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웅 장로 필력 55년                               

                                  

토요동인회시절

최 영(시인, 한국문인협회 군산 지부장)

김신웅 시인은 군중 27회, 군고 3회(1954)입니다. 토요동인회가 결성되던 때 그는 고등학교 3학년생이었습니다. 그가 1956년 <창립3돌기념토요동인회>지에 “평행선의 단층”이라는 시를 발표했는데, 그때 그는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학과 2년 재학 중이었습니다.

군산문인협회에서 펴낸 1992년 군산문학 제 8집에 발표된 <꿈 많은 소녀시절의 나와 토요동인회>라는, 당시 군산사범 2학년이던 이양근 시인의 글을 봅니다. “김기경 선생님의 지도로 <시순>이란 합동시집을 냈는데 이 합평회에 이병훈, 정윤봉, 김신웅 시인들을 초청하여 문학강연도 듣고 기념촬영도 했습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2009년 <군산문학의 원류를 찾아서>란 책을 내고 미국의 김신웅 선배에게 보냈습니다. 얼마 후 메일이 왔습니다. - 당시 얼굴이 동그랗고 눈이 크던 소녀로 이양근이 기억난다- 고 했습니다. 그때 문학 강의를 마치고 방명록에 글을 남겨 달라기에 시 쓰기에서 요체로 삼는, 순간의 포착을 중요시하라는 의도로 포착(捕捉)의 한자 표기를 捕促으로 잘못 썼던 것을 그 뒤 얼마안가 알게 된 일이 있다면서 모르면 모른 대로 할 일이지 현학적(衒學的)으로 아는 체하여 후진들에게 큰 실수를 했던 일을 기억하고 늦게나마 실수를 인정하며 혹 그 방명록이 보존되어 있다면 살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노 시인이 51년 전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젊은 시절의 상처였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직 70이 안 된 이양근 시인에게는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58년 4월 3일부터 7일까지 5일간 <대합실>이란 주제의 김신웅 개인시화전이 개복동 비둘기 다방에서 열렸습니다. 시화전 작품들과 일반 독자들의 반응과 작품평 등을 묶어 졸업논문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군산에서 최초의 개인시화전이 다시 전주 공보관에서 이어졌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안승호 시장도 시화전 장소를 직접 방문하고 방명록에 글을 남기기도 하고 격려했습니다. 전주, 이리에서도 시인과 화가들이 관람하러 왔습니다.

1958년 4월 15일(화)자 전북일보에 김신웅 시인에 대한 이동주 시인의 평설이 실렸습니다. 강강술래의 시인 이동주는 “<잡초>들로 묶은 몇 편은 탐탁치 않으나 그렇다고 형편없이 저열한 작품은 아니다. 그 외의 작품은 회심작이면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작품이었다. 조숙한 시인은 어쩌면 서정을 일찍 졸업한 것 같다. 서정을 지키기에는 현실이 너무 가혹했을지 모른다”라고 했다. 그리고 몇 편의 시들을 분석하면서 ‘지성을 바탕으로 주지주의 시에 전념할 것을 주문’하고 있었습니다. 김신웅의 대학선배인 이동주의 후배시인에게 대한 통찰력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충고와 애정, 그리고 격려의 글이었습니다.

앞에서 밝혔던 대로 1956년 6월 26일 <토요동인창립3돌기념시화전>이 개복동 비둘기 다방에서 열렸을 때 참여한 시인들을 보면;

* 서울: 고원, 김규동, 김수영, 이월광

* 광주: 김평옥, 박종국, 박흡, 이경인, 이해동, 허연

* 전주: 신석정, 김민성, 김해강, 백양촌, 백초, 유임일, 구름재(박병순),

최승범

* 이리: 장순하, 최학규, 홍석영

* 군산: 고은, 권오동, 김순근, 김동빈, 김신웅, 김영현, 송기원, 원형갑, 이병 훈, 정연길, 정윤봉

* 그림: 홍건직, 나병재, 김우범 들입니다.

이처럼 서울 4, 광주 6, 전주 8, 이리 3, 군산 11인 등 5개 도시에서 32명의 시인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토요동인회 범위가 군산, 전주, 이리를 기반으로 해서 멀리 서울에서도 참여했습니다. 이 시화전은 전주, 이리, 광주까지 이동 전시되기도 하며 작품들은 엔솔로지로 묶어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 참여한 시인들의 면면을 보면 거의가 당시에 중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이거나 도청공보실 공무원, 대학교수들인 가운데 유독 한 사람 김신웅이 대학생 신분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950년 대 별처럼 빛났던 군산의 문인들은 거의 저 세상 사람이 된 가운데 김신웅 시인만 미국으로 이민하여 살면서도 때때로 자문에 응하기도 하며 소식을 나누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인 고은 시인이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을 집필하고 있을 때 1999년 11월 9일(화요일)자에 소개한 김신웅 시인의 작품을 여기에 옮깁니다.

까치가 철탑 위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한동안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왔습니다

이윽고 그 철탑둥지에서

까치가 날고

까치새끼가 날기 시작하였습니다

철탑 위 그곳이

내 고향입니다

- 김신웅(65), <까치 둥지> 전문

“이것은 50년 전 나와 함께 시를 지어 서로 돌려가며 읽던 벗이 엊그제 보내온 것이다. 하필 철탑 위에 지은 까치둥지를 노래한단 말인가. 도시 혹은 도시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이 더 절실함인가.”- 고은

2010년 4월 27일 미국 LA에서 고은 시인의 <만인보> 영문판 출판기념회가 있었습니다. 고은 시인과 김신웅 시인이 그 자리에서 오랜만에 재회하고, 그 기쁨을 바로 전해 오기도 했었습니다.

아무쪼록 토요동인으로 함께 하고 생존해 계신 두 분의 여생이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

고은 시인의 <만인보> 영문판 출판기념회에서, 김신웅 시인과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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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文主義的 創造行爲者

성기조(시인, 한국 문예진흥재단 이사장)

 

김신웅 시인은 인문주의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그의 시가 인문주의를 바탕에 깔고 作詩되었기 때문이다. 인문주의자들은 시를 지적 예술의 하나로 보았고, 이러한 예술을 그들은 자유예술이라고 규정 했다.

이태리의 修辭學과 프랑스의 古典硏究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면 이들 두 傳統의 결합이야말로 인문주의 운동의 정신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결합이 詩文學을 연구하게 만들었고 인간중심사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는 인간의 새로운 발견이었고 詩를 통하여 인간을 발견하게 만들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論理가 인문주의 時論으로 자리 잡았다.

인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언어는 실물보다 더 價値가 있었다. 인간의 사상과 영감을 표현하는 말이 事物에 대한 지식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認識했던 사람들은 바로 시인들이었고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시인들은 높고 자유로운, 記念碑的이라고 말할만한 시를 창작했고 또한 시적인 세계를 만들어 냈다. 시인들이 만들어낸 세계는 시를 창조하는 세계이며 이때에는 天使의 영감이 가담하는 것 같이 마음의 英敏함을 느끼게 된다고 굳게 믿었다.

김신웅 시인은 다양한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인문주의에 대한 信仰 같은 굳은 앙금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1934년생이니까 곧 80이 된다. 대학재학 중이던 때 향리의 문학동인회인 토요동인회에 참여하여 主知的 實驗詩를 쓰며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신문기자가 되고, 解職記者가 된 뒤, 이른바 한국의 유행을 선도한다는 서울 명동에서 제화점을 운영하며 잘 나가는 사업을 하다가 1990년대 초반 미국으로 移民했다.

韓國文壇의 推薦制度를 거부하며 絶筆해오던 그가 애환을 그려 60이 지나서야 미친 듯이 시를 써 한국문단에 얼굴을 내민 과정은 가히 극적이라고 할만하다. 이는 인문주의에 대한 그의 믿음이란 생각이다.

낯설고 물 선 땅에 민들레처럼 날아가 자리잡는 동안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 친구들에 대한 추억, 헤어진 정든 사람, 멀고 가까운 친척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었고, 그 고통이 시를 다시 쓰게 만든 動機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늘 그리는 마음으로 따르는 그림자

한밤중에도 머리맡에서 흔들어 깨우며

가슴 속 낙숫물 소리 들으라 하네

잃어버린 몽당연필 하나에도

아리던 여린 마음으로

고여 오는 그리움 들여다보라 하네

거기 굴절되어 비친 야윈 얼굴

그림엽서 받았던 첫 편지 떠올라

이 가을 한 잎 낙엽으로 지고

걸음마다에 자국 남기네

기다림에는 끝이 없고

하나씩 덜어져가는 꿈 광주리 비워지면

가릴 부끄럼도 없이 드러나는 가슴

가지마다 헐벗은 나무로 서서

환청 듣기만 하네 듣기만 하라네

- <고이는 그리움으로> 전문

인용된 <고이는 그리움으로>를 읽고 가슴 뭉클해 하는 것은 기다림의 絶頂에 서서도 결코 한탄하거나 억울해 하지 않는 끈질긴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리라. 기다리다 지치면 가슴 치며 울기라도 하겠지만 김신웅은 낙엽진 겨울나무처럼 드러낸 가슴을 열고 幻聽 같기 만한 목소리를 ‘그저 듣고만’있다. 이 얼마나 절실한 기다림인가.

이러한 경지는 인문주의자가 아니면 얻기 어려운 세계이다. 그 까닭은 시가 예술로 승화된 것은 오로지 인문주의자들의 功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술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관점은 인문주의에 의해서 확립되었음을 알게 한다. 인문주의자들은 ‘神’에게만 있다고 믿었던 창조력을 인간에게도 있다고 믿었고, 이를 선언하고 난 뒤 시를 연구하고 창작하게 만들었다.

이런 행동은 中世精神에 대한 일대 변혁으로 인무주의 詩精神은 전통을 바탕에 깔고 현대의 것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굳게 믿게 헸다. 인용한 <고이는 그리움으로>의 세계가 이별의 아픈 상처를 그리움으로 詩化했지만 인간으로서의 원초적 감정을 절제하고 봄을 기다리는 裸木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탁월한 提示가 아닐 수 없다.

뜻을 가진 사람만이 시를 만들고 시를 만드는 사람만이 창조자가 된다. 그리움을 뜻으로 간직했다 詩로 쏟아내는 김신웅의 시적 창조는 훌륭한 인문주의자의 창조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인문주의자로 충실히 살아온 김신웅의 시가 갖는 풍격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창조자로 남으려는 노력과, 예술적 훈련을 통한 완성된 시세계에 도달하려는 피나는 노력은 30여년 絶筆하고서도 가슴 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때문이리라.

그에겐 황혼이 뜻 없을 것으로 보인다. 내일 또 다시 해가 떠오를 것을 믿고 사막길에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었고 걸어갈 것이며, 그가 믿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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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明山 하늬바람

김종천(포스트모던 발행인)

사람마다 아주 의외의 해후와 조우한다. 1999년 2월 23일로 기억되는 광하문 한글회관에서의 김신웅 선생님과의 해후는 실로 뜻밖이었다. 1973년 봄인가 이후로 처음이었다. 기독교문학상 시상식장에서다. 그간에 만나 뵙지 못하고 지난 게 신기하다. 지금은 미국에 계시고 기독교문인협회 미주지부 회장자격으로 참석하셨단다.

딱 50년 전이 되는 것 같다. 김신웅 선생님은 20대 후반의 장항 정의여고 국어교사로 문예반 지도를 맡았던 분이다. 당시 군산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나는 겁 없이 군산이란 곳의 문학열정에 뛰어들었다. 그곳의 주류 멤버는 이병훈, 원용봉, 김신웅, 노병식 그리고 대면은 못했지만 여류로 정윤봉을 꼽았다. 그리고 이덕이란 문학애호가가 어쩌다 한번쯤 아주 거하게 명산옥에서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한정식판을 벌여주기 전에는, 비둘기 다방에서 외항선이나 미군주둔 비행장에서 흘러나온 미제 커피나 마시고, 콩비지 안주로 막걸리부대가 되어 허무를 씹었었다. 그리고 군산에 피란 내려와 교직에 있다가 떠난 정연길(서울 시립대학교 교수 엮임) 시인이며, 원형갑(평론, 서울산업대학 총장), 고 은, 김동빈까지 합세한 토요문학동인회가 술안주였다. 어쩌다 이동주 시인이나 홍석영 소설가 등이 찾아오면 장날 같았고, 그림을 그리던 나병재, 김우범 등과 음악을 하던 피아니스트 박상현, 바리톤 최동규 등이 함께 어울려 판을 벌였다.

그때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군산사범 졸업시화전을 1962년 12월 21일부터 27일까지 비둘기 다방에서 열었었다. 김신웅 선생님께서는 정의여고에서 팔작팔작한 여학생 몇 명을 대동하고 오셔서는 “종천이! 너 이 아이들 우습게보면 안 돼!”하면서도 또 그런대로 자존심을 세워주시던, 이를테면 은사격인 김신웅 선생님을 만나뵙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시 쓰기는 아주 거덜을 낸 듯이 졸업 후에는 가끔씩 만나게 되어도 지인들의 안부는 물어도 문단의 돼가는 꼴들을 두고 게거품이나 뿜어댔지 문학에 대해선 서로 알은체를 안했는데 <시인>이란 명패를 달고 만났으니 참으로 게면 쩍은 만남이기도 했다.

연락처로 전화를 드려서 3월 2일 다시 만났다. 엉겁결에 만나 뵌 그날과는 달리 월명산의 하늬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진하고 상큼했다.

남원이라는 강촌에서 군산사범학교 3년간의 유학은 인생유전의 한 정거장에 불과한 나에겐 수심도 얕고 산도 민둥산이지만 김신웅 선생님은 군산이란 곳이 인생과 문학과 청춘을 불태운 희로애락의 원시림인지라 아무 이야기나 정한이 듬뿍듬뿍 묻어났다. 나의 문학역정에 건방기와 오기와 자존심을 한껏 불어넣어주신 선생님은 원용봉 선생님이 1997년 뉴욕에서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며, 노병식 선생님이 중풍으로 누워계시는 것까지, 같은 하늘아래 살면서도 소식을 접하지 못했던 나를 꾸짖는 듯하여 회색빛 구름으로 뭉클거리긴 했지만 푸르고 푸른 그 세월의 봄바람을 마시고, 또 마셔대면서 다시금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기하게 되었다.

인생무상! 어쩌다가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을 잃어버리고 살다가 희미한 기억 속의 옛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하는가! 나에게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내”를 외우게 하고 박인환, 이 상, 고 원, 박거영, 김수영, 박재삼 등을 각인시켜 주신 분들이 새삼 그리워진다.

김종천이가 살면서 월명산의 하늬바람을 잊고 지난 게 죄인지 세상 탓인지 모를 일이나 쓸쓸한 고백 한 토막으로 쓸쓸한 세월의 한 페이지를 넘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