에서 오라는 데가 있다오. 아주 좋은 일자리지요.

“그래요? 어딘데요?

“저 아래 위드팻치 근처요.

“어디 검사 좀 해봅시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에 플래시를 비춰 보더니 존 삼촌과 앨의 얼굴도 비춰 보았다.

“당신들하고 같이 있던 사람이 또 하나 있지 않았소?

앨이 말했다.

“우리 차에 편승하고 온 사람 말이오? 얼굴이 하얗고 키가 작달막한 사람 말이지요?

“아, 그랬던 것 같군.

“우리가 여기 들어올 때 그 사람을 차에 태워 주었지요. 오늘 아침에 품삯이 내려가니까 어디로 가 버리던데요.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다고 그랬소?

“왜 그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은 아주 창백하게 생긴 남자 말이오.

“그 사람 오늘 아침에 혹시 얼굴에 상처가 안 났던가요?

“별로 그런 것 못 보았는데요.” 앨이 말했다.

“주유소는 아직 열려 있습니까?

“여덟 시까지는 열고 있소.

“빨리 타요.” 앨이 소리를 질렀다.

“내일 아침까지 위드팻치에 도착하려면 한참 달려야 해. 어머니, 앞에 타실래요?

“아니다, 뒤에 타련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도 여기 같이 타시구려. 로자샤안하고 존 삼촌하고 앨이나 앞에 타라고 해요.

“아버지, 그 전표 좀 주세요.” 앨이 말했다.

“휘발유 좀 사고 남으면 잔돈을 받아야겠어요.

경비원은 일행이 집들 사이의 통로를 나가 주유소 쪽으로 좌회전해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둘만 넣어 주시오.” 앨이 말했다.

“멀리 가지 않으시오?

“멀리 안 가요. 이 전표 드릴 테니 좀 거슬러 주실 수 있습니까?

“보세요, 형씨.” 앨이 말했다.

“우리는 오늘밤까지만 도착하면 아주 좋은 일자리를 얻게 되어 있어요. 오늘밤까지 못 가면 그걸 놓치게 됩니다. 좀 부탁합시다.

“좋소. 거기다 사인을 해주시오.

앨은 차에서 내려 허드슨 차 코빼기를 돌아갔다.

“예, 사인하지요.

그는 말하면서 물마개를 비틀어 열고 라디에이터에 물을 채웠다.

“둘이라고 했지요?

“예, 둘만 넣어 주시오.

“어떤 쪽으로 가시오?

“남쪽으로 갑니다. 일자리가 있다 해서.

“그래요? 일자리는 쉽지 않은데 용하군요. 고정된 일자리 말이오.

“거기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앨이 말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 그럼 안녕히 계시오.

트럭은 한 바퀴를 돌더니 통로를 거쳐 차도 위로 올라섰다. 희미한 헤드라이트가 길바닥 위에 펄럭대고 오른쪽 불은 그나마 접선이 나빠 깜빡깜빡했다. 차가 뛸 때마다 짐칸 바닥에 아무렇게나 실어 놓은 단지나 냄비 같은 그릇들이 덜거덕대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부딪쳤다.

로자샤안이 가만히 신음 소리를 냈다.

“몸이 안 좋으냐?” 존 삼촌이 물었다.

“네, 자꾸 아파요. 어디 좀 좋은 데에 가서 가만히 누워 있었으면 좋겠어요. 고향에 그냥 있고 오지 않았더라면 이 고생은 안 했을 걸 그랬나 봐요. 고향에만 있었으면 코니도 가버리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쯤은 공부를 다 마치고 좋은 데에 취직이라도 했을 텐데.

앨도 존 삼촌도 대답이 없었다. 그들은 코니 얘기만 나오면 괜히 난처했다.

하얀 페인트칠을 한 농장 정문에 이르자 수위가 차 옆쪽으로 다가왔다.

“아주 나가는 거요?

“예.” 앨이 말했다.

“북쪽에 일자리를 얻어서 가는 거지요.

수위는 플래시를 트럭에 비춰 보더니 천막 안에 들이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플래시 불빛 속에 돌려댔다.

“오케이!

수위가 정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트럭은 왼쪽으로 돌아서 남북 간 대고속도로 101호선을 향했다.

“어디로 가는 건지 너 알고 있니?” 존 삼촌이 물었다.

“아니, 몰라요.” 앨이 대답했다.

“그냥 가는 거예요. 이제 그만 신물이 나는데요.

“인제 얼마 오래 갈 것 같지 않아요.” 로자샤안은 은근히 겁을 주는 말투였다.

“좀 편안한 데에 갔으면 좋겠어요.

첫서리가 내릴 때쯤이라 밤공기는 제법 싸늘했다. 길가에는 과일나무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뒹굴었다. 짐칸에는 어머니가 트럭 옆구리에 등을 기대고 앉았고 아버지가 맞은편에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소리쳤다.

“얘, , 너 괜찮니?

그의 꽉 막힌 목소리가 대답했다.

“좀 답답한데요? 인제 농장은 다 빠져 나왔어요?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가다가 그놈들이 또 차를 세울라.” 어머니가 말했다.

톰은 굴속에서 한쪽 옆을 쳐들었다. 어두운 짐칸 속에서 그릇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이거만 후딱 내리면 돼요.” 그가 말했다.

“이렇게 꼭 갇혀 있으니까 못 견디겠어요.

그는 팔꿈치로 몸을 버티었다.

“아이고, 날이 제법 선선해지는 걸? 그렇죠?

“구름이 올라가더라.” 아버지가 말했다.

“금년에는 겨울철이 빠를 거라고들 하더라.

“다람쥐가 높은 데에 집을 지은 모양이죠. 풀들이 씨를 뿌리고.” 톰이 말했다.

“아버지는 아무거나 보아도 천기를 맞추시거든. 다 떨어진 바지 하나만 가지고도 날씨를 점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야 모르겠다만, 내가 보기에는 겨울철이 다가오는 것 같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이 고장은 좀 더 살아 보아야 알겠지만.

“우리는 어느 쪽으로 가지요?

“모르겠다. 앨 녀석이 왼쪽으로 차를 틀었단다. 녀석은 우리가 오던 길을 다시 내려가는 모양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나도 모르겠어요. 국도에 제대로 올라서면 경찰 녀석들이 더 득실거릴 텐데요. 내 얼굴이 이 꼴이니 그놈들은 당장 붙잡을 거예요. 되도록 작은 뒷길로 갔으면 좋겠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운전석 뒤를 좀 두드려라. 앨보고 차를 멈추라 해.

톰이 주먹으로 운전석 뒤 판자를 두드렸다. 트럭이 길 한쪽에 멎었다. 앨이 내려 뒤로 걸어왔다. 루시와 윈필드가 담요 밑에서 빠끔히 내다보았다.

“왜 그래?” 앨이 물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어떻게 할지 생각 좀 해보고 가자. 되도록 작은 뒷길로 가는 것이 좋겠다. 톰이 그러는데.

“내 얼굴 때문에 그런다. 이 꼴을 보면 어느 경찰 녀석이라도 단박 알 거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가겠어? 나는 북쪽으로 갈까 했는데, 여태까지 남쪽에만 있었으니까.

“그래.” 톰이 말했다.

“뒷길로만 가봐라.

앨이 물었다.

“좀 내려서 잤다가 내일 가는 게 어떨까?

어머니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직 안 된다. 우선 얼마쯤이라도 동네를 벗어나야 마음이 놓이겠다.

“알았어요.

앨이 운전대에 돌아가더니 다시 차를 몰았다.

루시와 윈필드가 다시 담요를 뒤집어썼다.

어머니가 소리쳤다.

“윈필드야, 인제 좀 괜찮니?

“그럼, 인제 괜찮아.” 루시가 대답했다.

“여태 잤어.

어머니가 트럭 옆구리에 등을 기댔다.

“이렇게 쫓겨 다니니까 좀 우스운 생각이 드는구나, 좀 비굴한 기분도 나고.

“비굴한 기분은 누구나 마찬가지야.” 아버지가 말했다.

“누구나 그래. 오늘 싸움들 하는 거 못 봤어? 사람도 변하는 거야. 그 관청 캠프에서는 우리도 이렇게 비굴한 생각이 안 들었는데 말이야.

자갈길 위에서 앨은 오른쪽으로 차를 돌렸다. 노란 라이트가 땅위에서 몸부림을 쳤다. 과일나무들의 열매는 이제 다 없어지고 그 대신 목화가 한창이었다. 그들은 차를 돌리고 꺾고 하면서 목화밭이 있는 시골길을 20마일이나 달렸다. 길은 숲이 우거진 시내를 따라 뻗었다가 콘크리트로 된 다리를 건너 시내 건너편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윽고 시내 끝에 이르자 빨간 색을 칠한 짐짝 같은 화물차들이 줄지어 서있는 것이 불빛에 드러났다. 모두 앞 칸을 떼어 낸 짐칸들뿐이었다. 길 끝에서 커다란 가판이 ‘목화 따는 일꾼을 구함’이라는 표지를 달고 있었다. 앨은 속력을 늦추었다. 톰이 짐칸 판자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화물차가 있던 곳을 한 4분의 1마일 가량 지나자 톰이 운전석 뒤창을 두드렸다. 앨이 한쪽 옆으로 차를 세우고 뛰어내렸다.

“또 뭐야?

“엔진을 끄고 이리 올라와.” 톰이 말했다.

앨이 다시 운전대에 올라가 도랑 속으로 차를 몰아넣더니 엔진과 라이트를 켰다. 그리고 뒤꽁무니로 기어올라 왔다.

“자, 됐어.” 그가 말했다.

톰은 그릇들 위로 엉금엉금 기어 나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까 보니까 목화 따는 일이 있는 모양이에요. 간판을 보았어요.” 그가 말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가족들과 같이 있을까 궁리를 해보았어요. 그러면서 말썽도 안 일어나게 말이에요. 나도 얼굴만 다 나으면 아무 문제없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저 뒤에 있는 저 차들 보이지요? 목화 따는 사람들이 그 안에 살고 있어요. 어쩌면 지금 그곳으로 가면 일자리가 있을 거예요. 거기에 가서 일을 하면서 가족들이 그 화물차 짐칸 속에 살면 어떻겠어요?

“너는 어떻게 하고?” 어머니가 물었다.

“아까 오면서 보니 수풀이 꽤 우거진 시내가 있었잖아요? 나는 그 수풀 속에 가서 숨고 안 나타나면 돼요. 그리고 밤에 누군가 먹을 것만 좀 갖다 주세요. 그 뒤에 배수구가 있더군요. 혹시 그런 데서 잘 수도 있을 거예요.

아버지가 말했다.

“정말 목화나 좀 만져 보았으면 좋겠구나. 목화 일만은 나도 남 못지않게 알거든.

“화물차 짐칸도 들어가면 살 만할지 몰라.” 어머니가 말했다.

“그런대로 깨끗하고 땅바닥보다는 습기도 없을 거야. , , 그 수풀이 사람이 숨을 만하겠니?

“그럼요. 내가 유심히 보았어요. 거기 가서 자리를 잘 잡아 놓고 숨으면 돼요. 내 얼굴만 다 나으면 바로 나오지요, .

“흉터가 크게 나겠더라.” 어머니가 말했다.

“제기랄, 흉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나는 한번 400파운드나 되는 목화도 따 보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건 말이 그렇지 정말 대단한 일거리란다. 우리 식구가 다 대들어서 따면 돈도 좀 벌 거다.

“이제 고기도 좀 먹겠군요.” 앨이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할까요?

“그쪽으로 돌아가서 트럭 속에서 자는 거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침까지 자고 아침에 나가 일자리를 얻는 거야. 저렇게 깜깜해도 목화다래는 알아볼 것 같다.

“톰은 어떻게 할래?” 어머니가 물었다.

“어머니, 나는 인제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담요나 하나 가지고 가겠어요. 돌아가면서 잘 보세요. 배수구가 하나 있을 테니. 빵이나 감자나 죽 같은 것을 갖다가 그냥 거기에다 놓고 가면 나중에 내가 갖다 먹을게요.

“그러마.

“그렇게 하면 괜찮겠군.” 아버지가 말했다.

“그게 좋은 생각이지요.” 톰이 힘을 주어 말했다.

“내 얼굴이 조금만 나으면 그때는 나도 나와서 한몫 따지요.

“그래, 좋다“ 어머니도 찬성했다.

“하지만 위험한 짓은 하지 마라. 당분간 아무한테도 눈에 띄면 안 된다.

톰은 트럭 뒤로 다시 기어갔다.

“나는 이 담요만 가져가겠어요. 돌아갈 때 아까 내가 말한 그 배수구나 찾아보세요, 어머니.

“조심해라.” 어머니가 말했다.

“제발 조심해야 한다.

“걱정 마세요.” 톰이 말했다.

“조심하겠으니까.

그는 트럭 뒤꽁무니에 기어올라 아래로 뛰어내렸다.

“잘들 가세요.

어머니는 톰의 뒷모습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어른거리다가 시내 옆의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제발 하느님 은덕으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그녀가 말했다.

앨이 물었다.

“이제 그만 뒤로 돌아갈까요?

“그래.” 아버지가 대답했다.

“천천히 가거라.” 어머니가 말했다.

“가면서 배수구를 똑똑히 보아 두어야겠다. 꼭 찾아야 한다.

앨은 차를 뒤로 밀고 좁은 길에서 간신히 차를 돌려 세웠다. 그는 천천히 화물차가 늘어서 있는 데까지 차를 몰았다. 트럭의 라이트가 넓적한 화물차 짐칸의 문간에까지 대놓은 좁다란 통로를 비췄다. 문간은 깜깜했다. 밤에는 아무도 일어나 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앨은 라이트를 껐다.

“누나랑 삼촌은 뒤의 짐칸으로 가고 나는 이 운전석에서 잘게.” 그가 로자샤안에게 말했다.

존 삼촌은 몸이 무거운 조카딸을 부축해 짐칸 뒤로 올라갔다. 어머니가 그릇들을 한쪽에 포개어 놓은 다음 가족들은 서로 엉켜 붙은 채 아무렇게나 누웠다.

화물차들이 있는 어디선가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오랫동안 자지러지게 들려왔다. 개 한 마리가 깡충거리고 뛰어오더니 킁킁 냄새를 맡으면서 조드네 트럭 주위를 천천히 맴돌았다. 시내 바닥에서 물이 쫄쫄 거리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27

길바닥에 ‘목화 따는 일꾼 구함’ 플래카드가 즐비하고 광고쪽지가 마구 뿌려진다. 오렌지 광고 쪽지다. ‘목화 따는 일꾼 구함…. 이쪽 길로 오라.’고 적혀 있다.

지금은 줄기가 뻣뻣한 색깔의 식물이다. 묵직한 목화다래가 꼬투리에 매달려 있다. 하얀 목화가 마치 팝콘처럼 빠져 나오고 있다. 저 목화다래에 손이라도 대보고 싶다. 손가락 끝으로 살짝 만져 보기라도 했으면.

나는 목화 따는 데는 누구보다도 솜씨가 있는데.

진짜 목화 일꾼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지.

나는 목화를 따야 할 사람이다.

목화를 담는 포대가 있소?

, 그건 없는데요.

1달러 내시오. 포대 값이오. 우선 당신이 목화를 150파운드 따면 그것으로 포대 값을 때우겠소. 이 밭에서는 첫 번엔 100파운드 당 80센트요. 그리고 두 번째부터는 90센트를 주지요. 저기 있는 포대를 가져가시오. 그게 1달러요. 지금 현찰이 없으면 당신이 따오는 첫 번째 150파운드를 그 값으로 치겠소. 그럼 계산은 깨끗하오. 알겠소?

계산이야 깨끗하지. 무명포대는 목화 철이 끝날 때까지 쓸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 떨어져서 너덜거리면 뒤집어서 거꾸로 사용하면 된다. 주둥이를 박아서 막아 버리고 떨어진 쪽에 주둥이를 낸다. 그러다가 양쪽이 다 떨어지면 그때는 뜯어서 훌륭한 옷을 만들 수 있다. 여름 속옷을 만들면 훌륭하다. 잠옷도 만들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무명포대는 정말 쓸모가 많은 물건이다.

그걸 허리춤에 둘러보아라. 그걸 가랑이 사이에 끼고 끌어 보아라. 손가락 끝으로 목회를 따서 가랑이 사이에 벌리고 있는 포대 주둥이 속에 손을 쑤셔 넣는 것이다. 애들이 뒤에서 따라온다. 애들한테는 포대를 주지 않는다. 따로 굵은 삼베 자루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아버지의 포대에 같이 집어넣는다. 포대가 어느 정도 차면 제법 묵직하게 끌린다. 그러면 몸을 앞으로 굽히고 잡아끌어야 한다. 나는 목화 따는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다. 손가락만 까딱해도 목화가 저절로 따라온다.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하거나 콧노래를 물러도 포대가 하나 가득 차버린다. 손가락은 정확하게 목화를 찾는다. 저절로 아는 것이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제대로 보이는 것이다.

목화밭을 따라서 주고받는 이야기들….

전에 우리 고향에 한 여자가 있었다. 이름까지 밝힐 것은 없겠지. 그녀가 갑자기 검둥이를 낳았다. 그때까지 아무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검둥이를 좇아 다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녀는 고개도 못 들게 되어 버렸다. 내가 그녀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만 그녀의 목화 따는 솜씨가 하도 훌륭했기 때문이다.

포대가 무거워지면 잡아끌어야 한다. 엉덩이에 힘을 주고 짐을 끄는 말처럼 끌고 가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아버지 포대 속에 자꾸 따 넣는다. 여기는 목화농사가 잘도 되었다. 낮은 땅에선 줄기가 가늘어지고 섬유가 실처럼 늘어난다. 이 캘리포니아 목화 같은 것은 처음 보겠다. 길쭉길쭉한 섬유가 내가 본 중에 제일 좋다. 그 대신 땅은 빨리 망가진다. 목화밭을 사고 싶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런 밭을 사면 안 된다. 그냥 빌려 쓰도록 해야 한다. 목화가 한바탕 풍년이 들고 나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한다.

밭이랑을 따라 움직여 가는 사람들. 손가락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손가락이 들락거리면서 목화다래를 잘도 끄집어낸다. 눈을 왔다 갔다 할 것도 없다. 나는 눈이 멀어 버려도 목화만큼은 따겠다. 목화다래에 대해서는 묘한 감각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깨끗이 따낸다. 아주 깔끔히 따낸다.

이제 포대가 가득 찼다. 포대를 저울이 있는 데로 가져가라. 한바탕 다투어야 할 것이다. 저울질을 하는 친구가 또 돌멩이를 놓지 않았느냐고 실랑이를 할 거다.

그 사람은 왜 그럴까. 그의 저울은 딱 고정되어 있다. 그래도 그 사람 말이 맞을 때도 있다. 포대 속에서 돌멩이가 나올 때도 있는 것이다. 또 그 사람이 틀릴 때도 있다. 저울눈이 잘못된 것이다. 어떤 때는 두 가지 다 잘못될 때도 있다. 돌멩이도 들었고 저울눈도 틀리고, 그래서 늘 실랑이를 해야 하고 다투어야 한다. 그러니 핏대가 나기 마련이고 그러면 그 친구도 핏대를 올리게 된다. 돌멩이 몇 개쯤 들어 있으면 그게 어쨌다는 건가? 어쩌면 한 개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4분의 1파운드나 될까? 여하튼 아귀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포대를 털고 다시 돌아온다. 각자 장부가 있다. 그 안에 자기가 딴 중량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는 것이다. 각자 자기 장부를 쓰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이런 일은 참 할만 하다. 어린애들은 좋아라고 따라다닌다. 목회 따는 기계가 나온다는 말 들어 본 일이 있는가?

, 들어 보았지.

그런 것이 정말 나올까?

글쎄, 진짜 나오는 날이면 우리 같은 사람기계는 깡그리 없어질 거라는데.

날이 어두워지면 모두가 지쳐 버린다. 하지만 목화는 많이 땄다. 3달러나 벌었다. 나하고 우리 집 여편네하고 애들까지 동원했다.

자동차들이 목화밭으로 밀려온다. 목화 캠프가 세워진다. 포장을 친 높은 트럭과 트레일러가 하얀 목화다래를 하나 가득 싣고 있다. 목화는 울타리의 철조망에도 달라붙고 바람에 날리면 작은 방울들처럼 길바닥 위에 뒹굴기도 한다. 눈처럼 하얀 목화가 조면기에 실려 가는 것이다. 그 큼직한 짐짝들은 압착기에 실려 간다.

목화는 사람 옷에도 달라붙고 구레나룻 수염에도 엉겨 붙는다. 콧구멍 속까지 파고들어 간다.

, 어서 따라. 어둡기 전에 이 포대를 다 채워야 한다. 이골이 난 손들이 목화 다래를 더듬는다. 엉덩이에 힘을 주고 포대를 끈다. 이제 저녁때가 되면 어린것들은 지쳐 버린다. 그들은 갈아 놓은 밭이랑 위를 왔다 갔다 한다. 해는 기울고 있다.

해가 더 길었으면 좋겠다. 아직 몇 푼이 안 된다. 어떻게 되든지 여하튼 이런 일이라도 오래 할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

국도 위에는 선전광고에 이끌려 찾아 드는 낡은 자동차들이 길게 줄을 잇는다.

녹화 포대가 있소?

없는데요.

그럼 포대 값이 1달러요.

일꾼이 한 50명 정도라면 우리도 한동안 이일을 해먹겠는데 일꾼이 한 500명도 넘는다니 이 일도 얼마 안 가서 끝장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포대 값도 못 한 사람이 있다는 말도 들었다. 가는 데마다 새 포대를 사는데 자기 포대 값만큼도 못 따고 목화 철이 다 끝나 버린 것이다.

그러니 제발 돈을 좀 저축하도록 해야 한다. 겨울은 빨리도 닥치는 것이다. 겨울철에 캘리포니아에는 아무런 일감도 없다. 날이 어둡기 전에 포대를 채워라. 아까 저 사람은 포대 속에 흙덩어리를 두 개씩이나 집어넣더라. 제기랄, 좀 그러면 안 될 게 뭐야? 어차피 엉터리 저울에 속을 텐데.

, 여기 내 장부가 있다. 312파운드다.

그렇지! 웬일로 오늘은 한 번도 다투어 보지 못했는걸. 그 친구 저울눈이 좀 이상한 모양인데.

여하튼 오늘은 일진이 나쁘지 않군.

이 목화밭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한 천 명은 넘을 거라던데? 내일부터는 밭이랑 하나를 놓고 서로 다툴 판이군. 목화도 아무렇게나 낚아 딸 거고. 목화 따는 일꾼 구함. 일꾼이 많을수록 조면기에 빨리 들어가는 것이다.

, 목화밭 캠프에.

오늘밤은 돼지고기라도 해먹어 보자. 돼지고기를 먹을 돈이 있다. 어린애들은 좀 거들어 주어야겠다. 너무 지쳐 있는 모양이다. 어서 달려가서 돼지고기 4파운드만 사가지고 가자. 우리 집 아낙네가 너무 지쳐버리지 않았다면 비스킷이라도 한 접시 구워 낼 것이다.

28

짐짝같이 납작하게 생긴 화차가 열두 칸이나 시냇가의 평평한 곳에 다닥다닥 붙어 서있었다. 여섯 칸씩 두 줄로 서서 바퀴는 다 떼어지고 없었다. 커다란 여닫이문이 있는 데까지 두꺼운 판자가 걸려 사닥다리처럼 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훌륭한 집 구실을 하고 있었다. 비나 물도 새지 않고 바람도 막을 수 있었다. 한 칸에 한 세대씩 모두 스물네 세대가 들어 살고 있었다. 창은 없었지만 커다란 여닫이문이 항시 열려 있었다. 어느 집에서는 화차칸 한복판에 휘장이 걸려 있었지만, 대개의 집들은 여닫이가 있는 자리가 다른 집과의 경계선을 이루도록 되어 있었다.

조드네 가족들은 맨 끝 칸 한쪽 구석에 들었다. 먼저 들어 살고 있던 사람들이 석유깡통에 스토브 파이프를 박아 벽에다 굴뚝을 뽑아낼 구멍을 뚫어놓았다. 여닫이를 활짝 열어 두어도 짐짝 같은 화차 구석은 어두웠다. 어머니는 범포를 한복판에 쳐서 늘어뜨렸다.

“그거 훌륭하다.” 그녀가 말했다.

“여태까지 관청 캠프에서 지내던 때만 빼놓고는 여기가 제일 훌륭하구나.

그녀는 밤마다 매트리스를 깔고 매일 아침 그것을 다시 갰다. 그리고 날만 새면 밭에 나가 목화를 따고 밤마다 고기를 먹었다. 토요일에는 투레어까지 차를 몰고나가 양철 스토브도 사고 앨과 아버지와 윈필드와 존 삼촌의 작업복도 새로 장만하고 자신 드레스도 샀다. 자신이 입던 제일 좋은 드레스는 로자샤안에게 물려주었다.

“너는 몸이 너무 크니까 지금 새 옷 사 입는 것은 괜히 돈만 낭비하는 거다.” 어머니가 말했다.

조드 일가는 그럭저럭 운이 좋았다. 화차칸이라도 하나 차지할 만큼 일찍 들어왔던 것이다. 늦게 찾아온 사람들 천막이 평평한 장소마다 궁색하게 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화차칸에 사는 사람들은 고참이었고 일종의 귀족계급이었다.

가느다란 시냇물이 버드나무 숲에서 빠져 나와 다시 버드나무 숲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화차칸마다 시냇물에 내려오는 길이 반질반질하게 나있었다. 화차칸 사이마다 빨랫줄이 쳐있었고 빨랫줄에는 매일같이 빨래가 널렸다.

저녁때가 되면 사람들은 무명 포대를 접어 겨드랑이에 끼고 들판에서 돌아왔다. 오다가 네거리에 있는 가게에 들렀다. 가게에는 먹을 것을 사러 나온 목화 일꾼들이 많았다.

“오늘은 얼마나 하셨소?

“오늘은 좀 했지요. 오래 할 수만 있으면 좋겠는데. 이 어린것들도 이제 제법 솜씨가 늘어가는군요. 애들 엄마가 이 애들한테 포대를 따로따로 지어 주었지요. 어른 포대를 끌고 다닐 수가 없으니까요. 저희들 포대에 따가지고 와서 우리 포대에 집어넣곤 하지요. 다 떨어진 셔츠 두어 벌 뜯어서 만든 거지요. 그래도 훌륭하더군요.

어머니는 정육점에 갔다. 손가락을 입술에다 대고 불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돼지고기 불고기감이나 좀 사야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얼마죠?

1파운드에 30센틉니다, 아주머니.

3파운드만 주세요. 그리고 국거리로 쇠고기도 조금만 주시고요. 내일 우리 딸이 먹음 직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 그리고 우리 딸이 먹을 우유도 한 병 하고요. 걔는 우유를 잘 먹어요. 인제 곧 어린애를 낳을 거예요. 간호사가 그러는데 우유를 많이 먹으면 좋대요.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감자는 아직 좀 남았고.

아버지가 시럽 깡통을 들고 다가왔다.

“이걸 좀 가져갈까?” 그가 말했다.

“핫케이크도 좀 가져가고.

어머니가 얼굴을 찡그렸다.

“글쎄, 자 이렇게 가져가요. 인제 라드 기름은 충분히 있어요.

루시가 손에 큼직한 크래커 봉지를 두 개 들고 다가왔다. 그녀 눈에는 조심스런 의문의 빛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고개를 가로로 젓는지 세로로 젓는지에 따라 비극으로 변할 수도 있고 신나는 기분으로도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엄마?

그녀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봉지를 더욱 예쁘게 보이도록 위아래로 흔들어 보였다.

“그건 도로 갖다 놓아라.

루시의 눈에 비극이 서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건 한 개에 5센트 밖에 안 하는 거야. 그 꼬마들도 오늘은 일을 많이 했거든.

“그래.

루시의 눈 속에 흥분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래라.

루시는 돌아서자 그대로 달아났다. 문간까지 가는 도중에 윈필드와 마주쳤다. 그를 억지로 끌고 어두운 바깥으로 나갔다.

존 삼촌은 손바닥 부분에 노란 가죽을 대어 만든 천막 천으로 된 장갑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걸 끼어보더니 벗어서 도로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는 슬슬 술이 있는 진열장 쪽으로 가더니 병에 붙은 상표딱지들을 열심히 뜯어보았다. 어머니의 눈이 그쪽으로 갔다.

“여보.” 그녀는 부르면서 고개로 삼촌 쪽을 가리켰다.

아버지가 어슬렁거리고 삼촌 쪽으로 다가갔다.

“술 생각이 나는 모양이지?

“아니야“

“목화 일이 끝날 때까지만 좀 기다려.” 아버지가 말했다.

“그 다음에는 곤드레만드레가 되도록 실컷 마셔라.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어.” 존 삼촌이 말했다.

“나는 일도 잘하고 잠도 잘 자니까 요사이는 꿈도 안 꾸는군.

“저 술병들을 쳐다보고 있기에 물어본 거야.

“술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참 이상한 일이군. 나는 필요도 없는 물건들을 사고 싶단 말이야. 저 안전면도 같은 거나 저 위에 있는 장갑 같은 것을 사고 싶구먼. 값도 참 싸고 좋단 말이야.

“장갑을 끼고 어떻게 목화를 따려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건 나도 알아. 또 내겐 안전면도 같은 건 필요도 없는 물건이야. 물건들이 저렇게 진열되어 있으면 필요하든 안 하든 간에 괜히 사고 싶어진단 말이야.

어머니가 불렀다.

“자, 인제들 가세요. 살 것은 다 샀어요.

그녀는 보따리를 하나 들고 있었다. 존 삼촌과 아버지도 각각 보따리를 들었다. 밖에서 루시와 윈필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고 입에는 크래커를 하나 가득 집어넣어 볼때기가 불룩하게 불거져 나와 있었다.

“저녁밥은 다 먹었군.” 어머니가 말했다.

사람들이 화차 캠프로 밀려들었다. 천막들이 불을 켰다. 스토브 파이프에서 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조드 가족은 사닥다리 발판을 올라가 끝 칸 자기네 집으로 들어갔다. 로자샤안은 스토브 위의 상자에 걸터앉아 불을 피우고 있었다. 양철 스토브는 불에 달아 검붉은 술 빛으로 변했다.

“우유 사 오셨어요?” 그녀가 물었다.

“그래, 여기 있다.

“어서 이리 주세요. 아까 점심때 먹고 지금까지 한 모금도 못 먹었어요.

“넌 그게 무슨 약이라도 되는 줄 아는구나.

“그 간호사가 그랬어요.

“감자 다 해놓았니?

“저기 있어요. 껍데기를 다 벗겨 놓았어요.

“그걸 기름에 튀겨야겠다.” 어머니가 말했다.

“돼지고기 불고기도 가져왔다. 감자를 새로 사온 프라이팬에 썰어 놓아라. 그리고 옥수수가루를 좀 넣고, 남자들은 다 나가서 몸이나 씻고, 돌아올 때 물이나 한 양동이 길어 오세요. 루시하고 윈필드는 어디 갔니? 걔들도 씻어야 할 텐데, 그놈들은 크래커 봉지를 하나씩 가졌거든.” 어머니가 로자샤안에게 말했다.

“한 놈이 하나씩을 차지했어.

남자들이 시냇가로 씻으러 갔다. 로자샤안은 감자를 썰어서 프라이팬에 집어놓고 칼끝으로 뒤적거렸다. 갑자기 천막이 열어 젖혀졌다. 땀을 흘리는 넓적한 얼굴이 저쪽 칸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드 부인, 오늘은 어떠세요?

어머니가 몸을 돌렸다.

“아! 웨인라이트 부인, 안녕하세요? 오늘은 좋았었어요. 3달러 50센트나 했지요. 정확하게 3달러 57센트예요.

“우리는 4달러나 했답니다.

“그러시겠지요.” 어머니가 말했다.

“일손이 많으시니까.

“그래요 조나스도 이제 다 컸더군요. 어머, 돼지고기를 하시는군요.

문간에서 윈필드가 기어 들어왔다.

“엄마!

“떠들지 마라. 네에, 우리 집 남자들은 돼지불고기를 잘 먹어요.

“우리는 베이컨을 하고 있는데요.” 웨인라이트 부인이 말했다.

“여기까지 냄새가 나지 않으세요?

“아뇨? 여기서 옥수수가루에 감자를 튀기고 있으니까 아무 냄새도 못 맡겠는데요.

“아이고, 너무 타고 있네요.” 웨인라이트 부인이 소리치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엄마.” 윈필드가 말했다.

“왜 그러니? 너 크래커 많이 먹어서 배 아프니?

“엄마, 루시가 말을 해버렸어.

“무슨 말을 했어?

“큰형 말을 했어.

어머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

그러면서 그녀는 어린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얘야, 루시가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했니?

윈필드는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조금 물러서면서 말했다.

“조금밖에 말하지 않았어.

“윈필드야, 무어라고 했는지 어서 예기해 보아라.

“루시는 자기 크래커를 다 먹지 않고 조금 가지고 있었어. 한 개씩 꺼내 한 조각씩 깨물어 먹었어. 그러면서 자꾸 약을 올렸어. ‘너도 다 안 먹고 남았으면 좋겠지?’ 그렇게 약을 올리는 게 루시 버릇이야.

“윈필드야!” 어머니가 물었다.

“어서 말해 봐.

그녀는 근심스럽게 커튼 쪽을 돌아보았다.

“얘, 로자샤안, 너 가서 웨인라이트 부인하고 얘기 좀 해라. 우리 얘기 들을라.

“이 감자는 어쩌고요.

“내가 보마. 어서 가라. 저기서 저렇게 듣고 있는 게 싫다.

색시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늘어진 범포를 돌아갔다.

어머니가 말했다.

“자, 윈필드야, 어서 말해 봐라.

“아까 말했잖아? 조금씩 약을 올리면서 먹었어. 한 개를 두 조각으로 잘라서 오래오래 먹었어.

“빨리빨리 말해.

“그때 다른 애들이 몰려와서 빼앗아 먹으려고 했어. 그런데 루시는 조금씩 야금야금 먹기만 하고 애들한테 조금도 안 주었어. 그러니까 애들이 약이 올랐어. 한 애가 루시의 봉지를 잡아챘어.

“윈필드야, 그 다음 얘기를 어서 해보아라.

“지금 하는 거야.” 그가 말했다.

“루시도 화가 나서 걔를 쫓아갔어. 그래서 한 애를 두들겨 주고 또 다른 애를 두들겨 주었어. 그러니까 다른 큰 여자애가 와서 루시를 때렸어. 루시를 세게 때렸어. 그래서 루시가 울면서 큰오빠를 데려온다고 했어. 큰오빠 데려다가 죽여 버리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 큰애도 ‘그래라.’고 하면서 자기도 큰오빠가 있댔어.

윈필드는 말을 하면서 숨을 헐떡였다.

“그러면서 둘이 다시 싸웠어. 큰 애가 또 한 번 루시를 세게 때렸어. 그러니까 루시는 큰오빠를 데려다가 그 큰애 오빠도 죽여 버릴 거라고 했어. 그러니까 큰 애는 자기네 오빠가 우리 오빠를 죽이면 어쩔 테냐고 대들었어. 그러니까, 루시는 우리 오빠는 벌써 사람을 둘이나 죽였다 했어. 그랬더니 그 큰애가 루시보고 ‘아이고, 이 깜찍한 거짓말쟁이야!’ 하니까, 루시가 ‘우리 오빠는 사람을 죽여서 지금 숨어있는데 너의 오빠도 죽일 거야.’라고 대들었어. 그러면서 서로 욕하고 돌멩이를 던지고 했어. 그 큰애가 막 좇아오기에 나는 집으로 도망쳐 온 거야.

“오, 하느님, 이를 어쩌나!” 어머니가 탄식을 발했다.

“오오, 구유에 누워 계신 우리 주 예수님! 우리는 어쩌면 좋아요!

그녀는 이마에 손을 얹고 눈을 비볐다.

“이걸 어쩌면 좋다니?

지글거리는 스토브에서 감자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서 감자를 뒤집어 놓았다.

“로자샤안!” 어머니가 불렀다.

딸이 커튼 옆에 나타났다.

“이리 와서 저녁 좀 보아라. 그리고 윈필드야, 너 나가서 루시를 찾아 가지고 데려오너라.

“루시 데려오면 때려 줄 거야, 엄마?” 윈필드가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

“아니, 안 때려 줄 거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어쩌다 그런 소리를 했다니? 때려 준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니? 어서 뛰어가서 루시를 찾아가지고 데려오너라.

윈필드는 문 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사닥다리 판자 위에서 돌아오고 있던 아버지와 형과 존 삼촌을 만나자, 어른들이 들어오도록 한쪽으로 비켜섰다.

어머니가 가만히 말했다.

“여보, 잠깐 내 말 좀 들어 봐요. 루시가 다른 애들한테 톰이 숨어 있다는 얘기를 했다는군요.

“뭐라고?

“그랬대요. 싸움을 하다가요.

“고 망할 년이!

“아녜요,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런 거예요. 이거 보세요.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계세요. 내가 가서 톰을 찾아 그 얘기를 해야겠어요. 가서 조심하라고 일러주어야겠어요. 여기 꼭 지키고 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살피세요. 먹을 것도 좀 갖다 주어야겠어요.

“그러구려.” 아버지가 찬성했다.

“당신, 루시보고는 말도 하지 마세요, 내가 타이를 테니.

그때 윈필드가 루시를 앞세우고 돌아왔다. 루시는 몸이 더러웠다. 입은 찐득거렸고 코에서는 아직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부끄럽고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윈필드는 의기양양해서 뒤를 따라 왔다. 루시는 사나운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한쪽 구석에 가서 등을 대고 앉았다.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나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내가 엄마한테 다 일렀다.” 윈필드가 말했다.

어머니는 양철접시에 고기조각 몇 개와 감자를 담고 있었다.

“이놈, 시끄럽다, 윈필드!” 그녀가 말했다.

“루시를 더 괴롭게 하면 안 된다.

루시가 갑자기 방을 가로질러 가더니 어머니 몸을 부둥켜안고 어머니 배에 고개를 파묻었다. 흐느낌을 억지로 참느라고 몸이 온통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애를 떼어 놓으려고 했으나 꼭 달라붙은 그녀 손가락이 놓아 주지를 않았다. 어머니는 어린애 뒷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어깨를 다독거려 주면서 말했다.

“쉬잇, 시끄럽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한 거다.

루시는 눈물과 피로 더럽게 얼룩이 진 얼굴을 치켜들었다.

“애들이 내 크래커를 훔쳐 갔어.” 그녀가 울부짖었다.

“그 개 같은 년이 나를 때렸어.

그녀는 다시 억센 소리를 내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조용히 해!” 어머니가 말했다.

“그런 소리 하면 안 돼. 인제 그만둬. 엄마는 인제 갈 거다.

“엄마, 왜 루시를 안 때려 주는 거야? 루시가 크래커를 가지고 약을 올리지만 않았으면 그런 일도 안 일어났을 거야. 루시 좀 때려 줘, 엄마.

“이놈, 너는 네 일이나 해.” 어머니가 사납게 말했다.

“너도 좀 맞아야겠다. , 루시야. 엄마 좀 놓아라.

윈필드는 둘둘 말아 놓은 매트리스 쪽으로 가서 얄궂은 표정을 하고 시무룩하게 가족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적당히 방어태세를 취했다. 루시가 기회만 있으면 대들어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시는 말도 없이 기가 죽어 한쪽 구석으로 가버렸다.

어머니는 양철접시에 신문지를 덮었다.

“내가 얼른 다녀오마.” 그녀가 말했다.

“나중에 갔다 와서 먹지요. 지금은 아무것도 못 먹겠어요.

어머니는 열린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몸을 가누고서 사닥다리 발판을 걸어내려 갔다.

화물차들이 놓여 있는 시냇가 쪽으로는 천막들이 옹기종기 펼쳐져 있고 밧줄들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다닥다닥 붙어 서있었기 때문에 천막의 말뚝에 다른 천막의 밧줄이 같이 걸리기도 했다. 천막 천을 통해서 불빛이 새어 나왔고 굴뚝마다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문간에 나와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있었다. 어린애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어머니는 자세를 단정히 하고 천막들이 늘어선 사이를 걸어 나갔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았고, 지나갈 때마다 “안녕하세요, 조드 부인?” 하는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무얼 가지고 가세요?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빵을 좀 답례로 보내려고요.

드디어 그녀는 천막 끝에까지 이르렀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캠프장에는 밝은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은은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따금씩 사나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연기 냄새가 공중을 뒤덮었다. 누군가 하모니카를 조용히 불고 있었는데, 효과를 내기 위해 같은 소절을 반복해서 불어댔다.

어머니는 시냇가의 버드나무 숲속으로 접어들었다. 그녀는 오솔길을 벗어나서 혹시 누가 뒤라도 밟아 오지 않나 해서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한 남자가 바지 멜빵을 올리고 바지 앞 단추를 채우면서 캠프 쪽을 향해 오솔길을 걸어내려 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남자는 그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쳐 갔다. 그녀는 한 5분쯤 기다렸다가 다시 일어나서 오솔길 위에 기어올라 시내를 따라 조용히 걸어갔다. 하도 조용히 걸었기에 버드나무 잎을 밟고 걷는 자신의 걸음 소리보다도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오솔길과 시내는 왼쪽으로 굽었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서 국도 쪽으로 접근했다. 희끄무레한 별빛 속에서 그녀는 둑과 배수구의 둥그렇고 시커먼 구멍을 볼 수가 있었다. 거기에 그녀는 언제나 먹을 것을 갖다 놓곤 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구멍 속에 접시를 놓고 거기에 있는 빈 접시를 집어왔다. 그녀는 버드나무 사이를 기어서 수풀 속으로 들어가 앉아 잠시 기다렸다. 나무 덩굴이 얽힌 틈으로 그녀는 배수구의 시커먼 구멍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꼭 죄고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 안 가서 수풀 속은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쥐들이 살금살금 나뭇잎 위를 기어 다녔다. 스컹크 한 마리가 겁도 없이 성큼성큼 오솔길을 따라내려 오면서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바람이 버드나무를 살살 흔들고 지나갔다. 마치 버드나무 가지들을 만져 보는 듯했다. 노란 버들잎들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닥치더니 나뭇가지들을 마구 흔들어 잎사귀들이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렸다.

어머니는 머리 위와 어깨 위에 떨어지는 잎사귀들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늘 위에는 두툼하고 시커먼 구름장이 움직여 가면서 별들을 가렸다. 굵은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며 낙엽 위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었고, 구름은 자꾸 밀려가 가렸던 별들을 다시 드러내 보였다. 어머니는 몸을 떨었다. 바람이 불고 지나간 다음 수풀은 다시 조용해졌지만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는 시내를 따라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저 뒤쪽 캠프에서는 가냘픈 바이올린 소리가 곡조에 맞춰 삐삐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왼편 아주 멀리에서 살금살금 나뭇잎을 밟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갑자기 긴장했다. 무릎을 풀고 고개를 돋우며 열심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움직이는 소리가 멎었다가 다시 한참만에야 들려 왔다. 덩굴 하나가 마른 잎사귀 위에서 거친 소리를 냈다. 어머니는 시커먼 그림자 같은 것이 빈터에 기어들어 배수구 안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배수구 구멍이 잠시 흐려지더니 그 그림자 같은 모양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불러 보았다.

“톰!

그 그림자는 까딱도 않고 서있었다. 하도 조용히 낮은 자세로 서있었기 때문에 나무 그루터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다시 불러 보았다.

“톰, , 톰아!

그러자 그림자가 움직였다.

“어머니세요?

“바로 이쪽이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아들 쪽으로 걸어 나갔다.

“어머니는 오시지 않아야 하는데.

“너를 꼭 좀 만나야 하겠기에 왔다, . 너한테 할 말이 있다.

“여기는 길에서 너무 가까워요.” 그가 말했다.

“누가 지나갈지도 몰라요.

“너 거처라도 하나 만들어 두지 않았니?

“만들어 놓았어요. 하지만, 그러다가 누가 어머니하고 나하고 같이 있는 것을 보기라도 하면 가족들이 전부 골치 아프게 될 거예요.

“그래도 가야겠다.

“그럼 따라오세요. 조용히 오세요.

그는 작은 시내를 건넜다. 물속을 아무렇게나 디디고 걸어갔다. 어머니도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수풀을 뚫고 나가 수풀 건너 쪽에 있는 들로 나서더니 갈라놓은 밭을 따라 걸어갔다. 까맣게 물이 들어가고 있는 목화나무 줄기가 땅바닥에 깔려 거칠게 보였고 목화다래가 몇 개씩 줄기에 붙어 있었다. 밭 가장자리를 따라 한 4분의 1마일 가량 걸은 다음 그는 갑자기 수풀 속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리고 커다란 산딸기 수풀언덕에 다가서더니 몸을 앞으로 굽혀 덩굴로 덮어 놓은 씌우개를 잡아 젖혔다.

“기어 들어와야 해요.” 그가 말했다.

어머니는 손과 무릎으로 기어 들어갔다. 바닥에서 모래가 만져졌다. 그러자 언덕의 깜깜한 내부가 의외로 몸에 벽이 스치지 않을 정도로 넓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땅바닥에는 톰의 담요가 깔려 있었다. 그는 덩굴 덮개를 다시 제자리에 덮었다. 굴속은 완전히 깜깜했다.

“어머니, 어떤 쪽에 계세요?

“여기, 바로 이쪽이다, 가만가만 얘기해라, .

“걱정 마세요. 그동안 꼭 토끼처럼 살아왔어요.

그녀는 아들이 접시에 담은 것을 푸는 소리를 들었다.

“돼지불고기하고 감자 튀긴 거다.” 그녀가 말했다.

“아이고, 아직도 뜨뜻하네요.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그가 고기를 물어뜯고 씹어 삼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기는 아주 훌륭한 은신처예요.” 그가 말했다.

어머니가 근심스럽게 말했다.

“얘, . 루시가 네 얘기를 했단다.

톰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루시가요? 왜 그런 얘기를 했대요?

“그건 걔가 잘못한 건 아니더라. 애들하고 싸우다가 큰오빠가 와서 너희들 오빠를 때려 줄 거라고 했단다. 애들이 하는 짓이 그렇잖니. 그러다가 안 되니까 루시는 제 오빠가 사람을 죽이고 숨어 있다고 했단다.

톰은 킬킬거렸다.

“나도 어렸을 때에는 언제나 존 삼촌을 팔았지만 삼촌이 한 번도 다른 애들을 때려 주지 않더군요. 그건 그냥 애들이 하는 소리니까요, 아무 상관없어요.

“아니, 그렇지 않단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 어린애들이 사방에 나발을 불고 다니면 사람들이 다 듣게 되고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퍼뜨리게 되면 결국 수색을 나오게 될지도 모르잖니? , , 넌 다른 데로 가서 피해야 되겠다, 아무래도.

“그러니까 내가 늘 그랬잖아요? 나는 어머니가 그 배수구에다 무얼 갖다 놓는 것을 사람들이 볼까봐 늘 걱정이에요.

“나도 안다. 하지만 나는 너를 가까이 있게 하고 싶어서 그랬다. 난 네가 걱정이 되어 죽겠다. 너를 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지금도 못 보겠구나. 그래 네 얼굴은 좀 어떠니?

“빨리 낫고 있는 중이에요.

“좀 바싹 와봐라. 어디 좀 만져보자, . 이쪽으로 와봐라.

그는 가까이 기어왔다. 더듬거리는 그녀 손이 그의 머리에 와 닿았다. 어둠속에서 그녀의 손이 그의 코 아래를 더듬어 내려갔다. 그리고 왼쪽 뺨을 만졌다.

“상처가 아주 심하구나, . 그리고 코가 아주 구부러졌잖니?

“오히려 잘되었는지도 몰라요. 인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내 지문만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돌아앉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쉿!” 그녀가 말했다.

“저게 무슨 소리냐?

“그건 바람 소리예요, 어머니. 바람이라고요.

질풍이 불어 닥쳤다. 바람이 지나가면 나뭇잎들은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앉으면 말했다.

“얘야, 다시 한 번 만져 보자. 하도 깜깜하니까 갑자기 장님이 되어 버린 것 같구나. 손가락으로밖에 만져 볼 수가 없지만 그래도 좀 기억해 두어야겠다. 너는 다른 데로 피해야 한다, .

“그래요.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오늘은 벌이가 괜찮았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동안 돈을 조금씩 감추어 놓았다. 네 손 좀 이리 내밀어라. 여기 7달러가 있다.

“어머니, 돈은 필요 없어요.” 그가 말했다.

“나는 잘 지낼 거예요. 걱정 없어요.

“손을 이리 내보라니까, . 네가 돈을 안 받으면 나는 잠도 못 잘 것이다. 너는 버스나 아무거나 타고 다른 데로 가거라. 300마일이나 400마일쯤 아주 먼데로 가야 한다.

“돈은 필요 없어요.

“톰!” 그녀가 무섭게 불렀다.

“너 이 돈을 받아라. 내 말 들리니? 너는 어미한테 괴로움을 끼칠 권리가 없다.

“어머니, 이건 떳떳하지 않아요.

“나는 네가 어떤 큰 도시 같은 데라도 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로스앤젤레스 같은 데라도 말이다. 그런 데라면 너를 찾지도 않을 거다.

“으음.” 그가 말했다.

“이거 보세요, 어머니. 나는 진종일 그리고 밤새 혼자 숨어 살아왔어요. 누구 생각을 해왔는지 아세요? 케이시예요! 그 사람은 말을 참 많이 했어요. 그래서 귀찮게도 생각했지요. 그런데 요새는 그 사람이 하던 말이 자꾸 생각이 나요. 그 말이 다 기억나거든요. 한번은 그이가 광야에 자기의 영혼을 찾으러 뛰쳐나갔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의 영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단지 자기는 커다란 영혼의 극히 작은 일부만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일부도 다른 나머지의 모든 영혼과 함께 더불어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까 광야 같은 곳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되다는 거예요. 그 얘기가 어째서 기억에 남는지 참 이상하거든요. 그때는 별로 열심히 듣지도 않은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사람은 혼자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었지.” 어머니가 말했다.

톰이 말을 이었다.

“한번은 성경을 줄줄 외더군요. 그런데 그게 하나도 성경 같지가 않았어요. 그걸 두 번씩이나 외우기에 나도 외워 버렸어요. 전도서의 한 구절이래요.

“그게 어떤 구절이니?

“이런 거예요. ‘두 사람은 한 사람보다 낫다. 일의 대가를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가 쓰러진다 해도 다른 하나가 그를 일으켜 줄 것이다. 그러나 홀로 있는 자가 쓰러질 때에는 슬픈 일이다. 그는 자기를 일으켜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전도서 제 4 910

).’ 이게 그 구절의 일부예요.

“더 해보아라.” 어머니가 말했다.

“어서 계속해 봐라.

“조금만 더 할게요. ‘또한 둘이서 같이 누우면 그들은 따뜻하리라. 그러나 홀로 누우면 어찌 따뜻하겠는가?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공격을 받으면 둘이 힘을 합해 싸울 것이다. 세 겹으로 꼬은 줄은 쉽사리 끊어지지 않으리라(위와 같음, 1112).'

“그게 성경이니?

“케이시가 그랬어요. 성경이라고. 전도서의 한 부분이래요.

“쉿, 저게 무슨 소리냐?

“아무것도 아녜요. 그건 바람 소리예요. 나는 인제 바람 소리를 잘 알아요. 그리고 어머니, 나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성경의 대부분은 우리가 늘 같이 지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더군요. 돈 한 푼 없어도 그저 되어가는 대로 맡겨 두면 돼요. 요다음에 죽으면 금 접시에 담은 아이스크림을 먹게 되니까요. 그리고 아까 그 전도서에서도 그랬지만 두 사람이 같이하면 일의 대가를 더 받는다잖아요?

“얘, .” 그녀가 말했다.

“너는 지금부터 무얼 할 셈이냐?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 관청 캠프 생각을 해보았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자치적으로 생활을 해나가고, 또 싸움이 벌어지면 그것도 자기들 스스로 나서서 해결하고 하는지 말예요. 거기에는 총을 휘두르고 다니는 경찰도 없었잖아요. 그런데도 어떤 경찰이 만들어준 것보다 더 질서를 유지해 나가거든요. 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못 하는지 그걸 생각해 보았어요.

“얘, .” 어머니가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 너는 무얼 할 생각이냐고?

“케이시가 하던 그런 일을 하겠어요.” 그가 말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를 죽이지 않았니?

“그래요.” 톰이 말했다.

“아저씨가 머리를 빨리 숙이지 않아 죽었어요. 그 사람은 아무것도 법을 어긴 일은 없었어요. 어머니, 나도 생각을 해보았어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돼지같이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기름진 땅이 그냥 묵혀 있고 한 사람이 백만 에이커씩 차지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 훌륭한 농부들은 수십만 명씩 굶어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어요. 그래서 우리도 다 같이 입을 모아 고함을 질러본다면 어떨까 하고 말예요. 그 후퍼농장에서는 사람들 수가 너무 적어서 그랬지만…”

어머니가 말했다.

“그놈들이 너를 쫓아다니고, 잡아다가 그 후로이드처럼 너를 죽여 버릴 것이다.

“여하튼 그놈들은 나를 쫓아다닐 테지요.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같은 모든 사람들을 좇아다니는 놈들이니까요.

“너, 누구를 죽이려는 건 아니지, ?

“아녜요, 나도 오래 생각해 보았어요. 여하튼 내가 범법자인 이상 나는 그럴지도 모르지요. 제기랄, 그건 아직 모르겠어요. 어머니, 인제 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제발 내 걱정은 그만두세요.

칠흑같이 깜깜한 동굴 속에서 그들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네 소식은 어떻게 들을 수 있겠니? 그놈들이 너를 잡아 죽이면 내가 어떻게 알겠니?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알겠니?

톰이 불안하게 웃었다.

“그 케이시가 말했듯이 사람은 자기 자신의 영혼이 없는지도 몰라요. 단지 커다란 덩어리의 한 조각에 불과하겠지요. 그리고…”

“그리고 무어냐, ?

“그리고 그 뒤는 상관없어요. 나는 어둠 속에서 아무데나 돌아다니겠어요. 아무데나 다 가보겠어요. 어머니가 찾으시는 데는 아무데나 다 가있겠어요. 배고픈 사람들이 먹기 위해 싸우는 그런 곳에는 어디든지 가있겠어요. 경찰 녀석들이 선량한 사람들을 두들기는 그런 곳이라면 말예요. 케이시가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분노에 못 이겨 미쳐 날뛰며 고함을 치는 그런 데에 가있겠어요. 굶주린 어린아이들이 저녁밥을 먹고 웃고 있는 그런 데에 가겠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자기들 손으로 가꾼 음식을 먹고 자기들 손으로 지은 집에서 살고 있는 그런 곳에 가있겠어요. 아시겠어요? 그러다보니 나도 케이시 같은 얘기를 늘어놓고 있군요. 그 사람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어떤 때는 그 사람을 실제로 보는 것 같아요.

“나는 잘 모르게다.” 어머니가 말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구나.

“나도 잘 몰라요.” 톰이 말했다.

“그건 단지 내가 그동안 생각해 오던 것들이에요. 사람이 활동을 안 하면 공상만 많이 하게 되는가 보지요? 어머니, 이제 돌아가 보세요.

“그럼, 이 돈을 받아라.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받지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톰, 모든 일이 다 끝난 뒤에는 너도 집에 돌아오겠지? 우리를 찾을 수 있겠니?

“그럼요.” 그가 말했다.

“인제 그만 가세요. , 내 손을 잡으세요.

그는 그녀를 입구 쪽으로 이끌고 나갔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는 덩굴을 한쪽으로 치우고 그녀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저 밭을 죽 올라가다보면 끝에 플라타너스가 나와요. 거기에서 시내를 건너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어머니.

“잘 가거라.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는 후딱 걸어가 버렸다. 그녀는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으나 울고 있지는 않았다. 수풀을 헤치고 걸어가면서 그녀는 아무렇게나 나뭇잎을 밟으며 요란하게 걸어갔다. 그녀가 걷는 사이에 희미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굵직한 빗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지면서 나뭇잎 위에 탁탁 소리를 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수풀 속에서 어머니는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있었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고 덩굴로 가려진 언덕 쪽으로 서너 발자국 돌아가더니 다시 몸을 휙 돌려서 화물차 캠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배수구 쪽으로 곧장 나가 거기에서 길 위로 올라섰다. 이제 비는 지나갔으나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그녀의 뒤에 사람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그녀는 긴장하며 돌아보았다. 플래시 불빛이 깜박거리면서 길바닥 위를 비추었다. 어머니는 다시 돌아서서 집을 향해 걸었다. 조금 있으니 한 남자가 그녀를 가까이 따라잡았다. 그는 정중하게 플래시 불빛을 땅바닥에 비출 뿐 그것을 상대방의 얼굴에 들이 대지는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그가 말했다.

어머니도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비가 좀 올 모양이군요.

“비가 오지 말아야 할 텐데요. 비가 오면 일을 못 하게 되니까요. 우리는 목화 따는 일을 좀 더 계속해야 할 텐데요.

“저도 목화를 따야 할 텐데요. 아주머니는 이 캠프에 사세요?

“네.

두 사람은 발자국 소리가 함께 어울려 길바닥을 두드렸다.

“저는 목화밭이 한 20에이커쯤 있습니다. 좀 늦기는 했습니다만 인제 곧 따야 하게 생겼지요. 그래서 한번 나가 목화 딸 사람을 좀 구하려던 참입니다.

“일꾼은 얼마든지 구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이제 철도 거의 끝나 가니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저희 밭은 저쪽으로 한 1마일 정도만 가면 있습니다.

“우리 집에는 여섯 사람이 있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남자 셋하고 저하고 또 애들이 둘 있지요.

“이 길을 따라 한 2마일 가량 안내 표시를 해놓을까 하는데요.

“내일 아침에 찾아가겠습니다.

“비가 오지 말아야 할 텐데요.

“그렇군요.” 어머니가 말했다.

20에이커라면 얼마 오래 걸리지 않겠는데요?

“되도록 빨리 끝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목화는 좀 늦된 것이 돼서. 얼마 전까지도 열매가 안 맺더군요.

“그런데 얼마씩 주시나요?

90센트 드립니다.

“우리가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내년에 가서는 품삯도 75, 6센트로 떨어질 거라고 하던데요?

“그런 얘기들이 있더군요.

“그러면 문제인데요.

“그렇지요. 우리 같은 영세 농가에서는 일제 아무것도 못 해먹겠어요. 조합에서 품삯을 정해 버리고 우리는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답니다. 말을 안 들으면 그나마 땅이 날아가는 판이니까요. 그래서 우리 같은 송사리들은 골탕만 먹기가 일쑤지요.

그들은 캠프까지 다 왔다.

“그럼 내일 가겠습니다.” 어머니가 말했다.

“여기는 별로 일도 안 남았으니까요.

그녀는 맨 끝 화차칸으로 가서 사닥다리 발판을 올랐다. 희미한 등잔불이 화차칸에 침침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아버지와 존 삼촌과 한 나이 많은 남자가 벽 쪽에 등을 돌리고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저녁 잡수셨어요, 웨인라이트 씨?

그는 곱게 생긴 얼굴을 쳐들었다. 그의 이마 아래엔 눈이 움푹 들어가 있고 청백색 머리카락은 아주 고왔다. 은은한 고색(古色)을 띤 은색 수염이 그의 턱과 입가를 뒤덮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아주머니?” 그가 말했다.

“내일 일자리가 생겼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북쪽으로 1마일쯤 가면 돼요. 20에이커쯤 된대요.

“트럭을 타고 가는 게 낫겠군.”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딸 테니까.

웨인라이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리도 좀 딸 수 있을까요?

“그럼요. 저는 그 사람하고 잠깐 같이 오면서 이야기를 해보았어요. 일꾼을 구하러 오는 길이라던데요.

“목화는 이제 거의 끝물이지요. 얼마 안 남았어요. 여기도 인제 재탕이고요. 두 번째 따는 걸 가지고는 품삯도 안 되지요. 첫 번째 딸 때 어찌나 깨끗이 따버렸는지.

“아저씨 네도 우리하고 같이 타고 가시지요.” 어머니가 말했다.

“휘발유 값만 같이 부담하기로 하면 되잖아요?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아주머니.

“양쪽 집에 다 좋지요, .”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가 말했다.

“이 웨인라이트 씨가 한 가지 걱정이 있다고 하시는군 그래. 그 얘기를 지금 하고 있던 중이야.

“무슨 일이신데요?

웨인라이트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우리 집 애기라는 년 말이에요.” 그가 말했다.

“인제 다 큰 애지요. 열여섯이나 되었으니까 클 대로 다 컸지요.

“그 애기라는 따님, 참 예쁘게 생겼던데요.” 어머니가 말했다.

“얘기를 끝까지 들어봐.”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데 걔하고 댁의 아드님 앨하고 밤마다 같이 나다닌답니다. 그런데 애기란 년도 인제 다 크고 몸도 건강해서 어디 마땅한 데 시집을 보내야지 그냥 두었다가는 안 되겠더군요. 여태 우리 집엔 그런 문제가 전혀 없었는데요. 거기다가 우리 집사람하고 나하고 이렇게 형편이 어렵게 되니까 더 걱정이 되는군요. 그 계집애가 무슨 일이라도 저질러 버리면 어쩌나 해서 말입니다.

어머니는 매트리스를 내려 깔고 그 위에 앉았다.

“걔들이 지금 같이 나갔나요?” 그녀가 물었다.

“늘 나다니지요.” 웨인라이트가 말했다.

“밤마다 나간답니다.

“으음, 그렇군요. 우리 집 애도 나쁜 애는 아니지만요. 요새는 갑자기 어찌나 거만을 떠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애는 아주 착한 애예요. 그만큼 착한 애도 없지요.

“아니, , 제가 댁의 아드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앨을 무척 귀엽게 생각하지요. 하지만 우리 집사람하고 나하고 걱정하는 건, 우리 애도 다 큰 색시인데, 혹시 댁에서 다른 데로 떠나 버린 다음 우리 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해서 말입니다. 우리 집안에는 그런 수치스러운 일은 아직 없었지요.

어머니가 부드럽게 말했다.

“댁에 그런 수치를 끼쳐 드리지 않도록 조심할 테니까 걱정하시지 마세요.

그가 벌떡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얘기도 이제 다 큰 처녀입니다. 아주 얌전한 년이지요. 앨만큼이나 얌전하고 착한 앱니다. 우리가 걱정만 하지 않게 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딸애가 나쁜 것도 아니지요. 걔도 이제 다 컸으니까요.

“저희 집 아빠가 앨한테 얘기하도록 하지요.” 어머니가 말했다.

“안하시겠다고 하면 저라도 하겠습니다.

웨인라이트가 말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커튼 옆으로 돌아나갔다. 그가 자기네 집으로 가 얘기하는 소리가 도란도란 들렸다. 얘기 결과를 전달하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더니 말했다.

“여보, 당신하고 서방님하고 이리 좀 와서 앉으세요.

쭈그리고 앉았던 아버지와 존 삼촌이 육중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어머니 옆의 매트리스 위에 앉았다.

“애들은 어디 있어요?

아버지가 한쪽 구석에 있는 매트리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루시란 년이 윈필드한테 달려들어 물어뜯었지. 그래서 두 놈들을 눕혀 놓았어. 아마 잠들었을 거야. 로자샤안은 아는 부인이 하나 있다고 하면서 얘기를 하러 나갔어.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보, 톰을 만나고 왔어요.” 그녀가 가만히 말했다.

“그래서 걔더러 멀리 피신하라고 했어요.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존 삼촌은 가슴에다 턱을 떨어뜨렸다.

“달리 도리가 없어.

아버지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 ?

존 삼촌이 고개를 들었다.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이 안 나는군.” 그가 말했다.

“나는 인제 정신을 못 차리겠어.

“톰은 참 착한 애예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변명을 했다.

“아까 내가 앨한테 얘기하겠다고 한 것은 다른 뜻이 아니었어요.

“알고 있어.” 아버지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인제 틀렸어. 하루 종일 옛날에 지내던 일만 생각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단 말이야. 그까짓 고향생각만 하고 있으니, 참 내. 그 가보지도 못할 데를 말이야.

“이 고장이 더 아름답고 더 좋은 곳이에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 나도 알아. 옛날 고향 집의 버드나무가 잎이 다 떨어졌을 것이라는 생각만 하느라고 이 아름다운 고장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는단 말이야. 어떤 때는 우리 집 남쪽 울타리에 뚫린 구멍을 어떻게 때울까 하고 궁리를 한다니까. , 우스운 일도 다 있지. 여자가 나서서 집안일을 다 꾸려 나가니 말이야. 여자가 식구들을 거느리고 이걸 해라, 저쪽으로 가라, 하고 있는 판에 남자라는 건 앉아서 아무 걱정도 안 하고 있으니 말이야.

“여자가 남자보다 집안을 더 잘 바꿀 수도 있어요.” 어머니가 달래듯 말했다.

“여자는 자기의 모든 인생을 품안에 품고 있는 거예요. 남자는 인생을 머릿속으로만 생각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쩌면 내년쯤에는 우리도 정착해서 살 만한 데를 얻게 될 거예요.

“지금 우리는 쥐뿔도 아무것도 없잖아?” 아버지가 말했다.

“오랫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하고 일자리도 없고 농사지은 것도 없고 그러니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어떻게 먹고 살아간다는 거야. 그리고 로자샤안도 이제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면 앞이 캄캄해. 그런 생각을 하기가 싫으니까 자꾸 옛날 일만 생각하게 되나 보지. 인제 우리 인생도 다 끝장이 난 모양이야.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보, 그렇지 않다니까요. 그게 바로 남자가 모르는, 여자만 아는 일이에요. 나도 그런 것을 깨달았어요. 남자는 한 번씩 깡충깡충 뛰면서 살아요. 어린애로 태어나서 어른이 되어 죽잖아요? 그게 한번 뛰는 거지요. 논밭을 얻었다가 잃고, 그것도 한번 뛰는 거예요. 그렇지만 여자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결 같이 흘러가는 물줄기 같은 거예요. 물이 조그맣게 소용돌이치다가 작은 폭포도 이루고 하기는 하지만 결국 강물이니까 끝내 흘러가거든요. 여자는 인생을 그렇게 보는 거예요. 우리는 결코 죽지 않아요. 사람들은 살아 나가게 마련이에요. 조금씩 변하기는 할망정 계속 살아 나가는 것은 변함이 없어요.

“아주머니가 어떻게 알아요?” 존 삼촌이 물었다.

“모든 것을 유지시켜 주는 힘이 뭐지요? 모든 사람들이 피로에 못 이겨서 쓰러지는 것을 막아 주는 것이 무엇이지요?

어머니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한 손으로 다른 손의 반질거리는 손등을 비비더니 오른손 손가락들을 왼손에 깍지 끼웠다.

“말하기는 어렵지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내가 보기에는 제대로 어떤 방향을 향해서 굴러가는 것 같아요. 나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아요. 배가 고픈 것도, 그리고 심지어 병이 드는 것도 말예요. 어떤 사람은 죽지만 나머지 사람은 더 억세고 씩씩해지지요. 당장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 되는 거예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예요.

존 삼촌이 말했다.

“내 처도 그때 그렇게 죽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요.

“하루하루를 사는 거예요.” 어머니가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고향에서도 내년에는 풍년이 들 텐데.” 아버지가 말했다.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바깥 사닥다리 발판을 기어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이윽고 앨이 커튼을 돌아서 들어왔다.

“아, 아직 안 주무셨어요? 다들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그가 말했다.

“얘, .” 어머니가 말했다.

“지금 한참 얘기를 하고 있던 중이다. 이리 와서 앉아라.

“예, 그러세요. 나도 얘기를 하고 싶어요. 이제 곧 집을 나가야 할 것 같아요.

“그건 안 된다. 너는 지금 집에서 필요하다. 왜 꼭 나가야 되겠니?

“저어, 애기 웨인라이트하고 나하고 곧 결혼을 하려고 해요. 그래서 나는 차고에 취직을 해서 얼마 동안은 셋집에 살다가 나중에…”

그는 날카로운 얼굴을 쳐들었다.

“우리는 꼭 그렇게 할 거예요. 아무도 못하게 막을 순 없어요.

모두 그를 응시했다.

“앨!” 드디어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참 기쁘다. 너무나도 기쁘다.

“그래요?

“그야 물론이지. 너는 이제 다 큰 어른이 됐구나. 너도 여자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 나가지는 마라, .

“애기하고 약속을 했어요.” 그가 말했다.

“꼭 가야겠어요. 우리는 지금 이런 생활을 더 이상 못 참겠어요.

“봄까지만 기다려라.” 어머니가 간청했다.

“봄까지만 말이다. 봄까지만 기다려 주지 않겠니? 네가 나가면 트럭은 누가 몰겠니?

“글쎄요…”

웨인라이트 부인이 커튼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얘기 들으셨어요, 벌써?” 그녀가 물었다.

“네에, 지금 막 얘기하고 있는 중이에요.

“어머! 저걸 어쩌지? 케이크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요. 케이크나 아니면 다른 무어라도 하나…”

“네가 커피를 좀 얹어 놓고 팬케이크를 좀 만들어 보겠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시럽이 조금 있어요.

“어머, 그러세요?” 웨인라이트 부인이 말했다.

“아, , 그렇군요. 제가 설탕을 좀 가져올게요. 그 팬케이크에다 설탕을 좀 쳐야지요.

어머니는 나뭇가지를 잘라서 스토브에 넣었다. 저녁을 해먹고 남은 탄 찌꺼기가 나무에 불을 일으켰다. 루시와 윈필드가 마치 껍데기를 벗고 나온 소라게처럼 자리에서 부스스 나왔다. 잠시 그들은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자기들은 아직도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어떤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 그들은 좀 대담해졌다. 루시는 벽에 대지 않고 한 발로 깡충거리면서 문간까지 뛰어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어머니가 사발에 밀가루를 붓고 있는데 로자샤안이 사닥다리 발판을 올라왔다. 그녀는 몸을 힘겹게 가누면서 조심스럽게 걸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얘야, 뉴스가 하나 있다!”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파티를 한판 벌여야겠다. 앨하고 애기 웨인라이트가 결혼을 한단다.

로자샤안은 까딱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그녀는 어쩔 줄을 모르고 어색해서 서있는 앨 쪽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화차 칸 저편에서 웨인라이트 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지금 애기한테 새 옷을 입히고 있어요. 바로 그쪽으로 건너갈게요.

로자샤안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활짝 열린 문 쪽으로 되돌아가서 사닥다리 발판을 내려갔다. 땅바닥에 내려간 그녀는 개울을 향해 가더니 개울가에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그녀는 아까 어머니가 가던 길로 해서 버드나무 숲속으로 들어갔다. 바람은 이제 계속 불었고 나뭇잎들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로자샤안은 무릎을 꿇고 수풀 속으로 깊이 기어 들어갔다. 딸기 덩굴들이 그녀 얼굴을 할퀴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겼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뭇가지들이 그녀 온몸에 와 닿을 때만 그녀는 잠깐 멈춰 섰다. 그녀는 벌렁 자빠져 누웠다. 그녀는 자기 몸뚱이 속에서 아기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불빛도 없는 화차칸에서 어머니가 왔다 갔다 했다. 그녀는 담요를 두로 밀어붙이더니 일어섰다. 열린 문을 통해서 희끄무레한 별빛이 새어들어 왔다. 어머니가 문 쪽으로 나가더니 밖을 내다보고 섰다. 별들이 동쪽 하늘에서 희미하게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버드나무 수풀 위로 바람이 잔잔히 지나갔다. 작은 시냇물 위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거렸다.

캠프 안은 아직 잠이 들어 있었다. 한 천막 앞에서만 불이 타고 있었고, 사람들이 불을 둘러서서 몸을 쬐고 있었다. 그들은 손을 비비면서 새로 일기 시작하고 있는 펄럭거리는 불꽃 쪽으로 돌아설 때는 그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뒤로 돌아서 뒷짐을 지고 섰다. 한참 동안을 어머니는 그렇게 하고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두 손을 몸 앞으로 해 꼭 잡았다. 고르지 못한 바람이 이따금씩 불고 지나갔다. 바람 속에 서리의 찬 기운이 서려 있었다. 어머니는 몸을 떨면서 손을 비볐다. 그녀는 살살 걸어서 방을 돌아와 성냥을 더듬어 찾았다. 등잔 갓을 치켜 올려 심지에 불을 붙인 다음 시퍼런 불빛이 타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불은 노란 곡선을 그리면서 아름답게 비쳐 올랐다. 그녀는 등잔을 스토브 쪽에 옮겨 놓고 작은 버드나무 가지들을 꺾어 불 아궁이 속에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불길이 굴뚝으로부터 솟아올랐다.

로자샤안이 거북하게 몸을 뒤척이더니 일어나 앉았다.

“인제 그만 일어날래요.” 그녀가 말했다.

“방안이 좀 뜨뜻해질 때까지 좀 더 누워 있어라.” 어머니가 말했다.

“아니, 일어날래요.

어머니는 양동이에서 물을 떠 커피 주전자에 붓고 그것을 스토브에 올려놓았다. 옥수수빵을 데우기 위해 기름이 듬뿍 들어 있는 프라이팬을 또 불 위에 올려놓았다.

“왜 속이 언짢으냐?” 그녀가 가만히 물었다.

“좀 나갔다 오겠어요.” 로자샤안이 말했다.

“어딜 나간다는 거니?

“목화를 따러 나가겠어요.

“넌 못 가.” 어머니가 말했다.

“너한테는 너무 멀다.

“아녜요. 갈래요.

어머니는 물에 커피를 알맞게 타고 있었다.

“얘, 로자샤안, 너는 간밤에 팬케이크를 먹을 때에도 없었잖니?

딸은 대답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갑자기 목화를 따겠다는 거냐?

그래도 딸은 대답이 없었다.

“너 앨하고 애기 때문에 그러는 거지?

이번에는 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얘야, 너까지 목화를 딸 필요는 없다.

“갈래요.

“그래, 가거라. 너무 피로하게 하지만 마라. 여보, 일어나세요. 어서 일어나세요.

아버지가 눈을 껌벅이더니 하품을 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그가 신음 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우리가 자리에 든 것이 열한 시는 되었을 거야.

“자, 어서 일어나세요. 다들 가서 세수를 하세요.

화차칸 안의 사람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담요를 걷어차고 꿈틀거려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옷을 꿰어 입었다. 어머니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두 번째의 프라이팬에 담았다.

“어서들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오세요.” 그녀가 명령을 퍼부었다.

화차칸 저편에서 불이 켜졌다. 웨인라이트네 쪽에서도 나뭇가지를 꺾는 소리가 들려 왔다.

“조드 부인!” 하고 부르는 소리가 건너왔다.

“우리도 준비를 하고 있어요. 곧 준비가 다 되겠어요.

앨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일찍 서둘러야 하는 거야?

“다 해보았자 20에이커밖에 없단다.” 어머니가 말했다.

“어서 그쪽에 가보아야 한다. 목화 딸 것도 얼마 안 남았을 거다. 남들이 따버리기 전에 가야지.

어머니는 식구들을 몰아쳐서 옷을 입히고 부랴부랴 아침을 먹였다.

“자 어서 커피를 들어요.” 그녀가 말했다.

“인제 떠나야 해요.

“이렇게 어두운데 어떻게 목화를 따요? 어머니도 참.

“날이 밝을 때쯤 거기에 도착할 거다.

“목화가 좀 젖었을 거예요.

“비가 많이 오지는 않았다. , 어서어서 커피를 마셔라. 그리고 앨, 너는 좀 먼저 나가서 엔진이나 만져 두어라.”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거의 다 되셨어요, 웨인라이트 부인?

“지금 막 먹고 있어요. 금방 되겠어요.

밖에서는 캠프 전체가 기동을 하기 시작했다. 천막마다 문 앞에 불을 피우고 있었고 화차칸 굴뚝마다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앨은 커피 남은 것을 홀짝 들이마셨다. 커피 찌꺼기가 한입 들어왔다. 그는 사닥다리 발판을 내려가면서 그것을 뱉어냈다.

“웨인라이트 부인, 우리는 다 되었어요.” 어머니가 소리쳤다.

그녀는 로자샤안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너는 집에 있어야 한다.

색시가 턱에 힘을 주었다.

“갈래요.” 그녀가 말했다.

“어머니, 나도 가야겠어요.

“너는 목화 포대도 없잖니? 네가 어떻게 포대를 끌겠니?

“어머니, 포대 속에다 집어넣을래요.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를 지켜보마. 의사에게라도 한번 보여 보았으면 좋겠다.

로자샤안은 흥분한 사람처럼 트럭 주위를 왔다 갔다 했다. 그녀는 가벼운 코트를 입고 있더니 그것을 벗어 버렸다.

“담요를 가지고 가거라.” 어머니가 말했다.

“도중에 쉬고 싶으면 몸을 덮어야 할 테니까.

화차칸 뒤에서 트럭의 모터가 드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하겠다.” 어머니가 신이 나서 말했다.

“자, 각자 자기 포대를 챙겨라. 루시야, 엄마가 만들어 준 그 셔츠 자루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가운데 웨인라이트 가족과 조드 가족은 트럭에 기어올랐다. 아주 서서히 희미한 새벽빛이 밝아 오고 있었다.

“왼쪽으로 꺾어라.” 어머니가 앨에게 일렀다.

“조금 가다보면 무슨 표시를 붙여 놓았을 거다.

그들은 어두운 길을 따라 차를 몰았다. 다른 차들이 뒤를 따라왔고, 그 뒤 캠프에서는 자동차들이 발동을 걸고 있었다. 이 집 저 집에서 사람들이 밀려 나와 국도로 차를 몰아 왼편으로 돌고 있었다.

도로 오른편에 서있는 우편함에 마분지 하나 붙어 있었다. 그 위에 크레용으로 써 있는 것이 보였다. ‘목화 따는 일꾼 구함.’ 앨은 출입구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서 뒷마당으로 나섰다. 마당에는 이미 자동차들이 꽉 차있었다. 하얀 곳간 끝에 매달린 전등불이 겨드랑이에 포대들을 끼고 저울 옆에 서있는 남녀 일꾼들을 비추고 있었다. 여자들 가운데에는 포대를 어깨 위에 둘러메고 앞에서 열십자로 걸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찍 온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군.” 앨이 말했다.

그는 트럭을 울타리 쪽에 바싹 끌어다가 세웠다. 두 집 가족들이 차에서 내려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속에 끼었다. 그동안에도 길에서 다른 차들이 계속 밀려와 사람들은 더욱 불어갔다. 곳간 끝 불빛 아래에서 주인이 일꾼들의 이름을 적으면서 한 사람씩 접수하고 있었다.

“홀리라고요?” 그가 말했다.

“호- - 리라. 몇 사람이지요?

“넷입니다. -.

“윌.

“벤튼-.

“벤튼.

“아멜리아-.

“아멜리아.

“클레어-.

“클레어, 다음에 누구지요? 카펜터라고요? 몇 사람이지요?

“여섯입니다.

그는 사람들 이름을 낱낱이 적었다. 장부 왼쪽에는 중량을 기입할 칸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포대가 있으시오. 포대 없는 사람은 여기에 조금 있으니 가져가요. 1달러씩이요.

차들은 계속해서 마당 안으로 밀려들었다. 주인은 양가죽 재킷을 목덜미에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출입구 쪽을 근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이 정도 에이커에 이 많은 사람들이 대들어서 따내면 얼마 오래 걸리지도 않겠는데.” 그가 말했다.

어린애들이 커다란 목화 운반차에 기어올라 철망을 둘러놓은 차 옆 울타리에 발가락을 쑤셔 놓고 있었다.

“거기 다 내려와라!” 주인이 소리를 질렀다.

“어서들 내려와. 그 철망이 다 망가지겠다.

그러자 어린애들은 머쓱해져 말없이 내려왔다. 새벽이 희미하게 밝아 왔다.

“이슬 맞은 무게만큼은 빼야겠는걸.” 주인이 말했다.

“해만 뜨면 좀 달라지겠지만. , 그럼 아무 때나 시작하고 싶으면 시작하시오. 인제 목화가 보일 만큼은 밝았으니.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목화밭으로 나가서 밭이랑을 하나씩 차지했다. 그들은 포대를 허리에 감고 민첩하게 놀려야 할 손가락이 뻣뻣해진 것을 풀기 위해서 손뼉을 쳤다. 동쪽 언덕 위에 해가 물들기 시작했다. 기다랗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이 밭이랑을 따라 움직여 나갔다. 아직까지도 한길에서 차들이 밀려들어 농장 안마당은 사람들로 꽉 차버렸다. 사람들은 양쪽 길가에까지 차를 세웠다. 들판 위를 바람이 매섭게 불고 지나갔다.

“당신들이 도대체 어떻게 알고 모두 찾아왔는지 모르겠소.” 주인이 말했다.

“괜히 엉뚱한 소문이 퍼진 거나 아닌지, . 20에이커는 오전까지도 못 가겠소. 이름이 무어요? 흄이라고요? 몇 명이지요?

사람들은 줄을 지어 들판을 가로질러 나갔고 세찬 서풍이 끊임없이 불어와 일꾼들의 옷을 펄럭이게 했다. 그들의 손가락은 목화다래를 찾아 튀었고 뒤에 질질 끌고 있는 무거운 포대 속으로 날아들었다.

아버지가 같은 줄에 서서 일하고 있는 오른쪽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고향에서 같으면 이런 바람이 불면 꼭 비가 올 텐데요. 비가 내리기에는 서리가 좀 너무 많이 온 모양이지요? 이쪽에 나오신 지 얼마나 되셨소?

그는 지껄이면서도 눈은 아래로만 뜨고 있었다.

옆의 남자도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나는 벌써 한 1년이나 되었나 보오.

“어때요, 비가 올까요?

“그야 알 수 없지요. 모른다고 창피할 것도 없지만 말이오. 일평생 동안 이런 데서 살아온 사람들도 천기는 못 맞추더군요. 일을 하는 도중에 비가 내리면 그런 비는 정말로 퍼붓는 비라더군요. 여기 사람들 말이 그럽디다.

아버지가 얼핏 고개를 들어 서쪽 언덕을 바라보았다. 큼직한 구름장이 바람을 타고 능선가에 떠가고 있었다.

“저 구름이 비를 좀 뿌릴 것 같은데요?

옆의 남자도 힐끗 훔쳐보더니 말했다.

“알 수 없지요.

그러자 그 줄에 있던 사람들 모두 뒤쪽의 구름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몸을 더 아래로 굽혀들어 가면서 목화를 찾아 열심히 손을 놀렸다. 그들은 마치 경주라도 하듯 서로 다투어 목화를 땄다. 시간과 목화의 중량을 다투었고 비를 다투었고 서로 자기들끼리 다투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더 따야 했고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다. 그들은 목화밭 끝까지 갔다가는 새 이랑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어 뛰어 돌아왔다. 이제 그들은 바람을 앞에 안고 따나갔다. 떠오르는 해 쪽을 향해 높게 걸린 잿빛구름이 서서히 움직여 가는 것이 정면에 보였다. 길가에는 더 많은 차들이 몰려들었고 일꾼들이 줄을 지어 쇄도했다. 밭에 깔린 사람들의 줄은 미친 듯이 들판을 누비고 이랑의 끝에 가서 부대의 무게를 달아보고 자기 것에 표시를 하고 중량을 자기들의 수첩에 적어 넣은 다음 다시 새 이랑을 차지하러 달려갔다.

열한 시가 되자 목화밭은 깨끗이 끝장이 나고 일꾼들은 손을 털었다. 옆구리에 철망을 친 운반차들이 역시 철망을 두른 트럭 뒤에 붙들어 매지고 몇 대씩 국도 쪽을 향해서 솜틀 공장으로 몰려갔다. 목화다래가 철망 사이로 삐져나와 엷은 구름처럼 바람에 날렸고 솜털조각들이 길가에 돋아난 잡초잎사귀에 엉겨 붙었다. 일꾼들은 초조하게 마당으로 몰려들어 품삯을 받을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지어 섰다.

“흄 제임스 씨, 22센트. 랠프 씨, 30센트. 조드 토마스 씨, 90센트. 윈필드 씨, 15센트.

돈은 동전으로 둘둘 말아져 있었다. 일꾼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수첩을 꺼내 보면서 품삯을 받았다.

“웨인라이트 아그네스 씨, 34센트. 토빈 씨, 63센트.

사람들이 늘어선 줄은 천천히 움직여 나갔다. 모든 가족들은 말없이 자기들 차에 돌아갔다. 그리고 천천히 차를 몰고 가버렸다.

조드 가족과 웨인라이트 가족은 출입구 쪽이 좀 트이기를 기다렸다. 차에 탄 채 기다리는 사이에 첫 빗방울이 떨어졌다. 앨이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빗방울을 받아 보았다. 로자샤안이 가운데 앉고 어머니가 바깥쪽에 앉았다. 로자샤안의 눈은 다시 빛을 잃고 있었다.

“너는 오지 말았어야 할 걸 그랬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10여 파운드도 제대로 못 따지 않았니?

로자샤안은 불룩하게 불러 오른 자기 배 위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떨더니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딸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어머니가 자기 목화 포대를 펴서 로자샤안의 어깨를 덮어 주고 그녀를 가까이 다가앉게 했다.

마침내 출입구 쪽이 좀 트였다. 앨은 모터를 걸고 국도 위에 올라섰다. 어쩌다가 떨어지는 굵직굵직한 빗방울들이 길바닥 위에 부딪쳤다. 트럭이 달릴수록 빗방울은 더 작아지는 대신 많아졌다. 빗방울이 트럭운전석 지붕 위를 어찌나 세차게 두들기는지 차의 낡은 모터 소리보다도 크게 들렸다. 트럭 짐칸 위에서는 웨인라이트 가족들과 조드 가족이 목화 포대를 펴서 머리와 어깨를 덮고 있었다.

로자샤안이 어머니의 몸속에서 몸을 마구 떨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빨리, 빨리 몰아라! 로자샤안이 오한을 일으켰다, . 빨리 가서 더운물에 담가 주어야겠다.

앨은 쿵쿵거리는 모터에 전속력을 냈다. 화차칸 캠프에 도착해서 그는 트럭을 빨간 차들에 바짝 대어 세웠다. 차가 다 서기도 전에 어머니는 이 사람 저 사람한테 고함을 치고 있었다.

“얘, !” 그녀의 명령이 떨어졌다.

“너하고 아버지하고 존 삼촌하고는 버드나무 숲속에 가서 마른 나무, 죽은 나무 할 것 없이 탈 만한 것은 모조리 긁어 가지고 오너라. 불을 때서 덥게 해야겠다.

“지붕이 새면 어쩌지요.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다. 아직 습기가 많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나무는 많이 있어야 한다. 덥게 때야 하니까 루시하고 윈필드도 데리고 가라. 그 애들도 잔가지는 주울 수 있으니까. 암만 해도 네 누나가 이상하다.

어머니가 내리자 로자샤안도 따라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 무릎이 꼭 죄어들어 그녀는 트럭 발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뚱뚱한 웨인라이트 부인이 그것을 보았다.

“아니, 웬일이세요? 벌써 산기가 있나요?

“아녜요,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어머니가 말했다.

“오한이 좀 나는가 봐요. 아마 감기겠지요. 좀 거들어 주시겠어요?

두 여자가 로자샤안을 부축했다. 몇 발자국 걸어가는 사이에 그녀가 기운을 차렸다. 그녀는 간신히 자신의 몸을 지탱하면서 걸었다.

“인제 괜찮아요, 어머니.” 그녀가 말했다.

“잠깐 그랬어요.

두 부인은 그래도 그녀 팔꿈치를 부축하며 들어갔다.

“발을 더운 물에 담그자.

어머니가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들은 그녀를 부축해서 사닥다리 발판을 올라가 화차 칸 안으로 들어갔다.

“딸애를 문질러 주세요.” 웨인라이트 부인이 말했다.

“나는 불이나 좀 피워 드릴게요.

그녀는 마지막 남은 나뭇조각을 넣고 불을 지폈다. 비는 이제 마구 퍼부었고 지붕 위에선 요란한 소리가 났다. 어머니가 위를 쳐다보았다.

“지붕이 든든해서 다행이구나.” 그녀가 말했다.

“저 천막들은 아무리 좋은 거라도 비가 샌단 말이야. 물만 조금 올려놓아 주세요, 웨인라이트 부인.

로자샤안은 아직도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두 부인이 자기 신발을 벗기고 발을 문지르도록 내버려두었다. 웨인라이트 부인이 그녀 위에 몸을 굽혔다.

“많이 아픈가, 색시?” 그녀가 물었다.

“아녜요. 그냥 기분이 좀 안 좋아서 그래요. 기분이 좀 이상해요.

“나한테 진통제하고 소금이 좀 있어요.” 웨인라이트 부인이 말했다.

“그게 먹고 싶거든 괜찮으니까 말해요. 아무 사양 말고.

로자샤안은 몸을 다시 떨었다.

“어머니, 나 좀 덮어 주세요. 몸이 추워요.

어머니는 담요를 있는 대로 갖다가 그녀 위에 포개어 덮었다. 비는 지붕 위에 요란하게 쏟아졌다.

나무를 주우러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팔뚝에 나무를 한 아름씩 안고 있었고 모자와 저고리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제기랄, 다 젖었군.” 아버지가 말했다.

“삽시간에 이렇게 젖어 버리는걸.

어머니가 말했다.

“다시 가셔서 조금만 더 해 오셔야겠어요. 이까짓 거 금방 다 때버릴 거예요. 인제 조금만 있으면 날도 어두워져 버릴 텐데.

루시와 윈필드가 물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들어오더니 주워온 나무를 나무더미 위에 내던졌다. 그들도 돌아서서 다시 나가려 하자 어머니가 명령했다.

“너희들은 가지 마라. 불가에 바싹 서서 옷이나 말려라.

오후 내내 비가 와서 날이 흐리고 길은 물이 괴어 번들거렸다. 시간, 시간마다 목화나무는 까맣게 시들어 가는 듯했다. 아버지와 앨과 존 삼촌은 수풀까지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면서 죽은 나뭇가지들을 주워왔다. 그들이 갖다 놓은 나뭇단은 거의 천장에까지 닿을 정도였다. 드디어 그들도 나무 해오는 것을 그만두고 난롯가에 몰려들었다. 그들의 모자에서 물이 줄기를 이루며 어깨 아래로 흘러 내렸다. 저고리 끝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신발 속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철벅거렸다.

“자, 인제 됐어요. 그 옷들이나 벗으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다들 먹으라고 커피를 맛있게 끓여 놓았어요. 또 잘 말려 놓은 작업복도 있고요. 그렇게 서있지 말고 어서 갈아입으세요.

저녁이 일찍 다가왔다. 가족들은 화차칸 안에서 옹기종기 몰려 앉아 지붕 위에 퍼붓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9

해안을 따라 치솟은 높은 산과 골짜기를 넘어 잿빛구름들이 바다로부터 몰려왔다. 높은 바람이 소리도 없이 세차게 불어와 수풀 속을 스치며 소리를 냈다. 구름은 갈기갈기 찢어져 덩어리지다가 몇 겹씩 겹쳐져 회색의 바위 모양을 만들었다. 다시 한데 엉기면서 서쪽 하늘에 나지막하게 걸렸다. 이윽고 바람이 멎으면서 두툼한 구름장을 한군데에 뭉쳐 놓았다. 나중에는 서서히 단조로운 기세로 변해 작은 빗방울이 꾸준히 내렸다. 온통 잿빛으로 물든 비가 한나절을 저녁처럼 바꾸어 놓고 있었다. 처음에는 메말랐던 땅이 물기를 빨아들이면서 시커멓게 변했다. 이틀 동안 땅은 비를 실컷 들이마시더니 나중에는 땅속이 가득 찬 모양이었다.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생기고 지대가 낮은 데서는 들과 밭에 작은 호수가 생겼다. 흙탕물이 만든 호수는 점점 넓어져 갔고 번들거리는 물위로 줄기차게 비가 퍼붓고 있었다. 산도 물을 실컷 들이마시는 듯했다. 물줄기들이 합류하여 산허리에서 작은 시내를 이루고 있었다. 산에서 흘러드는 물은 협곡을 거쳐 골짜기 속을 쏟아졌다. 비는 꾸준히 퍼부었다. 시내와 작은 강들은 둑에까지 물이 넘치게 해, 버드나무와 잡목들의 뿌리를 휘감아 씻어 주며 버드나무의 허리를 휘게 하고 목화나무의 뿌리를 뽑아 쓰러뜨렸다. 흙탕물은 강둑을 따라 넘실거리더니 마침내 둑을 넘어서 논밭과 과수원과 까만 줄기가 서있는 목화밭에까지 밀려들었다. 평평한 밭은 온통 물바다가 되었고 비는 그 넓은 회색표면 위를 끊임없이 두드렸다. 물은 국도 위에까지 넘쳐 자동차들은 물살을 가르며 천천히 달렸고 뒤로 흙탕물을 일으켰다. 대지는 마구 두드리는 비 아래에서 속삭이듯 소리를 냈고, 시내는 소용돌이치는 물줄기아래에서 천둥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가 처음 내리기 시작할 땐 이주민들이 천막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하릴없이 지껄이고 있었다.

“곧 멎을 테지. 오면 며칠이나 오겠어?

물웅덩이가 생기자 그들은 삽을 가지고 나가서 천막 주위에 작은 둔덕을 쌓았다. 비는 천막 지붕을 사정없이 휘갈겨 마침내 천막을 뚫어 버리고 안에까지 쏟아져 들어왔다. 천막 가에 세워 놓은 둔덕이 맥없이 씻겨 내려가고 물은 천막 안에 흘러들어 침대니 담요니 할 것 없이 살림살이를 몽땅 적셔 버렸다.

사람들은 젖은 옷을 입은 채 앉아 있었다. 그들은 상자를 몇 개씩 늘어놓고 상자 위에 널빤지를 깔았다. 그리고 낮이나 밤이나 그 널빤지 위에만 앉아 있었다.

천막 옆에는 낡은 차들이 서있었다. 빗물이 새 점화장치의 전깃줄을 더럽히고 (휘발유를 가스로 기화하는 장치인) 기화기를 망가뜨렸다. 작은 회색빛 천막들은 흡사 호수 속에 떠있는 것 같았다. 결국 사람들은 이동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차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전선에서 전기가 새기 때문이었다. 또 엔진이 걸린다 해도 두꺼운 진흙이 바퀴를 움켜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젖은 담요를 손에 들고 물속을 걸어 빠져나갔다. 그들은 어린애를 업고 노인들을 이끌고 물탕을 치면서 나갔다. 가다가 좀 높은 지대에 헛간이 있기도 하나 거기는 이미 사람들로 꽉 메워져 있었다.

모두 몸을 덜덜 떨고 있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형편이었다. 몇몇이 구제 사무소에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모두 실의에 찬 얼굴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법이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구제를 받으려면 이 고장에서 1년 이상 살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인즉 정부에서 구제조치를 취해 준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점점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큰 공포감이 일어났다. 앞으로 석 달은 아무 일거리도 없을 판이었다.

곳간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엉겨 붙어 있었다. 공포가 그들을 엄습했고 그들의 얼굴은 공포감으로 파랗게 질렸다. 어린애들은 배가 고파 울어대지만 먹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질병까지 덮쳤다. 패렴, 그리고 눈이나 유두에도 번져 나가는 풍진. 비는 줄기차게 퍼부었다. 배수구가 물을 빨아들이지 못하니까 물은 국도 위로 넘쳐흘렀다.

마침내 천막 속에서, 그리고 콩나물시루 같은 헛간 속에서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남자들이 떼를 지어 나왔다. 옷들은 누더기였고 신발에서는 흙탕물에 섞여 찢어진 종잇조각 같은 것들이 나왔다. 그들은 물속을 첨벙거리면서, 읍내로 동네 가게로 구제 사무소로 찾아 다녔다. 굽실거리면서 먹을 것을 구걸하기도 하고 구제를 호소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구걸을 하고 굽실거리는 가운데 그들은 가망 없는 기분으로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그러면 물에 젖은 사람들에 대한 조그마한 읍내 주민들의 동정심은 분노로 바뀌었고 그 분노는 또 그들에 대한 공포로 변해갔다. 이윽고 보안관은 보안관 보들에게 비상대기를 시켰고 명령만 떨어지면 그들은 총과 최루가스와 탄약을 가지고 출동했다. 그리고 굶주린 사람들은 빵 한 조각을 구걸하러, 썩은 야채를 얻으러,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아무거나 훔치러 가게의 뒷골목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미친 듯이 의사의 집 대문을 두들겼다. 그러나 의사들은 바빴다. 슬픔에 젖은 사람들은 검시관에게 차를 좀 보내 주도록 부탁해 달라는 말을 가게에 전하고 갔다. 검시관은 그렇게 바쁘지는 않았다. 검시관의 차가 흙탕물을 뚫고 와 죽은 사람을 실어 갔다.

비는 인정사정도 없이 마구 퍼부었다. 성난 물살은 둑을 무너뜨리고 들판을 뒤덮었다.

헛간 지붕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젖은 풀 위에 누워서, 배고픔과 공포는 분노를 낳고 있었다. 사내아이들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구걸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둑질을 하기 위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른들도 힘없이 따라 나섰다. 자기들도 한번 해보기나 하려고.

보안관은 새로 보안관 보를 임명하고 새 소총을 주문해 들여왔다. 든든한 집에 살고 있는 편안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주민들을 불쌍하게 생각했으나 점차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고 나중에는 증오하게 되었다.

비가 새는 헛간 속 젖은 풀 위에서 폐렴으로 숨을 헐떡이는 여자가 어린애를 낳았다. 늙은이들은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가 그대로 그런 모습으로 죽어 갔다. 검시관들은 그들의 시체를 똑바로 펼 수가 없었다. 밤이 되면 광기를 띤 남자들이 대담하게도 남의 닭장에 가서 울어대는 닭을 그대로 잡아 왔다. 그들을 향해 총알이 날아왔다. 그들은 뛰어 달아나지도 않고 시무룩한 얼굴로 그저 물속을 철벅거리며 되돌아갔다. 가다가 총에 맞으면 그들은 지친 듯 흙탕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비가 멎었다. 들판에는 물바다가 희끄무레한 잿빛 하늘을 반사하면서 괴어 있었다. 땅 위에서는 흐르는 물소리만이 소곤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헛간에서 그리고 움막에서 나왔다. 그들은 쭈그리고 앉아 물바다를 이루고 있는 들을 내다보았다. 그들은 도무지 말이 없었다. 어쩌다가 말을 해도 아주 나직하게 했다.

봄까지는 일거리가 없어.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일이 없으면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지.

말이 한 쌍 있으면 밭을 갈고 풀을 베는 데에 부려야지, 일이 없다고 해서 그것들을 그냥 굶겨 죽일 수는 없잖아?

그건 말이잖아? 우리는 사람이야.

아낙네들은 남자들을 쳐다보았다. 마지막 파국이 왔는지 어떤지를 알아보려는 듯 남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남자들끼리만 모여 있는 곳을 보면, 그들의 얼굴에서 공포는 사라지고 대신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면 여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하면 아직 파국까지는 오지 않았고 어쩌면 잘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포가 분노로 변할 수 있는 한 파국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풀잎들이 뾰족한 끝을 땅 밖으로 내밀었다. 며칠이 지나자 언덕은 엷은 초록색으로 덮여 또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30

화차칸 캠프에 물웅덩이가 생겼고 비는 흙탕물을 튀기며 줄기차게 내렸다. 작은 시냇물은 점점 불어 마침내 화차칸들이 서있는 평지 쪽으로 둑을 넘어 들어왔다.

비가 내리고 이틀째 되던 날, 앨은 화차칸 가운데에 걸렸던 범포를 걷어냈다. 그는 그것을 걷어다 밖으로 들고 나가 트럭의 엔진 위에 덮어놓고 돌아와 자기 매트리스 위에 주저앉았다. 이젠 그나마 칸막이도 없이 양쪽 집 가족이 한 방에 살게 되었다. 남자들은 한데 어울려 있었고 의기마저 비에 젖어 있었다. 어머니는 스토브 불을 꺼뜨리지 않고 작은 나뭇가지들을 땠으며, 언제나 나무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비는 거의 납작하게 생긴 화차 지붕 위를 마구 두들겨 댔다.

비가 사흘째 계속되자 웨인라이트 가족은 조바심을 했다.

“이럴 게 아니라 어디든지 떠나는 게 좋겠어요.” 웨인라이트 부인이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들을 붙들어 보려 했다.

“어디 가서 이렇게 비라도 새지 않는 곳을 찾겠어요?

“그렇기는 하지만 어쩐지 떠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그들은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어머니는 앨을 쳐다보았다.

루시와 윈필드는 잠시 장난을 치려 하다가 이내 시무룩하게 주눅이 들어 버렸고 빗소리만이 지붕 위를 요란하게 두드렸다.

사흘째가 되니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지붕 위를 두드리는 빗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아버지와 존 삼촌은 열린 문 밖에서 미친 듯이 치솟고 있는 시내를 내다보았다. 캠프 양쪽 끝에서는 물이 거의 국도 위에까지 치솟고 있었다. 다행히 물은 캠프장을 삥 돌아 흘러 국도의 둑 뒤에서 캠프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물은 캠프장 앞으로 밀리고 있었다.

“존, 이 비가 얼마나 올 것 같나?” 아버지가 물었다.

“저 물줄기가 예까지 덮치는 날이면 여기도 다 침수될 것 같은데?

존 삼촌은 입을 벌리고 텁수룩한 입가를 문질렀다.

“그렇군.” 그가 말했다.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는걸.

로자샤안은 심한 감기에 걸려 열 때문에 얼굴이 상기되고 눈이 충혈 되어 누워 있었다. 어머니가 더운 우유를 들고 그녀 앞에 앉아 있었다.

“자, 이거 좀 마셔라.” 그녀가 말했다.

“그걸 좀 진하게 하느라 베이컨기름을 좀 탔다. , 어서 마셔라!

로자샤안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아버지가 손가락으로 허공에 줄 긋는 시늉을 했다.

“우리가 다 나서서 삽으로 둑을 높이 쌓아 올린다면 저 물줄기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저 위에서부터 저 아래까지 죽 쌓아야 하는데, 만만한 일은 아니지.

“그렇군.” 삼촌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만 하면 되겠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려고 할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그냥 다른 데로 옮겨 버리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래도 이 화차칸은 비는 안 새잖아.” 아버지가 우겼다.

“이만큼 비를 막을 수 있는 데가 어디 있을라고. 좀 기다려봐.

그는 방안에 있는 나뭇더미에 작은 가지 하나를 집어 들고 사닥다리 발판을 달려 내려가 흙탕물 속을 첨벙거리며 시냇물 쪽으로 가더니, 밀려드는 물길의 가장자리에 그 나뭇가지를 똑바로 세워 놓았다. 그리고는 금방 되돌아오더니 말했다.

“제기랄, 홀랑 젖어 버렸네.

두 남자는 물가에 세워진 나뭇가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이 나뭇가지위에 조금씩 차올랐다. 아버지는 문간에 쭈그리고 앉아 버렸다.

“금방 올라오는데.” 그가 말했다.

“나가서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해보아야겠군. 다들 그렇게 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여기를 빠져나가야겠어.

아버지는 기다란 화차칸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웨인라이트네 쪽을 내다보았다. 앨은 애기 옆에 앉아서 그들과 같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들 가까이 다가갔다.

“물이 불어나고 있는데요.” 그가 말했다.

“나가서 둑을 좀 쌓아 올리는 게 어떨까요? 모두들 나서서 같이 하기만 하면 되겠는데요.

웨인라이트가 말했다.

“우리도 지금 얘기하고 있는 중이지요. 우리는 다른 데로 떠나야 되겠어요, 아무래도.

아버지가 말했다.

“당신도 여러 곳에 가보셨겠지만, 여기서 지금 나간다 해도 비 맞지 않을 만한 곳을 찾을 수가 있겠어요?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어차피 마찬가지겠지요.

앨이 말했다.

“이분들이 가면 저도 따라가겠어요.

아버지는 적이 놀랐다.

“너는 못 간다, . 트럭은 어떻게 하니? 우리는 아무도 트럭을 만질 사람이 없잖니?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애기하고 같이 가야 해요.

“잠깐 기다려라.” 아버지가 말했다.

“너 이리 좀 건너오너라.

웨인라이트와 앨이 벌떡 일어서서 문 쪽으로 다가갔다.

“저걸 보아라.” 아버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위쪽에서 저 아래까지만 둑을 쌓으면 된다.

그는 자기가 꽂아 둔 나뭇가지를 쳐다보았다. 물이 나뭇가지를 휘감고 있었다. 조금씩 둑 위로 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일이 만만치 않을 걸요. 그리고 또 물이 언제 넘어올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웨인라이트가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하고 구경만 하고 있느니보다는 그렇게라도 해보는 것이 낳지 않겠어요? 아무데를 가도 여기만큼 괜찮은 데는 못 찾을 걸요? , 어서 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나 해봅시다. 다들 나서기만 하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요.

앨이 말했다.

“애기가 가면 나도 가겠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만약 사람들이 내 말대로 둑을 쌓지 않겠다면 우리도 다 떠나야 한다. , 얼른 가서 얘기나 해보자.

그들은 어깨를 움츠리고 사닥다리 발판을 뛰어 내려가 다음 화차칸으로 달려 들어갔다.

어머니는 꺼질락 말락 하는 스토브의 불 속에 작은 나뭇조각을 지피고 있었다. 루시가 그녀 곁에 바싹 다가왔다.

“엄마, 배고파.” 그녀는 우는소리를 했다.

“아냐, 넌 아직 괜찮아.”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국을 많이 먹었잖아?

“크래커 한 봉지만 먹었으면 좋겠어.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죽겠어, 엄마.

“인제 재미있는 일이 생길 거다.” 어머니가 말했다.

“조금만 있어. 인제 곧 재미있는 일이 있을 테니까. 좋은 집으로 곧 이사 갈 거야.

“강아지나 한 마리 있었으면 좋겠어.” 루시가 말했다.

“그래 강아지도 사주고 또 고양이도 사줄게.

“노란 고양이?

“엄마 귀찮게 하면 안 돼.” 어머니가 타일렀다.

“이런 때 엄마를 성가시게 하면 안 돼. 루시야, 로자샤안 언니가 아프잖아. 그러니까 너도 얌전하게 굴어야 해. 인제 곧 재미있는 일이 생겨요.

루시가 보채면서 달아났다.

로자샤안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매트리스 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뚝 그쳤다. 어머니가 몸을 휙 돌려 그쪽으로 달려갔다. 로자샤안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겁에 질린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웬일이냐?” 어머니가 소리쳤다.

로자샤안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더니 다시 들이마셨다. 갑자기 어머니가 이불 밑으로 손을 넣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웨인라이트 부인!” 그녀가 큰소리로 불렀다.

“오, 웨인라이트 부인!

뚱뚱하고 작달막한 웨인라이트 부인이 다가왔다.

“부르셨어요?

“여기 좀 보세요.” 어머니가 로자샤안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녀는 이로 아랫입술을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 이마는 땀방울로 흥건하게 젖었고 두 눈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진통이 시작된 모양이에요.” 어머니가 말했다.

“좀 빠르군요.

로자샤안은 크게 한숨을 들이마시더니 몸이 풀어져 버렸다. 깨물었던 입술을 놓으면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웨인라이트 부인이 그녀 위에 몸을 굽혔다.

“별안간 진통이 시작됐군? 정신 좀 차리고 말 좀 해봐요.

로자샤안이 맥없이 끄덕거렸다. 웨인라이트 부인이 어머니 쪽을 돌아보았다.

“그렇군요.” 그녀가 말했다.

“역시 시작했어요. 좀 빠르지요?

“혹시 열이 나서 빨라진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럼, 일어나서 좀 왔다 갔다 하고 걸어 봐야 하는데요.

“무리예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럴 만한 기력이 없어요.

“그래도 일어나야 하는데.

웨인라이트 부인은 위엄을 띠며 조용해졌다.

“나는 어린애를 많이 받아 보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자, 저 문을 좀 닫으세요.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해야지요.

두 여자는 무거운 미닫이 철문을 밀어붙이고 사람이 겨우 들락거릴 만큼 한 자 가량만 열어 두었다.

“우리 등잔도 가져올게요.” 웨인라이트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자못 흥분해서 얼굴에 홍조마저 띠고 있었다.

“얘, 애기야!” 그녀가 불렀다.

“너, 와서 이 꼬마들 좀 데리고 놀아 주어라.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루시, 너 윈필드랑 같이 애기한테 가 놀아라. 어서 가.

“왜 그래?” 꼬마들이 따졌다.

“어서 말 들어! 로자샤안 언니가 아기를 낳을 거야.

“나 볼래, 엄마. 나 볼래.

“루시야! 어서 가! 어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쯤 되면 애들은 더 이사 보채지 못했다. 루시와 윈필드는 마지못해 시무룩하게 저쪽으로 가버렸다.

어머니가 등잔에 불을 붙였다. 웨인라이트 부인은 자기네 로체스터 등잔을 가져다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커다란 불빛이 방안을 둥그렇게 비췄다. 루시와 윈필드는 나뭇단 뒤에 숨어서 이쪽을 들여다보았다.

“아기를 낳는대. 어디 좀 보아야지.” 루시가 조그맣게 말했다.

“너 소리 내지 마. 엄마가 못 보게 하니까 말이야. 엄마가 이쪽을 쳐다보면 너도 얼른 나무 밑으로 숙여. 그래야 볼 수 있어.

“아기 낳는 것 본 애들은 없더라.” 윈필드가 말했다.

“그럼, 아기 낳는 건 아무도 못 보았대.” 루시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본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거란 말이야.

등잔불이 밝게 비치고 있는 매트리스 가에서 어머니와 웨인라이트 부인이 잠시 무언가 의논을 하고 있었다. 빗발이 내리치는 소리 때문에 그들 목소리가 높아졌다. 웨인라이트 부인은 행주치마 호주머니에서 창칼을 꺼내더니 그것을 매트리스 밑에 밀어 넣었다.

“아무 효험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녀가 변명조로 말했다.

“우리 집안에서는 늘 그렇게 했어요. 여하튼 그래서 나쁠 건 없잖아요.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는 쟁기 끝을 가지고 했지요. 아무거나 끝이 뾰족해서 진통만 멈추게 할 수 있으면 되는 거죠, . 진통이 오래 가지 말아야 할 텐데.

“너 인제 좀 괜찮으냐?

로자샤안이 긴장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또 진통이 오는 거예요?

“그럼.” 어머니가 말했다.

“아주 잘생긴 놈 낳겠다. 너 기운 좀 차리고 시키는 대로 해라. 어디 한번 일어나 걸어 보겠니?

“한번 해볼래요.

“그래, 색시도 참 착하지.” 웨인라이트 부인이 말했다.

“참 착한 색시도 다 있군. 어디 부축해 줄까. 자 같이 걸어봐. ?

두 여자는 색시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색시 어깨 위에 담요를 덮어 핀으로 고정시켰다. 어머니가 한쪽에서 그녀 팔을 잡고 웨인라이트 부인이 다른 쪽에서 또 팔을 잡아 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나뭇단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 천천히 돌아서서 다시 걸어왔다. 그리고 같은 걸음마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비는 지붕 위에서 북치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루시와 윈필드는 신이 나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제 아기가 나오는 거야?” 윈필드가 물었다.

“쉿, 시끄럽게 하지 마. 들키면 못 보게 한단 말이야.

애기가 다가와서 아이들과 같이 나뭇단 뒤에 섰다. 애기의 야윈 얼굴과 노란 머리카락이 등잔불에 비치었고, 벽에 비친 그녀 얼굴 그림자는 그녀의 길고 날카롭게 생긴 코를 커다랗게 그려내고 있었다.

루시가 소곤거렸다.

“애기 언니, 갓난아기 낳는 것 본 일 있어?

“그럼.” 애기가 말했다.

“얼마나 있으면 아기가 나와?

“아직 멀었어. 오래오래 있어야 해.

“얼마나 오래 있으면 돼?

“어쩌면 내일 아침에나 나올 거야.

“쳇!” 루시가 말했다.

“그럼 지금 들여다보고 있어도 소용없겠다. 어머, 저거 봐!

걷고 있던 여자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로자샤안은 뻣뻣해져서 진통을 견디며 우는소리를 냈다. 두 여자가 그녀를 매트리스 위에 눕히고 그녀 이마를 닦아주었다. 그녀는 소리 지르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머니가 가만히 그녀에게 말했다.

“좀 참아라. 곧 끝난다. 인제 괜찮다. 주먹만 꼭 쥐어라. 그리고 입술을 이빨로 꼭 깨물어. 그래, 그렇게. 잘한다.

진통이 사르르 지나갔다. 그들은 색시를 잠깐 쉬게 했다. 그러더니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진통이 가라앉을 때마다 세 여자가 같이 왔다 갔다 하면서 걸었다.

아버지가 좁다랗게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의 모자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문은 무엇 때문에 닫아 놓았어?” 그가 물었다.

그러더니 그는 걷고 있는 세 여자들 쪽에 눈이 갔다.

어머니가 말했다.

“애가 진통을 시작했어요.

“그래? 그럼 우리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게?

“못 가요.

“그럼 우리만이라도 저 둑을 쌓아야겠군.

“그러세요.

아버지는 진흙 속을 철벅거리며 시내 쪽으로 나갔다. 그가 꽂아 놓은 나뭇가지는 4인치나 침수되어 있었다. 스무 명의 남자들이 비를 맞고 서있었다.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둑을 쌓아야겠어요. 우리 딸이 산기가 있는 모양이군요.

남자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아기를 낳는 겁니까?

“그렇다오. 우리는 지금 떠날 수는 없게 되었군요.

키 큰 남자 하나가 말했다.

“그건 우리 어린애는 아니니까, 우리는 가면 갈 수 있소.

“그야 물론이오.” 아버지가 말했다.

“당신들은 가시오. 갈 사람은 어서 가시오. 아무도 붙잡지 않을 테니까. 또 삽도 여덟 개밖에 없소.

그는 둑이 제일 낮은 쪽으로 달려가서 진흙 속에 삽을 들이밀었다. 한 삽 가득히, 진흙이 쩍 하는 소리를 내며 뜨여져 올랐다. 그는 삽을 계속 놀리면서 둑의 낮은 데에 흙을 퍼부었다. 그의 옆으로 다른 남자들이 줄지어 대들었다. 그리고 삽이 없는 남자들은 버드나무 생가지를 잘라서 그것을 얼기설기 엮어 진흙 속에 얽어 넣었다. 남자들은 일을 한다기보다는 하나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 남자가 삽을 내려놓으면 다른 남자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들은 저고리와 모자마저 벗어 버렸다. 셔츠와 바지는 몸뚱이에 찰싹 달라붙었고 구두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조드네 화차칸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 왔다. 남자들은 일손을 멈추고 불안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더니 다시 일을 계속했다. 작은 제방은 점점 길어져 마침내 양쪽 끝 국도의 제방과 연결되었다. 사람들은 지쳤고 삽질도 느려졌다. 물은 계속해서 불어 갔다. 맨 처음에 삽으로 흙을 퍼부었던 자리에까지 물이 올라와 있었다.

아버지가 의기양양해서 웃었다.

“그것 봐. 우리가 둑을 쌓지 않았더라면 지금 물바다가 되었을 거야.” 그가 소리를 질렀다.

물은 새로 쌓은 제방 위로 서서히 올라오면서 버드나무로 엮은 매트를 찢어 놓았다.

“더 높이 쌓자!” 아버지가 말했다.

“더 높여야겠소!

저녁때가 되었고 일은 계속되었다. 이제 남자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죽어 있었다. 움찔움찔 몸을 놀리는 그들의 동작은 꼭 기계의 움직임 같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아낙네들은 하나씩 조드네 화차칸으로 달려와서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이제 진통은 이십 분 간격을 두고 왔다. 로자샤안은 자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몹시 아픈지 아주 끔찍한 소리를 질러댔다. 이웃 여자들이 그녀를 쳐다보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고는 자기네 화차칸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이제 불을 상당히 후끈하게 때고 있었다. 있는 그릇마다 물을 가득 담아 스토브에 얹어 데우고 있었다. 이따금씩 아버지가 문간에 와 들여다보며 물었다.

“어때? 괜찮겠어?

“예, 괜찮겠어요.

어머니가 그를 안심시켰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누군가 플래시를 들고 나와 일하는 데를 비쳐 주었다. 존 삼촌이 뛰어들어 둑 위에 진흙을 쌓아 올렸다.

“좀 슬슬해.” 아버지가 말했다.

“그렇게 힘을 쓰다가는 쓰러지겠어.

“안 하면 어쩌겠어. 저 비명소리는 차마 못 듣겠어. 그건 꼭 그때, 그때 같군 그래.

“그래, 알겠어. 그래도 좀 슬슬 해 둬.

존 삼촌이 중얼거렸다.

“제기랄, 어디로 달아날까 보다. 죽어라 하고 일이나 하든지 아니면 어디로 달아나 버려야지 못 견디겠는걸.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물었다.

“아까보다 물이 얼마나 불었소?

플래시를 들고 있던 남자가 불을 나뭇가지 쪽으로 비췄다. 빗줄기가 불빛 속에서 하얗게 내리는 것이 보였다.

“아직도 올라오고 있군요.

“그래도 이제 좀 천천히 올라올 거요.” 아버지가 말했다.

“저쪽 끝까지 다 차야 올라올 테니까.

“그래도 여전히 올라오는 걸요?

아낙네들이 커피 주전자를 채워 다시 문간에 내다 놓았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남자들 몸놀림도 점점 무디어졌다. 그들은 무거운 발을 수레 끄는 말처럼 천천히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제방에 진흙을 더 쌓고 버드나무 가지도 더 많이 비추었다. 얼굴마다 휑하니 뚫린 눈에 볼때기 근육이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다.

화차칸에선 오래도록 비명소리가 계속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아버지가 말했다.

“애를 낳으면 애 할미가 나를 부르겠지.

그러면서 그는 말없이 삽질만 계속했다.

물은 철렁철렁하며 둑에 부딪쳐 왔다. 이윽고 상류 쪽에서 무엇이 무너져 나가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플래시 불빛이 번쩍하더니 커다란 목화나무가 거꾸러지는 것을 비췄다. 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나뭇가지들이 물속에 잠기고 물살에 휘말려 갈팡질팡하더니 작은 뿌리까지 몽땅 뽑혀 버렸다. 나무는 천천히 풀어지더니 하류 쪽으로 떠내려갔다. 지쳐 버린 사람들은 입을 벌린 채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가 천천히 움직여 갔다. 그러다가 한쪽 가지가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 그 그루터기에 매달려 버둥거렸다. 잔뿌리들은 물속에서 이리저리 나부끼다가 새로 쌓아 놓은 둑의 진흙에 달라붙었다. 뒤에서 센 물살이 자꾸 밀려오고 있었다. 나무가 밀려나면서 둑을 무너뜨렸다. 작은 물줄기가 새어 들었다. 아버지는 몸을 앞으로 내던지 듯 달려가더니 뚫린 자리를 진흙으로 메웠다. 물은 쓰러진 나무를 마구 밀어 붙였다. 이윽고 둑이 와그르르 무너져 나가고 물이 발목에 차더니 금세 무릎 위에까지 불어났다. 사람들이 흩어져 달아났다. 물살은 거침없이 평평한 땅에 밀려들어 화차칸에 자동차 밑을 휩쓸었다.

존 삼촌은 물이 밀어닥치는 것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는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몸을 가눌 사이도 없이 그는 자기 몸무게 때문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가 무릎을 꿇자 밀어닥치는 물살은 그의 가슴에까지 차올랐다.

아버지는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어이, 웬일이야!

그는 존 삼촌을 일으켜 세웠다.

“어디 아파? , 안에 들어가. 화차칸은 그래도 좀 높으니까.

존 삼촌이 기운을 차렸다.

“모르겠어.” 그가 변명하듯 말했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말을 안 듣는군. 다리가 말이야.

아버지가 그를 부축해 화차칸 쪽으로 데리고 갔다.

둑이 무너지자 앨은 돌아서서 달려갔다. 아무리 뛰어도 발이 무거웠다. 그가 트럭에까지 도달했을 때 물은 장딴지에까지 찼다. 시동을 걸었다. 엔진은 돌아가도 모터가 걸리지 않았다. 엔진을 더 많이 연소시켜 보았다. 배터리는 물에 젖은 모터의 움직임을 점점 더 둔하게 했다. 아무리 해도 웅 하는 소리가 일지 않았다. 천천히 몇 번이고 되풀이해 보았다. 스파크를 더 세게 해보았다. 그는 좌석 아래에 손을 넣어 크랭크를 찾아 가지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물은 운전석 출입구의 발판보다도 더 높이 올라왔다. 그는 차의 앞쪽으로 뛰어갔다. 물은 이제 크랭크 케이스보다도 더 높았다. 그는 미친 사람같이 크랭크를 틀어 맞추고 마구 돌려댔다. 크랭크를 돌릴 때마다 서서히 밀려들어오는 물살이 그의 주먹에 부딪혀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미친 듯한 몸부림도 소용이 없었다. 이제 모터에는 속속들이 물이 다 차버렸고 배터리도 다 젖어 버렸다. 조금 높은 곳에 받쳐 두었던 차 두 대에 시동이 걸리고 불이 켜졌다. 그 차들은 진흙 속에서 바동거리더니 도저히 안 되겠는지 운전석에 앉았던 사람이 모터를 끄고 가만히 앉아서 헤드라이트 불빛만 응시하고 있었다. 빗줄기가 라이트 불빛 속으로 마구 쏟아지면서 하얗게 빛났다. 앨은 천천히 차를 돌아서 안으로 들어가 점화전을 끊었다.

아버지가 사닥다리 발판에 이르렀을 때, 발판 아래쪽 끝이 물에 둥둥 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물속의 진흙에다 발로 밟아 넣었다.

“어때, 괜찮겠어, ?” 그가 물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어서 돌아가 봐.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발판에 올라 좁은 문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등잔 두 개가 나지막하게 비치고 있었다. 어머니가 로자샤안 옆 매트리스에 앉아 조그마한 마분지 조각으로 딸의 조용한 얼굴 위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웨인라이트 부인은 마른 나뭇조각을 스토브에 지피고 있었다. 진한 연기가 스토브 뚜껑 주위에서 솟아 화차칸 안엔 연기가 자욱했다. 아버지가 들어서자 어머니는 고개를 쳐들어 그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애는 좀 어때?” 아버지가 물었다.

어머니는 그를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

“괜찮을 거예요. 지금 잠들었어요.

공기도 해산 때문인지 퀴퀴한 냄새로 흐려져 있었다. 존 삼촌은 간신히 안에 들어서더니 벽에 꼿꼿하게 기대섰다. 웨인라이트 부인이 하던 일을 잠시 놓고 아버지 옆에 다가왔다. 그리고 아버지 팔꿈치를 끌고 한쪽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등잔을 들고 한쪽 구석에 있는 사과 궤짝 위를 비췄다. 궤짝에 깔아 놓은 신문지 위에는 푸르스름하고 쭈글쭈글한 작은 시체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숨도 한번 못 쉬더군요.” 웨인라이트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사산이에요.

존 삼촌은 돌아서서 화차칸의 어두운 저쪽 끝으로 힘없이 가버렸다. 비는 이제 가만가만 내렸다. 하도 조용히 내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존 삼촌의 힘없이 훌쩍거리는 콧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웨인라이트 부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등잔을 받아 들어 방바닥에 놓았다. 루시와 윈필드는 자기들의 매트리스에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천천히 로자샤안의 매트리스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쭈그리고 앉으려 했지만 두 다리가 너무도 지쳐 있었다. 그는 아예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는 네모난 마분지 조각을 앞뒤로 젓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을 마치 몽유병자의 그것처럼 커다랗게 뜬 채 멍청히 한 군데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어떻게 하겠나? 우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다 했는데.

“알아요.

“우리가 밤새도록 일을 해놓았지만 나무가 쓰러져 둑을 무너뜨려 버리잖아?

“알아요.

“이 화차칸 아래로 물소리가 들리지?

“예, 들려요. 다 알고 있어요.

“산모가 괜찮을까?

“모르겠어요.

“그래, 무슨 수를 써보았어?

어머니 입술이 뻣뻣하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뇨, 방법이라고 해야 늘 그렇지만 한 가지밖에 없지요. 그래서 그렇게 해보았어요.

“우리도 쓰러질 때가지 삽을 가지고 씨름을 했지. 그런데 그놈의 나무가 말이야. 비에 씻겨 내려오더니 그만…”

어머니는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는 얘기라도 해야겠는지 말을 이었다.

“이놈의 비가 얼마나 쏟아져서 물이 어디까지 올라갈지 모르겠군. 몽땅 침수되고 말겠군.

“알고 있어요.

“당신은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마분지만 부치고 있었다.

“우리가 일을 잘못했나?

아버지는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달리 어떻게 해볼 수도 있었을까?

어머니가 이상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핏기가 가신 그녀 입술이 꿈을 꾸는 듯한 애처로운 빛을 띠고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을 책망 할 건 없어요, ! 다 괜찮겠지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겠지요.

“이놈의 물 때문에 말이야, 어쩌면 다른 데로 떠나야 할지 모르겠어.

“갈 때가 되면 갑시다. 무어든지 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는 해야지요. , 조용히 하세요. 얘가 깨겠어요.

웨인라이트 부인은 나뭇조각을 잘라 연기를 내뿜고 있는 불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밖에서 웬 사람이 성난 목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서 그 개새끼를 좀 만나 봐야겠어.

그러자 문 밖에서 앨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를 가시는 거요?

“그 조드라는 개새끼를 만나러 가는 거야.

“아니, 그러지 마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지요?

“그 새끼가 그 바보 같은 생각만 안 했더라면 우리는 다른 데로 갔을 거 아니오. 인제 우리 차는 다 못쓰게 되어 버렸소.

“그럼, 우리 차는 국도 위를 신나게 달리고 있는 줄 아시오?

“여하튼 좀 들어가겠소.

앨의 목소리가 차갑게 떨어졌다.

“나를 때려눕히고 들어가 보시오!

아버지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문간으로 나갔다.

“얘, , 놔두어라. 내가 가마. 괜찮다, .

아버지가 발판을 내려왔다. 그가 하는 말이 안에 있는 어머니에게 들려 왔다.

“우리 집에는 아픈 사람이 있으니까 이리 좀 내려와서 얘기합시다.

이제 비는 가볍게 내리고 있었다. 새로 일고 있는 가벼운 바람이 비를 쓸어가고 있었다. 웨인라이트 부인이 스토브 옆 자리에서 건너와 로자샤안을 내려다보았다.

“조드 부인, 인제 곧 새벽이에요. 왜 좀 주무시지 않고 그러세요. 제가 앉아 있겠어요.

“아녜요.” 어머니가 말했다.

“저는 피곤하지 않은 걸요.

“돼지 눈같이 가물가물한데요?” 웨인라이트 부인이 말했다.

“자, 어서 가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세요.

어머니는 마분지를 살살 흔들었다.

“부인은 우리한테 너무 친절하게 해주셨어요. 정말 고마워요.

뚱뚱한 여자가 웃었다.

“감사할 건 없어요. 다 같은 방에 살고 있잖아요?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생겨 보세요. 댁에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았겠어요?

“그럼요, 도와 드리고말고요.” 어머니가 말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지요.

“그렇지요. 누구라도 서로 돕겠지요. 전에는 자기들 집안을 먼저 생각했지만 요새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누구라도 서로 도와 가며 살아야지요. 못살면 못살수록 더 그런가 봐요.

“오늘 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예, 알고 있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루시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눈 위에 올려놓았던 팔을 내렸다. 그녀는 눈이 부신 듯 잠시 등잔불을 쳐다보더니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기 낳았어, 엄마?” 그녀가 물었다.

웨인라이트 부인이 보자기를 집어 구석에 있는 사과상자를 얼른 덮었다.

“아기 어디 있어?” 루시가 물었다.

어머니가 입술에 침을 발랐다.

“아기 없다, 아기 안 낳았어. 잘못 알았단다.

“에이 참!” 루시가 하품을 했다.

“아기 낳았으면 좋을 건데.

웨인라이트 부인은 어머니 옆에 와 앉아 어머니 손에서 마분지 조각을 뺏어 들고 부채질을 했다. 어머니는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 놓고, 기진맥진해서 잠들어 있는 로자샤안의 얼굴에서 지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 좀 누우세요.” 웨인라이트 부인이 말했다.

“바로 이 옆에 누우세요. 색시가 한숨만 크게 쉬어도 일어나실 수 있어요.

“그러겠어요.

어머니는 자고 있는 딸 옆에 드러누웠다. 웨인라이트 부인은 땅바닥에 앉아 지켜보았다.

아버지와 앨과 촌 삼촌은 화차칸 문간에 앉아 희미하게 밝아 오는 새벽을 지켜보았다. 비는 멎었다. 그러나 하늘은 잔뜩 찌푸려 먹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날이 밝아옴에 따라 희미한 빛이 물위에 반사되기 시작했다. 까만 나뭇가지와 상자, 널빤지 같은 것을 휩쓸며 내려가는 시내의 급류가 보였다. 물살은 화차들이 서있는 평지에서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쌓아 놓았던 제방은 이제 흔적도 없었다. 급류는 평지에서 잠시 기세가 꺾여 멈추는 듯했다. 밀어 닥치는 물결 가장자리에는 물거품 같은 것이 노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문밖으로 몸을 내밀어 작은 나뭇가지를 사닥다리 발판 위 물 표면 바로 위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 물러나 앉아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물이 화차칸 안에까지 들어올까요?” 앨이 물었다.

“글쎄 말이다. 아직 산에서 내려올 물이 많을 거다. 알 수 없지. 또 언제 비가 다시 쏟아질지도 모르고.

앨이 말했다.

“나도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물이 또 들어오면 이번에는 몽땅 다 물에 젖어 버리겠어요.

“그렇구나.

“들어와도 한 서너 자 이상은 더 차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이상은 국도 위를 넘어서 저쪽 들판으로 밀려갈 테니까요.

“그걸 어떻게 알겠니?” 아버지가 물었다.

“화차칸 저쪽 끝에 가서 재 보았어요.

그는 손을 뻗었다.

“아마 이 만큼만 올라오고 말 거예요.

“그거야 아무려면 어떻겠니?”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는 어차피 떠날 텐데.

“떠날 수 없어요. 트럭이 여기 있잖아요? 홍수가 다 빠져도 트럭에서 물을 뽑으려면 한 일주일은 걸릴 거예요.

“그래 어떻게 하면 좋겠니?

“트럭 짐칸의 옆구리 널빤지를 떼어다가 방안에 좀 높이 괴어 놓고 그 위에 물건을 올려놓을까 봐요. 사람도 그 위에 올라앉고.

“그래? 밥은 어디서 지어 먹고?

“여하튼 우선 물건이 젖지 않아야 되잖아요?

바깥이 좀 밝아졌다. 희끄무레한 무쇠 같은 빛이었다. 두 번째 세워 놓은 작은 나뭇가지가 사닥다리 발판에 씻겨 내려갔다. 아버지는 좀 더 기다란 것을 다시 세워 놓았다.

“영락없이 올라오는군.” 그가 말했다.

“네 말대로 그렇게 해보는 게 낫겠다.

어머니는 잠을 자면서 몸을 불안하게 뒤척였다. 그녀는 눈을 멀겋게 떴다. 그녀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톰! 오오, ! !

웨인라이트 부인이 달래듯 조용히 다독거려 주었다. 어머니의 눈이 깜박이더니 다시 감겼고 다시 잠들어 갔다. 웨인라이트 부인이 일어서더니 문간 쪽으로 걸어갔다.

“저 좀 보세요!” 그녀가 가만히 불렀다.

“우리는 곧 떠나지 못하겠어요.

그녀는 사과상자가 있는 구석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걸 저렇게 놓아두면 안 되겠어요. 자꾸 안 좋은 일만 생기겠어요. 좀 들고 나가셔서 어디에든 묻기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요?

남자들은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부인 말이 옳겠군요. 거기에 놓아 두어 보았자 안 좋은 일만 생기겠어요. 묻는 것은 법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할 수 없을 때에는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도 해야지 별수 있나요?

“그렇지요.

앨이 말했다.

“물이 더 차오르기 전에 저 트럭의 널빤지를 떼어 내야겠어요.

아버지가 존 삼촌을 쳐다보고 말했다.

“나하고 얘하고 가서 트럭 널빤지를 떼어 낼 테니 저걸 좀 갖다가 묻어 주겠어?

존 삼촌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왜 내가 그런 일을 해야 하지? 왜 꼭 나를 시키는 거야. 난 싫은데?

그러더니 갑자기 그는 말을 바꾸었다.

“그럼 내가 하지. 하고말고. 자 이리 좀 갖다 줘.

“사람들을 깨우지 마세요.

웨인라이트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사과상자를 문간으로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보자기를 그 위에 얌전하게 펼쳤다.

“바로 그 뒤에 삽이 있어.” 아버지가 말했다.

존 삼촌은 한쪽 손으로 삽을 집어 들었다. 그는 문밖으로 나가 천천히 움직이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땅에 발을 디디자 물은 거의 그의 허리까지 차올랐다. 그는 몸을 돌려 사과상자를 다른 쪽 겨드랑이에 잘 끼웠다.

아버지가 말했다.

“자, 가자, . 가서 그걸 떼어 보자.

희미한 회색의 새벽빛 속에 존 삼촌은 물속을 걸어 화차칸 끝을 돌아 조드네 트럭을 지나쳐 갔다. 그는 미끄러운 둑을 기어올라 국도 위에 올라섰다. 그는 국도를 걸어 내려가 화차칸들이 서있는 평지를 지났다. 성난 물살은 길가에 바싹 붙어 급류를 이루고 있었다. 길가를 따라 버드나무들이 서있었다. 그는 삽을 내려놓았다. 그는 상자를 앞에 안고 수풀 속을 헤치고 들어가서 시내 가장자리에까지 이르렀다. 잠시 그는 멍청히 서서 버드나무 사이로 노란 물거품을 일으키며 씻겨 내려가는 급한 물살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과상자를 가슴 앞에 들었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굽혀서 상자를 물속에 넣고 손으로 꽉 잡고 있었다. 그는 사납게 말했다.

“물을 타고 내려가서 이야기를 해라. 한길에 나가서 썩어서 그렇게 말을 해라. 너는 그렇게 밖에 말을 할 수가 없다. 너는 사내였는지 계집애였는지조차 모른다. 알도리가 없다. , 이제 내려가거라. 그래서 한길에 누워라. 그래서 사람들은 깨닫게 될지도 모르리라.

그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물살에 떠맡기면서 흘러가게 했다. 상자는 물속으로 낮게 흘러들더니 한쪽으로 기울며 빙그르르 돌고 나서 천천히 뒤집혔다. 보자기는 따로 물결에 씻겨내려 갔고 상자는 급류에 휘말려 삽시간에 떠내려가더니 이내 수풀 뒤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존 삼촌은 삽자루를 집어 들고 재빨리 화차칸으로 돌아왔다. 그는 물속에 뛰어들어 트럭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서는 아버지와 앨이 세로로 한 자, 가로로 여섯 자짜리 널빤지를 떼어 내느라 끙끙거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다 묻었어?

“응.

“이걸 앨하고 둘이서 하고 있으면 내가 가서 먹을 것을 좀 사올게.” 아버지가 말했다.

“베이컨 좀 사오세요.” 앨이 말했다.

“난 고기가 먹고 싶어 죽겠어요.

“그러마.” 아버지가 말했다.

그는 트럭에서 뛰어내렸고 존 삼촌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그들이 화차칸 안에 들고 들어가자 어머니가 깨어 일어나 앉았다. “그거 뭣들 하는 거니?

“물에 젖지 않도록 자리를 좀 만들려고 그래요.

“무엇 때문에?” 어머니가 물었다.

“여기는 물이 안 들었잖아?

“곧 젖을 거예요. 물이 불어나고 있어요.

어머니는 간신히 일어서서 문간으로 가보았다.

“여기를 떠나야겠구나.

“지금은 못 가요.” 앨이 말했다.

“우리 물건도 다 여기에 있고 트럭도 여기에 있어요. 우리가 가진 거라고는 다 여기에 있잖아요?

“아버지는 어딜 갔니?

“아침거리를 사러 갔어요.

어머니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방바닥까지는 대여섯 인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매트리스에 돌아가 로자샤안을 들여다보았다. 색시도 그녀를 마주 쳐다보았다.

“기분이 좀 어떠니?” 어머니가 물었다.

“피곤해요. 좀 피곤해요.

“너 아침 좀 먹자.

“배고프지 않아요.

웨인라이트 부인이 어머니 옆으로 다가왔다.

“색시는 괜찮겠어요. , 잘 이겨 내던데요.

로자샤안의 눈이 어머니에게 무언가 묻는 듯했으나 어머니는 그 시선을 피하려 했다. 웨인라이트 부인은 스토브 쪽으로 걸어갔다.

“어머니.

“응? 왜 그러니?

“괜찮아요?

어머니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매트리스 위에 무릎을 꿇었다.

“앞으로 또 얼마든지 낳을 수 있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보았다.

로자샤안은 안간힘을 쓰고 일어났다.

“어머니!

“할 수 없었다.

로자샤안은 도로 누워 버렸다. 그리고 두 팔로 눈을 가렸다. 루시가 가까이 기어와서 겁에 질려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언니 아파? 언니 죽는 거야?

“죽긴 왜 죽이? 아무 일 없다. 인제 괜찮을 거다.

아버지가 물건 봉지를 싸안고 돌아왔다.

“걔는 좀 어때?

“괜찮아요.” 어머니가 말했다.

“조금 지나면 괜찮겠어요.

루시가 윈필드에게 돌아가서 보고를 했다.

“언니는 안 죽는대. 엄마가 그랬어.

그러자 윈필드는 어른들의 행동을 흉내 내어 나뭇조각을 가지고 이를 쑤시면서 말했다.

“나는 벌써 그런 줄 알았어.

“네가 어떻게 아니?

“안 가르쳐 줄래.

윈필드는 그렇게 말을 하고 나뭇조각을 탁 뱉어 냈다.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나무로 불을 피우고 베이컨을 데우고 고깃국물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가게에서 파는 빵까지 사왔다. 어머니는 그걸 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아직도 돈이 남았어요?

“아니, 없어.”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도 배가 너무 고파서.

“그런데 가게에서 파는 빵은 왜 사와요?” 어머니가 나무라듯 말했다.

“글쎄, 너무 배가 고프잖아? 밤새도록 일을 했더니.

어머니가 한숨을 흘렸다.

“인제 어떻게 할 셈이에요?

그들이 아침을 먹고 있는 사이에도 물은 자꾸만 불어났다. 앨은 음식을 꿀꺽 삼키더니 아버지하고 둘이서 널빤지를 받쳐 놓았다. 가로 다섯 자, 길이 여섯 자, 그리고 높이가 바닥에서 넉 자였다. 물이 문간으로 날름거리고 기어들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망설이는 듯하더니 서서히 방안으로 흘러들었다. 밖에서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간밤처럼 굵은 빗발이 수면 위에 물보라를 일으켰다. 지붕 위에서 쿵쿵거리는 소리를 냈다.

앨이 말했다.

“자, 이 매트리스를 올려놓으세요. 담요도 올리고. 젖지 않도록 말예요.

그들은 살림살이를 널빤지 위에 올려놓았다. 물이 방바닥 위로 넘쳐흘렀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앨과 존 삼촌이 각각 네 귀퉁이에서 로자샤안을 태운 채 매트리스를 들어 짐꾸러미 위에 올려놓았다.

로자샤안은 반향을 했다.

“나는 멀쩡해요. 일어날 수 있어요.

물이 방바닥 위에 엷은 필름처럼 갈렸다. 로자샤안이 어머니에게 무어라고 소곤거리자 어머니는 담요 밑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젖가슴을 만져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화차칸 저쪽 끝에서는 웨인라이트 가족이 왔다 갔다 하면서 자기들도 평상 비슷한 것을 만들고 있었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더니 지나가 버렸다.

어머니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물은 방바닥 위 반 인치쯤까지 차올랐다.

“너희들, 루시하고 윈필드!” 그녀가 마음이 심란한 듯 말했다.

“짐꾸러미 위로 올라가라. 여기 있다가 감기 들라.

그녀는 그들이 잘 올라갔음을 확인하고 로자샤안의 옆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터앉았다.

갑자기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떠나야겠다.

“지금은 못 가.” 아버지가 말했다.

“앨이 말한 것처럼 우리 살림살이는 몽땅 여기 있잖아? 조금 있다가 화차칸 문짝이라도 떼어 앉을 자리를 더 만들어야겠어.

가족들은 말없이 심란한 모습으로 널빤지 위에 쭈그리고 있었다. 물이 화차칸 안에 6인치 가량이나 올라와서야 홍수는 둑을 넘어 맞은편 목화밭 쪽으로 골고루 퍼져 나갔다. 남자들은 그날 하루 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나란히 꼭 끼어 앉은 채 잠만 잤다. 그리고 어머니는 로자샤안의 옆에 바싹 다가가 누웠다. 이따금씩 그녀는 딸에게 무언가 소곤거렸고 일어나 앉기도 했다. 그녀의 침통한 얼굴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담요 밑에 그녀는 가게에서 사온 빵 찌꺼기를 넣어두고 있었다.

비가 이젠 간간이 뿌렸다. 잠깐 소나기가 내리다가는 잠잠해지곤 했다.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아버지는 물탕을 치며 밖으로 나가더니 호주머니에 감자 열 개를 담아가지고 돌아왔다. 어머니가 시무룩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그는 화차칸 안벽에서 나뭇조각을 뜯어내 쪼개서 불을 피웠다. 그리고 냄비에다 물을 부었다. 가족들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감자를 손으로 집어 먹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음식이 다 없어지고 나자 그들은 그 잿빛 물 바닥만을 내려다보았고, 밤이 되어도 오래도록 잠이 들지 못했다.

날이 새자 그들은 몸이 달아 깨어났다. 로자샤안이 어머니에게 소곤거렸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러자. 이제 때가 되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남자들이 누워있는 문 쪽을 돌아보고 사납게 말했다.

“우리는 여기를 나가겠어요. 더 높은 곳으로 가야겠어요. 당신들은 와도 좋고 안 와도 좋아요. 여하튼 나는 로자샤안하고 애들을 데리고 여길 나가겠어요.

“그럴 수는 없어.” 아버지가 힘없이 말했다.

“좋아요. 그럼 로자샤안을 저 국도 위에까지만 들어다 주고 돌아오든지 말든지 하세요. 지금은 비가 안 오니까 우리는 가야겠어요.

“좋아, 그렇다면 모두 가자.” 아버지가 말했다.

앨이 말했다.

“어머니, 나는 안 가겠어요.

“왜 안 가?

“저어, 애기하고 같이…”

어머니가 웃었다.

“그렇구나.” 그녀가 말했다.

“넌 여기 있어라, , 우리 물건들이나 잘 보아라. 물이 빠지면 물론 우리도 돌아오마. , 빨리하세요. 비가 또 내리기 전에.” 그녀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자, 가자, 로자샤안. 좀 물기가 없는 데로 가야겠다.

“나도 걸어 갈 수 있어요.

“한길에 나가면, 글쎄 조금 걸을 수 있을까? 여보, 얼른 허리를 굽혀 보세요.

아버지가 물속으로 들어가서 기다렸다. 어머니는 로자샤안을 부축해서 널빤지 아래로 내려주고 나서 그녀를 단단하게 붙들고 화차칸을 걸어 나갔다. 아버지가 그녀를 두 팔로 들어 안아 되도록 높이 치켜들면서 깊은 물속을 조심스럽게 헤치고 화차를 돌아 국도 위에 올라섰다. 그는 그녀를 땅에 내려 세워 놓고 계속 부축하고 있었다. 존 삼촌이 루시를 안고 뒤를 따라왔다. 어머니가 물속에 들어서니 치마가 잠시 사방으로 너울거렸다.

“윈필드야, 엄마 어깨 위에 올라타라. 그리고 앨, 물만 빠지면 바로 돌아오마.” 그녀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다시 말했다.

“만일 톰이 오거든 말이다, 우리가 곧 돌아온다고 해라. 톰보고 몸조심하라고 하고. 윈필드. 얼른 엄마 어깨에 올라와! 그리고 발을 가만히 하고 있어야 해.

그녀는 앞가슴까지 차오른 물속을 조심스럽게 헤쳐 나갔다.

국도 둑에 이르자 남자들이 그녀를 부축해 올려 주고 윈필드를 내려놓았다. 그들은 국도 위에 올라서서 뒤로 물바다 위를 돌아보았다. 검붉은 화차칸들과 트럭들, 그리고 자동차들이 서서히 흘러내려 가는 물속에 깊숙이 잠겨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서있는 사이에 엷은 안개 같은 비가 스치고 지나갔다.

“어서 가야겠다.” 어머니가 말했다.

“얘, 로자샤안, 너도 좀 걸을 수 있을 같니?

“좀 어지러워요.” 로자샤안이 말했다.

“마구 얻어맞은 것 같아요.

아버지가 투덜거렸다.

“자, 가자고 했지만 어디로 간단 말이야?

“그걸 누가 알아요? , 어서 로자샤안이나 부축해 주세요.

어머니는 로자샤안의 오른팔을 잡고 부축했다. 아버지가 왼쪽을 잡았다.

“아무데나 좀 마른 곳에 가는 거예요. 마른 곳으로 가야 해요. 당신들도 이틀 동안이나 마른 옷을 입지 못하셨군요.

그들은 천천히 국도 위를 걸어갔다. 길가 시내 쪽으로부터 물살이 내닫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루시와 윈필드는 길바닥에 물탕을 치면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들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국도 위에는 교통이 완전히 두절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빨리 서둘러야겠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이렇게 얘 몸이 흠뻑 젖어 버리면 무슨 변이 날지 모른단 말예요.

“어디로 가자고 목적지도 말하지 않았잖아?” 아버지가 살짝 꼬집듯이 말했다.

길은 시내를 따라 굽어 있었다. 어머니는 침수되어 있는 사방의 들판을 두리번거렸다. 왼편 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시커멓게 비에 젖어 있는 헛간 하나가 약간 높은 언덕배기에 서있었다.

“저기 좀 봐!” 어머니가 말했다.

“저쪽 저기는 틀림없이 젖지 않았을 거야. 비가 멎을 때까지 저 헛간에 가요.

아버지가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임자가 있을 텐데. 괜히 쫓겨나려고?

루시가 저만큼 길 앞에 빨간 점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야생 제라늄이 그렇게 비를 맞고도 꽃 한 송이를 남겨놓고 있었다. 그녀는 꽃을 땄다. 꽃잎 하나를 조심스럽게 따서 자기 콧등에 붙였다. 윈필드도 달려가더니 그것을 쳐다보았다.

“나도 하나 줘.” 그가 말했다.

“안 돼. 다 내 꺼야. 내가 찾았어!

그녀는 또 꽃잎 하나를 이마에 붙였다. 밝은 색깔의 꽃잎은 조그마한 하트 모양을 하고 있었다.

“루시, 나도 하나만 줘. ? 얼른 하나만 줘.

그는 그녀의 손에 있는 꽃을 잡아채려다 놓쳤다. 그러자 루시가 다른 손으로 윈필드의 얼굴을 찰싹 때렸다. 그는 놀라서 멍하니 서있더니,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눈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애들 있는 데까지 따라왔다.

“너 무슨 짓을 했어?” 어머니가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쟤가 내 꽃을 빼앗으니까 그렇지.

윈필드가 훌쩍거렸다.

“난, 난 한 개만 달랬어. 나도 코에 붙이려고.

“한 개만 주어라, 루시야.

“저도 찾으면 될 거 아냐? 이건 내 것이야.

“루시야! 어서 하나 줘!

루시는 어머니의 목소리 속에서 어떤 위협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작전을 바꾸었다.

“자.

그녀는 일부러 너그러운 태도를 꾸미면서 말했다.

“너도 하나 붙여 줄께.

어른들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윈필드가 그녀 쪽으로 코를 디밀었다. 그녀는 꽃잎에 침을 발라 그것을 그의 콧등에 찰싹 소리가 나도록 사정없이 때려 붙였다.

“이 조그만 개새끼야!” 그녀가 가만히 말했다.

윈필드는 손가락으로 꽃잎을 만져 보면서 그것을 콧등에 세게 눌렀다. 그들은 어른들을 따라 빨리빨리 걸었다. 루시는 윈필드 때문에 재미가 깨진 것이 분했다.

“얘, 여기 또 있다. 이거 이마에도 붙여라.” 그녀가 말했다.

길 오른쪽에서 다시 비가 몰아쳐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어서 가요. 큰비가 오겠어요. 여기 울타리를 뚫고 가야겠어요. 그게 더 가깝겠어요. , 어서! 로자샤안, 너도 기운을 내라.

그들은 로자샤안을 반쯤 끌다시피 하며 도랑을 건넜다. 간신히 울타리를 뚫고 들어갔다. 그때 폭풍우가 그들 목덜미에 몰아 닥쳤다. 눈도 뜰 수 없는 비바람이 쏟아져왔다. 그들은 진흙을 헤치고 작은 언덕배기를 기어올랐다. 까만 헛간은 비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비는 거세게 이는 바람을 타고 요란하게 쏟아졌다. 로자샤안의 발이 미끄러지면서 그녀는 양쪽 사람들에게 매달려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여보, 당신 이 애를 좀 들쳐 업으시겠어요?

아버지가 몸을 굽혀 딸을 안아 들었다.

“여하튼 비에 흠뻑 젖기로는 마찬가지군.” 그가 말했다.

“윈필드! 루시! 빨리 와! 너희가 먼저 뛰어가!

그들은 숨을 헐떡이면서 비를 맞고 있는 헛간에 달려가 열린 한쪽 끝으로 비틀거리면서 들어갔다. 거기에는 문도 달려있지 않았다. 녹이 슨 농기구 몇 개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쟁기와 깨진 중경기, 그리고 쇠바퀴 같은 것들이었다. 빗발이 지붕 위로 마구 쏟아져 내려 문간은 마치 물로 장막을 친 듯했다. 아버지는 기름 묻은 상자 위에 로자샤안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오오, 하느님 맙소사!” 그가 말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혹시 그 안에 마른 풀이라도 있을지 몰라요. 보세요. 그쪽에 문이 있잖아요?

그녀는 녹슨 돌쩌귀 위에 달린 문을 열어 젖혔다.

“저 봐, 마른 풀이 있어. , 너 이 안에 들어와!” 그녀가 외쳤다.

안은 깜깜했다. 판자 사이에 뚫린 구멍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들 뿐이었다.

“이리 누워라, 로자샤안.” 어머니가 말했다.

“누워서 좀 쉬어라. 네 몸을 좀 말려 줄 방법을 생각해 보마.

윈필드가 말했다.

“엄마!

그러나 지붕 위에서 요동을 치는 빗소리가 ‘엄마’ 소리를 삼켜 버렸다.

“왜 그러니? ?

“저기 보세요. 저 구석에!

어머니가 그쪽을 들여다보았다. 어둠 속에 두 사람의 형상이 있었다. 한 남자가 드러누워 있었고 그 옆에 사내아이가 앉아 눈을 말똥거리며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쳐다보자 사내아이는 천천히 일어서더니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아이의 목소리는 거칠게 쉬어 있었다.

“여기가 아줌마네 헛간이에요?

“아니.” 어머니가 말했다.

“비가 오기에 잠깐 들어왔어. 아픈 사람도 있고 해서. 너 혹시 마른 담요라도 있니? 아픈 사람의 젖은 옷 좀 벗기게 말이야.

사내아이가 제 있던 구석으로 가더니 때가 더럽게 묻은 덧이불을 하나 들고 와서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고맙다, .” 어머니가 말했다.

“저쪽 사람은 왜 그러니?

소년은 단조로운 목쉰 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아팠는데 지금은 배가 고파서 그래요.

“뭐라고?

“굶고 있어요. 목화밭에서 병이 들었는데 지금 엿새째나 아무것도 못 먹고 있어요.

어머니가 그쪽으로 걸어가더니 누워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오십 가량 되어 보였다. 털이 부숭부숭한 얼굴이 야위었고 멀겋게 떠있는 눈이 아무데나 멍청히 응시하고 있었다. 소년도 그녀 옆에 섰다.

“너희 아버지?” 어머니가 물었다.

“네, 배도 안 고프다고 그러세요. 금방 밥을 먹었다고 그러세요. 먹을 것이 있으면 좀 주세요. 아버지는 이제 기운도 없어요. 몸을 까딱도 못 하세요.

지붕을 마구 휘갈기던 비가 다소 누그러졌다. 야윈 남자가 입술을 움직였다. 어머니가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귀를 바싹 대어 보았다. 그의 입술이 또 움직였다.

“그럼요.” 어머니가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드님은 괜찮을 거예요. 내가 우리 딸아이 옷 좀 갈아입힐 때까지 잠깐만 기다리세요.

어머니는 로자샤안에게 돌아갔다.

“자, 그 옷 좀 벗어라.”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덧이불을 치켜들고 그녀가 옷 벗는 것을 가려 주었다. 그녀가 옷을 다 벗자 어머니는 덧이불로 그녀의 알몸을 감싸 주었다.

소년이 그녀 옆에 다시 다가가서 설명을 했다.

“저는 몰랐어요. 아버지는 밥을 먹었다고 하셨어요. 또 배도 안 고프다고 하셨어요. 어젯밤에는 제가 나가서 진열장을 깨부수고 빵을 훔쳐 왔어요. 아버지 보고 삼켜보시라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빵을 다 뱉어 버렸어요. 그러더니 더 쇠약해지셨어요. 국물이나 우유 같은 것이 있어야 할 텐데요. 아주머니네 가족들은 우유를 살 돈이 있으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쉿! 걱정하지 마라. 무슨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까.

갑자기 소년이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단 말예요! 우리 아버지가 굶어서 돌아가신단 말예요!

“쉬잇!”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는 아픈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아버지와 존 삼촌을 건너다보았다. 그리고 덧이불 속에 움츠리고 있는 로자샤안을 쳐다보았다. 어머니의 눈이 로자샤안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가 다시 그쪽으로 되돌아갔다. 두 모녀는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로자샤안의 숨이 가빠지고 헐떡거렸다.

그녀가 말했다. “그러겠어요.

어머니가 미소를 머금었다.

“난 네가 그럴 줄 알았다. 알고 있었어!

그녀는 무릎 위에 꼭 쥐어져 있는 자기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로자샤안이 소곤거렸다.

“다들 좀 나가 주실래요?

비가 가볍게 지붕 위를 두드렸다.

어머니가 몸을 굽혀 손바닥으로 딸의 이마에 엉켜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빗어 주면서 이마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러고 나서 얼른 일어나더니 말했다.

“다들 이리 오세요. 이쪽 농기구 움막 쪽으로 나오세요.

루시가 무슨 말인지 하려고 입을 열려 했다.

“조용히 해라.” 어머니가 말했다.

“조용히 하고 어서 나가 있어라.

그녀는 가족들을 몰아세우고 소년까지 데리고 나와서는 삐걱거리는 문을 닫았다. 잠시 동안 로자샤안은 빗소리만 소곤거리는 헛간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지친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 덧이불을 몸뚱이에 감았다. 그녀는 천천히 구석 쪽으로 걸어가서 쓰러져 있는 얼굴과 그의 멍청하게 뜬 놀란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옆에 누웠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로자샤안은 덧이불의 한쪽을 풀고 자기의 한쪽 젖가슴을 드러냈다.

“이걸 빠세요. 그래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더 바싹 몸을 들이대고 남자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자, 됐어요. 어서요!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 아래로 들어가서 그를 받쳐 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부드럽게 그의 머리카락 속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헛간 위쪽과 건너 쪽을 쳐다보았다. 딱 다물어진 그녀의 입술은 신비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