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폴 루벤스 전시회에서-

1.

엽서 열장 크기 화폭에서

오백년 전 조선남자를 만난다

지구의 동서교류가 비롯되던

십육세기 무렵 서양으로 건너간

조선남자가 한 화가의 호기심 깃든

관심의 붓끝에 살아나

엘에이 서북쪽 산자락

게티 뮤지엄에 살아 돌아 왔다

임진년 왜구倭寇의 침노侵擄로 끌려가

일본 나가사끼 노예시장에서

이태리로 팔려 간 것으로 알려진

조선남자 '안토니오 꼬레아'

이태리에서 조선사람의 조상이 되어

알비 마을에 터잡은 조선사내

'한복 입은 남자'(Man in korea costume)로

머나 먼 나라에서의 고통과 신음 안고

'동방을 향해'(Looking East)잔칫자리

주빈主賓으로 돌아 와 서 있다

잃었던 말 떠오르고

떠돌던 넋이 자리 잡은

그 남자의 어제 해로는 몇백년

날수로 치면 헤아리기 쉽잖은데

옷자락 시원하고 넉넉하게 차려입고

우리 앞에 돌아 와 서있는 남자

눈길 주어 그늘을 거두게 하자

그늘 거두어 노랫소리 들리게 하자

그 앞에 반갑고 기쁜 마음 위로를 전하자

 

2.

이태리 상인 안토니오 카를레티에 팔려

큰 풍랑 속 멀미 끝에 닿은

낯선 땅 얼굴들과 통하지 않은 말들에

두려움은 얼마나 컸을까

귀국길에 객사한 안토니오의

아들 프란체스코에 의해

피렌체에서 해방되어

그 아비의 이름 안토니오

조선땅 꼬레아를 성으로 붙여 지어진 이름

안토니오 꼬레아로 자유의 몸이 된

제 이름 잃고 잊혀진 조선남자

이태리에 뿌리 내리고도

낯선 땅에서의 온갖 질고 이기며 버텨

조상의 옷 벗지 않은 고집

벨기에서 유학 온 화가 루벤스를 만나

오늘 우리 앞에 와 서있다

두려움 견뎌낸 세월 드리운

얼굴엔 수모와 모독 무겁고 깊게

영혼의 고통 수심과 향수로 주름졌어도

관모冠帽로 자존 지킨 조선남자 앞에

세월이 겹겹이 쌓인 오늘

큰 바다 건너 와 겪은 일들 떠올라

마음 속 드려다 보며 달랜다